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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학 읽기] 6. 연재를 끝내며
고전에 대한 나의 해석이 정통 학계의 전문가분들께는 상당히 생경하고 당돌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지금까지의 어떤 해석들과도 다른 독창적 해석에 놀라움을 표하면서 한편으로는 2천년 이상 ... 주신 중앙일보와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신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가지 조언과 비판을 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다 못한 답변은 책을 통해서 해드릴 생각이다. 이경숙 저자 #동양학 #연재 #조선시대 유학자들 #동양 고전 #본래 글자[사람사람] '완역 도덕경' 펴낸 아줌마 논객 이경숙씨
... 비판해 화제를 모았던 李씨가 새 책을 들고 동양학계에 다시 나타났다. 새 책의 제목은 '완역 이경숙 도덕경'(명상.전 2권). 새 책에서 李씨는 김용옥 교수에 대한 비난을 하지 않고 있다. '이경숙 ... 李씨는 컴퓨터 엔지니어인 남편 金씨와 고3, 초등 6년생인 두 딸을 두고 있다. -공교롭게도 김용옥 교수가 방송 강의를 재개한 시점에 책이 출간됐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원고의 절반은 2년 ...- '도올 저격수'로 이름을 날린 '아줌마 논객' 이경숙(44)씨가 돌아왔다. '노자를 웃긴 남자'란 책으로 도올 김용옥(중앙대 석좌교수)씨를 힐난했던 바로 그 이경숙씨다. 새로 펴낸 책은 ... 비판하지 않았다. '노자 도덕경'총 81장을 기존의 해석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야말로 '이경숙 식'으로 완역했다. 기존의 책은 도덕경 21장을 번역하는 데 그쳤었다. 책의 맨 앞에 40개 ...
'노자를…'저자 이경숙씨 유료
지난해 『노자를 웃긴 남자』(자인)를 펴내 도올 김용옥씨의 도덕경 해석을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라고 비판해 화제를 모은 '아줌마 논객' 이경숙(42)씨. 고전 해석에 학벌이 왜 ... 언제 장안을 시끌벅적하게 만든 적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말하는 그에게 도올 김용옥씨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나 할 수 있는 특정인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들이 ...
기이한 책’ 쓴 ‘평범한 아줌마’
배영대 중앙일보 문화부
도올 신드롬을 정면으로 뒤집어 숱한 화제를 낳고 있는 “노자를 웃긴 남자”의 저자 이경숙씨.
한사코 자신을 감춰왔던 그가 기자와 처음 인터뷰를 갖고 마침내 실체를 드러냈다.
그는 가공의 인물도 아니었고, 쟁쟁한 학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중학교때 도덕경을 처음 접한 이후 따로 공부한 적조차 없는 평범한 아줌마였다.
그가 누구인지 특별한 주제 없이 전화와 인터넷을 통해
나눈 사랑방 담화 같은 솔직한 이야기를 육성 그대로 중계한다.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된 “노자를 웃긴 남자 1,2”(자인)의 저자 이경숙(41)씨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2001년 2월24일자 33면)를 통해 부분적으로 실체를 드러내면서
그에 대한 관심이 다시 타오르고 있다.
특히 인터뷰에서 이씨는
“우리 사회의 학벌중시 풍조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 더 큰 목적일 수 있다”며
학력을 밝히지 않는 이유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적 이력과 실력의 수준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오히려 증폭되고 있다.
여기에 이씨가 지난 3월12일자부터 “중앙일보” 지면에 싣는 동양 고전에 대한 칼럼은
그 특유의 자신만만함과 설득력으로 그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이씨는 이에 대해 언제까지나 감출 수는 없는 만큼 칼럼을 통해
차차 고전을 공부한 과정과 김용옥을 비판한 배경 그리고 주부로서 느끼는 최근의 심경 등을
밝혀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기자와 다시 가진 이번 인터뷰에서도
여전히 “내가 쓴 모든 글과 책이 곧 나의 이력”이라며 구체적인 이력을 밝히기를 거부했다.
“내가 쓴 글과 책이 내 이력”
기자는 이씨의 실체에 조금이라도 접근하기 위해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다양한 방면에 대한 다각적인 질문을 통해
그의 실체에 조금이라도 접근하기 위해
특별한 주제를 정하지 않고 세상 사는 이야기 전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은 이씨와 인터넷과 전화로 주고받은 내용 전문이다.
─ “중앙일보”에 첫 인터뷰 기사가 나간 후 생활에 변화가 없지 않을 텐데….
“지금까지 만나기를 거절했던 분들께 입장이 무척 곤란해졌다.
한 사람을 만나면 다 만나야 할 것 같아 그토록 인터뷰를 사양했었다.
염려대로 많은 인터뷰 요청에 시달리고 있다.
신문·잡지사 기자들과 학계·종교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온다.”
─ 가족들도 기사를 보았나.
“물론이다.”
─ 가족들의 반응은.
“남편과 아이들은 내가 언론사 사람들이나 팬들 또는 적대적인 사람들 모두에게 시달릴까 봐
염려하고 있다. 그냥 조용히 내버려 두기를 바란다.”
─ 꽤 많은 인세를 받았을 텐데….
“액수를 밝히고 싶지 않다. 책으로 인한 수입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 인터넷 홈페이지를 잠정폐쇄했다고 들었다.
“홈페이지로 격려와 질책이 많이 쏟아졌다.
일부 도올을 지지하는 네티즌들의 원색적 비방도 있었고,
내가 책을 쓴 동기와 목적을 곡해하는 사람이 많은 듯해 잠시 닫아 두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중앙일보에 칼럼을 연재하기로 결심한 것도 이를 불식시키려는 마음이 컸다.
칼럼과 인터뷰를 통해 시간을 갖고 대해 나가다 보면 오해는 풀릴 것으로 본다.
그러면 다시 홈페이지를 열어 독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물론 비난만 있지는 않았을 텐데.
“나로 인해 도덕경의 올바른 뜻과 노자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감사의 뜻을 전하는 글이 가장 많았다.
동양학을 전공하거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분들 가운데 부끄럽다고 고백하신 분들도 있다.”
─ 이참에 학력을 밝힐 수 없나.
“노자나 공자의 학벌을 묻고 싶다. 논어나 도덕경을 읽을 때 저자의 출신 대학이나 학벌을
보고 읽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 도덕경은 언제 처음 접했나.
“중학교때 고서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사하면서 그 책을 잃어 버렸다.
가족 누군가가 버린 것 같다.”
─ 도덕경에 대해 누구의 강의를 들은 적은 있는가.
“없다.”
“도덕경 공부한 적 없다”
─ 구체적으로 공부한 과정은 있을 것 아닌가.
“따로 공부한 적이 없다고 누누이 말했지만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
도덕경을 비롯한 동양의 고전들은 ‘공부하는 책’이 아니다.
그저 깨끗한 마음과 맑은 심성으로 읽고 그 뜻을 삶에서 실천하면 되는 책이다.
왜 자꾸 ‘공부’나 ‘연구’를 들먹이는지 이해할 수 없다.
고전에 대한 그런 잘못된 ‘공부벽’ ‘연구벽’에 대한 우려에서
중앙일보의 ‘고전 읽기’ 칼럼을 쓰기로 했다. 칼럼을 통해 동양 고전은 공부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그런 나에게 자꾸 ‘얼마나 공부했느냐?’고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 한문은 언제 배웠나.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안 어른들께 배웠다.”
─ 한문의 특징은 무엇인가.
“글자 자체가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본다.
중국의 학문은 사실 옛날에 만들어진 글자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글자 자체가 철학을 잉태하고 있는 씨앗이다.”
─ 예를 든다면.
“예컨대 음(陰)이나 양(陽)이란 글자의 상형과 그 뜻을 푸는 과정 끝에
‘음양’이라는 개념이 나오는 식이다. 도(道)나 인(仁)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상이나 철학의 이름이 도나 인이 아니라
도와 인이라는 글자에서 도교와 유교가 나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상이 있고 그것을 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가 먼저 있고 그 글자의 뜻을 푸는 데서 사상이 세워진 것이 동양의 철학이다.
노자의 생각은 ‘도’라는 글자에서 시작되었고,
공자의 사상은 ‘인’이라는 글자에서 출발한 것이다.
생각을 글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가 생각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문자가 바로 한자라고 본다.
동양 철학은 한자라는 문자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철학 자체가 문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 도덕경은 어떤 책인가.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며 쓴 애민(愛民)의 글이고,
인위적인 사회구조를 자연적인 생활로 되돌리려는 정치사상서다.
도가(道家) 계통의 사람들이 양생법이나 신선술이 기록된 경전으로
변조시키려고 노력해온 탓에 일종의 수련서처럼 왜곡됐지만
도덕경은 수련법과는 전혀 무관한 책이다. 도덕경의 어디에도 그런 설명은 없다.”
─ 중앙일보에 쓴 첫 기고문(2월24일자 34면)에서 도덕경은 전체가 하나의 문장이라고 했는데….
“전체를 엮지 않고 낱낱의 문장을 읽으면 모든 구절이 제각기 따로 노는 것이 도덕경이란 책이다.
뒤를 보지 않으면 앞을 알 수 없고, 앞을 기억하지 못하면 뒤를 이해할 수 없다.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논리로 연결해야만 비로소 각 문장이 제대로 읽힌다.”
─ 자세히 듣고 싶다.
“도덕경이란 책의 구조는 놀랄 만큼 정교한 장치를 해놓은 미로와 같다.
안으로 들어가면 결코 길이 보이지 않는다.
미로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입구와 출구를 확인해 머리에 담은 다음 들어서야
바르게 빠져나갈 수 있다.
미로의 지도를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우선 들어간 다음 더듬거리며 헤매는 것이
도올을 비롯한 기존의 도덕경 해석이다.”
─ 기존 도덕경 해석서의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나.
“약간 잘못됐다는 생각은 했지만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된 것은 도올의 TV 강의를 보면서였다.
하도 황당해서 책(노자를 웃긴 남자)을 쓰면서 시중에 나와 있는 10여종의 도덕경 주해서를
세밀하게 봤다.”
공자·노자 잘못 그리는 도올 강의
─ 귀하의 해석에는 직관력이 돋보이는 것 같은데, 고전 해석에서 직관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전의 번역은 직관보다 원문을 존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직관력의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원문의 무시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원문과는 전혀 다른 해석들이 보편적인 것으로 통용되어 왔다는 이야기다.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지,
이해할 수 있는 해석에 원문을 맞추면 안된다는 말이다.
때문에 고전 해석에 직관력을 동원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 직관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예컨대 도덕경은 고전 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책이라
전체적인 구조의 비밀을 알아채는 데 직관의 도움을 받았다.
극한으로 절약된 문장과 글자의 의미를 여러 군데 분산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다른 고전들은 직관에 크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 다양성을 용인하는 것이 철학의 기초라고 본다. 당신의 고전 번역의 특징인 일관성은
다른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사항인가.
“해석의 다양성은 인정할 수 있어도 번역의 다양성은 인정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없다.
다양한 번역이 가능한 글이라면 그것은 글이 아니고 비문이다.
인간의 말을 옮기는 데는 불완전한 면이 있는 문자인 한자의 특성상
하나의 문장이 몇가지 뜻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올바른 하나의 번역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장 자체는 여러 가지 번역이 가능하지만
하나의 사상이나 철학으로서 일관성을 가질 수 있는 번역은 제한되기 때문이다.”
─ 도덕경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받은 주석서가 있는가.
“도움을 많이 받은 책은 도올을 비판하기 위해 쓴 글이므로
당연히 도올의 ‘노자와 21세기’다.
가장 좋아하는 주석서는 불교의 공(空)사상에 대한 용수(나가르주나)의 ‘중론송’이다.”
─ 논어에 대해 지금까지의 질문을 다시 한다면.
“논어도 중학교 무렵 처음 읽었고 강의는 별도로 들은 적이 없다.”
─ 도덕경과 논어 해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차이는 무엇인가.
“논어는 평이한 문체로 쓰인 책이고 유별난 생략이나 압축 또는 공자가 지어낸 단어들이
별로 없어 도덕경과 달리 번역 자체에 이론이 있을 부분이 많지 않다고 본다.
물론 많은 이론이 있지만 공자라는 성현의 지적 수준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전체적인 논리의 일관성을 조합해 내는 과정에서 어느 것이 가장 올바른 해석인지는
결정할 수 있다고 본다. 둘 중 하나다.
공자의 논리가 부실하거나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 도올의 논어 강의는 봤나?
“봤다.”
─ 도올의 논어 강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도덕경 해석과 마찬가지로 할 말이 많다.
기고문에도 일부 썼지만 중앙일보 칼럼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밝히겠다.”
─ 지금 몇가지 예를 말해 줄 수 있나.
“몇몇 문장의 번역이나 해석이 틀리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통해 그려내는 노자와 공자라는 인물이다.
도올이 논어와 도덕경 강의를 통해 대중에게 보여주는 공자나 노자의 모습은
공자나 노자가 아니다. 이 문제를 간단한 대답으로 다 말할 수는 없다.
앞으로 차차 지적해 나갈 생각이다.”
─ 귀하의 번역에는 띄어 읽기 등 한문독법상의 오류가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학계 전문가들로부터 정식으로 나온 지적이나 비판은 거의 없었다.
대개 네티즌들이 도올 관련 사이트에서 떠드는 이야기들인데
반론을 제시해야 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특히 책의 내용 중 극히 일부분만 가지고 비방할 뿐
전체적인 내용에 대한 논리적 반박은 접해본 바 없다.
있다면 한국학 연구소장인 박 현씨가 쓴 글 정도인데 이에 대해서는
인터넷을 통해 답변한 바 있다. 좀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비판이나 지적이 있기를 바란다.”
─ 가정주부이니 묻겠다. 아이를 키우는 데도 도(道)가 있는지.
“아이들뿐만 아니라 남편을 포함한 모든 가족에게 내가 견지하는 자세가 있다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가족들이 다른 가족 누구에게도 하지 않는 말이 있다.
‘하지마’와 ‘안돼’라는 두마디다.
무엇이든 가족들 중 누군가가 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으면 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는 본인의 선택이고 모든 가족은 그것을 존중한다. 그것이 도라면 도다.”
─ 동양의 전통교육은 어렸을 때는 강제로라도 잘못 뻗어나가는 가지를 쳐 주는 것 아닌가.
“자연상태의 나무에 잘못 뻗어나가는 가지는 없다.
나무를 기르는 사람의 마음에 안드는 가지가 있을 뿐이다.”
두 딸에게 한문 따로 안 가르쳐
─ 아이들이 엄마의 책을 읽었나.
“큰애가 중학교 3학년이고 둘째가 초등학교 3학년인데 큰애는 내 책을 읽을 만한 나이가 되었다.
책뿐만 아니라 큰애는 내 사이트에 올린 글을 함께 본다.
비판하는 글도 보지만 별다른 얘기는 안한다. 내가 쓴 책을 학교 선생님들께도 선물했다.”
─ 선생님들의 반응은?
“선생님에 따라 다소 다른 것 같다. 도올을 좋아해서 그의 강의를 열심히 듣고
수업시간에 얘기하는 분도 있고 또 내 책에 감명받았다고 하는 선생님도 있다고 한다.”
─ 아이들이 엄마의 활약을 알고 있나.
“잘 모른다. 단지 책 나오고 인터뷰가 나간 후 엄마의 영역이 커졌다는 정도는 아는 것 같은데
기뻐하기보다 그런 일에 엄마를 빼앗길까봐 걱정하는 눈치다.”
─ 모범생이 아닌 아이들 이른바 문제아는 어떻게 교육해야 하나.
“문제아는 없다. 어른들이 문제아라고 생각하는 불행한 아이들이 있을 뿐이다.
하기 싫고 자기에게는 어려운 공부를 강요하니 문제아가 된다.
잘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허락하면 문제아 대신
활력이 넘치는 건강한 아이를 보게 될 것이다.
문제아란 하고 싶은 일을 억제당하고 하기 싫은 일을 강요받으며 사는 아이들이다.
하고 싶어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주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 두 딸에게는 따로 한문교육을 하는가.
“한문을 따로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큰딸은 학교에서도 한자를 배우지 않지만 내가 한문 보는 것을 보고 스스로 배우려 한다.
둘째딸도 언니가 공부하는 한자를 보고 가끔 아는 체하기도 한다.”
─ 책과 기고에서 여러 차례 한글전용의 문제를 지적했는데,
한문교육은 언제부터 하는 것이 좋을까.
“한문을 배워야 우리 글에 대한 이해도 빠르다. 적어도 초등학교 때는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 초등학교때 가르친다면 교재는 어떤 것이 좋을까.
“따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한글 뒤에 괄호를 넣어 한문을 표기하는 것부터 실시해도 좋겠다.”
─ 국한문 혼용이 오히려 ‘한문을 안다’는 어설픈 자만심을 키우는 것은 아닐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기존의 고전 한문 해석이 너무 어렵게 풀어놔 일상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누구나 이해가능한 고전 번역이 이루어진다면
그러한 우려도 해소될 것이다.”
─ 맞벌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같이 벌어야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많으니 어쩔 수 없지만,
가능하면 아이들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주부가 가정을 지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불교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는데, 스스로 불자(佛子)라고 생각하나.
“진정한 불자는 아니다.”
─ 무슨 뜻인가.
“남을 위해 살 줄 알고 희생할 줄 알아야 진정한 불자다.”
─ 진정한 불자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가.
“흔히 유명한 사람들만 평가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드러나지 않은 진정한 불자들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쉽다.”
─ 불자라는 말 대신 종교인이라고 표현해도 좋은가.
“물론이다. 기독교인 중에도 드러나지 않지만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
드러내놓고 하는 선행보다 드러내지 않는 선행을 해야 진정한 종교인이다.”
─ 종교를 택한다면.
“물론 불교다.
하지만 보이지 않게 선행을 한다는 면에서 굳이 종교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 주부들도 재교육을 받아야 할까.
“주부 역시 자기계발을 게을리하면 안된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이 다라면 아이들이 크면 무시당할 수 있다.
엄마가 먼저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어떤 고액과외보다 더 좋은 교육이다.”
─ 구체적으로 어떤 공부를 해야 하나.
“필요하다면 학원에라도 다니면서 하고 싶은 공부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항상 책을 가까이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좋다.”
“지금 무엇 뿌릴까 고민할 때”
─ 인터넷시대에 책의 중요성은 감소하지 않을까.
“인터넷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교양의 원천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
“열심히 애쓰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가난이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본인들이 스스로 가난을 느끼는 것 아닐까.”
─ 운명은 있다고 보는가.
“그렇다.”
─ 주역을 공부한 탓인가.
“주역과는 상관없다.
내가 처음 펴낸 책인 ‘마음의 여행’(정신세계사)에 그에 대한 얘기들을 썼다.”
─ 타고난 운명이 있다면 열심히 애쓰고 부지런하게 사는 것도 그 사람의 운명인가.
“운명을 개척할 수도 있다.”
─ 어렵다. 안주하지 않고 개척하는 것도 운명일 수 있나.
“밭에 콩을 심었을 때 콩이 나는 것은 운명이다. 그러나 콩을 심을 것인가,
팥을 심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다.
사람들은 콩을 심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고
‘팥이 필요한데 콩이 나버렸으니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운명은 자기가 선택한 것의 결과다. 선택하는 순간 결정되지만 선택의 자유는 있다.
이미 선택한 것의 오지 않은 결과가 운명이다.
때문에 선택한 사실이 있는 이상 그것의 결과인 운명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아직 선택하지 않은 많은 일들이 있다.
지금까지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정해진 운명도 좋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의 선택이고 결정이며 행동이다.
이미 뿌린 씨앗은 뿌린대로 거둘 것이지만, 지금 무엇을 뿌릴 것인가는 지금 결정할 수 있다.”
─ 운명을 믿는 것이 고전 공부와 관련 있나.
“큰 관련은 없다. 그러나 인생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보다 올바른 선택을 할 가능성을
넓혀 줄것이다.”
─ 기(氣)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물론 기의 존재를 인정하며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다.
모든 물체에서는 기가 나온다. 여러 개의 종이컵 중 하나에만 어떤 물건을 넣고 손으로 기운을
느껴보면 물건이 들어 있는 컵을 정확하게 고를 수 있다.
기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리고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모든 만물은 각자의 기가 있다.”
─ 두 딸에게 따로 영어 공부는 시키는가.
“과외를 시키지는 않는다. 친척이 영어학습지 선생이어서 둘째딸에게 테이프를 갖다 주었는데
첫날 한번 하더니 치워버렸다. 역시 강요는 안한다.
하지만 언니와 대화하면서 자기가 이런 영어 단어도 안다고 자랑하면서 배우기도 한다.”
─ 특별한 운동을 시키는 것은 있나.
“큰딸은 특별히 미술을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동물이나 사물의 이미지를 잘 그린다.
둘째는 태권도 하나만 가르친다. 태권도 사범에게도 둘째가 게으름피우면 그냥 두고
강요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 아이들 교육에 전혀 강요를 안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강요보다 더욱 효과적인 것이 동기부여다.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어머니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동기부여를 못하기 때문에 윽박지르는 강요가 나온다.
강요는 바로 효과가 나지만 일시적이고 동기부여는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지만 지속적이다.
때문에 동기를 부여하고 그 효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다.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칭찬이다.”
─ 아이들 학교 성적은 어떤가.
“잘하는 편이다.”
─ 지방에 살면 서울보다 정보가 적어 교육에 불리하지 않을까.
“교육의 목적이 성적에만 있다고 할 때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정보가 많다는 것은 경쟁이 심하다는 이야기다.
지나친 경쟁이 교육에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서울보다 정보가 적은 만큼 경쟁이 약해 오히려 아이들의 정신건강에는 유익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비결은 뭔가.
“화목한 집안 분위기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서로 다정하고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는 분위기라면 자연히 아이들도 자기 할 일에
충실하게 마련이다. 아이들 공부에는 심리적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
가정의 분위기가 안정되지 못하면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기 어렵다.
부모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늘 부모가 책을 가까이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큰딸이 커서 무슨 일을 하기를 바라나.
“교편생활이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본인이 하고 싶다는 방향도 중시할 것이다.”
─ 지난 10년간 컴퓨터통신에서 ‘구름’(Cloud)이란 필명을 날렸는데, 컴퓨터는 잘하나.
“그렇게 잘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통신에 글을 올리는 데는 대단한 컴퓨터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 글쓰기는 언제부터 했나.
“본격적으로는 컴퓨터통신을 할 때부터다.”
─ 그때부터 그렇게 학벌 중시에 반대했나.
“아니다. 도올의 책과 강의 때문이다. 학벌을 강조하지 않고도 옛날에는 알 수 있었고,
또 지금도 알 수 있다고 보는데 유달리 학벌을 강조하는 것이 귀에 거슬렸다.
게다가 그 많은 학벌을 가지고도 번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 학벌에 원한진 일이라도 있나.
“도올의 강의가 학벌이 약한 많은 사람들에게 체념과 절망감을 안겨줄 것 같아
그것을 염려했을 뿐이다. 나는 학벌을 의식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내세울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본다.”
─ 장시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원래 말이 적은 편이다. 자꾸 말을 시키니 대답 안할 수도 없고 해서 하다 보니 말이 많아졌다.”
노자를 웃긴 男子 도올을 울린 女子
‘도올논쟁’의 시작과 끝 /
동양학 붐 일으킨 功 크나 동양학의 귀족화는 큰 잘못
배영대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노자를 웃긴 남자 1,2”(자인)는 기이한 책이다.
다른 고전 해석서들처럼 각주를 다는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번역과 해설의 파괴적 설득력은 기존의 어떤 해석서보다 탁월하다.
도올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통나무)를 저본으로,
책을 비판하는 데 일관한 이경숙(41)씨의 이 책은 도올을 직접적 타깃으로 삼았지만
궁극적으로 기존의 도덕경 해석 2,500년의 역사를 뒤집는 파괴력을 보인다.
저자 이씨는 “어려서부터 도덕경을 보았는데,
우연히 도올의 TV강의를 보고 저렇게 도덕경의 취지를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게 됐다”고 한다. 처음부터 책을 쓰려 한 것은 아니고 10년 전부터
‘구름’(Clouds)이란 ID로 필명을 날리고 있던 컴퓨터통신에 글을 올렸다.
이씨의 표현을 따르면 “조그만 통신모임방에서 글을 연재한 것은 이발사가 숲속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씨는 통신상의 글쓰기 특성상 재미있게 쓰다 보니
도올에 대한 인식공격성 발언도 많았다고 고백한다.
도대체 도올의 도덕경 해석이 얼마나 잘못됐길래 이씨는 이다지도 흥분하는 것인가.
고전의 번역과 해석은 2,000∼3,000년의 역사적 간격을 고려한다면 저자가 다시 살아나 밝히지
않는 한 번역서 각각의 다양성을 용인해야 하는 것이 오히려 마땅해 보인다.
이씨와 도올의 논어 해석은 정반대
이씨의 책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도덕경 1장에서 20장까지를 번역 해설한 이씨의 책은
1장 첫머리인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에서부터 20장이 끝날 때까지 거의 90% 이상을
도올과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아니 완전히 정반대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나의 고전을 번역한 두 책이 전혀 다른 말을 할 수 있을까.
도올과 이씨의 번역은 조사조차 전혀 다른 의미로 쓰고 있다.
더욱이 도올의 도덕경 해석은 기존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측면이 많아 도올에 대한 부정은
곧 기존 해석에 대한 부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씨의 책을 처음 접한 지난 해 말 기자의 느낌은 놀라움 외에는 다른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습관처럼 얼른 표지를 뒤적여 저자의 이력을 찾아 보았다.
‘1960년 마산 출생, 컴퓨터통신에서 활약, “마음의 여행”(정신세계사)이란 책을 낸 바 있음.’
이것이 전부였다. 저자 이경숙씨는 과연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어느 대학을 나와 어떻게 공부했을까. 인터뷰(중앙일보 2월24일자) 기사가 나간 이후
이씨의 학문적 이력과 실력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더 커졌지만,
이씨는 자신의 이력을 밝히기를 극구 거부하고 있다.
학계에서 이씨를 비판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이씨로부터 매서운 비판을 받은 도올은 자신을 드러냈으므로
이씨 또한 당연히 자신을 드러내야 게임의 룰에 맞다는 것이다.
복잡하게 얽혀 가는 도올논쟁 속에 왜 관련 학계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하지 않느냐는 요구들이
많다. 기실 학계에서는 도올과 이경숙씨 그리고 서지문 교수에 대해 냉담한 것이 사실이다.
그간 학계에서는 대체로 사석에서 도올을 피상적으로 비판하는 데 그쳤고 TV강의에 대해서도
‘엔터테이너’라는 식으로 비켜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학계의 반응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해 초 “서평문화”(간행물서평위원회, 2000년 봄호)에 기고한 최진석(서강대 철학과) 교수의
“노자와 21세기”에 대한 서평은 도올의 학문적 공과에 대한 학계의 본격적인 첫반응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교수의 서평은 원고지 50매라는 한정된 분량에 도올의 학문적 공과를
모두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이후 도올은 노자강의에 이어 KBS TV에서 논어를 강의한다.
그리고 올초 도올논쟁을 촉발시킨 서지문(고려대 영문과) 교수의 ‘소인(小人)이 군자(君子)를
강(講)하는 시대’라는 자극적 칼럼이 “중앙일보”에 나가고,
이것을 일간지에서 도올과 서교수가 논쟁을 벌이는 식으로 보도하면서 문제는 불거지기 시작했다. 잇따라 각종 학술전문지에서 ‘상품성’ 높은 도올과 그의 책에 대한 비평이 나오면서
논쟁은 확대되기 시작한다.
그 논쟁의 한가운데에 이경숙씨의 책이 놓여 있다.
이씨의 “노자를 웃긴 남자”는 도올의 노자 해석에 대해 원문 글자를 하나하나씩 비교하면서
도올과는 완전히 다른 자신의 독창적인 번역과 해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면적인 도올 비판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해 12월 제 1권이 출간된 이씨의 책권은 입소문만으로 두 달 넘게 베스트셀러에 목록에
올라 있다. 그러나 저자가 무명의 가정주부라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쯤에서 나온 이씨의 “중앙일보”와의 인터뷰 기사는 논쟁에 휘발유를 끼얹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이후 인터넷 등 토론공간에서는 전례 없는 철학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기실 도올이 그런 비판만 받을 정도의 사람은 아니다.
그가 우리 사회에 동양학 붐을 불러일으킨 공은 이경숙씨도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그 공에 대한 긍정이 번역에서의 과실(過失)조차 덮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도올이 외국유학을 마치고 1980년대 초반 귀국했을 때는
그의 표현대로 동양학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학문이었다.
당시 도올이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통나무)를 펴내며 우리 지식사회에 던진 충격은 막대하다.
도올은 이 책에서 “동양학은 나의 살아 움직이는 실존적 삶의 영원한 현재적 기록일 뿐”이라며
동양학 붐의 깃발을 높이 치켜든다.
기존에 보던 고리타분한 해석이 아니라 동서양 고금과 학제(學際)를 넘나드는 도올의 설명은 대단한 설득력을 얻었다.
의외로 도올이 들고나온 무기는 너무나 사소해 보이는 ‘번역’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번역은 단순히 글자를 외국어에서 국어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었다.
도올은 “번역이란 한문을 순수 옛 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통용되는 일상언어
즉 누구에게든지 의미전달이 가능한 보편적 언어로 바꾸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컨대 동양 고전인 “중용”(中庸)에 나오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을 ‘천이 명한 것,
그것을 성이라 위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천, 명, 성의 내용을 일상언어로 풀어 전달해야 하며
글자 하나 하나를 한마디로 대응해 풀 수 없을 때는 반드시 상세한 주해를 첨부해 자기가 이해한
바를 논리적으로 풀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올은 한 발 더 나아가
“오히려 서양인의 번역이 훨씬 더 정확하고 논리적이며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논어”라는 책 이름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보다
서양인들처럼 “공자라는 사람의 어록집”(The Confucian Analects)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쉽게 이해된다는 것이었다. 최근 도올이 한 방송에서 “오늘날 학문의 본령은 고전 번역이며,
나도 그런 번역자의 한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발언이다. 그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제기한 문제는 동양학 방법론이었다.
지금에 와서 그의 문제제기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다.
문제는 그 방법론이 담고 있는 내용의 정확성 여부다.
이런 문제제기의 맨 앞줄에 이경숙씨가 서 있는 셈이다.
이경숙씨가 지적하듯 도올의 해석에는 ‘밑반찬’이 많다.
풍성한 ‘밑반찬’은 도올이 동양학 붐을 일으키는 촉매로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도올은 도덕경 한줄을 해석하면서도 그 몇십배에 달하는 설명을 한다.
기존 주석의 성과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자신의 체험과 일상사 섞어 설명한다.
물론 이런 자세가 나무랄 일은 아니다.
오히려 대중을 상대로 하는 계몽적 글쓰기와 강연에 이런 작업은 필수적이며
전문가들이 더욱 정진해야할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밑반찬이 아무리 훌륭해도 메인요리에 오류가 있다면 시정돼야 한다.
이것이 이경숙씨가 지적하고 나온 도올 비판의 핵심이다.
“동양학의 귀족화가 도올의 큰 잘못” 비판
도올과 이씨는 여러 면에서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먼저 소위 학벌만 해도 그렇다. 도올이 처음 동양학을 들고 나왔을 때 그가 하버드대를 나왔다는 것은 특별한 관심거리였다. 나아가 그가 동양학 붐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도올이 학벌을 강조한 것은 동양학의 불모지에서 관심을 끌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
이후 40권에 가까운 그의 대중적 저술은 그의 카리스마를 더해 주는 작업이었으며, TV 강의는 동양학 열풍에 대한 그의 공적을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것이었다. 인문학과 TV의 만남도 극적이었다. ‘인문학의 죽음’을 말하는 한켠에서 도올이 개척한 TV와 인문학의 접속은 하기에 따라서는 인문학도 얼마든지 새로운 영역과 관심을 도출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씨가 도올의 잘못으로 지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학벌 문제다. 학벌을 강조하는 것이 ‘동양학은 어려운 것’이라는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씨는 자신의 학력을 초증학교 졸업이라고 말한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동양학을 어렵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 이씨의 주장이다.
이씨는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내가 본 것은 철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귀족화요, 엘리트화였다. 동양 고전이라는 것이 저렇게 어렵고 난해하고 일반인들은 함부로 접근하기조차 힘든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씨는 ‘고전은 누구나 읽을 수 있다’ ‘아줌마도 옥편 한권 들고 앉으면 고전의 원문을 읽어나갈 수 있다’ ‘동양 철학은 그렇게 난해한 말들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라고 말한다.
도올은 1980년대 초반 “동양학은 더 이상 공자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씨는 “동양학은 공자왈”이라고 말한다. 이씨가 보는 동양에서의 학문이란 ‘옛 성현의 말씀을 익히고 깨쳐 실천하는 것’이며, 공부란 ‘공자왈 맹자왈’이었고 고전을 읽을 수 있는 문자를 숙지하는 것이었다. 도올이 동양학 방법론의 문제를 제기했다면, 이씨는 동양학 공부의 내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씨의 노자 번역과 도올의 번역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도덕경만 해도 2,500년 동안 일일이 손으로 써서 전승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수로 혹은 의도적으로 왜곡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것이 고전 번역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판본의 문제다.
판본이란 한 고전이 발견된 시대에 따라 각각의 특징을 따서 구별하는 것이다. 도덕경의 대표적 판본으로는 죽간본·백서본·하상공본·왕필본·성현영본 등이 존재한다. 나열한 순서가 대체로 오래된 순서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히는 판본은 왕필본이다.
이 때문에 번역자가 도덕경의 어느 판본을 보았느냐에 따라 해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판본 이야기를 늘어 놓는 이유는 도올과 이경숙씨 번역의 큰 차이가 이 때문에 빚어졌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판본의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전파시킨 사람은 바로 도올이다. 도올이 펴낸 “노자와 21세기”는 위에 열거한 여러 판본을 비교하며 여러 해석이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도덕경 해설서라고 볼 수 있다.
도올이 노자를 강의하고 나서 “나는 노자를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상대적 정답의 가능성밖에 없는 과거를 말하는 대신 그보다 정답의 가능성이 훨씬 높은 오늘의 나를 얘기했다는 말인 것이다.
노자철학 핵심 해석부터 다른 두 사람
더하여 나의 해석만을 정답이라고 강변하거나 강요할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결국 도올이 노자나 논어를 강의해도 그것은 도올 자신의 철학을 말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경숙씨가 “도올의 도덕경 강의에는 노자가 없고, 논어 강의에는 공자가 없으며, 불경 강해에는 부처가 없다”는 말로 도올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판본들 사이에 몇가지 다른 자구 해석을 놓고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수많은 판본을 관통하는 노자철학의 핵심에 대한 번역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경숙씨의 도올 비판 중 하나는 도올의 해석이 한 문장에서조차 앞뒤 문맥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씨는 도올이 오늘의 문제의식으로 과거를 덮어씌우는 것을 중시하다 보니 과거에 통용되던 너무도 쉬울 수 있는 고전을 오리무중의 난해한 책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씨가 말하는 노자철학의 진수가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노자 철학의 핵심은 당연히 ‘무위’(無爲)다. 도올과 이씨는 물론 누구나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무위는 노자사상의 상징인 것이다. 문제는 무위에 대한 번역이다. 무위에서 ‘무’는 논란의 여지가 없으므로 결국 문제는 ‘위’(爲)자에 모아진다. 이씨는 이 한 글자야말로 도덕경을 푸는 열쇠라고 말한다.
도올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존 도덕경 번역은 위를 ‘할 위’로 풀었다. 그래서 ‘무위’를 ‘함이 없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씨는 ‘위’자를 ‘꾸밀 위’로 풀어 무위란 ‘꾸미는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씨가 볼 때 노자의 무위는 무엇을 하고 안하고의 뜻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위’자는 도덕경 2장에서 처음 나온다. 이씨와 도올 모두 도덕경 2장이 노자철학의 핵심을 설명하는 장으로 보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씨는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했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무위고, 추한 것이 있는 그대로 추한 것도 무위다. 선한 것도 무위요, 악한 그대로 드러난 악도 무위다. 노자는 미추와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추한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위장하거나 악한 것이 선한 것을 가장하는 것을 유위(有爲) 즉 꾸미는 것이라 하여 멀리할 뿐이다. 선악과 미추와 고저와 장단이 모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은 모두 무위인 것이다.”
이에 비해 “도올은 ‘위’자는 쳐다고 안보고 미추와 선악 등 가치의 상대주의로 해석하여 노자의 원의를 왜곡했다”는 것이 이씨의 비판이다. 이씨가 무위를 꾸밈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데 반해 도올은 그 무위를 윤리적 선악의 판단과 같은 이분법의 거부, 즉 가치상대주의를 피력하는 장으로 보는 것이 차이다.
‘동양학을 왜 어렵게 만드는가’
그렇다면 도덕경 제 1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존의 해석은 도(道)의 본질을 설명한 총론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이씨는 노자가 자신의 사상을 ‘도(道)라는 이름(名)’으로 명명하게 된 의미를 말하는 서론으로 간주한다. 또 기존의 번역이 1장의 키워드를 ‘도’로 봤다면, 이씨는 ‘명’(名)으로 본다. 이씨에 따르면 “노자가 앞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생각의 이름을 도라고 이름 붙이지만 이것은 도가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무방하다”고 일러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씨는 노자가 ‘도’ 자체에 대해 그다지 많은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노자의 말처럼 ‘도’는 보거나 만지거나 설명하거나 분석해서 그 실체와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고의 경지는 도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도덕경이란 책에서 노자가 말하는 것은 그러한 경지에 대한 묘사보다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정치적 리더를 포함한 일반인들이 어떻게 하면 그 도에 가깝게 살 수 있는가를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경”이란 제목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제목은 노자가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다. 또 백서본이 발견되었을 때는 현재 통용되고 있는 38장 즉 흔히 ‘덕경’(德經)이라고 불리는 도덕경 후반부의 첫장이 앞에 쓰여 있었다.이 점을 생각하면 ‘도덕경’이 아니라 ‘덕도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만큼 제목에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씨는 도덕경만큼 오랫동안 오해와 편견 속에 묻혔던 책은 없다고 말한다.
‘도’라는 하나의 종교철학과 그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 지침서인 것처럼 곡해되기도 했고, 심지어 ‘도인술’이나 ‘신선술’ 같은 것을 가르친 신비스러운 비서(秘書)처럼 왜곡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이씨는 “동양의 고전은 대개 극히 일상적이고 평이한 삶의 덕목들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바른 정치를 위한 지침서가 아니면 지혜롭게 살기 위한 처세의 경구거나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기 위한 교육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이씨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역시 동양학의 이러한 가치는 변함없다고 말한다.
이런 동양 고전을 읽는 데 논리적 증명이 요구되거나 객관적이고 실험적인 사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씨는 동양 고전의 이해에도 고도의 지적능력과 실천이 요구되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의 수행자들이나 내부의 전승자들에게만 가능한 경지라는 것이다.
이씨는 말한다.
“그러한 특수한 실천은 사실 고전이라는 것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심신적 수행의 결과로 체득해야 하는 극히 개인적 체험 영역이며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전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동양학이란 그런 것과는 구분되는 일반적 메시지다. 즉 고전은 아무나 읽을 수 있고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옛 성현들의 가르침이 적힌 책이다.”
그래서 이씨는 도올에게 묻는다. “왜 동양 고전을 전문서적으로 만드는가? 도대체 동양학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라고 말이다. 물론 고전의 원문 한 줄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무수한 문헌과 자료를 뒤지고 역대의 주석들을 다 참조하는 작업들이 전혀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전통과 현대 융합시킬 중요한 계기
현재 관련 학계와 대중의 이씨에 대한 인식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 학계는 아직 이씨의 번역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반면 대중의 관심은 높다. 학계 일부에서는 이씨의 번역에 대한 구체적 지적보다 이씨가 이력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점과 컴퓨터통신 글쓰기의 맹점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씨도 이러한 지적에 대해 공인으로서 좀더 개방적 자세를 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도올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제기한 해석학적 입장을 바탕으로 최신의 현대적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 현대적 번역의 대표격인 셈이다. 반면 이씨는 전문가들에 의해 왜곡돼온 전통적 고전 번역의 원래 모습을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통적 번역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주요 화두 가운데 하나는 전통과 현대를 어떻게 융합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현대적 도올과 전통적 이씨의 번역이 만난다면 전통과 현대를 융합하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다. 어쨌든 도올과 이씨의 완전히 다른 번역 가운데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논쟁과 토론의 과정일 것이다.
論難돋보기
기본 틀이 다른 두 사람의 한문讀法
이씨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이씨의 한문독법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한문이란 어디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에 한문 번역의 논란은 기실 띄어읽기 문제가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앞에서 언급했듯 도올과 이씨의 번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독법에 대한 문제제기는 소홀히 할 수 없다. 또 과연 이씨의 한문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가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더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이씨의 독법에 대한 공식적인 문제제기는 한국학연구소장 박 현씨가 모 주간지를 통해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박씨의 반론에 대한 이씨의 재반론을 통해 이씨의 도덕경 번역에 대한 수준을 판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박씨나 또 다른 사람의 재반론이 이어진다면 물론 환영할 일이다.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독자들도 고전 해석의 뒤편에 이런 고민들이 있구나 하는 감상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문제를 제기한 박씨의 결론은 이렇다.
“도올과 이씨의 번역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첫문장부터 끝문장까지 9할 정도는 다르니 말이다. 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유감스럽지만 결론부터 말하겠다. 이씨의 한문문법은 이씨가 역사상 처음으로 만든 ‘특수하고도 유연한’ 문법이다. 이에 견주어 도올의 한문문법은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이다.”
과연 그런지 박씨가 예로 든 구절을 놓고 두 사람의 주장을 비교해 보자.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덕경 1장>
도올의 번역:“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씨의 번역:“도를 도라고 할 수는 있으나 언제나(꼭)도여야 할 필요는 없다.”
박소장의 평가(이씨는 박씨의 번역에 대해 어떤 문법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함):“도올의 번역에도 문제는 있다. 그는 可를 ‘말하다’로 옮겼는데, 이런 경우 可는 ‘여기다’는 뜻의 ‘以爲’가 축약된 것으로 ‘여기다’ 또는 ‘판단하다’로 옮기는 것이 마땅한 바, 그런 것이 불분명하다. 아무튼 ‘도는 항상성에 달려 있지 않다’(道不于常)는 개념은 춘추전국시대의 유행어이기도 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면 문법을 창조하지 말고 스스로의 의식을 재창조해야 할 것이다.”
이씨의 반론:“도올의 번역을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에 의한 번역’이라고 해놓고 예로 든 문장을 말하기를 ‘도올의 번역에도 문제는 있다’고 한다. 그럼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에 의한 번역’이 왜 문제가 있을까? 그건 그렇다 치고 나의 번역은 ‘특수하고도 유연한 문법에 의한 것’이어서 틀렸고 도올의 번역은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다면 박씨는 ‘어떤 문법’에 의해 번역하며 그 번역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 그러나 박씨 자신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 버리고 두 사람의 번역에 ‘다 문제가 있다’고 해버리니 보는 사람들만 다시 한번 헷갈리게 만들고 말았다.
박씨의 말대로 ‘가’(可)를 ‘이위’(以爲)가 축약된 것으로 ‘여기다’ 또는 ‘판단하다’로 놓고 번역해 보면 어떻게 될까? ‘도를 도라고 여길 수도(판단할 수도) 있지만 도는 도가 아니다.’ 이렇게 되는가? 이것이야말로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 같은데.... 남의 답이 틀렸다고 말할 양이면 정답을 보여 줘야 한다. 틀렸다고만 하고 ‘정답은 각자가 생각해 봐’하는 식의 학문은 곤란하다.”
박소장의 반론:“먼저 앞 서술부의 술어인 可와 뒤 서술부의 부정사인 非는 어떤 한문에서도 결코 짝을 이루지 않는다. 可와 짝을 이루는 부정사는 非가 아니라 不(弗)이다. 다음으로, ‘반드시’라는 뜻의 必자가 생략되었다고 하더라도, 부정사는 역시 非가 아니라 不이어야 한다. 따라서 可道와 非常道는 결코 병렬된 두개의 서술어가 될 수 없다.”
이씨의 재반론:“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의 문장에서 ‘可道’와 ‘非常道’가 결코 병렬된 두개의 서술어가 될 수 없다면 도올의 번역(지금까지 이 구절에 대한 대부분의 번역)인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야말로 엉터리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도올의 번역은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에 의한 번역’이라고 하니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 도올의 번역에서 可는 ‘이라고 하면’으로 옮겨졌고, 非는 ‘아니다’로 옮겨졌으므로 이것이야말로 可에 대응하는 부정사로 非를 사용한 잘못된 번역이다.
그러나 이 문장에서 非가 부정하는 것은 앞 문장의 可가 아니라 바로 뒤따라오는 常이다. 즉 可에 대한 非가 아니라 常에 대한 非다. 常이란 글자는 ‘언제나 그러함’을 말한다. 이 常을 부정하는 글자는 非이지 不이 아니다. 비상구(非常口) 또는 비상연락망(非常聯絡網)이란 말은 있어도 불상구(不常口)나 불상연락망(不常聯絡網)이란 말은 없다. 常을 부정하는 非를 可를 부정하는 非로 볼 정도라면 아직 도덕경을 가지고 훈수하고 나오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박씨의 주장에 따른다면 도올의 번역이야말로 ‘특수하고 유연성이 넘치는 황당한’ 번역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즉 나의 번역은 문법상 전혀 하자가 없다. 박씨가 하는 말 ‘도는 항상성에 달려 있지 않다’는 말은 번역의 정오가 아니라 ‘항상성이 없는 것’이 ‘도냐’ 아니면 ‘도라는 이름이냐’ 하는 해석상의 차이에서 전통적인 번역과 나의 차이를 찾을 일이다.”
‘천하개지미지위미’(天下皆知美之爲美) <도덕경 2장>
박소장의 문제제기:“이씨는 두번째 장에서 ‘天下皆知美之爲美’를 ‘세상 사람들이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꾸며진 아름다움이면’이라고 옮겼다. 도올은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고 옮겼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이 또한 원칙적으로 도올의 번역이 옳다. 그렇다면 이씨 번역의 문제는 무엇인가.
이씨는 허사인 之자의 다양한 용법을 무시했다. 이 경우 之자는 독립적 문장을 예속된 절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안다’는 문장과 ‘그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독립적인 문장을 묶어 “나는 ‘그가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로 만들 경우 ‘그가…것’의 내용은 목적어절이 되는데, 그렇게 만드는 허사가 바로 之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살펴보자. 天下는 주어가 되며, 皆知는 서술어가 되고, 美之爲美는 목적어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씨는 목적어절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 하여 마음대로 끊었는데, 그런 문장은 춘추시대 이래 어디에도 없다.”
이씨의 반론:“박씨는 한문의 문법은 아는 듯한데 적용을 틀리게 하고 있다. 앞서의 예에서 보았듯 박씨가 설명하는 문법에 따를수록 오히려 올바른 것으로 증명되는 것은 나의 번역이다. 之가 독립적인 문장을 목적어절이 되게 만들 때 그 목적어절은 之 이하의 문장이다. 이 문장에서 목적어절은 美之爲美가 아니라 之爲美다. 之가 만드는 목적어절은 之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한문의 기초다. 도대체 어떤 문헌에서 之의 앞뒤에 있는 글자들이 모두 목적어절이 되더란 말인가? 다시 한번 풀어 보자. 주어는 天下다. 서술어는 皆知美다.
모두 아름답다고 안다. 무엇을? ‘꾸며진 아름다움’을, 즉 之爲美가 목적어절로 기능하는 것이다.”
박소장의 반론:“이씨는 爲자에 대해서도 너무 일면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도올이 이 글자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爲라는 글자는 분명히 ‘함’이다. 다만 그것은 ‘행’(行)이라는 글자와 달리 ‘목적의식적인 함’을 가리킨다. 이 글자가 ‘위하여’의 뜻으로 쓰이는 것도 그 때문이며, 때로 ‘이’(以)와 엮여 ‘여기다’나 ‘판단하다’로 쓰이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爲가 거짓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 것은 꽤 뒷날의 일로, 위 문장을 옮기면 ‘세상 사람들은 알고 있다,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으로’쯤 될 것이다. 요컨대 이 문장에서 爲자는 ‘여기다’의 뜻으로 쓰였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여김’이니 조금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와 비슷한 맥락의 문장들은 춘추전국시대의 유행이었다. 예를 들어 ‘어울림을 어울림으로 아는 것’(知和以和) 등이 있는데, 이런 논리는 전국시대 변설가들의 애용구로도 되었던 바 “국책”(國策)이란 문헌만 살펴봐도 그런 용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씨의 재반론:“이상하다. 박씨의 말은 모두 나의 번역과 주장을 뒷받침하니 말이다. 爲가 ‘목적의식적인 함’이라 하는데 이 말이 무엇인가? 바로 ‘꾸밈’이다. 목적이 무엇인가? 어떤 저의를 말한다. 못난 것을 잘나게 보이고자 하는 목적,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하게 꾸미려는 목적,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는 목적, 이와 같은 목적을 염두에 둔 행위가 爲다. 즉 노자가 말하는 무위인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가 아닌 것’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爲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경의 爲는 ‘함’으로 번역하면 안되고 ‘꾸밈’으로 번역해야 한다.
박씨의 모든 주장은 나의 번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내용인데 결론을 이상하게 내려 읽는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함’이라고 번역하면 도덕경의 모든 내용은 번역이 불가한 이상한 글이 되어 버림을 우리는 알았다. 爲는 결코 수식 없는 ‘함’이 아니라 ‘꾸미려는 함’이다. 본의는 ‘함’이 아니라 ‘꾸밈’이다. 爲를 도올처럼 ‘함’으로 번역하는 것은 ‘조작한다’라는 말에서 ‘조작’을 빼고 ‘한다’만 남긴 것과 마찬가지다. ‘한다’는 빼도 관계없다.‘조작’이라 해도 뜻은 통한다. ‘조작한다’ ‘가식한다’ ‘위장한다’에서 중요한 것은 ‘조작’ ‘가식’ ‘위장’이지 ‘한다’가 아니다. 모든 설명은 나의 번역이 맞고 도올은 틀렸다인데 결론만 나의 번역이 틀리고 도올이 맞다로 쓴 글이 박씨의 글이다.”
이씨의 결론:“도올과 나의 번역은 9할이 다르다고 하는 박씨는 이와 같은 결론을 뒷받침할 예문으로 불과 3개의 문장을 드는 데 그쳤다. 그리고 ‘특수하고도 유연한 문법’과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의 근거를 댄 것이 없다. 더구나 박씨가 이게 옳다고 말하는 ‘번역’은 도올의 번역과 같지도 않고 나의 번역과 같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박씨의 번역은 ‘특수하고도 유연한 문법’에 의한 것도 아니고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으로 한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박씨의 번역은 어떤 문법에 의한 번역인지 궁금하다.”
하버드대 졸업과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에서부터 도덕경 번역의 자구 하나 하나의 완전히 다른 번역에 이르기까지 극단적 대비를 보이는 도올과 이경숙씨. 이들의 번역을 둘러싸고 복잡하게 전개되는 논쟁을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독자들도 도올과 이경숙씨의 책을 차분히 살펴보면 나름의 견해는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배영대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이경숙이 던지는 도올 공개비판 2題
“도올은 철학의 대중화 아닌 독점화하려 한다”
“도올이 강의하는 도덕경은 노자 卑下요, 논어는 공자 冒瀆이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지침을 밝혔던 도올 김용옥 교수에게 이경숙씨는 ‘동양학이 무엇인가’라고 먼저 묻고 있다. 이씨는 동양학이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수 학자들이 독점할 난해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완성’을 위해 초등학생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옛 성현들의 가르침이 적힌 책이라고 주장한다. 이씨는 도올을 향한 비판의 초점을 철학을 대중화한 것이 아니라 엘리트화했다는 데 맞추고 있다.
동양학이란 한마디로 옛 성현의 말씀을 배우고 익혀 오늘을 사는 삶의 지표로 삼기 위한 공부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동양학은 옛 성현의 말씀이 기록된 책, 즉 고전으로 시작해서 고전으로 끝난다. 고전을 부지런히 읽고 그 뜻을 알고 외우는 것이 사실 동양학이다. 가르침의 실천은 공부와는 또 다른 문제이니 논외로 치자. 이런 동양의 고전은 불가(佛家)와 도가(道家), 병가(兵家) 등의 저작들을 빼고는 대개 극히 일상적이고 평이한 삶의 덕목들로 되어 있다. 바른 정치를 위한 지침서가 아니면 지혜롭게 살기 위한 처세의 경구이거나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기 위한 교육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논리적 증명이 요구되는 객관적이고 실험적인 사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저자 개개인의 가치관에 토대를 둔 주관적 주장들이어서 맞느냐 틀리느냐를 따질 수 있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사회에 도움이 되는 소리냐 아니냐가 가치의 척도다.
때문에 동양학의 교재가 되는 고전들이란 인간세상의 다툼을 줄이고, 전쟁을 없애고, 학정을 파하고, 질서를 부여하고, 서로 위하며 살게 만들자는 것으로 결론이 정해진 소리들이다. 바람직한 인간상을 상정해 그런 인간상에 가까운 사람들을 만들기 위한 교육의 지표가 되는 텍스트다.
동양학은 쉽다는 것이 특징
때문에 고전을 통해 배우는 동양학이란 ‘어떤 인간을 만들기 위한 교육을 할 것인가’를 궁리하는 학문이다. 노자는 성인을, 공자는 군자를, 석가는 부처와 보살을 그것으로 내세운다. 불교는 워낙 심오하고 방대한 사상체계여서 동양학의 범주에 포함시키기 힘들다. 그 자체로 동양학이 아니라 세계학이고 우주학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빼면 남는 두개의 그 목적을 하나로 묶어 ‘성인군자’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동양학은 성인군자를 만들기 위한 학문이다. 성격이 그렇다 보니 사실 동양학은 아주 쉽다는 특징이 있다. 텍스트인 고전들이 일종의 도덕 교과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칸트나 데카르트·헤겔의 철학은 일반 민중을 위한 철학이 아니다. 상당한 정도의 지적능력을 소유한 지식층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들이다. ‘순수이성비판’이나 ‘변증법’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초등학생은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왜 고전을 전문서적으로 만드는가?
그러나 논어를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초등학생은 바보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뜻이 어려워 이해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를 몰라 아예 읽지를 못한다. 그러나 한글로 옮겨 주고 읽으라 하면 누구나 알아듣는 소리들이다.
옛날 서당에서는 코흘리개 학동들이 훈장님에게 회초리로 맞아가며 외웠던 글들이 공맹(孔孟)이요, 사서오경(四書五經)이었다. 동양에서의 공부란 바로 ‘공자왈, 맹자왈’이었고 고전을 읽을 수 있는 글자인 한자의 숙지였다. 그래서 동양학의 문제는 이해가 아니라 실천에 있다. 동양철학이 서양철학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동양철학은 실천철학이다. 그리고 그것의 목적은 오직 하나 ‘인간의 완성’에 있다.
서양철학이 추구하는 바는 ‘인간’이 아니라 ‘논리의 완성’이다. 그래서 유가와 도가와 불가는 이상적 인간상의 모델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는 반면 실존적 인간상, 변증법적 인간상이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인간의 완성이라는 실천을 요구하지 않는다. 물론 철학이라기보다 신앙을 위한 교설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는 예외로 하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동양학의 가치는 변함이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소리냐 아니냐’이고 ‘도움이 된다면 실천할 수 있는 소리냐 아니냐’이다. 실천의 결과 도달 가능한 인간상이 21세기를 살아가는 데도 여전히 바람직스러운 것이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소리냐 아니냐는 따질 이유는 없다. 이해하는 데 특별한 재능이나 능력이 필요한 소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하는 데 고도의 지적능력이 요구된다면 그 실천은 극소수의 수행자나 내부 전승자들만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동양의 철학은 이런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특수한 실천은 사실 고전이라는 것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심신의 수행을 통해 체득해야 하는 극히 개인적 체험의 영역이며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전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동양학이란 일반적 메시지다. 즉 고전은 아무나 읽을 수 있고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옛 성현들의 가르침이 적힌 책이다.
나의 이런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기도 하지만 더러는 심한 반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고전의 원문 한 줄의 올바른 해석에도 무수한 문헌과 자료를 뒤져야 하고 역대의 주석들을 다 참조해야만 한다고 그들은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작업들이 전혀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런 작업의 대상이 되는 원전(原典)이 담고 있는 철학은 그렇게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대하는 동양학은 어떠한가? 고전의 번역은 역자나 주석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떤 경우에는 터무니없는 오역과 악역으로 일관한 것도 있다. 그래서 어떤 해석서를 보았느냐에 따라 고전에 대한 이해가 심한 편차를 보이는 것이다. 주석은 물론 한글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안되는 소리가 너무나 많다.
그래서 이런 주석서를 통해 고전을 읽는 현대인들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고전’이라거나 ‘논리적으로 연결이 안되고 말이 안되는 소리 같지만 뭔가 심오한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 동양철학인가 보다’ 심지어 ‘나는 머리가 나빠 동양철학은 도저히 모르겠다’며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도 생긴다는 것이다.
오늘날 동양철학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가장 큰 이유는 세가지다. 한자교육을 철폐하고 한글 전용을 주창해온 교육정책의 잘못이 하나요, 고전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주석을 해내지 못한 학계 전문가들의 태만과 무능력이 그 둘째다. 마지막 한가지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 긴 글이 필요할 것 같다.
소수의 학자들이 고전을 자신의 상품으로 독점하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도올이다. 한자교육의 철폐 덕분에 한자 해독 능력이 ‘특수한 지적능력’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동양철학이란 지식 자체를 독점하고 일반대중으로부터 유리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시골 서당의 학동들도 다 읽을 수 있었던 공자왈 맹자왈이 세계 유수의 명문 대학을 거쳐야 가능한 고도로 난해하고 고급스러운 학문으로 둔갑한 것이다. 천자문만 떼도 할 수 있는 동양학을 하버드대 졸업장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강변하는 사람이 바로 도올이다. 그래서 아줌마도 읽을 수 있는 고전을 대학 교수라야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내가 컴퓨터통신의 조그만 모임방에서 도올의 강의를 비판한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글을 연재한 것은 이발사가 숲 속에 대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소리를 바람이 전하고 나뭇잎이 대답하듯 퍼져나간 끝에 책으로 출판되기에 이르러 이제 세상 사람들이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말았다. 귀만 당나귀 귀가 아니라 옷까지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었는데 위대한 왕께옵서는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귀가 당나귀 귀면 어떻고, 옷이야 벗었으면 어떠하랴. 동양학의 제왕이신 위대한 도올이 아니면 이 방황의 세기, 탐욕과 환락과 끝없는 이기적 욕망의 전차가 질주하는 21세기에 누가 있어 온 국민의 눈과 귀를 노자의 말씀과 공자의 가르침에 쏠리도록 할 수 있었겠는가. 오직 도올이 아니면 불가능한 기적의 실현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도올 TV강의는 개그쇼
과연 어느 나라에서 철학강의 프로그램이 황금시간대에 TV를 통해 방영되며, 또 그 프로가 코미디나 드라마나 영화를 시청률에서 압도하며 흥행대박을 터뜨린 경우가 있었나. 이것이 인문학의 불모지라는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21세기에 일어난 사건이니 온 나라가 시끄럽지 않을 수 없다. 온 세계에 떠들어 자랑할 만한 사건이다.
‘코리아는 TV 철학강의가 최고 인기 프로인 나라라더라’하는 소문이 한번 나기만 하면 세계인이 한국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다. 모든 재외공관의 관리들은 만사 제쳐두고 이 사실을 적극 홍보할 일이다. 월드컵 공동주최나 한두 사람의 노벨상 수상보다 더 획기적인 홍보거리다.
도올의 노자 강의가 진행중일 때 우리나라의 술좌석 화제 중 베스트는 단연 ‘노자’였다. 도올의 강의를 안보고 ‘노자’를 모르면 사람 취급을 못받았다. 도올의 강의 이전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 일인가.
방송국도 놀랐고, 학계도 놀랐고, 민초들도 놀랐다. 본인도 물론 놀랐을 것이다. 황수관·구성애는 아침 햇살에 끄지 않은 가로등 신세가 돼 버렸다. 다른 방송국들도 불난 집이 돼 버렸다. ‘철학이나 동양학의 인재를 찾아라! 한의학도 괜찮고 안되면 동냥학도 좋다!’ 그러나 도올대왕의 인기와 카리스마에 누가 감히 맞설 수 있다는 말인가?
사상 초유의 철학 100강이 이어지고 대한민국에 동양학 붐이 노도광풍처럼 몰아치는 사이 온나라의 학계가 숨을 죽이고, 난다하는 학자들이 말을 삼갔으며, 신문사도 잘못 걸리면 백주에 망국의 원흉으로 몰리는 판이 되고 말았다.
도올이 TV를 통해 동양학 붐을 일으키고 철학에 대해 대중의 관심을 불러모은 것은 한국사 100장면에 들 만한 대단한 공적이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그 붐은 동양학 붐이 아니었고, 대중의 관심을 모은 것은 철학이 아니었다. 동양학이라 광고하고 철학이라는 간판을 내건 쇼 프로그램이었다. 문제는 쇼 프로그램을 학술적 교양 프로그램이라고 알렸다는 데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앞서 말한 도올의 공을 높이 사 여타의 문제들은 덮어 줘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동양학에 대한 국민대중의 관심을 끌어올리고, 개그나 코미디 같은 쇼 프로나 보던 시청자들에게 노자나 공자의 사상에 대한 강의를 보게 하였다’는 그 한가지로 모든 허물을 덮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의 강의에 대한 비판은 ‘인기를 시샘하는 소아병적 딴지’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나는 도올의 인기를 시샘할 이유가 없는 아줌마다. 그런 내가 “노자를 웃긴 남자”를 쓰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는 도올식 동양학이 왜 잘못됐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왜 그의 과(過)가 공(功)을 앞지르는지 분석하면서 기왕 동양학을 하려면 제대로 하자는 바람 때문이었다. 나는 학계에서 명성을 다투는 경쟁자도 아닐 뿐더러 인기를 다투는 스타도 아니다. 다만 그의 강의에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문제점들이 있다.
사람들은 도올의 업적으로 ‘철학을 대중화’했다는 것을 든다. 이 말은 철학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일반대중에게 철학이나 고전에 관심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올 자신이 그것을 자랑삼아 내세우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과연 도올은 철학을 대중화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도올에 대하여 말을 하고 나선 첫번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도올은 철학을 대중화한 것이 아니라 엘리트화, 독점화에 전력투구했다. 도올의 강의를 듣다 보면 누구나 ‘철학이라는 것은 과연 하버드대나 도쿄(東京)대를 나온 도올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도올은 모르는 한자를 옥편을 찾아 더듬거려서라도 고전의 원문을 읽어 보려는 의욕의 싹을 자르는 독소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도올은 자기의 화려한 학벌과 수십년간의 연구노력과 수만권의 장서와 독서량을 날마다 강의마다 책마다 떠들어 자랑하면서 ‘철학이란 얼마나 어려운지, 그 공부에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한지’를 대중에게 세뇌하고 있다.
이런 강의를 보는 시청자들은 그의 방대한 지식과 학문적 깊이에 감탄하고 탄복할지언정 스스로 철학을 공부해 보겠다는 의욕이 사라져 버릴 것은 불문가지다. 이것이 ‘철학의 대중화’인지 묻고 싶다. 이것은 대중화가 아니라 흥행화다.
쇼 프로는 듣고 즐기는 데 목적이 있다. 가수에게는 팬들에게 ‘나도 열심히 노래를 배워 저 가수만큼 잘 불러야 되겠다’는 의욕이나 동기를 부여할 이유가 없고 또 그래서는 안된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희소하기 때문에 가수가 인기스타가 되고 돈을 버는 것이다. 가수의 입장에서 일반대중은 노래를 못부를수록 좋고, 노래 잘하는 사람이 귀할수록 좋다. 그러나 학자는 그렇지 않다. 학자의 책임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식을 얻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철학강의’와 ‘개그쇼’가 달라야 하는 이유다.
지식독점 상술의 폐해
도올은 자기의 저서나 강의를 통해 ‘동양의 고전을 하나 읽는 데도 세계 유수의 학벌과 수십년간의 피나는 노력과 타고난 천재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체념과 절망을 대중에게 심어준 크나큰 죄가 있다. 그의 현란하고 지칠 줄 모르는 자기 자랑이 철학을 공부하려 했거나 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조차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면 그 철학은 어디에 소용되느냐는 말이다.
그런 학벌과 연구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아닌 고전의 원문 한줄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횡설수설로 일관하고 조금만 어렵다 싶으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도망이나 가고 그것도 아니 되면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말을 더듬는 모습에서 누가 철학을 공부해 보겠다는 용기를 가지겠는가.
도올이 강의를 통해 놀랄 만한 집념과 에너지로 시청자들에게 주입하고자 하는 것은 ‘나 같은 사람이 강의해 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배우기나 하지 언감생심 내 수준에 오를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다. 지식을 독점생산해 판매하겠다는 상술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노래나 개그나 코미디의 노하우를 개발해 자기만의 것으로 팔아야 하는 연예인은 당연하다고 봐줄 수 있다. 그러나 소위 교수직을 가졌었고 학자라는 사람이 이 따위로 학문을 독점하려 하고 그것을 혼자서만 팔아먹으려 하는 작태가 용서될 수 있는 일인가? 이것이 ‘대중화’라는 말인가? 대중화는커녕 독점화의 노골적인 광태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 강의가 쇼 프로처럼 보고 즐기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아예 그 강의를 ‘도올의 철학쇼’라고 제목을 붙일 일이다.
진정한 ‘철학의 대중화’란 국민대중이 누구나 철학을 공부해 보겠다는 의욕을 갖게 하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 주고, 철학이 소수의 엘리트 학자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철학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도올이 해온 강의를 보라. ‘자기만이 할 수 있고, 자기만이 알고 있고, 자기만이 강의할 수 있고, 자기만이 옳고,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온몸을 동원한 열강으로 부르짖는다. 그래서 내가 도올의 강의를 ‘개그쇼’라고 하는 것이다.
좋다. 그것도 스타의 흥행 노하우라 치자. 그러나 그처럼 대단한 학벌과 노력을 했다는 사람의 강의가 도대체 그게 뭐냐는 말이다. 고전의 해석이란 어느날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고 1,000∼2,000년에 걸친 선대의 수많은 학자들의 주석과 연구성과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때문에 그러한 것 중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석이나 해석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다.
올바른 지식 전달이 무엇보다 중요
그러나 기존 학설 중 소수가 지지하는 학설이나 자신의 독창적 해석을 내놓을 때는 정통적인 학설을 뒤집을 만한 가치와 설득력을 가져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도올의 경우 기존의 해석에 의지해 그 권위를 비는 모습을 취하는 듯하면서도 기실 그려내는 철학의 전체 모습은 전혀 엉뚱한 창작물이다.
그 대상의 변조 과정은 실로 교묘하고 지능적이어서 그의 주 대상인 일반대중은 그가 그려내는 그림이 진짜 철학의 참모습인 줄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노자 철학이 될 수 없는 것을 노자 철학이라고 가르치고 공자의 사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공자라고 그릇 전하는 것은 철학 강의가 아니라 철학의 훼손이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도 도올의 강의는 재미있다고. 길거리 약장수나 개그쇼는 재미있어야 한다. 그러나 학문적 강의는 재미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재미있어 좋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재미있다’는 사실에는 나도 동의하고 싶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도올의 강의는 ‘개그쇼’다. 더욱 큰 문제는 그 ‘개그’에는 엄청난 학벌과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다고 국민들이 믿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학문의 강의란 ‘재미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으면 좋겠지만 그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지식의 전달이며, 학문에 대한 동기 부여’다. TV강의는 시청률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아무리 고매하고 유익한 철학도 들어주거나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가 선택권을 갖는 TV강의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 강의는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강사는 학문적 깊이와 지적 바탕 외에도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카리스마와 적당한 쇼맨십과 유머와 유창한 언변, 그리고 연출 감각과 인간적 매력도 있어야 할 것이다. 외모도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둘 중 우선되는 가치는 분명히 전자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쇼’이기 때문이다. ‘학문적인 철학 강의’라는 전제가 붙고 그 주인공이 교수요, 학자라고 하면 벌써 ‘재미있자는 프로’는 아니다. 재미를 위해 노자를 ‘숭무주의자’(崇武主義者) 혹은 ‘쿵푸의 달인’으로 만들고 공자를 ‘공짱구양아치’로 둔갑시켜도 좋은 일인가.
과학과 철학의 차이가 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과학은 과학자를 보지 않지만 철학은 철학자를 본다’고. 아인슈타인의 인품이 훌륭해서 상대성이론을 배우는 것은 아니고 뉴턴의 사생활이 엉망이었다 해도 뉴턴의 법칙은 평가절하되지 않는다.
그러나 노자의 철학은 노자의 인품으로 뒷받침돼야 하고, 공자의 철학은 공자의 인격이 증명해야 한다. 부처의 가르침은 부처의 평생이 그 옳음의 토대이고, 예수의 복음은 예수의 생애가 곧 복음의 증좌다.
과학은 과학자에 대한 존경을 요구하지 않지만 철학은 철학자에 대한 존경이 전제된다. 공자가 양아치같이 살았다면 논어가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이며, 노자가 벼슬이나 탐한 속물이었다면 “도덕경”을 누가 읽을 것인가?
사마천을 생각할 때 불알 발린 구차한 인생이 떠오른다면 어떻게 “사기”(史記)를 읽고 감명받을 것이며, 성서를 읽는데 예수의 방귀가 생각나면 경건한 신앙이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도대체 ‘예수님도 방귀 뀌었소?’하고 묻는 것이 철학인가? 그런 질문을 던지거나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의에 쌍스런 소리를 마구 쓰는 것이 용기라고 생각하나? 그것은 용기나 솔직함이 아니라 우행이고 치기다.
과학을 가르칠 때는 과학자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철학자를 말해야 한다. 철학의 가치는 글로 쓰여진 저작물이 아니라 그것을 남긴 선인의 삶이고 생애에 있다. 그 철학을 말한 주인공을 회화화하면 그 철학도 희극이 되는 것이다.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철학이 말하는 것과 그 철학을 남긴 사람의 삶이 일치했느냐 하는 생각과 행동의 일치성이다. 우리가 위대한 철학이나 사상을 남긴 사람들을 성인 혹은 성현이라 부르는 것은 그 사상과 삶이 일치했기 때문이지 저작물의 가치 때문은 아니다.
때문에 철학을 강의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자에 대한 존경과 그의 생각과 삶에 대한 동경의 고양이다. 그 사상과 일치하고 그 철학에 걸맞은 위대한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 보여주는 것이 철학 강의다.
“도대체 동양학을 어떻게 하려는가?”
그런데 도올의 강의는 어떠한가. 그가 그려 보여주는 노자는 노회한 책략가이고 쿵푸의 달인이며, 깡패와 칼잡이들의 우상이고 기문둔갑술의 창시자다. 공자는 또 어떠한가. 논어를 강의하는 초두에 본인은 짱구요, 그 아들은 잉어요, 태생은 천민이며, 공짱구는 본처를 버렸고, 그 아들도 마누라를 내쫓았고, 아들에게 친어머니 초상에 울지도 못하게 한 개차반이었다고 떠벌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이어서? 사실도 아니지만 사실이더라도 실제보다 더 비하해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공자의 태생을 천하다고 하면서 자기는 부유한 의사 집안에 태어나 온갖 부의 혜택을 다 받고 엘리트 코스만 두루 밟은 선택받은 귀족이라고 자랑하는 심사는 무엇인가? 이런 지식재벌, 지식귀족이 ‘철학의 대중화’를 공으로 내세우면서 성현들을 마음대로 깔아뭉개는 작태가 왜 용인돼야 하는 것일까. 재미있어서?
‘강의에 재미를 더하고 시청자를 TV 앞에 붙잡아둘 방법이 그런 재미밖에 없는 강의라면 차라리 집어치우는 것이 낫지 않을까. 노자의 권모술수, 공자의 개차반 행실, 예수의 방귀, 사마천의 불알발림을 떠드는 이유는 암만 생각해도 그놈의 재미밖에 없는데 재미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도올의 강의를 ‘개그쇼’라고 말하는 세번째 이유가 이것이다. 재미를 위해 철학 강의에서 가장 조심스럽게 그려야 할 철학자의 모습을 양아치에 건달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을 강의하는데 강사가 자신은 하늘만큼 높이고 철학의 주인은 땅바닥에 처박으면 되겠나? 논어를 강의한다는 인간이 논어의 저자이고 유교의 시조인 공자를 말하면서 공자의 아버지를 일부러 ‘아비’라 하고 그 어머니를 굳이 ‘어미’라고 표현하는 심리적 내면동기가 나는 궁금하다.
‘공짱구의 아비는 성이 없고 어미는 이름이 없다’는 얘기가 논어 강의에 왜 나와야 하는지 설명을 듣고 싶다. 그러면서 자기 어머니가 자기를 얼마나 잘 교육시켰는지 자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자기 어머니는 어머니라 하면서 공자의 어머니는 ‘어미’라 부르는가 묻고 싶다. 반대로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도올의 노자 강의는 노자 비하요, 공자 강의는 공자에 대한 모독이다. 이게 무슨 철학 강의인가? 도대체 동양학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가? 도올의 대답을 듣고 싶다.
<노자를 웃긴 남자 1>이 책으로 나간 후에 독자들로부터 많은 메일을 받았다. 예상치 못했던 과찬과 격려의 편지가 많았다. 그리고 그 책에서 다룬 범위가 <도덕경>의 1장에서부터 10장까지 뿐이라며 나머지 부분에 대한 해설도 보고 싶다는 요청이 많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많은 분들의 지적 사항이 가급적 도올에 대한 이야기는 줄이고 그 대신 <도덕경>에 대한 충실한 번역과 해석에 더 많이 치중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었다. 이런 독자들의 요청 사항에 대해 먼저 약간의 해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은 <도덕경>을 텍스트로 하고 노자가 주인공인 노자의 철학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의 텍스트는 어디까지나 <노자와 21세기>라는 책이며, 주인공은 도올이며 주제는 노자의 철학이 어떠하냐가 아니고 도올의 강의가 어떠한 것이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노자를 웃긴 남자>는 결코 노자 철학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다. 도올의 티비 강의 '알기 쉬운 동양 고전'을 감상하는 방법에 대한 책이고 그 강의의 텍스트로 사용된 <노자와 21세기>라는 책에 대한 분석집이다. 이 점은 책의 서두에서 내가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도올의 애초 강의 계획은 1장에서 24장까지였고 그것이 <노자와 21세기> 상하 두 권으로 교재가 만들어졌다. 나중에 예상외의 뜨거운 인기를 끌게 되면서 강의가 연장된 것으로 알고 있다. 때문에 이 강의에 대한 감상 교재도 최소한 24장까지는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래서 내킨 김에 24장까지는 같이 봐주기로 하고 <노자를 웃긴 남자>의 후편인 <노자를 울린 남자>를 쓰게 되었다. 25장부터 81장에 이르는 나머지 <도덕경>에 대한 설명은 노자가 주인공이고 <도덕경>이 텍스트이며 노자 철학에 대한 학술적 해설서인 책의 모습으로 독자제위께 내놓을 것을 약속드린다.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의 성격이 그렇다 보니 글의 수준과 글투가 강의의 수준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떤 독자들에게는 다소 거부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여론을 존중하고 독자들의 의견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후편에서는 언어순화 및 주인공에 대한 대접의 격상을 최대한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 것은 얼마든지 맞추어줄 수 있는 문제인데 고민은 텍스트의 참조비율이다. <노자를 웃긴 남자>의 서문에서 말했지만 <노자와 21세기>라는 진귀하고도 가치로운 텍스트가 있음으로 해서 내가 <노덕경>을 설명하는 데 얼마나 도움을 많이 받았는지 모른다. 그런 텍스트가 먼저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도덕경>의 진의를 그렇게 쉽게 그렇게 재미나게 그렇게 명확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자와 21세기>라는 책은 한국의 동양 철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11장에서 24장에 이르는 내용에 대한 설명에서도 나는 <노자와 21세기>라는 텍스트에 의존하지 않고는 잘 설명해 갈 자신이 별로 없다. <노자와 21세기>는 도올이 만든 강의 교재이지만 꼭 도올의 독창적인 해설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본인의 말대로 10년의 연구성과가 집약된 책이어서 그 책 하나면 노자 등선 이후 중국의 왕삐로부터 서양의 러셀과 한국의 도올에 이르는 2천5백년 동안 되어져 온 노자 해석의 대부분을 한 권의 책 속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환상적인 연구의 성과물을 학문에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재삼 독자들께 양해를 구하고 싶은 것은 11장에서 24장까지의 내용만이라도 텍스트로서 <노자와 21세기>를 이용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라는 것이다. 1장에서 24장까지만 좀 쉽게 이해시켜드릴 수 있다면 그 나머지는 내가 비록 미력하나마 환상적인 텍스트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도덕경>을 풀이해서 설명해 드리겠다. 이번에 <노자를 웃긴 남자>가 출판된 후에 신문이나 잡지사의 기자들로부터 받은 질문 중 가장 많았던 것은 그 책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왜 그런 글을 쓰게 되었느냐 하는 질문인데 사실 한마디로 잘라서 말하기는 곤란한 질문이었다. 여러 가지가 복합된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많은 것 같아서 차제에 약간의 설명을 하려고 한다. 이것은 내가 보는 도올의 학문과 저작에 대한 소감이기도 하고 논평이기도 하다. 나는 처음 도올이 TV로 동양고전을 강의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걱정이 앞섰다. 왜냐하면 씨의 철학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익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대부분의 저작을 일독해 보았다는 이야기다. 내가 도올의 저작물들을 읽고 난 소감이라고 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도올이 책의 제목으로 삼은 것은 그것이 무엇이던지 그의 책 속에는 들어있지 않더라는 것이다. <여자란 무엇인가?>란 책 속에 여자는 없다. <노자 철학 이것이다>라는 책 속에 노자는 없다.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는 책 속에 불교는 없다.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라는 책 속에 태권도는 없다. 도올의 책은 하나같이 주제가 증발되어 행방불명된 미제 사건들이고 끝날 때까지 주인공이 안나오는 영화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표지를 확인해 보게 만든다. 이 책이 '여자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책이 맞는지, '노자철학 이것이다'하고 설명해 놓은 책이 맞는지 자꾸 제목을 확인하게 만든다. 도올의 책에서는 철학을 볼 수 없다. 그리고 철학자의 모습도 볼 수가 없다. 보이는 것은 자기의 머리 속에 꽉 찬 지식의 산더미를 어서 빨리 쏟아내서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고 압도시키고야 말겠다는 조갑증과 안달에 몸부림치는 약간 이상한 사람이 하나 보인다. 꺼내 놓은 것에 대해 놀라건 안 놀라건 그건 보는 사람 몫인데 그것조차를 참고 기다리지 못한다. '어때 나 대단하지? 놀랍지? 나 엄청 많이 알지? 너는 이런 것 알지도 못했지? 나 정말 공부 많이 했지? 어때? 그렇지? 나 엄청 잘났지? 맞지? 맞지? 맞지?' 계속 끊임없이 줄기차게 노골적으로 독자한테 '그래 니 잘났다'는 대답을 강요한다. 세계의 저명한 철학자나 사상가 중에 자기 책 속에 자기 자랑을 그토록 늘어놓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자기 자랑을 한마디 안 해도 펼쳐놓은 사변의 폭과 깊이에 저절로 탄복하고 감탄을 하게 만드는 게 대가의 철학이다. 글쓴 사람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얼마나 그 글을 쓰기 위해서 노심초사 노력을 했는지 어떤 방법으로 공부를 했는지 그건 자기 입으로 떠들어 자랑할 문제가 아니다. 10년 동안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가면서 공부를 했다고 자랑한다 하여 자기 주장에 조금의 신빙성이 더해지는 것도 아니고 어릴 때 공부를 얼마나 잘했는지 주섬거린다 하여 그게 논리의 뒷받침이 될 수 없다. 열 번 도전해서 열 번 낙방하고 열 한 번째 고시 공부하는 사람도 있고, 한번만에 척 붙는 사람도 있다. 진짜 기술 좋은 소매치기는 잘 안 잡힌다. 근데 열 번 떨어진 넘이 고시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제일 박사처럼 떠들고 수십 번 붙잡혀서 사흘두리 교도소에 들어오는 넘일 수록 말하는 것 들어보면 신의 손이다. 도올이 바로 그 짝이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것은 시험에 딱 붙는 것으로 보여주면 되고 소매치기 기술은 안 붙잡히고 해먹는 것으로 보여줄 일이다. 맨날 떨어지고 사흘이 멀다하고 잡혀오는 넘이 공부 자랑하고 기술 자랑하면 무슨 소용이냐 말이다. 노자 철학도 마찬가지다. 지가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고 연구를 수십 년 동안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바드 대학이나 동경대학에서 동양 철학을 얼마나 피눈물나게 교수하는 지, 그것을 어떻게 이겨 냈는 가를 수강생들이나 독자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제대로 알고 강의를 똑바로 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TV 강의를 보는 시청자들은 그가 말하는 노자 철학이 얼마나 가치롭고 정말 노자의 철학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인가가 중요한 관심사지 도올이란 사람이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알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물론 강의 본연의 내용이 훌륭할 때는 저런 정도의 학문적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공부한 과거의 역정과 그 방법론도 대단히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강의가 황당하고 내놓는 학문이 유치할 때는 그 공부의 과정이나 방법이란 것이 떠들어 자랑할 수록 얼마나 웃기는 것이 되느냐 말이다. 내가 보는 도올의 학문에 대한 논평은 이렇다. 도올은 여자를 모르면서 여자를 떠들고 노자를 모르면서 노자를 팔아먹고, 불교를 모르면서 절을 욕하고 기독교를 모르면서 교회를 비판하고 태권도를 모르면서 태권도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기를 모르면서 기철학을 만든다. 나는 도올이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알고 떠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한가지만 보자. <노자 철학 이것이다>라는 책 속에 노자가 어디 있고 노자 철학이 어디에 숨었더란 말인가? 그 책에는 전 세계의 철학이 전부 다 나온다. 아니 도올이 알고 있는 철학이란 철학은 죄다 나온다. 등장하는 인물과 거론되는 철학, 사상가만 해도 수백 명이 넘는다. 아마 한 권의 책 속에 가장 많은 주인공이 나오는 책으로 기네스 북에 들어갈 수 있다. 그 책에 이름이 안 나오는 철학자, 사상가 또는 현대의 학자들은 팔불출이다. 주인공이 천명쯤 나오는 두 시간 짜리 영화를 본다고 생각하면 그게 바로 <노자철학 이것이다>라는 책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사람들은 스쳐 지나간 주인공들 얼굴도 못 외운다. 하리우드와 홍콩과 충무로의 모든 스타들이 총동원된 영화를 하나 만들면 내용 불문하고 화제가 될 것이다. 아마도 관객들은 전 세계의 모든 스타들을 한편의 영화에서 보았다는 점에서 압도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영화라 말할 수 없다. 스타들 사진집이다. 이게 도올의 철학이다. 그 많은 스타들을 모조리 끌어 모았다는 능력만으로 유명해진 감독이다. 그러나 내용은 아무 것도 없다. 주인공이란 노자는 어디 숨었는지 찾지도 못한다. 노자 철학을 설명하는데 수백 명이 넘는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총동원된다고 하면 그건 노자가 아니다.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는 책을 읽으면 거기에도 불교는 사라지고 불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온갖 잡소리만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렇기만 하면 아예 책이 안 팔릴텐데 그러함에도 도올의 책은 상당한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고 열성적인 지지층을 갖고 있다. 이건 왜 가능했을까? 도올의 강박적인 콤플렉스의 작용이 의외의 효과를 거둔 탓으로 본다. 즉 학계에서 자기를 밀어내고 주류로 또아리를 틀고서 빈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학계의 기득권층과는 무언가 달라야 되겠다. 달라야만 한다. 나는 기어코 다르고야 말겠다는 오기와 치기가 거의 본능화된 강박관념이 상당히 해괴하고 엉뚱한 논리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호화찬란한 배역(책에 거론되는 인물들)과 배경(방대하다 못해 어지러운 지식)의 도움으로 어떤 독자들 - 주로 젊은 학생들 - 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보통 사람의 상식을 너무 태연하게 자주 깨트린다. 그것을 그럴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황당한 논리로 치장하여 '내가 잘못 알았었구나'하는 각성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도올은 독자들을 메저키스트로 만든다. 도올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마조히즘에 중독된 사람들이다. 자기의 상식이 깨어져 나가는 것에 당혹과 혼란을 겪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후련함과 통쾌함을 느끼는 것이다. 마치 마약상에 매달리는 중독자와 같다. 끊임없이 자기의 상식을 깨부수어서 그 아픈 쾌락을 맛보게 해주기를 원하고 도올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건전한 상식이 그런 식으로 자꾸 깨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올바른 상식이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도올로 해서 깨어지고 의심스럽고 수상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도올이 나서기만 하면 노자도 이상한 노자로 둔갑을 해버리고 공자도 희한한 공자로 바뀌어 버린다. 더 두고보면 사이코 부처도 만들고 변태적인 예수도 만들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것을 '철학을 대중화한' 공로를 내세워 방치할 수만은 없다. 더 이상 내버려두면 그 과가 공을 훨씬 앞지르게 될 것이다. 대중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강의에 매료되는 사람이 늘면 늘수록 그의 해악스러운 파괴력은 더욱 가공스러운 것으로 변해갈 것이다. <노자를 웃긴 남자>는 그러한 사회적인 병리현상에 대한 충격요법이었다. 비뚤어진 대한민국의 대중 철학에 대한 경고장이기도 했다. <노자를 울린 남자>는 그것의 정당성에 대한 확인이고 완결이다. 내가 보는 도올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비결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다. 정치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적을 만들고 적과 싸우는 것으로 대중의 지지와 사랑을 얻는 노련한 흥행사이다. 나는 그가 강의나 저술 속에서 만용에 가까운 독설과 폭언을 퍼붓는 것은 나름대로 계산을 끝마친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가 적으로 삼는 것은 대개 보통 사람들이 건들이기를 기피하는 언터쳐블한 대상들이다. 철옹성 같은 대학의 교수와 지식층,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론, 교회와 절과 같은 거대한 교단 등이 그가 지렛대로 삼는 적이다. 그의 학문적 바탕은 비록 시시할지라도 그의 적은 결코 시시한 상대들이 아니다. 그런 경향은 그가 다루는 학문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도올이 노자를 시대의 화두로 삼고 나온 이유는 '노자야말로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르고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덤빈 것이다. 공자, 예수, 부처 등등 대단히 어마어마한? 인물의 사상이나 기철학 내지는 한의학과 같은 고차원의 학문을 주로 취급한다. 그래서 그 학술적 가치와 연구의 성과와는 관계없이 다루는 주제의 거창함을 가지고 대중에게 최면을 거는데 탁월하고 노련한 기술자이다. 대단히 심오하고 어렵고 거창한 주제와 거대하고 막강한 적들을 상대함으로서 정의롭지만 고독하고 핍박받는 지식인의 이미지를 교묘하게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런 엄청난 주제를 다루는데 대한 경외감과 거대한 적을 상대로 싸우는 용기에 대한 찬사는 주제의 난해함과 적의 힘이 크면 클수록 비례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그것을 본능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지능의 소유자이다 물론 이러한 지능이 학문에는 별로 소용이 없음은 물론이다. 도올은 한사람의 적을 만드는 것으로서 한사람의 지지자를 얻는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열렬한 지지자와 증오심으로 가득 찬 적을 동시에 가질 수밖에 없다. 그의 지지자들 중에서 소수의 열성적인 도올교 신자들은 그가 공격하는 적을 평소에 미워하던 사람들이다. 도올의 '폭발적인 인기'와 정비례하는 '파괴적인 혐오'가 언제나 같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가 지지자를 얻는 방법이 그러한 이상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내가 도올의 방법을 그대로 흉내내어 보는 것은 <노자를 웃긴 남자>가 처음이고 <노자를 울린 남자>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불행은 적이 그렇게 위대하지 않다는 데 있다.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른 적이 개그맨이라는 것은 시대를 잘 못 태어난 구름의 슬픈 운명이다. 2001년 1월에 벽운 이 경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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