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마르코폴로와 쿠빌라이칸

이름없는풀뿌리 2021. 10. 9. 22:02

마르코 폴로(Marco Polo) 출생 : 1254년 9월 15일,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출생으로 추정 사망 : 1324년 1월 8일(69세),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에서 병사 후 Church of San Lorenzo(북위 45.2613° 동경 12.2043° )에 매장 직업 : 작가, 상인, 탐험가 언어 : 이탈리아어, 베네토어, 라틴어 국적 : 베네치아 공화국 종교 : 가톨릭 활동기간 : 1269년 ~ 1305년 장르 : 탐험 기행 문학 부모 : 니콜로 폴로(Niccolo Polo, 1230~1294), 니콜레 안나 데푸제(Nicole Anna Defuseh, 1234~1308) 배우자 : 도나타 바도에르(Donata Badoer, 1273~1354) 자녀 : 3녀 첫째딸 : 판티나 폴로(Fantina Polo, 1297~1368) 둘째딸 : 벨렐라 폴로(Bellela Polo, 1299~1358) 막내딸 : 모레타 폴로(Moretta Polo, 1301~1316) 친지 : 친할아버지: 니콜라 마페오 폴로(Nicola Maffeo Polo, 1209~1261) 작은할아버지: 마르코 마테오 폴로(Marco Matteo Polo, 1212~1240) 이복 숙부: 마테오 폴로(Matteo Polo, 1248~1265) 이복 숙부: 마페오 폴로(Maffeo Polo, 1252~1309) 주요 작품 : 《동방견문록》(루스티치아노 작가의 대필) 영향 : 크리스토페로 콜룸부스와 바스쿠 다 가마와 페 르디난드 마젤란이 모두 각각 그의 영향을 받음. 마르코 폴로(이탈리아어: Marco Polo, c.1254년 9월 15일 – 1324년 1월 8-9일)는 이탈리아의 탐험가로 17세 시절(1271년)에 고향을 떠나 아시아를 탐험하고 1292년(38세)에 향리로 돌아왔다. 생애 마르코 폴로는 1254년 9월 15일,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베네치아에서 무역상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니콜로 폴로는 아직 마르코 폴로가 출생하기 5개월 전에 실크 로드 원정을 떠나서 1259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으며 마르코 폴로의 삼촌인 마페오 폴로와 1260년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하여 킵차크 칸국, 부하라를 거쳐 쿠빌라이 칸의 조정에 머무른 뒤 1269년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 아버지를 아직 한 차례도 목도치 못한 어린 시절의 마르코 폴로는 1261년 조부 상(할아버지 장례)을 치렀고, 1268년 계조모 상(새할머니 장례)을 치렀으며 그 후 1269년 당시 15세였던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 니콜로 폴로(당시 39세)와 이복 숙부 마페오 폴로(당시 17세)를 베네치아에서 처음으로 함께 상봉하게 되었다. 그 후 1271년 당시 17살 된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 니콜로 폴로(당시 41세)와 숙부 마페오 폴로(당시 19세) 이 둘과 함께 모두 다시 본격적으로 중국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그 후 1275년 11월에서 1292년 2월까지 마르코 폴로는 관리로서 원나라를 위해 일하면서 17년 동안 중국의 여러 도시와 지방을 비롯하여 몽골·부르마·베트남까지 다녀왔다. 그 후 1292년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그 후 제노바와의 해전에서 가 리 함대에 민간 종군원으로 예속되어 출전하였지만 결국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재탈출하여 1295년에 고향으로 재귀환을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그의 아버지 니콜로 폴로는 고향 베네치아에서 이미 1294년에 병으로 하세하였다. 마르코 폴로 그는 제노바 전쟁 포로 시절 1년간 감옥 생활을 하면서 아시아 국가 거류 시절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구술로써 들려 주었는데, 이때 작가 루스티치아노(Rusticiano, 루스티켈로 다 피사)가 그의 해박한 발언 및 구술 관련 여행담을 기록한 것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동방견문록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 그가 여행한 지역의 방위와 거리, 주민의 언어, 종교, 산물, 동물과 식물 등을 하나씩 기록한 탐사 보고서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일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내용의 진정성에 대한 비판도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의 문화인 한자(漢字), 차(茶)에 대한 언급도, 뿌리깊은 악습인 전족(纏足)에 대한 비평도 없다. 또한 칼리프가 바그다드의 기독교인을 학살하려고 했다면서 이슬람교가 마치 다른 종교를 탄압한 종교라고 비판했다. 일본에 대한 언급도 “지팡구”는 황금으로 가득한 땅이라고 기술하였는데, 이는 당시 서구 상인들의 입맛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당시 아랍인에게 황금향으로 알려진 나라는 지팡구가 아닌 “실라”(아마도 신라)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즉, 동방견문록은 서구인들에게 동방에 대하여 자세하게 언급한 긍정적인 역할은 했지만, 편견과 허구도 있다는 점에서 비평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동방견문록의 허구적인 면은 학자들로부터 마르코가 실제로는 동방을 여행한 적이 없으며, 동방견문록 또한 자신이 실제로 여행하고 겪은 일을 쓴 기행문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들은 것이거나 자신이 지어낸 것이라고 추정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동방견문록이 허구라고 추정하고 있다. 1.만리장성, 중국의 기술이나 관습 등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미흡한 점. 2.동방견문록에는 마르코가 쿠빌라이 칸을 알현했고, 황제의 칙사를 지냈다고 하나 중국 문헌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 3.동방견문록에 언급되어 있는 마르코의 여행 경로는 실제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점. 4.기행 중에 자기 자신의 감정이 전혀 서술되지 않았다는 점. 5.여행 중 마르코 본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6.본인의 기행문이라고 보기엔 내용 구성이 어색하다는 점.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 여행 자체는 분명한 사실이며, 이러한 의구점은 마르코 폴로가 일부 지역에 대해 자신의 바람과 더불어 입소문을 함께 사실로써 기록해 서술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현재 학계에서 해당 내용은 여전히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나, 여전히 동방 여행에 대해서는 사실이라고 여기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마르코폴로(Marco Polo) 출생 : 1254경, 베네치아 또는 베네치아령 달마치야 쿠르촐라 사망 : 1324년 1월 8일 국적 : 이탈리아 요약 : 1271~95년에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여행했으며 17년 동안 중국에 머물렀다. 이 경험을 기록한 여행기 〈밀리오네〉는 흔히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리학의 고전이 되었다. 마르코의 길을 닦아준 것은 아버지인 니콜로와 삼촌 마페오의 선구적인 노력이었다. 폴로 집안은 오랫동안 중동 지역과 교역을 하여, 상당한 재산과 명성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 니콜로, 마페오, 마르코는 교황 특사의 편지를 갖고 몽골을 향해 떠났고, 1277년 초 터키를 통과했으며, 육로를 통해 몽골에 가서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성유와 교황의 편지를 그들의 후원자인 쿠빌라이 칸에게 바쳤다. 그후 약 16년 동안 폴로 가족은 황제의 영토, 특히 카타이에서 살았다. 이후 마르코 폴로가 기록한 풍성한 새로운 지리적 정보는 유럽인들이 대규모로 대양을 항해한 15세기말과 16세기에 널리 이용되었다. 1. 개요 1271~95년에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여행했으며 17년 동안 중국에 머물렀다. 이 경험을 기록한 여행기 〈밀리오네 Il milione〉는 흔히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Travels of Marco Polo〉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리학의 고전이 되었다. 2. 폴로 집안 마르코의 길을 닦아준 것은 아버지인 니콜로와 삼촌 마페오의 선구적인 노력이었다. 폴로 집안은 오랫동안 중동 지역과 교역을 하여, 상당한 재산과 명성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 폴로 집안이 실제로 귀족 가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베네치아처럼 공화주의와 중상주의의 전통을 가진 도시에서는 귀족 신분이 중세의 전형적인 의미를 거의 잃어버렸기 때문에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국제무역). 폴로 가족은 통찰력이 있고 기민하며 용감했던 것 같다. 1260년경에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정치적 변화를 내다보고 그곳에 있는 부동산을 현금으로 바꾸어 보석에 투자한 뒤, 볼가 강으로 떠났다. 이곳에서는 몽골 제국의 서부 영토를 다스리는 베르케 칸이 계절에 따라 사라이나 불가르에 머무르고 있었다. 폴로 가족은 몽골 제국의 이 지방 궁정에서 수완을 발휘하여 재산을 2배로 늘린 것 같다. 그들은 정치적 사건 때문에 귀국길이 막히게 되자, 동쪽의 보하라로 갔다가 1265년에 몽골 제국의 수도로 황제의 여름 주거지였을 상도(上都: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시에 나오는 도원향으로, 내몽골 자치구 뒤룬 현[多倫縣] 서북에 있었음)에서 여행을 끝냈다. 위대한 황제 쿠빌라이 칸(세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이들은 결국 쿠빌라이가 교황에게 보내는 사절이 되어 유럽으로 돌아갔다. 쿠빌라이는 '7개 학문에 정통한' 지식인 100명을 보내달라고 교황에게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이들에게 주었다. 이들은 또한 선물도 가져왔고, 예수가 부활할 때까지 누워 있던 예루살렘의 성묘에서 타고 있는 등잔의 기름을 조금 갖고 돌아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원). 마르코는 1254년경에 태어났다(이 연대는 그의 생에 일어난 주요사건들의 연대가 그렇듯이 추정에 불과함). 베네치아에서 보낸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라틴어를 거의 또는 전혀 배우지 않은 것은 확실한 듯하다. 그는 15(또는 16)세 때인 1269년에 동방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났다. 3. 마르코의 동방 여행 니콜로와 마페오가 돌아온 것은 교황(클레멘스 4세)이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그들은 새 교황이 선출되기를 베네치아에서 끈기있게 기다렸지만, 2년이 지났는데 후임자가 선출되지 않았다. 초조해진 폴로 가족은 마르코를 데리고 다시 여행길에 나섰다(1271). 팔레스타인에서 교황 특사인 피아첸차의 테오발도는 몽골 제국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들에게 주었다. 폴로 가족은 다시 여행길에 오른 지 며칠 지나기도 전에 친구 테오발도가 교황(그레고리우스 10세)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아크레로 돌아가서, 정식 신임장을 받고 2명의 수사와 동행하게 되었다. 이 소규모 원정대는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러나 2명의 수사는 곧 용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폴로 가족만 여행을 계속했다. 이 여행가들은 아크레에서 아야스(마르코의 글에서는 '라이아초', 즉 지금의 터키 남동부의 이스켄데룬 만 또는 알렉산드레타 만에 있는 유무르탈리크)로 갔다. 1277년초에 이들은 아마 오늘날 터키 동부에 있는 에르주룸과 오늘날 이란 북부에 있는 타브리즈를 통과한 다음, 산적들이 출몰하는 황량한 사막을 가로질러 페르시아 만 연안의 호르무즈 해협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폴로 가족은 인도와 그 너머까지 바닷길로 항해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육로를 통해 몽골 제국의 수도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곧 다시 길을 떠나 오늘날 이란 동부에 있는 호라산 지역을 향해 '지독하게 건조한' 사막을 가로질렀다. 그들은 차츰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좀더 살기 좋은 지역에 이르렀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의 바다흐샨(발라시안)은 이들을 기쁘게 했다. 마르코는 1년 동안 그곳에 머물자고 제안한 것 같다. 오랜 질병(아마 말라리아)은 이 지역의 온화한 기후로 완전히 나았다. 마르코는 또한 이 시기에 남쪽 지역(아프가니스탄의 다른 지역, 힌두쿠시 산맥에 있는 카피리스탄, 지금의 파키스탄에 있는 치트랄, 그리고 카슈미르 등)을 방문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가 도중에 모은 정보만으로서는 그가 어느 지역을 지났으며 무엇을 묘사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폴로 가족은 바다흐샨을 떠나 파미르 고원을 향해 바한(보칸) 계곡을 올라갔다. 그들은 여행 계획에 따라 결국 파미르 고원을 횡단했는데, 이 일정표는 오랫동안 많은 논의와 추측의 대상이 되었다. 산맥의 북동쪽으로 내려간 그들은 오늘날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彊維吾爾自治區]에 있는 카스가르(지금의 카스)에 도착했다. 이제 폴로 가족은 실크로드(비단길)에 올라 있었고, 그들의 진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과 동쪽에 있는 오아시스(야르칸드, 허톈[和], 카르칸, 로프노르 호)를 따라 추적해 갈 수 있다. 이 오아시스들은 오늘날 간쑤 성[甘肅省]의 둔황[敦煌]인 중국 국경 지방의 사주(沙州)로 가는 길에 징검돌처럼 놓여 있다. 폴로 가족은 사주에 도착하기 전에 주로 이슬람 교도가 살고 있는 지역을 여행했고, 그리스도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 교도, 불교도, 마니교도, 조로아스터 교도도 만났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전혀 다른 문명이 지배하는 드넓은 간쑤 성(마르코는 '탄구트'라고 불렀음]에 들어갔다. 폴로 가족의 여행 계획에 따르면, 그들은 아마 쑤저우[肅州]와 간저우[甘州]에 이른 다음, 닝샤[寧夏] 지역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들이 몽골 제국의 여름 수도인 상도로 곧장 갔는지, 돌아서 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1275년(최근 일본 학자 오타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274년) 폴로 가족은 다시 몽골 궁정에 들어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성유와 교황의 편지를 그들의 후원자인 쿠빌라이 칸에게 바쳤다. 4. 마르코의 중국 체류 그후 16(또는 17)년 동안 폴로 가족은 황제의 영토, 특히 카타이 (Cathay:지금의 중국 북부)와 망기(Mangi:또는 Manzi, 지금의 중국 남부)에서 살았다. 이들은 황제가 여름 주거지인 상도에서 겨울 주거지인 대도(大都:지금의 베이징[北京])로 옮길 때 함께 따라갔을 것이다. 불행히도 마르코의 책 〈밀리오네〉는 부분적으로만 전기이자 자서전이다. 따라서 이 책만 보고는 폴로 가족이 그동안 어디에 갔고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몽골족이 한족을 의심했기 때문에 외국인을 많이 고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폴로 가족이 이 잡다한 사회에 가장 훌륭하고 성공적으로 적응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정확히 얼마나 성공적이었을까? 그들은 어떤 특별한 능력으로 쓸모있는 존재가 되었을까? 이런 점들은 몇 세기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뚜렷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와 삼촌은 기술직에 고용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사이안푸' (지금의 샹양[襄陽]) 포위 공격 때 군사 고문으로 활약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기록은 일관성이 없다. 마르코의 말에 따르면, 이 도시는 아버지와 삼촌의 설계도에 따라 만든 '거대한 투석기'(돌이나 화살 같은 날리는 무기를 쏘는 기계 장치) 덕분에 결국 함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스럽다. 마르코 폴로는 젊은 나이(20세 정도)에 중국에 도착했다. 그는 중국어를 전혀 몰랐지만, 당시 동아시아에서 쓰이던 많은 언어들 가운데 일부(아마 몽골족이 사용하던 튀르크어, 아랍어에 동화한 페르시아어, 몽골어, 위구르 튀르크어)를 할 줄 알았다. 쿠빌라이 칸은 낯선 나라들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기 때문에 마르코를 총애했다. 황제는 자주 그에게 현지조사 임무를 주어 몽골 제국의 먼 지역으로 그를 파견했다. 마르코는 이런 임무를 띠고 중국 남서부의 윈난 성[雲南省]에 간 적도 있었고, 윈난 성을 지나 미얀마의 타가웅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중국 남동부 지역을 방문하여, 몽골족이 얼마 전에 정복한 인구 밀집 지역과 '킨사이'(지금의 항저우[杭州])를 열정적으로 묘사했다. 마르코가 원(元) 제국을 제2의 고국으로 여겼다는 증거는 풍부하게 남아 있다. 마르코는 개인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기록에는 공백이 많지만, 낭만적인 영웅 숭배자들은 이 공백을 열심히 채워넣었다. 그들은 마르코가 공주들을 매혹시키고 여러 지방을 다스린 훌륭하고 젊은 궁정 신하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마르코 폴로 신화는 몇 세기 동안 널리 퍼졌고, 소설가와 영화 제작자 및 극작가들에게 주제를 제공한 적이 많았다. 반면에 좀더 냉정한 비평가들은 당시의 중국 기록에 마르코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그러나 그는 중국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렸을까? 16, 17세기에 활동한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리 마터우[利瑪竇]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18세기 화가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는 랑 시닝[郞世寧]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중국 기록에 나오는 이런 이름들이 바로 마테오 리치나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은 또한 마르코의 기록이 황제 측근들의 비공식 자문 위원회에서 주워 모은 정보라기보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 같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아마 그 중간일 것이다. 마르코는 황제를 위해 임무를 수행한 것 이외에 소금 및 전매행정에 관해서도 재능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정부의 이 부서에서 책임있는 지위에 있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밀리오네〉의 일부 판본에 따르면, 마르코는 1282~87년에 양저우[揚州:간쑤 성 소재]라는 도시를 다스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거의 믿을 수 없고, 한 구절에서 추측한 것일 뿐이다. 5. 베네치아 귀환 1292년경(오타기의 주장에 따르면 1290년)에 몽골족의 한 공주가 바닷길로 페르시아에 가서 아르군 칸의 왕비가 될 예정이었다. 폴로 가족은 공주를 수행하여 페르시아로 가겠다고 제의했다. 쿠빌라이 칸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허락을 내렸다. 당시 쿠빌라이 칸은 거의 80세에 가까웠고, 그가 죽으면(그결과 정권에 변화가 일어나면) 소규모 집단으로 고립된 외국인들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그들이 고향 베네치아와 가족들을 보고 싶어한 것도 당연했다. 600명의 궁정 신하와 선원을 거느린 공주와 폴로 가족은 14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취안저우[泉州] 항구를 떠나 남쪽으로 항해했다. 함대는 참파('참바', 지금의 베트남)에 들렀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섬과 말레이 반도에도 들렀다. 수마트라 섬(작은 자우아)에서 5개월 동안 머문 것은 우기의 폭풍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마르코는 북극성이 수평선 밑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후 함대는 니코바르 제도(네쿠베란) 근처를 지나, 실론(세일란) 섬에서 다시 육지에 닿았다. 중국 배들은 그후 인도 서해안과 페르시아 남쪽을 지나 호르무즈에 닻을 내렸다. 그후 원정대는 호라산으로 갔지만, 아르군 칸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마흐무드 가잔에게 공주를 넘겨주었다. 폴로 가족은 결국 유럽을 향해 출발했지만, 이 시점에서 그들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그들은 아마 타브리즈에 몇 개월 머물렀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들은 몽골을 떠나 그리스도교도의 땅인 트레비존드에 도착하자마자 힘들게 벌어들인 수입을 거의 다 빼앗겼다. 그들은 좀더 지체한 뒤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베네치아에 도착했다(1295). 그들이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라고 여긴 친지와 이웃들이 그들을 극적으로 알아본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는 폴로 전설의 일부이다. 6. 평가 마크로에 대한 논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극적인 부침을 겪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천재이며, 가장 양심적인 관찰자이고, 쿠빌라이칸의 궁정에서 출세한 관리이자 위대한 몽골족 통치자들이 다스리는 범세계적 아시아에 정통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를 제 자랑만 늘어놓고 자신을 너무 과대 평가하는 허풍쟁이, 항구와 시장에 떠도는 소문을 그대로 믿는 떠돌이, 교양이나 상상력이 거의 없고 유머 감각은 전혀 없는 인물로 여겼으며, 특히 중국의 만리장성과 차(茶), 극동 지방의 표의문자에 대해 그가 언급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좀 더 균형잡힌 견해를 가지려면 많은 요소들, 특히 원문에 얽힌 문제와 중세의 세계관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근대의 학문과 연구는 그의 작품에 새로운 깊이와 넓이를 주었다. 마르코가 남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는 대부분 근거가 없거나 왜곡되어 있지만, 직접 보고 들은 것은 충실하게 보고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어쨌든 마르코의 설명은 중세인들의 마음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었다. 서양의 지평선이 넓어짐에 따라 마르코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졌다. 일본에 대한 묘사는 1492년에 저물어가는 해를 향하여 여행을 떠난 콜럼버스에게 뚜렷한 목표를 설정해주었고, 향신료 생산 지점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서양 사람들로 하여금 그 지역을 찾아나서 향신료 교역에서 오랫동안 계속된 아랍 상인들의 독점 상태를 깨뜨리도록 고무했다. 마르코 폴로가 기록한 풍성한 새로운 지리적 정보는 유럽인들이 대규모로 대양을 항해한 15세기말과 16세기에 널리 이용되었다. 〈밀리오네〉 편찬 마르코가 동방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경쟁 관계에 있던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1298). 마르코는 베네치아 해군 함장의 고문관으로 참전했다가 9월의 크루조라 해전에서 패함으로써 포로가 되어, 결국 제노바에 있는 감옥에 갇혔다. 이 감옥에서 절호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베네치아 출신의 여행가가 피사 출신의 포로인 루스티첼로(또는 루스티차노)를 만난 것이다. 10년쯤 전에 멜로리아 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힌 것으로 여겨지는 루스티첼로는 저명한 모험소설 작가이며 당시 가장 인기있는 주제인 기사도와 그 전승의 전문가였다. 마르코는 아시아에서 지낸 25년에 대해 보고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베네치아어나 프랑스-이탈리아어(13, 14세기에 유행한 이상한 복합어)에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집필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루스티첼로가 곁에 있기 때문에, 마르코는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쓰게 할 수 있었다. 채택된 언어는 프랑스-이탈리아어였다. 이리하여 위대한 책이 한 쪽 완성되었다(기행문학). 다행히 마르코는 곧 풀려나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후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법률 서류의 증언을 통해 부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그는 그리 많지 않은 재산을 관리하면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70세 때 세상을 떠났다. 마르코 폴로가 죽을 때 책에서 날조한 '거짓말'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자신이 실제로 본 것의 절반도 채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대꾸했다. 그가 유언장에서 '타타르인 노예' 한 명을 해방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노예는 아마 동아시아에서 베네치아까지 줄곧 마르코 폴로를 따라다녔을 것이다. 〈밀리오네〉의 성격과 내용 마르코 폴로의 실제 성격은 좀처럼 파악하기 어렵다. 그에 대해 알려져 있는 것은 사실상 그의 책에서 추론한 것뿐이다. 마르코가 책을 구술했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이고, 많은 부분이 구두로 한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루스티첼로가 줄곧 그같은 수동적인 입장에만 머물러 있었을까?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보면, 특히 전투 묘사에서는 루스티첼로가 자신의 성격과 자신에게 익숙한 표현법을 내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 자체는 당장 성공을 거두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지리학자인 조반니 바티스타 라무시오는 "몇 개월도 지나기 전에 이 책은 이탈리아 전역에 퍼졌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들은 이 책을 역사나 지리 또는 기행문이 아니라 환상적인 모험소설로 읽었다. 이 모험소설에서는 쿠빌라이 칸이 아서 왕과 같은 부류에 속해 있고, 중국은 기사들이 꿈꾸는 환상적인 곳에 있는 새로운 고장이었다. 이 모든 일은 인쇄술이 발명되기 오래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전문적인 사본 필경사나 아마추어들이 수십 부씩 책을 베꼈고, 그 과정에서 의역을 하거나 각색하기도 했다. 또한 이 책에 나오는 많은 낯선 이름들은 사본을 달리할 때마다 다르게 전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오늘날의 해설자들은 원본 재구성이라는 과업에 직면하여 포기하고 만다. 사실 〈밀리오네〉의 믿을 만한 원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날에는 수많은 언어와 방언으로 씌어진 갖가지 형태의 필사본이 약 140종류나 남아 있다. 이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자료들은 중세부터 내려온 가장 끈질긴 문헌학적 문제를 대표한다. 마르코 자신도 생애의 마지막 20년 동안 여러 권의 사본을 만들면서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거나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편집자들, 예를 들면 원문을 라틴어로 훌륭하게 번역한 탁발수사 프란체스코 피피노는 마르코의 서술이나 해석의 많은 부분이 경건하지 못하거나 거의 이단에 가깝다고 생각하여 원문을 심하게 삭제하거나 수정했다. 마르코 폴로는 이 책을 직접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방대한 우주 구조론(아시아에 관한 모든 논의에 종지부를 찍을 책)으로 생각한 것 같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이 〈세계의 묘사 Divisament dou Monde〉였음은 의미심장하다. 마르코는 교조적인 야망을 위해 개인적인 회상을 많이 희생했다. 여행과 그 과정 및 계절에 관한 세부 묘사는 생략된 경우가 많다. 개인적 감정이 담기지 않은 객관적인 거리에서 강력한 광안 렌즈를 통하여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광경들을 관찰했다. 〈밀리오네〉에서 마르코는 정해진 여행 계획표를 따르고 있지만, 샛길로 들어가 자신이 아니라 친척이나 친지가 방문한 곳들을 묘사한 경우도 많다. 그가 주제에서 벗어난 대표적인 예는 메소포타미아, 그리스도교도를 암살한 이슬람교도 집단과 그들의 성채, 사마르칸트, 시베리아, 일본, 인도, 에티오피아,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묘사이다. 〈밀리오네〉가 그 고장 고유의 일상어를 이용한 교훈문학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면 이 작품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문학작품의 예는 중세에 많이 볼 수 있다. 〈밀리오네〉라는 대중적인 제목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터무니없이 과장된 이야기'라는 개념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폴로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별명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별명은 아에밀리오네(Aemilione:큰 에밀)가 와전되어 '밀리오네'만 남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시인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이 걸출한 동시대인에 대해 끝까지 침묵을 지킨 것은 의미심장해보인다. 단테는 이 책을 거짓말로 꾸며낸 이야기이며, 위험한 이단적인 이야기로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마르코는 당시의 정설에 따르면 아무도 살 수 없는 적도 아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묘사했는데, 이것은 특히 놀랍게 여겨졌을 것이다. 동방견문록(Delle meravigliose cose del mondo, 1496) 원제《백만가지 이야기》, 《세계 불가사의의 서(世界 不可思議의 書)》 (이탈리아어: Il Milione, 프랑스어: Livres des merveilles du monde 또는 갈리시아어: Le Divisament dou monde)는 13세기 루스티켈로 다 피사가 마르코 폴로의 아시아 여행담을 기록한 책으로, 흔히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으로 불린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동방견문록》의 신빙성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이 책은 마르코 폴로가 직접 체험한 것을 쓴 것이 아니라, 다른 여행자들의 말을 듣고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을 집필한 사람은 당대의 전기소설 작가였던 루스티켈로 다 피사였다. 전승에 의하면 루스티켈로는 아직 마르코 폴로가 자신과 함께 전쟁 포로 수용소 감옥에 있었을 때 그의 구술과 발언을 기초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 피터 잭슨 (1998). “Marco Polo and his 'Travels'”.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61 (1): 82-101. 《동방견문록》은 마르코가 여행한 지역의 방위와 거리, 주민의 언어, 종교, 산물, 동물과 식물 등을 하나씩 기록한 탐사 보고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1권은 서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2권은 쿠빌라이 칸 치하의 원나라, 3권은 일본·동남아시아·남아시아·아프리카에 대한 내용이다. 하지만, 내용의 진정성에 대한 비판도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의 문화인 한자(漢字), 차(茶)에 대한 언급이 없다. 또한 칼리프가 바그다드의 그리스도인을 학살하려고 했다면서 이슬람이 마치 다른 종교를 탄압한 종교인 양 헐뜯고 있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의 이슬람은 인두세만 낸다면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으며, 기독교는 유대교와 더불어 성지인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존중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일본에 대한 언급도 “지팡구”는 황금으로 가득한 땅이라고 기술하였는데, 이는 당시 서구 상인들의 입맛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당시 아랍인에게 황금향으로 알려진 나라는 지팡구가 아닌 “실라”(아마도 신라)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즉, 동방견문록은 서구인들에게 동방에 대하여 자세하게 언급한 긍정적인 역할은 했지만, 편견과 허구도 있다는 점에서 비평을 받는 것이다. * 무역활동으로 견문이 넓었던 아랍인들은 신라를 살기 좋은 곳으로 언급하는 기록을 남겼으며 일부는 신라에 정착해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처용설화의 처용을 아랍인으로 보는 설도 있다. 《우리역사의 수수께끼》1권/이덕일 외 공저/김영사 마르코 폴로 (Marco Polo, 2014 방송) 2014년 12월 12일 ~ 2016년 7월 1일 넷플릭스 방송, 와인스틴 컴퍼니 제작 연출 : 요아킴 뢴닝, 에스펜 산드베르그, 알리크 사하로프, 다니엘 미니한 外 극본 : 존 푸스코 출연 : 로렌초 리첼미, 베네딕트 웡, 암르 와케드, 조안 첸 , 피에르프란체스코 파비노 外 제작비 : 시즌당 9천만 달러 1. 개요​ 2014년 넷플릭스에서 제작하여 2016년까지 스트리밍 했던 미국 드라마. 제목대로 마르코 폴로의 시선에서 본 쿠빌라이 칸 시대의 몽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2016년 6월에 시즌 2를 시작했으나 그해 연말에 넷플릭스에서 시즌 3를 캔슬하며 총 2개 시즌으로 마쳤다. 본격 미국 내 동아시아계 배우들의 취업률을 높여주는 드라마 2. 특징​ 시즌당 총 제작비 9000만 달러(한화 대략 1000억)를 투입하여 제작한 초 거대 스케일의 드라마. 2014년 기준으로 이 작품에 맞먹는 제작비를 투입한 시리즈는 시즌당 8천만 달러 정도를 쓴 HBO의 《왕좌의 게임》뿐이다. 그런데 정말로 한편 한편의 영상을 보면 그 제작비가 어디 들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의상, 세트, 촬영지나 색감 등이 엄청나다. 스케일로 시청자 기를 죽일 작정인 듯. 그리고 선정성 면에서도 왕좌의 게임이랑 한 판 붙으려는 듯 베드신도 많이 나온다 (그러나 별 재미를 보지 못했는지 시즌 2부터는 난데없는 베드신 등장 횟수가 다소 줄어들었다.).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몽골, 남송, 베네치아 등 각각의 등장 세력이 등장인물들의 외모, 의상부터 촬영지, 세트와 화면의 전반적인 톤과 색상까지 매우 세밀하게 재현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심지어 지나가던 군인 엑스트라조차도 신분과 계급에 따라 각기 다른 복장과 갑주를 착용하고 있고, 카메라가 몽골을 비추다가 남송을 비출 때에는 순식간에 전혀 다른 세계임을 알 수 있을 정도. 게다가 보통은 서양에서 아시아권을 영상으로 재현하려다 보면 한국인들이 베트남식 모자를 쓰고 다니거나 야자수가 길거리에 무성히 존재한다든지, 중국인지 동남아시아인지 분간이 안 되는 그런 애매함이 존재하는데, 이 시리즈는 배우들이 동양계 미국인들이라 영어로 말하는 것만 빼면 전혀 그런 점을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영어 더빙이 잘 된 홍콩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로튼 토마토 등에서 리뷰를 찾아보면 주로 전문가 리뷰는 스토리의 중심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고 감정 이입이 힘들다며 혹평을 받고 있다. 시즌 1은 자그마치 토마토 지수가 24%밖에 되지 않는다. (https://www.rottentomatoes.com/tv/marco_polo/s01/) 시즌 2는 토마토 지수가 100%인 게 반전. 일반 시청자들의 평가는 시즌 1 92%, 시즌 2 93% 로 재미있게 봤다는 반응이 많다. 2015년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마르코 폴로의 스승인 백안이 쿠빌라이 칸 밑으로 들어가게 된 이야기를 그린 30분짜리 단편 영상이 발표되었다. 3. 줄거리​ 쿠빌라이의 몽골 제국이 남송을 끝장내기 직전의 혼란스러운 시기로, 마르코 폴로는 그의 아버지 니콜로 폴로를 따라서 쿠빌라이에게 선물을 바치고 무역을 허가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니콜로가 약속한 100명의 선교사는 애초에 100명을 모으지도 못했으나 그나마도 몽골로 오던 도중에 길이 험하다고 되돌아 가버렸고, 고작 도착한 것은 성유(聖油) 뿐. 쿠빌라이는 니콜로가 별볼일 없다며 추방을 시키려 하나, 니콜로는 다음에 다시 올 때까지 자기 아들을 하인으로 바칠 테니(!!!) 자신에게 계속 무역을 하게 해 달라고 한다. 마르코 폴로와의 짧은 대화에서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된 쿠빌라이는 이를 받아들이고, 마르코는 처음에는 죄수와 같은 취급을 받다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쿠빌라이 칸의 신뢰를 받는 인물로서 중국 여기 저기를 누비게 된다. 3.1. 실제 역사와의 비교​ 정통 사극이 아닌 김용의 무협지 소설 같은 역사를 소재로 한 장르소설 정도의 설정으로 역사와 비교 하면 매우 다르다. 복식, 건물 등 소품고증이 아니라 스토리 및 구성상의 고증을 따지기로 하면 첫 화부터 오류가 있다. 쿠빌라이와 칸의 지위를 놓고 싸우던 아리크부카는 실제 역사에서 쿠빌라이가 즉위하기도 전에 칸을 자칭하여 쿠빌라이와 치고받고 싸우다가 결국 패배하는데,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의 지지자들만 죽이고 아리크부카는 살려주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1화에서 아리크부카가 쿠빌라이의 신하처럼 등장하고, 배신이 이때부터 시작이다. 게다가 2화에서는 군대를 앞세워 서로 대치하다가 일기토로 쿠빌라이의 칼에 맞아 죽는다. 남송 쪽도 마찬가지로, 가사도는 속이 검고 호전적인 전쟁광 캐릭터지만, 병사들 중에 최고로 강한자를 뽑아다가 자기 당랑권으로 목을 꺾어 죽이는 무시무시한 무협고수의 면모로도 등장한다. 그 밖에도 뜬금없이 어쌔신이 쿠빌라이를 암살하러 왔다가, 백안(바얀?) 이라 불리는 눈먼 무협고수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격퇴당하고, 이 사람은 또 상대들의 잠입 기술을 보고 산중노인에게 배운 어쌔신들이 분명하다고 한다. 심지어는 가사도가 당랑권의 달인으로 나와 궁정에서 깽판을 치고 다니면서 점점 판타지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 고증과 스토리만 따지면 거의 기황후급 불쏘시개다. 즉 그냥 그 시기를 재구성하고 실존 인물들의 이미지를 차용한 판타지로서 보는 게 낫다. 다만 드라마의 창작으로 보여진 몇몇 장면이 의외로 역사고증대로인데, 대표적으로 8화에서 몽골 군사들이 포로들의 사지를 잘라 거대한 솥에다가 끓이는 장면이 있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이를 몽골인들의 잔혹함을 강조하려 한 픽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실제로 몽골 군사들이 가끔 벌였던 짓이라고 한다. 그렇게 적군 시신을 끓여서 나온 기름을 가지고 적군에게 화공을 가했다고 하니, 실제 역사가 후대의 상상력보다도 훨씬 더 잔혹하고 공포스러웠던 셈. 그 외에도 가령 말발굽으로 사람을 죽이는 방식은 징기스칸 최대의 숙적인 자무카나 왕족, 칼리프 정도는 되어야 받는 형벌이었다. 작중에서는 조세 관련 비리를 저지른 상가라는 일개 관료가 저 형벌을 받아 죽는데, 일개 듣보관리한테 내리기에는 격이 맞지 않는다. 몽골 풍습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매우 불길한 것으로 여겨서 목을 조르거나 몸을 짓밟아서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이는 형벌은 몽골 풍습에서는 대단히 명예로운 처형 방법이었다. 또, 명색이 후궁들 중 가장 격이 높은 귀비이자 가사도의 여동생이 하루아침에 창녀 신세가 되는 것도 그렇고. 수십 명의 여자가 몇 명의 남자들의 밤시중을 드는 장면 역시 하렘에 대한 서양인들의 왜곡된 생각을 보여주는 클리셰다. 전족의 경우 가사도가 자기 여동생에게 칸의 하렘에 들어가서 스파이나 암살 등 일을 지키고 여동생의 딸, 즉 공주를 일종의 인질로 잡는데 여동생이 일을 잘 못하자 일종의 형벌 비슷한 개념으로 숙부의 권위로서 공주에게 전족을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정작 가사도의 여동생은 전족을 하지 않은 채로 잘 논다. 물론 전족이 악습인 것은 맞지만, 전족이 당대 관념에서 형벌로 여겨지지는 않았으며, 남성이 과거시험을 보는 것과 동급으로 여겨졌다. 4. 등장인물​ 4.1. 마르코 폴로​ 베네치아의 평범한 청년으로 십수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따라 몽골 제국의 수도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로 오게 된다. 니콜로 폴로에 의해 쿠빌라이 칸에 바쳐져, 한순간에 쿠빌라이 칸의 하인이 된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탈출할 생각만 했지만 첫눈에 반한 코카친과 쿠빌라이 칸의 명령으로 백안에게 각종 무술과 몽골의 풍습을 배우게 되면서 점차 몽골의 일원이 되어간다. 쿠빌라이 칸의 명령으로 난공불략의 도시 상양을 정탐하고 쿠빌라이 칸에게 보수중이던 성벽을 보고 하여, 그곳을 집중공략하게 되지만 이는 가사도의 함정이었고, 몽골은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게 된다. 이에 책임을 추궁당해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부섭정이던 유섭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트리뷰셋을 제안하여 결국 상양 공략에 성공하게 된다. 처음부터 코카친에게 관심이 있고, 결국은 사랑하게 되지만 그 코카친은... 시즌 2 초반은 쿠빌라이의 명으로 메이린과 함께 남송의 영토였던 곳을 강줄기를 따라 돌아다니며 사라진 송의 어린황제를 찾는다. 송이 멸망하고 난 후, 강가에서 집단자살한 백성들의 시신을 보기도 하고, 남쪽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강도떼도 만나나, 메이린의 기지로 어떻게든 빠져나갔다. 어린 황제는 '백안'의 사숙인 '연'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며, 그녀를 따돌리면서 어린황제를 빼돌리고 쿠빌라이 앞에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아흐마드가 어린 황제를 반란군의 사기를 꺾는다는 명목으로 죽이라고 제안하고, 쿠빌라이는 그 말을 듣고 어린 황제를 자기 품에서 질식사시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마르코에게 들키고 만다. 그 일이 있은 후, 선조들의 영혼에게 가르침을 얻겠다는 명분으로, 쿠빌라이가 유일하게 마르코만을 대동해 산을 오른다. 마르코와 대화를 통해 쿠빌라이가 어린황제를 죽인 것을 어느 정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다. 둘의 주위를 맴돌던 늑대가 쿠빌라이를 덮치자, 마르코는 늑대를 죽여서 쿠빌라이를 구했는데, 쿠빌라이는 깨달음을 얻었다며 산을 내려간다. 이 사건이 시즌 마지막의 일과 더불어 수미상관으로 나타난다. 마르코는 이후 쿠빌라이의 신임을 제대로 얻어, 칸의 호위대만 착용하는 목장식을 하사받고 쿠빌라이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명을 받는다. 이후 진금왕자와 아흐마드가 카이두의 딸 쿠툴룬과 아들 오루스의 습격을 받는다. 호위대는 모조리 죽고, 둘의 타고 있던 말의 목을 오루스가 산 채로 베어버리는 바람에, 엎어진 말에 깔려 아흐마드는 다리가 부러지고 만다. 꼼짝없이 초원에 버려진 둘은 쿠빌라이의 구원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이 도착했어야 할 시기에 도착하지 않은 것을 보고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마르코가 서둘러 이들을 추적해 호위대의 시체를 발견하고 그들을 공격한 화살을 가져와 카이두의 짓임을 밝혀낸다. 카이두의 뒤를 캐던 중에 화약이 운반되고 있는 장소에서, 카이두 일행과 함께 진지에 있던 아버지 '니콜로 폴로'를 비암바와 함께 납치해, 그들의 계획을 들으러 했으나 실패했다. 아버지는 크리스트교를 온전하게 지키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몽골제국을 절멸시켜야 한다는 교황의 생각에 찬동하고 있었으며, 역으로 마르코에게 쿠빌라이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으니 처리하기도 쉬울거 아니냐며 배신을 종용하기도 했다. 이국에 버려져 스스로의 능력으로 일어서 칸의 신임을 얻은 것조차 비웃는 아버지에게 오만정이 다 떨어진 마르코는, 그렇다고 아버지를 차마 자기 손으로 죽일 수도 없어 그냥 놓아주고 만다. 쿠빌라이는 이 후 화공으로 카이두의 진영을 무너뜨렸고, 아버지 니콜로 폴로는 쿠빌라이의 군대와 싸우다가 마르코와 다시 만나지만, 마르코의 방조하에 다시 도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습을 쿠빌라이가 목격하게 되면서, 쿠빌라이는 마르코의 충성심을 다시 시험하게 된다. 시즌 종반에 코카친이 출산할 때 유일하게 게르안에 남편인 진금왕자 대신 마르코를 부르는데, 이때 마르코에게 그만 '아이가 진금의 아이가 아니다, 마굿간 지기의 아이를 임신하게 했다.'라는 말을 해버리는 통에 곤경에 처하게 된다. 평소 그녀의 상태를 걱정하던 마르코는 뜻밖의 사실에 혼란스러워하지만, 차브이가 뒤를 쫓지 않고 안전을 보장할 테니 비밀을 잊고 조용히 몽골을 떠나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가라고 명하여 그대로 털래 털래 몽골을 떠나던 중, 쿠빌라이를 습격하고자 이동하는 성전기사단 군대를 보고는 급히 돌아와 카이두에게 수세에 몰려있던 쿠빌라이를 구해서 그대로 말을타고 빠져나간다. 그리고 시즌3가 캔슬되면서 쿠빌라이와 마르코 폴로에 행방에 대한 뒷이야기는 없는 걸로 되었다. 배우인 로렌초 리첼미는 실제 이탈리아인으로 왠지 이탈리아어가 그럴 듯 하더라니, 배우 커리어 자체는 이탈리아 밖에서 더 유명하다고 한다. 4.2. 쿠빌라이 칸​ 칭기스 칸의 손자이자 몽골제국의 칸. 생긴 건 무섭기는커녕 동글동글해서 귀엽기까지 한데, 입만 열면 카리스마 폭풍이 몰아친다. 일단 성격 면에서 한성깔 하는 호전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는 면모들이 많고, 그가 다스리는 몽골인들도 거친 만큼 무자비하고 포악한 면모를 보이는 한편,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사상, 인종, 종교를 초월한 리더쉽과 관용을 보여주는 난해하고 복잡한 인물이다. 시즌 1에서는 상양을 공략하기 위해 가사도와 대립하며, 마르코 폴로에게 여러가지 시험과 시련과 임무를 안기는 주된 인물이다. 실크로드의 밤과 모래바람 등을 비범하게 표현한 마르코 폴로를 마음에 들어 했으며, 서양인의 관점으로 본 자신과 몽골에 대한 의견을 마르코로부터 듣곤 한다. 최측근이라도 반기를 드는 세력에게는 가차없이 잔인하다. 마르코의 도움으로 자기 동생인 아리크가 자기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것을 파악하고 나서는, 평원에서 일기토를 벌여 목을 날려버렸다. 의외로 여성에게 약한 구석이 있어 부인인 차브이에게 성질도 잘 내는 한편, 애처가처럼 부인 말도 잘 듣는다. 출신 성분과 상관없이 몽골인이건 외국인이건 신상필벌이 확실해, 임무를 완수했다 생각한 마르코에게 하렘과 거처를 제공했으며, '백안'이라는 무술 고수도 소개시켜 줘서 무예도 배울 수 있게 해준다. 진금에게 중국식 교육을 받게 해 동족으로부터 '중국 왕자'라는 비아냥을 듣게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중국문화와 몽골의 융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몽골제국은 여러 칸국으로 분열되었으니 그의 융화 정책은 실패한 셈. 마르코에게 상양 공략을 위해 성내 정탐을 맡겨 성의 약해보이는 부분을 알아냈으나, 이는 가사도의 함정임이 드러나 엄청난 병력손실을 입은 뒤, 마르코를 처형하려고 하나 책사 유섭의 희생으로 회생한 마르코에게 '너 대신 희생한 책사의 몫을 네가 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며 무시무시하게 뒤끝을 남겼다. 마르코는 그 뒤 상양의 성벽을 붕괴시킬 트레뷰셋(투석기) 개발 등에 박차를 기울이며 결국 자기 몫을 해냈다. 시즌 2에서는 마르코와 메이린을 시켜 사라진 어린 송나라 황제를 찾아오게 한다. 어린 황제는 마르코의 사부 '백안'의 사숙이었던 '연'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나, 마르코는 그녀를 따돌리고 어린 황제를 쿠빌라이 앞에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아흐마드가 송나라 잔당 세력의 기를 꺾는다는 명분으로 어린 황제를 죽이길 권유하고, 쿠빌라이는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직접 어린 황제를 자신의 품에서 껴안아 질식사시킨 후, 시체를 상양 성문에 목매달아 놓는다. 그러나 상양의 백성들은 어린 황제의 내걸린 시체를 보고는 폭도로 변하여 상양은 한동안 난장판이 되었다. 곤혹스러운 입장이 된 쿠빌라이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기 서자인 비암바로부터 사촌인 카이두가 족장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자신에게 도전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칸의 권위에 대한 정당성을 얻기 위해 '쿠릴타이'에 참석하기로 한다. 하지만 카이두는 정정당당하게 쿠빌라이와 경쟁하려는 마음이 없었고, 자기 딸인 쿠툴룬과 아들 바이를 시켜서 쿠빌라이 호위대 차림으로 위장해 다른 부족을 기습하고는, 쿠빌라이의 소행처럼 보이는 흔적을 남겨 부족 전체가 동요하게 만들었다. 마르코 폴로와 진금왕자, 비암바의 동분서주로 아흐메드와 같은 왕족출신인 '나얀'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을 알고나서, 아흐메드 때문에 아이를 죽였다며 차브이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털어놓는다. 왕국의 반란은 진압되어 가고, 카이두의 계략 또한 슬기롭게 극복하나, 차브이가 후사를 얻기 위해 코카친에게 저지른 짓이 카이두에게 들통 나 칸 자리를 포기하라며 덜미를 잡히게되고 마르코는 집으로 보내진다. 결국 카이두의 막사안에서 둘은 결투를 벌이고, 카이두가 쿠빌라이를 거의 이길 뻔 했지만, 쿠빌라이의 거처로 향하는 성전 기사단을 보고 쿠빌라이를 구하기 위해 급하게 돌아온 마르코에게 목숨을 건지게 되는데, 이때 마르코를 보는 표정이 복잡 미묘하다. 차브이에게 마르코가 코카친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죽이자고 말했던 터에 오히려 그에게 자신이 목숨을 건졌으니.. 배우는 베네딕트 웡으로 비록 활동 기간에 비해 주연 출연은 없어도 조연으로 많이 나와서 이외로 상당한 커리어를 자랑하는 배우다. 선샤인과 프로메테우스, 마션에서도 조연으로 출연했다. 마션에서 JPL 소장으로 보급선 개발하기 위해 공밀레를 당하는 양반이 그이다. 가장 최근에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웡 역할로 참여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입성하기도... 쿠빌라이의 외모를 따라 하기 위해서 몸무게를 상당히 찌웠다고. 4.3. 차브이​ 쿠빌라이 칸의 아내이자 진금의 어머니. 남편에 대한 사랑이 지극정성인데, 그 표현도 남편 못지않게 공격적이다. 남편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기방에서 최고의 기술을 가진 여성들을 직접 뽑아 그룹 검열삭제까지 주도한다. 칸을 암살하기 위해 하렘에 잠입한 메이린을 직접 훈육하여 칸을 시중들게 한다. 가사도의 명령으로 본인을 암살하려는 메이린에게 직접 활을 쏴서 제압하기도 한다. 코카친을 눈여겨 보고, 진금 태자와 혼인을 맺게 하면서 시즌 2 갈등의 원인 제공 예정. 코카친을 진금의 아내로 밀면서 동시에 성급하게 진금의 자식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리고 마는데, 평소 코카친의 말을 돌보던 미청년 마굿간지기에게 코카친을 범하게 해 그녀를 임신시킨다. '아이가 완전한 왕가의 혈통이 아니게 될 것이다.'라고 저항하는 코카친에게 '아이는 전혀 왕가의 혈통이 아니지.'라고 이야기 함으로써, 코카친이 사실은 진짜 베이루트의 공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을 내비친다. 코카친이 진짜 코카친 공주의 환영을 보며 자신의 정체를 실토하자 그녀의 약해진 정신 상태를 걱정하며 자신이 직접 코카친의 병 수발을 들며 곁에서 돌본다. 환영이 점점 더 코카친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면서, 아이는 예정보다 두 달이나 일찍, 남녀 쌍둥이로 태어난다. 차브이는 딸이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아쉬워 했지만, 뒤이어 아들이 같이 나왔기 떄문에 무척 기뻐했으며, 쿠빌라이 칸도 출산한 게르에 들어와서 손녀와 손자의 탄생을 축복했다. 그러나 코카친은 출산 직전에 남편인 진금을 놔두고 마르코 폴로를 게르 안에 불렀고, 마르코 폴로에게 자신의 아이가 진금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말해버렸는데, 쿠빌라이도 나중에 진실을 차브이에게 듣고 나서 노발대발한다. 쿠빌라이가 차브이에게 '진금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이 더 있냐' 묻자, 마르코 폴로를 언급했으며, 쿠빌라이가 폴로를 없애버리자고 하자, 이미 쿠빌라이에게 고하기 전에 폴로를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카이두와 성전기사단의 기습으로, 쿠릴타이가 진행 중이면서 본진 병력이 아흐마드의 반란 진압을 위해 빠지는 바람에 호위대 밖에 없는 쿠빌라이가 꼼짝없이 위험해질 상황이 닥치자, 쿠빌라이를 구하기 위해 서둘러 돌아온 폴로 덕분에 쿠빌라이는 얼떨결에 목숨을 구하고, 고향에 보내 비밀을 감추려던 차브이의 계획은 어그러지고 만다. 카이두와 아흐마드의 모든 음해공작을 견뎌내고 쿠릴타이에서 재선(?) 확정을 앞둔 쿠빌라이가 왕좌를 카이두에게 넘겨주게 될 수도 있는 막판뒤집기의 씨앗을 제공했다. 결과적으로 시즌2에서 몽골제국에 가장 큰 위험을 제공한 인물이다. 트롤링 배우는 마지막 황제에서 열연했던 조안 첸. 4.4. 진금​ 쿠빌라이 칸의 아들이자 황태자. 아버지와는 다르게 경험도 없고, 황실에서 곱게 자란 온실 속 화초라서 주변에서 못 미더워한다. 문화를 융합하고자 했던 쿠빌라이의 의도 때문에 몽골식이 아니라 중국식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이름도 한자로 지어졌다(중국식 발음 그대로 읽으면 '친킴'). 그러나 그 덕에 몽골 출신들과 사상의 충돌을 종종 일으키며 더더욱 입지가 좁아졌다. 스스로도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인정받으려고 무던히 노력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서 항상 찌질거린다. 그런 주제에 아버지가 외국인만 선호하는 데 열등감을 내며 마르코 폴로만 못살게 군다. 시즌 1 최후반부에 결국 마르코 폴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형제(Brother)라 부를 정도로 대우하게 된다. 시즌 2에서는 시즌 1에서의 찌질한 모습을 상당 부분 털어버리고 신뢰하는 마르코와 부인 코카친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며 흉금없이 지낸다. 아흐마드와 함께 카이두 일족을 만나고 돌아오던 차에 카이두의 아들 딸인 쿠툴룬 오로스 남매에게 습격을 당하여, 호위대가 모두 죽고 본인은 말에 깔려 다리가 부러진 아흐마드와 함께 초원에 버려진 신세가 되어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아흐마드를 돌본다. 그 후 쿠릴타이가 열리는 중 대도가 아흐마드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코 폴로, 비암바, 백안과 함께 흑화된 아흐마드를 찾아 대도로 돌아가 함께 처단한다. 배우는 호주 출신의 레미 히. 4.5. 코카친​ 쿠빌라이에게 패배한 몽골 바야우트 부족의 공주로, 현재에도 공주로서 대접 받고 있으나 사실은 공주가 아니다. 정체는 진짜 코카친 공주의 시녀 네구이. 쿠빌라이의 침략으로 바야우트 부족이 멸족하고 진짜 코카친 공주가 자결하자 흔적을 없애고 위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그 정체가 들통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마르코폴로가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여자로, 마르코 폴로의 꿈속에서는 이미 여러 번 거사를 치뤘다(...). 결국 마르코 폴로와 맺어지게 되나, 차브이의 의해 진금과 혼인을 하게 된다. 이에 마르코 폴로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하지만 결국 진금과 혼인하게 된다. 시즌2에서는 진금의 후궁으로 밀고자 하는 차브이의 바람대로 진금의 곁에서 머물면서 마르코 폴로와도 애써 거리를 둔다. 차브이가 그 동안 3명의 아내를 거치면서도 실패한 진금의 후사를 얻기 위해서, 코카친과 친하게 지내던 마구간지기로 하여금 그녀를 범하게 하고 마구간지기의 아이를 잉태하게끔 만든다. 시즌 막바지에 마르코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추가적으로 아이들의 눈이 푸르다고 이야기해 마르코 폴로의 아이들일 수도 있다는 이상한 암시를 한다. 마구간지기는 그 후 마구간 주변 강에서 자살했는데, 조장(鳥葬)하는 장소 곁에서 마구간 지기의 아내를 만나고, 그녀의 아이도 보게 되면서 여러 방면으로 멘탈 붕괴하게 된다. 시즌 초반부터 진짜 코카친 공주가 나타나 그녀의 지위를 되찾겠다며 괴롭힌다. 그녀는 코카친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의 원래 이름인 '네구이'라고 부르며 아이가 태어나면 그들이 너를 버릴 거라며 그녀의 정신상태를 불안하게 만든다. 사실 진짜 코카친 공주는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니며, 그녀의 불안한 정신상태가 만들어낸 '자기환상'임을 차브이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다. '네구이'는 '이름이 없다'라는 뜻이며, 그녀의 이름이 정해질 때, 이름을 적은 종이들 중에 백지가 계속 떠올라 자신의 이름이 그렇게 됐음을 알린다. 아이가 8삭동이로 태어나고 젖이 나오지 않자, 쿠빌라이 칸과 마르코 폴로 앞에서 '아이 아버지는 진금이 아니다'라는 말을 해버리고 마는데, 차브이를 추궁해 진상을 알게된 쿠빌라이는 안 그래도 양자인 아흐마드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 판국에 이게 무슨 거지같은 일이냐며 노발대발한다. 비밀의 누설을 막기위해 마르코 폴로는 차브이에게 고향으로 가길 종용당하고, 코카친은 달이 없는 밤에 몰래 게르를 빠져나와 강으로 들어간다. 낌새가 이상함을 느낀 차브이가 뒤를 쫓았으나 '괜찮아요, 어머니'라고 말하며 스스로 강 바닥으로 가라앉고, 차브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의 머리를 누른다. 실제 역사상 진금의 정비로 쿠빌라이 칸 다음 칸인 원성종 테무르의 모후인 '코카친'의 행적을 따 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 역사에서는 차브이 사후 차브이 소유의 재산을 전부 물려받았고 여성으로서는 원나라 최고의 지위에 오른다. 노국대장공주의 고조모다. 제작진이 노리고 했는지 아니면 그냥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마르코 폴로가 베네치아로 돌아오는 길에 호송한 코카친 공주와 동명이인이다. 코카친은 일 칸국의 칸 아르군에게 시집가게 되어 마르코 폴로가 이를 호송하는 일을 맡는데, 이들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아르군이 죽어서 코카친은 아르군의 아들인 가잔과 혼인하게 된다. 마르코 폴로는 코카친을 일 칸국에 호송하는 일을 마친 후 원나라를 아예 떠나 베네치아로 귀향하게 된다. 작중에서는 시즌2 마지막에 사망이 거의 확정된 것같이 나오는데, 드라마가 역사판타지드라마다 보니 실제 역사와 다른 길을 가게 될지는 시즌 3까지 지켜봐야 하지만 넷플릭스에서 시즌 3를 캔슬하면서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배우는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등장했었던 주주. 4.6. 아흐마드 바나카티​ 쿠빌라이 칸의 재상비주얼 담당. 페르시아 출신 색목인으로 과거 몽골 가문에 끌려가 진금과 어린 시절을 보냈고, 칸과 차브이에게도 양아들 취급을 받는다. 진금의 열등감 원인 1 남송과의 관계에 주전파로 주화파인 부섭정 유섭과 대립한다. 사상이나 행동은 몽골인과 다름없다. 시즌 1 내내 진금 태자보다 한 발 먼저 의견을 제시하면서 진금 태자로 하여금 열등감을 느끼게 만드는 원인 제공자 중 한 명이다. 시즌 1 후반에는 차브이 황후를 암살하려다 생포된 메이린을 구금하며 자신의 집에서 데리고 있는다. 10화에서 남송의 화가를 시켜 그린 그림에서 옥좌에 올라 쿠빌라이 칸의 목을 들고 있는 장면이 나오면서 시즌 2 흑화 확정. 시즌 2에서 그의 과거가 좀 더 언급이 된다. 청년 시절, 재상업무를 맡기는 쿠빌라이의 뜻을 물리치고, 왕국의 재정을 더 잘 알아야 나중에 재상자리에 오르게 되어도 통치가 수월하다는 핑계로, 재정 주무관 업무를 맡으려 한다. 그는 쿠빌라이의 하렘에서 낙오된 여자들이 머무는 사창가에서, 어린시절 쿠빌라이에게 멸망한 자신의 일족과 같은 출신의 여인을 만나 그녀와 어울리던 중, 그녀가 죽은 줄 알았던 자신의 생모라는 사실을 흥얼거리는 노래가락을 통해 알게 된다. 그래서 그녀를 목 졸라 죽이고, 쿠빌라이에게 돌아와 자신이 생각이 짧았다며 전에 제안받은 재상업무를 맡겠다고 이야기한다. 재상자리에 오르면서부터 그는 쿠빌라이에게 복수한다는 생각으로 왕국의 국력을 소진하고, 분란의 씨앗을 여기저기 심었으며, 쿠데타 마저 모의한다. 마르코폴로와 메이린을 이용해 어렵사리 찾아낸 송의 어린 황제를, 저항세력의 희망을 꺾어야 한다며 쿠빌라이에게 죽이게 했으나, 송의 백성은 어린황제가 죽어 성에 목매달린 모습을 보고 난 뒤에 폭도가 되고 말았다. 쿠빌라이 대신 칸이 되고 싶어하는 카이두의 야심과, 성전기사단같은 서방세계와 연이 닿아있는 '나얀'왕자를 이용하여 송의 반군을 막는다는 구실로 상양으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쿠릴타이 참석을 위해 쿠빌라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은 섭정의 권한으로 상양의 성 안에서 쿠빌라이의 이름을 팔아 전횡을 일삼게 된다. 수족으로 부리는 메이린의 복종심을 이용하기 위해 볼모로 잡고 있던 메이린의 딸 '링링'을 그녀에게 돌려주지 않고 '나얀'에게 팔아 넘겼으며, 링링은 나중에 마르코폴로에 의해 구출되어 메이린에게 돌아오게된다. 메이린은 마르코폴로에게 답례로 아흐마드가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사실과, 진금왕자를 기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게 되어, 그간 그가 내린 '잘못된 결정들'의 배경과 '이상한 군대이동'에 대한 의도가 들통난 다음부터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칸으로부터 아흐마드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진금왕자 일행이 도착하고, 왕궁 호위대장이 명령을 거역하는 등 궁지에 몰리자, 궁 안의 자기 처소로 도망치다가 미리 안에 기다리고 있던 메이린이 찌른 비수를 맞고 사망하게 된다. 원사에는 '아합마(阿合馬)'라는 이름으로 표기된 인물로 실제 역사에서도 원나라 조정의 재정을 담당했던 관료였는데 돈을 불리는 데 재주가 뛰어나서 각지의 세금을 멋대로 매기거나 일부러 화폐 가치를 폭락시켜 인플레이션을 조장하는 수법 등으로 자신의 배를 채웠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원성을 샀지만 어쨌든 국고도 풍족하게 해 줘서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그 전횡을 못마땅해 한 한족 관리들과 태자 진김과 대립했고 결국 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망치에 맞아 죽었다. 이러한 역사적 행적을 바탕으로 각색된 인물. 배우는 마헤시 자두. 4.7. 비암바​ 쿠빌라이 칸의 호위 담당. 칸의 서자로 진금에게 무시당하지만 반대로 진금에게 열등감우월한 키를 제공하는 인물 중 한명이다. 왕을 암살하기 위해 온 어쌔신의 배후를 추적하기 위해 마르코 폴로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칸과 백안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마르코 폴로를 인정하는 인물이다. 지원군으로 온 쿠툴룬에게 관심을 보이며 계속 들이대 결국 쿠툴룬과 결혼을 약속하지만, 쿠툴룬의 아버지 카이두가 칸과 대립 후 추방당하면서 결혼에 위기를 맞는다. 결국 상양 전투에서 진금 태자를 위기에서 구하지만 진금은 끝까지 비암바를 무시하고, 맨몸으로 쿠툴룬에게 간다. 시즌2 초반에서, 비암바는 카이두를 대신해 몽골의 족장선출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겨루자는 메세지를 쿠빌라이에게 전하러 간다. 쿠빌라이 입장에서는 서자가 자신과 경쟁하는 사촌에게 멋대로 간 것도 모잘라 아비에게 도전하겠다는 이야기도 대신 전하러 왔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 셈. 비암바는 아버지가 받을 충격을 알지만 그게 다른 사람에게 듣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직접 전달하러 왔다고 한다.(...) 카이두가 모친의 종용으로 자신이 쿠빌라이 다음의 '칸'으로 밀고 있던 자신의 딸, '쿠툴룬' 대신 직접 '칸'에 오르기 위해 '쿠릴타이'에 참석해 도전하기로 하면서, 쿠빌라이 칸을 곤란하게 만들 여러가지 뒷공작을 저지르게 되는데, 여기에 자신이 사랑하는 쿠툴룬까지 타의로 참석하게 되자, 심각하게 갈등하게 된다. 쿠툴룬 역시 정정당당하게 대결하지 않고 비열한 짓을 저지르는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과 비암바에 대한 미안함이 겹쳐, 상당히 혼란해 한다. 결국 다른 부족을 습격해 쿠빌라이 칸의 짓으로 꾸몄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이후, 쿠툴룬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아흐마드는 비암바가 저버린 쿠빌라이 칸의 은혜를 칸의 군대에서 백의종군하며 갚으라며 일반사병으로 복무하길 제안하는데, 쿠빌라이가 이를 승낙하여 졸지에 지휘관급 왕족에서 졸병으로 권위가 추락한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이런 치욕을 감내하며, 일반사병에게 받는 물고문 장난 같은 린치도 견딘다. 시즌 후반부에 그는 화약을 이동시키는 아흐마드의 군대의 경로를 추적해 그가 성전기사단과 왕족인 나얀, 칸의 친척 카이두와 공모하여 대대적으로 쿠빌라이의 배후룰 공격할 것이라는 징후를 발견하고, 마르코 폴로와 진금 왕자와 함께 이를 막기 위해 활약하게 된다. 배우는 호주 출신의 울리 라프케후. 4.8. 가사도​ 본작 최고의 흑막이자 1부의 최종 보스. 대단한 야심가로 나오며 조정 최고의 실권자였으나 송 황제가 사망하면서 후궁이었던 여동생 메이린이 몰락하고 정치적 뒷배경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후 자신의 권력을 되찾고 더더욱 강화하기 위해 송과 원나라의 사이를 이간해 전쟁이 벌어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남송은 쿠빌라이한테 수도 없이 발리면서 신하부터 황후까지 두려워하며 필사적으로 평화협정을 맺으려 하는데, 이 인간 혼자만 야만인 따위에게 질 수 없다며 몽골과 싸움박질할 기세다. 심지어 황후가 몰래 신하들을 보내어 쿠빌라이와 평화협정을 맺으려 하자, 자기 역시 몰래 병사들을 보내 평화협상을 맺은 송나라 측 사신들을 죽여버릴 정도. 오히려 쿠빌라이는 잠시나마 화평을 맺을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진금을 보내 협상을 주도시키고, 협상이 성사되었다고 생각하여 잔치를 열고 부하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연극도 보는 등 기뻐하는 분위기였건만... 10화에서 백안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목이 잘리게 된다. 배우는 다크 나이트에서 마피아의 회계사였던 진 한. 4.9. 아리크부카​ 쿠빌라이의 동생으로, 1화에서 진금이 우창을 공격하러 나설 때 대군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뒤통수를 치고 카라코룸으로 가 버린다. 진금이 해명을 요구하러 카라코룸으로 오자, 자신이 보낸 사자가 송나라 군에 잡혀 죽었다고 둘러대고 전군을 송나라로 출격하겠다고 말하는데, 마르코 폴로가 반란의 낌새를 눈치채고 쿠빌라이 칸이 직접 군대를 몰고 오자 일기토를 벌이지만 패배해 목이 잘린다. 몽골의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순혈주의자로, 쿠빌라이 칸의 문화 융합 정책을 죽는 순간까지 반대한다. 배우는 바르진냐민 아마르사이칸으로, 몽골 출신 배우이자 감독이다. 4.10. 카이두​ 몽골 제국의 2대 칸인 오고타이 칸의 손자로, 쿠빌라이 칸과는 오촌 관계. 쿠빌라이가 아리크부카와 대결할 때까지만 해도 쿠빌라이를 따랐으나, 사실 자신도 내심 몽골 스타일을 따르지 않고 외지인과 중국인들 방식을 따르는 쿠빌라이에게 반감을 갖고 있다. 또한 중앙 진출에 대한 야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칸을 위해 연 파티에 칸이 오지 않고 아들인 진금을 대신 보내자 살짝 빡쳐서 진금이 전투에서 패배한 이야기를 꺼내며 부족원들 앞에서 망신을 준다. 그 이후 중앙 진출을 위해 칸의 서자인 비암바와 딸의 결혼을 허락하지만 상양 공략에서 본인의 군대가 선봉에서 제외되자 불만을 제기하고 추방당한다. 시즌2에서는 족장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쿠빌라이에게 도전하겠다는 메시지를 쿠빌라이의 서자인 비암바를 통해서 전달했다. 진금과 아흐마드의 호위대를 죽이고, 같은 몽골제국의 부족을 쿠빌라이의 짓으로 위장하여 학살하는 등 이번 시즌에서 몽골제국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는 인물이다. 쿠툴룬을 살리기 위해 난산으로 위독했던 아내의 배를 갈라야 했던 옛 기억과, 칸이 되기 위해 평소 신념을 저버리고 더러운 뒷 공작을 마다않는 현재 자신의 모습 사이의 괴리로 갈등하나, 일족이 쿠빌라이 가문에 의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밀려났다고 주장하며 직접 칸이 되라 종용하는 어머니의 뜻을 결국엔 따른다. 남매간인 쿠툴룬과 오루스마저 아버지의 악행에 의해 분열되고 마는데, 쿠툴룬은 아버지의 뒷공작에 대해 '칸이 되려면 이런일까지 해야 하는 건가'라는 물음을 계속 가지지만, 오루스는 '나약한 심성으로 대사를 그르치면 칸이 될 수 없다'며 지극히 단순무식한 발상으로 아버지의 의견을 따른다. 그러고도 아버지에게 인정은 못 받는 안습신세 자신들이 습격한 진금왕자와 아흐마드가 귀환하자 전전긍긍하지만, 뜻 밖에 아흐마드가 새로운 칸을 옹립할 떄가 왔다며 은근히 아버지를 미는 모양새를 띄자, 이들은 한 순간에 적에서 동지가 되었다. 배우는 망작 007 어나더데이로 유명한 릭 윤 4.11. 쿠툴룬​ 잘못 읽으면 모 암흑신화의 마신이 되어버린다. 카이두의 딸로, 몽골 페피첫 등장 시 남자들과 씨름을 하는 여장부로 등장한다. 게다가 어쩌다 한두 번 하는 게 아니라 거의 무패에 가까운 챔피언이라 한다. 첫 등장 직후 마르코 폴로를 아주 격하게 덮치는(...) 장면으로 시청자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지원군을 이끌고 대도에 오게 된다. 아버지의 중앙 진출 야망을 위해 칸의 서자인 비암바와의 대결에 일부러 져서 혼인을 약속하지만, 아버지가 칸과 대립하며 추방당하게 된다. 시즌 2에서는 아버지의 명으로 비암바 몰래 쿠빌라이의 군대를 기습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통에 비암바에 대한 미안함과 아버지의 행위에 대한 회의를 동시에 느끼고 있다. 이번 시즌 내내 성급하게 행동하고, 앞뒤를 생각하지 않는 오빠 '오루스' 덕에 스트레스가 많다. 오루스는 아흐마드가 타고있는 말을 베어 버리는 바람에 아흐마드의 다리를 부러뜨렸고, 카이두를 토벌하기 위해 쿠빌라이와 함께 온 진금왕자를 죽이겠다며 달려든 대결에서는 진금에게 패배하여, 머리통이 박살나 죽고 만다. 오루스가 죽고, 아버지 카이두가 '쿠릴타이'에서 그동안 벌여온 행각을 낱낱이 고발당하며 조리돌림 당하는 신세가 되자, 아버지를 부추겨 무리하게 칸에게 도전하게 만든 할머니를 원망한다. 아흐마드에게서 들은 '코카친의 자식이 사실은 진금왕자의 자식이 아닌 마굿간지기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카이두에게 알려, 카이두가 쿠빌라이에게 '쿠릴타이'에서 칸의 지위를 포기하도록 종용하게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아버지가 사망하고 실패하자, 일족을 떠나 사라진다. 쿠툴룬은 실제 역사상의 인물이며 원작인 동방견문록에도 등장했다. 붉은 머리와 큰 키를 가진 글래머 미녀로 묘사되지만 엄청난 격투실력의 소유자였으며 무려 6개 부족 통합 씨름대회의 챔피언을 한 적이 있었다. 한마디로 현실에 존재하는 투희라 할 수 있겠다. 빵빵한 뒷배경이나 미모에 반해 청혼한 사람도 많았지만 신에게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게만 순결을 바치겠다는 무협지스러운 맹세를 하는 바람에, 구혼자는 일단 씨름으로 도전해야 했고 아무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결혼은 안 하고 부친인 카이두와 워낙 사이좋게 지내서 나중엔 카이두 부녀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자, 맹세를 취소한 뒤 카이두의 부하 중 한 명과 결혼했지만 그 후에도 부친 곁에서 전쟁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배우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헬렌 조 역으로 출연하여 관심을 모았던 한국 배우 수현이다. 주조연 여배우 중에 유일하게 노출이 없다. 4.12. 백안(Hundred eyes)​ 역사에 기록된 원의 명장 바얀. 여기선 캐릭터성이 역사와 많이 다르다. 장님 쿵푸 고수로서, 무당파의 도사이다. 과거 쿠빌라이의 정예병 스물다섯을 죽이고 붙잡혔으나 양 눈을 빼앗기는 대신 쿠빌라이를 섬기게 된 인물. 일단 공식적으로는 승려라고 하는데, 쿠빌라이 말로는 고기도 먹고 여자도 하고 할 거 다한다고(...). 마르코 폴로에게 쿵푸와 몽골 문화를 가르쳐주며 몽골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다. 사실상 마르코 폴로의 정신적 지주. 마르코 폴로가 갈등할 때마다 냉정한 조언을 주며, 칸을 암살하기 위해 온 어쌔신들을 눈치채고 격퇴하기도 한다. 현재 세계관 최강자 칸의 명령으로 마르코 폴로와 함께 가사도를 암살하기 위해 상양(양양성)에 가게 된다. 암살은 실패하지만 그 사이 마르코 폴로는 상양의 약점을 찾게 된다. 하지만 그 약점은 가사도가 파놓은 함정이었다. 배우는 톰 우로 킥애스2에 출연한 적이 있다. 킹 아서: 제왕의 검에도 나온다. 4.13. 메이린​ 가사도의 여동생으로, 원래는 창녀였으나 송 황제(아마도 이종)의 눈에 들어 후궁으로 들어갔다. 가사도의 정치적 뒷배경으로 가사도를 위해 암살과 정보수집 등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오빠와의 관계가 영 안 좋아서, 그녀의 딸을 가사도가 붙잡아 인질로 잡아두고 일을 시킬 정도. 게다가 실제로 동생이 죽든 말든 별 상관이 없는 듯 하다. 인질로 잡힌 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쿠빌라이 칸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그 다음은 차브이를 암살하려 했으나 결국 붙잡힌다. 그녀가 가사도의 동생인 것을 알고 몽골의 궁정 사람들도 술렁이게 된다. 배우는 문소리 올리비아 청. 4.14. 니콜로 폴로​ 마르코의 친아버지이나, 가족에게 큰 관심은 없는 편. 장사를 하러 나간 탓에 마르코가 태어날 때에도 보지 못했고, 심지어 이름조차도 어머니가 대신 지어줬다고 한다. 아들을 쿠빌라이에게 넘기고 조건부로 다시 몽골에 돌아오지만, 비단을 만드는 누에고치 밀수를 시도하다가 걸려서 목숨이 오가는 지경에 처한다. 다만 자신을 살려준 아들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하거나, 아들을 위험한 비단길에 데려가지 않으려고 하는 등 부성애는 있다. ...고 보였으나, 시즌2에서는 교황과 쿠빌라이의 사촌이자 왕족인 나얀 사이에서의 대화, 마르코와 대면한 뒤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삶의 목적은 쿠빌라이를 척살하고 몽골제국을 몰아내어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것에 있음을 덤덤히 알린다. 그러기 위해서 심지어 아들인 마르코도 희생하고 이용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혀서 마르코가 아버지인 본인에게 학을 떼게 만든다. 후반부에는 카이두와 연합해 쿠빌라이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칸의 선제공격으로 쑥대밭이 된 카이두의 군영에서 마르코와 재회하고, 마르코는 아버지를 도망가게끔 놔 둬 버리는데, 이 모습을 쿠빌라이에게 들켰다. 쿠빌라이는 마침 마르코를 황실의 비밀을 아는 관계로 제거할 생각이었기에, 카이두를 도와 반역을 도모하려던 아버지를 보내준 것은 좋은 구실이 된다. 배우는 피에르프란체스코 파비노. 4.15. 마페오 폴로​ 마르코의 숙부로 여행길에서 눈보라로 마르코가 쓰러져 3일이나 허비하게 만들자 우리가 만든 것을 마르코가 부술 것이라고 불만을 표시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쿠빌라이 칸(쿠빌라이 세첸 카안, 忽必烈 薛禪汗, sečen qaγan) 재위 : 1260년 5월 5일 ~ 1271년 12월 18일 대관식 : 중통(中統) 원년 3월 24일(1260년 5월 5일) 묘호 : 세조(世祖) 칸호 : 세첸 카안(몽골어: ᠰᠡᠴᠡᠨᠬSečen Qa'an, 한국 한자: 薛禪可汗 설선 가한) 존호 :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孝皇帝) 시호 :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출생일 : 1215년 음력 8월 28일(9월 23일) 출생지 : 막북(漠北) 초원 혹은 허베이성 사망일 : 지원(至元) 31년 1월 22일(1294년 2월 18일, 79세) 사망지 : 원나라 대도(현, 베이징 시) 황궁 자단전 매장지 : 부르칸 칼둔 왕조 : 대원 가문 : 보르지긴 부친 : 툴루이 모친 : 소르칵타니 베키 배우자 : 소예순성황후, 남필 황후 자녀 : 친킴, 제국대장공주 종교 : 티베트 불교,유교 성리학,샤머니즘,텡그리 쿠빌라이 카안(몽골어: ᠬᠤᠪQubilai Qa'an, 페르시아어: قوبيلاى قاآن Qūbīlāī qā'ān, Хубилай хаан, 忽必烈 汗) 1215년 음력 8월 28일(9월 23일) ~ 지원(至元) 31년 1월 22일(1294년 2월 18일)) 또는 쿠빌라이 대칸(Хубилай их ван)은 대원의 제5대 카안(재위 : 1260년 ~ 1294년)이자, 칭기스 칸의 손자이다. 본명은 쿠빌라이(몽골어: ᠬᠤᠪᠢᠯᠠᠢ Qubilai, 한국 한자: 忽必烈 홀필렬),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존호는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孝皇帝), 칸호는 세첸 카안(ᠰᠡᠴᠡᠨᠬᠠᠭᠠᠨ Sečen Qa'an, 薛禪汗, 키릴문자: Сэцэн хаан)이다. 1279년 남송을 정복하고 금나라와 거란족의 잔당을 토벌하였으며, 고려를 부마국으로 편입하고, 태국, 캄보디아, 자바 섬을 원정하였으며 베트남 북방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칭기즈 칸의 아들 툴루이의 넷째 아들로 경쟁자이자 막내동생 아릭부케 세력을 꺾고 몽골 제국의 카안으로 즉위한다.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유학에서 따서 대재건원(大哉乾元)의 약칭인 대원(大元)으로 개칭하고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 시)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1276년 2월 4일 남송의 수도 임안을 점령한 뒤 1279년 3월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정복하였으며, 버마·베트남·일본 등지에 군사를 보내 침공하였다. 그 는 중앙아시아 출신 등 다양한 종족을 실력 위주로 채용하고, 실크로드를 정비, 수호하였다. 서역에서 오는 문화를 중시하였으며,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다. 몽골 제국과 중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에 의해 쿠빌라이 칸은 유럽의 전설이 되었다. 또 한편, 카안에 즉위하기 전 자신을 찾아온 고려 원종과 모종의 동맹 관계를 맺었고 그의 아들인 충렬왕을 사위로 맞으면서 고려와 특수관계를 맺었다. 그는 한때 고려와 연합해 일본을 정복하려 했으나 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실패하고, 아리크 부케와 카이두를 비롯, 반란에 직면했다. 여진족은 그를 호필내(呼必賚)라 불렀다.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툴루이 칸과 케레이트족 출신 소르칵타니 베키의 넷째 아들이며 몽케 칸의 동생이었다. 친형제로는 몽케 칸과 일 한국의 건국자 훌라구, 쿠빌라이와 대립했던 아리크부카가 있었다. 1215년 음력 8월 28일(9월 23일)에 태어났으며 막북(漠北) 초원 출생인데, 일설에는 허베이성 근처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쿠빌라이는 몽골어로 좋은 진흙, 좋은 땅을 뜻한다.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는 케레이트족 지도자 토그릴 칸의 동생 자하 캄보(Жаха Хамбу)의 딸이다. 할아버지 칭기즈 칸의 지시로, 탕구트족 출신 독실한 불교신자 여성이 그의 유모로 지정되었으며, 쿠빌라이는 불교에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는데, 후일 이 유모를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그의 어머니 소르각타니는 중국인들을 탄압하고 착취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살피고 다독이는 정책을 취해 우리 몽골에 충성하도록 해야 된다. 중국인들을 멸시하기보다 이해하고 존중할 것을 당부했고, 이는 쿠빌라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쿠빌라이는 어려서 어질고 밝고 현명한 성격이었으며, 영특하고 슬기로웠다.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했다 한다. 쿠빌라이의 용모는 키가 크고 체격이 컸다 한다. 몽골이 호라즘을 정복하고 돌아오는 길에 칭기즈 칸은 1224년 사냥길에 나서 몽케와 쿠빌라이를 시험하였다. 쿠빌라이는 형 몽케와 함께 토끼와 영양을 사냥해왔다. 칭기즈칸은 9살 된 쿠빌라이의 손에 사냥한 동물들의 피와 지방을 묻히게 한 후, 일행에게 쿠빌라이를 지명하며, 이 아이는 지혜로운 소년이라 칭송하였다. 1227년 칭기즈칸이 죽고 아버지 툴루이가 2년간 섭정으로 있게 되자, 아버지를 따라 카라코룸으로 갔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톨루이 가문이고 장남도 아닌 둘째 아들이라는 위치로 인해 1251년경까지는 가문의 회의에서 상당부분 배제되었다. 1.1.2 청년기​ 1232년 9월 혹은 10월 9일 쿠빌라이의 아버지 툴루이가 독살 혹은 알콜 중독으로 갑자기 죽고, 1236년 오고타이는 이미 죽은 툴루이의 가족에게 허베이 성의 8만 호를 주었다. 쿠빌라이는 아직 통치경험이 부족하여 허베이성 지역 토착민들에게 자치권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지역 토착민 관료들의 농간으로 세금이 적게 걷히고, 몽골 정부에서 오는 보조금도 줄었으며, 농민들이 도망치는 일이 발생했다. 농민의 감소로 영지가 황폐화되자, 쿠빌라이는 직접 허베이 성을 다스렸다. 소르칵타니 베키는 그를 돕기 위해 새로운 관료들을 보내 그의 세법을 수정하게 했다. 이때 쿠빌라이는 중국의 여러 문화와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후일 중국인 승려를 카라코룸으로 불러 아들 친김의 교육도 맡기는 등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242년 쿠빌라이는 중국 화북지역의 저명한 불교승려 해운(海雲)을 몽골의 오르도에 초빙했다. 1242년 카라코룸에서 하이윤 승려를 만났을 때는, 그와 불교 철학에 대해 담론하였다. 해운에게 감명받은 쿠빌라이는 1243년에 태어난 아들 친킴의 교육을 후일 그에게 맡겼다. 1244년부터 쿠빌라이는 본격 사방에서 문인, 학자, 불교 승려 등을 모은 후, 그는 자신의 가신 그룹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 총독을 파견하여 대리 통치하는 한편, 형주분지에 안무사(按撫司), 경조분지에 선무사(宣撫司), 하남에 경략사(經略司)를 파견하여 현지 민심과 지역사회를 파악했다. 1244년 유생 왕악(王鶚)을 고비 사막 이북 지역(현재의 몽골)으로 초청하였다. 승려 해운은 다른 불교 승려이자 건축가 류병창(劉秉忠), 중국의 도교 사상과 도교 사제들을 쿠빌라이에게 소개하였다. 류병충은 화가, 서예가, 시인, 수학자였으며 하이윤이 사원의 건립 일을 맡아볼 때는 쿠빌라이의 고문이 되었다. 산서(山西) 출신 학자 조벽(趙璧)역시 자신의 측근으로 두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다른 국적의 사람들도 자문, 측근으로 고용하였다. 그는 몽골은 물론이고, 지역과 제국의 이익, 몽골과 투르크 제부족 간의 균형을 맞추기를 열망하였다. 1251년 7월 1일 형 몽케 칸이 몽골의 대칸으로 즉위하자, 쿠빌라이에게 남부군 총사령관 겸 총령막남한지사무(總領漠南漢地事務)에 임명했다. 쿠빌라이는 쿠투(忽都) 땅에 주둔했다가, 곧 하북성(河北省) 장가구(張家口)에 금련천막부(金蓮川幕府)를 설치하였다. 이때 쿠빌라이는 허형(許衡), 장문겸(張文謙), 두묵(竇默), 조벽(趙璧), 요추(姚樞), 적경(郝經) 등의 한족 문사들을 영입했다. 이때 금나라의 옛 영토를 접수, 금나라 조정에서 일하던 원호문, 장덕휘 등을 초빙하여 유교대종사(儒教大宗師)라는 칭호를 내리고 불렀으나 이들은 요청을 거부하였다. 그의 친한족 정책에 대해 보수적인 몽골 부족장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고, 몽케 칸은 쿠빌라이를 경계, 일부 정책과 작전에서 쿠빌라이를 배제시키고 직접 보고 받았다. 쿠빌라이는 다소 신중하고 현명한 성격이었고, 몽케 칸은 쿠빌라이를 내심 경계하였다. 1251년부터 형인 몽케 칸은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이자 그의 백부인 오고타이 칸이 계획했던 남송의 정복과 페르시아 정벌을 결심하고, 페르시아 정벌은 쿠빌라이의 동생인 훌라구에게 맡겼다. 이때 몽케 칸은 쿠빌라이에게 중국 정벌을 맡겼고, 동시에 중국 정벌에 대한 군사·행정의 전권이 주어졌다. 몽케 칸은 쿠빌라이에게 칭기즈칸이 투르크 총독으로 파견했던 마흐무드 야라바치를 딸려 중국 북경(北京)으로 보내졌다. 쿠빌라이는 곧 중국 북부 지방의 영향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오르도를 내몽골 중부 혹은 내몽골 남부로 옮겼다. 그는 옹기라트부의 테굴룬과 결혼했으나 일찍 죽고, 같은 옹기라트부 출신 차브이와 재혼했다. 그밖에도 타라칸, 바야구신 등의 제3, 제4정궁 황후가 있었고, 22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태어났다. 또 다른 첩들에게서는 25명의 아들을 두었다. 두번째 정실 부인 차브이 카툰은 그의 믿음직스럽고 영향력 있는 조언자였다. 1.1.3 정복 준비와 대리국 정벌​ 그는 자신의 영지인 화북의 하남성의 농업 생산량을 늘렸고, 경조(京兆, 산서성(陝西省) 서안(西安))를 받은 뒤 경조 지역에 행정체제와 보급기지를 갖추었고, 그는 말단의 촌장들에 이르기까지 하나 하나 직접 관리, 감독하였다. 1252년 쿠빌라이는 재판에서 용의자를 무조건 처형한 마흐무드 알라와치를 비판하고, 조벽은 왕좌에 대한 그의 주제넘는 태도로 그를 공격했다. 몽케는 곧 마흐무드 얄라바흐를 해고했다. 1252년 6월 쿠빌라이는 쿠샤나르(曲先惱兒)에 체류 중이던 몽케 칸으로부터, 운남성(雲南省) 정벌을 명받았다. 쿠빌라이는 운남성에 있던 대리국(大理國)을 먼저 침공하여 남송의 측면을 돌파하는 작전을 썼다. 1253년 가을, 그는 명령을 받고 군사를 이끌고 출정, 섬서성(陝西省)을 출발하여 운남성으로 들어와 3,4개월간의 전투 끝에 그해 10월 진사강을 건너, 그해 겨울에 대리국으로 들어갔다. 1254년 1월 2일 단흥지(段興智)의 항복을 받아내, 대리국의 수도인 대리성(大理城)을 정복하고 운남행성(雲南行省)을 설치했다. 운남행성의 총독인 대리총관(大理總管)은 대리국의 왕족인 단씨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대리국 정복 직후인 1254년 초 훌라구, 아리크 부케 등이 칸의 세력 확장과 인재 포섭 등 칸의 지위에 오르려는 움직임들을 감지하고 되돌아가면서, 부장인 우리양카다이에게 이 지역 인근지역의 위수(衛戍)를 맡겼다. 대도(大都)로 들어가 몽케 칸을 알현한 뒤, 1254년 5월 륙판산(六盤山)에 체류하다가 그해 8월 다시 대리지역을 방문한 뒤 무주(撫州)로 갔고, 그해 겨울 쿠투에 주둔하였다. 1256년 겨울 몽골의 카라파라카슨 지역으로 이동, 주둔하였다. 그해 겨울 몽케 칸으로부터 익주(益州), 회주(懷州) 분지 일대의 공략을 명받았다. 1257년 몽케 칸의 지휘 아래 출정에 참여하여 남송 공략을 준비하였으나 1259년 8월 몽케가 갑자기 죽었다. 이복동생이자 유모의 아들인 무게는 합주(合州) 조어산(釣魚山)에 주둔하면서 전령을 보내 몽케 칸의 부음 소식을 전했고, 9월 1일 쿠빌라이는 무게가 보낸 전령을 만났다. 또한 북방에서도 그의 아내 차브이가 사람을 보내 아리크부카가 대칸에 오르려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칸의 유업인 남송 정벌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답을 주었다. 한편 쿠빌라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남송의 북방지역의 한 성곽을 포위, 공격하던 중, 몽케 칸의 전사 소식과 형제 중 막내이기 때문에 고국의 방비를 맡았던 아리크 부케가 스스로를 칸에 오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교전 중이던 남송군에 사자를 보내 휴전을 협정하고 대도로 복귀하였다. 1.1.4 1차 베트남 원정​ 1256년 여름 몽케 칸은 남송이 몽골 사신들을 압류했다는 이유로 남송 정벌을 선언, 3개의 부대를 편성했다. 쿠빌라이는 3개의 부대 중 중로군 통수(中路軍統帥)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몽케 칸은 갑자기 쿠빌라이에게 대월(베트남) 파견 지시를 내린다. 1257년 베트남 정벌군을 편성, 베트남으로 내려가 저달하(抵達河)에 입성했지만 대월 쩐 왕조는 쿠빌라이 군의 침공을 격퇴 하였다. 1257년 음력 12월 12일에 몽골과 대월 사이에 평화 조약을 다시 수립하였다. 1260년 쿠빌라이가 대칸이되었을 때 쩐 성종은 몽골에 3년마다 공물을 보내기로 했고, 몽골에서 파견한 다루가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월의 왕은 얼마 뒤 몽골에 조공을 보내는 것을 거절했다. 얼마 뒤 쿠빌라이는 대월의 쩐 성종에게 참파 왕국을 정벌하는데 지원군을 내줄 것을 요청했다가, 대월로부터 거절당했다. 쿠빌라이는 대월에 사자를 보내 트란 왕을 왕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쩐 성종은 백성을 모아 몽골에게 일단 협력할지, 아니면 고국을 위해 싸울 것인가를 투표로 정하게 했다. 투표는 몽골에 대한 항전으로 결정되었다. 대월은 쿠빌라이의 사자를 대접, 선물을 주어 귀국시키고, 결사 항전을 선언한다. 사신의 귀국 후 베트남의 항전 소식을 들은 쿠빌라이는 추후 대월 재원정을 결심한다. 1.1.5 몽케 칸의 세무 조사​ 쿠빌라이가 독립적인 금련천 막부를 설치하고 중국 화북 지방을 다스리면서 친중국화 정책을 펼치자 몽골의 보수적 부족장들은 쿠빌라이를 내심 의심하였다. 일각에서는 쿠빌라이가 카라코룸으로 올라올 세금 영수증의 일부를 빼돌렸다는 소문이 퍼졌다. 1257년 몽케는 관료를 파견, 쿠빌라이의 영지에 세무 조사를 실시하고, 관료들을 다스렸다. 몽케의 세무 관리들은 잘못을 발견하고 142건의 규정 위반 사항을 기재했으며 한인 관리를 비판하고, 일부는 처형 당했다. 몽케는 쿠빌라이에게 독자적인 세금 징수 권한을 압수하였다. 쿠빌라이 칸은 아내 차브이 카툰을 먼저 카라코룸으로 보내고, 자신도 올라가 사죄하였다. 몽케 칸은 공식적으로는 쿠빌라이를 용서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를 내심 불신하였다. 1.2 회군과 즉위​ 쿠빌라이는 1258년 몽케 칸을 따라 남송 정벌에 출정하였다. 1258년 몽케 칸은 쿠빌라이를 동부지역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병력을 지원하였다. 쿠빌라이는 통풍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 머물러 있었지만 몽케 칸의 지시를 받고 이주하였다. 몽케 칸은 그에게 악주(鄂州) 정벌을 명하였다. 악주의 성주 장견(張堅)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아 악주성을 손에 넣지 못했다. 장견은 쿠빌라이의 군사가 떠난 직후 사망한다. 1258년 12월 남송에 도착, 남송군과 교전했으나 패배하고 후퇴, 다음 년도에 재정벌을 계획한다. 1259년 2월 쿠빌라이는 군사들과 형주(邢州)에 도착했고, 5월 복주(濮州)에 도착했다. 1259년 9월 3일 쿠빌라이가 친히 이끄는 몽골 제국 중로군은 회하(淮河)를 건너 남송에 들어갔으나, 남송의 장군 가사도(賈似道)가 사람을 보내 화의를 요청, 2십만 냥의 은과 연간 2십만 냥의 은을 몽골 측에 바치기로 하고 쿠빌라이는 일단 퇴각하였다. 이때 그는 사자로부터 이미 몽케 칸이 남송 군과의 전투 중 투석기 돌에 맞아 부상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8월 11일 사천성(四川省) 합주(合州)에서 부상과 이질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몽케 칸의 진영에 있던 그의 이복동생이자 유형제인 무가는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 몽케 칸의 부고 소식을 쿠빌라이에게 전달했다. 몽케 칸이 사천성(四川省)에서 사망한 소식을 접한 쿠빌라이는 당분간 몽케 칸의 죽음을 비밀로 부치고 장강(長江)근처와 무한(武漢) 공격을 준비하였다. 쿠빌라이의 군사가 무창(武昌)을 공략하는 동안 장군 우량카다이의 군대가 합류, 쿠빌라이의 군대를 지원하였다. 쿠빌라이는 남송의 수도 임안을 즉시 공격하려 하였으나, 그의 휘하 장수들은 임안 대신 악주를 공격하자고 호소했다. 측근 학경(郝經)은 몽케 칸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아리크 부케가 칸위에 오를수 있다며 남송과는 협상을 하고 즉각 연경으로 가서 조정을 장악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학경의 진언을 받아들여 쿠빌라이는 염희헌(廉希憲)을 개평(開平)으로 보내, 당시 몽골 제국의 군권을 장악한 인물 중 한 사람인 타가차르(塔察兒)의 지지를 얻어냈다. 곧 쿠빌라이는 그의 아내로부터, 쿠빌라이의 남동생 아리크 부케가 군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북쪽으로 회군하여 몽골 평원으로 돌아왔다. 쿠빌라이가 몽골에 도착하기 전인 1259년 11월 아리크 부케는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개최, 주치 가, 차가타이 가문 왕공족, 일부 부족장들의 지지를 얻어 스스로를 대칸으로 선언하였다. 쿠빌라이와 그의 넷재 동생 훌라구는 이에 반대하며 관망하였다. 쿠빌라이의 한인 참모는 쿠빌라이가 대칸의 위에 오르도록 지지했으며, 중국 북부와 만주에 있는 귀족, 장수들을 설득하여, 중국 북부와 만주의 호족들이 쿠빌라이의 입후보를 지지하였다. 쿠빌라이는 남송에 사절을 보내 휴전협상을 추진했으며, 군사를 이끌고 북상, 그해 10월 13일 오귀산(烏龜山)을 거쳐 11월 17일 우두산(牛頭山)으로 이동했다. 1259년 겨울 쿠빌라이의 군대는 연경(燕京)에 도착했다. 1259년 12월 17일 쿠빌라이는 남송의 가사도와 회담, 휴전 협정을 체결, 성사시켰다. 1260년 3월 그는 군사를 이끌고 몽골 남동부 상도(上都)에 도착했다. 카라코룸으로 돌아온 쿠빌라이는 다시 쿠릴타이(Kuriltai, 大會議) 개최를 선언했다. 여기서 그의 지지세력들은 쿠릴타이를 임의로 개최하여 몽골족 부족장들을 소집, 카단(合丹), 아지기(阿只吉)와 서부의 왕공족들, 타차르(塔察兒), 에센카(也先哥}), 쿠차쿠르(忽剌忽兒) 등 동방 왕가의 왕족들, 그밖에 보르지긴 씨족 위주의 부족장들과 소수의 왕실 근친들을 연경에 불러모았다. 1260년 4월 15일에 개최된 쿠릴타이에서 쿠빌라이를 정식 대칸으로 선출하였다. 1.3 고려의 귀순​ 1260년 3월 고려의 태자 왕전(王倎, 원종)은 신하들과 함께 몽케 칸을 만나러 연경(燕京, 북경)에 갔다가 몽케의 행재소(行在所)로 가는 길에 경조(京兆)와 동관(潼關)을 지나게 되었다. 여기서 몽케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당시 몽골의 제후들은 누구를 지지할"지 고민하였다. 육반산에 이르렀을 때 몽케 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고려 태자 왕전 일행을 가로막는 것은 아리크부카의 군사였다. 태자 일행은 조어산을 가는 대신 쿠빌라이를 찾아가기로 했다. 왕전 일행은 서쪽으로 가던 길을 돌려 남쪽으로 향했다. 고려 태자 왕전은 쿠빌라이 지지를 선언, 쿠빌라이의 군사가 강남(江南)에서 있어 왕전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험한 길을 거쳐서 양주(梁州)를 거쳐 초주(楚州)의 교외에 도착하니 마침 쿠빌라이 칸은 양양(襄陽)에 있다가 군대를 돌려서 북상하고 있었다. 3월 20일 고려 태자 왕전을 만났다.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 리나 떨어져 있는 나라이고, 당 태종(唐 太宗)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귀부(歸附)해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高麗萬里之國, 自唐太宗親征而不能服, 今其世子, 自來歸我, 此天意也.)'라고 하면서 크게 칭찬하고, 함께 개평부(開平府)에 도착하였다. 쿠빌라이는 당 태종도 어쩌지 못한 고구려의 후신이 스스로 귀순하였다며 기뻐하였다. 고려에서 고종(高宗)의 훙서를 부고하니 쿠빌라이 칸은 바로 다루가치 쉬리다이(束里大) 등에게 명령하여 세자의 귀국행을 호위하라고 하였다. 쿠빌라이는 세자와 작별하면서 속리대, 강화상(康和尙)을 다루가치로 딸려 보냈다. 쿠빌라이는 그 해에 고려 고종이 죽자 강회선무사(江淮宣撫使) 조양필(趙良弼), 섬서선무사(陝西宣撫使) 염희헌(廉希憲)의 진언을 받아들여, 세자 왕전이 왕위에 오를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해 5월 1일 쿠빌라이는 고려 서경에 주둔 중이던 몽골군의 회군을 지시하였다. 1.4 즉위 초반​ 1.4.1 아리크 부케의 도전​ 5월 5일 카이핑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는 몽케 칸의 뒤를 이어 만장일치로 쿠빌라이를 칸으로 선출한다고 발표하였다. 1260년 5월 12일 쿠빌라이는 중서성(中書省)을 제국의 최고 행정기관으로 선포하고, 자신의 부재시 재상이 정무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또한 쿠빌라이는 스스로 자신의 칭호를 짐(朕), 형 몽케 칸을 선황(先皇)으로 칭하였다. 쿠빌라이는 자신이 신뢰하는 중국인 출신 재상 왕문통(王文統)을 평장정사(平章政事),장문겸(張文謙)을 중서성 좌승으로 임명하여 중서성을 장악했다. 6월 29일에는 연호를 중통(中統)으로 선언했다. 이때 쿠빌라이는 이전과 같이 제국의 수도를 카라코룸으로 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새로 건설된 도시를 수도로 정할 계획을 세웠다. 카이핑을 임시 수도로 선언한 그는 북경 혹은 그 주변에 새 도시를 건설할 장기적 목표를 세웠다. 그는 자신이 선대 칸의 유언에 의해 제위를 계승했음을 선포했고, 자신이 적법한 계승자임을 발표했다. 아리크 부케 역시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자신을 칸으로 선출하고 쿠빌라이를 찬탈자라 공격하였다. 후에 쿠빌라이가 가계상 적자이고 합법적인 군주라는 마르코 폴로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정통성 시비, 논란은 그의 생전은 물론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으며, 그의 정통성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심지어 임종 직전의 칭기즈 칸이 당시 어린 아이였던 쿠빌라이를 장래의 칸으로 지목했다는 전설까지 날조되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수도 카라코룸에서 내전이 발생했고, 카라코룸은 황폐화되었다. 쿠빌라이는 사촌이자 오고타이 칸의 여섯째 아들인 카단의 지원으로 카라코룸으로 들어가는 식량 보급로는 차단했다. 첫 전투에서 아리크 부케가 패하고 그의 사령관 알마다르는 전투에서 사망했다. 아리크 부케는 보복으로 아비수가를 처형하였다. 1260년 9월 쿠빌라이의 군대가 카라코룸으로 진격, 아리크부카와 쿠빌라이 군의 교전에서 쿠빌라이의 군사가 승리했다. 물러난 아리크부카는 다시 전열을 재정비한다. 카라코룸은 쿠빌라이의 대규모 군대에 함락되었지만, 1261년 쿠빌라이가 떠나자 다시 아리크 부케에 의해 점령되었다. 1261년 11월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양군은 여러 차례 격돌하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력과 화북의 물자를 장악한 쿠빌라이에게 전세가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1261년 말 카이펑 북쪽 시무토노르 호수에서 벌어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는 쿠빌라이가 승리했으나, 아리크 부케는 북서쪽 몽골의 오이라트부족의 지원을 얻어 저항을 계속했다. 1262년 2월 이주(夷州) 주지사 이단(李璮)은 몽골 통치에 반발했고, 쿠빌라이는 그의 재상 사천택(史天澤) 등에게 군사를 주어 이단을 정벌하게 했다. 이단의 반란을 진압한 사천택은 이단을 참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쿠빌라이는 한족 출신 관료들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는 거두게 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대칸으로 즉위한 뒤, 중국을 주요 기지로 간주하여 중국을 통치하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서서히 인식했다. 그의 영토는 몽골과 내몽골, 만주 및 중국 화북지역에 국한되었다. 다른 중앙아시아의 칸국으로부터는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받는 선으로 협상하였다. 1260년 8월 쿠빌라이는 독자적인 지폐 교초를 발행했다. 1.4.2 아리크 부케 토벌과 내정 단속​ 남부 전선을 확보하기 위해 쿠빌라이는 일단 남송 외교를 시도하고 항주(杭州)로 사절을 보냈다. 산서성과 사천성에 있던 몽케 칸의 군대는 아리크 부케를 지지하였다. 쿠빌라이는 염희헌(廉希憲)에게 병력을 주어 사천성과 산서성에 보내 아리크부케의 지지자 류태평을 사살하고, 혼도하이와 아란타르를 제거하게 했으며 휘하 여러 장수들을 격파하였다. 1263년 6월 13일 쿠빌라이는 추밀원을 최고기관으로 설정하고 추밀원을 최고 군사기관으로 정했다. 둘째 아들 연왕 친킴(眞金)을 수중서령(守中書令) 겸 추밀원판사(兼樞密院判事)를 겸직하여 추밀원과 중서성을 장악하게 했다. 1264년 여름,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카와의 전투에서 그를 패배시키고 항복할 것을 강요했다. 1264년 8월 21일 상도(上都, 현, 카라코룸)에서 아리크 부케는 쿠빌라이에게 일단 항복하였다. 일설에는 7월 3일에 아리크 부카가 항복했다는 설도 있다. 승리 직후 쿠빌라이 칸은 즉시 여러 몽골 부족장 및 여러 울루스에 긴급 사절을 파견하여 쿠릴타이 회의를 다시 소집한다고 통보하고, 몽골 초원으로 동쪽으로 오도록 소환하였다. 4개의 소(小) 울루스 지도자들이 불참하였는데, 이는 칭기즈 칸의 유언의 원칙에서는 어긋났다. 서부 몽골 지역 및 정복지의 지도자들은 일단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인정하였다. 쿠빌라이는 참모들의 진언을 받아들여, 아리크 부카가 관할하던 영토를 분할하였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는 항복을 번복하고 끝까지 반발했으나, 아리크 부케는 2년 뒤에 죽었다.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케를 지지한 지도자들을 처형하였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를 지지했던 카이두와 두아가 제국의 서부에서 반기를 들어 몽골제국은 동부와 서부로 분열되었다. 이들은 쿠빌라이의 가까운 친척으로 카이두는 오고타이의 5남 카시의 아들이고, 두아는 차가타이의 장남 무투겐의 삼남 이슨 도아의 아들이다. 카이두는 차가타이 한국의 지지를 받아 몽골 타르박타이 산맥 근처에 정착, 원나라를 공격했다. 1267년 2월 25일 금나라의 중도(中都, 현 베이징 시)를 도읍으로 정하고, 금나라의 이궁(離宮)이었던 대녕궁(大寧宮)을 황궁 정전으로 하였다. 1272년 3월 4일 수도를 중도에서 대도(大都, 현 카라코룸)로 옮기고, 금나라의 구 성곽인 남성(南城) 외에 새로운 성곽 북성(北城)을 축성하였다. 1271년 12월 18일 조칙을 내려, 금나라 금 장종(金章宗)의 법률 태화율(泰和律)의 사용 금지를 명한다. 일단 몽골의 법률을 적용하게 하는 한편, 태화율을 참고로 법령 정비에 나선다. 1.4.3 지폐 발행과 유통​ 1260년 10월 지폐 중통원보교초(中統元寶交抄)의 발행을 명하고, 지폐를 시중에 대량 발행하였다. 화폐의 단위는 문(文)과 관(寬)이었으며, 지폐의 재질은 뽕나무의 속껍질을 재료로 사용했다. 동시에 금과 은, 동을 상당수 정부에서 독점화하고 유통은 지폐를 통해 사용하게 했다. 중통원보교초는 보통 A4 용지 크기였으나 길이가 일정하지 않아 33cm가 넘는 것도 있었으며, 지폐는 원나라 외에도 몽골 4개 칸국(汗國)과 원나라의 속국인 고려, 베트남 등에도 통용시켰다. 쿠빌라이는 친히 칙령을 내려, 중통원보교초의 사용을 거부할 경우 처벌하게 했다. 지폐의 존재를 모르던 서양, 중동의 상인들은 특이하게 봤는데,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 칸의 지폐를 종이에 금, 은과 같은 가치를 부여했다고 놀라워하며, 연금술이라 평가했다. 1.4.4 동방 정벌과 친중국화​ 쿠빌라이는 동방의 이민족 정복을 결심하고, 동방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중국 문명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확신하였다. 오고타이 칸과 몽케 칸 등 전임 몽고의 대칸은 요나라와 금나라의 변방 군사지역 정복으로, 이들을 끌어들이고 이들 영역 내 한인들을 포섭하고자 한족 문명과 접촉해왔고, 유교 사상과 불교, 도교 등 한족 문화에 대한 수용을 자주 표명하였으나, 대부분의 몽골 부족장들은 한족 문화 수용에 반대했다. 쿠빌라이 칸은 즉위 전부터 중국 문화에 깊이 관심을 기울였고, 이는 몽골의 보수적 부족장들의 의심을 사는 동시에 몽케 칸으로부터도 의심받았다. 쿠빌라이 칸은 황하 강과 양쯔 강 이남 한족의 영토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한족의 국가 통치와 유교 서건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마침내 카이핑을 중심으로 한족 식 행정기관을 설립하였다. 영토와 중국 지역, 그리고 몽고 제국 전체의 세력을 얻으려고 노력하면서, 쿠빌라이는 한족이 그를 중국 황제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를 위해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는 몽골 부족장 및 유목민족의 전통을 지키려는 몽골 부족장, 왕족들의 반감과 거부감에 봉착하였다. 1.4.5 태묘 설치와 유교적 제사 수용​ 쿠빌라이 칸이 한족 친화 정책을 펼친 것은, 한족이 몽골의 통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조치는 1263년 한족의 통치 체제를 모방하고 몽골 제국과 황실의 역사를 중국화하는 것이었다. 중국 문화와 제도를 일부 중서성 설치로 받아들였다면, 그는 중국식 제도와 풍습을 수용하는 것을 추진했다. 그는 사당인 태묘를 건설하고, 이후 몽골의 대칸은 묘호와 시호를 사후 추증하는 것을 정했다. 1263년 음력 3월 쿠빌라이 칸은 연경(후일의 대도)에서 칙령을 선포, 태묘 건립을 선언했다. 1264년 10월 정초, 쿠빌라이 칸은 7개의 신주를 태묘 사당에 모셨다. 1265년 11월 23일(음력 10월 14일) 쿠빌라이 칸은 태묘에 친히 제사지내고, 할아버지 칭기즈 칸에게 먼저 태조의 묘호를 추증했다. 1266년 9월 쿠빌라이 칸은 태묘에 8실을 정하고, 10월 태묘를 재정비했다. 승상 안톤과 바얀은 태묘에 봉안된 이들의 묘호를 정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평장사 조벽(趙璧)에게 이를 집행하게 했다. 이어 칭기즈 칸 이외에 오고타이 칸, 툴루이, 귀유크, 몽케에게 묘호와 시호를 올렸고, 그들의 정실 황후들에게도 시호를 올렸다. 동시에 예수게이, 주치, 차가타이 등에게도 묘호를 올렸다. 또한 1251년에 이미 황제로 추존된 아버지 툴루이의 시호를 경양황제로 개칭하고, 태묘 8실에 친히 제사지냈다. 이러한 관행은 한 전략가와 학자들이 쿠빌라이 칸의 새로운 정권에 참여하도록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중국 사서 "剑桥中国史——辽西夏金元"은 이러한 일련의 관행 제정이 쿠빌라이 칸의 중국 정복 및 중국에서 몽골 정권의 통치를 강화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한다. 쿠빌라이는“공자는 사람은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어야 능히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고, 집안을 다스릴 수 있어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자신의 집안을 엄하게 다스렸다. 쿠빌라이는 일찍부터 요추, 두북, 이덕휘, 동문용, 왕순, 이겸과 같은 유학자들을 뽑아 자신의 자제들에게 유가사상을 가르쳐 어릴 때부터, 익히게 하였다. 1.4.6 사할린 공략​ 1264년 쿠빌라이 칸은 군사를 보내 사할린을 공략하게 했다. 쿠빌라이는 국가를 운영하려면 세금을 기반으로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면 경제가 개선 될 것이라 판단하였다. 니야크와 오로크는 당시 몽골의 통치하에 있었다. 쿠빌라이가 보낸 군사는 사할린을 급습, 원주민 아이누와 싸웠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아이누 부족은 쿠빌라이 사후 1308년에 가서 몽골에 복종,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1.4.7 파스파 문자 제정과 사전 편찬​ 파스파 문자(Phags-pa characters, 八思巴文字)는 1265년 몽골 원나라(元) 국사(國師)인 파스파(八思巴)가 쿠빌라이(세조 世祖)의 명을 받아 몽골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든 문자로서, 몽골신자·방형몽골문자라고도 하는데, 파스파의 백부(伯父) 사펜이 처음 고안한 것을 파스파가 개량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파스파 문자는 몇년의 연구 끝에 1270년 제정되었다. 1282년에는 칭기즈 칸 사망 60주년을 기념하여, 학자들에게 명하여 몽골어 백과 사전 바르탄도르지 수무바타르(Балдандоржийн Сумъяабаатар)를 편찬했다. 원사에 의하면 바르탄도르지 수무바타르는 총 12권이었다 한다. 1.4.8 내정 정비와 인재 채용​ 그는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중국의 정치적, 문화적 모델을 채택하여 갈등을 줄이는 한편, 송나라 중기 이후 동안 엄청난 재력과 전력을 보유했던 지역 영주의 영향을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부터 약 1276년을 전후한 무렵까지 내정을 한인 고문에게 크게 의존하였다. 그는 유병충(劉秉忠) 외에도 허형(許衡)과 같은 한족 출신 고문을 중용하였고, 그 중 일부는 총독으로 임명하여 중국 화북 지역에 파견, 상주시켜, 이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쿠빌라이는 종종 직접 친히 과거를 주관하여 인재를 시취, 채용하였다. 남송 멸망 이전에 투항한 한인 관료와 남송 패망 후에 편입된 이들은 남인으로 분류하여 차별하였고, 몽골의 귀족 외에도 서역과 다양한 강역에서 초빙되어 온 학자들을 관원으로 채용하였다. 그러나 중국인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거두고, 몽골인 군인이나 무슬림을 지방관으로도 보내 한인, 특히 남인들을 견제했다. 1264년 8월 11일 영토를 중원지구(만리장성 이남, 태령, 화이허 이북), 동북지구(흑룡강 유역), 막남막북몽골초원전경(내몽골 및 외몽골), 서백리아지구(시베리아 남부 지역), 서역지구, 토번지구, 운남지구 등으로 개편, 지방을 정비했다. 쿠빌라이는 몽골의 여러 부족장, 카간들에게 성리학과 중국 문화, 중국식 행정 관제, 조세제도 제도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몽골 고원의 제부족장들, 카간들은 중국화에 반발했고, 쿠빌라이는 처벌로 대처하였다. 쿠빌라이는 중국문화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한편, 중국인 출신 자사, 총독, 부총독, 선위사, 안무사 등을 파견하여 통치하게 하고, 몽골의 부족장들을 견제하였다. 그밖에 정복지, 원정지에서 만난 무슬림 학자들 역시 재주에 따라 선별 채용, 30명의 무슬림이 쿠빌라이의 조정에서 고위 관리로 봉사하였다. 왕조의 12개 행정 구역 중 8개에 쿠빌라이늩 특별히 무슬림 출신 총독을 임명하였다. 원나라의 대부분의 지역은 행정관료인 총독과 부총독을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그는 툴루이가문의 인척인 진정(眞定)의 사씨(史氏)와 고성(藁城)의 동씨(董氏) 등의 도움을 얻어 중국인 세습적 봉건제를 폐지하고, 몽골의 부족들 역시 통폐합시켰다. 지역 호족들의 발호를 억제하였으며 각 주의 지사와 부지사를 쿠빌라이가 직접 임명하여 파견, 중앙집권제를 확립했다. 선위사와 안무사 등을 보내 이들을 돕거나, 견제하게 하고 지역 토착세력도 견제하였다. 또한 티베트 지역은 자치권을 부여하는 한편 제국의 중서성이 통치에 직접 관여하게 하였다. 1264년 9월 7일 직접 《지원개원소 (至元改元詔)》라는 칙령을 반포하고 연호를 지원(至元)으로 개정했는데, 이는 《역경 (易經)》의 내용 중 지재곤원지의(至哉坤元之義)에서 따온 것이다. 중통 5년은 지원 원년이 된다. 쿠빌라이는 대운하 재건, 공공 건물 수리, 도로 확장 정책을 펼쳐 경제력을 상승시켰다. 그러나 그의 국내 정책에는 옛 몽골의 관습법과 전통의 일부 반영되고 있었고, 이는 점차 중국식의 제도와 정책으로 변화해갔다. 쿠빌라이는 상인들은 중요한 국정의 파트너로 보고, 1262년 세금의 대상으로 선포했으며 그들을 감독하는 1268년에는 시장 세무부서를 세웠다. 이슬람, 위구르족과 중국 상인들을 장악, 정복은 자신의 작업을 확장 한 후 받는 남중국해와 인도양의 교역로와 상권을 확보했다. 1266년부터 쿠빌라이 정부의 주요 수입원은 소금 생산권의 독점이었다. 1268년 8월 13일 쿠빌라이는 당나라, 송나라의 어사대를 참고하여 어사대(御史台)를 설치하고 최고 감찰기관으로 하도록 정했다. 우승상 탕차르를 어사대부로 임명하고, 중국인 출신 관료 장웅비(張雄飛)를 시어사로 임명하였다. 1.5 정복 활동과 정치 활동​ 1.5.1 행정구역 개편​ 쿠빌라이는 중국 화북지역과 대도, 중도, 상도, 카라코룸 및 주변지역은 중서성이 직접 관할하게 하고, 각 지방은 몽골 황족의 울루스와 지방행정기관을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1264년 쿠빌라이 칸은 총제원(總制院)을 설치하고 그 책임자인 원사(院使)의 관질은 정2품으로 임명했으며 산하 관제를 편성하고, 선정원에 딸린 군대도 편성하여 선위사사도원수부(宣慰使司都元帥府)라 하였다. 뒤이어 총제원은 선정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불교 관련 사무를 관장하고 토번(지금의 티베트) 지역의 군정 사무를 담당했다. 또한 사천성 서쪽, 운남성 서북쪽은 직할령으로 두고, 티베트지역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대신 선정원이 티베트 지역의 행정, 군사 문제에도 관여하게 했다. 서하가 멸망하고, 코단이 통치하던 서량부와 옛 서하의 고도 흥경부(닝샤 은천), 녕하행성 등을 통합해 1261년 서하중흥행성을 설치하고 성장을 파견하였다. 1273년 폐지했다가 1281년 다시 부활, 1295년 다시 폐지했다가 1286년 선위사를 파견하고 감숙행성이라 하였다. 행성의 서북부는 오고타이와 코단의 후손들이 통치했고, 감숙행성의 북부 경계너머는 아리크부카 울루스가 있었다. 쿠빌라이는 이들 울루스들의 자치권을 인정했지만, 감숙행성을 통해 이들의 동태를 감시, 견제하였다. 금나라의 섬서등외행성의 자리는 1260년 진촉행성을 설치하고 경조부에 행성부를 두었다가 1262년 섬서사천행중서성으로 바꾸고 경조부에 본부를 두었다가 1273년 행성본부를 이주로 옮겼다가 도로 1287년 경조부로 옮겼다. 1288년에는 사천행성을 분성하여 사천성 일대를 별도로 다스리게 했다. 사천성에는 행성추밀원을 설치했다. 1269년 요양과 요동 주변에 동경행성을 설치했다가 대도에서 직접 관할하게 했다. 1278년에 요양에 선위사를 보내고 1286년 다시 동경행성을 설치했다가 1287년 요양행성으로 바꾸었다. 또한 흑룡강변에 요양행성 산하 정동원수부를 두었다. 이는 후대에 정동행성으로 개편되었다. 동북방에는 카사르 울루스, 카치운 울루스, 쿵그라트 울루스, 테무게 옷치킨 울루스 등이 있었고, 여진족에게도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요양행성에 파견한 지방관들과 군사들을 통해 이들 동방 왕가 울루스들과 여진족, 거란족의 동태를 감시하게 한다. 1267년 남송의 양양을 점령하고 남송 원정을 시작했다. 1268년에 양양에 하남강북행성을 설치하고 행성추밀원을 설치했다. 1274년 남송의 남부 해안가를 점령하고 호광행성을 설치, 우승상 아리카라를 상주시켰고, 1275년에는 아리카라에게 병력을 보내 형호북로를 확보하고, 염희헌 등을 보내 행성사무소를 강릉(현, 후베이성 형주)으로 옮겨 설치했다. 1276년 남송의 일부지역을 점령한 이후에 상하이와 절강성 일대에 강유등외행중서성을 설치했다가 1284년 항주로 사무소를 옮기고 1285년 강절행성이라 하였다. 1277년에는 강서등로행성중서성을 설치하고 1278년에는 강서행성병입복건행성을 설치했다가 1280년 복건행성을 분리시켜, 강서행성과 복건행성이 되었다. 1260년 영북행성의 유수 겸 도독이기도 했던 아리크부카가 스스로 대칸을 칭했다.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의 영지 중 하나인 영북행성은 화림행성에 흡수해버렸다. 또한 오고타이 칸국 근처에 북정도원수부와 화주총관부를 설치해 아리크부카 울루스와 오고타이계 군주들을 감시하게 했다. 1274년 대리총관부 주변에 운남행성을 설치, 구 대리국 지역과 주변지역을 감시하게 했다. 또한 운남행성과 함께 운남왕부를 설치하여 아들 후게치를 보내 다스리게 했다. 1.5.2 지방관 파견과 서역 학자 초빙​ 쿠빌라이 칸은 중국의 각 지역에 자사, 총독, 부총독을 직접 임명, 파견하여 통할하게 했고, 한인(漢人)의 세습적 봉건 제후제를 폐지하고 몽골의 제부족장 칸의 권한을 축소시켰으며, 파견된 지방관으로부터 직접 혹은 태자 친킴, 시중 등을 통해 정무를 보고받고 처리하는 등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였다. 또한 당나라와 금나라의 법률 제도를 참고하게 하여 법률 정비를 상시 추진하였다. 또한 세제를 정비하였고, 무슬림 출신 아흐메드에게 재무성을 맡겨 조세를 관장하게 했다. 오고타이 시대의 역참을 좀더 조밀하게 하고, 봉화와 파발, 역참의 관리를 강화하였다. 마르코 폴로는 당시 원나라의 통신, 전달 시스템이 완벽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쿠빌라이는 중근동의 학자와 과학자들을 초빙, 후원하였으며 아라비아 출신 천문학 자들은 산시성 천문대 건설에 참여하였다. 천문학자 자말 아드 딘 부카리(Jamal ad-Din Bukhari)는 새로운 천문장치 설치와 중국 달력의 보정을 허용 개념을 소개하였다. 또한 아라비아 출신 지도제작자들을 고용, 지도를 제작하게 하여 육로와 해로를 정확하게 기술하게 하였다. 이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모든 주변 인접 지역의 정확한지도를 만들었다. 또한 아라비아의 수학자들을 통해 중국에서 유클리드 기하학, 구면 삼각법 및 아라비아 숫자를 소개, 이를 배우게 했다. 쿠빌라이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또한 불교 경전, 기독교의 신구약과 율법, 이슬람의 꾸란, 도교의 노장사상, 형이상학에 관한 철학적 질문에 대한 자유로운 담론, 논쟁을 허용하였다. 무슬림 학자, 상인들을 초빙하여 관료로 임명하여 중국지역을 다스리게 하여 남송과 한인 세력을 견제하였고, 몽골에는 한인 관료들을 자사와 총독, 부총독으로 파견하여 몽골 귀족들을 견제하였다. 1.5.3 고려 복속 확정과 제1차 일본 원정 실패​​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다.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일부 자문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이 칸은 일부 몽골인 측근과 몽골 관리들의 제안에 따라 일본, 미얀마, 베트남, 자바 정벌을 단행한다. 고려 국왕인 충렬이 그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이후 고려의 역대 군주들은 원나라의 공주 혹은 종실의 딸과 결혼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인 동시에 외손이 된다. 1267년 쿠빌라이 칸은 기거사인(起居舍人) 반부(潘阜)에게 명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 쿠빌라이의 친서를 전달하게 했으나 일본은 쿠빌라이 칸의 친서를 무시하였다. 반부의 귀환 후 쿠빌라이는 고려 원종에게 조서를 보내 사신과 군사를 일본에 보낼 것이니, 중신(重臣)들을 보내 일본으로 인도할 것이며 원정을 방해하지 말라고 통지한다. 이후 쿠빌라이는 고려에게 공물의 양을 줄이는 대신,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고려의 협력을 종용하였다. 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 파나카티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1274년 쿠빌라이는 900척의 함대를 편성하여 고려로 보냈다. 이어 중국 남부에서 온 10만 명의 선원을 태운 배를 약 74m 간격으로, 3,500척을 보내고, 고려에서도 장정을 징발하여 일본으로 보냈다. 그해 10월 일본 근처에 도착했다.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으로 보냈으나, 쓰시마 섬,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이때 몽골의 선박은 다소 악천후 용골이 없는 강 보트를 기반으로 설계된 선박이라, 풍랑과 해일에 견디지 못하고 그의 함대는 파괴되었다. 일본에 대한 첫 공격 이후 일본 수군 와우코가 보복으로 고려의 남부, 남동부를 습격했다가 잔류 몽골군에 의해 퇴각했다. 쿠빌라이의 일본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할수 없었다. 일본 정벌 준비를 통해 원정 준비를 위해 설치한 출선기관인 정동행성과 고려정부가 일체화되어, 새로 속국이 된 고려는 원나라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5.4 1차 남송 원정​ 1268년 가을부터 친히 남송 정벌을 시작했다. 그러나 양양 태수 여문환(呂文煥)의 군사는 5년간 저항했고, 쿠빌라이는 퇴각과 재 원정을 반복했다. 그는 동생 훌라구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 아라비아 기술자들에게 투석 병기들을 제작하게 했다. 1273년 3월에 이르러 다시 남송을 본격 공략, 3월 14일 양양(襄陽)이 마침내 함락되고 양양 태수 여문환과 그의 일족이 투항, 남송의 방위시스템은 붕괴되었다. 쿠빌라이는 5년간 자신에게 철옹성으로 저항한 여문환의 군사 능력을 높이 평가해, 원나라의 장수로 받아들이고 환대하였다. 쿠빌라이는 명을 내려 원나라의 병사가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쿠빌라이는 한인 출신 장수들을 등용하는 한편, 남송의 장졸들에게 투항을 요구하였다. 1274년 7월 20일 여사정남소(興師征南詔)를 내려 남송 정벌을 선언, 친히 옛 남송의 천호, 만호 등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섰다. 방위 시스템의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1276년 2월 4일 바린 바얀(伯顔)에 의해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무혈 함락되었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그의 아내의 요청으로 그는 몽골 제국의 황족과 같은 예우를 하라 명하였고, 남송의 황족들은 몽골 황족의 예에 따라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1.5.5 대원 제국 선포​ 1271년 유병충을 재상에 임명했다. 1271년 12월 18일 쿠빌라이는 주역(周易) 십익(十翼)의 건괘(乾卦) 중 대재건원(大哉乾元)이라는 뜻과 역경(易經) 제1권에서 따서,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여 원 왕조를 창설, 스스로를 대원제국 황제이자 대몽골제국 황제로 선언하고 수도를 대도(大都, 'Grand Capital')로 옮겼다. 정식 국호는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 MongolДаян Их Монгол Улс)이다. 1272년 그는 중국 서북지역에 도시 상도(上都)를 건설하고 개평부(開平府)라 칭했으며, 이 지역은 여름 지역에 머무르는, 여름 수도로 지정했다. 이는 베네치아인 청년 무역가 마르코 폴로에 의해 제너두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소개되었다. 쿠빌라이는 황제 위에 오르기 전인 1256년, 유병충에게 자신의 거처를 건설할 것을 명하여 1258년 무렵에 완공하였던 곳이다. 상도에 대해 쿠빌라이와 마르코 폴로는 서둘러 그 내용을 《동방견문록》(Le Devisement du monde. 세계의 서술)이라는 고(古) 프랑스어 서적으로 내 놓았다. 쿠빌라이는 중국 남부에 있던 남송 정벌을 기획했다. 쿠빌라이 칸은 대도 주변에 큰 정원을 조성하였는데, 사절을 시켜 각 나라에서 과일 나무를 가져와 정원과 과수원을 조성했다. 1273년 4월 2일 둘째 아들 친킴(真金)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책봉 조서에서 칭기즈 칸이 적통인 오고타이 칸을 후계자로 지정했다고 하였는데, 이후의 군주들이 적통임을 언급하는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규유크 칸과 몽케 칸을 그가 정통으로 보았는지 의심하기도 한다. 1274년 2월 9일 그는 대도 황궁의 정전 대명전(大明殿)을 새로 지어 이어하고, 조회를 시작하였다. 태자 친킴과 제친왕, 족장 및 고려 군주 원종이 대도로 와 조회에 참여, 하례하였다. 쿠빌라이 칸은 대도를 화려하게 조성하였다. 대도와 상도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 부자에 의해 유럽에 전해지고, 마르코 폴로의《동방견문록》에 소개된 이후, '부의 도시'로서 구전되었다. 영국의 시인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작품인 《쿠빌라이 칸》에서 소개됐고, 미국의 영화 감독 오슨 웰스의 작품인 《시민 케인》에서 제너두(Xanadu)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였다. 이후 1977년 캐나다의 록 밴드인 러시가 《제너두》라는 노래를 불렀으며, 1980년 미국의 영화 감독인 로버트 그린왈드가 《제너두》라는 영화를 제작하였다. 1.5.6 우구데이 칸국과 갈등​ 1266년 아리크 부케의 죽음 이후, 쿠빌라이 카안의 5촌 조카이며 오고타이 칸의 손자 카이두는 아리크 부케의 계승을 선언, 일부 동몽골의 부족장들과 투르크족 족장들의 지지를 얻어 쿠빌라이를 공격하였다. 평소 우구데이 칸국을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자신의 넷째 아들인 노무간에게 대군을 주어, 승상 안톤, 서자 코코추 등을 딸려보내, 제국의 서북방 국경(현, 신장 웨이우얼 자지추 주변)으로 파견, 우구데이 칸국과 맞서게 했다. 이 원정군에는 몽케의 아들인 시리기(Sirigi), 아리크 부케의 아들인 요부쿠르, 멜릭 테무르가 있었는데, 이들은 1276년에 진중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과 코코추를 사로잡은 뒤, 킵차크 한국에 넘겨 버리고 자신들은 카이두에게 의탁했다. 노무간은 1278년에야 탈출에 성공한다. 코코추는 1284년에 대도로 송환되었다. 1.5.7 2차 남송 원정과 정복​​ 1276년 쿠빌라이는 회유책으로 귀부안민소(歸附安民詔)를 반포, 새로 편입된 강남 지역의 주군현 관리및 사졸군민에게 새 질서를 받아들이고 안정적으로 생업에 종사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육수부 등은 쿠빌라이의 회유를 거부, 송 단종과 동생 조병을 데리고 도피, 해상유망정권을 세우고 쿠빌라이 군에 저항하였다. 남송의 장군 문천상이 원나라와 강화를 체결하고자 장군 바얀에게 왔다가, 문천상을 사로잡았지만 곧 탈출, 문천상은 육상에서 원나라에 저항한다. 1276년 이후 다시 결집하여 저항하려는 여진족을 토벌하고, 만리장성 밖에 있던 거란족의 잔당을 궤멸, 몰살시켜 내몽골과 만주 지역을 평정하였다. 또한 일부 군사를 보내 위구르 족과 티베트를 정벌하였으며, 옛 서하 지역의 부흥 운동 역시 좌절시켰다. 1278년 육상에서 저항하던 남송 장군 문천상군을 상대, 장홍범 군에 의해 오파령 전투 궤멸당했다. 장홍범은 문천상을 사로잡는데 성공, 대도(지금의 베이징)로 압송하였다. 쿠빌라이는 사람을 보내 장군이면서 뛰어난 문인이던 문천상을 회유, 여러번 설득을 했으나, 그는 완강하게 거부하고 옥중에서 정기의 노래를 읊었고, 곧 재투옥시켰다. 1283년까지 문천상을 설득했지만 충신은 두 주군을 섬기지 않는다는 요지의 말만 되풀이하고 거절, 결국 1283년 1월 문천상은 처형당한다. 문천상의 사형 선고를 접한 쿠빌라이는 문천상의 사형을 당장 중지할 것을 지시했으나, 이미 문천상은 처형당한 뒤였다. 그 후, 다시 남송 정벌군을 편성하여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 3월 19일 애산 전투에서 최종 전멸시키고,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송사에 의하면 일주일 뒤, 십만여 구의 시신이 해상에 떠다녔다 한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옛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1.5.8 월남 공략 실패와 2차 일본 원정 실패​​ 그러나 그 후 이루어진 군사원정은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났다. 1281년 다시 일본에 군대를 보냈으나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고, 1285년과 1288년에는 베트남에 침공한 군대가 차례로 패배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북방 지역을 차지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1276년 중앙아시아에서 하이두와 대치하던 원나라 군대에서 몽케의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하이두의 세력 확대를 허용시켰다. 1280년 쿠빌라이 칸은 2차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 위한 기구로 만주지방과 고려 개경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정동행성)을 설치한다. 1281년 5월 전함 900척에 몽골인 및 한인으로 연합한 부대 및 고려인으로 편성된 동로군(東路軍) 5만 명, 전함 3,500척에 남만(南蠻)의 범문호(范文虎)가 이끄는 강남군(江南軍) 10만 명을 황해상으로 일본에 보냈다. 그러나 그해 6월 2차 일본 정벌 중 쓰시마 주변에서 허리케인이 발생, 여원 연합군 함대 다수가 침몰했다. 원나라 군 약 10만~20만 명, 고려인은 7,000여 명이 해상에서 익사했다. 일본은 허리케인이 자신들을 지켜주었다 하여 신풍(神風, 가미카제)이라고 불렀다. 생존한 원-고려 연합군은 다카시마 해변 서쪽에 도착, 불이 붙은 화살로 연속 공격하였다. 그러나 생존 부대는 곧 일본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1281년 6월 23일 배를 타고 하카타 만에 도착한 고려군은 중국, 몽골에서 온 배가 도착하지 않아 단독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멸하였다. 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하였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으며, 중국 내에서도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했다. 또한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이것도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참파 공략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루트의 개척에 뜻을 둔 경우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는 성과를 올렸다. 1293년에 다시 원나라 군대를 보내 오키나와를 공격, 일본인 100명을 체포하였다. 1.5.9 카이두의 봉기와 갈등​​ 1277년 오고타이 칸의 손자이며, 그의 다섯째 아들 카시(合失)의 아들인 카이두가 아리크 부케의 계승을 선언하고, 쿠빌라이의 형 몽케 칸의 아들 시리기, 사촌 사르반등을 이끌고 상도로 진격, 쿠빌라이는 장군 바얀을 보내 카이두를 상대하게 하고, 격파하였다. 카이두의 거병으로 미얀마 정벌을 일시 중단하였다. 1287년 카이두는 만주와 동몽골을 영지로 하는 카사르의 후손 식투르, 카치운의 후손 카다안,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인 나얀과 동맹을 맺고 다시 쿠빌라이와의 전쟁에 나섰다. 카이두는 이어 몽골 동부 지역의 부족장들과도 결탁, 군사를 이끌고 다시 상도로 갔다. 1288년 몽골 동부 군대의 맹주인 나얀은 쿠빌라이의 친위대와 결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쿠빌라이에 의해 처형당했다. 쿠빌라이 칸은 카이두에게 협조했던 몽골 동부지역의 칸들을 몰살시키고, 친히 카이두를 상대하였다. 나얀 등이 패한 이후 대부분의 반란 가담 세력들은 쿠빌라이에 항복하였다. 쿠빌라이가 몽골 동부로 간 사이 카이두의 군사가 우세하였다. 동쪽 반란군과 함께 상도로 진군했던 카이두는 쿠빌라이의 손자인 카말라를 격파하는 등 우세한 전황을 유지했지만 나얀을 평정한 쿠빌라이가 본군을 이끌고 상도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회군하였다. 이 원정이 실패한 후 카이두는 산발적인 전투를 몇 번 더 벌였으나 바얀의 방어에 막혀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이후로도 카이두는 쿠빌라이의 종주권에 반발, 끊임없이 쿠빌라이와 갈등하였다. 1289년 쿠빌라이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카이두를 상대했지만, 체포하지 못하고 원나라 국경 밖으로 쫓아낸 뒤 철수하였다. 1.5.10 미얀마, 캄보디아 원정 및 자바 원정​ 1277년 쿠빌라이는 군사를 보내 미얀마를 공략했으나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1283년, 1287년에 다시 몽골 군을 보내 미얀마를 원정하여 이라와디 삼각주까지 점령했다. 일단 쿠빌라이군은 버마의 수도 바간을 점령하고, 새 정권을 세운 뒤 종주권만 인정받는 선에서 회군, 퇴각하였다. 1283년 태국을 공격, 크메르 제국의 자야바르만 8세는 몽골에 복속, 종주권을 거부했다. 1273년 자야바르만 8세는 쿠빌라이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하고 몽골 사절을 수감하였다. 1275년 쿠빌라이는 혹시 모를 남송 황제와 귀족들의 탈출로를 막기 위해 운남 성에 국경 지대를 확보하라고 명령했고, 태국에서 국경지대의 원나라 군대 주둔에 이의를 제기하자, 칸은 전쟁을 선포한다. 쿠빌라이는 군사를 보냈고, 1283년 자야바르만 3세는 쿠빌라이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공물을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1283년에 참파 에서 육로를 통해 캄보디아 남쪽으로 진출을 시도, 캄보디아 북부를 점령했다. 1284년 캄보디아는 원나라에 속국이 되고, 조공을 바쳤다. 1286년 6월 나라 티하파테가 이를 거절했으나, 논의 끝에 버마는 1287년 1월 원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조약에 동의하고 대도로 보냈다. 쿠빌라이는 1293년 자바 섬 정벌을 기획, 2만~3만명의 해군을 징발하여 원정 을 시작 했지만, 인도네시아를 침략 한 몽골 군은 더위로 인한 열사병, 탈수, 고열, 말라리아 등으로 3000~5000여 명 이상의 병력이 상당한 손실을 입은 후 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이가 죽은 해인 1294년에 태국의 수코타이 왕국과 치앙마이 왕국은 확실히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1.5.11 후계자 내정​ 쿠빌라이는 사후 황제위를 놓고 벌어질 갈등을 대비, 황태자를 미리 세워서 후계 문제에 따른 분란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친킴은 무슬림 재무관료들을 극도로 미워하여 갈등이 생겼고, 이는 쿠빌라이와의 갈등으로 이어지다가 알콜 중독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친킴 다음으로 후계자로 지명한 다르마발라는 6년만에 병으로 대도에서 진료를 받던 중 사망한다. 1287년 쿠빌라이 카안은 카단의 반란을 정벌하려고 군사를 일으킨 뒤 테무르를 임명하고 마침내 반란을 진압했다. 1292년 봄, 쿠빌라이 칸은 다르마발라의 병사를 계기로 1293년 4월 14일 황태자의 인장을 테무르에게 건네주고, 군을 위문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라고 하고, 왕위를 약속하였다. 테무르는 군사적 경험을 통해 북부 지역 군대의 권한을 장악하였다. 1294년 경의 원나라 1.6 생애 후반​ 1.6.1 제2차 베트남 원정​ 1284년 6월 쿠빌라이는 아들 토곤을 진남왕(鎭南王)에 봉했다. 그리고 7월 참파를 정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남왕위는 대원 왕실서열 제도에서 6계급 중 2위에 위치하는 고위직 왕호로 제 4-5위의 왕호 밖에 부여받지 못한 다른 서자(후게찌, 아우루쿠찌, 코코츄 등)에 비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는 쿠빌라이가 토곤의 남방 정복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되고 있다. 1285년 1월 토곤의 군사는 방 키에프(하노이 북동쪽)와 탕롱(현, 하노이)를 점령했고, 소케투가 이끄는 토곤의 제2진 부대는 참파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베트남의 중북부 지역을 점령했다. 쩐 성종은 일단 그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쩐흥다오는 '항복을 하려거든 신(臣)의 목부터 먼저 베소서'라며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쩐 성종과 대월군 총사령관 쩐흥다오는 그들의 전술을 방어에서 공격으로 바꾸고 몽골을 공격했다. 4월에 쩐쾅가이(陳光啓)가 소게투를 전사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군을 크게 대패했다. 쩐흥다오 군도 함투(Hàm Tử, 현재의 흥옌)에서 전투에서 토곤 군대를 격파하였다. 베트남군의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토곤은 대월의 궁수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청동 파이프 안에 숨었다. 토곤이 청동 파이프로 숨은 일은 몽골 제국과 토곤 자신에게 굴욕감을 가져다 주었다. 안남의 패전에 분노한 쿠빌라이 칸은 죽을 때까지 토곤이 대도로 알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6.2 제3차 베트남 원정과 실패​ 1288년 4월 초 쿠빌라이는 해군을 베트남 원정에 파병, 오마르가 이끄는 보병을 딸려 보냈다. 몽골의 해군 함대는 박당강을 거쳐 대월을 공격했다. 곧 교량과 도로가 파괴되고 대월 부대가 공격을 개시하자, 몽골 군은 보병 호위없이 박동에 도착했습니다. 대월은 미리 병력 일부를 매복한 뒤, 작은 소 함대가 전투에 참여하고 후퇴하는 척했고 몽골 인들은 대월 군대를 추격했다. 매복해 있던 수천 대의 작은 베트남 함대가 양면에서 몽골 함대를 공격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몽골군은 다시 바다로 나가려 했고, 중간에 좌초되어 침몰하였다. 강둑으로 패주하던 몽골군은 육지에서 기다리던 쩐흥다오가 이끄는 군대에게 격파당했다. 같은 해 말에는 토곤은 안남(대월 쩐 왕조)에 이르러 군을 나누어 대월을 침공했다. 그러나 대월의 장군 진국준(陳国峻)의 활약으로 원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1288년 박당강 전투에서 토곤이 이끄는 원군은 대패를 당했으며, 오마르가 포로로 잡혔습니다. 1288년 말 토곤은 몽골군을 이끌고 베트남에서 퇴각하였다. 그럼에도 쩐 성종은 몽골과의 갈등을 피하려고, 일단 원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약속하였다. 1291년 패퇴한 토곤은 명을 받아 몽골군 500명과 한인 병력 1000명과 함께 양주에 출진했다. 하지만 안남의 패전에 분노한 쿠빌라이는 죽을 때까지 토곤이 알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토곤은 쿠빌라이가 사망할 때까지 양주로 추방당했다. 1.6.3 만년과 최후​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이면서도 유교 경전을 탐독하고, 유교에서도 일정부분 영향을 받아, 자신의 정책에 반영하였다. 1271년부터 재위기간 중 금 장종의 법률 태화율을 참고하고, 유학자들을 통해 법령을 정비, 1291년 국법 지원신략(至元新格)을 반포하였다. 계속 된 정벌과 정복 사업의 강행으로 장정들이 사라져 나라의 육체노동력이 황폐해졌고, 군비 조달로 인한 세금수요 증가와 재정난의 증대는 재정의 악화를 가져왔다. 이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상인들의 교역과 무역을 적극적으로 장려, 지원했는데, 이슬람교도 출신 서역 상인들과 위구르인 상단 등 주로 색목인(色目人) 계통의 상인들의 중국 진출을 허용함과 동시에 이들 색목인 출신 신흥 관료를 발탁하여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토목 공사를 통해 몽골 지역의 초원으로도 물을 공급하려 하였으나, 잇단 전쟁으로 장정들이 사라져서 수로 개척 공사는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만주에서 티베트, 중앙아시아까지 제국 각지에서의 잇단 반란과 그칠 줄 모르는 통치권 도전으로 시끄러웠다. 킵차크 칸국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던 장남 친킴이 풀려나 돌아왔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친킴을 북방으로 쫓아냈고, 친킴은 자신이 쫓겨난 것을 불쾌히 여겼다. 황후 차부이 카툰이 1281년 3월 20일에 죽고, 1286년 1월 5일 장남 황태자 친킴이 알콜중독으로 병사하자, 그는 우울감과 고독에 시달렸다. 1283년 차부이 카툰이 추천한 남부이 카툰과 재혼하였다. 1285년에 일부 신하가 그가 친킴에게 양위하고 물러나야 된다는 발언을 했다가 그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신하들을 처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이 일로 태자 친킴을 두려워했고, 친킴은 전전긍긍하였다. 베트남 정벌 실패와, 2회의 일본 원정 실패 역시 그에게 실의에 빠지게 했다. 그는 후처 남브이 카툰과 두 딸에게 정치 업무를 일임하고, 폭음과 폭식을 거듭했다. 또한 알콜에 중독되었는데 그가 말년에 즐겨마시던 술은 포도주였다. 1287년 4월 칭기즈칸의 동생 벨구테이의 4대손으로 몽골 동부지역의 영주이던 나얀이, 계속된 일본 정벌 실패 등에 불만을 품고 거병, 반란을 일으켰다. 1274년에 쿠빌라이가 여진족을 시켜서 동북부를 견제한 것이 불만의 시작점이었다. 쿠빌라이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다. 이때 카이두도 동시에 카라코룸을 공략하면서 서쪽으로 원나라를 침공하자, 바얀에게 군사를 딸려보내 패퇴시켰다. 쿠빌라이는 황하 강변에서 나얀 군대를 패배시키고 친히 나얀을 체포, 사형에 처하고 서부로 가 카이두와 교전했다. 카이두는 1289년 철수하였다. 1289년까지 그는 나얀을 지지하는 세력을 소탕하였다. 1287년 12월 4일 랴오닝 지방의 나얀의 영지를 몰수, 관료를 파견하여 중국식 행정구역으로 개편했다. 만년의 쿠빌라이는 폭음과 폭식으로 인한 소화불량과 위장질환, 통풍,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혈전을 앓았다. 아리크 부케와 그의 잔당이던 두아 등 한국의 리더들의 반발과 반란에 봉착하는 가운데 1294년 2월 18일 대도 황궁 자단전(紫檀殿)에서 79세를 일기로 병사한다. 합리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중국의 사상에 매료되었는데, 주로 유교 사상 보다는 상앙과 이사의 법가 사상에 더욱 관심을 가졌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용인술에 뛰어났다. 1.7 사후​ 시신은 1294년 2월 20일 발인, 영여는 대도를 떠나 현재의 몽골 켄티 주의 부르칸칼둔에 매장되었다. 원사에 의하면 기련곡(起輦谷)에 매장되었다고도 한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5월 10일 손자 테무르가 상도에서 즉위, 그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두아 등 서북의 카안들의 반란은 계속되고, 제국의 북방은 쿠빌라이 사후 한동안 혼란에 빠졌다. 반란을 일으킨 서북의 칸국들은 1303년 손자 테무르와 최종 협상, 형식적인 종주국의 지위를 회복했다. 몽골식 존호는 세첸 칸, 설선황제로 몽골어로 현명, 예지(睿智)를 뜻한다. 여진족은 그를 호필내(呼必賚)라 불렀다. 청나라 때 건륭 말년에 건륭제의 명으로, 사서에서 그의 명칭을 홀필렬에서 호필내로 개정되도록 했다. 이는 청나라 멸망 후 회복되었다. 3. 가족관계​ 조부 : 추존황제 태조(太祖) 칭기스 칸 조모 : 추존황후 광헌익성황후(光獻翼聖皇后) 옹기라트씨 아버지 : 추존황제 예종(睿宗) 툴루이 칸 어머니 : 추존황후 헌의장성황후(顯懿莊聖皇后) 케레이트씨 형제 뭉케 칸 - 몽골 제국의 4대 대칸 홀도도 - 일설에는 다른 여성 소생이라는 설이 있다. 훌라구 - 일 칸국의 초대 대칸 아릭 부케- 몽골제국의 대립 대칸 3.1 후비​​ 제1오르도첩고륜 대황후(帖古倫 大皇后) 옹기라트씨 또는 퇴그렌 - 쿠빌라이의 원비(元妃) 제2오르도소예순성황후(昭睿順聖皇后) 옹기라트씨 - 쿠빌라이의 정후(재위 : 1260년 ~ 1281년) , 본명은 찰필(察必) 남필 황후(南必 皇后) 옹기라트씨 - 쿠빌라이의 계후(재위 : 1283년 ~ 1294년) 제3오르도탈랄해 황후(塔剌海 皇后) 노한 황후(奴罕 皇后) 제4오르도오식진 황후 허올신씨(烏式眞 皇后 許兀愼氏) 그 외속가답사 황후(速哥答思 皇后) 백요올진 황후(伯要兀眞 皇后) 활활륜 황후(闊闊倫 皇后) 알자사 황후(斡者思 皇后) 욱실진 황후(旭失眞 皇后) 타로별진 황후(朶魯別眞 皇侯) 살불홀 비자(撒不忽 妃子) 팔팔한 비자(八八罕 妃子) 살불홀 비자(撒不忽 妃子) 아속진 비자(阿速眞 妃子) 올내홀내 비자(兀乃忽乃 妃子) 3.2 자녀​ 아들1.도르지 황자(朶兒只 皇子) - 소예순성황후 소생. 요절함 2.명효태자(明孝太子) 진금(眞金) - 소예순성황후 소생. 원나라 제2대 황제 성종(成宗)의 아버지 3.진왕(秦王) 망갈라(忙哥剌, ? ~ 1280년) - 소예순성황후 소생. 4.북안귀정왕(北安歸定王) 노무간(那木罕, ? ~ 1292년) - 소예순성황후 소생. 5.운남왕(雲南王) 후게치(忽哥赤, ? ~ 1271년) 6.아야치 황자(愛牙赤 皇子) - 페르시아계 사서 집사에 의하면 오식진 황후 허올신씨 소생. 7.서평왕(西平王) 오그룩치(奧魯赤, ? ~ 1303년) 8.영왕(寧王) 쿠쿠추(闊闊出, ? ~ 1313년) - 페르시아계 사서 집사에 의하면 오식진 황후 허올신씨 소생. 9.진남왕(鎭南王) 토곤(脫歡, ? ~ 1301년) 10.쿠틀루크 테무르 황자(忽都魯帖木兒 皇子) 11.테미치 황자(鐵滅赤 皇子) - 남필 황후 소생. 요절함 딸1.조국대장공주(趙國大長公主) 월렬(月烈) - 생모미상(生母未詳), 조무양왕 애불화(趙武襄王 愛不花)에게 하가(下嫁) 2.창국공주(昌國公主) 오로진(吾魯眞) - 생모미상(生母未詳), 패화(孛花)에게 하가(下嫁) 3.창국대장공주(昌國大長公主) 다륜(茶倫) - 생모미상(生母未詳), 첩감간(帖監干)에게 하가(下嫁) 4.노국장공주(魯國長公主) 완택(完擇) - 생모미상(生母未詳), 알라진(斡羅眞)에게 하가(下嫁) 5.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낭가진(囊家眞) - 생모미상(生母未詳), 알랄진(斡剌眞), 첩목아(帖木兒), 만자태(蠻子台)에게 하가(下嫁) 6.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 생모(生母)는 야속진 비자(阿速眞 妃子), 고려 충렬왕 왕거(高麗 忠烈王 王昛)에게 하가(下嫁) 7.공주(公主) - 남송 공제 조현(南宋 恭帝 趙㬎)에게 하가(下嫁) o o o 영화음악 16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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