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무덤에서 나온 광개토왕 그릇[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 검토가 진행되고 있으니, 언젠가 호우의 비밀이 풀릴 수 있기를 바란다.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
동아일보 > 오피니언 |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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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예술혼이 담긴 그릇, 금관[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동아일보 > 오피니언 |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50년을 이은 교훈, 백제 무령왕릉 발굴의 비밀[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 앞으로 다시 5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또 어떤 비밀이 새롭게 밝혀질지 몹시 궁금하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
동아일보 > 오피니언 |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70145
박정희가 말타고 달렸다더라
베일 벗는 靑, 최고 인기코스
[청와대 백과사전❶] 내일 전면개방…미리 보는 열두 공간의 비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70195
서울의 새로운 핫플 '청와대', 역사 알고 가면 더 흥미로워
정혜선 기자 입력 2022. 05. 19. 17:18 댓글 50개74년만에 개방된 ‘청와대’가 서울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서울관광재단은 청와대 개방행사에 맞춰 청와대의 건물들과 그 안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번 청와대 개방을 통해 대통령의 집무실인 본관과 부속 건물들은 물론 일반인들에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대통령의 생활공간인 관저까지 모두 시민에 공개됐다. 시민에게 공개된 청와대는 곳곳에 한국적인 미가 녹아있으면서도 현대적이고 세련된 멋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건축과 자연풍경을 전시한 박람회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외국의 유명 궁전이나 공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워 가볍게 방문해도 좋지만, 알고 가면 더 재밌고 흥미로운 곳이 청와대다. 본격적인 여행에 앞서 900년을 훌쩍 넘는 청와대의 역사를 소개한다.
청와대가 자리한 북악산 남쪽의 역사는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104년 고려 숙종 때는 북악산 아래 별궁을 짓고 남경으로 삼았다. 고려 남경의 별궁이 있었던 자리가 지금의 청와대 인근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된 뒤 청와대 자리에 경복궁 후원이 조성됐으며, 이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폐허가 되면서 방치돼 있다가 조선 말 고종 때에 이르러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되며 경무대라는 이름의 후원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그 자리에 조선 총독의 관사를 지었다. 총독관사는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역대 대통령들의 집무실 및 관저로 이용되다가 1991년 지금의 본관 건물을 새로 지어 집무실을 옮기게 됐다.
이처럼 1104년 고려부터 시작해서 조선, 일제강점기 그리고 지금까지 청와대는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권력자의 땅이었다. 그랬던 청와대가 이제 시민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서울의 새로운 핫플(핫플레이스)이 된 청와대 시설물과 그 공간의 숨은 이야기를 만나보자.
청와대의 얼굴 ‘본관’
청와대 본관은 조선총독부의 관사를 대통령의 집무실로 사용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1991년에 만들었다. 한옥에서 가장 격조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지붕을 올리고 15만여 개의 청기와를 얹었으며, 본관 앞으로는 대정원이라고 이름 붙은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청기와는 청자의 나라였던 고려 시대부터 사용돼 조선 전기까지 궁궐 지붕에 쓰였던 기록이 남아 있다. 청기와를 만들기 위해선 전략자산이자 화약의 핵심 원료 염초(질산칼륨)가 다량으로 필요했다. 자연적인 초석 광산이 없던 한반도에서 염초는 그 생산이 매우 어려웠으며 군사용으로도 늘 재고가 부족했다. 그만큼 청기와는 중요한 건물에만 사용됐다.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청기와는 창덕궁에 있는 선정전이 유일하다.
본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햇빛에 반짝이는 청기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본관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현관 통로 지붕과 본관 건물의 지붕이 계단처럼 연결된 듯 보여 거대한 파도의 푸른 물결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청와대 본관의 지붕에는 잡상 11개가 있다. 경복궁의 근정전에 잡상이 9개가 있는데 청와대가 근정전보다 격이 더 높은 셈이다. 전체적인 건물 구조는 궁궐의 목조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한국적인 미가 담겨 있으면서도 팔작지붕이 중후한 느낌을 더한다.
측면에서 바라본 청와대 본관의 현관/사진=서울관광재단청와대의 아늑한 숲 ‘소정원’
본관에서 소정원을 통해 관저로 향할 수 있다. 대정원이 넓은 잔디밭이었다면 소정원부터는 아늑한 숲이다. 정원 사이로 난 숲길이 아기자기하다. 숲의 나무들도 꽤 울창해 햇빛이 파고들 틈이 없을 만큼 그윽한 그늘을 만든다.
숲은 사방으로 연결돼 청와대 부속 건물 곳곳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가 돼준다. 자연을 통해 막힘없이 공간이 연결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 방식인 차경(借景, 자연을 빌려 정원으로 삼는다)을 떠올리게 한다.
본관과 관저 사이에 있는 소정원의 풍경/사진=서울관광재단경무대의 흔적 ‘수궁터’
관저로 넘어가는 길에는 수궁(守宮)터가 있다. 경복궁을 지키던 병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이 일대를 경무대라고 불렀는데, 조선총독부가 전각을 허물고 총독관사를 지었다. 광복 이후에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다가 지금의 청와대 본관을 지으면서 총독관사는 철거했고, 현재는 총독관사 현관 지붕 위에 장식으로 놓여있던 절병통만 옛 자리에 놓아 과거를 기억하고자 했다.
수궁터에는 수령이 700년이 넘는 주목이 오랜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고려 시대부터 이 땅을 지키며 격동의 대한민국을 바라봤을 나무인 셈이다. 절병통은 주목 뒤쪽으로 이어진 잔디밭 위에 놓여있으므로 주목을 먼저 찾는다면 절병통도 발견하기 쉽다.
수령이 700년이 넘은 주목, 청와대의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사진=서울관광재단대통령의 사적 공간 ‘관저’
수궁터를 지나 오르막길을 약간만 오르면 관저에 도착한다. 관저는 본관과 마찬가지로 팔작지붕에 청기와를 얹은 전통한옥 구조로 이뤄져 있다. 생활공간인 본채와 접견 행사 공간인 별채가 ‘ㄱ’자 형태로 자리 잡고 있고, 그 앞으로 마당이 있다. 마당 한쪽에는 사랑채인 청안당이 있으며, 관저 바로 앞에는 의무실이 있다.
청안당은 사랑채로 '청와대에서 편안한 곳'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관저와 마당에서 역대 대통령들이 잠시나마 근심과 걱정을 잊고 마당으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쉬어가는 시간을 보냈던 모습을 상상해본다.
관저 정문/사진=서울관광재단청와대의 문화유산 ‘오운정’과 ‘미남불’
관저 뒤로 이어진 숲길로 난 데크를 통해 언덕으로 올라가면 청와대 내의 역사문화유산인 오운정과 미남불(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을 볼 수 있다.
오운정은 조선 고종 시대에 경복궁 후원에 지어졌던 오운각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오운(五雲)은 ‘다섯 개의 색으로 이루어진 구름이 드리운 풍경이 마치 신선이 사는 세상과 같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현판은 어린 시절부터 붓글씨에 능통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글자이다. 오운정 아래로는 짙은 숲이 펼쳐지고, 초록빛 나무 틈 사이로 청와대 관저와 종로 일대의 풍경이 얼굴을 내민다. 오운정을 지나 보물로 지정된 미남불(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로 가는 길에는 시야가 트여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포인트가 있으니 풍경을 감상하기도 좋다.
미남불(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은 석굴암 본존상을 계승하여 9세기에 조각된 것으로 자비로운 미소를 띤 부처님의 얼굴과 당당한 풍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통일신라 전성기의 불교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로 생김새가 멋스러워 ‘미남불’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본래 경주에 있던 것이 일제에 의해 서울 남산의 총독관사에 놓였다가 청와대 자리로 총독관사를 옮기면서 함께 이곳으로 왔다.
그 생김새가 멋스러워 미남불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사진=서울관광재단외국 귀빈을 위한 한옥 ‘상춘재’
상춘재는 외국 귀빈들을 맞이하는 의전 행사나 비공식 회의 장소로 사용된 한옥이다. 과거에는 조선총독부가 지은 일본식 목조건물인 상춘실이 있었던 장소였으나, 청와대 내에 한옥의 아름다움을 외국 손님에게 소개할 장소가 없었기에 1983년에 200년 이상 된 춘양목을 사용해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된 우리의 전통 가옥을 지었다.
상춘재 앞에는 120여 종의 나무가 심어진 녹지원으로 연결된다. 한옥과 숲을 동시에 감상하기 좋은 공간으로 외국에서 국빈이 오면 상춘재에서 만찬을 진행했었다.
상춘재 위로는 1900년대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침류각이 있다. 침류각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으며 1989년 관저를 신축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왔다고 한다.
우리 전통 가옥을 외빈에게 보여주는 공간이자 만찬 회담을 하는 상춘재/사진=서울관광재단청와대의 숲 ‘녹지원’
녹지원은 청와대 경내 최고의 녹지 공간이다. 넓은 공간으로 구성 돼 대통령과 국민이 만나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던 공간이다. 120여 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들이 곳곳에 있어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또한, 녹지원에는 한국산 반송(盤松)이 있는데 그 수령이 170년을 넘었다.
녹지원/사진=서울관광재단청와대의 프레스센터 ‘춘추관’
대통령의 기자 회견 장소이자 출입 기자들이 상주하던 춘추관이 있다. 고려와 조선의 역사 기록 기관이던 춘추관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언론의 자유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춘추관 앞 잔디밭(헬기장)에는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청와대 개방 기간 중에는 간이 텐트와 빈백이 놓여있다. 알록달록한 간이 텐트가 찾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고,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가 병풍처럼 펼쳐져 풍경도 제법 좋다.
춘추관 앞의 휴식공간, 간이 텐트가 있어 캠핑 분위기가 난다./사진=서울관광재단국빈들을 위한 공식 행사장 ‘영빈관’
청와대 본관 쪽으로 돌아가 왼쪽으로 가면 영빈관이 있다.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 행사를 열었던 건물이다.
우리나라를 알리는 각종 민속공연과 만찬이 열리는 행사장으로 쓰이거나 회의와 연회를 위한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형태이며 특히 앞의 돌기둥 4개는 화강암을 통째로 이음새 없이 만들어 2층까지 뻗어 있다. 정면에서 보는 영빈관은 웅장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영빈관/사진=서울관광재단후궁의 신위가 모인 곳 ‘칠궁’
영빈관 앞쪽의 영빈문을 통해 나가면 청와대 담장 옆에 붙어 있는 칠궁으로 갈 수 있다. 칠궁은 조선의 왕을 낳은 어머니이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의 신위를 모신 장소다. 조선의 왕과 왕비는 종묘에 신주를 모시고 왕을 낳은 후궁 신주는 따로 모시는 공간을 만들어 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며 효를 다했다.
1908년에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던 다른 후궁의 사당들을 이곳으로 합치면서 모두 7개가 모였다고 하여 칠궁이라 이름 붙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희빈의 신주와 뒤주에 갇혀 죽었던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궁궐의 다른 전각들처럼 규모가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검소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차분해지는 장소이다.
왕의 어머니이나 왕비가 아닌 후궁의 신주를 모시는 칠궁/사진=서울관광재단북악산 청와대 전망대
1.21사태 후 폐쇄됐던 북악산이 전면 개방되고 북악산을 오르는 등산로 2개 코스도 공개됐다. 하나는 칠궁에서 출발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청와대 춘추관 뒤쪽으로 올라가는 길로 두 코스는 중간 거점 장소인 백악정에서 만나 하나로 연결된다.
칠궁 방향 코스는 전체적인 길이는 좀 더 짧지만 가파른 계단 구간이라 다소 힘에 부치고, 춘추관 방향은 오르막길이지만 계단이 없이 경사가 급하지 않아 비교적 순탄한 편이다. 어느 길로 가든지 백악정까지는 약 20분 남짓이면 다다르고, 백악정에서 다시 청와대 전망대까지 약 10분이 소요된다.
백악정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 후에 뒤쪽으로 연결된 데크를 따라 올라가는 코스를 지나면 어느 순간 광화문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직선 구간이 나온다. 청와대 아래로 자리한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의 탁 트인 풍경이 반긴다. 올라오는 길이 다소 고생스럽더라도 이 풍경을 보기 위해 1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을 서울의 새로운 조망 명소다.
북악산 청와대전망대에서 바라본 광화문과 경복궁의 풍경/사진=서울관광재단<청와대 찾아가기 Tip>
▷도보: 청와대 사랑채를 검색하고 찾아가면 청와대 영빈관 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청와대를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좀 더 가면 본관으로 바로 이어지는 입구로 입장이 가능하다.
▷대중교통: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에서 도보 이동(15분) 하거나 1호선 시청역 또는 5호선 광화문역에서 1711번 버스이나 7016번 버스를 타고 효자동 정류장에서 하차 후 도보 이동(5분)
▷예약방법: ‘청와대, 국민 품으로’ 홈페이지를 통해 네이버, 카카오톡, 토스에서 신청을 할 수 있다. 개인은 최대 4명까지, 단체는 30명에서 50명까지 신청이 가능하다. 7시부터 19시까지 2시간 간격으로 예약 신청이 가능하며, 현재 6월 11일까지 공개가 예정되어 있고, 차후에는 재정비를 통해 다시 개방할 예정이다. 정혜선 기자 doer0125@sedaily.com
이것이 대통령이 보던 풍경
한겨레신문 이정규 기자 입력 2022. 05. 22. 11:38 댓글 126개능선처럼 내려앉은 빌딩들 뒤편으로 자리한 서울 남산이 파란 하늘에 가닿았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겹겹의 빌딩들 사이로 난 차도는 광화문광장에서 경복궁까지 뻗어 나갔다. 궁궐 돌담길과 이어진 청와대 입구엔 풍물패가 보였다. 꽹과리, 징, 장구, 북 소리가 백악산 중턱까지 울려퍼졌다. 54년 동안 시민에게 닫혔던 청와대 뒷산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올라가 광화문광장을 바라봤다는 청와대 뒷산. 2022년 5월10일부터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시민에게 열린 그곳엔 ‘청와대 전망대’라는 이름이 생겼다.
역사 느끼려면 창의문에서 출발
뉴욕에도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베를린,/ 모스끄바에도 없는 산
―2007년 북악산 개방을 축하하며 황지우 시인이 쓴 축시 ‘풍경 뻬레스트로이까’, 이하 동일
5월17일, 서울KYC 도성길라잡이의 안내를 받으며 백악산 열린 길과 청와대 뒷길을 함께 걸었다. 백악산 일대와 한양도성길이 전면 개방된 지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시민단체인 서울KYC에서는 ‘도성길라잡이’들이 무료로 한양도성길을 소개하는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한양도성길 해설은 서울시 공공예약서비스 누리집에서 예약하면 된다.
청와대와 북악산 사이에 새로 개방된 구간을 둘러보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종로구 경복고 옆 ‘칠궁 뒷길’에서 백악산을 오르는 길로 500m가량 된다. 금융연수원 옆 ‘춘추관 뒷길’로도 올라갈 수 있다. 두 길 모두 ‘청와대 전망대’까지 왕복 1시간이 채 안 걸린다. 마지막으로, 창의문에서 시작해 백악산 1번 출입문을 거쳐 한양도성길을 넘어가는 3㎞ 남짓 되는 길이 있다. 느린 걸음으로 2시간 정도 걸린다.
창의문에서 시작하는 세 번째 길을 서울KYC 도성길라잡이는 추천한다. “과거에서 시작해 현재의 역사까지 경험하려면 (한양도성의 일부인) 창의문부터 출발해야 해요. 한양도성은 태조 이성계가 종묘와 사직, 경복궁을 짓고 세 번째로 올린 건축물이죠. 분단으로 시민에게 통제됐던 백악산 북쪽부터 남쪽까지의 길이 조금씩 열려온 역사도 몸소 느낄 수 있습니다.” 김석찬 서울KYC 도성길라잡이 해설사의 설명이다. 한양도성은 1396년 태조가 수도 한양의 경계를 그리고 외부의 공격에서 지키려 지었다. 경복궁을 가운데 두고 백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을 따라 18.6㎞ 길이의 성이 이어졌다. 사대문이 세워졌고 대문 사이에 네 개의 소문을 내었다. 창의문은 한양도성 서북쪽에 있는 소문이다. 조선시대 인조반정 때 반정세력이 창의문을 거쳐 광해군이 있던 창덕궁을 향해 가기도 한 곳이다.
단 하루도 산을 못 보면 사는 것 같지가 않은,/ 산이 목숨이고 산이 종교인 나라에
평일인데도 오후 2시 창의문 앞, 삼삼오오 무리 지어 산을 오르려는 등산객들이 눈에 띄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 깔린 돌을 밟아보니 신발을 신었는데도 반들반들한 감촉이 느껴졌다. “반들반들하죠? 사람들이 하도 많이 지나가서 그렇습니다. 선조들은 이 문을 통해서 평안도 신의주까지 가곤 했거든요.” 김 해설사가 말했다. 창의문을 지나 부암동으로 난 길을 걸으면 한양도성으로 갈 수 있는 백악산 1번 출입구가 나온다. 검은 쇠창살에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구역’이라는 경고문이 아직 붙어 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20년 11월 한양도성 백악산 바깥길을 개방하며 쇠창살에 걸린 자물쇠를 직접 열었다.
백악산 한양도성길과 그 옆에 설치된 철조망. 서울KYC 제공‘서울의 DMZ’라 불린 이유
1번 출입구를 지나 가파른 계단길을 올랐다. 숲 내음이 가득하고 꿩 소리가 들리고 아카시아꽃 냄새도 풍겼다. 경계초소를 지나니 옛 군견훈련장 터가 보였다. “군사시설이었으니까요. 대공포 진지, 벙커도 볼 수 있습니다. 한때 이곳이 서울의 디엠제트(DMZ)라고 불린 이유입니다.” 군견훈련장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김 해설사가 설명했다. 한양도성길은 500년 넘게 백성과 시민이 노닐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백성은 소원을 빌며 한양도성을 걸었다. 해방 이후로도 주민들은 백악산에서 땔감을 구하거나 농사를 지었다. 1968년 1월 김신조 등 무장공작원이 청와대를 습격한 뒤 인왕산과 북악산이 국가안보를 지키는 군사시설로 바뀌며 일반인 출입이 통제됐다.
하여 차출된 팔도 머슴애들의 사투리를/ 잘 짜맞춘 성곽이/ 산허리를 재봉틀질한 것 같은
한양도성도 조선시대에는 군사시설이었을까. 철조망과 철책 너머로 네모반듯한 돌이 차곡차곡 쌓인 한양도성이 보였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한양도성길을 걷다보면 돌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태조 때 쌓은 돌은 작고 불규칙하죠. 세종 때는 좀더 안정감이 생겼고요. 청나라는 병자호란 이후 성을 마음대로 쌓지 못하게 했는데요. 숙종 때는 청나라 정세가 안 좋을 때를 이용해 네모반듯한 사각 모양으로 착착 성을 쌓았습니다. 순조 때는 돌의 크기가 더 커졌고요. 심지어 북파공작원이 남침한 이후 박정희 정권도 대대적으로 성곽을 보수하고 증축했죠.” 한양도성은 청와대를 수비하는 구실도 했다. 도성 안쪽 길이 열리며 철조망은 철거됐지만 189m 길이의 철조망은 ‘기억의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남겨졌다. 철조망을 따라 올라가면 총탄이 새겨진 소나무를 만날 수 있다. 1968년 김신조 사건(1·21 사태) 때 군대와 경찰이 북한 무장공비와 싸우며 생긴 분단의 흔적이다.
이렇게 풀어버리니 별것도 아니었던 두려움이/ (중략)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아름다움이 되었으니
민간인 출입이 통제됐던 한양도성은 조금씩 시민 곁으로 돌아왔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 인왕산 일부가 열렸다. 백악산 개방을 시작한 시기는 노무현 정부 때였다. 문재인 정부에 이르러 백악산 일대 한양도성길을 사실상 전면 개방했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청와대 앞길, 2018년 인왕산길, 2020년 한양도성 바깥길(백악관 북쪽), 2022년 4월 한양도성 안길(백악산 남쪽)을 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5월10일 청와대를 떠나 용산 집무실로 옮기자, 청와대 뒷길까지 시민의 공간이 됐다.
청와대가 경복궁 후원으로 복원되면
한양도성길을 따라 청운대 쉼터 인근에서 숲속으로 들어가면 세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숙정문, 법흥사터, 만세동방으로 나뉘는 길이다. 청와대~백악산 신규 개방 구간을 가려면 만세동방으로 가야 한다. 여기부터는 내리막길이 많다.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약수터인 만세동방의 물은 현재 오염돼 마실 수 없다. 한동안 닫혀 있던 길이라서 그럴까. 꽃내음이 확 풍기는 숲길이 시민을 반겼다. “문 열렸네, 감동이다. 열렸다!” 함께 길을 걷던 우미정 서울KYC 사무국장이 환호했다. 청와대 뒷길로 들어가는 대통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대통문 출입시간은 오후 5시까지로 제한돼 있다.
저 권부의 푸른 기와집 그늘에 가려/ 지난 반세기 마음의 위도에서 사라졌던 자리에서
길을 따라 걷던 시민들은 청와대부터 경복궁, 광화문, 남산서울타워까지 보이는 경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 보이네요. 진짜 광화문까지 싹 보인다. 명당이다. 여기 청와대도 보이네.” 우미정 사무국장이 말했다. 경복궁은 13만 평이고 청와대 터는 대략 7만 평이다. 20만 평에 가까운 땅에는 조선왕조 500년과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청와대는 사실 경복궁의 후원이었어요. 이 땅을 후원으로 복원한다면 20만 평의 문화재 공원이 될 것입니다. 경복궁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킨 뒤 군부대가 주둔하기도 했죠.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눈 뒤 청와대를 옮겼으면 어땠을까. 숙의 과정이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김 해설사가 말했다.
오늘 이제는 육성으로 이름 불러도 될/ 그대 백악이여
청와대 전망대에서 청와대 춘추관 뒷길로 내려오면 여러 군사시설의 흔적을 접할 수 있다. 이 근방은 한때 미군의 미사일방어시스템인 패트리엇 미사일 포대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1차 요새가 한양도성이었다면, 김신조 사건 이후 2차 요새가 됐던 거죠. 남북관계가 악화될 땐 요새화가 더 심해졌고요.”
알고 나니 더 사랑하게 됐다
등산을 마치고 삼청동으로 나오니 오밀조밀한 건물들에 오래된 음식점과 카페가 즐비했다. 문득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가 쓴 글이다. 청와대 개방을 이유로 걸었더니 백악산이 마음에 들어왔다. 많은 이야기를 알게 됐으니, 더 사랑하고 더 알아야 할 길이 남아 있다. 이정규 기자 jk@hani.co.kr
'조선궁궐 잔혹사' 덮쳐오는 청와대
노형석 입력 2022. 07. 29. 07:05 댓글 90개79년 전인 1943년 4월30일, 지금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청와대 옛 본관 앞 뜨락에서는 일본 권력자들의 섬뜩한 도끼질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미국과의 물량전에서 밀려 패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당시 청와대의 전신인 경무대 주인은 7대 조선총독이자 패전 뒤 전범이 된 군국주의 장성 고이소 구니아키(1880~1950) 대장. 그가 경무대 관저 건물 앞 뜨락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고목 앞에 다가가 도끼를 쳐들더니 힘차게 나무 아래쪽을 내리찍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나카 총감을 비롯한 총독부 부하 관료들과 기업인들은 열렬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1965년 3공화국 시절의 청와대 정면. 도판 국가기록원 제공 1939년 9월20일 열린 경성 경무대 낙성식 사진. 경성에서 발행된 일본어 신문 <조선신문>에 실린 것이다. 도판 국가기록원 제공이날 열린 퍼포먼스의 제목은 ‘조선용재수여식’. 경무대 관저 근처에 울창하게 자랐던 느티나무 등의 정목을 도끼로 베어 군함을 만드는 조선소에 헌납하는 행사였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1943년 5월1일치 지면을 보면, 광기 어린 총독과 수하 관료의 행태들을 생생한 르포처럼 엿볼 수 있다. 고이소는 인사말을 통해 “대동아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배가 많아야 한다. 관저 뜰 앞 정목을 베어 조선소에 제공할 것이니 선박 건조에 힘써 주기 바란다”고 열변을 토한 뒤 바로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이에 감격한 이시다 체신국장은 “가장 우수한 성적을 올린 조선소에 공급해 선박 공급에 더욱 매진하게 할 것을 맹세한다”고 다짐했다. 신문을 보면, 뒤이어 고목을 찍는 총독의 주위에서 울려 퍼진 청중의 구호를 소개하면서 이런 구절로 기사를 맺었다. ‘느티나무야, 나아가서 배가 되어 미영을 쳐부수는 데 한도움이 되라!고 힘껏 내리치는 (총독의) 도끼 끝에 조선(造船), 조선, 조선의 열의가 불타고 있었다.’
1966년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쓰던 청와대 집무실 모습. 도판 국가기록원 제공<매일신보> 기사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1943년부터 1945년 일제의 패망 직전 발악기에 총독 관저인 경무대 인근에서는 조선의 기맥을 이어받은 고목을 베어 조선소에 공출하는 광기의 퍼포먼스 행사가 줄이었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해방 뒤 1948년 출범한 이승만 초대 정부부터 올해 4월 청와대를 떠난 문재인 정부까지의 권좌로만 기억하지만, 청와대는 처음 건물이 지어진 1939년 9월부터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내쫓긴 1945년 9월까지 엽기적인 퍼포먼스와 더불어 가장 악랄한 식민지 폭압 정책이 계획되고 집행됐던 총본부였다.
1956년 봄 경무대를 방문한 학생들의 행렬. 벚꽃이 만발한 가운데 학생들 대열 안쪽에 경무대 관저가 보인다. 도판 국가기록원 제공 청와대 경내 한옥영빈관 ‘상춘재’의 내부. 지난 19일 열린 ‘청와대, 한여름 밤의 산책’ 사전 언론공개 행사 당시 공개된 모습이다. 노형석 기자하여 청와대 권역은 숙연하고 무거운 역사의 울림이 깃든 공간이다. 식민지 폭정의 비사가 숨어 있는 곳이자 한국전쟁·4월혁명·10·26사건·촛불항쟁 등 한국 최고 권력사를 증언하는 엄숙한 장소다. 멀리는 11세기 고려시대 남경 별궁의 자취와 14세기 태조 이성계의 한양 건설의 밑뿌리가 있고, 16세기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의 소실, 19세기 말 고종과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의 역사가 무언의 공간과 땅속 지층에 올올이 새겨진 곳이다. 이런 내력을 지닌 청와대 공간을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프랑스 베르사유궁을 유력한 모델로 삼아 복합문화위락지구로 만들겠다는 방안을 내놓고 지금 정부의 치세 기간 내내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고품격 미술관과 대여 전시장, 공연장, 조각공원을 중심으로 자연유산·문화역사를 결합시킨 공원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의 구상은 시민적 합의를 얻은 것이 아니고 지금 윤석열 정부가 대선에서 승리한 뒤 내부적으로 기획한 것이다. 여전히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고려시대 별궁터나 조선 초와 19세기에 조성된 경복궁 후원 건물들, 그리고 전통 정원 등의 역사적 서사를 전문가들의 조사로 충실히 파악한 것도 아니다. 당연히 앞으로 운영될 미술관이 어떤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내놓을지 정체성의 문제가 제기되지만, 뚜렷한 복안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19일 열린 ‘청와대, 한여름 밤의 산책’ 사전 언론공개 행사 때 공개된 저녁 나절의 본관. 노형서 기자점점 뚜렷해지는 것은 경복궁과 창경궁을 비롯한 조선 궁궐 잔혹사의 재림이다. 경복궁과 창경궁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가 열린 것을 시작으로 1970~80년대까지 온갖 종류의 잡다한 행사들이 열렸다. 적어도 80년대까지 창덕궁·경복궁·덕수궁의 관리 상황을 보면, 궁궐을 역사 사적지에 걸맞게 복원하고 관리한 게 아니라, 주된 콘셉트는 복합문화공간이었다. 스케이트장, 투견대회, 씨름장, 미인대회, 우량아선발대회 등이 궁궐 앞 특설무대에서 펼쳐졌다. 심지어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5·16 쿠데타 군인들을 위무하는 대중 연예인들의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당대엔 시민들의 문화 욕구를 수용할 만한 마땅한 공간이 별로 없었던 점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뒤늦게 문화 지체를 인식한 당국이 궁궐의 원형 복원에 신경을 쓰게 됐고, 그것이 1991년 경복궁 복원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관저 근처의 침류정. 1920년대 지은 한옥 건물로 추정된다. 노형석 기자지금의 청와대 복합문화공간화는 한국의 궁궐 잔혹사로 기억되는 1970~80년대의 궁궐 공연 행사장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퇴행이다. 더욱이 미술관도 청와대 인근인 북촌 곳곳에 많고, 가칭 이건희컬렉션관까지 지어지는 상황에서 충분한 전문가들과의 교감도 없이 뜬금없는 베르사유 모델을 거론하며 미지의 전시 시설을 구상하는 모양새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베르사유는 전혀 다른 성격의 유적이다. 17세기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 때 천재적인 조경가 앙드레 르노트르(1615~1700)와 건축가 쥘 망사르도(1646~1708)의 설계로 대정원과 궁전이 조성되어 이후 지금까지 프랑스 정치외교사의 주요 무대로 여전히 건재하다. 한국의 청와대와 성격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300년 넘게 유구한 역사적 맥락과 예술품, 정원의 조경 원리의 내력 등이 모두 기록되고 유산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2014년 6~11월 베르사유 궁 정원에서 한국 미술가로는 처음 초대받아 우주와 무한을 상징하는 철과 돌덩이 설치작품들을 전시했던 거장 이우환은 당시 인상적인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작업할 때 300여년 전 정원을 꾸민 천재 조경가 르노트르가 `내 완벽함을 깨고 다른 것을 보여봐라’라고 말하는 듯한 환청을 들었고, 시공을 초월해 실력을 겨룬다는 각오로 준비했다는 말이었다. 이우환의 작품은 오롯이 르노트르의 작품과 여러 기록이 수세기 동안 철저히 보존되고 연구가 거듭됐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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