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그림 길 송파진②] 청황제 칭송글 쓴 이경석과 이를 비꼰 송시열 중 누가 더 애국? / 이한성
이름없는풀뿌리2022. 8. 31. 08:50
□ 청황제 칭송글 쓴 이경석과 이를 비꼰 송시열 중 누가 더 애국?
[겸재 그림 길 송파진②] 청황제 칭송글 쓴 이경석과 이를 비꼰 송시열 중 누가 더 애국?
cnbnews 제676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5.29 10:26:27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지난 호에 소개했듯이
겸재의 송파진(松坡津: 송파나루)도(圖)는 석촌호수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송파대로 북쪽
롯데 쪽에서 석촌호수 건너 송파대로 남쪽을 향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석촌호수 남북단을
송파대로가 지나지만 그때는 송파강을 잇는 나루였음은 이미 설명하였다.
이렇게 한강의 본류였던 송파강에는 두 개의 나루가 있었음을 상기하자.
하나는 삼전도(三田渡: 삼밭나루)이며 또 하나는 병자호란 이후에 번성한 송파나루다.
겸재가 주로 활동한 영조 시대에는 이미 삼전도는 지고
송파나루가 번성기를 누리고 있던 시절이었다. 져가는 삼전나룻가에는
조선 백성이라면 누구라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큰 비석이 우뚝 단 위에 서 있었다.
이른바 삼전도비(三田渡碑)인데 원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지금도 이 비는 롯데호텔 남단 석촌호수 가에 세워져 있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우선 참고 사진 1, 2를 통하여
석촌호수 주변의 찾아보아야 할 표석이나 비석의 위치를 표시해 보았다.
사진 1은 송파대로가 정비될 때의 사진으로
바로 겸재의 송파진 그림의 시각(視角, 앵글)과 동일한 방향이다.
사진 속 1 지점은 롯데빌딩이 서 있는 자리이며, 2는 현 롯데호텔 위치,
3은 사진2 석촌호수 초기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위치인데,
‘삼전도 표석’이 서 있는 서호(西湖) 남서쪽 코너다.
4 지점은 송파별산대 극을 볼 수 있는 서울놀이마당이다.
번호 5는 ‘송파나루 표석’이 서 있는 위치로, 송호정(松湖亭)이라는 정자도 세워 놓았다.
또한 이 주변 지역은 영-정조 이후 번성한 송파장으로
이 지역 경제의 중심지가 된 뜻 깊은 곳이기도 하다.
6 지점은 삼전도비를 옮겨 놓은 곳이다.
옛 지도를 보면 삼전나루는 탄천 가까이 있던 나루로
살곶이 다리를 건너 뚝섬을 지나 나루를 건너 광주 땅으로 이어졌는데
지금은 삼전도 표석을 아쉬운 대로 석촌호수 서남단에 세워 놓았다.
임금 옷 잡아당기고, 울부짖은 백성들
삼전나루의 비극은 1636년 병자년(丙子年) 겨울에 시작되었다.
다 아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 왕과 신료들을 남한산성에 포위하여 드디어 항복을 받아낸다.
그날이 1637년 1월 30일이었다. 야사(野史)도 많고 설(說, 썰)도 많다.
홍경모 선생의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나 실록에는 비교적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참고할 만하다. 인조 15년(1637년) 1월 30일 왕조실록 기사를 여기에 옮긴다.
군더더기 없이 사실 체크를 위함이다.
삼배구고두 장면을 묘사한 그림(석촌어린이공원 소재).
성을 나가 황제에게 삼배고두례를 행하고 환도하였다.
청인(淸人)이 성을 나갈 때 시위하는 사람을 500명을 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에
상(上, 인조)이 시종 50여 명만을 거느리고 진시(辰時)에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 중에 뒤에 남는 자는 서문 안에 나열해 서서 가슴을 치며
곡용(哭踊)하였는데, 햇빛에 광채가 없었다. 상이 산에서 내려가 형초(荊草: 가시풀)를 깔고
앉았는데, 얼마 뒤 갑주(甲冑) 차림의 청나라 군사 수백 명이 좌우로 나누어 말을 달려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하니, 이경직이 아뢰기를,
“이는 이른바 영접하는 것입니다. 사신이 갈 때에도 이와 같이 합니다” 하였다.
얼마 뒤에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말을 달려오자, 상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들과 더불어 두 번 읍(揖)하고 동서(東西)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자,
상이 답하기를, “지난날의 허물은 다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大人)이 힘써 주실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 만큼 백성들은 무사함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떠났으면 합니다” 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선도하였다.
상이 뒤따라 나아가 옛 광주(廣州: 대왕면, 지금의 가락동?) 앞에 이르자,
용골대가 시신(侍臣)들을 뒤에 떨어뜨려 두었으므로 상은 다만 삼공, 오경, 육승지, 한림과
주서 각 한 사람만을 거느리고, 왕세자는 시강원과 익위사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비석 앞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니 황제가 마전포(麻田浦)에 단을 설치하고서
위에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주 차림에 궁검을 찬 자가 각각 방진(方陣)을 치고
옹립하였으며, 깃발과 창검이 사방에 빽빽이 늘어서 있고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하였는데,
대략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용골대 등이 말에서 내리니, 상 또한 말에서 내려
비석 아래에 앉았다. 용골대 등이 먼저 들어가 보고를 하고는 이윽고 나와서
선도하여 걸었다. 상이 도보로 따라서 진 밖에 이르자,
용골대 등이 전하를 동쪽 작문(作門) 밖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상이 삼배고두례(三拜叩頭禮: 무릎 꿇고 조아려 3번 머리를 땅에 대는 예를 3세트 행함)를
행하자, 용골대 등이 들어가 보고한 다음 나와서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나왔으니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다”
하니, 상(인조)이 답하기를, “천은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동쪽 작문을 통해 들어가니,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아갈 것을 청하였다.
청나라 사람이 여창(臚唱)하자, 상이 다시 삼배고두례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나와 동쪽 작문을 통해 나와서는 다시 동북쪽 모퉁이를 지나
단의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강화)에서 잡혀 와서
단 아래의 약간 서쪽에 늘어서 있었다. 이윽고 용골대 등이 황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를 것을 청하였다.
황제는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쪽 윗자리에 앉았는데 서쪽을 향해 앉았다.
청나라 왕자 세 사람은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는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해 앉았다. 또 청나라 왕자 네 사람은 모두 서북쪽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봉림(鳳林)과 인평(麟坪) 두 대군은 그 아래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주었고,
강도에서 잡혀 온 신하는 단 아래의 서쪽 모퉁이에 앉게 하고서 차 한 잔을 올렸다.
얼마 뒤 갑자기 일어나 단을 내려가 오줌을 누었으므로
상 또한 일어나 단을 내려가 진 밖의 동쪽 모퉁이로 나가서 휴식하였다.
황제가 단상에 돌아와 앉고서 상이 다시 자리로 들어와 앉기를 청하였다.
용골대를 시켜 우리나라의 여러 시신들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각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하니, 여러 종관(從官)들이 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가 문관이므로 활쏘기를 잘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용골대가 굳이 청하므로 마침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게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기 때문에 다섯 번을 쏘았으나 모두 적중하지 못했다.
청나라 왕자와 제장(諸將)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활을 쏘았는데 이것을 묘기로 여겼다.
얼마 뒤 진찬(進饌)하고 술을 돌렸는데, 술상이 차례로 예수(禮數)가 줄었으나
상의 앞에 놓인 술상은 황제의 술상과 똑같이 하였으니, 이는 존경하고 우대하기 위해서였다.
술이 세 순 돌자, 상을 치우도록 명하였다. 상을 치우려 할 때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각 큰 개를 끌고 와서 황제의 앞에 이르렀다. 황제가 직접 고기를 베어
개 앞에 던져 주자 고기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개가 곧바로 받아먹곤 하였는데,
저들은 그것을 묘기로 여겼다. 두 종호가 개를 끌고 내려갔다.
얼마 후 상이 인사를 하고 단을 내려갈 것을 청하였다.
단 뒤쪽을 경유한 뒤에 서북쪽 모퉁이를 따라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붙잡힌 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상이 전중(田中)에 앉아 있는데,
용골대 등이 황제의 말로 빈궁 이하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을 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상이 서남쪽 모퉁이로 옮겨 앉자,
용골대 등이 황제의 말로 영롱한 안장을 갖춘 백마를 끌고 와서 주었으므로
상이 친히 고삐를 잡았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잠시 후 용골대 등이 초피구(貂皮裘)를 가지고 나와 황제의 말로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에 주고자 해서 가져왔는데, 지금 보니 본국의 의복 제도가
이와 같지가 않다. 감히 억지로 입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리(情理)를 표하고자
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엎드려 사례하였다.
(중략)
상이 밭가에 앉아 진퇴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유시(酉時)에 한(汗)이 비로소 환도(還都)를 명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봉림대군과 봉림대군의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장차 그들을 북쪽으로 데려가려고 해서였다. 상이 인사를 하고 물러나
빈궁의 막차로 들어가서 빈궁을 만나 보았다. 송파진(松坡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진졸(津卒)은 거의 다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강가에 정박해 있었는데,
백관들이 앞을 다투며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올랐다.
상이 강을 건넌 뒤에 황제가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을 통해 건너서
장막(帳幕)으로 나아갔다. 용골대 등이 호행(護行)하는 군병을 이끌고 길의 좌우에 도열하여
상을 인도해서 가니,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하였는데,
길 양 옆에서 슬피 울부짖는 자가 1만 명을 헤아렸다.
살곶이 다리에 이르자 날이 이미 저물어 어두웠으며,
초경(初更)쯤에 비로소 경성에 당도하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이때 몽병(蒙兵)이 아직도 도성에 가득하여 이전처럼 노략질하였는데,
다만 궐문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호종하고 온 백관들이 모두 궐내에 머물러 있었다.(기존 번역 전재)
이렇게 해서 왕세자(소현세자) 내외, 봉림대군 내외를 비롯하여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심양으로 끌려갔다. 그렇게 끌려간 남자 백성들은 종이 되었고
많은 여인들은 몸을 더럽혔다. 삼배고두례를 행한 치욕의 그 임금은 여전히 조선 땅에서
정치 권력을 휘둘렀고 우리는 어린 날 이 임금을 ‘인조대왕’이라 배웠다.
전쟁에서 승리한 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이 승리한 전쟁의 기록을
황제의 크나큰 덕으로 기록하여 조선 땅에 남기기를 원했다.
어찌 보면 그러한 면도 있었다. 두 왕자를 볼모로 데려간 것 이외에
임금을 비롯하여 지배층 누구도 항복한 자에게는 위해를 가하지 않은 면이 있다.
불쌍한 것은 백성이었다. 그들은 엄동설한에 만주 땅으로 끌려가 전리품(戰利品)이 되었다.
불행히도 이들을 구해내려는 나라의 노력은 없었다. 심양관에서 볼모 생활을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활약한 소현세자와 강빈만은 조선의 백성을 구하고자 노력했다.
미꾸라지 같았던 신료들 vs 붓 잡은 이경석
그것은 그렇고, 숙제를 받은 조선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누가 그 비문을 쓰고자 하겠는가? 미꾸라지처럼 잘들도 빠져 나갔다.
우둔했는지, 나라의 어려움을 그냥 볼 수 없었는지
장유, 이경석 두 사람의 비문이 채택되어 청나라로 갔다. 그 기록을 보자.
장유(張維)와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청나라에 들여보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택하게 하였다. 범문정(范文程) 등이 그 글을 보고,
장유가 지은 것은 인용한 것이 온당함을 잃었고 경석이 지은 글은 쓸 만하나
다만 중간에 첨가해 넣을 말이 있으니 조선에서 고쳐 지어 쓰라고 하였다.
상이 경석에게 명하여 고치게 하였다.
(張維, 李景奭所撰三田渡碑文, 入送淸國, 使之自擇. 范文程等見其文, 以張維所撰,
引喩失當, 景奭之文可用, 而但中有添入之語, 令我國改撰而用之. 上命景奭改之)
이경석 묘. 분당에 있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경석의 글씨. 선생은 명필이었다. 자료사진
이렇게 하여 이경석은 상의 명을 받아 비문을 고쳐 쓴다.
그 비문이 롯데호텔 남쪽 석촌호수 가에 지금도 서 있다. 여기에 원문을 옮겨 싣는다.
많은 이들이 비문을 말하지만 읽는 이는 많지 않다.
사실이 아닌 내용들이 나다님을 막고자 함이다.
淸 崇德元年冬十有二月, 皇帝以壞和自我, 始赫然怒, 以武臨之, 直擣而東, 莫敢有抗者.
時我寡君, 棲于南漢, 澟澟若履春氷, 而待白日者, 殆五旬. 東南諸道兵, 相繼崩潰,
西北帥逗撓峽內, 不能進一步, 城中食且盡. 當此之時, 以大兵薄城, 如霜風之卷秋蘀,
爐火之燎鴻毛, 而皇帝以不殺爲武, 惟布德是先, 乃降勑諭之曰: “來, 朕全爾. 否, 屠之.”
有若英, 馬諸大將, 承皇帝命, 相屬於道. 於是我寡君, 集文武諸臣謂曰: “予托和好于大邦,
十年于玆矣. 由予昏惑, 自速天討, 萬姓魚肉, 罪在予一人. 皇帝猶不忍屠戮之, 諭之如此,
予曷敢不欽承, 以上全我宗社, 下保我生靈乎?” 大臣協贊之, 遂從數十騎, 詣軍前請罪.
皇帝乃優之以禮, 拊之以恩. 一見而推心腹, 錫賚之恩, 遍及從臣. 禮罷, 卽還我寡君於都城,
立召兵之南下者, 振旅而西. 撫民勸農, 遠近之雉鳥散者, 咸復厥居. 詎非大幸歟?
小邦之獲罪上國久矣. 己未之役, 都元帥姜弘立, 助兵明朝, 兵敗被擒.
太祖武皇帝只留弘立等數人, 餘悉放回, 恩莫大焉, 而小邦迷不知悟. 丁卯歲, 今皇帝命將東征,
本國君臣避入海島. 遣使請成, 皇帝允之, 視爲兄弟國, 疆土復完, 弘立亦還矣. 自玆以往,
禮遇不替, 冠蓋交跡, 不幸浮議扇動, 搆成亂梯. 小邦申飭邊臣, 言涉不遜, 而其文爲使臣所得,
皇帝猶寬貸之, 不卽加兵. 乃先降明旨, 諭以師期, 丁寧反覆, 不啻若提耳面命, 而終不免焉,
則小邦君臣之罪, 益無所逃矣. 皇帝旣以大兵, 圍南漢, 而又命偏師, 先陷江都。
宮嬪、王子曁卿士家小, 俱被俘獲. 皇帝戒諸將, 不得擾害, 令從官及內侍看護, 旣而大霈恩典.
小邦君臣及其被獲眷屬, 復歸於舊, 霜雪變爲陽春, 枯旱轉爲時雨; 區宇旣亡而復存,
宗祀已絶而還續. 環東數千里, 咸囿於生成之澤, 此古昔簡策所稀觀也. 於戲, 盛哉!
漢水上游三田渡之南, 卽皇帝駐蹕之所也, 壇場在焉. 我寡君爰命水部就壇所, 增而高大之,
又伐石以碑之, 垂諸永久, 以彰夫皇帝之功之德, 直與造化而同流也, 豈特我小邦世世而永賴?
抑亦大朝之仁聲武誼, 無遠不服者, 未始不基于玆也. 顧摹天地之大, 畫日月之明,
不足以彷彿其萬一, 謹載其大略. 銘曰: 天降霜露, 載肅載育. 惟帝則之, 竝布威德. 皇帝東征,
十萬其師. 殷殷轟轟, 如虎如豼. 西蕃窮髮, 曁夫北落. 執殳前驅, 厥靈赫赫. 皇帝孔仁,
誕降恩言. 十行昭回, 旣嚴且溫. 始迷不知, 自貽伊慼. 帝有明命, 如寐之覺. 我后祗服,
相率以歸. 匪惟怛威, 惟德之依. 皇帝嘉之, 澤洽禮優. 載色載笑, 爰束戈矛. 何以錫之,
駿馬輕裘. 都人士女, 乃歌乃謳. 我后言旋, 皇帝之賜. 皇帝班師, 活我赤子. 哀我蕩析,
勸我穡事. 金甌依舊, 翠壇維新. 枯骨再肉, 寒荄復春. 有石巍然, 大江之頭.萬載三韓, 皇帝之休.
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 겨울 12월에, 황제가 우리나라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혁연히 노해서 위무(威武)로 임해 곧바로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우리 임금은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봄날 얼음을 밟듯이,
밤에 밝은 대낮을 기다리듯이 두려워한 지 50일이나 되었다.
동남 여러 도의 군사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서북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면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으며,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대병이 성에 이르니, 서릿바람이 가을 낙엽을 몰아치는 듯,
화로 불이 기러기 털을 사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무를 삼아
덕을 펴는 일을 먼저 하였다. 이에 칙서를 내려 효유하기를
“항복하면 짐이 너를 살려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였다. 영아아대(英俄兒代)와
마부대(馬夫大) 같은 대장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연달아 길에 이어졌다.
이에 우리 임금께서는 문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에 우호를 보인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혼미하여
스스로 천토(天討)를 불러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가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효유하니, 내 어찌 감히 공경히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전하지 않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그 뜻을 도와 드디어 수십 기(騎)만 거느리고 군문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어루만졌다. 한번 보고 마음이 통해
물품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바로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들을 소환하여
군사를 정돈해서 서쪽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농사를 권면하니,
새처럼 흩어졌던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가 상국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기미년 싸움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명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홍립 등 몇 명만 억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으니, 은혜가 그보다 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정묘년에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강화도로 피해 들어갔다.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황제가 윤허를 하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강토가 다시 완전해졌고, 홍립도 돌아왔다.
그 뒤로 예로써 대우하기를 변치 않아 사신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박한 의논이 선동하여 난의 빌미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는 말에 불손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글이 사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황제는 너그러이 용서하여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먼저 조지(詔旨)를 내려 언제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정녕하게 반복하였는데, 귓속말로 말해 주고 면대하여 말해 주는 것보다도
더 정녕스럽게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들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황제가 대병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또 한쪽 군사에게 명하여 강도(江都)를 먼저 함락하였다.
궁빈-왕자 및 경사(卿士)의 처자식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종관(從官) 및 내시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내려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 및 포로가 되었던 권속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서리가 내리던 겨울이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되고, 만물이 시들던 가뭄이 바뀌어
때맞추어 비가 내리게 되었으며,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다시 보존되었고,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옛날 서책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바이니, 아 성대하도다!
한강 상류 삼전도(三田渡) 남쪽은 황제가 잠시 머무시던 곳으로, 단장(壇場)이 있다.
우리 임금이 공조에 명하여 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 하고, 또 돌을 깎아 비를 세워
영구히 남김으로써 황제의 공덕이 참으로 조화(造化)와 더불어 함께 흐름을 나타내었다.
이 어찌 우리나라만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것이겠는가. 또한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의(武誼)에 제아무리 먼 곳에 있는 자도 모두 복종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천지처럼 큰 것을 그려내고 일월처럼 밝은 것을 그려내는데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삼가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오직 황제가 그것을 법받아
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
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이었다.
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
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 군사들이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
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
무엇을 내려 주시었나.
준마와 가벼운 갖옷이다.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
우리의 탕잔함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
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
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만년토록 우리 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
(기존 번역 전재)
내용을 읽으면 지금도 낯이 붉어지는 치욕의 반성문이며 오랑캐 찬양가이다.
이경석은 죽고 싶었을 것이다. 이 비는 처음에는 청태종이 머물던 삼전도에 세웠다.
필자의 졸고 ‘이야기가 있는 길’을 인용해 본다.
태생이 반갑지 않은 비였기에 256년간 서 있던 비를 청일전쟁이 끝나고
청나라 힘이 약해지자 고종 32년(1895년) 강물 속으로 수장했다.
그러나 일제시대 인양돼 다시 세워졌다. 아마도 일본인들은 조선은 본래
남의 지배를 받았던 민족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해방이 되자 이 비석은 주민들에 의해 다시 땅 속에 묻혀 잊혀졌는데
1963년 큰 홍수가 나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끈질기게도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서울시가 역사 교육을 위해 다시 세웠다. 우리에게는 정말로 버리고 싶은 비이지만
언어학적으로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면은 몽골어와 여진어로 기록하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기록해 이미 사라져간 여진어의 초기 문자 체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동안 자리를 잡지 못해
몇 번을 옮겨 다니다가 현재의 자리에 세운 것이다.
북벌 계획 돕다가 죄 뒤집어 써
이야기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대비되는
예가 있다. 지금도 삼전도에 가면 사적 101호 삼전도비(三田渡碑),
즉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가 있다. 신하의 나라가 된 조선은 항복 조건 중 하나로
정복자 청태종을 찬양하는 공덕비를 세워야 했다. 이 치욕의 비문을 쓰려고 하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다. 누가 흙탕물에 손 담그려 하겠는가?
결국은 이조판서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이 비문을 썼다.
그는 이 비문을 쓰고 글 가르쳐 준 형님께 편지를 보내
‘글 배운 것이 후회된다(有悔學文字之語)’고 했다. 이경석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끌려가자 청나라로 가서 세자를 보필했으며,
효종의 북벌 계획을 돕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자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
죽음 직전 효종의 간곡한 애원에 의해 간신히 목숨을 구해 의주 백마산성에 감금되었다.
풀려나서도 청나라에 의해 영원히 벼슬길이 막혔던(영불서용: 永不敍用) 이가 이경석이었다.
이 분이 나이 들어 은퇴하자 기로소(耆老所: 은퇴한 상공들의 원로원)에 들어
궤장(几杖: 임금이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로, 원로대신에 대한 최고의 예우)을 받게 되었는데
그 연회에 우암 송시열(尤唵 宋時烈)이 쓴 축하의 글 궤장연서(几杖宴序)에
‘수이강(壽而康: 오래 살고 건강하소서)’이란 말을 썼다. 듣기에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러나 ‘수이강’이란 말의 출처는, 송나라 흠종 때 금나라에 항복 문서를 바치고
늙도록 잘 산 손적을 비판하면서 주자가 쓴 표현이었다.
송시열이 자신을 벼슬길에 인연 맺어 준 이경석을
손적에 비유해 ‘수이강’ 하라 했으니 이경석은 어떠했겠는가?
우암은 이 호란(胡亂) 때 어디서 무엇하고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이경석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비문을 쓰려는 이가 없었다.
결국 박세당이 썼는데 송시열을 나무란 박세당은 노론들에 의해 고초를 겪었고
이경석 묘의 비문도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훼손당하였다.
분당에 있는 이경석의 묘에는 이제 후손들이 새로 비를 세웠다.
어느 시대나 흙탕물에 손 담그는 사람과 피해 있다가 이를 더럽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은 아쉽게도 그런 나라였다. 임진란, 병자호란을 되돌아보면
그때를 산 이들의 평가와 그 후손들이 받은 영욕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 시대는 여기에서 자유로운가?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