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도(江都) 함락의 진실을 찾아서
인천in 황효진 승인 2021.02.01 11:36
(1) 강도 함락과 출성 항복 - 황효진 / 공인회계사, 전 인천도시공사 사장
인천in이 이달부터 황효진 전 인천도시공사 사장의 ‘역사기행
– 길을 걷고 뜻을 묻는다’를 연재합니다.
5천년 우리 역사의 무대가 된 지역을 찾아 깊이 서려있는 곡절의 시간들을 돌이켜봅니다.
그때 그 역사의 진실이 무엇이며,
현재의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고있는지 차분히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강화 고지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강도는 천험인가
虜種雖云頑 (오랑캐들이 아무리 완악하다지만)
安能飛渡水 (어떻게 이 물을 날아 건널 수 있으랴)
彼亦知未能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內以耀兵耳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한다오)
誰能諭到水 (누가 물에 들어가라 말하겠는가)
到水則皆死 (물에 들어가면 곧 다 죽을 텐데)
愚民且莫驚 (어리석은 백성들아 놀라지 말고)
高枕甘爾寐 (안심하고 단잠이나 자소)
行當自退歸 (그들은 응당 저절로 물러가리니)
國業寧遽已 (나라가 어찌 갑자기 무너지겠는가)
1232년 고려의 강화도 천도 직후, 문신 이규보가 펼친 ‘강도함락불가론’이다.
13세기 이후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견고하게 유지된 주장이었다.
전근대적 전쟁 개념에서에서는 군사 지리적으로 일리가 있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강화도는 북으로는 조강(祖江), 동으로는 염하(鹽河)가 흐르는 ‘천연 해자’를 끼고 있다.
섬 안으로는 넓은 땅을 갖고 있고 섬 밖으로는 험준한 ‘천연 성곽’을 지니고 있다.
한마디로 강화도는 천험(天險)이다. 이규보의 예언적(?) 주장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되었다.
멀리는 고려 무신 정권이 40여 년 동안(1232년~1270년) 강화도를 전시 수도로 삼아
몽고군과 대항하며 안전하게 지켜왔고, 가까이로는 정묘호란 때(1627년) 인조가
이곳에 파천하여 70일 가까이 지내며 임시 수도로 삼아 종사(宗社)를 지켜냈다.
강화도가 고려와 조선의 보장처가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400년 동안 유지된 강도함락불가론이 완전하게 검증된 것은 아니었다.
몽고나 후금의 침입 때 고려 왕실과 조선 왕실이 각각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강도 전투를 대비했지만 실제 그곳에서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경우 모두 이규보의 표현대로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하다’ 갔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규보의 강도함락불가론은
홍타이지의 조선 침공으로 말미암아 희망적 가설로 전락될 위기에 처했다.
강화 남산에서 바라본 강화읍내 (사진촬영=황효진)
병자호란은 대청제국을 선포한 홍타이지의 전쟁이었다.
홍타이지는 조선정벌을 목표로 총력전을 펼치면서 친정(親征)을 감행했다.
조선 정벌에 동원된 병력은 정규군 3만 4000명과 ‘쿠틀러’라 불리는
전쟁 허드렛 일군 약 1만 1000명을 포함한 4만5000명 정도의 대규모 병력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12만 대군설보다 훨씬 적은 숫자이지만
이는 명 태조 주원장의 말대로 ‘천하가 감당하지 못할 여진족 1만(女眞一萬 天下莫當)’을
훨씬 넘긴, 당시 ‘대청제국’이 동원 가능한 최대의 병력이다.
홍타이지는 전격전(blitz krieg)이 가능하도록
한강 이북의 모든 강들이 꽁꽁 어는 한겨울을 기다렸다.
1637년 1월3일(병자년 12월8일),
홍타이지 군대의 선봉대 300여명이 상인으로 위장하여 압록강을 넘었다.
이틀 후 홍타이지의 본대가 의주를 넘어 조선으로 침공했다.
그들은 정묘호란 때와는 달리
의주에서 용천, 철산, 선천, 곽산, 안주, 평양, 황주, 평산, 개성, 서울까지 오는 동안
각자의 산성에서 전투 준비를 하고 있던 조선군을 비켜가면서 서울로 바로 진군했다.
전력 질주하는 도중 뒷덜미를 잡힐까 우려하여 그들은 전체 부대를 여러 부대로 나누어
진군하는 시차 작전을 구사했다. 선봉대마저 3진으로 나누어 시차 진군했다.
반면 조선군은 각자의 도읍에서 10여리 정도 떨어진 산성에만 머물러 있었다.
가령 의주부사 임경업은 백마산성으로, 평안감사 홍명구는 자모산성으로,
도원수 김자점은 정방산성으로 물러나 있었다.
덕분에 청군의 의주~서울 침공로는 무인지경이 되었다.
선봉대는 압록강을 넘은지 7일 만에 서울 홍제원에 나타났다.
광해군 시절에 그토록 우려했던 ‘장구직도(長驅直擣)’가 현실화된 것이다.
즉, 오랑캐가 강물이 어는 겨울을 틈타 ‘멀리 말을 달려 서울을 직접 타격한’ 것이다.
1637년 1월9일(병자년 12월14일)
청군이 개성을 지나쳤다는 장계를 받은 조선 조정은 패닉 상태가 되었다.
이른 아침 봉림대군, 소현세자빈, 원손 등 왕실 가족,
종묘사직의 신주를 봉안할 임무를 맡은 윤방 등 원임 대신들,
시종 내관을 비롯한 사대부 가족들이 일차로 강도로 피난을 떠났다.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오후에 강도 파천 길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타이지 군대 선봉대가 이미 서울 근교 홍제원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강도 파천과 함께 조선의 주력 부대를
강도로 보내 지구전을 펼치려던 조선군의 방어 전략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로써 인조를 호종한 재상급(宰臣) 고위 관료 70여명, 당상관 50여명, 당하관 270여명,
그리고 군병 약 1만3천여명이 남한산성에서 본의 아닌 장기 농성을 하게 되었다.
반면에 강도에는 조선 수군 70여척의 판옥선이 배치되었지만
육군 병력은 강도의 자체 병력 1600여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정묘호란 때 강도에 조선군 병력 12,000여명이 배치되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강화 유수부와 외규장각. 강화행성이 있었던 곳이다
- 강도 함락과 죽음의 행진
1637년 2월16일(정축년 1월22일)
왕실 가족과 사대부 가족들이 강도로 피난 온 지 38일째 되는 날이었다.
‘오랑캐들이 아무리 완악하다지만 어떻게 이 물을 날아 건널 수 있으랴’고 생각했는데,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하다’ 갈 줄 알았는데,
홍타이지의 이복동생 예친왕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 3000여명이 ‘물을 날아 건너왔다’.
청군은 뭍에 올라와서도 변변한 전투 한번 치루지 않았다. 그들은 파죽지세로 달려
남문 주변을 포위했다. ‘천험’ 강도는 사실상 ‘무방비 도시’였던 것이다.
성 안에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실 가족은 물론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고 있는
사대부들의 가족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을 지켜줄 병력은 사실상 전무했다.
절망과 공포가 성 안에 엄습했다.
오랑캐 총칼에 성 문이 열리기도 전에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성 남문에 보관하고 있던 화약더미에 담뱃불이 붙으면서 대규모 폭발도 일어났다.
남문 문루는 형체도 없이 날아가고
문루 위에 있던 김상헌의 형 김상용의 '옥체'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김장생의 손자 김익겸, 권오기의 아들 권순장 등 여러 명이
불길에 휩싸여 자의반 타의반 순절했다.
금성(金城)이 순식간에 화염지옥(火焰地獄)이 된 것이다.
이 화약고 폭발이 신호탄이 되었을까?
성 안 곳곳에서 사대부 남자들의 순절이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전 판서 이상길, 전 정언 이시직, 전 감사 정효성, 전 장령 정백형,
승무원 부제조 홍명형, 필선 윤전, 도정 심현, 주부 송시영 등이 적전분사(敵前憤死)했다.
전쟁이 끝난 후 강화 충렬사에 모셔진 사람들이다.
강화부성 남문.
이곳에서 화약고 폭발이 일어나 김상용 김익겸 권순장 등 여러 사람들이 순절한다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에 자리한 충렬사
열사(烈士)보다 절부(節婦)의 수가 훨씬 많았다.
오랑캐에게 능욕(凌辱)을 당하기 전에 죽음을 선택한 여인들은 신분 고하를 막론했다.
소현세자빈 강빈이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내시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인조의 장인 한준겸의 여러 자녀들도 목을 매어 죽었다.
강화도를 이미 빠져나간 검찰사 김경징의 어머니, 아내, 며느리 등
3대 여인이 모두 한자리에서 자결했다.
김경징의 어머니는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고 있는 전쟁 총사령관 김류의 부인이었다.
김경징과 함께 강도를 버리고 떠난 강화유수 겸 주수대장 장신의 며느리도 목을 맸다.
김경징과 함께 왕실가족의 강도 파천 업무를 수행했던
부검찰사 이민구의 아내는 오랑캐들에게 포로로 끌려갔다가 도중에 죽임을 당했다.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고 있는 병조판서 이성구의 아내도 자결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김장생의 며느리들인 김집과 김반의 부인들도 자결했다.
김상용과 함께 순절한 김익겸(김반의 아들)의 부인은
만삭의 몸으로 배를 타고 강도를 빠져나오는 도중 선상(船上)에서 아이를 낳았다.
이 때 태어난 아이가 ‘선생(船生)’으로 불린 서포 김만중이다.
김집의 부인은 김익희의 어머니인데, 그 손자 김만균이 현종 때
‘할머니가 강도에서 죽은 일’로 청나라 사신의 영접을 거부한 장본인이다.
한편 김상용 곁에서 순절한 별좌 권순장의 아내는
먼저 두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홍명일의 아내는 배를 타고 피난하다 오랑캐 군사가 가까이 오자
두 아들을 물에 던지고 자기도 뒤따라서 스스로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부부가 함께 자결하기도 했다.
도정 심현은 인조에게 인생 고별 상소를 올린 다음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으로는 백년을 함께 하고 의리로는 한번 죽음을 함께 하는 것이오.
내가 충신이 되고 그대는 충신의 부인이 되지 않겠소?”
부인이 대답했다.
“지아비는 충성을 위해 죽고 저는 절개를 위해 죽으니,
몸을 깨끗이 하여 함께 돌아감은 실로 달갑게 여기는 바입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의 절정이었다. 마침내 부부는 서로 마주 보고 목을 매어 죽었다.
부부가 함께 죽기로 약속을 하였으나 부인만 자결하고 남편은 끝내
자결을 결행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소론의 영수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 부부의 경우다.
윤선거의 부인 이씨는 남편과 작별 인사를 정중히 하고 목을 매고 죽었으나,
부인과 함께 자결하기로 약속한 윤선거는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고 있는
아버지 윤황을 뵙고 난 후 죽겠다고 강도를 빠져나왔지만 끝내 죽지 못했다.
20대 후반 청년 윤선거는 이 일을 참회하며 부인을 새로 들이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나라에서 아무리 벼슬을 내려도 진심으로 사양하는 징사(徵士)의 모델이 되었다.
그는 세거지 논산에서 30여년을 살다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죽었다.
그의 시신은 파주 탄현리에 있는 부인의 묘지에 합장, 안치되었다.
그가 부인 이씨로부터 용서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사대부 여인들만 능욕을 피해 자결한 것은 아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아내와 첩도 자결하여 죽었다. 포로로 사로잡혔다가 도망쳐서
숲속에 숨어 있다가 오랑캐의 핍박에 의해 물에 빠져 죽는 이름 모를 사람도 많았다.
남급의 <남한일기>에 따르면 자결한 여인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여자들의 머리를 동이는데 쓰는 뙤리가 물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이 마치 연못에
낙엽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흩날리는 것 같았다고 전한다. 탕지(湯池)가 피바다가 되었다.
소현세자빈 강씨 묘. 광명시 영휘원에 있다
김상용의 묘(왼쪽)와 윤선거의 묘,
김상용의 묘는 남양주, 윤선거의 묘는 파주에 있다
- 출성 항복
1637년 2월20일(정축년 1월26일)
남한산성의 농성이 43일째 되는 날이었다.
인조와 조선 신료들에게 강도의 소식이 전해졌다.
얼마 전부터 청군이 강도를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을 전해 듣고 있었으나
강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천혜의 요새를 갖춘 강도가 한겨울에 그렇게 쉽게 무너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의정 홍서봉과 이조판서 최명길 등이 오랑캐 진영에 가서
강도에서 사로잡혀온 내관 나업과 종실 진원군 이세완을 직접 만나서는 봉림대군의 친필
서신과 재신 윤방과 승지 한흥일 등의 장계(狀啓)를 받아서 산성으로 올라왔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최명길이 전하는 강도 함락의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었다.
최명길이 청나라 진영에서 들고 온 문서도 모두 가짜로 꾸며 써서 협박하는 것으로
의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조가 봉림대군의 친필 서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편지는 대군이 직접 쓴 것이니, 가짜가 아니다.”
그 말을 들은 신료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경악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강도로 피난 가 있는 가솔들의 생사 여부가 걱정이 되었다.
실제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고 있는 영의정 김류(부인과 며느리, 손자며느리 자결),
병조판서 이성구(부인 자결), 공조판서 장유(며느리 피로),
예조판서 김상헌(형 김상용 순절), 참판 김반(부인 자결), 대간 윤황(동생 윤전과 며느리 자결)
등 상당수 대신들의 가솔과 친족들이 강도의 함락 시 변고를 당하고 있었다.
인조가 말했다.
“종묘사직이 이미 함몰되었는데,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구나(宗社已陷, 吾無可爲者)”
남한산성 남문.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입성할 때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인조는 출성(出城) 항복을 결정하였다.
김상헌, 정온, 윤황 등 대표적인 척화파 신료들도 침묵했다.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있던 강도의 함락으로 출성항복을 거부할 근거가 사라진 것이다.
생존의 문제 앞에 성리학적 의리 논쟁도 무의미했다.
삼전도 항례(降禮) 절차만 남았다.
이날 김상헌은 목을 매고 정온은 배를 갈랐으나 두 사람 모두 죽음에는 이르지 않았다.
남한산성에서 출성 항복을 최종 결정할 때에는
강도의 함락 때처럼 줄지은 순절의 행진은 없었다.
절망과 공포로 출구가 없어 보였던 강도의 함락과는 달리
인조 출성 항복은 설욕을 다짐하는 구천(勾踐)의 출구가 남아 있었던 때문이었을까?
이조참판 정온의 절명시(絶命詩)는 절망시(絶望詩)가 되고 말았다.
砲聲四起如雷震 사방에서 들려오는 대포소리 천둥 같으니
衝破孤城士氣洶 고립된 성이 깨어지매 사기가 흉흉하네
惟有老臣談笑聽 늙은 신하만이 담소하며 듣고서
擬將茅屋號從容 초가집에 앉아 조용히 죽기로 했다네
농성 44일째 되는 다음날 아침, ‘조선 국왕 신(臣) 이종(李倧)’은
‘대청국 관온인성(寬溫仁聖) 황제 폐하’에게 출성 항복을 통보했다.
인조의 출성 항복으로 조선은 망국의 길로는 가지 않았으나 ‘오랑캐 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조선은 대청제국을 천자국으로 사대(事大)해야 하는 축의 변화를 겪어야 했다.
다시 말해 제후가 황제에게 행하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는
삼전도에서의 단 한번의 항례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왕을 대신하는 사신들은 대청제국의 황제를 알현할 때마다 언제나
삼배구고두를 행하는 예를 갖추어야 했다. 왕이나 세자가 교체될 때마다
명나라에게 하였듯이 대청제국에 조공을 바치며 칙서를 받아와야 했다.
그 뿐이었는가?
국내의 성을 수축하는 등 국방의 문제까지 대청제국의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명나라가 엄연히 존재하는 가운데 조선의 대청제국에 대한 칭신(稱臣)은
어쩌면 조선 역사상 최대 모험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세력 판도로 보아
청나라가 명나라를 ‘흡수합병할’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선은 국가적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험을 강제한 계기적 사건이 강도의 함락이 아닐까 싶다.
삼전도 비.
한강상류 삼밭나루터 항복했던 장소에 세워졌으나 현재는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언덕에 있다
- 강도 몽유록의 여인들
강도가 함락되는 날, 강화부성에서 자결한 ‘죽은 자’들이 말한다.
“제가 운명을 달리 한 건 하늘의 뜻입니까? 귀신의 뜻입니까?
그 이유를 찾으면 이르는 답이 있으니, 바로 내 남편입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남편은 재상의 지위에 있었고 체찰사의 임무를 맡았거늘 공론을 살피지 않고
사사로운 정에 치우쳐서 강도의 막중한 임무를 사랑하는 아들에게 맡겼습니다.
그 아이는 부귀에 빠져 아름다운 경치나 즐기며 앞날에 대한 계책이라고는 전혀 없었으니,
군사 일에 대해 무슨 아는 것이 있었겠습니까?
강이 깊지 않은 게 아니요 성이 높지 않은 게 아니었건만,
대사를 그르치고 말았으니 죽임을 당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영의정 김류의 부인이자 강도 감찰사 김경징의 어머니가 남편과 아들에게 쏟아내는 질책이다.
김경징의 아내도 이에 동조하며 지아비에게 한마디 한다.
“서방님은 자기 재주를 헤아리지 못하고 홀로 중책을 맡아
천혜의 지형만 믿고 군사 일 돌보기를 게을리하였으니,
그 결과 방어에 실패한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온 강에 비바람이 몰아쳐 사직의 존폐가 한 귀퉁이 쇠잔한 성에 달려 있었거늘,
전군이 무너져 임금이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아, 이 모든 일이 강도를 수비하지 못한 데 말미암은 것이니,
사형을 당한 것은 군법에 마땅한 일입니다.”
또 한 여인의 분노는 주사대장(舟師大將) 장신에게 향한다.
“시아버님의 잘못은 말하지 않는 게 도리이지만,
억울한 마음과 서글픈 정이 물처럼 용솟음쳐 막을 수 없습니다.
임금의 각별한 은혜를 입어 강도 유수(留守)가 되었으면
막중한 땅인 강도를 굳게 지켜야 마땅하거늘,
평탄한 바다와 낮은 성을 헛되이 믿고 창검을 쓸모없는 도구 보듯이 하며
나태하게 낮잠을 자고 강가 누각에서 술에 취해 누웠으니,
국가의 존망을 꿈속에선들 생각해 본 적이 있겠습니까?
짐승 같은 오랑캐들은 본래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 뗏목을 타고
험한 풍랑을 건너려니 빨리 전진할 수 없었건만,
강도의 성은 적막하여 지키는 병사 하나 없었습니다.
그 많던 수군(水軍)은 다 어디에 있었단 말입니까?
화려하게 장식한 전함들은 헛되이 바다 안개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무기가 날카롭지 않은 것도 아니요 지세가 험한 것도 아니었으나,
사람들의 대처가 이러했으니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사실상 강요된 죽음의 원한 때문일까?
전쟁 지휘부 가족 당사자들마저 그들의 무능함과 비겁함을 질타한다.
이는 전쟁 직후 발간된 작자 미상의 한문소설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의 이야기이지만
사실 강도 함락에 대해 일반 백성에게 각인된 기억의 서사이기도 하였다.
- 흔들리는 통설
이러한 강도 함락에 대한 기억의 서사는 나만갑이 병자호란 당시 강도의 일을 기록한
<병자록>에 있는 <기강도사(記江都事)>의 기본 내용과 동일하다.
나만갑의 기록이 <강도몽유록>보다 앞서 나왔으니,
강도 함락에 대한 전쟁지휘부 인재론(人災論)의 기원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나만갑의 기록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그대로 전수되어
조선 사회에서 오랫동안 확대 재생산되었다.
최근까지 그 기억의 서사는 한병기 교수의 <역사평설 병자호란>에서도 인용되면서
강도 함락의 인재론은 통설(?)로 견고하게 유지되어 왔다.
그런데 그 통설이 얼마 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병자호란, 강화도 함락의 원인과 책임자 처벌 – 김경징 패전책임론의 재검토를 중심으로>
이라는 허태구 교수의 논문이 ‘오래지만 낡지 않고 견고한’ 통설의 벽에 망치를 두드렸다.
그는 나만갑의 <병자록>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면서 강도 함락의 원인은
청군과 조선군의 현격한 전력 차이에서 찾아야 한다고 포문을 열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수군 중심의 강도 방어 전략이 실패한 것은
청군의 기발한 나룻배 수송 작전, 홍이포 등 화력의 우세,
조선측 육군 병력의 압도적 열세 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논증하였다.
또한 그는 검찰사라는 직분을 가진 김경징에게는
강도를 지키는 군사적 책임이 없음을 밝혔다.
동시에 그는 군사적 책임자는 주수대장 장신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김경징이 장신보다 나중에 처형되는 되는 것도 군사적 책임이 아니라
도덕적 정치적 책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김경징은 아수라장 강도에 노모와 부인 등을 버리고 홀로 나왔다.
혼자 살기 위해 먼저 강도를 탈출한 것은 논란이 되었던
무능과 부패 문제를 떠나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허태구의 논증은 강도 함락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있어 ‘너무도 당연한’ 사료 비판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입증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강도가 함락된 그날에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실상(實像)은 제시하지 않았다.
강도 함락의 진상에 다가가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남아 있었다.
- 강도 함락, 진실에 다가서다
2년 전 구범진 교수(서울대 동양사학과)의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이 발간되었다.
병자호란을 홍타이지의 전쟁으로 풀어낸 이야기가 추리소설처럼 읽히는 책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소설’을 썼다는 말이 아니다.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은
철저한 사료비판과 논리적 추론은 물론 학제간(學際間) 공동 연구를 통해
그동안 베일에 가렸던 전쟁의 실상을 밝혀낸 기념비적 저작물이다.
구범진 교수는 2016년부터 ‘홍타이지의 전쟁’과 관련된
수많은 ‘신상(新商)‘ 아이템을 역사학계에 출시해 왔다.
병자호란 당시 동원된 청군의 규모, 전격전, 시차 진군 작전, 양로 병진 작전, 고사 작전 등
총력전을 펼친 청군의 전쟁 전략, 조선 근왕병과 청군의 전투 실황,
홍타이지와 천연두 문제, 강도 함락의 진상과 관련한 기마부대의 투입 여부,
강화도 상륙시 동원된 홍이포 문수, 공경명과 경중명 등 투항 한인장군의 존재와 역할,
염하수로의 조석과 조류 분석,
청군의 나룻배 수송과 그와 관련된 향화호인(向化胡人)의 존재 등 구범진 교수가 출시한
신상 아이템들이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에 종합선물세트처럼 담겨 있다.
그 종합선물 세트 안에 강도 함락의 진상의 문을 여는 열쇠가 담겨 있었다.
그는 강도 함락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만주어 사료를 포함한
국내외 이용가능한 모든 사료를 객관적이고도 종합적으로 분석해냈다.
철저한 비교 검증과 논리적 추론을 거쳐 타당하고 합리적인 사료들만 추려냈다.
1637년 2월 16일 당시의 염하수로의 조석과 조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해양학 전문가와 학제간 공동 연구를 진행했고 강도 함락 때와 비슷한 조건의 시기에
강화 현장을 답사하여 조석과 조류의 변화를 실증해내기도 했다.
<인조실록>, <승정원일기>, 나만갑의 <기강도사>, 남급의 <남한일기>,
이민구의 <답정판서서>, 조익의 <병정기사>, <청태종실록>,
<내국사원 만문당안> 등이 강도 함락 관련 기본 사료들이다.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에 근거하여 강도 함락의 실상을 재구성해 보았다.
조선군에게 있어서 강도 방어의 일차 관건은 청군의 염하 도하(渡河)를 저지하는 일이었다.
청군이 강도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두 가지 루트가 있었다.
하나는 한강 하류를 따라 조강을 거쳐 연미정으로 진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천 방향에서 광성진 방향으로 올라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겨울에는 한강이 꽁꽁 얼뿐만 아니라
강도 동북쪽 연미정으로 진입하는 염하수로도 결빙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경우 염하의 결빙이 콘스탄티노플을 지켜준
골든혼(golden horn)만의 쇠밧줄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강도 동북쪽은 ‘불가침 해역’이 된다.
반면에 인천에서 올라오는 바닷길은 좀처럼 결빙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겨울에
청군이 강도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인천 방향에서 광성진을 거쳐 올라 와야만 했다.
이 때문에 조선 수군은 방어 거점을 강도 동남쪽 광성진으로 두고
그곳에 전력을 집중하였고 연미정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전력을 배치하였다.
연미정.
강진혼과 변이척이 이끄는 7척의 충청수군 판옥선이 연미정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금년 1월초 연미정 앞바다의 성엣장이 밀물에 밀려 떠다니고 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 광성진을 거점으로 하는 조선 수군의 전략은 합리적이었다.
물론 갑곶 맞은편 김포 통진 지역에서 청군이 배를 징발하여 도하할 경우도 고려했어야 하나
이른바 청야전략(淸野戰略)을 구사하여 그에 대한 대비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해안선은 물론
강화부성에도 전력 배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강도에 있는 육군 병력이 고작 1600여명에 불과하고 그것도 600명 정도는
육지로 송출되어 있는 병력의 한계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광성진 방어에 실패할 경우
강도는 청군에게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청군은 조선군의 이러한 전략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들의 도하 지점은 광성진도 연미정도 아니었다. 강도의 목덜미에 해당하는 갑곶이었다.
목덜미가 잡힌 것이다. 연미정과 광성진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전함이 갑곶으로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청군은 기발한 전략을 구사했다.
배가 산으로 가는 전략이었다. 청군은 삼강(三江) 지역(지금의 용산 인근)에서
갑판도 선실도 없는 삼판선(나룻배) 44척을 만들어 수레에 싣고
문수산 갑곶나루로 수송한 것이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2세가 천년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할 때
쇠밧줄이 설치된 골드혼 지역을 우회하여 배를 싣고 산을 넘어온 전략과 너무도 흡사했다.
조선군은 청군의 이러한 움직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청군의 도하 작전이 실행되기 하루 전 검찰사 김경징이 ‘오랑캐의 나룻배 수송 동태’를
보고하는 통진 수령의 말을 의심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청군은 치밀했다.
조선 수군의 대형 판옥선이 폭이 좁고 물살이 빠른 염하수로에서는
제 기능을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흑룡강과 송화강에서 고기 잡는 데 사용하는 거룻배 수준의 작은 삼판선을 만들었다.
그것도 청군에 귀순한 남양만(경기 화성) 지역의 향화호인들을 잊지 않고 부려먹었다.
문수산성 아래 갑곶나루.
예친왕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이 도하작전을 위해 정박한 곳이다.
1637년 2월16일,
갑곶나루 앞 염하 해류가 밀물에서 썰물로 바뀐 오전 11시~11시 30분 경,
새벽에 밀물을 타고 광성진에서 갑곶 인근까지 올라온 장신의 판옥선 27척은
썰물에 밀려 불가피하게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고,
이보다 앞선 시간에 홍이포 포격을 받은 강진혼의 판옥선 7척은
연미정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염하는 무선무인(無船無人)의 바다가 되었다.
예친왕 도르곤이 이끄는 3000여명의 청군 부대는 이러한 사정을 예측한 듯
나룻배 44척에 올라 서서 상앗대질하며 아무런 저항 없이 갑곶나루에 상륙하였다.
뒤늦게 황선신이 이끄는 100여명의 조선 병사들이
진해루 인근 산에서 청군과 맞서 싸웠으나 전멸하였고,
청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십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해루에서 진을 치고 있던 검찰사 김경징은
변변한 전투 한 번 하지 못하고 격파를 당해 해선을 타고 남쪽으로 도망갔다.
부검찰사 이민구도 비무장 병력을 이끌고 갑곶 나루를 순시하다가
혼자 배를 얻어 타고 강도를 빠져나왔다.
손돌목 광성진 앞바다.
조선수군 판옥선이 폭이 넓은 염하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한편 봉림대군은 청군의 상륙이 개시되기 전에 갑곶 나루를 순시하다
강화부성으로 돌아가 군사를 모아 다시 진해루 쪽으로 와서 싸움을 벌이고자 했으나
성을 나올 무렵에는 청군이 이미 상륙하여 부성을 향하고 있어 성문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해가 지기도 전에 청군의 남문 포위가 시작되었다.
성 안에는 절망과 공포의 기운이 감돌았다.
결국 강도 함락의 날, 청군의 상륙을 저지할 수전(水戰)은 없었다.
강화부성을 지켜낼 산전(山戰)도 없었다.
강도는 열하(熱河)의 '무란위장' 같은 청군의 사냥터에 불과했던 것이다.
조선 백성에게 죽음과 굴욕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강도 함락의 책임을 물었다.
강화유수 겸 주수장군 장신과 충청수사 강진혼과 충청부수사 변이척은
군사적 이유로 참수당하였고
검찰사 김경징은 강도 탈출에 따른 도덕적 문제로 자진(自盡) 처분을 받았다.
부검찰사 이민구도 강도 탈출에 따른 문제로
영변으로 위리안치되었지만 사형 처분만은 면했다.
강화 갑곶나루터 진해루. (이상 사진촬영 = 황효진)
황선신이 진해루 인근에서 군사를 이끌고 맞섰으나 청군은 파죽지세로 남문을 포위했다.
북극한파에 폭설이 내린 날 아침,
강화 갑곶 나루 진해루(鎭海樓) 앞에 섰다.
진혼가(鎭魂歌)를 대신해 이민구의 천랑행(天狼行)을 읽어 내려갔다.
天狼東行挾驕虜 천랑성 동으로 행해 교만한 오랑캐 비추니
宇縣腥塵雜風雨 천하의 누린내가 비바람과 섞였네
南至馬韓西龍灣 남쪽 마한에서 서쪽 용만까지
生靈百萬飼豺虎 백만 백성 승냥이와 호랑이 밥 되었네
犬戎那得近天威 견융이 어찌 임금의 위엄에 다가섰나
烈士呑聲但心苦 열사들 울음 삼키며 마음만 괴로웠네
星槎永阻析木津 사신들 석목진 가는 길 영원히 막혀
冠蓋却踏遼陽土 관리들 도리어 요양 땅 밟는구나
嗚呼此事何代無 아아 이런 일이 어느 때들 없으랴
國之不亡神所扶 나라 보존한 것도 신의 도움이지
絶綱壞紐再整頓 끊어지고 무너진 법도 다시 정돈하니
小臣漏命眞須叟 소신의 부지한 목숨 경각에 달렸네
百口零落等草莽 온 가족 영락하여 초망 같은데
一身獨迸沙塞隅 이 한 몸 홀로 변방으로 쫓겨났지
繩勉踪跡混魑魅 마지못한 삶 이매들과 어울려
分甘覓 沒隨泥涂 몰락 감수하며 진창길 갔어라
朝食幾分逆旅翁 아침밥에 시장기나 면하는 나그네
夜宿寒就牛衣中 잠자리 추워 우의 속에 떤다네
結髮遊宦三十年 상투틀고 벼슬한 지 삼십 년
子孫滿眼家室豊 자손들 눈에 가득하고 집안 넉넉했지
忽遭喪亂兼網罟 갑자기 난리 겪고 법망에 걸려
終日坎稟悲途窮 종일 적소에서 궁한 신세 슬퍼하네
冤氛肯銷斗墟深 북두성 깊이 서린 원기 없앨 수 있으랴
鳥雀不棲茅茨空 참새도 텅 빈 초가에는 깃들지 않네
陽光暗澹悶高牖 햇빛 흐려져 높은 들창 닫았더니
天地爲之雷怒吼 천지간에 성난 천둥소리 울리네
近時名臣楊用脩 근래의 명신 양용수는
少竄滇南死白首 젊어서 전남(곤명)으로 쫓겨나 늙어 죽었지
我今老朽遘玆患 나는 지금 늙어서 이 환난 만났으니
雖未生還亦未久 살아서 돌아가지 못해도 오래 있지는 않겠지
已將禍福付盈虛 화복을 생멸하는 이치에 부쳤으니
哀樂於吾復安有 슬픔과 즐거움이 나에게 어찌 다시 있으랴
漫聲奏歌激林樾 늘어진 소리로 노래하여 숲속에 퍼지는데
繞簷霜雪飛淸晝 처마를 휘감는 눈서리 대낮에 흩날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