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실이 강북땅 → 섬 → 강남땅 된 사연
[겸재 그림 길 송파진①] 잠실이 강북땅 → 섬 → 강남땅 된 사연
cnbnews 제675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5.14 13:40:05
(문화경제=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경교명승첩을 따라
한강을 오른 지도 여러 날 되었다. 오늘은 송파진(松坡津)이다.
겸재의 그림을 보면 송파진이 특별히 소나무 언덕(松坡)이 있는 나루(津)는 아니다.
이 지역은 전부터 광주목 중대면 송파리(中臺面 松坡里)였는데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언덕에 소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필자의 기억으로도 88올림픽 무렵 중대면에 해당하는
가락동에 살았었는데 뒷동네 야산에 소나무가 심심치 않았던 기억이 난다.
겸재의 송파진 그림에는 송파나루 강가에 버들이 늘어져 있고 주변 민가들에는
수종은 알 수 없지만 침엽수는 아닌 나무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으로는 확인이 안 되지만 그림의 맨 뒤쪽 라인을 형성하는 남한산성 성벽에 빽빽이
이어진 나무는 소나무이다. 한편 어떤 이들 말로는 암사동에서 미사리로 가는 길에
강가마을 선리(船里)가 있었는데 이곳에 수해가 닥치자
이곳에 있던 송파마을 사람들이 이전해 왔기에 송파(松坡)가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그림 1. 겸재 작 송파진도.
이제 우선 겸재의 그림(그림 1)부터 살펴보자. 번호 1로 표시한
남한산성 성벽 중간에 보일 듯 말 듯 살짝 드러나 있는 성문(城門)의 지붕은 무엇일까?
아마도 겸재는 이 문이 알고 있는 아픔을 같이 했던 것 같다.
남한산성 서문(西門, 즉 右翼門)이다.
1637년 1월 엄동설한에 조선의 왕 인조가 항복을 길로 택한 문이다.
그 임금은 감히 평탄한 남한산성의 정문 남문(南門, 즉 至和門)을 택하지 못하고
한겨울 가파른 그 길을 택해 항복의 예를 올리러 나섰다.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아마도 겸재는 이 문을 그리고 싶지 않았던 듯싶다.
번호 2로 표시한 산봉우리는 연주봉과 그 능선으로 보인다.
그 산 줄기 아래쪽 우뚝한 봉우리는 금암산 같다.
이 산줄기는 이성산성까지 이어지고 있어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산행길이다.
강 건너편 북쪽 3 나루에는 배 몇 척과 배를 기다리는 듯한 선객(船客)들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요즈음 비치 파라솔 같이 보이는 차일막(遮日幕) 아래 쉬고 있는 이들도 보인다.
강 한가운데에는 광목으로 돛을 달았을 것처럼 보이는 돛배도 있는데
노(櫓) 대신 상앗대(삿대)를 쓰고 있다. 출발하려는 강안(江岸)의 배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송파강도 깊이는 그만그만했던 것 같다.
강 건너 남안(南岸)에는 두 무더기의 나무 원뿔 같은 모양 ‘4’를 세워 놓았는데
이것도 아마 상앗대를 물기 빠지게 세워놓은 것 같다.
초가로 보이는 백성들의 집이 옹기종기 많이 모여 있다.
분명 초가일 텐데 지붕의 모양이 우리가 익숙한 둥근 각(角)이 아니고
맞배지붕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겸재 시대 백성들 집은 이랬었나….
가운데 언덕에는 어느 세도가의 별서(別墅)로 보이는
팔작지붕의 이층 누대(樓臺)가 빙 두른 회랑에 우뚝한 문으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무슨 건물일까? 옛 지도에 나루에 진사(津舍)가 그려져 있는데
진사로 보기에는 너무 규모가 크다. 오른쪽으로 백성들 집 뒤 언덕에 규모는 작으나
잘 지은 팔작지붕(또는 우진각지붕) 건물이 있다. 이것이 진사(津舍)일까? 아니면
옛 지도에는 삼전도(三田渡: 삼밭나루)에 비각(碑閣)이 그려져 있으니 그 삼전도 비각인가?
아니면 남한산성 축성 설화에 등장하는 이서 장군의 부인 송씨 부인을 모신
부군당(府君堂)이 쌀섬여울 동쪽에 있었다는데 그 부군당과 관련 있는 건물은 아닐까?
건물들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의문이 생기는데
현재 필자의 능력으로는 아쉽게도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면 겸재의 송파진도(松坡津圖)는 어느 위치에서 어떤 앵글로 그린 것일까?
현재의 석촌호수 모습.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잠실 사거리에서 석촌호수 쪽으로 조금 내려온 지점에서
남한산성 방향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 그렇다면 당장 의문이 생긴다.
아니 잠실대교 북단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그려야
그림처럼 강(江)과 나루가 있고 저 멀리 남한산성이 보일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겸재가 송파진도를 그린 시점을 엿볼 수 있는 송파진 지역 옛 지도(지도 1)를 살펴보자.
규장각 소장 경기도 광주목 읍지에 실려 있는 지도이다.
지도 1. 광주의 옛 지도.
겸재의 그림을 연상하며 살펴보면
겸재는 필자가 지도상에 녹색 화살표로 표시해 놓은 앵글(視覺)에서 송파진도를 그렸다.
지도의 1 표시는 송파진도의 맨 뒤쪽 라인에 그려진 남한산성이다.
표시 2는 그림 좌측 산줄기, 즉 연주봉 능선에서 이성산성으로 내려가는 능선 길로
그 끝에 우뚝한 산 금암(金巖)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3은 지금의 가락본동 주변인 중대면이다.
그곳에는 남한산성과 연결되고 다시 송파나루와 연결되는 도로가 그려져 있다.
조선 후기 지도라서 송파나루와 연결된 길을 크게 그렸으나
조선 전기에는 삼전도(三田渡)와 연결되는 길이 더 큰 길이었다. 왜 이 길이 중요할까?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 길은 항복한 나라 조선의 왕 인조가 지나간 항복의 길이었다.
인조는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고읍(古邑)을 지나
삼전도 수항단(受降檀)에서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의 예를 올렸다.
남한산성과 가락동의 현재 지도.
그런데 고읍(古邑)의 위치가 모호했었다.
연구자에 의하면 중대면(현재 가락본동)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래야 동선이 맞다.
광주 읍치는 아마도 중대면, 하남시 춘궁동, 남한산성, 경안
이렇게 네 곳으로 옮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서울역사연구원의 연구 자료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련다.
일제시기에 작성된 『조선고적조사보고서』는 춘궁동 읍치 외에
중대면에도 읍치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보고서에서 제기한 중대면 읍치의 근거는
『丙子錄』에 있는 내용 중 인조가 남한산성의 서문으로 나왔고,
고읍을 거쳐 삼전도의 수항단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실제로 북문이 아닌 서문을 나와서는 동부면 읍치를 지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조사해 본 결과, 이와 같은 내용은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병자록』(간행자, 연대 미상) 외에도 『承政院日記』, 『南漢日記』, 1928년 朝鮮博文社에서
발간한 『壬辰及丙子錄』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승정원일기』의 기록대로 중대면에 읍치가 설치되었다면,
그 시기는 동부면 읍치보다 이전이거나, 아니면 동부면 읍치 설치 후
어떤 이유로 일시 읍치가 이동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참고로 여기에서 동부면 읍치란 하남시 춘궁동(일명 고골)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겸재의 송파진도에는 인조의 항복 길이 보이지 않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필자는 그 길을 대략 점선으로 송파진도에 그려 넣었다. 지도 1의 4표시는 성내천이다.
지금은 물길이 직선화되어 옛 모습 없이 한강으로 흘러들고 있다.
5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있기 전 한강의 본류(本流)가 흐르던 송파강 물길이다.
지금의 잠실대교가 지나가는 한강수가 아니다. 그러면 이 물길은 어디를 흐르던 물길일까?
바로 지금의 석촌호수가 된 한강의 옛 물길이다.
겸재의 송파진도에 그려진 강물은 이 지도에 그려진 강물로 이제는 석촌호수가 된 물길이다.
지도 상에는 무동도(舞童島)라고 쓴 저자도(楮子島)도 보이고
한강물로 직접 흘러들던 양재천(6)도 보인다.
지금은 양재천이 탄천으로 흘러드는 탄천의 지류가 되었지만
잠실 지역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이 지도처럼 한강으로 직접 흘러들던 물길이었다.
7은 탄천이다.
항복 길을 ‘승리 길’로 표기한 쓸쓸함
지도 2. 광주 옛 지도.
다시 지도를 살펴보면 강 남쪽에
三田渡(삼전도), 松坡津(송파진), 碑閣(비각)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자세히 그린 옛 광주목 지도(지도 2)를 보자. 필자가 써 넣은 숫자를 기준하면
표시 1은 서문(西門)인데 써 있는 글씨는 丙子得捷處(병자득첩처)이다.
의미는 ‘병자년(1636년)에 승리를 거둔 곳’이라는 뜻이다.
인조가 항복하러 나선 서문인데 이렇게 써 넣은 것을 읽는 내 마음은 쓸쓸하다.
번호 2는 砲壘(포루)라 써 넣었다. 연주봉 옹성에는 지금도 포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길로 내려가면 금암산과 이성산성에 닿는다.
3은 중대면, 4는 성내천, 5는 지금은 석촌호수가 된 옛 한강 본류, 6은 양재천, 7은 탄천이다.
이 지도에는 송파진과 삼전도에 대한 기록이 지도 1보다 정확하다.
동(東)에는 松坡津(송파진), 서(西)에는 三田渡(삼전도)가 그려져 있고
삼전도 쪽 작은 기와집에는 碑閣(비각), 중앙 큰 기와집에는 鎭舍(진사)라 썼고,
송파나루(松坡津) 쪽에는 酒幕(주막)과 擺撥(파발)이란 글씨가 보인다.
아쉽게도 강 건너 북쪽에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광주 지도를 그리다 보니 강북 양주(楊州) 땅은 소홀히 한 점도 있겠지만
실제로 강북 쪽에는 나루와 뽕나무 밭뿐이었다.
이제 다시 겸재의 송파진도를 보면 나루 남쪽 민가들에는 주막도 심심치 않게
자리 잡았을 것이며, 중요한 연락을 맡았던 파발도 자리했었음을 알 수 있다.
큰 기와집은 아마도 진사(鎭舍), 작은 기와집은 비각(碑閣)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도 3. 잠실 개발 이전의 한강 물길.
그러면 송파의 물길은 어떻게 된 것일까?
지도 3은 을축년(1925년) 대홍수 이후 잠실 지역 물길을 나타낸 지도이다.
확연히 한강의 물길은 두 갈래로 갈라져 있고 지금의 잠실은 섬으로 나타난다.
표시 1은 한강의 본류이다. 풍납동 쯤 와서는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물길 2는 지금의 잠실대교가 놓여 있는 현 한강 물길이다.
1800년대 중기에 그려진 대동여지도에 보면 작은 샛강으로 그려져 있다.
새내(新川)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한다. 지금 잠실 신천동은 여기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이 샛강은 수량이 부족할 때는 육지와 연결되는 모래 길이었다.
3은 지금 석촌호수로 남은 옛 한강 본류 송파강 물길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겸재의 그림 송파진은 이 물길을 그린 것이다.
표시 4는 겸재 그림 속 집들이 자리 잡았던 강 남쪽 광주목 송파나루다.
옛 송파나루의 자료사진.
송파강 북쪽 강변은 이제는 롯데빌딩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겸재 그림 속 차일이 쳐 있고 선객들이 배를 기다리던 곳이다.
살곶이 다리(지도 3의 9)에서 화양동을 거쳐 지금의 잠실대교(2)를 지나
뽕나무가 무성했던 모래섬 잠실(5. 옛 지명 桑林, 뽕나무밭)을 지나
송파나루로 이어진 길이 보인다. 6은 탄천, 7은 양재천, 8은 저자도이다.
한강 물길까지 바꿔버린 1925년 대홍수
잠실 북쪽(자양동 쪽) 물길 새내(新川)가 갑자기 큰 물길이 된 것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라고 한다. 암사동 선사유적지도 이때 땅이 쓸려나가면서 드러났고
잠실 모래벌판을 감돌아 흐르던 송파강도
강물이 몰아쳐 새내(新川)를 거의 직선으로 들이쳐 큰 강줄기가 되었다 한다.
그 결과 잠실은 강 사이 완연한 모래섬이 되었고 이 모래섬 서쪽
부리도(浮里島) 주변은 탄천과 양재천이 각각 유입되면서 비만 오면 범람했다 한다.
석촌호수 조성 당시의 자료사진.
한국전쟁 이후 자료들을 보면 이곳에 살던 300여 가구의 주민들은
조선시대 동잠실(東蠶室)의 의무도 없기에 상신(桑神)으로 모실 신목(神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뽕나무 밭을 없애고 채소를 키우며 살았다 한다.
그러던 이곳에 1970년대 초 개발의 바람이 몰아닥쳤다. 겸재 그림의 배경이 되었던
송파강 물길을 막아 공유수면을 매립하여 섬을 강남 쪽 육지에 붙여 육지화하고
신천강을 확장해 직선화된 한강 물길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강 북쪽에 붙었던
뽕나무밭(桑林) 잠실은 강남 땅이 되었고 송파강은 메워져 석촌호수가 되었다.
오늘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잠실역으로 간다.
겸재의 그림 송파진을 찾아 석촌호수를 돌아보기 위함이다.
석촌호수에 가면 4개의 관심 대상을 찾아보리라.
삼전도 터 표석, 송파나루 터 표석, 삼전도비와 송파산대놀이 마당이 그것이다.
송파강에는 두 개의 나루가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설치된 삼전도(三田渡, 삼밭나루)와 병자호란 이후에 번성한
송파진(松坡津, 송파나루)이다. 아쉽게도 그 흔적은 근래에 세운 표석만 있을 뿐이다.
또 하나 가슴 아프지만 둘러보아야 할 기념물이 있다.
인조가 수항(受降)한 후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세운 삼전도비다.
또한 송파산대놀이 공연장도 석촌호수에 있다.
이제 석촌호수를 한 바퀴 돌기 시작한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니
집안에 갇혀 있던 이들이 봄바람을 맞으러 호숫가를 부지런히 걷고 있다. 옛 송파강이
조선역사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은 이 강에 삼밭나루(三田渡)가 설치되면서 부터이다.
태종이나 세종은 동교(東郊: 응봉, 살곶이다리, 저자도, 뚝섬 쪽)에 나가서
매 사냥도 즐기곤 했는데 이때 더 멀리가면 송파강가에서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일례로 실록에 기록된 세종 때 일을 보자.
세종 7년 을사(1425)3월에 일인데,
임금이 동교(東郊)에 행행하여 매를 날려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저자도(楮子島)에 가서 물고기를 잡도록 명하였다. 연(輦)을 살꽂이[箭串] 들에 머무르고
거가를 수행한 내금위(內禁衛)의 사복 갑사(司僕甲士)에게 말 타고 활 쏘도록 명하였다.
낮에는 삼전도 하평(三田渡下平)에 머물러 술을 돌렸다.
(上幸東郊, 觀放鷹, 命漁于楮子島, 駐輦箭串平,
命隨駕內禁衛, 司僕甲士騎射. 晝停于三田渡下平設酌)
이렇게 익숙하다 보니 도성에서 광주로 가는 길목 송파강에 나루를 설치토록 했다.
그때가 1439년(세종 21년)인데,
새로 설치한 삼전도(三田渡)에 한강 도선(漢江渡船) 한 척과
사재감선(司宰監船) 두 척을 주고,
또 한강 진척(漢江津尺) 5인과 낙하 진척(洛河津尺) 5인을 배속시키고
구분전(口分田)을 주어 윤번(輪番)으로 교대근무하게 했다.
(新設三田渡, 給漢江渡船一隻, 司宰監船二隻.
又除漢江津尺五人, 洛河津尺五人屬之, 仍給口分田, 輪番遞立).
삼전나루 터 표지석.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렇게 함으로써 도성에서 왕십리, 살곶이, 화양정, 삼전나루, 광주로 이어지는 루트가
조선 초부터 확립되었다. 조선 초기 삼남으로 이어지는 노량나루,
경상도 길로 이어지는 한강나루, 영동이나 영서로 이어지는 삼밭나루 길이 뚫려
교통이 편리해졌다. 서거정은 사계집(四桂集)에서 삼전나루 지나는 길의 정서를 읊는다.
渡途中 삼전도 길에서
羸馬三田渡 여윈 말 타고 삼전도로 가는데
西風吹帽斜 서풍이 불어 모자가 기우네
澄江涵去鴈 맑은 강은 가는 기러기를 담고
落日送還鴉 지는 해는 돌아가는 까마귀를 보내네
古樹明黃葉 고목 노란 잎이 선명한데
靑山將盡處 푸른 산 끝나는 곳
遙認是吾家 저 멀리 우리집이구나
아마도 삼전도를 건너 집으로 오는 귀가길인가 보다.
태종과 세종이 승하한 후 그 능(陵)을 대모산 남녘에 자리 잡았으니
이 길은 능행길(陵幸 길)이 되었다. 중종 때(1536년, 중종 31년)에는 임금이
헌릉, 영릉, 선릉에 행행(行幸)하게 되어 이곳에 배다리를 가설한 일도 있었다.
삼전나루가 번성하면서 왕래객이 늘어났는데
이렇게 되면 예나 지금이나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뱃삯을 올려 이익을 챙기려는 자들이 많아지면서 하급 관리가 맡던 나루 관리직인
삼전도승(三田島丞)을 힘 있는 자들이 차지하여 뱃삯 횡포를 부리는 일도 생겼다.
그러나 삼전도가 이렇게 번영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삼전도 앞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슬픈 여인의 설화도 남아 있다.
졸고 ‘이야기가 있는 길’에서 소개했던 이야기를 옮겨 소개해 본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앞 매바위의 전설이다.
매바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바위 하나가 자리하는데 ‘守禦西臺’라는 각자(刻字)가 우람하다.
그러나 이 바위는 ‘매바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아픈 전설이 담겨 있다.
남한산성 축성 때 동남쪽 부분은 이회 장군이, 서북쪽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각성(覺性)스님과 응성(應聖)스님이 책임을 지고 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회 장군이 맡은 구역은 제 날짜에 축성이 이루어지지도 않고
비용도 부족해 공사 진척이 지지부진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안
장군의 부인 송씨와 첩실 유씨는 호남으로 모금 활동을 떠나 공사비를 모아 돌아왔다.
그러나 장군은 이미 참수(斬首) 당한 뒤였다. 장군이 참수를 당하는 순간 수어장대 앞
바위에서는 매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한다. 장군의 억울한 사정을 바위는 알았는지 매를 날려
그 충절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 후 이 바위는 매바위라는 이름을 얻게 되어
이회 장군의 억울함을 전하고 있다. 그러면 송씨 부인과 유씨 부인은 어찌되었을까.
모금해온 쌀을 모두 송파강에 던지고 물로 뛰어 들어 자결했다 한다.
쌀을 던진 곳 송파나루 앞은 쌀섬여울이라 불리게 됐고
이들이 자결한 삼전도 송파강과 탄천이 만나는 위치 옆 무동도(舞童島) 근처에서는
궂은 날이면 여인네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다.
이들의 넋을 위로하려고 잠실동 313-1번지 부근에 부군당(府君堂, 호구부인당, 애기씨당)을
세웠는데 1971년 잠실이 개발되면서 이제는 이야기로만 남았다.”
또 하나 삼전도의 아픈 기억은 너무나도 컸다.
1636년 청태종은 삼전도를 건너와 남한산성을 에워쌌고
인조는 결국 삼전도 수항단(受降壇)에서 한반도 역사에 가장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행했다.
훗날 정조는 남한산성 행행길에 이 곳을 지나면서 수치스러웠던 그 날을 생각하며
시 한 수 읊었다. 홍재전서 춘저록(春邸錄)에 그 시(詩)가 보인다.
삼전도 비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層巒疊石漢南城 층층 봉우리와 겹겹 바위 한남성
西將臺高可按兵 서장대 우뚝하니 군대를 주둔시킬 만하네
請看三田頑石立 삼전도에 완악한 빗돌 서 있는 걸 보게나
當時奇計媿陳平 당시에 진평 같은 기계 없었던 게 부끄럽구려
석촌호수를 다 돌아 겨우 삼전나루 터 표석을 찾는다.
서쪽 호수 서남쪽 코너 차도 옆 화단가에 있다. 물 옆을 끼고 도는 길이 산책로인데
길까지 올라와야 하니 찾아볼 분은 잊지 마시기를. 옛 지도를 보면 삼전나루는
탄천과 가까이 그려져 있으니 실제로는 이 표석보다 더 서쪽이었을 것이다.
공원에 세우는 것이 편해서 이곳에 세운 것 같다.
이 나룻가에서 그날 있었던 이야기는 다음 호로 미룬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