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2022-08-28 18:03:21
瑣尾錄
조선시대 선조 대 선비였던 오희문(吳希文)[1]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 동안 피난길에 올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 9년 3개월간의 매일의 일상을 기록으로 남긴 피란일기. 총 7책. 쇄미록이라는 제목은 징비록처럼 시경에 나오는 문구를 따서 만들었다. 그 구절은 쇄혜미혜 유리지자(瑣兮尾兮 遊離之子)이며 뜻은 무엇보다 누구보다 초라한 것은 여기저기 객지를 떠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피란일기로 꼽히며, 난중일기, 징비록과 함께 임진왜란 시기 3대 사찬 사서로도 꼽힌다. 대한민국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일기를 소재로 국립진주박물관에서는 특별전을 열고 있다.
오희문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해인 선조 24년, 1591년 11월 27일부터 전쟁의 폐해로부터 서서히 벗어나 사회가 안정되어 가던 1601년 2월 27일까지 9년 3개월간 피난하면서 겪었던 갖은 어려움을 거의 매일매일 기록한 일기이다.
내용이 매우 방대하기 때문에 여러 일기로 나누고 있다. 자세한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임진남행일록: 신묘년(1591년) 11월 ~ 임진년(1592년) 6월
2) 임진일록: 임진년(1592년) 7월 ~ 동년해 12월
3) 계사일록: 계사년(1593년) 1월 ~ 동년해 12월
4) 갑오일록: 갑오년(1594년) 1월 ~ 동년해 12월
5) 을미일록: 을미년(1595년) 1월 ~ 동년해 12월
6) 병신일록: 병신년(1596년) 1월 ~ 동년해 12월
7) 정유일록: 정유년(1597년) 1월 ~ 동년해 12월
8) 무술일록: 무술년(1598년) 1월 ~ 동년해 12월
9) 기해일록: 기해년(1599년) 1월 ~ 동년해 12월
10) 경자일록: 경자년(1600년) 1월 ~ 동년해 12월
11) 신축일록: 신축년(1601년) 1월 ~ 동년해 12월
구체적인 작성 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은 임진남행일록은 후에 작성된 것으로 즉, 선조 24년인 1591년 11월 27일부터 이듬해 1592년 6월 28일 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일들을 요약해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록들은 거의 모두 하루하루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이다.
예외적으로 1593년 1월 14일부터 동년 3월 말까지 45일간은 저자인 오희문이 전염병으로 앓아누워 있었기 때문에 일기를 쓰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록(日錄)들은 거의 모두 하루하루 빠짐없이 기록한 방대한 양의 일기이다.
저자인 오희문은 외거노비의 신공을 받으러 한양을 떠나 1592년 7월 1일에 전라도 장수현감인 처남 이빈의 집에서 머물고 있다가 밀려오는 왜군을 피하여 장수현감의 가족들, 장수현 아전들과 함께 영취산(靈鷲山)의 석천사로 피난하게 되었으며, 이후 다행히 한양을 빠져나와 친척집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가족과 다시 만난 후 십여 년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1601년 2월 27일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일기를 썼다.
이에 따라 오희문과 그의 가족이 전라도 장수와 충청도 홍주, 임천, 아산 및 강원도 평강 등지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여러 사건들이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전쟁이 발발했던 때에 그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 상황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노모를 모시러 전라도 영암과 태안에 다녀오면서 그가 보고 느꼈던 전쟁 중 사회상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도 저자의 처남과 사위(오윤겸의 친구 신응구. 오희문을 친아버지처럼 돌봤으며 전쟁 중 본처가 죽자 오희문의 장녀를 후처로 들였다) 및 아들(오윤겸) 등을 비롯한 친지들이 여러 고을의 수령으로 재임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방문하여 들은 각 지방 고을의 현황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쇄미록은 피란일기인 동시에 일상생활일기로 전쟁 상황 묘사를 제외한 일상생활에 관한 다양한 기록들 또한 많이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시 제사를 지낸 방법,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는 방법, 그외 각종 교환경제, 물품수수 등의 모습, 각종 오락과 여가생활 등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이 남겨져 있다.
오희문은 고통스러운 피란 와중에도 조상에 대한 제사를 각별히 지냈는데, 쇄미록에 나오는 각 해 마다 제사를 지낸 횟수는 1595년 17회, 1596년 22회, 1597년 20회, 1598년 28회, 1599년 24회, 1600년 24회 등이다. 주로 삭망례(朔望禮), 천신례(薦新禮), 기타 기제와 다례, 시제(時祭) 등을 지냈으며, 형편이 힘들어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어 반갱(飯羹, 밥과 국)만으로 예를 올리기도 했고, 제수를 마련하기 위해 제물을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제사를 지내려 한 이유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어줄 사람이 당시 오희문 외에는 없었고, 종손까지 죽어서 달리 제사 지낼 사람도 없었으며, 겨우 종손의 아우가 살아남아 있었으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를 염려하였기 때문으로, 1600년에 오충일의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이를 멈추게 된다.
이에 따라 쇄미록에는 1500년대 후기 우리나라의 제사 예식과 준비과정, 차례 방법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남겨졌다. 또한 집안 노비들이 전란의 혼란을 틈타 달아나거나 꾀병을 부리며 농사일을 게을리한 일을들 기록하며 분노하면서도 피란 중에 죽은 노비들은 슬퍼하면서 없는 살림을 털어서라도 장례를 치뤄주고 제사도 지내주려고 노력하는 등 조선 중기 노비제도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쇄미록에는 피란기의 스트레스를 잊기 위한 여러 여가생활 모습도 남겨져 있다. 주로 승경도와 바둑, 장기와 쌍륙 등이었다. 갑오일록 1월 5일자 일기에는 "‘정경도를 던져 승부 내기해서 종일 놀았다"는 내용이 있으며, 임진일록 11월 19일자 일기에는 "마을의 여러 소년들이 다 모여서 종정도를 노는데 맨 끝에 있는 자는 먹으로 두 눈을 그려서 웃음의 자료로 삼았다"라는 내용도 있다.
계사일록 8월 7일에는 "이른 아침에 아우와 함께 절에 올라가서 제공(諸公)과 함께 두부를 먹고 혹 바둑도 두고 혹 종정도를 놀면서 웃음거리로 삼았다"라고 나와 있으며, 계사일록 7월 22에는 "저녁때까지 요월당에 있는데 마을의 젊은이와 어른이 다 모여서 혹은 바둑을 두고, 혹은 종정도도 놀고, 혹은 장기도 두고, 쌍륙도 놀아 즐기면서 긴 해를 보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전쟁 중에도 정기적으로 조보를 발행하고 각 고을 수령들의 행정력이 잘 유지되어 있는 모습 등 동시대 다른 국가들보다 앞선 조선의 행정력에 대한 기록도 있다.
반면 전쟁기의 끔찍한 기록들도 많이 남겨져 있는데 자녀들 중 가장 사랑하던 막내딸이 학질에 걸렸으나 치료를 못받고 죽은 일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잊지 못했고, 걸식자나 굶어 죽은 사람에 대한 내용,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기까지 했다는 기록, 전란으로 인한 피란민들의 고통스러운 삶, 군사 징발과 군량 조달. 과도한 부역으로 인한 백성들의 몰락, 처와 자식을 버리고 도망한 아버지, 자식을 버리고 달아난 어머니, 죽은 어머니의 젖을 만지면서 우는 아이, 유행병과 배고픔으로 인해 떼죽음당한 사람들, 싸우지도 않고 밥만 축내는 무능한 의병들과 곽재우 같은 유능한 의병들의 기록, 왜군의 잔인한 살인·방화·약탈·강간 행위들, 명군의 무지한 약탈과 행패, 세든 집 집주인이 멋모르고 가담했다가 처형당한 이몽학의 난 등의 내용이 많이 나와 당시의 처참한 상황 또한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1593년 7월 7일) 또 어제 오는 길에 7,8세 되는 아이를 보니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고 여인 하나는 길가에 앉아서 역시 얼굴을 가리고 슬피 울고 있었다. 괴이해서 그 까닭을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지금 내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버리고 갔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세 사람이 떠돌면서 걸식했는데 이제는 더 빌어먹을 곳이 없어서 장차 굶어 죽게 되었으므로 내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으니 우리 모자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어서 우는 것이라 한다. (...) 슬프다, 창생이 장차 다 없어지고 하나도 남지 않으려는가. 탄식함을 이깆 못하겠다.
(1594년 2월 14일) 길에서 굶어 죽은 시체를 거적으로 말아서 덮어둔 것을 보았는데 그 곁에 두 아이가 앉아서 울고 있다. 물었더니 그 어미라 한다. 어제 병으로 죽었는데 그 뼈를 묻으려 해도 비단 제 힘으로 옮길 수 없을뿐 아니라 또 땅을 팔 도구를 얻을 수가 없다고 한다. 조금 있다가 나물 캐는 여인이 광주리에 호미를 가지고 지나가므로 두 아이가 말하기를, 그 호미를 얻으면 땅을 파고 묻을 수 있다고 한다. 슬픔과 탄식스러움을 이길 수가 없다.
그윽이 들으니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아서, 심지어 육촌의 친척도 죽여가지고 씹어 먹는다 하기에 항상 상서롭지 못하다고 했더니, 이제 다시 들으니 서울 근처에서 전일에는 비록 한두 되의 쌀을 가진 자라도 죽이고 빼앗는데, 근일에는 사람이 혼자 가면 쫓아가서라도 죽여놓고 먹는다.
1500년대 말 우리나라의 문화와 여러 일상 생활에 대한 내용, 그리고 유래 없는 국난에 일반 백성들이 겪었던 비참한 생활 등을 직접 목격자가 세세히 글로 남긴 1차 사료이다.
많이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원균이 공을 세웠다고 적은 내용이 몇가지 있다.
하나는 합류를 미루다가 재촉받은 뒤에야 전선 5척만 끌고 뭉그적대며 합류했던 옥포해전으로 쇄미록의 내용만 보면 원균의 경상 우수군이 전라 좌우수군을 이끌고 싸운것처럼 보인다. 그 외에도 여러 '원균의 승전보'가 그대로 실려있으며 칠천량 대패 직전에 나무하던 비무장 왜군을 기습해 다 죽이려다가 역습을 받아 피해를 본 그 사건 역시 승전보로 기록되어 그 승전보가 그 실체를 모르는 민간에게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나온다.
이런 내용은 오희문이 전쟁터와 멀리 떨어진 피난지에서 떠도는 소문만을 듣고 기록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관점에 따라선 왜란 당시 민심의 증언이니 만큼 어떤면에선 그 실체가 드러나기 전의 원균의 언플능력을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전에 원균이 충청병사로 부임해 왔을때 멀리서 그 행차를 봤는데 역시 원균답게 술에 만취해 부축을 받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4년 10월 16일에 한국고전번역원,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이민수가 번역을 완료하였다.(네이버 책: 쇄미록 세트)
2018년 12월 19일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에서 번역한 쇄미록(한글 번역본 전6권, 한문 표점본 2권 포함 전8권)을 국립진주박물관[2][3]에서 펴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565371)
2020년 11월 06일에 사회평론아카데미에서 『한 권으로 읽는 쇄미록』이 출간되었다. 16세기 양반 오희문의 난중일기로 알려져 있는 『쇄미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 류성룡의 『징비록』과 함께 임진왜란 3대 기록물이며, 9년 3개월의 기록이 51만 9,973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 때문에 전권을 읽기가 쉽지 않은데, 사회평론아카데미에서 『한 권으로 읽는 쇄미록』(신병주 해설)이 출간되어 쇄미록 읽기가 수월해졌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7302933)
임진왜란 때 오희문(1539년 ~ 1613년)이 난을 겪으면서 쓴 일기로, 선조 24년(1591년) ~ 선조 34년(1601년) 2월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오희문은 학문에 뛰어났으나, 과거급제를 못해 정식으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 오윤겸은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손자인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 청나라까지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三學士)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일기는 총 7책으로 되어있고, 각 책의 끝에는 국왕과 세자의 교서, 의병들이 쓴 여러 글, 유명한 장수들이 쓴 성명문, 각종 공문서, 과거시험을 알리는 글, 기타 잡문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밖에 임진왜란 시기에 있어서 관군의 무력함에 대한 지적과 비판,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낸 것과 화의 진행과 결렬, 정유재란에 관한 것 등 장기간에 걸쳤던 전쟁에 관하여 전반적이고 광범위하게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오희문 자신이 관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친분이 두터운 많은 고을 수령들의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 누구보다 정확하게 종합적으로 정보를 입수,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수현에서 보고 들은 각 지역의 전투 현황과 각 의병장들의 활약상, 왜군의 잔인한 살인과 약탈 행위, 명나라 군대의 무자비한 약탈과 황폐화, 전란에 따른 피난민 사태, 군대 징발, 군량 조달 등 다른 자료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사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민중의 생활상과 지방행정의 실태 등 임진왜란에 관계되는 사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전반의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들이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으며, 민간인으로서 생활체험적 기록이기 때문에 더욱 그 가치를 더해준다
『瑣尾錄 (쇄미록)』 연구
원광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정성미
(박사학위 논문)
목 차
國文要約(국문요약)
Ⅰ. 序論(서론)
1. 연구목적
2.『瑣尾錄(쇄미록)의 구성
Ⅱ. 오희문의 生涯(생애)
Ⅲ.『瑣尾錄(쇄미록)』에 보이는 양반의 生活意識(생활의식)
1. 喪禮(상례)와 祭禮(제례)
2. 接賓客(접빈객)과 出他(출타)
3. 信仰(신앙)
Ⅳ.『瑣尾錄(쇄미록)』을 통해 본 오희문가의 經濟生活(경제생활)과 奴婢(노비)
1. 經濟生活(경제생활)
(1) 物品受贈(물품수증)
(2) 竝作所出(병작소출)과 家內業(가내업)
(3) 交換經濟(교환경제)
2. 奴婢(노비)
(1) 率居奴婢(솔거노비)와 外居奴婢(외거노비)
(2) 오희문의 奴婢觀(노비관)
Ⅴ.『瑣尾錄(쇄미록)』에 나타난 牧民觀(목민관)
1. 敎育(교육)과 科擧(과거)
2. 오희문이 본 官僚(관료)의 實態(실태)
Ⅵ. 結論(결론)
[국문요약]
『瑣 尾 錄』 연 구
조선을 건국하고 유교를 개국 이념으로 채택하여 이를 널리 보급시키는데 앞장서 왔던 사람들은 사대부들로 이들의 실체와 역할을 규명하려는 시도와 노력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관찬사서 등을 통하여 정치 ㆍ사회ㆍ 경제적 측면에 대한 연구는 활발한 반면 생활사에 대한 연구는 소홀히 취급된 것이 사실이다. 사대부들이 갖는 고유의 정치ㆍ 사회ㆍ 경제적인 성향은 그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상호간에 영향을 주어왔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
따라서 본고는 오희문의 일기인 『瑣尾錄(쇄미록)』을 통하여 사대부들의 일상생활의 단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사대부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을 통해 수령과 노비들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재조명해보았다. 이를 정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역사에서 오희문이 살았던 16세기는 정치적으로 중소지주출신의 사림이 성장하여 기존 훈구역과 대립, 갈등하던 시기로 사림들의 성장 발판을 마련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향촌 지배질서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가져오는 시기이다.
경제적으로는 과전법의 붕괴와 함께 양반 지주층이 상속이나 매득, 개간 들을 통해 농장을 확대해 나갔으며 사회적으로는 주자학적 가부장제 의식이 널리 보급되었고 유교적 윤리관이 기층사회까지 침투하여 부계친 중심의 문벌의식이 대두하던 시기였다.
살펴본 결과 기존에 알고 있었던 16세기 사회상에 관하여 몇가지 새로운 사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첫째, 16세기 제사설행방식에 있어서 유교적 제사방식이 완전히 정착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당시 외가와 처가 대한 제사를 받드는 윤행이 일반적이었고 이와 연관하여 오희문의 성장과정을 통해 당시 솔서의 풍습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풍습은 재산균등상속과 제사를 받드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제사를 자녀에게 분급하는 것은 봉양과 봉제사에서 기인된 것인데, 16세기 가족제도나 제사방식은 아직 부계중심의 성리학적 사회 구축질서가 정착되지 않은 과도기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양반의 일상생활에서 관한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사대부계층은 성리학으로 무장되어 있는 합리주의자, 그리고 권위주의자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지만 실지로 그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그렇지만은 않았다.
예를 들어 노비가 없을 때는 친히 밥을 지어 먹거나 물고기의 배를 가르는 기본적인 식생활 해결에서부터, 앞일에 대한 궁금증과 현실의 답답함을 헤쳐 보려고 꿈을 기록하거나 해석하였고 또 점복을 통해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절박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굿을 통해 현실을 타개하려는 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살펴 보건데 조선시대 양반사대부들은 이러한 무속행위에 대하여서는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었다. 즉 독경이나 굿 등의 행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포용하지는 않았지만 점복행위만큼은 사대부가에서 일반적으로 용인된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셋째, 양반이 상행위를 행한다는 점이다. 물론 임진왜란이라는 사회적 여건으로 말미암은 현실타계의 일환이기는 하였지만 벼슬살이를 하지 않은 오희문이나 관리로 있는 주변사람들도 이를 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직접적인 상행위가 아니고 노비나 주변의 사람들로 하여금 대행하고 있는데 사실 물가나 장시일, 그리고 수익 예상 등을 고려하여 지시하고 있으므로 오희문 자신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이는 조선사회는 신분에 따라 그 업도 사농공상으로 분류되었다고 믿었던 기존의 통념에 반하는 것으로, 이는 16세기 장시의 발달로 시장경제가 활발해진다는 사회적 측면과 오희문의 투철한 경제관념이라는 개인적 측면에서 이해된다고 보여진다. 또 관료와 경제생활의 밀접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통해 당시의 선물경제의 양상도 살필 수 있었다.
넷째, 주노관계에 대한 인식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주노관계는 상하관계, 복종의 관계로서 주가가 노비를 재산으로 보고 경제적 이윤획득을 위하여 일정한 편의를 제공하지만 실질적으로 노비에게 급료를 주었다든가, 공이 있고 자손이 없는 노비에게 제사를 지내주는 기록은 일기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또 단편적인 사례이지만 노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경리를 위해 상전의 일도 뒤로 미루고 있다든가, 주인의 일에 대하여는 태만만 반면, 자신의 일에는 적극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이완되는 사회경제의 모습을 주노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이다.
다섯째, 임진왜란 당시 수령의 실태이다. 음관으로 관료가 된 경우 그 가문의 배경에 따라 수령의 권위와 임무도 차별이 있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천거나 음관, 과거를 통하여 관료가 되는데 임진왜란 당시 16세기 말에는 실질적으로는 가문의 배경이 관료의 임기와 업무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사회가 관료사회라는 기존의 통념에 반하는 사실로 임진왜란이라는 국가비상시이기라는 전제를 두고서도 『瑣尾錄(쇄미록)』을 통해 그 실제를 확인 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천거나 음관을 통하여 관리가 된 자 중에는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합리적인 여러 제도의 시행으로 백성들의 칭찬을 받지만 대부분 사리사욕과 위로부터의 불합리한 정책과 관행으로 이를 실천하기는 힘들었다.
이상은 개인일기라는 제한된 사료에서 사례를 통한 연구라는 한계점이 있으나 어쩌면 제도를 운영하는 중앙중심의 관찬사료보다 실제 제도를 체험하는 현실적인 측면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적 관행 및 실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고 믿는다.
앞으로 이를 뒷받침 할 많은 사례연구가 기대되며 『瑣尾錄(쇄미록)』을 통해 사대부의 여가생활이나 부부생활, 그리고 여성 생활, 노비의 가족과 결혼생활 등은 심도 있게 다뤄야 할 과제라고 보여 진다.
Ⅰ. 序 論(서론)
1. 硏究(연구)의 目的(목적)
역사가 과거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다양한 삶과 나아가 그들이 만든 사회 문화적인 제반 모습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때, 生活史(생활사)는 이 가운데 인간의 일상적인 생활양식과 삶을 영위해가는 구체적인 역사상을 재구성하고 그 변화상을 추구하는 역사 연구의 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즉 생활사는 인간 내지는 인간의 경험을 일차적으로 중시하여 역사행위자로서의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재구성해내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최근 들어 한국사학계에는 생활사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져 가고 있다. 이는 한국사의 각 시대의 歷史象(역사상)을 좀 더 현실에 가깝게 복원하려는 의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 진다.
이러한 연구 경향은 연구자의 수적인 증가에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학문적으로는 서양사의 연구경향, 즉 독일의 일상생활사, 프랑스 아날학파의 사회문화사, 영국의 노동자문화사, 미국의 신문화사 등의 연구에 대한 번역서가 출간되면서 한국사 연구에 있어서도 생활사 연구에 많은 시사와 자극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지금까지의 생활사에 관한 연구는 정치 제도사, 경제사, 사회운동사, 사상사 등에 밀려 등한시 되었으며 사회사의 일부로 간주되어 왔었다.
그러나 생활사는 역사연구에 있어서 자칫 간과하기 쉬운 인간의 일상적인 삶의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용기와 두려움 등, 그 밖의 여러 心性(심성)의 변화들을 추적함으로써 각 시대마다의 인간의 삶을 객관적인 사실에 가깝게 재구성하고 이를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시대를 설명하는 이론적 틀 즉, 정치 제도나 사회 경제 구조의 변화가 인간의 삶에 어떻게 투영이 되고 있었는지를 당대의 개인 생활사를 통해 검증함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시대상의 가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이를 검증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작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살아있는 역사로 복원하는 작업이며, 또한 간과하기 쉬운 부분들을 재검토하고 이를 보완함으로써 보다 사실에 대한 객관성을 높이고 살아있는 역사학으로서 그 기능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고에서는 16세기말을 살았던 吳希文(오희문)의 『瑣尾錄(쇄미록)』이라고 하는 개인의 사료를 중심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16세기 말의 한국사 認識(인식)의 한 단면을 재검토하여 보고자 한다.
『瑣尾錄(쇄미록)』은 16세기말 임진왜란의 전란을 겪으면서 쓴 10년간의 일기로 이 시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전란으로 인하여 조선왕조의 정치 경제 사회 체제 전반에 걸쳐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변화가 지방에서 피난살이를 하였던 벼슬이 없던 양반사대부가 개인의 일상생활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규명해보고 아울러 전란을 겪고 있는 조선의 사회변동이 과연 그렇게 급격한 것이었는지를 당대를 살았던 한 개인의 삶을 통하여 이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한 家訓(가훈) 硏究(연구)」등은 가훈류의 고문서를 이용하여 양반 사대부들이 가정을 다스리던 모습의 한 단면, 즉 혈족의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아들과 딸의 역할 차이 등을 규명하여 사대부의 생활상과 인간관을 밝혔다.
양반층의 일기를 분석하여 당시의 생활상을 해명하려는 연구는 이성임의「朝鮮(조선) 中期(중기) 어느 兩班家(양반가)門(문)의 農地經(농지경)과 奴婢使喚(노비사환)」,「朝鮮(조선) 中期(중기) 柳希春(유희춘)가의 물품구매와 그 성격」의 논문이 있는데 이는 『미암일기』를 통해 당시 관료였던 유희춘의 농지 경영, 노비사환, 물품 구매의 관행 등을 규명하였고 김경숙은 「16세기 士大夫(사대부)집안의 祭祀設行(제사설행)과 그 性格(성격)」이란 논고에서 『묵재일기』를 분석하여 16세기까지 유교적 질서가 완전히 정착되지 못하였음을 밝혀내고 있다.
김현영 역시 『黙齋日記(묵재일기)』를 통해 양반사회 성립에 있어서 16세기를 강조하는 사례연구로 양반사족인 이문건이 성주라고 하는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삶을 영위하고 있는 가를 살펴보고 있다.
이순구는 『丙子日記(병자일기)』를 통하여 가정생활의 모습에서 여자의 역할을 규명하려 하였다. 이외에 무관의 일기인 『北部日記(북부일기)』를 분석하여 군관의 변방에서의 생활상을 연구한 우인수의 「『북부일기』를 통해 본 17세기 출신군관의 북방생활」,그리고 胥吏(서리)의 일기를 통해 중인들의 생활상을 추적한 유봉학의 일록 『공사기고』에 나타난 19세기 향리의 생활상」이 있다.
위의 논고들은 모두 개인일기를 통하여 특정 인물과 계층에 따른 경제생활, 관료생활, 의례생활, 향촌생활, 등의 생활상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논고들의 공통점은 특정 부분들을 강조한 사례연구로서 가치를 더하지만 전체적인 모습에 대한 조명과 다른 일기류나 고문서와의 비교를 통한 사실 확인의 언급은 적은편이다.
필자는 위의 일기류에 관한 선행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吳希文(오희문)(1539∼1613)의 일기인 『瑣尾錄(쇄미록)』을 통하여 16세기 양반가의 일상생활과 관료들의 삶, 그리고 피지배계층으로서 다수를 차지하는 노비들의 일과 등 그들의 민속과 의례생활을 복원해 냄으로써 당시 사회의 한 단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瑣尾錄(쇄미록)』은 임진왜란의 전란 가운데 피난생활을 하면서 기록한 일기로 당시 저자는 전란의 극심한 사회변동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16세기 양반 사대부가의 일상생활을 복원하는 데에는 약간의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쟁이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를 수반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전쟁이라고 하는 특수한 조건에서 체제와 제도가 이완되고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사회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족들은 변화의 현실을 어떻게 대처해 나아갔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사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瑣尾錄(쇄미록)』의 사료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또한 『瑣尾錄(쇄미록)』을 쓴 오희문은 다른 일기류의 저자에 비해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의 삶에 접근해 있었고 손님접대나, 농사관리. 그리고 농민의 입장에서 바라본 수령들의 행태 등을 가감 없이 적고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관료생활을 역임하였던 유희춘의 『眉巖日記(미암일기)』나 이문건의 『黙齋(묵재)日記(일기)』보다는 보편적인 조선 중기의 일반 사족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는 대목 대목은 생활상뿐 아니라 이면에 숨어있는 심리적 측면 까지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사실 일기자료는 개인의 제한된 경험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화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따르기는 하지만 어떤 면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鳥瞰圖的(조감도적)인 年代記(연대기)자료나 당대 巨儒(거유)들의 문집에서 보이는 거시적인 측면보다 현실적인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규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즉 일기의 필자들이 겪는 당대의 구체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제도를 운용하는 사회적 관행 및 실태를 밝히는 데는 오히려 유용한 면이 있다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瑣尾錄(쇄미록)』이 가지는 이러한 특수성과 보편성은 16세기 생활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16세기는 정치적으로 중소지주출신의 사림이 성장하여 기존 훈구세력과 대립, 갈등하던 시기로 사림들의 성장 발판을 마련하는 시기이며 향촌 지배질서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겪던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는 과전법의 붕괴와 함께 양반 지주층이 상속이나 매득, 개간들을 통해 농장을 확대해 나갔으며 사회적으로는 주자학적 가부장제 의식이 널리 보급되었고 유교적 윤리관이 기층사회까지 침투하여 부계친 중심의 문벌의식이 대두하던 시기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본고는 오희문이 『瑣尾錄(쇄미록)』을 기록하였던 1591년 (신묘년) 11월에서 1601년(신축년) 2월까지의 記事(기사)를 바탕으로 분석하는데 주로 임천과 평강에서의 피난시기가 중점이 될 것이나 오희문이 살았던 16세기전반을 대상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시기를 비교하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瑣尾錄(쇄미록)』은 많은 사회 경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인용되고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瑣尾錄(쇄미록)』을 이용한 연구로는 이호철의 『조선전기농업경제사』와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 그리고 오희문과 『瑣尾錄』에 관한 연구로는 전경목의 「日記(일기)에 나타나는 朝鮮時代(조선시대) 士大夫(사대부)의 日常生活」, 정만조의 「朝鮮時代(조선시대) 용인지역 士族(사족)의 동향」, 문숙자의 「해제-고문서를 통해 본 용인 해주오씨 가문의 사회적 기반-」, 이성임의 「조선 중기 오희문가의 商行爲(상행위)와 그 性格(성격)」등 이 있다.
이 밖에 유영수의 「瑣尾錄(쇄미록)의 양봉일기에 관한 고찰」 Ⅰ,Ⅱ, 김성희의「『瑣尾錄(쇄미록)』에 나타난 16세기 가장의 역할」, 등이 있다.
『瑣尾錄(쇄미록)』에 관한 앞의 연구들은 대부분 『瑣尾錄(쇄미록)』의 한 부분인 사례를 중심으로 주제를 설정하고 이를 분석하였다.
이 가운데 전경목과 이성임의 논고는 『瑣尾錄(쇄미록)』을 통해 본 조선 양반사대부가의 일상생활이라는 측면과 경제적 측면을 주제로 한 연구이다. 전경목은 봉제사와 접빈객을 주제로 오희문가를 통해 16세기 사대부의 일상생활을 조명하였다.
한편 이성임은 오희문가의 경제생활의 근간을 상행위라는 측면에서 분석하였는데, 즉 지방과 서울에서의 교역과 원격지 교역으로 나누어 『眉巖日記(미암일기)』와 비교하면서 그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논문들은 16세기 사대부의 일상생활과 경제생활이라는 측면을 규명한 것에서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전경목의 경우에는 기존의 설을 확인, 비교한다든가, 부분만을 언급하여 전체적인 모습까지는 다가가지 못하였으며 이성임의 논고에서는 경제생활의 근간을 상행위에 중점을 두고 살폈지만 노비 등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적은 편이다.
『瑣尾錄(쇄미록)』전반을 연구한 논고가 없었던 이유는 다른 일기류에 비해 『瑣尾錄』이 비교적 일찍 발굴되었으나 당시 생활사라는 부분이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瑣尾錄(쇄미록)』만큼 16세기 한 사대부의 인간사가 절실히 녹아든 기록은 흔치 않다. 무엇보다도 전쟁이라는 사회전반의 급변 상황에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의 일상사를 기록한 것만으로도 역사적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희문은 해주오씨 가문의 양반출신으로 문필이 빼어나고 해박한 식견을 가졌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정식으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나 인척들은 수령을 역임하였고 아들 윤겸은 영의정을 지냈다.
『瑣尾錄』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詩經(시경)』 「國風(국풍)」篇(편)에 나오는 瑣兮尾兮流離之子((쇄혜미혜유리지자)에서 따온 것으로 전쟁에 쫓기어 쇠약해진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뜻의 피난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에 관한 귀중한 연구 자료로 가치가 있음은 물론이며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瑣尾錄(쇄미록)』을 통하여 사대부들의 일상생활의 단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아 사대부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을 통해 수령과 노비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조명해 보고 나아가 그 결과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16세기말의 역사인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왜 그러한 차이가 발생하였는지를 규명하여 16세기 사회의 전반적인 새로운 인식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특히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다 확실한 모습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Ⅱ장에서는 오희문의 생애에 대하여 가문의 배경과 그 가족의 구성, 그리고 그가 평소 가지고 있던 종교관, 신분관 , 남녀관, 노비관 등을 살펴 양반의 의식과 또한 오희문의 성장과정을 통하여 16세기 당시 率壻(솔서)의 풍습도 알아보고자 한다.
Ⅲ장에서는 『瑣尾錄(쇄미록)』에 보이는 양반의 生活意識(생활의식)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하는데, 먼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가장 큰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喪禮(상례)와 祭禮(제례)를 중심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당시에는 제례에 있어 輪行(윤행)이 관례임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제사를 주관하는 오희문의 개인적 성향과 유교적인 통례와의 상관관계, 그리고 외가와 처가까지 제사를 모시는 16세기 관행 변천에 관하여 살펴보고자한다.
다음으로 접빈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양반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임진왜란이라는 전란기에도 무언가 대접하여 보내는 것을 예의 근본이라 생각하고 이를 항상 실천에 옮기려 했던 당시의 양반가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생활의 모습들을 찾아보려한다.
또한 조선시대 양반들은 숙박업이나 유통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16세기의 여행은 어떠했는지, 필요한 것들은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종(奴(노))과 말이 없었을 때 양반의 실상은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본다면 당대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양반가의 信仰(신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이고 전란 중이었던 당시의 불안한 사회와 현실은 자연히 양반사족도 꿈, 점복, 굿을 통한 해결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유교적 소양을 가지고 합리성을 추구하던 사대부들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일기를 통한 구체적 사례는 그들 내면의 모습들을 밝히게 될 것이다.
Ⅳ장은 오희문가의 經濟生活(경제생활)을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는 선물 교환이 경제활동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오희문은 벼슬살이는 하지 않았지만 많은 친인척들이 관료로 있었기 때문에 사족간의 물품 수증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물품수증이 당시 일반적인 것이었는지, 경제생활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병작을 통한 地代收取(지대수취)와 여성들의 경제활동인 養蠶(양잠)과 手工業(수공업), 養蜂(양봉)과 養鷄(양계)를 통한 이익추구가 경제기반을 이루고 있고, 특히 사족임에도 불구하고 원격지 교역을 통해 차익을 남기려는 강한 의욕으로 상업에 종사하고 있는 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노비의 일상생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오희문가의 노비들을 중심으로 노비의 존재형태에 따라 각 노비의 역할과 직무, 가족과 결혼생활 등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외거노비와 솔거노비가 각기 주인과의 관계에서 신분적, 경제적으로 어떠한 의미와 성격을 가지는지, 또한 주인에 예속되어 있지 않은 각 노비의 독자적인 영역은 무엇인지에 유의하고자 한다.
이는 오희문이 바라본 노비에 대한 인식과도 관계되는 부분으로 노비들이 농업과 상업을 통해 영리를 추구하는 점이나 주인으로부터 받는 급료의 성격, 재산의 소유관계와 사후의 재산 처리, 속량의 방법 등을 살피게 될 것이다.
아울러 가능하다면 노비들의 주인에 대한 인식도 추적해 볼 것이다.
Ⅴ장은 『瑣尾錄(쇄미록)』에 나타난 수령관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향촌에서 살았던 오희문이 바라보는 지방수령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당시 조선시 초급교육은 어떠하였는가, 아들과 딸의 교육 방식은 어떻게 달랐나, 임진왜란기의 과거제도는 종전 평화시와 어떻게 달랐는가를 살펴보고자한다.
그리고 관료의 임명 방법과 수령의 직무는 어떠하였으며 벼슬하지 않은 평범한 사대부가와의 연관관계 및 그리고 요즈음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청탁에 대한 관행과 이에 대응하는 수령의 모습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보겠다.
끝으로 양반이지만 민초들이 겪는 괴로움을 양반의 시각이 아닌 나라를 사랑하고 국가의 안녕을 바라는 민초의 입장에서 수령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들의 모습을『瑣尾錄(쇄미록)』에 나오는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瑣尾錄(쇄미록)』의 구성
『瑣尾錄(쇄미록)』은 오희문이 선조24년(1591)년 11월27일부터 시작하여 동왕34년(1601)2월27일까지 쓴 만 9년 3개월간의 일기로 모두 7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책의 표지에 쓰여진 일기의 이름과 분량 및 수록기간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1>『瑣尾錄(쇄미록)』의 체제와 구성
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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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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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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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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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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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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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남행일록
임진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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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1591)11월∼임진(1952)6월
임진(1592)7월∼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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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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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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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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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1593)1월∼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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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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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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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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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1594)1월∼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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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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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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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일록
병신일록
정유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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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1595)1월∼12월
병신(1596)1월∼12월
정유(1597)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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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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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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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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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1597)2월∼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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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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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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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일록
무술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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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1597)9월∼12월
무술(1598)1월∼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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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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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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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일록
경자일록
신축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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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1599)1월∼12월
경자(1600)1월∼12월
신축(1601)1월∼2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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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각 책의 수록 기간과 분량이 각각 다르다. 대체로 1책부터 3책까지는 각 책마다 거의 1년 동안 쓴 일기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4책은 2년 1개월 동안, 5책은 7개월 동안, 그리고 마지막 7책은 2년 2개월 동안 쓴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壬辰南行日錄(임진남행일록)」은 엄격히 말하면 그날그날 쓴 일기는 아니다. 구체적인 작성 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은 이 일록은 후에 작성된 것으로 즉 1591년 (선조24년) 11월 27일부터 이듬해 동왕1592년 (선조25) 6월 28일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일들을 요약해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록들은 모두 거의 하루하루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이다. 다만 1593년(선조26) 1월14일부터 동년 3월말까지 45일간은 그가 전염병으로 앓아누워 있었기 때문에 일기를 쓰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日錄(일록)들은 모두 거의 하루하루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이다.
또한 『瑣尾錄(쇄미록)』은 오희문이 쓴 일기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일기의 사이사이나 책의 끝에 그가 얻어 볼 수 있었던 각종 공문이나 통문 등이 소개되어 있다. 예컨대 「壬辰南行日錄(임진남행일록)」뒤에 선조의 敎書(교서), 永同人通文(영동인통문), 全羅(전라)道前東來府使高敬命檄文(도전동래부사고경명격문) 등이 傳寫(전사)되어있다. 이 공문이나 통문들 중에는 다른 책에는 실려 있지 않은 것들도 있어서 오희문의 일기와 함께 주목할 만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오희문이 『瑣尾錄(쇄미록)』을 작성하게 된 구체적인 동기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때는 1592년(선조25) 7월 1일부터 이다.
그때 그는 전라도 장수현에서 머물고 있다가 밀려오는 왜적을 피하여 長水衙屬(장수아속)과 함께 靈鷲山(영취산)의 석천사로 피난하게 되었고, 십여 년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1601년(동왕34) 2월 27일 일기를 마치면서 이제 서울에 도착하여 流離(류리)하는 때가 아니므로 일기를 그만 쓴다고 서술한 점 및 책명을 避難記(피난기)라는 뜻으로 『瑣尾錄(쇄미록)』이라고 붙인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피난 중에 겪었던 일들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瑣尾錄(쇄미록)』은 자연히 오희문과 그의 가족이 전라도 장수와 충청도 홍주, 임천, 아산 및 강원도 평강 등지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일이나 사건들을 중심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렇다고 해서 個人史(개인사)에 관한 것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쟁이 발발했던 때에그는 장수에 있었기 때문에 진안ㆍ 장수ㆍ 무주와 그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 상황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노모를 모시러 전라도 영암과 태인에 다녀오면서 그가 보고 느꼈던 전쟁 중의 사회상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또 그의 처남과 사위 및 아들 등을 비롯한 친지들이 여러 고을의 수령으로 재임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방문하여 각 지방 고을의 현황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한 개인의 일기로서 임진왜란 당시의 전황을 비롯하여 그 시대의 사회상과 지방 고을의 현실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자료라는 점들 때문에 오희문의 『瑣尾錄(쇄미록)』은 일찍이 주목을 받아왔다. 그래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62년에 이 일기를 한국사료총서 제14집으로 간행되었고 1990년에는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되었다.
Ⅱ. 오희문의 생애
오희문은 海州(해주) 吳氏로 오희문가의 가문은 15세기 초 족보의 초기형태라 할수 있는 族圖記(족도기)를 작성하여 이를 필사하여 전해왔다. 이는 오희문가 가문의 가계계승의식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이 가문은 18세기 중엽까지 「海州(해주)吳氏」 혹은 해주의 옛 지명을 딴 「首陽(수양) 吳氏」로 칭해지다가 1771년(영조47) 辛卯譜(신묘보)에 의하면 해주 오씨로 지칭하겠다는 취지를 밝힌 후부터는 「海州(해주) 吳氏」로 그 명칭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전기의 婚俗(혼속)은 妻鄕(처향) 혹은 外鄕(외향)으로의 이동이 많아 조선후기에 비하여 한 지역에 世居(세거)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해주오씨 가문의 경우 16세기 초반까지 廣州(광주) 土塘(토당), 죽산, 양성등지에서 세거하여 近畿地方(근기지방)을 별로 벗어나지 않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가문이 근기지역뿐 아니라 중앙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질 정도로 顯達(현달)하게 된 것은 시조로부터 14세가 되는 楸灘(추탄) 吳允謙代(오윤겸대)로 吳允謙(오윤겸)은 바로 오희문의 장자이다.
오윤겸은 춘탄공파의 派祖(파조)(中始祖(중시조))로 용인지역에 世居(세거)하는데 이 이유는 오희문이 용인의 世居士族(세거사족)인 처가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오희문가의 정치적 성향은 윤겸이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므로 서인의 성격을 띠었다. 살펴보면 윤겸의 스승인 成渾(성혼)이 奸黨(간당)의 무함을 받자 이를 변호하다가 時論(시론)의 배척을 받았으며 인조반정이후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적 비중이 높아졌고 노소론 분당 이후 즉 17세기말 18세기 초의 당색은 소론이었다. 18세기 이후 조선정계가 노론일색으로 재편되면서 해주오씨 춘탄공파는 용인군 모현면 일대에 재지사족으로서 완전히 정착하여 중앙정계와는 다소 거리를 갖게 된다.
다음은 오희문가의 가계도이다.
오희문의 고조부는 사마시에 합격하고 증조부는 北平館提檢副司果(북평관제검부사과)를 지냈으며 조부는 石城縣監(석성현감)을 역임하였고 오희문의 부 景閔(경민)은 장성 현감과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古城(고성) 南氏(남씨)로 외가는 충청도 황계이다.
오희문은 1539년(중종34년) 윤7월25일에 태어났으며 奉訓郞(봉훈랑)으로서 繕工監(선공감) 監役(감역)을 역임한 적이 있었다. 그는 70세에 모친상을 당하자 노령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으며 1613년(광해5년)12월 27일에 75세로 삶을 마감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즈음에 오희문은 서울의 관동에서 살았으며 가족으로는 75세의 노모(南氏(남씨))와 부인(李氏(이씨)), 그리고 4남 3녀가 있었다. 그 당시 장남 윤겸(34세)은 광릉 참봉이 되었고, 차남 윤해(31세 생원)는 죽은 아우 희인에게 양자하여 서울 진고개(泥峴(니현))에 살고 있었다. 삼남 윤함은 결혼하여 해주 처가에 가 있었고 4남 윤성(17)과 세딸은 미혼이었다. 이후 1594년(갑오년)에 큰 딸을 함열태수 신응구에게 시집보낸다.
장남 윤겸은 비변사의 천거로 평강 현감으로 나갔다가 1597년(정유년) 봄 문과에 급제하여 후일 인조반정으로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사헌을 시작으로 이조판서와 좌의정ㆍ 영의정에 올랐고, 손자 오달제는 이른바 三學士(삼학사)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유년시절은 당시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외가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유년과 소년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오희문은 외가가 있는 황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러나 유년시절을 모두 황계에서만 보낸 것은 아니었다. 즉 지방 수령이었던 외숙을 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성장하였는데 오희문에게는 두 명의 外叔(외숙)이 있었다.
그 하나는 武科出身(무과출신)으로서 충청도 서산군과 전라도 보성군 및 영암군의 군수를 역임한 南知遠(남지원)으로, 오희문은 외숙을 따라 5년 동안을 서산군의 衙內(아내)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희문이 서산군에 도착하여 어렸을 때 알고 지내던 官奴(관노)등과 만나 소년 때 놀던 일을 이야기하였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외가에서 태어난 오희문은 외숙을 따라 서산에서 소년시절을 보냈으며 결혼이후 외숙의 부임지인 전라도 보성군과 영암군에서 한때 거주하였던 것 같다.
오희문의 처는 연안 이씨로 장인은 文川郡守(문천군수)를 지낸 李延秀(이연수)이다. 오희문의 결혼 시기는 1556년(명종11년)으로 오희문의 나이 17세로 추정되고 있다.
결혼 이후 서울의 처가에서 처남 이빈과 함께 살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선조26년 서울에서 왜군들이 철수하자 첫째 아들 윤겸과 둘째 아들 윤해로 하여금 친가와 친척의 집들을 둘러보게 하는 계사년 5월의 기록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이빈은 연안부원군 이석형의 5대 종손으로 관북에 있는 연안이씨종가에서 살았는데, 오희문은 30여 년 동안 처가에서 처남과 함께 살았으며 그곳에서 오희문의 4남 3녀가 모두 생장하였고 여아들이 지녔던 물건이 처가 이빈의 집에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몇 년 전 까지는 처가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희문은 일생동안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으나 유교적 소양은 깊었던 양반사족으로 보인다. 이는 거의 빠짐없이 기록한 『瑣尾錄(쇄미록)』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친척이나 자제 혹은 인근에 거주하는 사람의 자제를 직접 가르치기도 한 사실에서이다. 또 양반으로서 우월한 신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음에서 알 수 있다.
즉 오희문의 딸 단아가 종기로 고생하자 오희문은 임천 태수를 만나 허교수를 소개받고 양반인줄 알고 예를 갖춘 후 알고 보니 典樂(전악) 許億鳳(허억봉)의 아들인 것을 알고 몹시 분해하는 사실과 양인으로 보여 지는 김지학이 수륙제때 쓸 묵정을 구하므로 오희문은 이를 주면서 술을 권하니 齋戒(재계)하기 때문에 사양하고 마시지 않으니 가소로워하는 사실에서 오희문은 양반의 우월적 심리를 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희문은 유교적 성향이 무척 강했던 양반사족으로서 임진왜란시 중국군이 조선내정에 간섭하며 시행한 불교 정책에 대해 자신의 佛敎觀(불교관)을 피력한다.
즉 …모두 판사를 두어 일을 맡아 처리하고 그 도 여러 사찰의 일들을 총괄해 다스리며 사람을 쓰고 내보내는 일은 도총섭이 주장하고 持任(지임)의 임명과 파면은 또한 그 판사가 임명한다고 했다.
이는 필시 중들을 유지시켜 군대에 내보내고 부역에 내보내는 일을 모두 이들로 하여금 맡아 처리하여 숨기고 빠지는 자가 없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법을 마련하면 폐단도 생기게 마련이니 중들이 이것을 빙자하여 세력을 만들어 방자히 굴어 제어하기 어렵게 되고, 불교를 믿는 조짐이 또한 이로 인해서 일어날까 깊이 두려운 바이다.
라고 하여 불교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고 불교를 믿는 것에 대하여 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성리학을 國是(국시)로 삼은 조선시대 양반사대부계층의 공통된 생각이라 보여 진다.
또한 오희문의 무속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는 기록도 있다. 오희문의 가족이 걸식하는 무녀를 불러 점치게 하는데 이를 맞추자 오희문은 “이는 곧 天地사이의 한 간사한 기운이 사람에 의해서 괴상한 짓을 하여 혹 길흉을 이야기하여 밥 얻어먹는 방법으로 삼는 것이니 이 같은 무리는 가끔 있는 것인데 어리석은 풍속에 현혹되니 탄식할 일이다.” 라고 하여 무속을 경계하는 마음을 내비치었다.
오희문은 유학을 숭상하는 양반사족으로, 임진왜란 피난기 중 미래에 대한 불안한 심리를 표출하는 과정에서도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그의 생각은 유교적 범주를 벗어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하여 오희문은 조선시대 양반 사족으로서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유교적 성향이 강한 지식가가 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오희문이 살았던 당시 16세기에는 率壻(솔서) 즉 男歸女家婚(남귀여가혼)의 풍조가 있었는데 이는 오희문의 외가와 처가살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풍조는 재산 균등상속이 제사를 받드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재산을 자녀에게 분급하는 것은 봉제사를 위함이었다. 즉 조선 전기와 중기에는 아들ㆍ 딸 구별 없이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받았는데 처가로부터 많은 재산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혼인을 계기로 처가로 옮겨 사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장자를 중심으로 가계를 계승하며 제사를 지냄으로써 부계위주의 종법제가 정착이 되어 男歸女家婚(남귀여가혼) 대신 親迎禮(친영례)가 본격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瑣尾錄(쇄미록)』보다 이전의 일기인 『眉巖日記(미암일기)』와 『黙齋日記(묵재일기)』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며 특히 17세기 중반 우반동 김씨의 고문서인 김명열 전후문서에는 재산분배방식에 있어서 差等分配(차등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有志(유지)를 내려 17세기 이후 솔서의 풍습이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Ⅲ.『瑣尾錄(쇄미록)』에 보이는 兩班(양반)의 生活意識(생활의식)
1. 喪禮(상례)와 祭禮(제례)
사람은 살아서 죽을 때 까지 여러 단계의 通過儀禮(통과의례)를 거치게 된다. 이러한 통과의례는 규범화되어 풍속과 전통을 형성해 나가는데 그 중 喪禮(상례)와 祭禮(제례)는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禮俗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고려 말 주자성리학의 도입된 후 유교를 치국의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은 모든 의식을 유교식으로 대체하고자 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朱子家禮(주자가례)』를 보급, 권장하였다.
16세기는 이러한 유교적 의식이 자리 잡는 시기로 대체로 16세기 중반 이황의 문인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된다. 본장에서는 『瑣尾錄(쇄미록)』을 통해 오희문가의 상례와 제례에 대한 의식과 절차를 살펴보고 이전과 이후의 타 일기류와 비교하여 그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1) 喪禮(상례)
상례는 初終(초종)에서 장례를 거쳐 脫喪(탈상)에 이르기까지 26개월(윤달 제외)의 오랜기간이 소요되는 단계별 의식을 총칭하는 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3년 상을 말한다.
즉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喪(상)을 지냈는데 부모에게 태어난 자식이 이를 지키는 것이 부모에 대한 효이며 자식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앙의 고위관리로부터 지방의 평범한 양반에 이르기까지 이를 준수하였는데 여기서 3년 상은 부모가 돌아가신지 3년째 되는 날까지 상을 치르는 것으로, 만으로 따지면 2년이다.
그런데 3년이 되었다고 하여서 바로 탈상하는 것은 아니고 일정한 기간의 유예를 두었으니 大喪(대상) 두 달 후에 禫祭(담제), 즉 상복을 벗는 의식을 치르고 탈상하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부모가 돌아가신 후 공식적인 추모기간은 만26개월이 되는 셈인데 이 같은 규정은 상례를 비롯한 四禮(사례)의 절차를 명시한 『家禮』나 조선시대 법전인 『經國大典(경국대전)』에 명시되어 있으며 실지로는 大喪(대상)을 치르고 바로 탈상하는 사례가 많았다.
부모님이 절명하시면 시신을 목욕시키고 襲(습)을 한 후 자식들은 坐團(좌단)을 한다. 이어 靈座(영좌)를 만들고 그 위에 魂魄(혼백)을 설치한다. 부모가 돌아가신 둘째 날은 小殮(렴소)을 치르고 셋째 날은 大殮(대렴)을 행하고 殯(빈)을 설치한다.
넷째 날은 成服(성복)을 하는데 조선시대사람들은 小殮(소렴)이나 大殮(대렴)을 치르는 시기를 반드시 『家禮(가례)』에 규정된 날짜에 하지는 않았으나 成服(성복)을 하는 기간만은 철저히 넷째 날을 지켰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가 돌아가신 후 만1년이 지나는 13개월째가 되면 小祥(소상)을 치르고 2년이 지나는 25개월째가 되면 大祥(대상)을 치르며 27개월째가 되면 禫祭(담제)를 지낸다.
『瑣尾錄(쇄미록)』에 의하면 오희문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거나, 병에 걸려, 또는 왜적의 분탕질의 희생으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사실 오희문은 거리상 너무 멀거나 곤란한 형편 때문에 일일이 弔喪(조상)을 가거나 상례의식에 참여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가족의 상사에는 부음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哭(곡)을 하거나 素服(소복)을 입는 등 나름대로의 예를 다하는 장면이 나와 있다. 본장에서는 『瑣尾錄(쇄미록)』에 기록 되어있는 상례 절차를 통하여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피난기의 양반 사족들이 실지로 어떻게 喪(상)을 치루었는지, 오희문의 누이 金妹(김매)와 林妹(임매) 등 주변 인물과 딸 단아의 죽음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오희문은 1599년(기해년) 당시 60세로 同腹(동복) 7남매 중 아우와 南妹(남매)만 살아있음을 4월21일의 기록29)에 자세히 남기고 있다.
오희문은 세 번째 누이 金妹(김매)를 1594년(갑오년) 4월 6일 疫疾(역질)에 걸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서울에 사는 김매는 임진년에 예산으로 피난 와 있을 때 오희문은 어머님을 모시고 그곳에 머무른 적이 있고 처자들이 관동으로부터 遊離(유리)하다가 겨우 살아서 아산에 도착 했을 때 종과 말을 보내 이십여 일을 머무르게 하는 등 친족과의 사이는 각별하였다.
이는 오희문이 김매의 부음을 듣고 골육을 잃은 오희문의 심정을 절절히 표현하고 기록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아우, 희철의 편지를 통하여 알게 되는데 아우의 편지에는 죽은 날짜를 쓰지 않아 언제인지 알 수가 없어 누이의 부음을 들은 지 4일 후인 1594년(갑오년) 4월 초9일 오희문 가족은 設位(설위)하고 향을 피우고 一哭(일곡)하며 成服禮(성복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595년(을미년) 3월12일의 기록에 의하면
내일은 곧 죽은 누이의 소상인데 처음에는 친히 제사를 지내러 가려 했으나 비단 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행자도 약시 준비하기가 어려워서 다만 종만 보내고 가지 못했으니 평생진 한을 어찌하리오. 다만 스스로 슬피 울 뿐이다.
라고 하며 죽은 누이의 소상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제사도 지내지 못함을 탄식하고 있다. 곧 김매는 죽은 지 12개월째인 3월13일은 김매의 小祥(소상)이며, 김매가 죽은 지 2년이 되는 1596년(병신년) 3월13일 大祥(대상)을 치루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오늘은 김매의 대상이다. 처음에는 친히 궤연에 가려고 했는데 종과 말이 여의치 않아서 가지 못한다. 누이가 죽은 지 이년이 되었는데 겨우 이틀거리인데 종과 말이 여의치 않아서 한번도 靈前(영전)에 가서 울지 못하고 이미 3년이 되었으니 비록 형세라고는 하지만 애통한 마음이 더욱 지극하다.
金妹(매)의 大祥(대상)때 역시 종과 말이 없고 행자가 없는 관계로 대상에 참여하지 못함을 애통해 하고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2년이 지난 오희문의 나이 60세가 되던 기해년, 오희문은 또 다시 林妹(임매)의 訃音(부음)을 듣는다. 임매는 당시 영암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임매가 죽기 전해인 1598년(무술년)에 왜적의 손에 의해 남편 景欽(경흠)과 딸을 잃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오희문 가족은 素服(소복)을 입고 예를 갖춘다.
이로부터 1년 3개월 후 임매는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한다. 임매는 1598년(무술년) 4월 초7일에 세상을 떠났으나 소식을 들은 날은 4월21일로 오희문은 부음을 들은 지 4일째 되는 날 이른 아침 아우 및 세 아들을 데리고 어머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둘째아들 윤해의 집에 가 哭(곡)을 한다.
여기에서 임진왜란 당시 가족과 떨어져 그나마 소식을 편지로 알게 되는데 정확한 사망 날자를 몰라 부음소식을 들은 날자를 사망일로 간주하여 4일째되는 날은 成服禮(성복례)를 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成服禮(성복례)만은 꼭 지켰음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죽은 지 1년이 되는 1599년(기해년)에 小祥(소상)과 만2년이 되는 1560년(경자년)에 大祥(대상)을 치뤘음을 알 수 있다.
이외 오희문의 가족으로 사랑하는 막내딸 단아가 병으로 죽자 비교적 소상히 단아의 喪(상) 절차를 기록하였다.
단아는 오희문이 적적할 때 단아와 함께 추자놀이나 정경도 놀이를 하면서 소일하였고 피난 중 좁은 방에서 발을 맞대고 같이 자는 등 오희문과는 유달리 정이 두터웠으며 천성도 아름다운 사랑하는 막내딸이었다.
단아는 5개월 동안 병을 얻어 고생하다가 1597년(정유년) 5월1일 끝내 죽게 된다. 단아가 죽자 오희문은 목수를 불러 棺(관)을 만들게 하고 殮襲(염습)에 쓸 옷을 준비하고 小殮(소렴)에 쓸 옷도 준비한다.
1597년(정유년) 2월 1일 기록에 의하면
…내 딸이 평상시에 가난한 집에 태어나 의복과 음식을 남과 같이 해주지 못하다가 죽어서도 좋은 옷 하나를 얻어 염습하지 못하니 하늘에 닿는 남은 한스러움이 이에 그 지극함을 다하는 도다 …
상용에 쓸 물건을 구해 오게 했더니 겨우 유지 두장과 백지 한 묶음, 송연 조금을 보냈을 뿐이다…
제형이 염습에 쓰라고 흰 모시 적삼 한벌, 초록색 치마저고리 한 벌, 아청색 장의 한벌, 홑치마 한 장 , 겉치마 한 장을 보냈고 소렴에 쓸 것으로는 제 어머니가 장의 한 벌, 저고리 한 장을 내놓았고, 제 셋째 조카가 단금 하나를 주었다.
라고 하여 流離(유리)하는 중이라 의복을 갖출 수 없어 평상시 입던 옷으로 염습하고 나중에 형과 어머니가 옷을 준비하였고 목수를 불러 관을 짜 3일째 되는 날, 저녁때 入棺(입관)하고 成殯(성빈)한 다음 평일에 쓰던 조그만 실꾸리, 분첩, 은반지 3개를 넣어주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다음날 2월 초4일 유리중인 오희문 가족은 먼저 떠나오고 윤함을 머물러 있게 하여 윤함으로 하여금 발인해 오도록 하게하고 오희문은 먼저 선산을 찾아가 조부모 산소 위 산등성이 서쪽 정남향의 자리를 골라 묘 터를 닦고 하관을 준비한다. 2월 6일 오희문은 단아가 쓰던 물건도 같이 묻어주고 묘제를 지낸다.
그리고 죽은 지 11일째 되는 날 흰옷을 벗는데 이때 오희문은 아침저녁으로 먹는 밥을 가지고 죽은 딸에게 제사를 지내며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5월1일 죽은 딸의 혼에 제사를 올리고 죽은 지 백 일 째되는 5월11일 무당을 불러 이웃집에 자리를 차리고 징과 북을 치면서 굿을 하며 허사인줄 알면서도 죽은 딸의 혼을 위로한다. 그 후 한 달 후 초 하루 날 떡을 만들어 딸의 넋에 제사 지낸다.
딸이 죽은 지 1년이 되는 날 오희문은 小祥(소상)을 치르는데 朝夕上食(조석상식)을 이때부터 철수한다. 大喪(대상)은 그로부터 1년 후인 1599년(기해년)에 치루게 되는데 오희문의 일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곧 죽은 딸의 大祥(대상)이다 …
세월이 머물지 않아 대상이 이미 지났으니 애통한 마음이 더욱 심하다 … 우리 내외가 세상에 있는 동안은 매양 이날이면 비록 먹던 밥 을 가지고라도 제사를 지낼 것이나 만일 죽은 후에는 부탁할 곳이 없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비통함이 더욱 지극하다. 슬프다.
오희문은 죽은 막내딸의 大祥(대상)을 치룬 후 제례에 대해 오희문이 살아있는 동안은 제사를 지낼 것이나 그 이후 부탁할 곳이 없다는 점을 애통해하며 그의 간절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후 두 달이 지난 후 4월 8일의 일기에는 날이 밝을 때 윤해가 윤함과 제사를 지냈다. 삼년이 이미 지나고 禫祀(담사)도 역시 마쳤으니 이로부터는 삭망도 비로소 그치게 되었으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더욱 몹시 비통하여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는 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몹시 슬프다.
라고 하여 오희문은 딸의 禫祭(담제)를 지낸 후 상례절차를 마무리하며 애도한다.
오희문의 막내딸 단아는 미성년으로 엄격히 말해 喪禮(상례)라는 범주에는 들지 못한다. 물론 喪禮(상례)는 상중에 행하는 모든 예절이라는 뜻을 포함하지만 유교적 喪葬祭禮(상장제례) 절차에서 보면 부모나 조부모등 손윗사람이 돌아가셨을 때 예와 효를 다해 정성으로 절차를 밟는 수순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아끼던 가족의 한사람이 죽음으로써 예를 다해 절차를 밟고 이를 소상히 기록하였으므로 단아의 예에서 당시 오희문가의 喪禮(상례)에 대한 일면을 알 수 있다.
오희문은 일반적인 弔問(조문) 과정에서도 成服(성복)전에 사람을 보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 가까이 지내던 지인의 성복날에도 오희문은 종과 말이 없어 弔喪(조상)하지 못하였고 전염병이 있는 집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만 조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집안에 전염병이 돌 때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墓下(묘하)에 잔만 올려 예를 행하였으며 전염병이 돌지 않는 다른 친가의 집에서 대신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쇄미록』을 통하여 오희문가의 상장제례의 특징적인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희문은 누이인 金妹(매)와 林妹(임매)의 죽음을 전해 듣고 피난중이라 친히 조상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부음을 들은 지 4일째 되는 날은 성복례를 행하거나 소복을 입고 죽은 이를 애도하였으며 小祥(소상)과 大祥(대상)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직접 祭(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특히 사랑하던 막내딸을 잃고는 구조 물자를 통하여 관을 손수 준비하고 염습을 하며 小祥(소상)때까지 朝夕上食(조석상식)을 잊지 않았고 大祥(대상)ㆍ 禫祭(담제)의 절차를 거쳐 죽은 딸을 애도하는 오희문의 딸에 대한 사랑과 죽은 자에 대한 예를 볼 수 있었다.
2) 祭禮(제례)
오희문의 『瑣尾錄(쇄미록)』에 가장 많은 행사는 祭祀(제사)이다. 이것은 제사를 받드는 일은 오희문의 일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례이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하겠다.
매 해마다 오희문은 忌祭(기제)와 茶禮(다례) 時祀(시사)를 빠짐없이 지내고 있는데 무엇보다 피난 중에 형편이 힘들어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을 때는 飯羹(반갱)만으로도 예를 올려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통하고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마당으로, 이 만남의 자리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와 형식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제례에는 시대적 이념과 상황에 따라 그 의미와 형식이 다양하게 변화하기도 하였다.
제사에는 조상이 돌아가신 날 거행하는 忌祭祀(기제사), 명절날 거행하는 차례(茶禮,일명 名節祭(명절제), 俗祭(속제)라고도 하는데 대개 김장생의 四節茶禮(사절다례)에 따라 정조, 한식, 단오 및 추석에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한식이나 추석 때는 주로 省墓(성묘)를 하였으며 조상의 생일에도 제사를 지냈다.
時祀(시사)는 철에 따라 1년에 4번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 것이나 4번씩 행하는 집은 흔치 않았고 실제로 1번씩 행하는 집이 많았는데 직접 묘하에서 제사를 지냈으므로 보통 時祭(시제)를 墓祭(묘제)라고 하기도 한다.
예를 올리는 방법에 있어서 忌祭(기제)와 茶禮(다례)의 차이는 제수는 모두 갖추어 올리되 기제에는 술을 세잔(三獻(삼헌))올리며 축을 읽는데 반하여 다례는 술을 한잔(一獻(일헌))올리며 축을 읽지 않는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오희문의 일기에는 비교적 소상히 제사 지내는 것을 기록하였는데 1595년에서 1600년까지 5년 동안의 일기 (을미, 병신, 정유, 무술, 기해 ,경자일록)를 토대로 제사 일람표를 만들어 보았다.
이 제사일람표에는 그 시기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祭祀(제사)의 性格(성격)이나 특이 사항을 비고란에 적었다.
1595년(을미년)과 1596년(병신년)의 일기는 오희문이 임천에 거주하여 사위인 申應榘(신응구) 함열 태수의 도움을 받아 살고 있던 시기로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는 시기의 일기이며 1597년(정유년)과 1598년(무술년), 1599년(기해년)의 일기는 장남 윤겸이 평강태수가 되자 평강으로 이주하여 아들 윤겸의 도움을 받으며 나름대로 토지병작과 양봉, 양잠 등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는 시기의 일기이다. 다음은 오희문이 지낸 제사를 정리한 표이다.
<표1 1595년(을미년) 제사 일람표>
번 호
|
제사일
|
종류
|
대상
|
기타
|
1
|
1/1
|
다례
|
신주
|
윤해 묘소에 망제
|
2
|
1/15
|
다례
|
신주
|
삼년동안 타향에 떠돌아 선조 묘소에 제사를 올리지 못함을 탄식
|
3
|
2/1
|
다례
|
신주
|
|
4
|
2/27
|
|
선조,아버지,죽전숙부
|
묘소에 제사를 지내지 못함을 한탄
|
5
|
2/29
|
기일
|
외조기일
|
외가종손 경효형이 별세하였으므로 제사 지낼 사람이 없으므로 어머님께서 궐사하는 것을 근심하시므로 잔을 올림
|
6
|
4/29
|
기일
|
선고제사
|
|
7
|
5/5
|
단오날
|
선고제사
|
윤겸 묘소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하기에 조부모 및 죽전숙부께는 제사를 지내지 않음
|
8
|
5/20
|
기일
|
죽전숙모
|
몹시 군색해 반갱만으로 올림을 탄식
|
9
|
6/15
|
유두절
|
신주
|
|
10
|
7/3
|
기일
|
조모
|
종손이 죽어 달리 제사지낼 사람이 없어 지냄
|
11
|
7/7
|
칠석
|
신주
|
|
12
|
7/8
|
선고생신
|
선고
|
술과 떡을 차려 제사를 지냄
|
13
|
8/15
|
추석
|
신주
|
|
14
|
9/8
|
기일
|
장모
|
부인이 간결히 지내려고 하므로 지냄
|
15
|
9/9
|
중양절
|
신주
|
|
16
|
11/22
|
동지
|
선조,죽전숙부
|
|
17
|
12/18
|
|
노 막정 죽음
|
매장하고 술과 실과를 갖춰 제사지내줌
|
<표2 1596년(병신년)제사일람표>
번 호
|
제사일
|
종류
|
대상
|
기타
|
1
|
1/1
|
다례
|
신주
|
지난해 정조보다는 나은 편임
|
2
|
1/15
|
정월보름
|
신주
|
|
3
|
2/11
|
시사
|
선조
|
|
4
|
2/29
|
기일
|
외조모
|
|
5
|
3/3
|
다례
|
신주
|
|
6
|
3/12
|
기일
|
고조
|
종손들은 모두 죽고 남은 자손은 해서에 있어 제사지내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정성을 바침.(윤행관련)
|
7
|
4/8
|
초파일
|
신주
|
|
8
|
4/29
|
기일
|
선군
|
|
9
|
5/5
|
단오날
|
선조
|
사당에서 다례를 올림
|
10
|
5/15
|
기일
|
증조
|
|
11
|
5/20
|
기일
|
죽전숙모
|
5/29일 숙부기제일인데 인아결혼
|
12
|
5/22
|
기일
|
장인
|
잊고 고기반찬을 먹음
|
13
|
6/15
|
유두절
|
신주
|
계절에 따라 다례를 올리는 속절.사당에서 지냄
|
14
|
7/3
|
기일
|
조모
|
이후7/7칠월칠석,7/8선고생신,8/10 고조기일에 대하여는 오희문 여행이라 기록이 없음
|
15
|
7/15
|
절사.(다례)
|
선조
|
|
16
|
8/15
|
추석(묘사)
|
조부모,아버님,
죽전. 숙부, 아우,손자,
죽은 누이 등에 제사
|
|
17
|
9/8
|
기일
|
장모
|
|
18
|
9/9
|
중양절
(時祭(시제))
|
선조
|
|
19
|
9/17
|
다례
|
신주
|
아우가 어머님과 함께 상경
|
20
|
10/5
|
기일
|
고조
|
|
21
|
10/16
|
기일
|
증조모
|
|
22
|
12/23
|
|
누님의 신주
|
임천에서 평강가는길 예산에서 인아가 아파 아산에 머물러 있음
|
<표3 1597년(정유년) 제사 일람표>
번 호
|
제사일
|
종류
|
대상
|
기타
|
1
|
2/12
|
다례
|
신주
|
평강도착
|
2
|
2/19
|
한식날(묘사)
|
조부모,선군,죽전숙
부모,풍덕,단아묘
|
아우와 윤해를 시켜 조부모,선군,죽전숙부모,풍덕,단아묘에 제사 지내게 하고 오희문은 신주전 다례를 지냄
|
3
|
3/3
|
삼짇날(명절날)
|
신주,망녀
|
|
4
|
3/12
|
기일
|
고조
|
|
5
|
4/29
|
기일
|
선고
|
|
6
|
5/1
|
단아 죽은지 백일
|
망녀의 혼에 제사
|
|
7
|
5/15
|
기일
|
증조
|
|
8
|
5/20
|
기일
|
죽전숙모
|
|
9
|
5/29
|
기일
|
죽전숙부
|
|
10
|
6/1
|
초하루
|
죽은
|
|
11
|
6/15
|
유두절(다례)
|
신주
|
|
12
|
7/3
|
기일
|
조모
|
|
13
|
7/7
|
칠석
|
신주
|
|
14
|
7/8
|
선고생신(다례)
|
선고
|
|
15
|
7/25
|
오희문생일
|
신주
|
|
16
|
8/10
|
기일
|
고조
|
|
17
|
8/15
|
추석
|
선조
|
남은 음식으로 공이 있는 노비중 자손이 없는 노비에게 제사 지내줌
|
18
|
9/9
|
중양절
|
아버님,죽전숙부모,
윤해의양조부모,
망녀 제사
|
|
19
|
10/5
|
기일
|
조고
|
|
20
|
10/16
|
기일
|
증조모
|
|
<표4 1598년(무술년) 제사일람표>
번 호
|
제사일
|
종류
|
대상
|
기타
|
1
|
1/1
|
다례
|
조고비,선군,
죽전숙부,망녀
|
|
2
|
1/5
|
다례
|
선군,망녀
|
|
3
|
1/15
|
정월보름
|
신주,망녀
|
|
4
|
2/1
|
소상
|
망녀
|
|
5
|
2/29
|
기일
|
외조모
|
|
6
|
2/30
|
한식절
|
신주,망녀
|
|
7
|
3/3
|
삼진날
|
신주
|
|
8
|
3/12
|
기일
|
고조
|
|
9
|
3/15
|
망녀
|
自縣設奠(자현설전)
으로 제사 안지냄
|
|
10
|
4/8
|
초파일
|
선군.망녀
|
|
11
|
4/29
|
기일
|
선고
|
|
12
|
5/5
|
단오날
|
신주
|
|
13
|
5/15
|
기일
|
증조
|
|
14
|
5/20
|
기일
|
죽전숙모
|
|
15
|
5/22
|
기일
|
장인
|
|
16
|
5/29
|
기일
|
죽전숙부
|
|
17
|
6/15
|
유두절
|
신주
|
|
18
|
7/3
|
기일
|
조모
|
|
19
|
7/7
|
칠석
|
|
|
20
|
7/8
|
선고생신
|
선고,망녀
|
|
21
|
8/10
|
기일
|
고조
|
|
22
|
8/15
|
추석
|
조고비,선고,
죽전숙부모, 망녀
|
용인 처부모의 묘제도 오희문의 집에서 지냄
|
23
|
9/8
|
기일
|
처모
|
|
24
|
9/9
|
중양절
|
신주,망녀
|
|
25
|
10/5
|
기일
|
선고
|
|
26
|
10/16
|
증조모
|
|
|
27
|
11/25
|
동지
|
|
|
28
|
12/4
|
시사
|
선군,죽전숙부,망녀
|
|
<표5 1599년(기해년) 제사 일람표>
번 호
|
제사일
|
종류
|
대상
|
기타
|
1
|
1/1
|
다례
|
신주전
|
평강도착
|
2
|
1/14
|
기일
|
망녀
|
인아의 생일이기도 함
|
3
|
1/15
|
다례(속절)
|
신주,죽은딸
|
차조밥을 지어 노비먹임
|
4
|
2/1
|
대상
|
망녀
|
|
5
|
3/3
|
삼삼가절
|
신주
|
|
6
|
3/11
|
한식절일
|
조고비,선고,
죽전숙 부모, 망녀
|
다음날이 고조의 기일이므로 소복을 입음
|
7
|
3/12
|
기일
|
고조
|
아우,인아,붕질과 하게 지냄
|
8
|
4/8
|
초파일,
망녀의 담사
|
망녀
|
윤해와 윤함이 지냄
|
9
|
4/29
|
기일
|
선고
|
아우,세아들,붕질과 함께 지냄
|
10
|
5/5
|
단오절
|
조고비,선고,죽전숙
부모,죽은아우.망녀
|
묘제
|
11
|
5/15
|
기일
|
증조
|
아우,윤해지냄
|
12
|
5/20
|
기일
|
죽전숙모
|
윤해,인해
|
13
|
5/29
|
기일
|
죽전숙부
|
인아
|
14
|
6/15
|
유두절(다례)
|
신위,망녀
|
|
15
|
7/3
|
기일
|
조모
|
아우,인아
|
16
|
7/7
|
칠석날(다례)
|
신위
|
|
17
|
7/8
|
다례(선고생신)
|
|
|
18
|
7/25
|
다례(오희문생일)
|
신주,망녀
|
|
19
|
8/15
|
추석
|
조고비,아버님,
죽전숙부모,망제,망녀
|
성묘
|
20
|
9/9
|
구구가절(다례)
|
신주
|
|
21
|
9/15
|
시사
|
조고비,선고,
죽전숙부,망녀
|
아우와 같이 지내지 못함
|
22
|
10/5
|
기일
|
선고
|
윤해,인아
|
23
|
10/16
|
기일
|
증조
|
윤해,인아
|
24
|
11/6
|
동지(다례)
|
신주
|
|
<표6 1600년(경자년) 제사일람표>
번 호
|
제사일
|
종류
|
대상
|
기타
|
1
|
1/1
|
다례
|
신주
|
묘제도 겸함
|
2
|
1/15
|
다례
|
신주
|
|
3
|
2/1
|
기일
|
망녀
|
인아
|
4
|
2/12
|
기일
|
윤겸첩의 어머니
|
오희문의 집에 와 있음므로 제사를 차려 지내게 함
|
5
|
2/22
|
한식절(다례)
|
|
묘제
|
6
|
3/3
|
삼삼가절(다례)
|
신주
|
|
7
|
3/12
|
기일
|
고조
|
오희문,인아
|
8
|
4/8
|
초파일(다례)
|
신주
|
|
9
|
4/28
|
다례(선고생신)
|
선고
|
|
10
|
5/5
|
단양절(다례)
|
신주
|
산소
|
11
|
5/15
|
기일
|
증조
|
|
12
|
5/20
|
기일
|
죽전숙모
|
|
13
|
5/29
|
기일
|
죽전숙부
|
|
14
|
6/15
|
유두절(다례)
|
신주
|
|
15
|
7/3
|
기일
|
조고
|
|
16
|
7/7
|
칠석 (다례)
|
신주
|
|
17
|
7/8
|
선고생신
|
선고
|
|
18
|
7/25
|
오희문생일(다례
|
신주
|
|
19
|
8/10
|
기일
|
고조
|
|
20
|
8/15
|
추석
|
조고비,선고,죽전숙
부모,망녀
|
국상으로 인해 묘소에서 제대로 제사를 지낼 수 없음(신주전에서만 지냄)
|
21
|
9/8
|
기일
|
장모
|
인아와 함께 지냄
|
22
|
9/9
|
중양절(다례)
|
신주
|
|
23
|
10/5
|
기일
|
조고
|
|
24
|
11/17
|
동지(다례)
|
신주
|
|
위의 표(1∼6)를 살펴보면 각 해마다 제사를 지낸 횟수는 1595년(을미년) 17회, 1596년(병신년) 22회, 1597년(정유년) 20회, 1598년(무술년) 28회,1599년(기해년) 24회, 1600년(경자년) 24회 등이다.
기록으로 보면 오희문이 여행 중 이거나, 식구가 병중에 있어서, 혹은 결혼식과 겹치는 경우에는 제사를 빠지기도 하였고(혹 기록을 못했을 경우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됨) 비정규적인 예로는, 누님의 神主(신주)에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1년에 평균25회 정도의 제사를 지낸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1598년(무술년)은 28회인데, 사실상 2월29일의 외조모와 3월15일의 망녀 및 5월 22일의 장인에 대해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아 25회로 간주된다.
1598년(무술년)의 25회는 忌日(기일)과 俗節(속절), 時祀(시사)까지 포함된 숫자로 평강에 거주하는 동안 비교적 時勢(시세)가 안정되었으며, 이후1599년 (기해년)이나 1600년(경자년)도 비슷한 횟수이다.
1598년(무술년)이 전년도(정유년)에 비하여 죽은막내딸 단아의 忌日(기일)까지 포함되어 행사가 더 늘어난 셈이지만 오희문은 4대조 봉사)에 외가, 처가의 제사까지 지내고 있다.
외가나 처가의 제사는 형편에 따라서 매해 꼭 지내지는 않았지만 잊지 않고 소소한 음식만으로 제사를 받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輪廻奉祀(윤회봉사)가 관례였던 시기로 한해에 25회, 즉 월평균 2회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많은 횟수라고 볼 수 있다. 즉 4대의 제사를 혼자서 받드는 일은 계속하여 4대를 딸도 없이 獨子(독자)로만 내려온 경우는 가능하겠지만 오희문은 독자도 아니고 당시의 풍습인 輪行(윤행)이 성행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례적인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문제는 오희문의 기록에서 살펴 보건데, 오희문의 제사에 대한남다른 관심과 집념, 그리고 임진왜란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이 이례적으로 많은 제사를 받들게 된 것이라 해석된다. 우선 오희문의 제사에 대한 관심과 집념을 보여주는 기록을 소개한다.
우리집 신주는 아우가 어떻게 처리했는지, 깨끗한 곳에 묻었으면 이것이 좋은 방법인데 만일 모시고 떠났다면 온전하지 못할까 걱정이다. 宗家(종가) 선조의 신주는 믿을 사람이 없으니 만일 버려두고 피해 갔다면 반드시 불에 탔을 것이니 또한 민망하고 걱정 되는 터이다.
라고 하여 왜적이 서울을 침입하여 宗家(종가)와 家族(가족)이 피난을 떠났다는 소식을 오희문이 머물고 있는 장수현에서 듣자 오희문은 피난기간 내내 선조 신주의 행방에 대해 노심초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오희문이 머물고 있는 장수현도 안전지대가 아니므로 처남 이빈의 가족과 함께 산속에 피난중에도 (피난하여)산속에 있는데 오늘은 곧 조모의 제삿날이다. 서울을 빼앗긴 후 각자가 도망하여 숨어 있어서 제사를 올릴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 틀림없으니 이 비통함을 어찌 말하겠는가?
라는 글로 조모의 제사를 지내지 못함을 비통해하고 있다.
또한 4년 동안 한번도 墓所(묘소)에 직접 찾아가지 못함을 늘 아쉬워하다가 1595년(을미년) 추석을 앞두고 윤해를 시켜 광주 墓下(묘하)에 잔을 올리도록 하는데, 윤해가 병으로 친히 묘하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종을 시켜 대신 지내니 이는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오희문은 제사를 받드는 것에 대해 노심초사하고 祭需(제수)를 마련하기 위해 제물을 구걸을 하거나 비축해야만 하였다. 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제사를 모시는 횟수가 많으므로 일년 내내 제사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피난중이라는 시세가 안정되지 않은 시기이기는 하지만 오희문 혼자서 제사를 받들어야하는 이유를 다음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조모 제삿날이다 … 종손은 모두 죽어서 달리 제사 지낼 사람이 없고 다만 오정일의 끝의 아우가 있어서 지금 해주 고향 마을에 살고 있으나 필시 기억하지 못하고 제사지내지 못할 것이다. … 각 집이 돌려 가면서 힘써 극진히 갖추어야 할 것이나 이제 그럴수가 없으니 슬픈 감회를 이길 수가 없다.
내일은 曾祖母(증조모)의 기일이다. 그런데 해마다 忠一(충일)의 집에서 지낸다고 하니 이제부터는 우리 집에서 지내지 않으려고 한다.
라고 하여 종전에는 제사를 輪行(윤행) 하였음과 宗孫(종손)이 죽어서 달리 제사 지낼 사람도 없고 종손의 아우가 있으나 기억하지 못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오희문이 제사지내는 이유를 피력하였다.
다음의 기록은 제사를 지내는 이가 있음을 안 후로는 이후 제사를 지내지 않을 것임을 결정하는 기사로 이후 왜적이 물러가고 시세가 안정된 1600년(경자년) 일기에 오희문은 우리선조의 忌祭(기제)와 墓祭(묘제)를 (그동안)나의 집에서 홀로 맡아서 지내왔는데 이제는 시세가 좀 안정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자손들이 돌려가면서 차례로 지내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생원 즉 윤해로 하여금 輪次記(윤차기)를 작성하도록 하여 克一(극일)과 忠一(충일) 등에게 보내서 새해부터는 돌려가면서 지내도록 했다.
그동안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자손들이 이곳저곳으로 피난을 다니고 또 곤궁하여 祭需(제수)마련이 매우 어려워서 忌祭(기제)와 墓祭(묘제)를 오희문 홀로 맡아 지내왔는데 이제 왜적이 물러가고 사회도 점차 안정되므로 당시의 風潮(풍조)에 따라 자손들이 제사를 輪行(윤행)하도록 하자고 한다.
이렇게 오희문은 제사에 대한 열의는 대단하였는데 오희문뿐 아니라 오희문의 처도 끼니도 때우기 힘든 어려운 생활 속에서 쌀 한말을 들여 祭器(제기)를 구입하거나 제삿날이 가까워오면 예를 다하기 위해 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모습에서도 오희문가의 제사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알 수 있다.
오희문가의 제사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4대조 봉사에 외가 처가의 제사까지 받들며 선고의 生諱日祭(생휘일제)도 모시고 있다.
둘째, 임진왜란 이후 타향에 떠돌아 선조묘하에 직접 제사를 지내지 못함을 늘 마음에 두고 있으며 시세가 안정된 정유년 이후 1년에 한번 이상은 오희문이 직접 가든지, 아니면 아우나 아들들을 시켜 묘제를 지내게 하였다.
셋째, 國喪(국상)을 당해서는 일반 士大夫家(사대부가)에서는 풍성하게 제사를 지낼 수 없었으므로 이를 지켜 추석에도 神主前(신주전)에 간단히 다례를 지내고 있다.
넷째, 죽은 딸은 물론이고 첩의 어머니 제사도오희문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공이 있으며 자손이 없는 노비의 제사도 지내주었다. 제사의 設行(설행)은 오희문이 몸이 아파 몸을 추스르지 못하여 직접 주관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아우나 아들들이 代行(대행)하였고 오희문의 안사람이 출타중이거나 와병 중에는 딸들이 정성스럽게 祭需(제수)를 마련하였다.
16세기 초중반기의 이문건의 『黙齋日記(묵재일기)』와 제사설행방식의 성격의 특징을 비교해 보면 이문건의 집안에서는 3대를 봉사하였고, 불교적 색체가 짙은 제사이다.
곧 이 시기는 유교적 질서가 완전히 정착되지 못하였음을 반증하며 고려시대 절에서 祭(제)를 올리던 관습이 16세기 중엽까지도 상당히 남아있었으며 유교적 제례방식이 완전히 정착하지 못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16세기 말 오희문가의 제사설행방법은 전술한 바와 같이 宗孫(종손)이 아님에도 4대를 봉사하였고 불교적 색체는 전혀 띠지 않았다. 물론 이문건가와 비슷한 生諱日祭(생휘일제)를 받들었고 亡女(망여)를 배식함으로써 부모ㆍ 형제ㆍ 자매ㆍ 자녀 등 가까운 亡者(망자)를 추모하는 성격이 강하였으나 피난기라는 형편을 재고해 볼때 이문건가보다는 훨씬 유교적 색체를 띠었으며 제사의 횟수도 많았다.
이러한 모습은 유교적 제사방식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男歸女家婚(남귀여가혼), 子女均分(자녀균분) 相續(상속) 등과 관련하여 전통적인 제례방식이 아직도 오희문가에 남아있지만 유교식 제사방식이 時俗(시속)을 완전히 대체할 정도로 철저히 적용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오희문가의 제사방식은 16세기 초 중반기의 이문건가보다는 훨씬 유교적이지만 그 이후에 비하여 유교적 제사 방식이 정착되지 않은 과도기적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오희문가의 상례와 제례에 관한 태도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공통된 것으로써 유교식 제례에서의 제사의 의미는 부모가 살아계실 때 행하던 효행의 연속으로 이는 효가 모든 행동의 근원(孝者百行之源(효자백행지원))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배출된다(忠臣求於孝子之家(충신구어효자지가))고 하여 가정의 도덕규범인 효를 국가의 도덕규범인 忠(충)과 연결시켜 효가 모든 행동과 사회규범의 근본임을 주지시켰다.
즉 충과 효는 성리학적 유교질서의 근본으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었으며 효를 실천하는 방법의 하나로 오희문은 사대부가로서 상례와 제례를 중요시하여 이를 받들었음을 알 수 있다.
2. 接賓客(접빈객)과 出他(출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일상생활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接賓客(접빈객)이다.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을 예를 갖추어 잘 대접하는 것은 조선시대 양반사대부가의 기본덕목이며 예로써 임진왜란이라는 피난기의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물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있어온 예의범절의 하나임은 말할 나위 없다. 또한 양반의 일상생활중 하나인 出他(출타)에 있어서 종과 말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은 사대부의 일상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종과 말은 양반의 품위유지와 기본적인 일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이들의 역할과 16세기 피난시절 접빈객의 실태를 『瑣尾錄(쇄미록)』를 통하여 살펴보자.
(1) 接賓客(접빈객)
士大夫(사대부)들의 일상생활의 하나는 접빈객이다. 문자 그대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정성으로 맞이하는 것이 사대부들의 의례의 하나로 임진왜란 중 피난살이를 하는 오희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객지에서의 피난 생활이니 엄격하게 말하면 손님을 청해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接賓客(접빈객)을 당하는 위치에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찾아오는 손님들은 피난 오기 이전 한 동네에 살았던 사람이나 知人(지인), 그리고 인가의 이웃이나 친척들로 도움을 주거나 받는 사람들이었다.
인척들 중에는 사위, 사돈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도 접빈객의 범주 안에 드는 것은 당시의 혼인관계라는 것이 손님관계, 즉 일정한 교제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당연히 접대하여야 할 대상이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어떻게 빈객을 맞이 하였는 지를 『瑣尾錄(쇄미록)』을 통하여 살펴보자.
南庭之(남정지)가 老親(노친)과 가족을 모시고 지나가다 들러서 다시 만나니 한편으로는 슬프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뻤다. 그로부터 피난 생활하는 어려움을 들으니 슬픈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 술을 사고 밥을 지어서 南公(남공)을 대접해 보냈다.
吳希文은 홍주 계당에서 士人(사인) 李光輻(이광복)의 서당을 빌려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1592년(선조 25) 11월에 그의 親知(친지)인 南庭之(남정지)가 찾아오자 대접할 음식이 없자 술을 사다 그를 대접하는 한편, 밥을 지어 그의 식구 등을 접대하였다. 또 평소 친분이 있었던 지인이 찾아오자 다음과 같은 심정으로 그를 맞이한다.
또 趙正郞(조정랑) 應祿(응록)이 찾아왔는데 만 번 죽었던 나머지에 다시 서로 만나서 십분 기쁘다. 술과 저녁 식사를 대접하여 보냈다.
오랜 고초를 겪고 만난 친구를 술과 식사를 마련하여 대접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빈객과 빈객의 일행이 잘 수 있도록 잠자리도 제공하여야 하였다.
進士(진사) 李得天(이득천)이 난을 피하여 連山(연산) 땅에 와 있다가 … 지나가는 길에 나를 찾아왔다. 이는 뜻밖의 일이라서 기쁘고 위로가 된다. 득천의 아버지는 곧 나의 소년시절의 벗으로서 동갑이요 같은 마을에서 살던 사람이다. … 저녁밥을 대접했으나 이곳에는 잘 곳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生員(생원) 李翼賓(이익빈)의 집으로 보냈으니 이는 이득천이 이익빈과 서로 알기 때문 이었다.
친구의 아들이 방문하자 오희문은 식사뿐 아니라 잠자리를 제공하게 되는데 이는 요즈음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는 멀리에서 온 빈객의 경우에는 하룻밤 재워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로 오희문은 자신도 이광복의 서당을 빌어 비좁게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웃집의 방을 빌려 재울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빈손으로 보낼 수 없어 무언가 주어 보내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세량이 와서 보았다. 지금 大興縣(대흥현)의 山寺(산사)에 있는데 내가 여기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걸어서 왔다. 형용이 파리하고 옷도 매우 얇아서 차마 볼 수가 없다. 하룻밤 여기에서 유숙케 하고 이튿날 돌아갈 때 쌀 1말 5되, 감장 1사발, 옷 만들 두꺼운 종이 4장, 짚신 창 1벌을 주어서 보냈다.
대흥현의 산사로 피난 와 있던 吳世良(세량)이 吳希文(희문)을 찾아 것은 希文(희문)이 대흥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홍주 계당에 거한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 얼굴을 보기위해 온 것이지만, 자신의 처지가 어려웠으므로 혹시 希文(희문)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처럼 임진왜란과 같은 난리통에 찾아온 빈객들 대부분은 路資(노자)를 얻거나 혹은 食糧(식량)을 빌리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希文(희문)은 이와 같이 자신을 찾아온 빈객을 잘 대접한 것은 평소 자신과 알고 지내던 사대부에 한한 것만은 아니었다.
彦實(언실)의 종 允石(윤석)이 떠돌다 保寧(보령) 땅에 와서 살고 있다가 (내가 이곳에 와 산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산 숭어 두 마리와 쌀을 사가지고 왔는데 줄만한 물건이 없어서 겨우 백주 두 그릇을 먹여 보냈으나 탄식할 일이다.
이와 같이 친지의 종이 찾아와도 그에게 물건 하나라도 챙겨서 보내려고 하였다. 물론 이 경우에는 종 允石(윤석)이 조그마한 선물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의 차원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희문의 마음에는 멀리서 찾아온 이에 대한 감시의 표시로 무언가 주어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고, 집안이 궁핍해 賓客(빈객)에 대하여 대접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빈객이 약간의 식량이나 반찬거리를 가지고 오는 경우도 있었으나
希文(희문)의 일기에 언급되는 빈객 대부분이 사실은 난을 피하여 이리저리유리하는 사람들이었기에 때문에 그들에게 다과나 식사를 대접하다보니 자연히 希文(희문)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 질 수밖에 없었다.
希文(희문)은 1595년(선조 28) 4월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요사이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식사 대접하기가 몹시 번거롭고 이로 말미암아 양식 자루가 거의 바닥이 났으니 매우 민망하다. 라고 하여 손님을 접대하느라 번거롭고 여기에 양식도 떨어져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반대로 오희문 자신이 빈객이 되어 접대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침식사 후에 察訪(찰방) 金可幾(가기)가 우리 부자를 청한다. 그 부인도 난을 피해서 여기에 와서 내 아내와 윤겸의 처를 청하는데 아내는 연고가 있어 가지 못했고 다만 윤겸의 처만 갔다가 저녁에 돌아왔다. 나는 윤함과 가보았더니 점심을 많이 차려 주어서 종일 이야기하다 왔다.
찰방 김가기는 오희문의 아들 윤겸과 친분이 있는 자로 찰방의 며느리는 오희문의 8촌 손주뻘 이라고 오희문은 적고 있다. 물론 윤겸과의 친분 때문에 찰방 김가기 부자는 오희문 가족을 후한 음식으로 대접하고 보살피지만 손님을 접대하여 음식을 나누어먹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사교활동의 하나로, 정보를 교환하는 의미로도 보여 진다.
일기를 살펴보면 여자도 주체적으로 빈객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자가 맞아들이는 대상은 친척이나 접빈객의 안사람이며 여자의 역할은 손님을 맞이하는 일 외에 음식을 만들거나 청하여 대접하는 것으로 접빈객을 맞이한다는 것은 사대부가의 의례생활이지만 여자들의 사회 활성화의 한 부분이기도 하였다.
또한 양반사족들이 일상적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경우는 일반 親知(친지)나 知人(지인)에 해당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오희문이 김제를 거쳐 태인에 계시는 어머니를 뵈러 가는 도중 金堤(제) 서쪽 竹山里(죽산리) 代村(대촌)의 양반 趙大鵬(조대붕)의 집에 도착하게 되는데 조대붕은 40여 년 전 서울에서 이곳 죽산리로 移居(이거)한 양반으로 오희문을 반갑게 맞이한다.
나를 별실에서 자게하고 동산의 채소를 대접한다. 집이 가난해서 밥을 지어 대접하지 못하니 몹시 한스럽다고 한다.
이렇게 사대부들은 피난생활의 와중에서도 손님이 찾아오거나 찾아가면 성
심껏 대접을 하는 것이 하나의 의례생활이었다. 그러다 보니 집안에 식량이 떨어졌을 때마다 인근의 친지나 수령을 찾아가 乞粮(걸량)을 하였으며 그가 걸량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모욕을 느끼기도 하고 이 때문에 걸량하기를 주저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자신의 집에 찾아온 빈객을 성심껏 대접하는 것이 일상생활의 하나였다. 이는 빈객을 잘 접대하는 것이 곧 사대부로서 儀(의)를 갖추는 일이라는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전의 일기인 『黙齋日記(묵재일기)』와 『眉巖日記(미암일기)』 그리고 『丙子日記(병자일기)』에도 빠짐없이 나타나는 기본적인 의례생활이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봉양과 돌아 가셨을 때는 제사를 받드는 ‘효’를 가정생활의 기본덕목으로 삼았듯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도덕규범으로는 ‘예’를 생활화하는 것이었다.
즉 먼 곳에서 자신을 찾아 온 빈객들에게 술과 식사를 대접하고 잠자리를 제공하며 路資(노자)나 生活費(생활비)를 보태주는 것, 즉 빈객을 접대하는 것을 예의 실천으로 생각하였으며 이것은 곧 덕을 베푸는 길이라고도 생각하였다.
그래서 빈객이 집에 넘치는 것은 그 집주인에게 덕이 있다는 징표로 생각하였으며 빈객이 끊어지면 주인의 不德(덕)의 소치로 받아들였다. 그랬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대부들 및 손님을 맞이하는 안사람의 경우에도 불만을 표시하는 것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즉 이를 당연한 一禮(일례)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2) 出他(출타)
양반들은 오랜 기간 동안 여행을 하거나 외출을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시중드는 종과 말이었다. 즉 양반에게 있어서 종과 말은 그들의 품위 유지
라는 외형적 조건일 뿐만 아니라 실지로 말과 종없이는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으며 말이 없을 때는 빌려서 나들이를 하거나 물건을 운반하는 등의 경우는 비일비재하였다.
그 실제를 『瑣尾錄(쇄미록)』을 통해 살펴보면
들으니 柳忠義(유충의) 愿氏(원씨)가 지난 四(사)일에 별세했다고 하니 놀랍고 슬픔을 이길 수 없다. 그 평일에 있어서 나를 대우하기를 몹시 후하게 했는데 불의에 부음을 들으니 더욱 몹시 슬프다. 내일 남쪽으로 갈 터라고 하였으나 종과 말이 틈이 없어 가서 弔喪(조상)하지 못하니 한스러우나 어찌 하리오.
예를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 喪(상)을 당했을 때 弔喪(조상)하는 것은 사대부의 기본적인 의례였다. 그러나 종과 말이 여의치 않았을 때는 그도 저도 못하였던 것이 현실이었음을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종과 말이 없어 가까운 친지나 지인의 訃音(부음)을 접하고도 찾아가 弔喪하지 못함을 통탄하는 내용이 여러 군데 보이고 있다. 그만큼 사대부가의 행차에 있어서 종과 말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에 어른이 來訪(내방)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答訪(답방)으로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이었는데 일기의 다음 내용을 보자.
忠義衡(충의형) 柳愿氏(유원씨)께서 나를 찾아와 본 뒤에 돌아가셨다. 어른이 두 번이나 오셔서 나를 찾아보았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종과 말이 없었기 때문에 한 번도 이에 답하여 찾아뵙고 謝禮(사례) 하지 못했으니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위 일기에서 希文(희문)은 어른이 두 번이나 자신을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종과 말이 없어서 이에 대해 答訪(답방)하지 못함을 죄송스러워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웃어른이 자신의 사랑을 방문하였을 때에는 곧 어른을 찾아뵙고 사례를 하는 것이 하나의 예의범절이었다. 그러나 e希文(희문)은 자신의 수하에 종과 말이 없었기 때문에 두 차례나 결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외 꿈에 그리던 노모를 눈앞에 두고도 종과 말이 없어 행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왜적이 서울에 들어간 후, 希文(희문)은 노모의 생사를 몰라 밤낮으로 기도하며 제발 무사하기를 빌었으며 또 다른 식구들은 꿈에 나타나는데 유독 노모만은 꿈에 나타나지 않자 제발 꿈에서라도 뵙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希文(희문)은 그가 1591년(선조 24년) 11월에 노비의 신공을 받기 위해 南行을 하는 도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노모와 헤어진 지 만1년 만에, 그리고 왜적의 침입으로 소식이 단절 된지 만 일곱 달 만에 노모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그렇게 그리던 노모가 살아서 누이가 있는 영암 땅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은 希文(희문)은 당장 달려가고 싶었으나 그에게는 그때 마침 말과 종이
없었다. 希文(희문)은 이에 대해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법성창까지는 바닷길이 아주 멀고 이와 같이 추운날씨에 북풍마저 몹시 사
납게 불어대니 어떻게 가실련지 심히 민망스럽고 걱정이 된다. 내가 즉시
가고 싶지만 종과 말이 長水(장수)에 가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열흘 안으로 가 뵈올 예정이다.
즉, 그렇게 애타게 그리던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도 종과 말이 없어 오희문
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처럼 말과 종은 사대부의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이러한 士大夫家(사대부가)의 出他(출타)에 있어서 꼭 소용이 되는 말은 교통수단이자 품위유지의 핵심이었다. 특히 먼 거리를 여행해야 할 때 걸어서 가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말이나 소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더군다나 항상 먹을 양식과 반찬들을 마련하여 가지고 다니면서 식사를 해결해야 했으며 침구나 의복 역시 가지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이를 운반할 말이 없이 遠行(원행)을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또한 화폐가 발달하지 않아서 사삿집에 유숙하거나 식사를 제공받을 경우 그 대가를 양식이나 베로 지불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를 싣고 다닐 말이 없이는 객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따라서 遠行(원행)을 할 때에는 반드시 종과 함께 말이 필요하였다.
이렇게 중요한 교통수단인 말은 가격도 상당히 비쌌다. 말1필을 구입하려면 소한마리에 포목 한필을 얹어주어야 했고 말을 잃었을 때는 한 집안의 큰 액운이라고 한탄해 하였다.89)말이 병이 나면 가던 길을 되돌아 와야만 했던 때도 있었고 또 즉시 馬醫(마의)를 불러 치료하도록 하였다.
사실 기록에 의하면
希文(희문)이나 希文(희문)의 가족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았던 종들은 피난 기간 내내 학질이나 풍한 등으로 시달려 여러 차례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을 때에도 거의 의원을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말이 병이 나자 希文(희문)은 여러 차례 馬醫(마의)를 불러 술과 누룩 등으로 치료비를 대신하였고 또 말의 질병을 잘 고친다는 官奴(관노)를 특별히 자기 집에 보내주기를 부탁하는 서신을 수령에게 띄워 이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당시에 있어서 말은 士大夫家(사대부가)의 의례생활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말을 움직이는 것은 종으로 종은 집안에서나 바깥에서 사대부가의手足(수족)이자 耳目(이목)으로서 종이 없는 양반의 일상은 상상하기 조차 힘들다. 오희문의 기록을 보면,
집에 종이 없어서 겨우 어린 종 安孫(안손)을 데리고 갔다.… 요새 종이 없어서 오랫동안 땔나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날씨가 이와 같이 찬데 방에 불을 넣지 못하고 잤다.
또 宋奴(송노)는 지난달 이십일 후에 말미를 얻어 집에 돌아가서 지금에 이르기 까지 오지 않는다. 주림이 이와 같은데 집에 사환이 없어 아는 곳에 가서 꾸어 오지도 못하니 몹시 밉다.
라고 하여 종이 없어서 부득이 어린종이라도 데리고 외출을 할 수 밖에 없
음을, 그리고 땔나무 할 종이 없어 냉방에서 자야만 하는 현실과 휴가를 얻어 집에 간 종이 한 달여간 돌아오지 않자 걸식조차 못하고 있는 처지를 그려내고 있다.
이 외 『瑣尾錄(쇄미록)』에는 종이 휴가 중이어서 없을 때는 양반사족인 오희문이 친히 물고기의 배를 가르고 씻는 記事(기사)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렇듯 종은 양반의 일상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또 종은 바깥과의 통신 역할자이며 정보의 조달자이기도 하였다. 말이 없어 弔喪(조상)을 하지 못하는 양반 대신 조상도 하였고 집안 어른의 문안 인사도 대신하였다.
윤겸이 돌아간 뒤, 소식을 알려오지 않고 또 우리 집에 종이 없어서 보내어 소식을 묻지 못하니 그 집의 병든 사람들의 근황이 어떠한 지 알 수가 없다.… 또 오늘은 어머님 생신이다. 비록 가뵙지 못해도 사람을 보내서 문안하려 했는데 이것마저 하지 못하니 …
위 記事(기사)에서 보듯이 집안 소식은 종이 왕래하여 전달하였고 집안의 대소사행사에는 오희문이 직접 가서 문안인사를 드리지 못할 때에는 종이 대신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종이 없을 때에는 집안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도 없었고 떨어져 있는 부모에게 문안 인사하는 도리조차 행하지 못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대부들은 孝(효)와 禮(례)를 중요시하여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성심껏 실천으로 옮겼고 그들의 품위 유지 및 실생활에 있어서 종과 말은 필수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종은 집안에서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기본적인 노동력이었으며, 바깥에서는 정보의 전달자 및 수행자로서 사대부가의 耳目(이목)과 手足(수족)이었다. 이처럼 사대부가의 출타에 있어서 종과 말은 교통의 수단이자 품위 유지의 핵심이었다.
3. 信仰(신앙) (꿈과 점복 무속)
오희문은 집안의 大小事(대소사)를 앞두고, 질병으로 인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또한 태어날 아기의 미래에 대하여 미리 길흉을 점쳤으며 꿈을 통하여 앞일에 대해 조심을 하거나 기대를 갖기도 하였고 무당을 불러 악귀를 물리치는 굿을 행하기도 하였다.
사실 유교를 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 양반사대부가에 있어서 占卜(점복)이나, 讀經(독경), 굿, 등의 巫俗(무속)이 그들의 생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이러한 행위들이 실생활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볼 때 가능하다.
즉 유교를 근본으로 하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이러한 행위는 어떤 경우에 행하였는가? 라는 動機(동기)와 이를 행하면서 느끼는 오희문의 태도, 즉 무속관은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본다면 조선시대 사대부의 인간심리와 심성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瑣尾錄(쇄미록)』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무속에 대한 기록들은 역병이 크게 번졌던 16세기 말과 피난시절이라는 불안정한 시기로 평상시보다 훨씬 더 무언가 의지하고 싶었던 급박한 때였으며, 무엇보다 개인일기이기 때문에 일상사에 대한 솔직한 자신의 의견을 적어 놓았다는 점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가치가 있다.
물론 전술한 바와 같이 오희문 개인일기이기 때문에 일반화하기엔 무리가있겠지만 어쩌면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본장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통해 오희문가의 무속 신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瑣尾錄(쇄미록)』에는 특히 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꿈은 생활의 일부로 꿈에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닐까? 무엇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급적 머릿속에 기억하거나 일기에 기록하려고 하였다.
또 어젯밤 꿈에 내가 서울에 있는 것 같이 친척과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아내도 또한 만났으니 이는 반드시 내가 죽은 것이라 생각하는가, 아니면 저들이 이미 죽어서 그 영혼이 내 꿈에 나타나는 것인가, 열흘 동안에 어찌해서 이같이 두 번씩이나 꿈에 보이는 것인가
꿈에 聘君(빙군)과 子美(자미)를 보았다. 근래 봄꿈을 자주 꾸지만 빙군은 전에 한번도 꿈에 보이지 않더니 오늘밤 꿈에 보이니 필시 봄꿈이겠지. 아니면 혹시 宗子(종자)가 깊은 산골짜기에 떠돌아 다니고 있어 여러 조상의 신위도 역시 타향에 있는데 좋은 때나 節日(절일)에 제사를 궐하는 때가 많아 旅魂(여혼)이 感傷(감상)해서 꿈에 들어온 것인가? 슬프고 탄식스러 움을 금할 수 없다.
라고 하여 꿈속에서 헤어져 있는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고 죽은 장인과 처남을 만나고 있다.
첫 번째 인용문은 당시 오희문은 집을 떠나 신공을 받으러 남행하고 있었고 이 사이 임진왜란이 일어나 가족과 헤어져 있어 가족의 생사를 모르고 애타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오희문은 꿈속에서 가족을 만나 더욱더 가족에 대하여 애타게 걱정을 하고 있는 기록이며, 두 번째 인용문은 전쟁으로 인해 돌아가신 장인과 처남의 제사를 宗孫(종손)이 제대로 지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꿈에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안타까워하는 기록이다.
당시에는 특히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누군가가 찾아갈 수도 없고 편지마저 보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꿈을 통해, 죽은 자와 만나고 헤어져 있는 자와도 만나 안부를 전하기도 하고 앞일을 예견하기도 하였다.
밤 꿈에 평강(윤겸)이 들어왔다. 분명히 평상시와 똑 같은데 창문 앞에서 갓을 벗고 절을 한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필경 과거에 급제해서 갓을 벗고 관모를 쓸 징조인지 그렇지 않으면 금명간에 還官(환관)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위 꿈의 내용은 오희문이 아들 允謙(윤겸)이 과거급제 소식을 들은 7일전의 꿈이다. 오희문의 아들 윤겸이 과거시험을 본 후 오희문은 아들의 과거소식을 애타게 기다렸고 이에 대한 소식은 꿈으로 나타나 오희문에게 아들 윤겸의 과거급제소식을 예견하고 있다.
그 꿈은 정확히 맞고 있었다. 이처럼 꿈은 애타게 기다리는 소식을 전해주는 매개체이기도 하였다.
또한 오희문은 꿈의 징조에 대하여
지난밤에 꿈이 불길하니 이 무슨 징조인가 속담에 흉한 꿈이 도리어 상서롭다니 이로써 위로가 된다. 지난밤 꿈이 몹시 나쁜데 글로 쓰면 도리어 길하다고 한다.
라고 하여 불길한 꿈은 오히려 吉夢(길몽)으로 생각하였고 황당하거나 夢兆(몽조)가 이상한 꿈은 기록하여 뒷날을 징험하려하기도 하였다. 또한 과거에 나간 아들의 소식이 없자 집에 길한 꿈이 없어 과거에 낙방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즉 꿈을 통하여 앞일을 예견하고 예방하였던 것으로, 이를 인식하고 기록하는 것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일상생활의 하나였다.
또한 앞일에 대한 궁금증과 이를 대비하기 위해 오희문은 평소 占卜(점복)에 관심을 가졌음을 알게 하는 기록이 있다.
지난 十五(십오)여년 전에 내가 양지 농촌에 있을 때 죽산에 사는 맹인 김자순을 불러서 내 나이를 점치라고 했더니 자순은 말하기를 나이 五十四(오십사)세인 임진년에 큰 횡액이 있고, 이것이 지나면 나이 七十(칠십)이 넘는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심상히 알고 믿으려 하지 않았더니 올봄 병에 다행히 죽음을 면했지만 그 병세를 보건데 十分(십분)의 九(구)는 위급하고 오직 一分(일분)만이 다행할 뿐이니 지금 비록 죽지 않는다 해도 큰 어려움을 만날 것인데 무엇보다 어머니와 아우와 처자가 유리하는 괴로움이다.
오희문은 15년전 맹인인 점복자 김자순을 불러 점을 치게 하였는데 1593년(계사년) 오희문 나이 55세 때 이 말을 기억하고 점복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오희문 나이 54세인 임진년에 만난 큰 횡액이란, 왜란을 만나 부모 자식간에 생이별을 하고 유리하며 오희문은 또한 전염병을 앓아 45여일 동안 사경을 헤메다 살아났으니 김자순의 말이 헛말이 아니었음을 상기하며 점복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오희문은 觀象監(관상감) 命課官(명과관)으로 임천에 떠돌아 와 있는 이복령과 가까이 지내며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이복령을 찾아가 길흉을 점치곤 하였다.
점치는 동기는 큰딸과 작은 아들의 궁합을 보거나 혼인 吉日(길일)을 잡거나 여행길 안전에 대한 길흉을 점치게 하거나 질병이 언제쯤 나을 것 인지 출산시기와 태아의 성별을 알아보거나, 과거합격 여부 등 개인 身數(신수)에 관한 것에서부터 관아의 일까지 점을 치고 있으며 실지로 청혼이 들어 왔을 때 궁합 등이 좋지 않으면 이를 거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복행위는 오희문이 직접 이복령의 집을 찾아가거나 이복령을 불러 점을 치는데 오희문의 주도로 이를 행하고 있다. 이는 점복자가 남성이기도 한 까닭이지만 오희문 자신이 점복신앙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오희문의 점복에 대한 태도는
李奉事(이봉사) 福齡(복령)이 찾아왔기에 함열 딸이 근일 불편한 것을 물었더니 엽전을 던져 점을 치고 나서 말하기를 딴 증세는 없고 필시 태기가 있는데 마땅히 아들을 낳겠다고 한다.
또 윤겸의 벼슬길에 대한 길흉을 물었더니 八月十日(팔월십일)이 가장 길하다고 한다. 또 宋奴(송노)가 도망갔는데 언제 잡아오겠느냐고 물었더니 七(칠)월이 되면 저절로 올 것이라고 한다. 이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이지만 후일에 허실을 알기 위하여 기록해 둔다.
라는 기록을 통하여 오희문의 占卜觀(점복관)을 알 수 있다. 즉 집안의 대소사를 일일이 묻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궁금증과 아울러 미래의 길흉에 대해 미리 알고 대처하자는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고, 좋은 점괘가 나오면 마음 한편으로는 믿고 싶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거라는 단서를 붙이며 虛失(허실)을 알기 위해 기록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점복행위는 오희문 뿐 아니라 당시 함열 현감이었던 사위 신응구도여러 번 이복령을 통해 관아의 일이나 자신과 가족의 신수점을 보기도 하였는데 이를 통해서 보면 점복이나 해몽은 당시 사대부가의 보편적인 일상생활의 하나로 보인다.
이외 기도나 독경, 굿을 통해 해결되지 않은 현실의 부분들을 타개해나가려 했다. 특히 병이 낫지 않을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또는 죽은 이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이러한 의식들이 행하여졌는데 오희문의 주도아래, 혹은 묵인아래 행하여졌지만 주관자는 대개 여자의 몫이었다.
이는 巫女(무녀)가 여자이기도 하였지만 여성들이 무속의 힘에 의지하려는 의지가 더 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것이라 하겠다.
다음은 이러한 무속을 행하는 동기와 방법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오희문의
무속관에 관하여 살펴보자.
1. 계집종들은 양덕에서 온 물건을 내다 놓고 뜰에서 기도를 드린다. 비록 헛일인 줄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때이어서 보고서도 금하지 않았으니 가위 슬픈 일이다.
2. 요새 부인이 기운이 몹시 불편하더니 어제부터 좀 덜하다. 그러나 무당을 불러서 기도했더니 오후에 도로 불편하니 걱정이다. 무당이 헛것이라는 것을 역시 알만하다.
3. 그 고통이 극열하여 구토까지 계속하니 집 사람은 귀신이 범한 것 같다
고 하매 늙은 계집종을 시켜서 돈과 밥을 바쳐 귀신을 물리치게 했으나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4. 부인은 경쟁이를 불러서 經(경)을 읽어 잡귀를 쫒게 했다. 딸의 병세 때문이다. 비록 헛일인 줄 알면서도 민망한 중에 형세가 말릴 수가 없으니 탄식한들 어찌하랴?
5. 어떤 사람이 가르쳐주기를 병자의 生氣福德日(생기복덕일)을 가려서 글 아는 중을 불러 가지고 정한 쌀 3되로 밥을 지어 세 그릇에 담고 정화수 한 그릇에 백지 한 장으로 깃대 5개를 만들어 벌여 세우고 징을 치고 경을 외우면서 빌면 자못 효험이 있다고 한다. 비록 이것이 허탄한 일인 줄은 알지만 민망하고 박절한 중에 그대로 말수가 없어서 사람을 시켜 중을 불러다가 …
6. 죽은 딸의 백일기이다. 부인이 무당을 불러 이웃집에 자리를 차리고 징과 북을 치면서 굿을 했다. 분명히 그것이 허사인줄 알면서도 애통한 나머지 자애의 정에 쫒겨서 그대로 허락하고 금하지 않았다. 부인도 역시 친히 가서 무당의 말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왔다.
위의 인용문 가운데 1, 2는 오희문의 부인이 아픈 경우이고 3, 4, 5는 오
희문의 막내딸 단아의 병 때문이며 6은 죽은 막내딸의 백일을 기해 넋을
추모하는 행위이다.
오희문가는 집안에서 혹은 이웃집에서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고 중을
불러 독경을 하는가 하면, 종들 스스로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무속을 행하는 동기는 첫째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죽은 딸의 天道(천도)를 위한 행위라고 보여 진다.
그런데 오희문은 이러한 무속에 대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즉헛것인 줄 알면서도 금하지 않는다거나, 자애의 정 때문에 허락한다든가, 민망하고 박절한 와중이라 그대로 말수가 없어 행한다고 하였다.
이는 점복에 비하여 굿에 한해서만은 오희문 자신이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모습으로서, 불신해서라기보다는 士大夫家(사대부가)로서의 지체를 유지하려는 이중적인 잣대로 일정한 거리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瑣尾錄(쇄미록)』을 통해 살펴본 사대부가의 꿈ㆍ점복ㆍ굿에 관한 신앙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꿈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또는 꿈을 통해 앞일을 예견하고 또 바라는 것들이 꿈이라는 현상을 통해서 나타난 것으로서, 조선시대 양반사대부들이 가장 믿고 경계하는 일종의 심리적 현상이라고 보여진다.
오희문이 살았던 16세기나 지금도 꿈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갖는 것은 일반적인 것으로 교통ㆍ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의 꿈에 대한 생각과 기록들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포용된 일상 생활사였던 것이다.
점복은 맹인 김자순과 관상감직의 이복령을 통해 행해지고 있다. 개인의 신수뿐 아니라 관아의 일까지 길흉을 점쳐 앞일에 대해 두려움을 극복하려 했고 또 희망을 갖으려고 하였으며 당시의 분위기는 양반사대부가에 있어 점복행위만큼은 특별히 용인되고 있음을 추정하게 한다. 즉 양반사대부가 일반이 점복신앙의 소유자임을 오희문이나 함열태수 신응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행위는 오희문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는 않지
만 극한 상황에서 주로 여자들이 주관하여 행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사대부가의 무속에 관한 이중적 잣대로 흔히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성리학으로 무장되어 있는 합리주의자들인 것처럼 인식하지만 완전히 유교가 정착되지 않은 16세기 말의 양반, 오희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힘과 이성을 떠난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사항들, 즉 미래의 일ㆍ현재 겪고 있는 것에 대한 길흉에 관한 것에서는 꿈, 점복, 굿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VI. 『瑣尾錄(쇄미록)』을 통해 본 오희문가의 경제생활과 노비
1. 經濟生活(경제생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개월 전 1591년(신축년)11월 오희문은 장수현감으로
있는 처남 이빈과 영암의 누이동생, 그리고 영동의 外家(외가)를 방문하고 장흥ㆍ성주의 노비의 신공을 수취하기 위해 南行(남행)하게 된다. 이때 왜란을 만나 오희문은 처남인 장수현감의 도움으로 80여일을 산중에서 생활하였다.
이후 처자와 노모의 소식을 듣게 되고 그 해 10월 홍주의 계당으로 옮기지만 여의치 않아 다음해인 1592년 (임진년)6월 다시 임천으로 이주한다. 윤겸의 친구이자 관동에 같이 피난한 신응구가 임천에서 멀지 않은 함열 현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희문은 임천에서 4년간 관둔전과 타인의 토지를 병작하여 점차 생활이 안정되자 1597년(정유년) 어머니와 동생의 가족도 이주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식솔은 항상 10∼20명 정도가 되고 있다.
申應榘(신응구)가 퇴직하자 오희문 일가는 평강으로 이주한다. 이는 아들 윤겸이 평강수령이었기 때문이며 역시 평강에서도 토지병작과 누에ㆍ벌ㆍ닭을 치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오윤겸은 1599년(기해년)12월 평강현감을 사직하고 처가의 農所(농소)가 있는 결성으로 돌아간다. 이후 1601년(경자년) 정월에 윤겸은 홍문관 修撰(수찬)에 제수되고 마침 전쟁도 종결되자 1601(경자년) 2월 평강에 있던 오희문은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오희문의 피난시절 경제생활은 주위 친지나 지인들로부터 받은 食物(식물)과 奴婢(노비)의 身貢(신공), 그리고 竝作(병작)을 통한 所出(소출), 그리고 교환경제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거나 시세차익을 노린 원격지 교역으로 이익을 꾀한다.
그러나 초기 피난 생활은 하루하루 끼니를 해결하기에 바빴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제사를 모시거나 집안의 대소 행사를 치르기에도 힘이 들었다. 하지만 경제논리에 밝았던 오희문의 성향과 주위 지인들의 도움으로 점차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본장에서는 임천거주시기와 평강거주시기를 중점으로 오희문가의 경제활동과 16세기 사대부가의 경제의 중심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대부들의 경제활동은 비단 피란기라는 시대적 상황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 物品受贈(물품수증)
오희문은 피난기간 내내 인근의 지방관과 친인척들로부터 물품을 受贈(수증)받고있다. 수증품의 내용과 시기, 증여자와의 관계 등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선물교환의 성격을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비교적 전시기인 『黙齋日記(묵재일기)』와『眉巖(미암)日記(일기)』를 비교하여 관직에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수증관계의 시대적 변화를 유추하여 보고자 한다.
다음은 피난초기인 임진년과 계사년의 홍주와 임천 거주기 때에 수증한 물품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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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5 임진년 수증내용>
번호
|
수 증 품
|
증여자
|
수증일
|
기 타
|
1
|
말
|
이빈(처남)
|
9.28
|
高價(고가)
|
2
|
솜옷4벌, 무명저고리
|
이빈
|
10.5
|
|
3
|
술
|
좌수 손덕남
|
10.6
|
|
4
|
술,실과,닭,별감
|
박대복
|
10.6
|
|
5
|
꿩
|
좌수 박언상
|
10.6
|
|
6
|
술,실과
|
노비
|
10.6
|
장수에서 떠날때
|
7
|
곡식,나무
|
청양군수 임순
|
10.21
|
|
8
|
벼1섬
|
이익빈
|
10.22
|
|
9
|
각색 沈菜(침채)
|
윤내금봉
|
10.22
|
|
10
|
벼1섬
|
홍세찬
|
10.30
|
윤해
|
11
|
쌀2말
|
김자흠의 아내
|
11.2
|
|
12
|
찹쌀1말
|
정종경의 아내
|
11.2
|
|
13
|
쌀1섬,조기20마리,민어3마리,게3마리
|
홍주목사
|
11.7
|
홍주목사의
부인이오희문의
七(칠)촌 친척
|
14
|
쌀2말,담근게10마리
|
금정 찰방 김가기
|
11.14
|
|
15
|
벼1섬
|
보령 조한림
|
11.14
|
|
16
|
자리 한잎
|
김가기
|
11.17
|
|
17
|
쌀10두,참깨2두,건민어1마리,침도어20
개,숭어3묶음,감장3두,간장3,소금3되
|
병사 이옥
|
11,17
|
윤겸을 보고
|
18
|
거친벼 15두
|
이좌수
|
11.21
|
|
19
|
닭2마리,조기1묶음,떡1봉
|
부여관아
|
11.24
|
|
20
|
쌀2섬,콩1섬
|
공주목사
|
12.3
|
|
21
|
술1병,대추1상자
|
용곡 찰방
|
12.3
|
|
22
|
밥상,요,쌀22두
|
鄕所(향소)
|
12.4
|
|
23
|
떡1상자,소족1개술2병
|
이금이
|
12.5
|
|
24
|
술2병,감장2말,닭1마리,간장2되,참기
름1되,
|
定山所(정산소)
|
12.5
|
|
25
|
쌀9말,콩3말,팥2말,좋은
술1병,생치1마리,목미1말,감장2말
|
부여군수
|
12.5
|
송노(운반)
|
26
|
관자,찢어진 그물
|
오세량
|
12.8
|
|
27
|
조기1묶음,민어1마리,마초1바리
|
한효중
|
12.10
|
윤해가 결성에서,
청혼의사
|
번호
|
수 증 품
|
증여자
|
수증일
|
기 타
|
28
|
감장
|
찰방기공
|
12.12
|
윤겸을 보고
|
29
|
백미10두,콩10두,조기4묶음,게30개,
조기2묶음,감장1두,간장1두,참기름1되
|
홍주통판 황헌
|
12.14
|
|
30
|
말1필
|
찰방 김공중
|
12.14
|
|
31
|
생치
|
태안 유위장
조광림
|
12.16
|
|
32
|
쌀2두,목미2두,닭2마리,게10개
|
덕산태수 문몽원
|
12.20
|
|
33
|
말린 숭어3마리
|
덕산태수
|
12.22
|
윤겸의 편지로
|
34
|
술,안주,앵색떡,간장,김치
|
청양현 두응토리
|
12.24
|
|
35
|
쌀2말,콩2말
|
홍주 서주의 아내
|
12.27
|
춘희(운반)
|
36
|
벼10두,백미2두,콩2두,목미5되,찹쌀5되,
참기름1되,닭2마리
|
정산태수
|
12.28
|
막정(운반)
|
37
|
쌀8두,콩3두,팥2두,眞末(진말)4두,
목미1두2승,감장1말
|
부여군수 박동도
|
12.29
|
질손(운반)
|
38
|
쌀3두,노루다리 및 갈비,
조기1묵음,닭1마리,황각2두,간장 2되
|
결성가장 유택
|
12.29
|
윤겸의 친구
|
<표6 증여내용>
번호
|
수증품
|
수 증 자
|
수증일
|
기 타
|
1
|
벼15두
|
?
|
10.30
|
|
2
|
쌀1말5되,감장1사발,온만들 두꺼운
종이4장,짚신창 1벌
|
오세량
|
12.7
|
|
3
|
숭어1마리
|
예산 김매
|
12.22
|
|
4
|
술과 음식
|
청양현 두응토리
|
12.24
|
|
<표7 계사년 수증내용>
번호
|
수 증 품
|
증여자
|
수증일
|
기 타
|
1
|
정조30두
|
대흥 윤함의 처가
|
1.3
|
농장윤함의 장인 편지로,막정,말질손(운반)
|
2
|
둔조1섬,백미와 상미 각 서말,보리쌀
4말,말장5말
|
회덕군수 남덕실
|
4.5
|
윤겸에게도 보냄
막정(운반)
|
3
|
중미1석,총10두,조개젓1항아리,저린
숭어3마리,
|
보령군수
|
4.6
|
윤겸에게 줌
|
4
|
건어3마리
|
결성
|
4.6
|
금손(운반)
|
5
|
쌀10두,콩10두
|
대흥
|
4.9
|
신공
|
6
|
백미2두,중미5두,찹쌀1두,참깨2두,
들깨2두,참보리2두,팥2두,진말2두
|
공주목사
|
4.10
|
|
7
|
백미5두,중미5두,찹쌀5두,들깨5두,꿀3되,조기2묶음,소고기포2첩,소주2병,
말린,숭어2마리
|
통판 이간
|
4.10
|
|
8
|
백미 각각1섬,찰보리 각각1섬, 소금 10두,간장3두,건어 5묶음씩
|
부사의 공문으로
홍주,덕산
|
4.10
|
|
9
|
벼두섬,백미3두,콩2두,뱅어젖3되
|
보령군수
|
4.10
|
가이지집 보관
|
10
|
벼5두,보리5두
|
윤함의 처삼촌(대
흥)
|
4.12
|
|
11
|
광어 한 마리, 상어2마리, 오징어3마리
|
결성군수 김응건
|
4.12
|
|
12
|
부채2자루
|
언실
|
4.24
|
|
13
|
중미3두,간장3두,소금5두,찹쌀1두
|
병사 이구
|
5.2
|
송노(운반)
|
14
|
햇보리 조금,채소 한 바구니
|
驛吏(역리) 억룡
|
5.5
|
단오절
|
15
|
벼4두
|
이익빈
|
5.26
|
|
16
|
쌀1두,조기1묶음
|
함열태수 신응구
|
5.30
|
|
번호
|
수 증 품
|
증여자
|
수증일
|
기 타
|
17
|
쌀7두,벼9두,간장2두,조기3묶음,갈치
4마리,생선젖2동이,조개젖1항아리,남
자신한 켤레,여자신 한 켤레
|
함열태수 신응구
|
6.2
|
윤겸
|
18
|
거친벼10두
|
윤해의 처조카 최
진운
|
6.5
|
|
19
|
콩3두
|
대흥 태수 신괄
|
6.9
|
조한림의 환자 탕감
|
20
|
쌀 각각7두, 간장 각각1두
|
조도어사 이철
|
6.15
|
윤해,윤함에게
막정,춘기(운반)
|
21
|
쌀2두,보리쌀2두,팥1두,조기 한묶음,
간장1두
|
정산군수 김장생
|
|
윤겸친구
|
22
|
쌀2두,조기2묶음,간장2되,젓갈한되,감
장1되,소금
|
?
|
6.19
|
|
23
|
쌀12두
|
임천관아
|
6.20
|
죽은 아우의 아내,
네 아들 6인의 이름으로 첩지를 써서 얻음
|
24
|
보리20두,소금5두
|
부여현
|
6.20
|
|
25
|
空石(공석)2백장,벼10두,조기2묶음,장어10
마리,청어10마리
|
한산군수
|
6.20
|
첩지
|
26
|
쌀8두, 반찬거리
|
부여군수
|
6.21
|
임천이거
|
27
|
쌀 1두5승,반찬거리
|
조희보
|
6.23
|
윤겸과 교분
|
28
|
생성구운것,생성국
|
조희보
|
6.24
|
|
29
|
떡,생선구이,육탕
|
조희보
|
6.25
|
대상을 치른 후
|
30
|
보리2두,소금2두
|
부여 강증
|
6.25
|
춘기(운반)
|
31
|
백미2두,소금,위어2두름,조기4마리,새
우젖3되
|
함열군수
|
6.25
|
|
32
|
생선구이,육탕,계탕
|
조한림
|
6.26
|
|
33
|
농어1마리,조어1마리,위어10마리
|
함열군수
|
6.28
|
|
34
|
쌀10두,보리1석,진말2두,간장3승,미
역2동,소금1두,자리 한잎,馬鐵(마철)2벌,찹
쌀5되
|
함열군수
|
6.28
|
윤해
|
35
|
양색병,실과및 어육구이,양고기와 粘(점)
酒(주)한사발
|
조희보
|
7.1
|
|
36
|
黃鷄(황계)2마리
|
함열,조방직
|
7.2
|
안손의 처 이질
치료
|
번호
|
수 증 품
|
증여자
|
수증일
|
기 타
|
37
|
백미1두,중미1두오승,콩1두,조기1묶
음,쇠고기한덩어리,쇠고기포5조각,새
우젖1되,추로1병,감장,간장
|
함열
|
7.13
|
행자, 영암어머니
께
|
38
|
쌀6두,콩4두,소금1두,감장1두,닭2구,
건어2묶음,소주1병
|
검찰사 종사 김상
용
|
7.16
|
처족,윤겸 친구
|
39
|
백미2두,콩2두,기금과꿀 각1승,건숭
어마리,새우젖5승,보리가루3승
|
통판 이성남
|
7.18
|
윤겸의 처족
|
40
|
건숭어1마리,홍합5되,젖1항아리,적은
전복 5꾀미
|
영암누이
|
7.25
|
추석제수용도
|
41
|
쌀5두,콩6두,간장1두,소금7두,감태10
묶음,고등어5마리,미역7묶음
|
순찰사 이정암
|
8.27
|
술을 빚어 팔려함
|
42
|
건숭어1마리
|
임현
|
7.28
|
|
43
|
건숭어2마리,저린 고등어5마리,乾毛(건모)
致(치)5묶음,생선젖1항아리
|
영암누이
|
8.28
|
|
44
|
고등어4마리,미역3묶음,감태5묵음
|
어머니
|
8.28
|
|
45
|
갓모1
|
경흠(누이 남편 )
|
8.28
|
|
46
|
쌀1두,은절어1묶음,소전복1꾸러미
|
임자중
|
8.28
|
행자
|
47
|
백미3두,정미10두,콩10두,정조1석,건
숭어3마리,건민어3마리,쇠고기포10조
각,젖3되,감장1두,간장3승,각모1개,3
책부채3자루
|
나주목사
|
8.30
|
|
48
|
백미2두,중미3두,콩3두,목미1두,감장
1두,간장1두,참기름1승,생치1수,닭2
수,쇠고기포5조각,조기1묶음,안부채5
자루,백지1묵음,보리10두
|
장성군수 옥여
이귀
|
9.6
|
|
49
|
술과 과실
|
유공 원씨
|
9.10
|
|
50
|
쇠고기한덩이
|
임천태수
|
9.13
|
임면부 운반
|
51
|
벼10두,두부2덩이
|
조희식
|
9.17
|
|
52
|
백미5두,벼10두,콩4두,소금1두,찹쌀1
두,건민어2마리,국수5묶음,보리씨4두,
쇠고기두덩어리.
|
함열군수
|
9.17
|
|
53
|
백미2두,목미1두
|
부여군수 박동수
|
9.27
|
명복
|
번호
|
수 증 품
|
증여자
|
수증일
|
기타
|
54
|
즙장1사발,김치1그릇
|
이웃 늙은 아전
|
10.4
|
|
55
|
큰 홍시7개, 계란3판,녹두 3되,박1개
|
兵吏(병리)의 아내
|
10.4
|
|
56
|
감장1사발,각색김치
|
이웃 김대성
|
10.5
|
|
57
|
대추,밤
|
주인집 늙은 부인
|
10.4
|
|
58
|
사발2개,접시2개,종지2개,팥2되,생채
및 김치 조금
|
이웃사람
|
10.5
|
|
59
|
술과 대추 밤
|
주인 할미
|
10.5
|
|
60
|
접시4개,큰접시4개,팥3되
|
兵吏(병리)의 아내
|
10.5
|
|
61
|
벼3두
|
조좌수 윤공
|
|
|
62
|
쌀2되,팥2되
|
집주인
|
10.6
|
|
63
|
벼오두,조개젖
|
정사과
|
10.9
|
|
64
|
쌀2두
|
수주
|
10.9
|
|
65
|
쌀2두,새우젖2승,종이3묶음
|
함열
|
10.10
|
|
66
|
고기 한 채반 삶아보냄
|
임천 室內(실내)
|
10.10
|
|
67
|
찰떡
|
익산 경여의 처
|
10.12
|
|
68
|
참깨1두,생강3근
|
동서 이언좌
|
10.13
|
|
69
|
굴2되,침위어10개
|
임천 태수
|
10.14
|
|
70
|
저린게20마리,콩5되.소금3되
|
임천태수
|
10.14
|
편지로 얻음
|
71
|
간장1그릇,저린조기1마리,젓 조금,탕
육,고기구이, 및 젖,과 채소
|
임참봉 면부와 아
내
|
10.15
|
향춘
|
72
|
술한병,색떡 한그릇,삼색실과,두부구
이,삶은 닭 1마리,김치한그릇
|
김대성
|
10.17
|
|
73
|
콩2되,찰떡5개
|
주인할머니
|
10.19
|
|
74
|
벼2두,좁쌀1되,콩7되
|
집주인
|
10.22
|
|
75
|
쌀1두,콩3되,감장,간장각 1그릇
|
조희윤
|
10.23
|
향춘을 시켜 구걸
|
76
|
술1병
|
임참봉
|
10.27
|
|
77
|
어육구운것,채소
|
임천衙內(아내)에 가 있
는 오희문의 처
|
10.29
|
분개
|
78
|
찰떡
|
경여의 처
|
10.30
|
|
79
|
백미1두,버선지을 白木(백목)4척,자반 1그
릇
|
어머니
|
11.5
|
|
번호
|
수 증 품
|
증여자
|
수증일
|
기타
|
80
|
백미1두
|
아우 언명(희철)
|
11.5
|
|
81
|
건숭어2마리,고등어5마리,미역5묶음,
간장1그릇목화5근
|
임매
|
11.5
|
|
82
|
건숭어3마리,小脯(소포)3첩,기름과 꿀 각2
되, 眞末(진말)3두,참깨2두
|
나주통판 이성남
|
11.5
|
윤겸의 편지
|
83
|
백미1두,조미3두,콩1두,조기1묶음,돼
지고기1덩이
|
장성 이귀
|
11.5
|
|
84
|
쌀1두,닭2수
|
정사과댁
|
11.7
|
|
85
|
마른나무 한짐,감장 한 항아리
|
소즐
|
11.2
|
|
86
|
벼2석,콩1석,沈葦魚(침위어) 20마리,새우젖3
되,소금2두,참기름1되,누룩10덩이
|
함열군수
|
11.12
|
|
87
|
술병과 과일
|
백몽진
|
11.14
|
|
88
|
녹두1두,팥1두
|
윤겸의 종 개질지
의부
|
11.14
|
개질지
|
89
|
닭한마리
|
삼가댁
|
11.16
|
정사과댁 종편
|
90
|
벼1석,중미4두,콩2두,녹두1두
|
부여군수 박동수
|
11.17
|
개질지
|
91
|
팥죽2사발
|
집주인
|
11.19
|
|
92
|
벼10두,곡초1짐
|
유공선각
|
11.16
|
|
93
|
백미2두,젖1항아리
|
임천태수
|
11.20
|
향춘을 시켜 구걸
|
94
|
벼1석,저린게10개,조기1묶음,凍魚(동어)3두
름
|
한산군수
|
11.20
|
개질지
|
95
|
술1병,오색실과1상자,오색고기구이1
상자,쇠고기한덩어리,찹쌀1말
|
함열군수
|
|
윤겸처가집 비부
의 남편 옥지
|
96
|
쇠고기 두짝
|
임자순
|
11.23
|
|
97
|
벼10두,말장
|
조한림
|
11.25
|
|
98
|
정미26두,백미12두,조미2두,콩39두,
벼10두,저린게20마리,숭어2마리,동어
5두름,새우젖5되
|
여러 곳
|
11.27
|
윤겸구함
|
99
|
쌀3두,조기1묶음
|
임천태수
|
|
윤겸이 윤경운에
게 편지를 보내어
태수에게 청탁
|
100
|
정조1석,백미3두,콩5두,누룩3덩어리,
저린게10개
|
홍산군수
|
윤11.22
|
|
101
|
정어리10두룸
|
함열
|
윤11.14
|
|
번호
|
수 증 품
|
증여자
|
수증일
|
기타
|
102
|
새우젖1되,젖국물1항아리
|
한산군수
|
윤11.16
|
|
103
|
콩10두,벼1석,새우젖4승,누룩세덩이,
소금2두,常楮(상저)세묶음
|
함열군수
|
윤11.23
|
|
104
|
백미1두,중미3두,콩2두,조기한묶음,새
우젖2되,감장 ㆍ 간장 각2되,소금2되,미
역1동,청주1병
|
함열군수
|
12.7
|
행자
|
105
|
쌀과 콩 각1말
|
진안현감 정식
|
12.11
|
|
106
|
마초 및 쌀과 콩각1두
|
진안현감 정식
|
12.11
|
첩지를 써서 보냄
|
107
|
백미1두,두부콩1두,목미2되,삼색실과,
청주1병
|
진안현감
|
12.13
|
|
108
|
백미3두,정미3두,목미2두,찹씰1두,미
억1동
|
진안현감
|
12.16
|
행자
|
109
|
백미1두,중미4두,콩4두,간장2되
|
장성 이귀
|
12.29
|
|
<표8 증여내용>
번호
|
수증품
|
증여자
|
수 증 일
|
기 타
|
1
|
감주 1그릇, 국수
|
역리 억룡
|
5.5
|
단오절
|
2
|
저린갈치13마리,광어1마리,오징어4
마리,생조기1마리
|
결성
|
5.11
|
윤겸
|
3
|
새 갓모
|
결성 본관좌수
|
5.16
|
逃役人(도역인) 田畓立案(전답입안)
을 해주어 인사차
|
4
|
오미자
|
함열군수
|
7.1
|
안손(운반)
|
5
|
쌀2되
|
熟手(숙수) 영환
|
7.14
|
어마니 친족
|
6
|
간장
|
춘의
|
8.30
|
짐이 무거워 줌
|
7
|
쌀10두,콩1석,각모와 부채
|
아우 희철
|
8.30
|
|
8
|
조2되
|
변응익
|
9.18
|
|
9
|
임천아내에서 온 물건
|
이웃집,윤해집
|
10.29
|
|
10
|
소금5승,刀魚(도어)2마리,고등어1마리
|
소슬
|
11.8
|
|
11
|
馬草(마초)12묶음
|
백몽진
|
11.19
|
|
12
|
목미1두,찹쌀1두, 정미1두
|
이빈 처
|
11.17
|
|
13
|
정미1두
|
처서모
|
11.17
|
|
이상은 오희문의 가장 어려웠던 피난 시절 초기 임진년과 계사년의 受贈(수증)과 贈與(증여)의 관계이다. 이러한 선물교환은 호혜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동기에서 시작 된 것으로 양반상호간의 관행으로 보여진다.
우선 1592년(임진년)과 1593년(계사년)의 수증과 증여는 1592년(임진년) 수증 37건 증여4건, 1593년(계사년) 수증109건, 증여13건으로 오희문의 선물교환은 압도적으로 수증이 많이 차지한다.
초기 오희문에게 물질적인 배려를 한 사람들은 처남이었던 장수 군수 이빈, 공주 목사와 나주 목사, 부안 군수와 함열 군수, 홍성 군수를 비롯한 지방관들과 친지, 이웃들 그리고 아들 윤겸의 지인들이었다.
수증품은 곡물, 어물, 찬물류, 땔나무, 자리, 상, 접시 등으로 주로 구호식량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스스로 물자를 나눠먹기를 자처해 인정을 베물자가 푼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오희문이 지인을 통한 請託(청탁)이나 帖紙(첩지)를 써 還穀(환곡)을 타는 등 구걸에 의한 수증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안정기 때 보다 임진왜란이라는 위기상황으로 인하여 친족의 유대관계는 이완되었고 경제적 궁핍을 초래하여 수증관계 즉 선물교환은 훨씬 더 인색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는 임천 거주기나 평강 거주기 때에는 초기보다 선물수증이 비교적 활발하며 이를 바탕으로 오희문은 시장교환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1592년(임진년) 9월부터 12월까지 석 달 동안의 물품수증관계는 37건으로월평균 12회에 걸쳐 식물을 조달받았고 계사년도 월평균 9회에 달하고 있다.
오희문이 받은 물품은 아우와 아들, 어머니 등 다른 인척과 주위 이웃에게도 보내진다. 즉 초기의 수증관계는 스스로 물건을 주고받는 선물교환이라기 보다는 주변지인들을 통한 구걸과 청탁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직접적으로 본인이나 가까운 인척이 관료가 되어야만 쉽게 수증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이는 또 다른 수증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열쇠였다.
이를 구체적으로 임천 거주기와 평강거주기를 비교하여 그 수증관계를 표로 부석하여 보았다.
<표9 수증횟수>
전반기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1월
윤달
|
12월
|
1월
|
2월
|
3월
|
4월
|
계
|
월평균
|
임천
|
17
|
12
|
8
|
11
|
26
|
25
|
8
|
11
|
4
|
12
|
11
|
8
|
153
|
12.8
|
후반기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1월
|
2월
|
3월
|
계
|
월평균
|
평강
|
35
|
53
|
25
|
45
|
32
|
24
|
24
|
17
|
24
|
27
|
16
|
35
|
357
|
29.8
|
<표9> 는 1593년(계사년)6월부터 다음해 1594년(갑오년) 4월까지 임천 피난기를 전반기로, 1597(정유년)4월부터 다음해 1598년(무술년)5월까지 평강 피난기를 후반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임천 피난기는 전술한 바와 같이 지인들의 청탁을 통하여 수증 받는 구걸의 형태이고, 후반기는 큰아들 윤겸이 평강현감으로 있어 자연스럽게 수증 받고 있는 경우이다. 이는 관직과 경제생활이 밀접하게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러한 사실은 16세기 오희문의 『瑣尾錄(쇄미록)』보다 이전의 일기인 李文健(이문건)의 『黙齋日記(묵재일기)』와 柳希春(유희춘)의 『眉巖日記((미암일기)』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이들 사대부가의 경제생활에서 선물교환의 실제들이 보여 지는데 유희춘가의 경우 1567년 10월부터 1576년 7월까지 일상용품으로부터 사치품까지 다양한 물품을 각지 지방관이나 친인척으로부터 월평균 42.4회 주거나 받은 한편, 그 사이 물품을 구입하거나 제작을 의뢰한 것은 월평균 1∼2회에 불과하였다.
이문건가의 경우,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살펴볼 때 유배이전 물품 수증횟수는 시묘기간 4년 동안 지방관과 친인척 그리고 동료로부터 월평균 14.5회, 유배 기간 20년 동안 친분 있는 지방관으로부터 월 평균 33.3회 수증 받고 있다.
물론 유희춘의 경우는 관료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청탁수수도 한 몫을 하고 있어 이문건가보다는 수증횟수가 많은 편이며 오희문의 경우에는 시기가 임진왜란이라는 사회불안정기라는 점에서 볼 때, 그리고 주변의 인척들이 지방관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결코 적은 횟수라고는 볼 수 없다.
즉 당시 선물교환이 16세기 양반사족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실지로 오희문은
우리집 모든 식구들이 오로지 子方(자방)의 도움에 의지해서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가 벼슬을 그만두었으니 의지할 곳이 없으니 이 괴로움을 어찌하리오 … 윤겸이 바뀌어간 뒤로는 농작물도 반드시 여의치 못할 것이요 또 얻는 양식도 없을 것이니 필경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우리집 家勢(가세)가 말할 수 없다.
고 하였다. 즉 사위인 함열 태수 신응구가 사임하고 남포로 내려갔을 때와
아들 윤겸이 평강태수를 사임하고 농가가 있는 결성으로 내려가자 수증이 예전만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탄식한다. 이로써 관직과 경제생활이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외 오희문의 수입중에 노비의 신공이 있다. 오희문은 30여口(구)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안악, 문천, 장흥, 강진에 등지에 사는 외거노비 수는 24口(구)이고 5口(구)는 使喚(사환)되고 있었다. 즉 외거노비 24口(구)에서 오희문은 신공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오희문이 수취한 신공은 3∼4구에 불과하였다. 물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신묘년) 11월27일 노비의 신공을 받기 위해 떠난 南行(남행)에서는 성주와 장흥 등지에서는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공물을 받았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난 이후에는 신공을 제대로 받기가 어려웠다.
다만 장흥의 노비들의 공물을 거두는 일은 모두 一族(일족)의 役事(역사)를 칭탁하고 도망해 피해서 나타나지 않았고, 다만 계집종 무숭은 집에 있는데 그 아들은 의병으로 나갔고 혹은 水使(수사)의 군사로 나갔으며, 또 그 집은 불이 나서 다 타고 남지 않아 공물을 마련할 길이 없어 한 필도 받지 못하고 오직 타다 남은 깨 닷 되를 받아 가지고 왔으며 …
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혼란하여 신공을 받기 어려웠고, 또 이때를 틈타 도망간 노비도 있었다. 또한 신공으로 바쳤다고 하나이를 받은 노비는 오희문에게 바치지 아니하고 중간에 착복해버린 경우도 있으며, 받은 신공을 노비가 사사로이 쓰고 나타나지 않는 등 제대로 신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받았어도 규정량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던 같다. 살펴보면 장흥에 사는 婢(비) 무숭은 굵은 필목 2필과 깨 닷 되를 바쳤고 안악에 사는 婢(비) 복시는 세목 1필, 목화 4개를, 그리고 해주에 사는 親家(친가) 노비들이 貢木(공목) 2필과 포목 2필을 바쳤다.
즉 신공은 실지로 양이 적었으며 친가의 신공은 어머님 몫이기 때문에 실지생활에 보탬은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신공보다는 물품의 수증이 오희문 집안의 경제의 중심이었다.
(2) 竝作所出(병작소출)과 家內業(가내업)
오희문은 임천ㆍ평강등지에서 타인의 토지를 병작하고 官屯田(관둔전)을 경작하였다.
오희문은 1595년(을미년) 석성태수로 하여금 둔답을 경작하도록 임천 태수에게 말하게 하고 이를 승낙 받아 경작할 농토를 받아 둔답을 손질하고 씨를 뿌린다. 또 品人(품인)의 둔답 및 여러 사람의 논과 밭을 빌려 흙을 일궈 씨를 뿌리고 경작을 시도한다.
병작을 하면 필경 所出(소출)이 적어 후회할 것이라는 우려도 표명하지만 피난 이후 처음으로 농사를 지어 수확한 후 꾸준히 농사를 짓게 되는데 그가 얻은 소출 내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10 시기별 소출내용>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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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출량과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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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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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28년(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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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18석74두,콩8동,팥3동,율무14두4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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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8.27,9.15,10.1
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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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29년(1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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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2두6승,벼8석26두,콩7두2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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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
윤8.20,9.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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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30년(1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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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석(기장,조,피,콩보리,녹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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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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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31년(1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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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석 2두5승(보리,녹두,콩,잡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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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 12.그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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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32년(1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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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석14두5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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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 12.그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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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33년(1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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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석12두7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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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년 12.그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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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별 소출 현황을 살펴보면 1599년(기해년)이 所出(소출)이 가장 많다. 이어 1598년(무술년), 1597년(정유년)순이다. 이는 수증관계와 마찬가지로 1599년(기해년)과 1598년(무술년)은 오희문이 평강에서 수령인 아들의 도움으로 관둔전과 역전을 경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597년 (정유년)에도 비교적 완만한 소출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1595년(을미년)에도 관둔전을 경작하지만 병작으로 수확의 반을 나누어 받고 받은 소출도 품삯이나 종자비, 그리고 빌렸던 환곡을 갚고 나면 이미 소출은 바닥이 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평강 거주기에는 아들 윤겸(평강 태수)의 도움으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는 길이 멀다는 이유로 竝作經(병작경)3을 다른 이에게 주기도 한 예에서 알 수 있다. 즉 경작은 전술한 수증관계와 마찬가지로 경제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관직과 경제생활의 상관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외 오희문은 집에서 생산한 물건으로 경제적 향상을 꾀하려 노력한다. 즉 養蜂(양봉)과 養蠶(양잠), 養鷄(양계) 그리고 오희문의 아내가 만든 술과 行纏(행전) 등이 그것이다.
양봉을 하는 것은 당시 꿀이 고가품이었는데 한철 지낼 양식을 얻을 수 있
음은 물론이고 비상시 잉여 재산으로 축척할 수 있는 식품이었다. 양봉은 평강으로 이주한 1597년(정유년)에 시작하였으나 생산은 없었던으로 보이고 이후 1598년(무술년)에야 비로소 分蜂(분봉)이 시작되어 본격적인 양봉에 접어든다.
오희문가의 양봉에 관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600년(경자년)에는 분봉난 벌이 모두 11통이었는데 달아난 벌이 6통이어서 5통만 남았노라고 탄식하기도 한다. 1598년(무술년) 처음 꿀을 수확하게 되는데 어미벌 2통에서 꿀 9되와 밀랍 6량2돈을 생산한다. 즉 한통에서
4되 반씩을 거둔 오희문은 두 번째 나머지 3통에서 1말 반되를 생산하게 된다.
저녁 무렵에 3통에서 꿀을 땄다. 이것은 금년에 분봉된 것이다. 꿀은 1말8되였다. 전부 덕노에게 주어 목화를 바꿔 오도록 해야 하겠다.
라고 하여 평균 1통당 5되4홉의 꿀을 생산한 오희문은 겨울철 대비로 목화로 바꾸려 하였다. 이후 다음해 꿀 7통을 채밀해 5말6되를 생산한다. 그리고 서울로 들어오기 전해인 1600년(경자년) 채밀을 하게 되는데 이때 1통에서 1두 5승을 채밀하여 장모제사에 쓸 약과를 만들고 마지막 채밀에서 두통에서 1말9되 마지막 한통에서 5되를 생산해 1600년(경자년)에는 평균 8되 9홉씩 채밀한다.
오희문은 꿀을 생산해 곡식과 바꿔 나름대로 겨울을 지낼 계획을 세웠지만
소득이 너무 적어 탄식하며 양봉을 하면서도 이것이 양반이 행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이러한 常人之事(상인지사)까지 행하게 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다.
이렇게 얻은 꿀은 함흥에 보내져 팔게 되는데 그곳에서의 꿀 시세는 1말에
7필의 필목으로 계산되었고 가져간 6말의 꿀은 다시 측량하니 5말3되로 덕노는 포목 37필의 필목을 받아 온다.
당시 화폐로 사용되었던 필목은 오희문가의 다음해 (1600년) 경제생활의 자본이었으나 꿀 값이 생각보다 값이 싸게 쳐진 결과로 오희문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탄식해 마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살 때는 포목 2필로 꿀 1말4되를 사들인다. 그러니까 꿀을 팔 때 보다 살 때가 더욱 비싸 오희문은 시세차익을 노린 상행위에는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꿀은 물물교환 되었지만 당시 화폐인 銀(은)으로도 환산되었다. 꿀 2되에 은2돈을 받고 판매하였는데 이도 이윤을 남길 수 없었다. 즉 꿀 2되 값이 중간크기의 문어보다 싸다는 사실이다.
오희문은 양계도 하였다. 당시 닭 한 마리 가격이 쌀1斗(두)2升(승) ∼2斗(두)에 거래된다. 꿀에 비하여 가치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오희문의 경제관념은 철저하였다.
즉 奴(노) 春希(춘희)가 上京(상경)중에 몸이 아파 중간에서 며칠을 머물게 되자 오희문은 다른 무엇보다도 닭들이 오래 견디지 못하고 결국 죽게 될 것임을 염려하고 있으며 하루는 뒷집에 사는 진남의 어미가 닭 8마리를 잃고 울고 있자 오희문은 닭 값이 米(미) 16두에 해당하므로 마땅히 울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희문이 이렇게 농토를 경작하고 양봉과 양계로 살림을 꾸려 나갔으며 오
희문의 아내는 집에서 양잠을 하여 가계에 보탬을 주고 있다. 양잠은 집안 여자들의 몫으로 오희문의 처는 누에치는 것이 점점 번져서 거의 4멍석이 넘고 이렇게 친 누에는 23말의 고치를 따는 수확을 얻게 된다.
그러나 노비들도 자기 몫으로 누에를 치는 것에 열중하다 보니 “한 집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과다하게 쳐서 온 집안 노비로 하여금 누에치는 데만 전력하고 밭 갈고 김매는 일은 돌아다 볼 겨를이 없게 만들었으니 …라고 하여 오희
문의 온 집안사람과 노비들도 누에를 치느라 바빠 농사일을 등한시 하게 된 사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렇게 농사를 폐지하고 잠업에 전력했는데 누에를 쥐들이 다 갉아먹어 3분의 1밖에 남지 않아 통분하고 있다.
또 뽕 딸 사람이 없어 관노를 빌려 뽕을 따게 하기도 하지만 이 때문에 아에 누에를 치지 않기도 하였다.
이외 오희문의 집안 여자들은 술을 빚거나 떡을 만들어 혹은 行纏(행전)이나 沈隅(침우)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계에 보탬을 주고 있다. 당시 아녀자들의 경제활동도 한 몫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아들이 만든 행전을 이웃집에 팔아 벼 2두, 콩 3되를 얻었다든가 술을 빚어 놓은 것을 장에 가서 쌀로 바꾼다든가 베게모를 팔아 벼 8두, 콩 3두 5승을 얻었다는 기록은 집안에서의 아녀자들의 경제활동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생활은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오희문은 술을 팔아 쌀을 사려하기 때문에 술을 보고도 먹지 못하는 형편을 탄식스러워 했고 술을 팔아 쌀을 사러간 노비는 돈을 잃어버려 오히려 본전까지 손해를 보는 낭패를 겪기도 하였다. 이외 장에 내다 팔려고 떡을 쪘으나 비가 와 장에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과 떡을 먹어버려 5되의 쌀을 허비하고도 있다.
이렇듯 오희문은 竝作所出(병작소출)과 家內業(가내업)을 통하여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병작을 통한 소출 수입은 평강 피난기인 1599년(기해년) 소출이 가장 많았다. 이는 당시 아들 윤겸이 평강수령으로 있었기 때문으로 역시 관직과 경제의 상관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경작으로 얻은 소출의 대부분은 종자 값이나 품삯, 그리고 환상 값을 제하면 다음해 경작 때 까지도 끼니를 잇기가 힘들었으며 양봉이나, 양잠, 양계 그리고 집에서 안사람이나 여아들이 만든 행전이나 술등을 팔아 이익을 남겨보려 하지만 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瑣尾錄(쇄미록)』을 통해 16세기 양반이 벌을 기르는 과정, 술을 빚어 놓고도 마시지 못하는 심정, 그리고 이익을 남기고자 계획한 여러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는 그들의 일상이 흥미로우며 임진왜란 당시의 피난생활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다.
(3) 交換經濟(교환경제)
오희문은 임천 피난시절, 특히 1593년(계사년)을 전후한 해에는 심한 궁핍을 겪게 된다. 乞食(걸식)과 草根木皮(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하고 있으며 누룩과 쌀을 얻어 술과 떡을 빚어 장시에 내다 팔아 사는 형편이었다. 다음은 아는 사람이 없어 걸식도 힘들고, 또 앞으로 다가올 추위로 인한 걱정과 막막한 생계를 토로하고 있는 記事(기사)이다.
내 성질이 본래 졸해서 본래부터 생계를 경영하지 못하여 평시에도 오히려 처자를 보호하지 못하여 표주박의 밥도 여러 번 비었는데 하물며 이 난리 뒤에 타향으로 떠돌아 돌아봐도 힘입을 친구가 없고, 또 농장에 의지할 곳도 없이 이 땅에 의탁하고 있어 주림과 추위가 날로 박두하고 날로 심해지니 앞으로 또 몇 번이나 고초를 당할지 알 수가 없다. 한갓 한스럽고 탄식할 뿐이다.
이러한 와중에 오희문의 처는 家事(가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희문을 질책하고 이에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한다. 물론 신응구를 비롯한 인근의 지방관이 물품을 보내왔으나 이것만으로 10여명에 이르는 식솔의 생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사실 신응구도 오희문의 사위가 된 1594년(선조27년) 8월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물품을 제공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후 평강에서의 생활은 임천에서 보다 다소 有足(유족)할 수 있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아들 윤겸이 평강현감이기 때문이었다. 오희문은 주변의 친척과 지인으로부터 받은 물건의 대부분을 필요한 물품과 교환하고 때로는 時勢差益(시세차익)을 노린 원격지 교역도 시도한다.
본장은 물품의 교환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구하는 오희문의 商行爲(상행위)를 통해 오희문가의 경제생활의 성격을 파악하고자 한다.
초기 오희문의 물물교환은 주변의 친지로부터 받은 물품을 대부분 곡물류와 식품류로 교환하고 있다. 특히 보리를 많이 구매하고 있는데 이는 어려운 시기일수록 보리의 수요가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혹 內紬(내주)ㆍ 外紬(외주)와 같은 사치품도 있으나 이것은 일상에 필요한 것은 아니고 婚需(혼수)용이었다.
지방에서의 교환에 있어서 구매에 따른 지불수단은 곡물ㆍ어물ㆍ포목류ㆍ식품류 등으로 이와 같이 현물화폐가 주로 사용되는 것은 서울에서 銀子(은자)가 많이 사용되는 것과 구별되는 현상이다. 물품의 구매처로는 匠人(장인)ㆍ行商(행상)ㆍ船商(선상)ㆍ個人(개인)(隣家(인가))ㆍ寺刹(사찰)도 확인되나 대부분은 場市(장시)이다.
또 여기에서 확인되는 것은 수공업자의 상행위이다.
鍮器匠(유기장)ㆍ甕匠(옹장)ㆍ笠匠(립장)ㆍ冶匠(야장)ㆍ浮石寺僧(부석사승)은 장인으로 제작품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하였다. 특히 芒鞋(망혜)(짚신)는 부석사에서 구입한 것인데 부석사에서는 대량으로 짚신을 제작하여 판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목5필로 구입한 芒鞋(망혜)를 10필을 받음으로써 두배의 수익을 얻게 된 오희문은 다시 芒鞋(망혜)를 구입하고자 하나 많은 사람들이 芒鞋(망혜)를 구하러 부석사에 모여드는 바람에 더 살수가 없었다.
오희문의 교환매매를 담당한 이는 주로 오희문가의 노비들로 파악된다. 막정과 덕노는 대표되는 오희문가의 使喚奴婢(사환노비)로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물건을 운반하고 교환을 하며 실질적인 오희문의 손과 발이 되었다. 그 외 윤해와 윤겸의 奴(노)인 춘기와 개질지를 비롯하여 누이동생 남매의 奴(노) 덕룡 등이 오희문가에서 使喚(사환)되었고 양인으로써 허찬과 김언신 등이 오희문가를 위해 도움을 주고 있다.
사실 이들은 오희문의 지시에 따라 물건을 주고 사오는 商行爲(상행위)를하게 되므로 이는 오희문 자신이 하는 거와 다를 바 없다. 실지로 오희문이 장시일이나 물가, 예상수익 등의 정보를 미리 알고 이를 적절하게 지시하고 있다.
오희문은 지방에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생계를 위해 보리를 주로 구매하며
救荒的(구황적) 측면에서 교환매매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오희문가 奴(노) 光伊(광이)를 통하여 면포ㆍ의류ㆍ생활용구 등을 교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서울에서의 교역이 지방에 비하여 생활용구 등의 비중이 큰 이유는 1596년 이후 오희문은 평강으로 이주하여 다소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서울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다양한 물화가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구체적으로 오희문가에서 서울을 통하여 판매하고 있는 물품은 면포류 외에 皮郞笠(피랑립)ㆍ芒鞋(망혜)ㆍ虎皮(호피)ㆍ熊皮(웅피)ㆍ豹皮(표피)ㆍ鷄(계)ㆍ淸(청)(꿀) 등이 확인된다. 이러한 품목은 집에서 생산하거나 또는 수증 받거나 시세차익을 노려 사들인 품목으로 豹皮(표피)나 虎皮(호피),熊皮(웅피).淸(청) 등은 꽤 고가품에 팔리고 있다.
여기에서 서울과 지방이 비교되는 또 다른 점은 지방에서의 판매는 물물교
환거래였으나 서울에서는 물품가격을 銀(은)으로 받고 다시 銀(은)으로 물품을 구입하는 화폐경제라는 사실이다. 은이 사용되는 이유는 임진왜란으로 은의 유입이 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주 매매처로는 光伊(광이)가 사는 곳의 인근의 장시일 것으로 추정된다. 光伊(광이)는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춘 인물로 파악되며 이를 통해 신분과 경제력의 대등관계를 엿 볼 수 있다. 16세기 장시와 상업의 활성화로 양반이면서도 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비임에도 부를 축적하여 粟良(속량)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임진왜란이라는 특수상황을 전제함은 물론이다.
살펴보면 지방과 서울의 교환매매에 있어서 오희문가는 서울에서는 그다지큰 경제적 이익을 취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이는 지방보다는 서울이 구매자와 판매자가 많고 물품이 다양하여 이윤추구가 가능한 곳이겠지만 물품 교환의 품목이 다르고 거래규모가 작고 한정되어 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격지간의 시세차익을 염두에 두고 그 지역의 토산품이나 특산품을사서 다른 지역에 판매하는 상행위는 어느 정도 이익을 남겨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전근대사회에서의 이 같은 商行爲(상행위)의 필요조건은 직접적인 상행위의 당사자인 노비와 물건을 운반하는 말인데 오희문은 임진왜란이라는 불안정기에도 奴僕(노복)과 本錢(본전), 그리고 말을 투자하여 원격지 교역에 몰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원격지 교역에는 오희문뿐만 아니라 아들, 사위, 누이동생 등 그의 가족 모두가 참여하고 있다. 특히 아들 윤겸은 영동에는 생선과 미역이 몹시 귀해서 사온대도 필시 남는 것이 없고 도리어 손해를 볼 것이니 할일이 아니라고 하므로 그 계획을 중지하려 한다. 고 하여 말을 세내어 원격지 교역을 단행할 경우 잉여를 남기기 어렵고 거꾸로 손실을 입을 것이라고 하여 오희문은 그 계획을 중지한다.
오희문가의 상행위를 전술한 수증의 경우와 같이 표를 만들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11 임천과 평강에서의 상행위 수>
전반기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1월
윤달
|
12월
|
1월
|
2월
|
3월
|
4월
|
계
|
평균
|
임천
|
2
|
3
|
2
|
0
|
3
|
1
|
2
|
1
|
2
|
1
|
1
|
2
|
21
|
1.8
|
후반기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
월
|
1월
|
2월
|
3월
|
계
|
평균
|
평강
|
2
|
2
|
4
|
2
|
1
|
0
|
0
|
0
|
4
|
1
|
1
|
0
|
17
|
1.4
|
임천거주지와 평강거주기를 비교하여 볼 때 전반기(1593년 6월부터 1594년4월까지)인 임천 거주기가 후반기(1597년 4월부터 1598년 3월까지)인 평강거주기 보다 상행위 횟수가 더 많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대부분 곡류를 구입하기 위한 것으로 이익을 남기기 위한 상행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평강에서의 상행위는 오히려 줄어든 횟수인데 중요한 것은 평강 거주기 때는 본격적인 遠隔地(원격지) 교역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전반기는 1번의 원격지 교역밖에 없는 반면에 후반기에는 17횟수의 상행위중 8회의 원격지 교역을 단행한다.
즉 임천 피난시절 때와 평강 피난시절 때 오희문은 원격지 교역을 통하여시세차익을 노리고 상행위를 단행하는데 전술한 바와 같이 임천 거주 때는 1회에 불과한 반면 평강 거주 때는 8회의 원거리교역을 단행 하였는바 이는 평강에 그 아들 윤겸이 현감으로 있었기에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바탕으로 교역도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살펴보면 그 구매물품은 소금ㆍ어물ㆍ미역ㆍ목화ㆍ생마 등으로 대체로 그 지역의
토산품이다. 즉 충청도 황간ㆍ영동ㆍ온양ㆍ아산에서는 목화를, 강원도 고성ㆍ고원ㆍ통천ㆍ안변ㆍ이천ㆍ안협에서는 어물과 미역을, 그리고 황해도의 연안ㆍ해주 충청도의 사천ㆍ비인ㆍ남포ㆍ안면도 등지에서 소금을 구입하고 있다.
지불수단은 서울 이외의 지역은 현물화폐가 통용되고 있으며 가장 큰 교역은 꿀을 판매한 경우이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소규모로 원격지 교역에서도 시세차익은 제한되었고 용이하지도 않았다.
오희문의 경제생활을 이문건가와 유희춘가를 비교할 때 이문건가와 유희춘가의 경우 선물교환이 활발하였고 그보다 시기가 늦은 오희문가는 시장교환이 활발하다.
즉 16세기에는 장시 등 시장이 성장하는 추세였으므로 가장 후대에 살았던 오희문 집안에서 시장교환의 빈도가 높은 것은 당연하나 오희문도 아들이 관직에 있었을 때는 선물교환이 활발하였음을 前章(전장)을 통하여 확인하였다.
또 17세기 병자호란 피난일기인 남평조씨의 『丙子日記(병자일기)』의 경우에는 선물교환이 시장교환보다 활발한데, 피난기에는 안정기보다 상품유통이 활발하지 못했음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시장과의 접촉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18세기 이후 1725∼1761년 간 일기인 구상덕의『勝聰明錄(승총명록)』이나 1738년 황윤석의 『頤齋亂藁(이재난고)』등에 의하면 시장교환이 선물교환보다 활발하다. 물론 개개인의 특성과 기록 방식의 차이에 따라 세밀한 분석이 요구되지만 대체적으로 18세기 대부분 사족의 경제생활은 시장교환이 선물교환을 능가하였다고 보인다.
살펴보면 오희문은 임진왜란을 만나 고향을 떠나 유리하면서 경제적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심하였다. 하루 세끼 해결하기도 힘든 상황 속에서 구걸과 외상, 환곡 등으로 지내다가 함열 현감이 사위가 되고 또 그 아들이 평강현감이 되자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임진왜란이라는 불안정한 사회적 조건은 오희문가의 경제생활에 항상 부담을 주었고 생계유지책의 일환으로 상행위는 필요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사실 오희문가의 경제의 중심은 경작을 통한 병작소출과 물품의 수증에 있다. 물론 시세차익을 남기기 위한 원격지 교역이나 집에서 생산한 물품은 조금의 도움은 있었으나 부를 창출하거나 안정된 생활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瑣尾錄(쇄미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양반의 商行爲(상행위)이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사회적 특권을 가장 많이 누리고 있던 신분으로 경제적으로는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지주가 대부분이었고 유학을 업으로 하며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 관료 내지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던 신분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오희문은 직접 상업에 종사하지는 않았지만 노비를 시켜 원거리 교역 등의 상행위를 통하여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는 신분에 따라 사농공상의 직업을 가진다는 기존의 통념과는 다른 모습을 『瑣尾錄(쇄미록)』을 통해 확인되는 것으로 이는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양반도 상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을 제공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러나 오희문가가 피난 생활속에서 친지를 통해 물품을 수증 받거나, 토지를 경작하거나, 상행위 등을 통해 경제생활을 가능케 하였던 것은 무엇보다 理財(이재)에 밝고 經濟觀念(경제관념)에 투철한 오희문 자신의 개인적 성향 때문이다.
이는 양반사족임에도 불구하고 투절한 경제관념을 가졌다는 것은 16세기 양반의 또 다른 면모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사위와 아들이 현직에 있음으로써 이것이 용이하게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로서 당시 관직과 경제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一例(일례)를 보여준다 하겠다.
2. 奴婢(노비)
조선왕조 중기에 있어 노비는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다소간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全(전)인구의 30∼50%를 차지하였으며 전체 노비 가운데서는 私奴婢(사노비)가 절대다수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사노비는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조선왕조의 유지에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등 각종 자료에는, 노비가 양반사족의 手足(수족)에 해당한다든지 노비의 유무가 그들의 성쇠와 직결된다고까지 하였다. 즉 지배층이 노비획득이나 증식에 그처럼 철저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실제로 노비는 그 소유주의 사회경제적 기반으로써, 소유주를 위한 순수한 경제적 활동이외에 사치노비로서의 의미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본장에서는 사노비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瑣尾錄(쇄미록)』을 통하여 검토함으로써 사노비의 사회경제적 기능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좀 더 심화시켜 보려고 한다. 즉 사노비의 主家(주가)에 대한 의무와 역할은 어떠한 것이 있는지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를 통해 주가에 대한 의무이외 自己經理(자기경리)를 통한 성장은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노비의 이러한 역할에 대해 이를 바라보는 主家(주가)의 인식은 어떠한지를 살펴보아 15ㆍ16세기와 17ㆍ18세기의 역사 환경의 변화에 따른 主奴(주노) 관계도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자 한다.
(1) 솔거노비와 외거노비
① 솔거노비
솔거노비는 상전의 수족으로 主家(주가)로부터 받는 인신적 예속의 강도가 훨씬 높고 그것은 주로 각종 身役(신역)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家內使喚奴婢(가내사환노비)와 率下奴婢(솔하노비)로 나누어진다.
가내사환은 집안의 의ㆍ식ㆍ주에 해당하는 잡다한 일들을 도맡는 역할을 한다. 심지어 여건에 따라 유모가 되기도 하도 이들의 혼인이나 분가할때 따라가기도 하고 본가와의 연락을 위한 수행노가 되기도 하였다. 뿐만아니라 主家(주가)에서 직접 경영하는 농장 및 代田耕作(대전경작)에도 동원되었다. 이들은 노동노예로서 主家(주가)에 의해 부양되는 존재들로 독자적인 經理(경리)가 부정되지만 노동의 대가로 主家(주가)에서 받은 재물은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다.
『瑣尾錄(쇄미록)』에 보이는 가사 사환노비의 존재형태는 奴(노) 막정ㆍ송이ㆍ명복 ㆍ안손ㆍ춘기ㆍ말질손, 婢(비) 동을비ㆍ강춘ㆍ눌은개ㆍ어둔이 등으로, 이들은 각종 사환 및 가사노동뿐 아니라 主家(주가)가 경영하는 토지경작에도 동원되었다.
a-1. 또 8명으로 하여금 못다 맨 밭을 매게 했다. 이는 곧 6일 갈이이다. 식사후에 나는 덕노를 데리고 말을 타고 여러 밭을 돌아 본 뒤에 그 길로 노비 등이 밭 매는 곳에 갔더니 오전에 이미 다 매고 겨우 5, 6 묘가 남았을 뿐인데 모두 냇가 나무 그늘 밑에 누워서 자고 있다.
그 맨 곳을 보니 어제도 넉넉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을 매양 풀이 무성하다고 말하고 힘을 다하지 않았고 오늘도 또한 그렇게 말했으니 만일 여러 가지 사람을 일시에 내보내지 않았으면 오늘도 역시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까닭에 품을 얻어서 모두 8명을 보냈더니 누워서 쉬고 매지 않고 매양 이 모양인데 뜻밖에 내가 가서 보는 데도 오히려 먼저 습관을 밟고 있어 게으르기가 심하니 통분함을 이 길수가 없다.
즉시 두 계집종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다가 가졌던 채찍으로 종아리 40여 차례를 때린 후에 윤해의 집 팥밭을 매게 했으니 소비된 인원이 모두 29명이요, 양식 6 ㆍ 7두가 들었다.
온 집안의 궁색한 것은 따지지 않고 매양 먹는 것이 적다고 만 하여 들에 나가면 놀거나 쉬고 힘을 쓰지 않으니 더욱 몹시 밉살스럽다.
위의 기록은 노비들이 刈草(예초)에 힘을 쓰지 않고 태만하다고 주인에게 매 맞는 풍경이다. 즉 주인 오희문은 刈草(예초)에 소비한 양식과 인원을 따져 게으른 노비들에게 私刑(사형)을 가하는데 여기에서 가내사환노비들은 가내노동 외에도 솔하노비와 함께 주가의 농지경작에 주요한 노동력이 되었음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의 태만과 도망으로 인한 노동생산성 하락은 佃戶的(전호적)인 竝作半收制(병작반수제) 도입을 촉진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되기도 한다.
솔하노비는 主家(주가)의 인근에 거주하면서 주가의 농장경영에 주로 부역노동의 형태로 사역되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이 가내사환노비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은 가족을 구성하여 비록 제한된 형태나마 독자적인 자신의 經理(경리)를 위해 농업경영이 가능하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주가로부터 식량, 가옥, 토지, 기타 각종 생산도구를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으며 주가에 의해 사역되는 시간이외 남은 일부의 시간만을 이용하여 자신의 經理(경리)에 힘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a-2.올해는 우리 집에 뽕딸 사람이 없어서 누에를 치지 않고 다만 후임어미가 두어 자리 치는데, 이제 이미 섶에 올랐다. 계집종 銀介(은개) 및 德奴(덕노)의 처는 많이 치는데 역시 거의 섶에 오르게 되었다.
덕노가 보은에서 돌아와서 그 이튿날 뽕따는 일을 시작하여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와도 그 수고로움을 알지 못한다. 만일 상전의 일이라면 반드시 꺼려하고 원망도 많을 것이다.
a-3.들으니 윤겸의 집에 불이 낫는데……불이 난 원인은 계집종 莫終(막종)이 사사로이 관솔을 저축해 두고 밤마다 불을 켜고 일을 했는데 마침 잠이 든 자리에 붙어서 타기 시작했고 …… 이리하여 그 노비 등 여섯 집이 일시에 焦土(초토)가 되었으니 불쌍하다.
a-4.宋奴(송노) ㆍ 漢卜(한복)을 시켜 한복의 매지 않은 논을 매게 했다. 지난봄에 한복이 논을 얻어서 농사지어 먹고자 하므로 내가 얻은 屯畓(둔답) 五(오)두락을 농사짓게 했으나 힘이 부족하여서 이웃사람 大難(대난)이라는 자와 나누어 경작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대난과 나누어 짓는다는 말은 속였기 때문에 내가 그 말을 듣고 그 절반을 빼앗아 지었다. 하지만 대난이 이미 초벌을 맷기 때문에 品人(품인)의 환상곡으로 계산하려 한다
a-5.송노ㆍ 누른개ㆍ 복지 등을 시켜 전일에 못다 맨 율무밭을 매게 했더니 소나기가 때때로 내려서 다 매지 못했으니 한스럽다. 다만 율무밭 둑에 漢卜(한복)을 시켜 찰수수 1되를 심게 했더니 겨우 한 두둑을 심었는데 그나마도 씨가 드므니 필시 한복이란 놈이 훔쳐다가 제 밭에 심었을 것이다.
몹시 밉다. 대체로 우리 집 전답은 모두 한복이 씨를 뿌렸는데 생각건대 역시 훔쳐간 것이라 더욱 밉다.
사료 a-1, 2, 3에 의하면 오희문가의 솔하노비는 德奴(덕노)부부와 銀介(은개) 守伊(수이)부부, 漢卜(한복)과 江春(강춘)부부 등이며 윤겸의 婢(비) 막종이 이에 해당한다.
a-2, 3은 솔하노비들이 主家(주가)에서 가내사환뿐 아니라 농업경작에 사역되면서 그 여가를 이용해 독자적인 양잠, 직물수공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德奴(덕노)는 오희문가의 바깥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자신의 經理(경리)에 강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a-1의 상전의 일에 대한 노비들의 태만과 비교하면 좋은 대조
를 이룬다. 특히 漢卜(한복)은 a-4, 5에서 보듯이 그의 처 江春(강춘)과 더불어 主家(주가)에서 가내사환과 농작노동에 사역당하는 대표적인 솔하노비였다.
한복은 오희문에게 이러한 身役(신역)의 대가로 a-4에서 보듯이 일부 토지를 임대받아 독자적인 농작경영을 시도한다. 하지만 노동력 부족으로 이웃사람 大難(대난)에게 竝作半收(병작반수)하자 오희문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희문은 한복에게 주었던 경작권을 다시 빼앗아 간다.
a-5는 한복이 오희문이 빌려준 토지 말고 또 다른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소작료를 납부하는 본격적인 竝作半收的(병작반수적) 형태는 아니고 비어 있는 토지를 身役(신역)의 대가로서 主家(주가)가 생계보조로 빌려준 것이다.
그런데 a-4에서 한복은 主家(주가)에서 신역의 대가로 제공한 토지를 병작반수의 형태로 빌려주어 수취하려 한 것이 오희문에게 탄로 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농작 경작 외에 노비들은 주가의 명령에 의해 商行爲(상행위)도 하였는
a-6.어제 향춘이 시장에 가서 술을 팔아 쌀을 사려고 돈을 주머니에 가득히 넣었다가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우스운 일이다. 한 푼의 남는 것이라도 아껴서 그 부족함을 채우려 했더니 도리어 그 본전까지 모두 잃었으니 더욱 탄식스럽다.
a-7.덕노는 어제 왔으나 주어 보낸 바꿀 물건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팔지 못했다고 하니 몹시 밉살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 없다. 자기 물건은 모두 목화로 바꾸고 상전의 물건은 도로 가져왔으니 더욱 몹시 밉고 분하다.
더구나 또 올 날짜가 지나서 왔기 때문에 내 집일이 모두 낭패되고 이루어지지 못하게 했으므로 중하게 매를 때려 경계하려 했으나 만일 내가 노한 김에 때리면 반드시 중상을 입힌 뒤에라야 그 태만한 것을 조금쯤 징계하게 될 것이나 앞으로 심부름 시킬 곳이 많기 때문에 아직 참고 용서해 주었다.
a-6, 7의 경우는 主家(주가)가 노비를 시켜 상행위를 하고 있는 사례이다. 가까이는 婢(비) 향춘을 시켜 집에서 만든 술을 장에 팔아 돈을 보태 쌀을 사게 하고 멀리는 奴(노) 덕노를 시켜 木花反同(목화반동)219)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향춘은 돈을 잃어버리고 덕노는 자신의 經理(경리)에 바빠 상전의 일은 뒷전으로 물리고 있다. 이러한 상행위는 양반의 체면상 직접 물건을 사고 팔수는 없지만 主家(주가)의 자본과 계획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오희문 자신이 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내사환노비와 솔하노비는 상전이 직접 경영하는 농작경작에 있어서 중요한 노동력으로 동원되었고 상행위에도 사역되었다.
이에 主家(주가)는 그 代價(대가)로 토지를 임대해 주는 등 노비의 經理(경리)에 도움을 주고 있고 노비 또한 재산증식에 적극적이었다. 이 외 자신의 經理(경리)를 하지 않은 家事(가사)使喚婢(사환비)에게는 給料(급료)를 줌으로써 자기 생계를 유지하게 하기도 하였다.
② 외거노비
외거노비의 主家(주가)에 대한 경제적 의무는 奴婢口數(노비구수)에 따라 상납하는 身貢(신공)이다.
외거노비들은 그 토지소유형태에 따라 佃戶(전호) ㆍ 自作農(자작농) ㆍ 地主(지주)로 존재하였는데 대부분의 외거노비는 主家(주가)의 농장 토지나 타인의 토지를 경작하는 佃戶(전호)로서 독자적으로 가족을 구성하며 經理(경리)를 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主家에 대한 의무에 있어서도 각종 사역에 동원되어 신공을 면제받는 유형과 부역노동의 의무 없이 순수하게 신공만을 납부하는 전호로 나뉘어져 있다. 뿐만아니라 自作農(자작농)이나 地主(지주)로, 또는 상행위를 통한 富商(부상)으로 성장한 노비들도 나타나고 있다.
b-1. 종 막정이 장흥에서 돌아왔는데 겨우 계집종 무숭에게서 굵은 필목 2필과 깨 닷되를 받아왔고
b-2. 계집종 광덕의 남편은 … 광덕의 신공을 바치겠다고 광덕으로부터 편지를 가져 왔으므로 아침에 개질지로 하여금 편지와 말을 가지고 그 집에 보내어 백미 7두, 적미 3두, 마태 5두, 마초 30여 묶음을 받아 왔으니 근일동안은 걱정은 없겠다.
b-3. 춘이로 하여금 말을 가지고 대흥 윤함의 처가 농막에 보내서 보리를 가져오게 했다. … 春已(춘이)가 대흥에서 돌아왔는데 겨우 보리 5두를 가지고 왔다. 이는 곧 戶奴(호노) 애운이란 자가 徭役(요역)을 핑계로 주지 않더라고 하니 미운일이다.
b-1,2에서 살펴보면 당시 오희문의 외거노비에 대한 신공 내용이 밝혀져있다. 장흥에 거주하는 婢(비) 무숭은 외거노비로 신공 값으로 굵은 필목 2필과 깨 닷되를 바쳤으며 婢(비) 광덕부부도 역시 외거노비로서 백미 7두, 적두 3두, 마태 5두, 마초 30여 묶음을 바쳤다.
이처럼 신공을 바치는 이들은 외거노비로 일단 主家(주가)로 부터의 강제부역노동에는 자유로운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b-3의 경우처럼 일단 主家(주가)로부터 멀리 벗어나 사는 戶奴(호노) 애운은 요역을 핑계로 主家(주가)의 요구를 거절해 오희문을 흥분시키고 있다. 물론 전쟁중이라 신공을 피해 도망간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당시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적 요건도 작용했으리라 판단된다. 그러나 전술한 막정이나 송이도 외거노비였으나 어릴 때 主家(주가)에 捉喚(착환)되어 솔거노비로 사역되기도 하며 主家(주가)의 필요에 따라 부역노동에 사역되기도 하였다.
b-4. 어제 강 건너 종 광진과 계집종 저근개 등이 양식할 쌀 1두씩을 가지고 왔다. 우리집 밭과 논을 해먹는 사용료로 준비해서 가지고 온 것이다.
b-5. 평양의 죽은 종 막정의 전답은 이미 팔아서 … 아차도의 밭 반일 갈이는 암소 1마리, 집 앞의 삼밭은 포목9필, 밭 하루갈이는 아청2필과 포목6필인데 이 밭은 몹시 나쁘기 때문에 값이 적다고 한다. 논7두락은 포목2필, 아청, 천익 새것1은 포목5필로 계산했다.
또 밭 반일갈이는 묵어서 살 사람이 없다고 한다. 또 논2두락은 당초 팔 때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팔지 않았는데 마땅히 다시 막정의 형에게 물어 보겠다고 한다.
b-6. 안협 땅에 사는 연수가 벼1석, 콩10두, 중노루1마리, 꿩4마리를 가져왔기에 술과 식사를 대접했다. 연수와 덕손은 모두 私奴(사노)로서 부자로 사는 자들이다. 연수는 故(고) 참판 유희림의 종이요, 덕손은 판서 정창연의 종으로서 난리 후에 덕손은 가계가 모두 없어졌고 연수는 전과 같다고 한다.
b-4, 5, 6을 통하여 主家(주가)에 身貢(신공)만을 납부하는 외거노비들의 경제적 처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b-4의 奴(노) 광진이나 婢(비) 저근개 등은 자기 상전이 아닌 다른 상전, 즉 오희문의 토지를 병작하는 佃戶(전호)로 추측된다.
b-5의 막정은 전술한 바와 같이 외거노비이지만 捉換(착환)되어 죽은 후 자손이 없어 재산권을 주인인 오희문이 행사하게 되는데 막정의 재산은 약 2.5일간의 旱田(한전)과 7두락의 畓(답)을 소유하였는데 막정의 토지는 부모에게 상속받은 것으로 보여 진다.
따라서 막정의 가족은 적어도 자기 땅을 소유하여 경작하는 自作農(자작농)으로 보이는데 오희문은 논의하지 않은 막정의 재산에 대해서는 막정의 유일한 가족인 형과 상의를 해야 했다.
즉 외거노비인 막정의 가족은 자작농으로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갖춘 자작농이었던 것이다.
b-6 의 경우는 그 중 경제적 처지가 제일 나은 地主(지주)로 추정된다. 중앙관료의 외거노비인 私奴(사노) 연수나 덕손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으뜸가는 부자로 연수는 아들을 속량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신공을 바치는 외거노비도 佃戶(전호), 自作農(자작농), 地主(지주)에 이르기 까지 각각 경제적 처지가 다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16세기 사노비는 법제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주가에 종속되어 役(역)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거노비는 농지경작이나 상행위를 직접적으로 행하는 당사자로서 경험 축적과 부지런함으로 어느 정도 자신의 경리를 취할 수 있었고 외거노비의 경우에는 노력여하에 따라 지주가 될 수도 있었으며 경제적 부를 이용하여 신분상승도 가능하였다. 이는 임진왜란이라는 특수상황도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당연한 사실이다.
2. 오희문의 奴婢觀(노비관)
奴婢主(노비주)의 私奴婢(사노비) 인식은 양면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자기의 사유물인 노비를 인간적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사회경제적 효용성에 입각하여 使喚(사환)이나 身貢(신공)의 의무를 부과한 경우와 특별한 예외의 경우이지만 주노관계를 시혜의 대상으로 인식하려 한 경우이다.
이 두 가지 측면중 어느 것이 主(주)가 되었는가 하는 것은 개별적 奴主關係(노주관계)의 다양성속에서 간단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전체적으로 前者(전자)의 비중이 훨씬 컸을 것으로 생각한다.
본장에서는 主家(주가)로서의 오희문이 그의 婢(비)인 열금과 奴(노)인 막정의 병고와 죽음 그리고 매장의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16세기 양반가의 노비인식을 추론해 보고자 한다.
오희문은 전술한 바와 같이 신공을 미납한 노비에 대한 처벌은 물론 의무수행에 태만한 노비에 대해서도 처벌하였다. 『瑣尾錄(쇄미록)』에서 일관하고 있는 분위기는 상전의 입장에서는 노비들의 마지못한 노동력 제공이 늘 불만이었으며 그 때마다 처벌하고 싶지만 혹 부상을 입거나 죽게 될까 우려하여, 또 그만큼의 使喚(사환)이라도 시키기 위하여 억지는 참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이렇듯 使喚(사환)과 身貢(신공)을 강요했던 주인이 凶年(흉년)과 戰亂(전란) 등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자신이 거느리는 노비(솔거노비)의 생계는 커녕 생명마저도 보호해주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비들은 主家(주가)들의 식사에 필요한 곡식을 아끼기 위해 송피를 벗겨 식량에 보태기도 했으며 때로는 굶기도 하였고 형편에 따라 그 들 스스로 양식을 얻어 끼니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노비의 병환에서 사망 ,그리고 매장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그들에 대한 노비주의 태도가 어떠하였는지를 열금과 막정, 그리고 몇몇의 노비의 사례를 들어 검토하기로 하자.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다만 계집종 열금이 이 곳에 온 후로 허리 밑이 몹시 부어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여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니 가련하다.… 열금은 사삿집에 나가 있다가 뒤에 종과 말을 보내서 데려갈 계획이다.
나이가 일흔이 다된 늙은 婢(비) 열금은 부종을 얻어 여행길에서 같이 오지 못하고 사삿집에 있다가 두 달이 다 된 후 오희문의 집에 돌아온다. 그러나 점점 병세가 심해져 토옥에 거쳐하며 토옥에 들어가 거쳐하면서도 오직 음식만은 평시에 비교해서 가감이 없고 술과 고기를 요구하다가 조금 마음이 여의치 못하면 문득 분한 말을 한다니 말할 수 없다.
조석 미음도 오히려 계속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감히 술과 고기를 준비하여 죽어가는 늙은 종에게 줄 수 있는가? 병이 위중하나 만일 속히 죽지 않으면 우리 집에 해를 끼치는 것이 많겠다.
전란으로 인해 곡식이 부족하여 죽도 먹기 힘든데 늙은 종은 먹는 것은 줄지 않고 오히려 酒肉(주육)을 원하니 병이 비록 위중하나 일찍 죽지 않으면 집에 해를 끼치겠다하여 빨리 사망해주었으면 하는 오희문의 솔직한 심정을 담고 있다.
3일후 열금이 사망하자
지난밤에 늙은 종 열금이 죽었다. 병세가 몹시 중해서 형세가 구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래 찬 곳에서 거처했고 음식도 또한 배불리 먹지 못했고 비록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구할 길이 없어서 하나도 얻어먹지 못하고 죽었으니 불쌍하다.
성질이 본래 험악해서 조금만 여의치 않아도 문득 노해서 욕하고 심지어 상전 앞에서도 또한 불공 한 말을 많이 해서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미워했으니 비록 죽었어도 아까울 것이 없으나 다만 젊었을 때 잡혀 와서 심부름을 하면서 나이 칠십이 지나도록 한번도 도망해 달아나지 않았고 또 길쌈을 잘하고 집안일에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조금도 속이는 일이 없었으니 이는 족히 취할 바이다. 그런데 타향으로 떠돌다가 죽는데도 제자리를 얻지 못했으니 더욱 슬프고 탄식스럽다.
비 열금의 죽음에 대한 오희문의 최종평가는不昔(불석)이란 표현이다. 즉 ‘비록 죽었으나 애석하지 않다 라는 뜻으로 애석한 것은 단지 어릴 때 데려와 使役(사역)했는데 나이 70이 넘도록 한번도 도망하지 않았으며 또 紡績(방적)을 잘 하였고 집안일을 근면 ㆍ 검소하게 하였으며 조금도 속이는 일이 없었으니 이런 것 들은 취 할만 하나 타향에 떠돌아다니는 처지여서 관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오희문은 노비에 대하여 인간적인 면보다는 죽은 婢(비)의 사회경제적 역할과 상전에 대한 복종에 대하여만 최소한의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열금은 사망한 바로 다음날 매장한다.
두 종과 이웃집에 있는 피난민 한복을 시켜서 열금의 시체를 져다가 여기에서 五(오)리 떨어진 한산으로 가는 길가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오희문은 奴(노) 2인과 이웃집에 사는 피난민 漢卜(한복)으로 하여금 새벽에 열금의 시신을 들것에 얹어 5리 밖에 떨어진 한산의 길가 양지바른 곳에 매장하게 했다.
양인의 경우 대체로 3일장으로 최소한의 장례절차를 거친다고 생각되지만 열금은 그 가족과 일족이 떨어져 상전에 예속되어 산다고 하더라도 그 종말이 매우 초라하다. 평생을 使役(사역)해 주었지만 주인은 현장에 가지도 않고 棺(관)도 없이 들것에 운반되어 길가에 묻혔던 것이다.
물론 이 상황은 피난중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노비에 대한 주인의 보편적인태도로 보여 진다.
다음은 오희문가의 奴(노) 막정에 대하여 살펴보자. 막정은 오희문이 37년 동안 부린 家事使喚奴婢(가사사환노비)로 집안일은 물론 바깥일을 도맡아 한 노비였다.
막정도 수일 이후로 병세가 몹시 중해서 음식을 아주 끊었다고 하니 필시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다. … 그러나 덕노는 휴가를 얻어 멀리 갔으니 만일 며칠새에 죽는다면 집에 한사람도 없어서 염하고 묻을 일을 시킬 사람이 없으니 몹시 걱정이다.
막정은 집안의 大小事(대소사)를 도맡아 해온 충실한 奴(노)였음에도 불구하고, 막정이 죽음에 임박하자 묻을 사람이 없어 오희문이 걱정하는 기사이다. 3일 후 막정이 죽자 함열에서 급히 온 희문은 막정이 죽은 그 이튿날 말 2필을 빌려 正木(정목) 半疋(반필)과 쌀 3두로 관을 사오게 하고 벼 2두를 가지고 관에 쓸 못을 사오게 하는 등장례를 준비한다.
덕노 한복을 시켜 또 이웃사람 세 명과 함께 막정을 집 앞 수산도 남쪽가 向陽(향양)한 곳에 매장하게 하고 또 허찬으로 하여금 가보게 했다. 막정은 본래 평양에 살았는데 나이 十四歲(십사세)에 잡아다가 심부름을 시켜 이제 三十七(삼십칠)년이 되었다.
그동안 여러 곳에 사는 노비들에게 收貢(수공)하는 일과 자식들 혼인 때 구걸하는 일까지 도맡아 하고 조금도 지체하거나 태만하여 기일에 대지 못한 일이 없었으며, 내 처자가 난리에 도망 다니는 중에도 저를 의지하고 일을 맡겨 해 오더니 지난해 이후로 명령을 순종하지 않은 일이 많고 조금만 불쾌하면 문득 도망할 생각을 하여 금년에는 더욱 심했다.
그 뒤에 제 아내 粉介(분개)가 도망간 뒤로는 원망을 상전에게 돌리고 더욱 집안일을 돌아다보지 않으며 명령을 쫒지 않아 심지어 말에게 꼴을 먹이는 일도 항상 돌아다 보지 않고, 양식을 보자기에 싸서 자리 곁에 두어두고 달아날 계획을 한 것이 하루에 생긴 일이 아니나 병으로 인해서 行步(행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 여기 머물러 있던 것이다.
…근래 제가 한 일을 생각하면 비록 죽어도 아깝지 않지만 전에 애쓴 일이 몹시 많았고 또 타향에서 객사했으니 눈물을 금할 수 없다. 이에 관을 준비하여 매장하고 술과 실과를 갖추어 제사지내 주었다.
莫丁(막정)은 14세에 使喚奴婢(사환노비)로 들어와 37년을 主家(주가)(오희문)에 복종하여 51세에 죽은 奴(노)이다. 막정이 하는 일은 노비의 신공을 받는 일과 철이 되면 목화반동을 하러 나가거나 아이들 혼인 때 필요한 물자를 구걸하는 등 집안의 안팎의 일을 두루 하면서도 속이거나 거짓이 없는 부지런한 奴(노)였다. 그러나 말년에 아내 분개가 도망한 것이 상전의 잘못이라 생각하고 늘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병들어 죽게 된다.
오희문은 막정의 公(공)을 생각하여 관을 준비하고 사람을 시켜 매장하고 있다. 그리고 5년 후인 1600년(경자년) 12월15일 막정이 죽은 날 밥을 지어 제사를 지내준다. 이유는 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막정이 죽은 이후 오희문은 막정의 재산을 취한다. 즉 자손이 없는 막정의 재산은 상전인 오희문이 가져가게 되는데 막정은 상당한 재산가였다.
평양의 죽은 종 막정의 전답은 이미 팔아서 포목 20필, 아청 2필, 아청 새것과 새천익 1개 그리고 황소1마리를 받았는데 소는 아직 그곳에 머물러 두어 먹이고 그 나머지 물건은 지금 온 종에게 보내 왔으니 몹시 기쁜 마음을 어찌 이루다 말하랴.
막정의 전답을 함열 자방이 포목 20필과 아청 2필, 천익 1개, 소 1마리를 받아 처분하고 소를 제외한 물건을 가져오자 오희문은 그 기쁨을 이루다 말할 수 없을 만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살아서는 상전에 몸을 바치고 죽어서는 애쓰게 모은 재산까지 헌납하니 공이 있는 노비가 아닐 수 없다.
열금과 막정의 죽음에 대한 오희문의 심정이나 매장과정에는 비슷한 점이
많다. 노비의 죽음에 不惜(불석)이라 표현한 것이다. 즉 아깝지 않다는 표현인데 열금은 곡식도 없는 상황에서 먹을 것만 축내고 원망의 말을 많이 하므로, 막정은 그의 처가 他奴(타노)인 宋奴(송노)와 눈이 맞아 도망간 후 주인에 불복종하고 일을 태만히 하여 도망갈 궁리만 하였다는데서였다.
매장에는 3∼5인을 시켜 들것으로 운반하여 장지에 갔으며 주인은 날씨가 춥다는 이유로, 그리고 양반신분이라는 이유로 현장에 가지 않고 종이나 이웃사람을 시켜 매장하게 한다.
매장도 열금은 죽은 다음날 하였고 막정은 3일장을 하였으나 일체의 장례절차가 생략된 것이었다. 다만 열금과 막정은 어릴 때 捉來(착래)되어 장기간 오희문의 집에 使喚(사환)되어 있으면서 노고가 많은 점은 인정하고 있다.
특히 막정에 대해서는 棺(관)과 酒果(주과)를 준비하였고 제사를 지내주었다는 점이다. 물론 공이 있고 자손이 없는 노비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준 적은 있는데 특별히 막정만은 제삿날을 기억하여 지내주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시대 主奴(주노)의 관계는 귀천의 구별을 명백히 하였던 바 유교적 측면인 君臣(군신) ㆍ 父子(부자)의 윤리는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사회 경제적 봉사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만 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도 외거노비의 경우에는 이러한 조치마저 거의 취하지 않았고 외거노비는 집단으로 거주하는 一族(일족) 내지 같은 마을에 사는 주민들의 相互扶助(상호부조)에 의해 해결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서 사노비주의 경우는 대개 자기 노비를 재산으로 보고 경제적 이윤
획득을 위해 자신의 생활에 편의를 제공받기 위해 부렸으며 主奴關係(주노관계)는 엄격한 上下關係(상하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도움을 받은 노비에 대하여서는 마음으로 부터 감사하며 무언가 보답을 하려 했고 노비가 병이 나면 의원을 불러 병을 낫게 하고 가족을 만나게 하는 등 인간적 배려도 하였다. 또한 처참하게 죽은 가까운 노비에 대하여서는 진정 마음속으로 슬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적 배려는 감정에 한하였고, 이성적으로는 노비를 인격체로 보아 시혜를 베푼다기 보다는 다른 한편으로 노비를 적절하게 이용하기 위한 懷柔(회유)나 善心(선심)인 듯싶다.
그렇다면 당시 奴(노)의 主家(주가)에 대한 인식은 어떠하였는지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살펴보자. 물론 막정과 같이 충실한 奴(노)의 예는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
전술한 최인세의 아내나천복의 어미의 경우는 先代(선대)로 내려오는 종으로 직접적으로 오희문가와는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으나 오희문의 모를 제 상전 모시듯 하며 섬겼고 윤해의 종 春已(춘이)는 主家(주가)의 명령에 의한 收貢(수공)이나 商行爲(상행위)도 충실히 이행하는 등 비교적 상전에 대하여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상전에게 갖다 주어야 할 양식을 가지고 도망한 경우도 있으며 사사로이 상전의 물건을 훔치거나 중간에서 착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전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불손한 말로 대들어 상전에게 매 맞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기 일에 바빠 상전의 물건은 바꿔오지 못하는 경우 등 주가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만은 하지 않았다.
이는 양반에 대한 일반적인 피지배층 신분의 반감이 기본적인 주류이나 전술한 양반들의 노비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상전이 먹
을 것이 부족하면 노비들은 굶었고 노비 스스로 양식을 해결하여야만 하였
다.
주인의 이름으로 빌린 還穀(환곡)을 노비에게 주었을 때는 노비가 이를 갚어야 했고 노비가 도둑질할 경우에는 그 가족이 대신 갚아야 만 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원칙은 맹목적인 主家(주가)에 대한 충성대신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노비도 經理(경리)를 통해 생계유지가 절실했고, 필요에 따라서는 상전의 일은 뒤로 물려야 했으며 도둑질과 도망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점차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으면서 18세기 사료인 이희성대의 고문서 의하면, 주가들은 노비와 계를 맺어 경제적으로 상부상조하는 예가 나오는데, 이는 18세기 주노관계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엄격했던 16세기 주노관계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노비의 도망과 신분 상승으로 말미암아 사회 경제적 이완을 겪다가 18세기 이후 신분 예속적 주노관계는 차츰 경제적 측면에서 변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V. 『瑣尾錄(쇄미록)』에 나타난 牧民觀(목민관)
본장에서는 오희문의 기록인 『瑣尾錄(쇄미록)』에서 보이는 오희문가의 교육과 임진왜란 시의 과거제도 시행에 관한 일면, 또 그의 아들 允謙(윤겸)과 그 주변 인물들의 수령직 수행에 대한 사례들, 즉 수령의 임명, 수령의 직무, 수령에 대한 청탁, 수령파면 등 제반적이고 구체적인 모습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임진왜란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는 관료생활이나 과거제도의 실시 등이 평소 안정기와는 다른 상황 아래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겠지만 그 실질적인 모습들을 오희문의 눈을 통해 보여진 제도의 운영과 실태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敎育(교육)과 科擧(과거)
먼저 오희문의 師承(사승)관계와 그 자녀들의 교육에 대하여 살펴보자.
『瑣尾錄』에 의하면 오희문은 어린 시절 줄곧 외숙과 함께 살았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렇다고 외숙으로 부터 글을 배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그의 외숙이 무과출신이기 때문에 학문에 다소 소양이 부족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며 특히 외숙이 수령으로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자신이 수령으로 부임하였던 고을의 선비에게 글을 배우도록 주선하였을 가능성은 높다. 실제로 그의 외숙이 보성군수로 부임하였을 때 오희문은 그 고을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생원 任希重(임희중)(1492∼?)에게 수학한 바 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의병장 임계영의 집은 산양(보성의 별호)에 있다. 내가 외종형인 남자순형과 함께 삼촌을 따라 산양군에 가 있을 때 그와 교분이 두터웠고 나 또한 그의 아버지인 생원 임희중으로 부터 글을 배우면서 보아왔기 때문에 지금 만나니 자못 옛 생각이 난다.
위의 記事(기사)는 선조 25년 (1592)9월19일 오희문이 임희중의 아들인 의병장 林啓(임계)을 만나고 기록한 글이다. 글 내용으로 보아 임희중은 오희문의 스승이었음이 확인된다.
이외 오희문이 또 다른 학자로부터 修學(수학)했다고 추정 되는 기록이 있다.
조희윤은 小名(소명)이 희무였으나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곧 나와 同門修學(동문수학)하던 어릴 때 친구이다. 서로 만나지 못한 지가 三十(삼십)여년 이었다가 오늘 뜻밖의 만남이 이루어져서 서로 얼굴을 몰라보다가 각각 성명을 말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라고 하여 오희문이 20세 전후에 같이 수학하던 희윤을 충청도 임천에서 피난도중 만나게 되는 기록이지만, 위의 내용에서는 이들의 스승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보성의 임희중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조희윤과는 서울에서 수학했기 때문에 이들의 스승도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바로서는 오희문의 아우 희철이 서울 泥峴(니현)에서 살았던 李廷馣(이정암)(1541∼1600)의 문하생이라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학문증진을 위해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대개 조용한 山寺(산사)를 찾아가 공부에 몰두하는 방법도 견지하였다. 즉 오희문도 한때 도성사라는 절에 들어가 공부하였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보이며 오희문뿐 아니라 오희문의 아들 윤해, 윤함과 윤성도 역시 절에 올라가 공부하였다.
이 같은 교육방법과 아울러 자제나 손자, 친척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의 자제들은 집에서 직접 가르쳤다. 아래의 記事(기사)는 희문이 조카인 심열에게 글을 가르쳤던 사실을 알게 하는 기록이다.
심열의 어미는 곧 나의 누이이다. 그는 태어나 10세가 되던 해에 어미가 죽자 조모의 집에서 자랐다. 그가 나에게 와서 글을 배우면서 우리 아이들과 여러 해 함께 거처하였기 때문에 조카보기를 내 자식같이 하였는데 이제 蔭職(음직)으로 좋은 벼슬에 올랐으니 온 집 안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였다.
라고 하여 조카를 집에서 직접 가르쳤는데 아마 이때 그의 아들들에게도 글을 가르쳤던 것으로 보여 진다. 또 피난도중 간절히 책을 읽고 싶어 하는 딸들에게도 『諺解小學(언해소학)』과 『諺解漢楚演義(언해한초연의)』등을 구해주거나 둘째딸에게 베끼도록 한 것을 보면 딸들에게도 집안에서 교육을 시켰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밖에도 오희문이 임천에 거주하던 1595년(선조28) 4월에는 당시의 집 주인인 최인복의 아들 최연에게 1596년(선왕29) 10월에는 인근에 거주하는 성민복의 아들에게 그리고 오희문의 손자인 충아에게 史略(사략)을 가르쳤다.
오희문은 윤겸, 윤해, 윤함 세 아들들의 교육을 당시 성리학자로 유명했던牛溪(우계) 成渾(성혼)(1535∼1598)에게 보내 수학하게 하였다. 우계는 1593년(선조26)에 海州(해주) 石潭書院(석담서원)에 있으면서 오희문과 윤겸에게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묻기도 하였으며 이듬해에 윤함이 해주로 돌아가는 길에 오희문은 그 편에 우계에게 답장을 보낸다.
윤겸은 우계와는 각별한 師弟之間(사제지간)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문과에 급제한 후 바로 우계를 찾아보았으며, 우계의 부음을 받고 장례에 참석하기 위하여 평강에서 파산으로 곧장 달려가기도 하였던 사실에서 알 수있다.
조선시대 과거에는 소과ㆍ 문과ㆍ 무과ㆍ 잡과의 네 종류로 구별되어 있었으며定期試(정기시)와 否定期試(부정기시)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3년에 한 번 실시하는 식년시가 기본이었으나, 수시로 실시된 부정기시는 增廣試(증광시)ㆍ 別試(별시)ㆍ 謁聖試(알성시)ㆍ 庭試(정시)ㆍ 春塘臺試(춘당대시) 등이 있었다.
이 중 식년시와 증광시는 소과·문과·무과·잡과가 모두 열렸으나, 별시·알성시·정시·춘당대시는 문과와 무과만이 실시되었다.『瑣尾錄』에는 부정기시인 별시와 알성시, 정시 그리고 정기시인 식년시의 시행에 관한 기사도 보여 진다.
오희문이 바라본 과거의 실태를 오희문의 아들들과 그 주변 인물 그리고 主(주)를 이루는 아들 윤겸의 기사를 통해 살펴보겠다.
우선 무과의 경우 임진왜란이라는 국가비상시기이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무과 입격자를 내어 군대에 충당하여 왜군과 싸우게 하였다.
갑오년 2월의 기사에 의하면 전주에서 무인을 선발하는 과정을 적고 있다.
전주에서 廷試(정시)를 보아 무인을 선발하였는데 쇠화살 五矢二巡(오시이순)에 두 번 맞힌 자와 騎射(기사) 一(일)차에 두 번 맞힌 자 이상을 뽑아 一千七百八十二人(일천칠백팔십이인)을 얻었다 한다. 그리고 이 군에서 참여한 자도 또한 三十七人(삼십칠인)이라 한다. 다만 居喪(거상)중에 있어 장사를 지내지 않은자가 많이 입격했다고 하니 탄식스러운 일이다.
라고 하여 아주 가벼운 절차를 거쳐 一千七百八十二(일천칠백팔십이)인의 무인를 뽑고 있으며 전주에서만 37명이 응시를 하였고 상중에 있는 사람도 합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살펴보면 과거제도 응시자격에는 다음과 같은 제한이 있다. 부모의 상을 당하거나 承重孫(승중손)이 조부모의 상을 당한 자는 3년상(만2년3개월)이 끝날 때까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으며 초시 합격자가 상을 당하였을 경우 거주지 수령의 공문을 받아 예조에 제출하면 다음의 복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규정이다.
오희문의 눈으로 볼 때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비상시에 많은 무인들을 뽑을 수밖에 없지만 당시 居喪(거상)중에 장사도 지내지 않은 자가 입격하였음은 유교적 인식아래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또한 오희문은 소년시절 친구인 안사눌이 여러 번 낙방 끝에 정시에 합격한 소식을 듣고 늙어서도 뜻을 게을리 하지 않고 과거만 있다면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쫒아가서 시험을 치러 마침내 이름을 얻은 것을 보고 무척 기뻐하였다.
그러나 방을 부치는 날 간원의 보고에 의하여 합격이 취소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유는 수험생은 시험지 머리에 본인의 官職(관직)·姓名(성명)·年齡(연령)·本(본) 官(관)·居住(거주), 父(부)·祖(조)·曾祖(증조)의 官職(관직)과 姓名(성명) 및 外祖(외조)의 官職(관직)·姓名(성명)·本官(본관)을 다섯줄로 쓴 다음 그 위를 종이로 붙여 봉하게 하였는데 불행히도 安士訥(안사눌)은 주소를 쓰지 않아 합격이 취소된 것이었다.
원시(초시)는 훈련원이 주관하여 70인을 뽑았고, 향시는 각 도의 병마절도사가 주관하여 경상도 30인, 충청·전라도 각 25인, 강원·황해·영안·평안도 각 10인, 도합 120인을 뽑았다.
따라서 무과 초시의 시취 정액은 모두 190인이었으며 시험과목도 무예 10기와 강서를 합한 11기 중에서 1∼3기를 택하여 고시하였다. 그러나 쇄미록의 기사에 의하면 전주에서 실시한 정시에서는 한번에 1782인의 무인을 뽑았다.
且完山廷試武人(차완산정시무인) 試取鐵箭五(시취철전오) 失二巡中二者(실이순중이자)ㆍ 騎射一次二中己上(기사일차이중기상) 得取一千七百八十二人云(득취일천칠백팔십이인운) 此郡得叅亦三十七八云(차군득참역삼십칠팔운) 但居喪(단거상) 未葬者(미장자) 亦多入格云(역다입격운) 可歎可歎(가탄가탄) 「갑오일록」2월2일
조선시대 법제상으로는 賤人(천인)이 아니면 결격사유가 없는 이상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625년(인조 3)부터는 賤妾(천첩) 자손도 曾孫(증손) 子(자)부터는 응시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정시에 장원한 이재영은 천인인 학금의 아들이고 권승경도 서얼출신으로 무과에 장원하였다고 한다. 즉 천인 출신도 과거에 응시하였다는 사실과 서얼 출신도 실지로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瑣尾錄(쇄미록)』의 記事(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오희문의 아들 윤겸은 별시에서 과거에 급제 한다. 강경에 합격하고 이어문묘 알성에 급제함으로써 오희문을 기쁘게 한다. 이어 과거합격을 알리는 창방을 하고 어사화를 꽂고 3∼5일간의 시가행진인 榮親儀(영친의)를 행하며 향교에 가서 공자 영장을 배알한다.
그리고 오희문은 여러 친지와 지인을 초대하여 聞喜宴(문희연)을 베풀어 주며 이를 축하해준다. 또한 의례적으로 조선시대에는 과거급제나 득남 등 경사가 있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재산의 일부를 상속하여 주는데 이를 別給(별급)이라 하였다.
오희문과 윤겸의 처가는 別給(별급)으로 윤겸에게 전란 이후 얼마 남지 않은 노비와 전답일부를 주어 이를 기념하였던 것이다.
이상을 통해 일기라는 극히 제한적인 사료로써 오희문과 아우, 그 아들들의 師承(사승)관계와 그 당시 아이들의 초급교육과 과거 시행에 관한 실태에 관하여살펴보았다.
일기라는 극히 제한적이고 단편적인 사료를 통하여 당시대의 교육전반과 오희문 자제들의 구체적인 교육과정에 관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오희문의 일기를 통하여 초급과정은 집에서 직접 가르치거나 인근의 유학자에게 수학하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어느 정도 학식이 갖추어졌으면 관학기관이나 유명한 유학자에게 보내어 학업을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일반 사대부가에서는 딸들에게도 책을 읽히는 등 학문하는 자세를 견지하도록 배려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임진왜란 때에는 비정기시인 정시와 별시 그리고 알성시에서 많은수의 무과를 뽑아 군대에 충당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經國大典(경국대전)』에 公示(공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주소를 쓰지 않으면 합격이 취소되는 사례도 확인되었다.
특히 천인도 실지로 과거에 응시한 사례가 있으며, 서얼도 과거에 등극하였다는 사실과 피난 중에도 일정한 과거급제의식을 치루는 것을 볼 수 있다.
2. 吳希文이 본 官僚(관료)의 實態(실태)
조선시대 사대부의 궁극적인 목표는 오직 官僚(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관료가 된다는 것은 경제적 보장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문과 개인에게 영광을 가져다주는 출세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그 것은 관료가 됨으로써 양반신분의 특권을 계속 유지하고 대접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관료가 되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
첫째 과거시험을 통하는길,
둘째 遺逸(유일)이라는 명분으로 천거를 받는 길,
세째 門蔭(문음)이라는 길이 있다.
오희문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장남인 오윤겸은 후일 영의정까지 제수된다. 따라서 본장에서는 오희문의 아들 윤겸을 중심으로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위급시에 있어 관료의 임명에서 부터 직무, 평가에 이르기까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瑣尾錄(쇄미록)』에 처음 보이는 윤겸의 관료 생활은 體察使(체찰사) 鄭澈(정철)이 막중의 참모로 삼고자 하여 兩湖體察使(양호체찰사) 鄭澈(정철)의 從事官(종사관)이 된다. 윤
겸은 체찰사 밑에서 여러 지역을 순행하면서 백성의 공물납부로 말미암은 괴로움을 물어서 심한 경우에는 그 역을 덜어주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전쟁의 참상과 과정, 그리고 조정의 소식을 편지를 통하여 오희문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윤겸의 관직생활은 오희문 집안에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게 되는데 공주목사의 배려 및 도사와 체찰부사의 배려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본도 도사가 쌀 닷말ㆍ 조기 세 묶음ㆍ 감장 두 말을 보내왔다. 또 체찰부사 김찬과 별장이 쌀과 콩 각각 한 섬씩 도합 두섬을 官人(관인)을 시켜 실려 보내왔다. 식량과 반찬이 떨어져 민망하고 걱정스러운 때 이같이 의외의 물건을 보내주니 온 집이 기뻐함을 금할 수 없다. 이것으로써 이 달은 근심이 없겠다.
위의 배려는 관료인 윤겸의 정식급료이었는지, 혹은 배려차원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윤겸이 체찰사의 참모라는 지위와 무관하지는 않은 듯싶다. 의외의 물건으로 한 달간의 양식을 마련한 오희문은 이후에도 윤겸과 관계되는 知人들을 통하여 많은 食物(식물)을 조달 받게 된다.
한편 오희문의 일기에는 윤겸이 종사관을 언제 어떻게 그만 두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확실치 않다. 참모를 그만둔 이후 서울에서 侍直(시직) 생활을 하다 을미년 윤겸은 비변사에서 추천한 수령이 될만한 자 29명중 한사람에 속하기도 하지만 결국 수령 제수는 받지 못하고 副率(부솔)에 승진된다.
그러나 윤겸의 관직생활은 순탄하여 곧 衛率(위솔) 六品(육품)으로 승진하고 평강태수에 임명된다.
이 때 오희문은 윤겸의 평강수령 임명 소식에 다음과 같이 소감을 피력한다.
듣고 나니 놀라고 탄식함을 이길 수가 없다. 이 같은 어지러운 세상은 진실로 벼슬할 때가 아닌데 억지로 벼슬에 나가게 했으니 이는 비단 우리 한 집의 일이 아니라 나이 많은 늙은 부모가 오래 굶주리고 있으며, 한 아우는 먼 곳에 떠돌아 입에 풀칠할 방법이 없으니 만일 남쪽 지방 한 고을의 태수를 얻으면 모두 모셔다가 조석식사의 걱정은 면할 수가 있을 터인데, 이제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것도 또한 운명이라 비록 한탄한들 무엇 하리오.
라고 하여 亂世(난세)에 자식이 관직에 나가는 것을 一門(일문)의 영광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걱정하고 있다. 국가의 위급 상황시기에 있어서 자식의 앞길이 어찌될지 모르는 두려움이 앞서지만 한편으로는 남쪽 풍요의 고장으로 관직을 제수 받지 못하는 아쉬움이 내포되어 있는 듯 하다.
따라서 관직으로 나가는 아들의 덕으로 조석식사를 해결하려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이후 윤겸은 평강수령을 사임하고 서울에 근거하다 文學(문학)에 오른다.
전술한 바와 같이 후일 윤겸은 薦擧(천거)에 의해 관직에 나서지만 후일 과거에 급제하여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한편 희문의 一家(일가)중 문음에 의해 관직에 나가는 경우는 오희문의 조카인 심열의 경우이다. 1593년(계사년) 10월의 기록에 의하면 심열의 장인은 곧 참판 閔公(민공) 濬(준)인데 반드시 그 힘으로 인해서 얻은 것이다 고 하여 오희문은 심열이 음사의 힘으로 벼슬에 올랐음을 축하하고 있다.그렇지만 문음에 의한 진출이었기에 안정된 관료생활을 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이제 들으니 조카 심열은 벼슬살이가 생소해서 上司(상사)에게 욕을 당하기도 여러 번이었다니 비록 스스로 그만 두지 않더라도 장차 지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한다. 세력없는 음관이라 이치가 진실로 그러하니 탄식한들 무엇 하리오.
라고 하여 세력이 없는 음관으로 관직생활을 하고 있는 심열에 대한 걱정과 이 같은 현실을 탄식하고 있다.
다음으로 수령의 赴任(부임)과정은 어떠했을까?
그것은 부임지의 사정에 낮선 한 사람이 의례적 절차를 행하며 그 고을을 통치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력을 형성하는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부임의례도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除授(제수)에서 부터 부임지에서의 친영의식, 객사와 향교에서의 배알의식, 상관의식 까지 많은 의례를 거치게 된다.
부임지에 도착한 수령은 勸農(권농)과 救恤(구휼), 收稅(수세), 財政(재정)등
의 행정적 기능과 사법적 기능, 군사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국가비상시 수령의 책무는 훨씬 가중됨이 사실이다. 때문에 오희문이 피난생활을 했던 임천의 경우 1년에 4번 수령이 교체되는 경우까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잦은 수령 교체에 대하여 오희문은
… 세력이 없는 음관이 길가의 원 노릇을 하는데 사람됨이 경박하고 천해서 비단 왕래하는 공사의 일행뿐만 아니라 심지어 떠도는 士大夫(사대부)들까지도 侵害(침해)가 몹시 많아서 응접에 시달리다가 관청의 저축이 다 없어져도 어찌할 계책도 없었던 것이다.
거느린 가족은 역시 많고 관청에는 한 항아리의 간장이나 한 되의 쌀이나 콩도 없어 날마다 방아를 찧어도 오히려 계속할 수가 없어서 꾸어다가 쓰는 형편이었다.
심지어 관청에서 하루에 소용되는 것이 五(오)두라고 하니 … 뒤에 오는 자가 만일 대간이나 시종의 신하로서 몸 갖기를 검약하게 하고 강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손님을 접대하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고 비용을 아껴서 …
라고 하여 蔭官(음관)으로 수령을 역임함에 따라 주변의 요구가 과대하고 수령이 부리는 식솔들이 많아 관물이 사사롭게 소비되는 것이 큰 원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공무를 수행하면서 사사롭게 응접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해결방안의 하나임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밖에 수령의 사사로운 재산증식으로 인한 주변의 비방들도 있었으며 수령의 직임을 다하지 못해 파면될 것을 미리 예측하고 미리 관아의 물건을 사사롭게 빼돌리는 일로 암행어사의 탄핵을 받는 수령들도 있었다.
다음은 당시 부정축재를 한 수령과 그 방법을 기록한 기사이다.
태수의 성명은 김성헌인데 오래 민심을 잃고 또 재물을 많이 탐해서 군내 가까운 곳에 큰 집을 샀으며 또 사사롭게 관고의 물건을 내다가 두 배에 가득 실어서 영광에 사는 일가의 집으로 보냈고, 또 곡식을 내다가 성안 인가 十(십)여곳에 두었다. …
또 떠도는 사람들을 노비로 샀으며 쌀로 나무를 사둔 것 또한 많다고 한다. 도둑질한 곡식이 천석여에 이르고 배에 실어둔 물건은 이보다 더 많다고 한다.
라고 하여 오희문은 영광군수 신상철, 태인군수 박문영, 영암군수 김성헌의 부정축재로 민심이 흉흉하여 암행어사가 군에 들어와 잘잘못을 조사한 후죄수들을 나주로 옮겼다고 한다.
여기에서 수령들의 잘못된 폐행으로 한 군에 監官(감관)이 몹시 많고 또 순찰사가 정해서 보낸 軍官(군관)이 세 사람이나 되어 혹 역사도 돌보고 焰硝(염초)도 만들며 쌀 찧는 것도 감독하여 소비되는 것이 몹시 많아 이 때문에 관청 곡식이 탕진되었으며 사신이 왔을 때도 鄕吏(향리)와 鄕任(향임)까지 刑杖(형장)의 욕을 당하는 것을 들고 있다.
아전들 역시 횡포가 심하였는데 뇌물을 받고 환상을 주는데 차등을 두는 등 수령의 눈을 피한 하급관리의 폐해도 민생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물론 태수의 치적에 대하여 칭찬하는 기사도 보이고 있는데, 임천태수 변호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기도 하였다.
… 지금 태수는 즉시 명령하여 軍官(군관)을 돌려보내고 또 監官(감관)을 폐지하고 몸소 업무를 친히 보며, 鄕任(향임)을 개정하니 한 고을의 바라는 바가 되었다.
고 하여 수령을 가려서 쓰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민생의 편암함과 직결되는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공주목사까지 제수받은 邊好謙(변호겸)이 전임의 일로 파면을 당하게 되는데서 한탄을 금치 못한다. 뿐만 아니라 임천 태수 徐諿(서집)에 대하여서도 백성을 가장 잘 다스려 백성들이 바야흐로 생업이 편안하였으나 질병으로 사임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또한 오희문은 수령과 인척관계에 있는 사람이거나 수령 당사자를 통해서지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청탁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사례를 통해 기록하고 있다. 즉 사위가 함열 태수로 있을 때 임천에 사는 오희문에게 와서 노비를 다스릴 일이라든가, 도망간 노비를 관의 힘을 빌려 찾아달라는 청탁등이 줄을 있고 있었다.
또한 아들 윤겸이 평강태수로 있을 때 청탁은 더 잦았는데 상황에 따라 오희문은 위의 경우처럼 청탁을 들어주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치에 맞지 않은 경우 번민했던 사실들이 다음 기사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김언춘이 꿩 한 마리를 가져왔다. 이는 신역을 감해달라고 청하는 것인데 물리치는 것도 옳지 않아 그대로 두어두고 윤겸이 돌아온 뒤에 편지를 하겠으나 감해주는 일은 알아서 하도록 할 작정이다. 인정에 못 이겨서 매양 이같이 번거롭게 하니 몹시 미안 하다.
저녁에 김귀실이 와서 보았는데 콩 1석을 져다가 주면서 말하기를 서울의 刈草軍(예초군)을 감하게 해달라고 이것을 가져왔다고 한다. 이에 나는 노해서 물리치고 다시 오지 말라고 했다.
이상의 두 記事(기사)는 신역을 감해달라거나 예초군을 감해달라는 부탁으로 수령의 아버지인 오희문에게 청탁하는 내용의 사례들이다. 이를 통해 보더라도 수령자신에게는 더 많은 청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이 같은 청탁에 부응하지 못해 혹 민심을 잃을 아들에 대하여 염려를 하는 내용도 보인다.
근일에 친구들이 구걸하는 편지가 구름처럼 모여들건만 여기에 응할 수가 없어 모두 그대로 보내서 반드시 노여워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 몹시 민망하다고 했다. 또 나라의 말 三(삼)필을 잃어서 비록 백성들의 말을 거두어 보내기는 했지만 파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앉아서 파면을 기다린다고 했다.
위의 기사는 임진왜란 당시 먹을 것을 구걸하는 상황과 나라의 말을 잃었을 때는 의례적으로 파면당하는 사실을 엿 볼 수 있다.
이렇듯 수령도 나름대로 직무에 대하여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주변사람들에 대한 응접과 환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창고가 비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여 환상을 독촉한다거나, 여러 곳의 召募官(소모관)이 자칭 御使(어사)라 칭하고 고을을 순행하여 지공을 요구한다거나, 중국군사의 양곡을 운반한다거나 군사를 기한 내에 뽑는 일 등 평소 안정기보다 훨씬 수령의 임무는 고달팠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인지 좋은 임지의 수령으로 나가길 원했다. 하지만 좋은 임지에 제수를 받으려면 吏曹(이조)에 아는 사람이 있어야하고 만일 나쁜 지방에 제수 받으면 차라리 농사짓는 만 못하다고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수령의 差役(차역)에 있어서도 현실적으로 나타나는데 윤겸이 평강수령으로 있을 때 윤겸은 運糧員(운량원)으로 몇 번씩 외지에 나가야만 했다.
여기에 대해 오희문은 안협이나 평강의 수령은 두 번씩이나 차역을 보내고 이천과 철원의 수령은 한번도 運粮員(운량원)으로 외지에 나가지 않은 까닭을 이천수령과 철원수령은 재상의 자제인 까닭이라고 한탄하고 있다.
평강수령 李民聖(이민성)은 아들이 재상의 반열에 오른 이덕형인데 그 오희문은 이민성의 폐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필시 세력을 믿고 교만히 굴고 맘대로 하고 꺼림이 없어서 농사철을 돌아보지 않고 크게 土木(토목)의 공사를 일으켜 자기가 쓸 衙室(아실)을 크게 짓는데 심지어 대들보를 두개나 넣고 앞뒤 행랑을 일시에 다 지으니 백성들이 받는 괴로움 이 때문이다.
이민성은 자기가 쓸 衙室(아실)을 짓는데 사사로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원성을 사고 있다. 이후 백성들에게 욕을 당한 이민성은 불안한 마음에 벼슬을 버리고자 하여도 관의 곡식을 다 소비했기 때문에 환상곡을 다 받은 후에 사임하려 하지만 재상인 아들 이덕형이 백성들의 원성을 산 아버지를 수령직에 오래있게 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이렇듯 수령이 직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될 때 백성이 수령에게 욕을 보이기도 하고 수령은 그 자리가 불안해 자진 사임할 뜻을 비치기도 하였다.
주지하듯이 수령의 가장 첫 번째 임무는 권농이다. 관전이나 둔전을 백성들에게 개간하게 하여 감독하고 소출을 받는다거나, 종자를 빌려주고 가을
에 받아 창고에 곡식을 채우는 일이 민생고를 해결하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외 수령이 하는 일은 패자를 발부하여 미리 소송의 빌미를 제거한다든가, 죄인을 잡아오게 하는 일, 가옥입안이나, 노비매매 등을 승인하는 일, 중앙에서 오는 관료를 맞이하는 일 등인데 특히 이 시기의 수령은 군사를 모집하는 일에서 중국군이 요구하는 지공뿐 아니라 피난 온 지인들의 식물 접대, 청탁까지 포함되어 안정기의 수령의 임무보다 훨씬 더 고단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관직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고 또 관직에 나가서는 좋은 목민관이 되고자 고을의 폐단을 적어 소초를 올려 잘못된 점을 시정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牧民官(목민관)으로서의 임기를 마치기 이전에 사임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병이 걸리거나 혹은 전임의 일로 인해 추핵당한 경우도 있었으며 폐정으로 인해 인심을 잃어 파면을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사임의 듯을 밝히기도 하였다.
『瑣尾錄(쇄미록)』에서 보여지고 있는 수령의 실태는 이 시기가 무엇보다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위급시기이기 때문에 안정기때 보다 수령의 직무나 청탁 등이 과중하고 번거로웠던 것으로 보여 진다. 때문에 관역으로 인한 백성들의 괴로움도 과중되었을 것이고 이를 바라보는 오희문은 가감 없이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고초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를 『瑣尾錄(쇄미록)』에 적고 있었던 것이다.
VI. 結論(결론)
조선을 건국하고 유교를 개국이념으로 채택하여 이를 널리 보급시키는데 앞장서 왔던 사람들은 사대부들이었다. 따라서 사대부들의 실체와 역할을 규명하려는 많은 노력들로 상당히 많은 사실들이 규명되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관찬사서 등을 통하여 정치ㆍ 사회 ㆍ경제적 측면에서의 사대부에 대한 연구는 활발한 반면 그들의 생활사에 대한 연구는 소홀히 취급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대부들이 갖는 고유의 정치ㆍ 사회ㆍ 경제적인 성향은 그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상호간에 영향을 주어왔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여야만 올바른 판단도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본고는 16세기 말을 살았던 양반 사대부가인 오희문의 십여년에 걸친 임진왜란 피난일기인 『瑣尾錄(쇄미록)』을 통하여 사대부의 실상에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였다.
오희문의 아버지는 장수 현감을 지냈으며 임란 초에는 처남인 이빈이 장수
현감이었고 그 후 임천 거주기에는 사위가 함열 현감이었으며 사위가 관직에 물러날 즈음에는 아들 윤겸이 평강현감으로 재직하여 친지들 중 수령 등으로
있던 사람이 많아 朝報(조보)를 비롯한 각종 공문서를 접힐 수 있었다.
때문에 오희문의『쇄미록』은 개인의 일기를 뛰어넘어 임진왜란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瑣尾錄(쇄미록)』의 진정한 가치는 오희문과 그의 가족이 전라도 장수와 충청도 홍주, 임천 아산 및 강원도 평지 등지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일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하여, 당시의 사회경제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 임진왜란이라는 특수상황임을 재고함은 물론이다.
필자는 오희문이 지은 『瑣尾錄(쇄미록)』을 통하여 사대부들의 일상생활의 단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사대부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을 통해 수령과 노비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재조명해 보았다. 물론 오희문의 개인일기라는 사료의 한계점으로 인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모습들과 가까이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는 있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오희문 개인의 모습이 당시 벼슬하지 않은 양반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해 보았다.
이를 정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희문은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지만 유교적 소양을 가진 양반으로 그의 생활의식에는 유교적 근본 도덕인 예의염치를 덕목으로 삼았다. 16세기 우리가 알고 있는 풍습처럼 그도 외가에서 나고 자랐으며 성장하여서는 처가의 집에서 살았다.
오희문은 상사시나 제사를 모실 때도 당시의 관습에 비추어 그가 하지 않아도 될 일 들을 손수 집행하곤 하였다. 이는 당시 선조의 제사를 輪行(윤행)하는, 즉 후손들이 남녀 차별 없이 그리고 장손과 차손 구별 없이 1년 혹은 일정기간씩 돌려 지내는 것이 풍조였으나 오희문은 임진왜란이라는 전란기에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4대조는 물론이고 외가와 처가에 이르기까지 년 25회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이는 오희문의 봉제사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집념을 대변하는 것으로 오희문의 이러한 태도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공통된 것으로서, 유교식 제례에서의 제사의 의미는 부모가 살아계실 때 행하던 효행의 연속으로 이는 효가 모든 행동의 근원(孝者百行之源(효자백행지원))이고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배출된다 (忠臣求於孝子之家(충신구어효자지가))라고 하여 가정의 도덕규범인 효를 국가의 도덕규범인 忠(충)과 연결시켜 주지시켰기 때문이다.
즉 충과 효는 성리학적 유교질서의 근본으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었으며 효를 실천하는 방법의 하나로 상례와 제례는 중요시되었으며 오희문은 이를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외 일상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접빈객이었다. 끼니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궁핍한 시기에 이렇게 예를 행하는 것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사회가 올바로 움직이려면 사회구성원들이 예의를 알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효’가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도덕규범이었듯이 ‘예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도덕규범이었다. 사회구성원 모두 예’를 지키면 자연히 질서가 유지되고 사회가 안정되며 이러한 ‘예를 실제 생활에서 具現(구현)하는 것이 바로 ‘접빈객’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종과 말은 사대부를 움직이는 필수조건이었다.
그들에게 유교적 소양은 교육을 통하여 완성시켜 나가는데 서당에 나가기이전의 초급교육은 자제나 손자, 친인척 그리고 가까운 지인의 자제를 직접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사대부층은 교육을 통하여 얻은 지식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는 것이 일족의 영광이며 양반신분의 특권을 계속 유지시키는 길이었다. 당시 관료가 되는 방법 중 음관으로 관료가 되는 경우는, 힘이 몹시 약하고 언제 사임될지 모르는 불안한 자리였다는 것이 확인된다. 즉 문음보다는 당당히 문과를 통해 입문하면 관직의 길이 평탄하였음을 아들 윤겸의 사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없어 한직에 나가는 아들에 대하여 오희문은 농사짓는 것만큼은 못하지만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으라는 권고와 함께 아들의 수령제수를 허락한다. 당시 벼슬살이와 경제는 밀접한 관계로 윤겸의 관직생활은 오희문가에 경제적인 도움을 준다. 수령의 직무는 보편적으로 권농과 가옥이나 토지 입안 작성, 그리고 소송 해결 등이 있으나 임진왜란이라는 특수 상황에서는 중국군의 지공요구와 군사모집, 그리고 지인들의 청탁에 이르기까지의 대소사가 끊이지 않는다.
오희문은 피난시절, 고향을 떠나 유리하면서 경제적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심하였다. 하루 세끼 해결하기도 힘든 상황속에서 구걸과 외상, 환곡 등으로 지내다가 함열 현감이 사위가 되고 또 그 아들이 평강 현감이 되자 보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임진왜란이라는 사회적 환경 때문에 그 발판은 오래가지 못하였으므로 생계유지책의 일환으로 상행위는 필요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사실 오희문가의 경제의 중심은 농토를 통한 병작소출과 물품의 수증에 있었다.
물론 시세차익을 남기기 위한 원격지 교역이나 집에서 생산한 작물은 조금의 도움은 있었으나 부를 창출하거나 안전한 생활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것들을 가능케 하였던 것은 理財(이재)에 밝고 經濟觀念(경제관념)에 투철한 오희문의 개인적 성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위와 아들이 현직에 있음으로서 물품수증이나 병작을 통한 소출 등이 가능하게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로서, 당시 관료생활과 경제적 상관관계를 알 수 있는 一例(일례)라 하겠다.
오희문가의 노비를 통해 살펴본 노비의 존재형태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솔거노비가 사노비중 70%를 차지한다. 솔거노비의 형태중 가내사환노비는 主家(주가)에 의해 부양되는 존재들로, 독자적인 자신의 經理(경리)가 부정되지만 노동의 대가로 주가에서 받은 재물은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다.
오희문가의 가사사환노비는 막정, 송이, 명복, 안손, 춘기 등으로 대표된다.
솔하노비는 인근에거주하면서 주가의 농장경영에 주로 부역노동의 형태로 사역되는 존재들로 가내사환노비와 구별되는 점은 가족을 구성하여 비록 제한된 형태나마 독자적인 자신의 경리를 위한 농업경영도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상행위에도 동원되어 주가의 경제생활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자신의 재산증식에도 열심이었다. 이렇게 솔거노비들이 주가에 사회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신역을 제공하는 대가로, 主家(주가)는 토지를 임대해 주는 등 생계책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외거노비는 노비구수에 따라 신공을 납부하는 의무를 갖는다. 그들은 대부분 주가의 농장 토지나 타인의 토지를 경작하는 전호로서 각종 사역에 동원되어 신공을 면제받는 유형과 부역노동의 의무 없이 순수하게 신공만을 납부하는 전호로 나뉘어졌다. 신공만을 납부하는 외거노비의 경우 본인의 노력과 상속으로 자작농, 지주로 까지 성장한다.
오희문가의 노비를 통해 확인되는 것은 가내사환노비와 솔하노비는 상전이
직접 경영하는 농작경작에 있어서 중요한 노동력으로 동원되었고 상행위에도 사역되었다. 이에 주가는 대가로 토지를 임대해 주는 등 노비의 經理(경리)에 도움을 주고 있고 노비 또한 재산증식에 적극적이었다. 이 외 자신의 경리를 하지않은 家事使喚婢(가사사환비)에게는 급료를 주어 자기 생계를 유지하게 하기도 하였다.
결국 오희문의 눈을 해 본 당시 사대부들의 노비관은 일반적으로 자기 노비를 재산으로 보고 경제적 이윤획득을 위해 자신의 생활에 편의를 제공받기 위해 부렸으며 主奴關係(주노관계)는 엄격한 上下關係(상하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노비가 병이 나면 의원을 불러 병을 낫게 하고 가족을 만나게 하는 등 인간적 배려도 하였다. 또한 처참하게 죽은 가까운 노비에 대하여서는 진정 마음속으로 슬퍼하기도 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노비를 인격체로 보아 시혜를 베푼다기보다는 다른 한편으로 노비를 적절하게 이용하기 위한 懷柔(회유)나 善心(선심)인 듯싶다.
18세기 사료인 이희성대의 고문서와 의하면 노비와 계를 맺어 경제적으로 상부상조하는 예가 나오는데 이는 18세기 주노관계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16세기 엄격했던 주노관계는 18세기 이후차츰 경제적 변화에서부터 비롯됨을 시사한다 하겠다.
한국 역사에서 오희문이 살았던 16세기는 정치적으로 중소 지주출신의 사림이 성장하여 기존 훈구역과 대립, 갈등하던 시기로 사림들의 성장 발판을 마련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향촌 지배질서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가져오는 시기이다.
경제적으로는 과전법의 붕괴와 함께 양반 지주층이 상속이나 매득, 개간 들을 통해 농장을 확대해 나갔으며 사회적으로는 주자학적 가부장제 의식이 널리 보급되었고 유교적 윤리관이 기층사회까지 침투하여 부계친 중심의 문벌의식이 대두하던 시기였다.
살펴본 결과 기존에 알고 있었던 16세기 사회상에 관하여 몇 가지 새로운 사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첫째, 16세기 제사설행방식에 있어서 유교적 제사방식이 완전히 정착되지못하였다는 점이다. 당시 외가와 처가 대한 제사를 받드는 윤행이 일반적이었고 이와 연관하여 오희문의 성장과정을 통해 당시 솔서의 풍습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풍습은 재산균등상속과 제사를 받드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것으로 제사를 자녀에게 분급하는 것은 봉양과 봉제사에서 기인된 것인데,
16세기 가족제도나 제사방식은 아직 부계중심의 성리학적 사회 구축질서가 정착되지 않은 과도기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양반의 일상생활에서 관한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사대부계층은 성리학으로 무장되어 있는 합리주의자, 그리고 권위주의자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지만 실지로 그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그렇지만은 않았다.
예를 들어 노비가 없을 때는 친히 밥을 지어 먹거나 물고기의 배를 가르는 기본적인 식생활 해결에서부터, 앞일에 대한 궁금증과 현실의 답답함을 헤쳐 보려고 꿈을 기록하거나 해석하였고 또 점복을 통해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절박한 생사의 갈림길에서 굿을 통해 현실을 타개하려는 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살펴 보건데 조선시대 양반사대부들은 이러한 무속행위에 대하여서는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었다. 즉 독경이나 굿 등의 행위에 대해서는적극적으로 포용하지는 않았지만 점복행위만큼은 사대부가에서 일반적으로 용인된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 번째 양반이 상행위를 행한다는 점이다. 물론 임진왜란이라는 사회적 여건으로 말미암은 현실타계의 일환이기는 하였지만 벼슬살이를 하지 않은 오희문이나 관리로 있는 주변사람들도 이를 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직접적인 상행위가 아니고 노비나 주변의 사람들로 하여금 대행하고 있는데 사실 물가나 장시일, 그리고 수익 예상 등을 고려하여 지시하고 있으므로 오희문 자신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이는 조선사회는 신분에 따라 그 업도 사농공상으로 분류되었다고 믿었던 기존의 통념에 반하는 것으로, 이는 16세기장시의 발달로 시장경제가 활발해진다는 사회적 측면과 오희문의 투철한 경제관념이라는 개인적 측면에서 이해된다고 보여진다.
또 관료와 경제생활의 밀접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통해 당시의 선물경제의 양상도 살필 수 있었다.
넷째 주노관계에 대한 인식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주노관계는 상하관계, 복
종의 관계로서 주가가 노비를 재산으로 보고 경제적 이윤획득을 위하여 일정한 편의를 제공하지만 실질적으로 노비에게 급료를 주었다든가, 공이 있고 자손이 없는 노비에게 제사를 지내주는 기록은 일기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또 단편적인 사례이지만 노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경리를 위해 상전의 일도 뒤로 미루고 있다든가, 주인의 일에 대하여는 태만만 반면, 자신의 일에는 적극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이완되는 사회경제의 모습을 주노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이다.
다섯째 임진왜란 당시 수령의 실태이다. 음관으로 관료가 된 경우 그 가문의 배경에 따라 수령의 권위와 임무도 차별이 있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천거나 음관, 과거를 통하여 관료가 되는데 임진왜란 당시 16세기 말에는 실질적으로는 가문의 배경이 관료의 임기와 업무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사회가 관료사회라는 기존의 통념에 반하는 사실로 임진왜란이라는 국가비상시이기라는 전제를 두고서도 『瑣尾錄(쇄미록)』을 통해 그 실제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천거나 음관을 통하여 관리가 된 자 중에는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합리적인 여러 제도의 시행으로 백성들의 칭찬을 받지만 대부분 사리사욕과 위로부터의 불합리한 정책과 관행으로 이를 실천하기는 힘들었다.
이상은 개인일기라는 제한된 사료에서 사례를 통한 연구라는 한계점이 있으나 어쩌면 제도를 운영하는 중앙중심의 관찬사료보다 실제 제도를 체험하는 현실적인 측면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적 관행 및 실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고 믿는다.
앞으로 이를 뒷받침 할 많은 사례연구가 기대되며 『瑣尾錄(쇄미록)』을 통해 사대부의 여가생활이나 부부생활, 그리고 여성 생활, 노비의 가족과 결혼생활 등은 심도 있게 다뤄야 할 과제라고 보여 진다.
[출처] 『瑣尾錄 (쇄미록)』 연구|작성자 우리나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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