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봉 최승대, 영명사, 부벽루, 전금문, 대동강(좌->우) - 사진으로보는 근대한국[서문당]
김황원(金黃元)의 미완성 시
- 하응백 / 경희대 현대문학 박사 / 문화에디터 -
12세기 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
고려 예종 때 김황원(金黃元)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학문에 힘써 고시(古詩)로 이름을 떨쳐
해동제일이라는 일컬음을 받았다고 하며,
정직하여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예종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요나라에 가는 길에
대기근이 있는 북부지방에서 주군(州郡)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했다.
귀국 후 예부시랑 · 국자제주(國子祭酒) ·
한림학사 ·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를 역임했다.
그는 임금이 책을 보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어 물으면
대답할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었으나,
청직한 성격 때문에 남의 모함도 많이 받았다.
시와 관련하여 그가 남긴 일화 한 편이 있다.
요즘도 그렇지만 경치가 좋은 누각에 가면 그곳 산천 풍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들이 누각 안쪽에 판각을 해서 많이 걸려 있다.
고려시대 평양 부벽루도 그러했던 모양이다.
하루는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랐다.
그런데 김황원이 보기에 그 시들은 하나같이 졸작이었다.
김황원은 그 시들을 모두 떼어 불태워 버렸다.
내심 그 시들보다 훨씬 뛰어난 후세에 길이 남을
시 한편을 써서 걸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김황원은 시상을 떠올리며 하루 종일 경치를 보다가 드디어 시 두 구절을 얻었다.
長城一面溶溶水(장성일면용용수)
긴 성벽 한편으로는 넘쳐넘쳐 흐르는 물이요
大野東頭點鮎山(대야동두점점산)
넓은 들 동쪽에는 점 점이 산이로다
하지만 그 뒤를 지을 수가 없었다.
7언 절구란 뒤에 두 구가 있어야 완성되는데,
아무리해도 뒤의 두 구절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김황원이 해가 지고서야 통곡을 하면서
자신의 시재(詩才)의 모자람을 한탄하면서 부벽루를 내려왔다고 한다.
김황원은 통곡을 하고 내려왔지만,
이 시 두 구절로도 썩 훌륭하여 후대 사람들이 널리 기억하였다.
국악가사에도 이 시 구절이 가끔 등장한다.
다음의 ‘사설 지름’이 이 시구를 인용하고 있다.
백구(白鷗)는 편편(翩翩) 대동강상비(大同江上飛)요
장송(長松) 낙락(落落) 청류벽상취(淸流壁上翠)이라
대야동두점점산(大野東頭點點山)에
석양(夕陽)은 비꼈는데
장성일면용용수(長城一面溶溶水)에
일엽어정(一葉漁艇) 흘리저어
대취(大醉)코 재기수파(載妓隨波)하야
금수능라(錦繡綾羅)로 임거래(任去來)를 하리라
“갈매기 훨훨 대동강 위를 날고,
낙낙장송은 청류벽 위에 푸르도다.
넓은 들판 점점 산은 석양에 비끼고,
긴 성벽 한편 흐르는 물에 배 한 척 띄워,
크게 취해 기생을 실은 채로 물결 따라 흘러가니
금수산 능라도로 흘러 들어가네”라는 의미다.
김황원의 시구를 인용했지만,
김황원의 시구에 비하면 훨씬 졸작이며 천박하기까지 하다.
놀량사거리의 ‘사거리’에도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백구(白鷗) 편편(翩翩) 대동강상비(大同江上飛)하고
장송(長松)은 낙락(落落) 청류벽상취(淸流壁上翠)라 아하아
장성일면(長城一面)은 용용수(溶溶水)요
대야동두(大野東頭)는 점점산(點點山)이라
즉, 김황원이 처음 시를 지었고,
그 다음 누군가가 이를 인용하여 사설 시조를 지었고,
이 시조를 다시 ‘놀량사거리’가 차용한 것이다.
70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서도
김황원의 시는 민중들의 노래 속에 살아있게 된 것이다.
이는 훌륭한 예술의 이어짐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완의 세계에 대한 후대인들의 아쉬움이기도 할 것이다.
부벽루에서 바라본 대동강-사진으로보는 근대한국[서문당]
* 김황원(金黃元 1045년 ~ 1117년) / 위키백과에서
고려의 문신 및 시인이다.
자는 천민이고 본관은 광양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고시에 이름을 날려 해동의 제일인자라 일컬어졌다.
한림원에 있을 때 요의 사신을 시로써 맞아 존경을 받았으며,
예종 때 요에 가는 길에 북부지방 백성들이 굶주려 있는 것을 알고는
나라의 식량을 풀어 그들을 구했다. 귀국 후에 예부시랑, 한림학사 등을 지냈다.
예종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요나라에 가는 길에
대기근을 당한 북부 지방에서 주군(州郡)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했다.
귀국 후, 예부 시랑(禮部侍郞)·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를
역임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는 일찍이 평양 부벽루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내려다보고
시를 짓다가 두 줄만 짓고
나머지는 표현하지 못해서 울고 내려왔다는 일화가 있다.
"長城-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긴 성 한 쪽을 끼고 넓은 물이 질펀하게 흘러가고,
너른 벌 동쪽 가엔, 점점이 산이더라)"는 그때 지은 시라고 한다.
그는 문장에서 정지상(鄭知常) 이전의 제1인자라는 평을 받고 있는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김황원(金黃元 1045년 ~ 1117년) / 고려사 卷九十七 列傳 卷第十 諸臣
김황원(金黃元)은 자가 천민(天民)이고 광양현(光陽縣) 사람이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고문(古文)을 힘써 익혀 해동제일(海東第一)이라 불렸으며,
청렴하고 강직하여 권세에 빌붙지 않았다.
이궤(李軌)와 친하여 함께 한림(翰林)에 있으면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당시에 김이(金李)라고 불렀다.
요(遼)의 사신이 왔을 때 김황원이 내연(內宴)에서 구호(口號)를 지었는데,
‘봉황은 조서[綸綍]를 입에 물고 하늘에서 내려오고(有鳳銜綸綍從天降),
자라는 봉래산(蓬萊山)을 타고 바다를 건너왔네.(鼇駕蓬萊渡海來)’라는 구절이 있었다.
사신이 놀라 감탄하여 〈그 시의〉 전편(全篇)을 구하여 베껴갔다.
재상(宰相) 이자위(李子威)가 그 문장이 당시에 숭상(崇尙)하는 바를
따르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말하기를,
“만약 이러한 무리가 한림원에 오랫동안 있으면 반드시 후배들을 그르칠 것이다.”
라고 하여 마침내 아뢰어 그를 쫓아냈다.
상서(尙書) 김상우(金商佑)가 시를 지어 말한 것이 있었는데,
“학문은 부박(浮薄)하지 않으니 마침내 고문으로 돌아갈 것이며,
도(道)는 회사(回邪)하지 않으니 어찌 지금 아첨하겠는가.”라는 것이었다.
선종(宣宗)이 그것을 듣고 〈김황원을〉 우습유 지제고(右拾遺 知制誥)로 발탁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산부(京山府) 수령으로 나아갔다. 어떤 관리가 살인강도를 잡아왔는데
김황원이 자세히 들여다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도적이 아니다.”라고 하여 바로 석방하게 하였다.
판관(判官) 이사강(李思絳) 또한 이름 있는 선비인데 힘써 간하여 말하기를,
“그 도둑이 이미 자백하였으니 마땅히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나중에 다른 도둑을 잡으니 과연 지난번에 살인한 자였으므로
이민(吏民)이 모두 그 신기(神技)에 복종하였다. 경산에 2년을 있으면서
선정(善政)을 베푼 것이 많았으나 공납하는 은의 품질 때문에 파직 당하였다.
숙종(肅宗)이 연영전(延英殿)을 열어 〈김황원을〉 불러 서적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매번 책을 보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바로 질문하면서 선배(先輩)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예종(睿宗) 때에 여러 차례 승진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요(遼)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길을 가다가
북쪽 변방에 크게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김황원은〉 역마를 통해 상서하여 주군(州郡)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꺼내어
그들을 진휼하기를 청하였더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돌아올 때 백성들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 분이 우리를 살린 상공(相公)이시다.”라고 하였다.
예부시랑 국자좨주 한림학사 첨서추밀원사(禮部侍郞 國子祭酒 翰林學士 簽書樞密院事)를 역임하였으며,
여러 차례 표를 올려 치사(致仕)하기를 청했으나, 그 다음해에 허락하였다.
여진(女眞)이 요를 침략하여 동쪽 변방의 여러 성을 모두 함락하였으나
오직 내원(來遠)·포주(抱主) 두 성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식량이 모두 떨어지자 재물을 가지고 와서 가격을 낮추어 우리에게서 곡식을 사 갔는데,
변방의 관리가 민(民)이 호시(互市)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김황원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재앙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은 인(仁)이 아니며 이웃을 화나게 하는 것은 의(義)가 아닙니다.
두 성에 쌀을 팔게 하시고 아울러 무역(貿易)을 허락하도록 청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이〉 대답하지 않았다. 〈예종〉 12년(1117)에 죽으니 73세였다.
성격이 조심하는 것이 없이 자못 가무(歌舞)와 여색(女色)을 좋아하였다.
예부낭중(禮部郞中) 김부식(金富軾)이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으나
요직에 있는 사람 가운데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를 막았다.
아들은 김통리(金通理), 김존도(金存道), 김통문(金通文)이다.
* 김황원(金黃元 1045년 ~ 1117년) / 고려사절요 卷8 > 睿宗二 > 睿宗 十二年 8월
김황원이 사망하다(簽書樞密院事金黃元卒)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김황원(金黃元)이 사망하였다.
김황원은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문장[文詞]이 해동제일(海東第一)로 받들어졌다.
성품이 맑고 굳세어 권세에 기대지 않았다.
이재(李載)와 더불어 함께 한림(翰林)에 있으면서 명망이 동등하였다[齊名].
그때에 거란(契丹)의 사신이 도착하여 김황원이 대궐의 잔치[內宴]에서 구호(口號)를 지었는데,
봉황이 윤음[綸綍]을 머금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자라가 봉래산[蓬萊]을 타고 바다를 건너온다는 구절이 있었다.
사신이 놀라 감탄하여 전편(全篇)을 구하여 베껴서 갔다. 그
러나 두 사람이 모두 고문(古文)을 배워 당시의 세태[時態]를 따르지 않았다.
재상 이자위(李子威)가 그들을 싫어하여 말하기를,
“만약 이러한 무리가 오랫동안 문한의 지위에 있게 된다면
반드시 후대의 사람들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아뢰어 이들을 내쫓았다.
뒤에 경산부사(京山府使)가 되어 나아갔는데, 자비로운 정치[惠政]를 베풀었다.
숙종(肅宗)이 연영전(延英殿)을 열고 불러다가 서적을 관장하게 하며,
매번 책을 볼 때마다 의심되는 바가 있으면 즉시 항상 그에게 질문하였으며,
선배(先輩)라고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왕이 즉위함에 이르러,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사신의 임무를 받들고 요(遼)에 가는데
길에서 북쪽 변방이 큰 기근으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을 보고
역마(驛馬)를 달려 상서하여 창고를 열어 그들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돌아오자 백성들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분이 우리를 살린 상공(相公)이다.”라고 하였다.
후에 여진(女眞)이 요를 침략하여 동쪽 변경의 여러 성(城)을 모두 함락시키고,
오직 내원성(來遠城)·포주성(抱州城)의 2성만이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았는데,
식량이 다하여 재물로써 값을 줄여 우리에게서 곡식을 사가고자 하였으나
변방의 관리들이 백성들이 무역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김황원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진 것이 아니며[幸災不仁],
이웃을 노하게 하는 것은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怒隣不義].
청하건대 두 성에 쌀을 팔고 아울려 무역을 허락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품이 스스로 언행을 단속하고 경계하지[拘檢] 않으며,
음악과 여색을 매우 좋아하였다. 사망하기에 이르러
예부낭중(禮部郞中) 김부식(金富軾)이 시호(諡號)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요직에 있는 사람[當途] 가운데 좋아하지 않는 이가 있어 이를 막았다.
모란봉에서 내려다 본 대동강 - 사진으로보는 근대한국[서문당]
을밀대 - 사진으로보는 근대한국[서문당] (https://hyangto202.tistory.com/category/)
전김홍도필 관서십경도(傳金弘道筆關西十景圖) 중 평양(平壤) 부벽루(浮碧樓), 지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평양성도(平壤城圖) 서경전도(西京全圖), 163.5cm*377.5cm, 10폭병풍中북성(北城)부분, [국립중앙박물관]
다른 평양성도와는 달리 청록산수화풍으로 그린 이 그림은 화가의 묵서나 도장이 날인돼 있지 않아,
제작된 시기와 화가를 알기어렵지만 서툰 필치의 계화보다는 산수나 인물표현에 더 능숙하였던 것으
로 추측된다. 6세기 고구려의 수도성으로 건설된 이후로 1,300여 년 동안 번성하여 온 옛 평양의 전
경을 굽어본 형식인 오른쪽으로는 높이솟은 대성산과 대동강을 비롯한 자연풍경을 실감 있게 묘사하
였으며, 성곽과 건물들, 정연한 도로망이 비교적 상세하고 빽빽하게 그렸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성곽이나 자연경관을 모두 담으려고 했다는 것을 화면 가득한 자연지물과 건축물 등에서 확인된다.대
동강 변에 빨래하는 아낙네들에서부터 십리사정十里沙汀에 가마를 들고 가는 인물, 말 타고 달리는
인물, 배를 기다리는 다양한인물상들이 묘사되어 당시 평양의 풍속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뛰어난
화풍은 아닐지라도 평양성의 방대한 경관과 내용을 세세하고 꼼꼼한 필치로 표현함으로써 화면에 생
생함을 부여해주고 있다. 그러나 전각과 지명표기를 가로와 세로로 병행함으로써 통일성이 결여된 점
이나 배탄 인물들의 간략한 표현에 비해 배에 탄 인물의 수가 유독 많은 편은 다른 작품과 다른 특징
이다. 또 피마준이 구사된 바위, 선유하는 인물과 능라도 주변에 땔감을 한가득 싣고 가는 인물들의
표현이 다른 작품과는 이채로운 특징이다. 이 그림에는 시대를 판정할 만한 건물이 묘사되어 있어 주
목된다. 대동문에서 왼쪽 성곽으로 이어지는 끝에 종탑이 있는데, 그 종탑 아래에 육로문이 자리하고
있다. 십폭 중 일곱 번째 화면에 속한 육로문 왼쪽에 전보국電報局이라는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조
선 말기 관청의 하나로, 전기 통신 업무를 관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 사무국이다. 1885년 8월 20
일 한성 전보국이 설립된 이후로 다음해에 평양 등에 전보분국이 설립되었다. 따라서 이그림은 전보
국이 개설된 이후 20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 송인(送人) / 정지상(鄭知常, ?~1135)
雨歇長提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갠 긴 강둑에는 풀빛 더욱 푸르른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남포로 님 보내는 노랫가락 구슬프다
大洞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마를 것인가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의 눈물만 푸른 물결을 더해 가노니...
* 浮碧樓(부벽루) / 李穡(이색, 1328~1396)
昨過永明寺 暫登浮碧樓(작과영명사 잠등부벽루) 어제 영명사 지나다가 부벽루에 잠간 올랐어라
城空月一片 石老雲千秋(성공월일편 석로운천추) 성 위 빈 하늘엔 조각달, 바위는 구름과 함께 천년인데
麟馬去不返 天孫何處遊(인마거불반 천손하처유) 기린은 가고 아니 오네 천손께선 어디서 노니실까
長嘯倚風磴 山靑江自流(장소의풍등 산청강자류) 긴파람 불어오며 산은 푸르고 강물은 절로 흐른다.
단원 김홍도의 ' 浮碧樓 宴會圖 ' 입니다.
사람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크로즈업 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림은 사진과 달리 다소 거리가 있더라도 한장의 화폭속에 임의로 넣을수 있어서 편리하지요.
위 그림도 모란봉과 득월루까지 거리가 제법되지만 2m짜리 큰 화폭에 다 넣어 그려냈습니다.
을밀대(乙密臺)쪽에서 대동강으로 내려다 보고 그렸는데, 능라도의 한적한 모습도 보입니다.
좌 상은 최승대(最勝臺)가 있는 모란봉 정상 (95 m)으로 이 그림에서는 아주 작게 그렸다.
우측 하단에 있는 건물들은 '영명사(永明寺)'란 절이고,
우측 끝 건물은 '전근문(轉錦門)'으로 북한국보 22호이다.
전금문 위는 '득월루(得月樓)' 라고 하는데 이름이 몇 번 바뀌었다 함.
자 ~ 그럼 처용무가 한창인 무대 중앙을 한번 살펴볼까요.
첫째 - 부벽루 중앙에 삐딱하게 앉아있는 양반이 평안도관찰사(평안감사) 입니다.
평안도사나이 즉 평양 보스들의 기본 컨셉이 저렇게 삐딱하게 건방지게 앉는것이 특징이다.
김두한과 쌍벽을 이루었던 평양박치기 이화룡도 모든 영화에서 연기할 때 삐딱하게 앉는다.
북한의 김정일, 김정은까지 건방지게 삐딱이앉아, 사람들과 환담하는 모습들이 자주 보인다.
둘째 - 평안도는 조정에 세금을 내지 않는 유일한 지역입니다.
당시 중국의 명나라나 청나라에 오고가는 사신을 모두 다 맞이하고 또는 환송하는 곳으로
이곳에서 청나라의 정보나 속내를, 미리 접대를 통해 알아내어 조정에 전해지곤 하였지요.
기생은 그만큼 수요도 많고, 또 외국어도 잘 해야하므로 수준도 높고 수입도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평안감사는 조정에서도 실세중의 실세가 임명되곤 하는데,
재정도 자치로 운영되어 그야말로 임명되면 수많은 기생과 함께 꿈같은 2년의 임기를 보내게 되지요.
사양할리 없겠죠. 그래서 " 평안감사도 지하기 싫으면 그만이다 " 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셋째 - 평안감사 옆에 놓인 2개의 함은 무었일까요 ? 축의금 함 입니다.
평안도는 재정이 독립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늘상 연회때마다 부조금을 받지요.
새로 부임한 감사가 각 고을의 목사,군수,현감들을 다 알 수는 없겠죠.
해서 관아에서 오래 근무한 면식이 넓은 총명한 관기가 금전, 은전으로 구분해서 받고 기록하는데.
좌측은 무관 오른쪽은 문관인데 우측의 2명은 기록중인지 안보이네요 .
가끔, 실록에 공금을 유용한 사례가 있지만 왠만한 부정은 묻힐만큼 위세가 대단하였슴.
잔치에는 상관없이 능라도에는 농사일에 열심입니다.
과일상을 이고 가는 아주머니들과 큰 상에 떡과 음식을 잔득차린 상을 네명이서 살금살금 합니다.
녹의를 입은 사람은 " 아~ 꾸물대지 말고 날래날래 오시라요" 하면서 빨리 서두를 것을 주문하고 있다.
행사장 안내를 맡은 포졸 두세명이 정신없이 움직이지요.
공연장의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게 질서유지에 회초리까지 들고 있지요.
이곳에도 통로확보 하느라 접근을 막고있는데 어린 아들은 구경 가자며 조른다.
재빠른 녀석 두명은 석탑앞에 숨어 엎드려 구경에 여념이 없다.
조금 멀리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오른쪽 아래 가마꾼도 보이는 군요.
사인남여(四人藍輿)는 종2품 이상이 타는데, 관찰사가 종2품이라 평안감사가 타고온 가마 입니다.
그림에 그려 넣은 것은 관찰사가 주최하는 연회라는 뜻이겠지요. 원래 가마는 등급이 많은데요.
사대부들이 가마 타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만큼, 가마를 메는 백성들은 그만큼 고단하였겠지요.
역시 나이가 좀 든듯한 사람이 언덕배기에 앉아 " 씨바 ~ 연회고 뭐고 숨차 죽겠다 " 하는 것 같죠?
힘들어 하는 모습을 어떻게 저렇게 쓱쓱 줄 몇개로 그릴까 ? 단원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솜씨입니다.
그래서 영,정조때는 수시로 암행을 보내 가마타는 것을 적발하여 혼내고 귀양도 보내고 했답니다.
엿장수 겠죠 ?
난렵한 애들은 나무에 올라가 구경하고 있네요.
요놈들은 한판 하네요.
중학생 쯤으로 보이는데 왼쪽놈이 더 딴딴하게 보이는데요.
이 사람은 또 왜? 멱살이 잡혀 있을까?
아마도 빠쁜 농사철에 왠.. 연회냐고 큰소리로 야유를 보냈나 봅니다.
하긴 일반백성이야 어찌 좋을수만 있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어~ 취한다. 허리끈도 풀리고 갓도 벗겨지고, 낮술에 취하면 사또도 몰라보는데....
위 그림은 따로 임모하여 음식점이나 술집, 아니면 브라인더 자수 무늬로도 많이 활용하는데
누구 그림이냐 ? 해서 시비가 많은데... 바로 김홍도 부벽루의 일 부분입니다. (위 동그라미 부분)
傳 金弘道 筆 平安監司饗宴圖 세로 71.2cm, 가로 196.9cm [국립중앙박물관]
대동강에서 평안감사가 베푼 잔치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대동강 위에는 평안감사가 탄 배를 중심
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 및 관선官船이 늘어서 있고 뒤로는 관기官妓들이 탄 배, 음식을 준비하는
배, 사대부나 아전들이 탄 작은 배들이 따르고 있다. 강가에서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있으며, 성
마을 집집마다 환영 깃발이 세워져 있다. 평양에서 열린 잔치의 화려한 면모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