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김홍도필 관서십경도(傳金弘道筆關西十景圖) 中 평양(平壤) 부벽루(浮碧樓), 지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평양성도(平壤城圖) 서경전도(西京全圖), 163.5cm*377.5cm, 10폭병풍 中 북성(北城)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사명대사(四溟大師) 禪詩
- 法名 : 유정(惟政), 號 : 송운(松雲), 사명당(四溟堂) -
浮碧樓用李寒林韻(부벽루용이한림운)
- 浮碧樓에서 -
三國去如鴻(삼국거여홍) 삼국시대의 역사는 기러기처럼 자취 없고
麒麟秋草沒(기린추초몰) 기린의 전설은 가을 풀에 묻혔구나
長江萬古流(장강만고류) 긴 강물은 먼 옛날부터 도도히 흐르는데
一片孤舟月(일편고주월) 저 달은 한 조각 외로운 조각배인가
悟道頌(오도송)
一太空間無盡藏(일태공간무진장) 빈 태허공에 한없이 쌓였어도
寂知無臭又無聲(적지무취우무성) 고요히 아는 그건 냄새도 없고 소리도 없다네.
只今聽說何煩問(지금청설하번문) 지금 듣고 말하는게 그것인데 번거로이 왜 묻나?
雲在靑天水在甁(운재청천수재병)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하지 않았던가?
壬辰十月(임진시월)
十月湘南渡義兵(시월상남도의병) 시월에 의병들이 남쪽으로 건너가니
角聲旗影動江城(각성기영동강성) 나팔소리와 깃발이 강성을 뒤흔든다
匣中寶劍中宵吼(갑중보검중소후) 칼집 속 내 보검이 한밤중에 외치누나
願斬妖邪報聖明(원참요사보성명) 사악한 요귀들을 베어 임금님 뜻에 보답하리
過咸陽(과함양, 함양을 지나며)
眼中如昨舊山河(안중여작구산하) 옛 산하가 내 보기엔 어제와 같은데
蔓草寒煙不見家(만초한연불견가) 우거진 풀 시린 안개에 집은 보이지 않고
立馬早霜城下路(입마조상성하로) 서리 내린 초저녁 성 밑에 말을 세우니
凍雲枯木有啼鴉(동운고목유제아) 얼어붙은 구름 아래 고목에는 까마귀 울음소리
過邙山(과망산, 북망산을 지나며)
太華山前多少塚(태화산전다소총) 태화산 앞쪽의 수많은 저 무덤들은
洛陽城裏古今人(낙양성리고금인) 낙양성에 대대로 살아오던 인물들일세
可憐不學長生術(가련불학장생술) 가여워라, 불노장생 배우지 못 하고서
杳杳空成松下塵(묘묘공성송하진) 한갓되이 소나무 아래 티끌이 되었구나
謹奉洛中諸大宰乞渡海詩(근봉락중제대재걸도해시)
- 일본에 가며 재상들에게 시를 부탁함 -
年來做錯笑餘生(년래주착소여생) 요 몇 년 동안 주착부린 일이 남은 평생 웃음거립니다
數月荷衣滯洛城(수월하의체낙성) 서너 달 동안 장삼 자락으로 한양에 머물고 있소이다
愁病平分送春恨(수병평분송춘한) 시름과 병이 반인 채 한스럽게 봄이 지나갑니다
歌吟半惱憶山情(가음반뇌억산정) 산 속 생활을 그리며 읊조리니 나머지 반도 괴로움이지요
浮杯謾道堪乘海(부배만도감승해) 잔 띄워 바다를 건너겠다고 큰소리 치고 보니
飛錫初羞誤說兵(비석초수오설병) 지팡이 날리며 병법에 대해 잘못 말한 것 부끄럽소
爲國重輕諸老在(위국중경제노재) 나라의 모든 일이 여러 노 재상들에게 달렸으니
願承珠唾賁東行(원승주타분동행) 주옥같은 시를 주시어 동쪽 길을 밝혀주소서
在馬島客觀(재마도객관) 대마도 객관에서
爲圍普濟生靈承命渡海時所記雜體詩(위위보제생령승명도해시소기잡체시)
생령을 널리 구제하기 위하여 명을 받들고 바다를 건넜을 때 기록한 잡체시
(在馬島客官左車第二牙無故酸痛伏枕呻吟(재마도객관좌차제이아무고산통복침신음)
대마도 객관에 있을 때 왼쪽 둘째 이빨이 까닭 없이 시리고 아파 베개에 엎드려 신음하다
病扃賓館痛生牙(병경빈관통생아) 병든 나그네 객관에서 생니가 아파오네
坐筭平生百不嘉(좌산평생백불가) 앉아서 한평생을 생각하니 좋았던 일 하나 없구나
髮作僧長在路(발작승장재로) 머리 깎고 중이 되어 노상 길 위에서 보냈으니
留鬚效世且無家(류수효세차무가) 수염 길러 세속을 배웠으나 집이 없다네
煙霞事業生難熟(연하사업생난숙)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일 아직 서툴고
存省工夫策未加(존성공부책미가) 깨달음에 이르는 공부에도 전념치 못했지
進退兩途俱錯了(진퇴양도구착료) 나아가고 물러서는 두 길 모두 그르쳤는데
白頭何事又乘槎(백두하사우승사) 머리 하얀 사람이 뭐 하러 배를 또 탔는가
雨夜呈長官(우야정장관) 비오는 밤 장관님께 드리며
遠客坐長夜(원객좌장야) 먼 곳에서 온 나그네 긴 밤 잠 못 들고
雨聲孤寺秋(우성고사추) 외로운 절엔 가을 빗소리만
請量東海水(청량동해수) 동해물의 깊이를 재어보게나
取看淺心愁(간취천심수) 내 근심과 어느 것이 더 깊은지
사명대사가 1604년 가을 일본 쓰시마 섬에서 쓴 5언절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회담을 앞두고
외로운 산사에 내리는 가을비 소리를 들으며 근심이 깊음을 표현했다. 강학자 씨 제공
靑松辭(청송사)
松兮靑兮(송혜청혜) 소나무여 푸르구나
草木之君子(초목지군자) 초목 중의 군자로다.
霜雪兮不腐(상설혜부부) 눈서리 차가워도 주눅 들지 않고
雨露兮不榮(우로혜부영) 이슬 내려도 웃음보이지 않는구나.
不腐不榮兮(부부부영혜)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한결같고
在冬夏靑靑(재동하청청) 겨울에도 여름처럼 푸르디푸르구나.
月到兮節金(월도혜절금) 달뜨면 잎 사이로 달빛 곱게 체질하고
風來兮鳴琴(풍래혜명금) 바람 불면 거문고소리 청아하구나.
월정사 사명당대선사 진영 (靈隱寺四溟堂大禪師眞影),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1호
1544년(중종 39) 경상도 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1577년 13세 황여헌(黃汝獻)에게서 《맹자》사사
1559년(명종 14) 16세 부모별세로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 됨
1561년(명종 16) 18세에 출가 2년만에 승과(僧科)에 합격
1575년(선조 8) 32세에 묘향산 보현사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제자 됨
1586년(선조 19) 43세에 옥천산의 상동암에서 마침내 무상(無上)의 법리 대각(大覺)
1589년(선조 22) 46세에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己丑逆獄)에 휘말려 투옥, 무죄로 풀려남
1592년(선조 25) 49세에 임진왜란 참전, 전공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1594년(선조 27) 51세에 외교밀사로 1597년까지 일본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와 네 차례 회담
1597년(선조 30) 2월 54세에 정유재란(丁酉再亂)
1604년(선조 37) 비공식 정부대표로 일본 방문 160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와 회담
1605년(선조 38) 3,000포로 송환 및 통신사 교류 발판 마련하고 귀국
1610년(광해군 2) 67세에 해인사에서 法門
■ 壬辰倭亂과 僧軍長 四溟大師장철균 / 월간조선 8월호
국난극복에 앞장선 외교의 달인 사명대사 유정 이야기
조선에선 저평가, 일본에선 높이 평가받는 호국승려
서산대사를 도와 승명(僧兵) 일으켜 평양탈환 작전에서 전공(戰功) 세워 …,
성곽 구축, 군기(軍器) 제조 등에도 기여
전후(戰後) 비공식 사절로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와 회담…,
포로 송환 등 관계 정상화의 기틀 닦아
사명대사(四溟大師·1544〜1610)는 1592년(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자
승군(僧軍)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운 승병장(僧兵將)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15만 일본군이
‘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는 명분하에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었다.
7년간 계속된 이 전쟁을 우리 역사에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の役)’,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萬曆之役)’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이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고 부르면,
대마도를 거점으로 고려와 조선을 약탈해 온 왜구(倭寇)가 일으킨 전쟁이 된다. 이 전쟁은
왜구가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된 일본 막부가 조선을 정조준해서 침략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명의 참전으로 국제전으로 확대된 ‘동북아 7년 전쟁’이었다.
따라서 이 전쟁을 단순히 임진년에 발생한 왜란이라고 하는 것은 검토를 요한다.
본문에서는 ‘조선·일본 전쟁’ 또는 약칭으로 ‘조·일 전쟁’으로 부르기로 한다.
조선의 요청에 따라 참전한 명나라는 7년의 전쟁기간에 4년이나 휴전하면서
일본과 비밀리에 강화회담을 진행했다. 이 회담에서 조선이 소외된 것은 물론이고
일본은 명 측에 조선의 분할을 제의하는가 하면, 명은 조선을 직할통치(直轄統治)하려고 했다.
전시에도 치열한 외교가 병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일 전쟁은 열전(熱戰)과 외교전(外交戰)이 혼합된 이중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 전란 중에 사명대사(이하 사명·四溟 또는 그의 법명인 유정·惟政으로 호칭)는
외교밀사로 일본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만나 이러한 명·일 간의 음모를 탐지하고,
전란 후에는 조선의 외교사절로 일본을 방문하여
막부의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담판하는 등 대일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하였다.
올해는 을사조약 110주년, 광복과 분단 70주년 그리고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오늘날의 불편한 한·일 관계를 돌아보면서 불승(佛僧)에서 호국(護國) 승병장으로 그리고 외교사절로
변신하며 조선을 구하는 데 앞장섰던 사명대사의 생애를 추적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파란만장했던 사명대사 일대기
사명대사에 대한 호칭은 다양하다.
그의 법명은 유정(惟政),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으로 불린다.
일본에서는 송운대사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유감스럽게도 사명대사의 외교활동은 우리 역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그의 생애와 활동에 관해서는 현존하고 있는 허균(許筠)의 석장비(石藏碑),
사명의 고향 밀양에 있는 영당비(影堂碑),건봉사에 있는 기적비(紀蹟碑),
그리고 파괴된 석장비를 복원한 사명대사비(四溟大師碑) 등 네 개의 비를 통해 복원되고 있다.
그리고 사명의 행적으로는 그의 제자 해안 등이 남긴 글들을 모은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에 전해지고 있다.
이들을 통해 사명대사의 생애를 재구성해 보면,
그는 1544년(중종 39) 현재 경상도 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7세에 이미 조부에게서 사략(史略)을 배웠고,
13세에는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던 황여헌(黃汝獻)으로부터 《맹자》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가 18세 되던 1561년(명종 16)에 승과(僧科)에 합격하였다.
출가한 지 불과 2년 만에 승과에 급제하면서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당시의 쟁쟁한 문사들과도 교유하게 된다.
사명의 이러한 학문적 배경은 그의 가족력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의 증조부 효곤(孝昆)과 조부 종원(宗元)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낸 사족(士族) 출신이었다.
현존하는 그의 시문과 외교활동에서 보여주었던 탁월한 협상능력은
사족 집안의 학문적 소양을 반영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1575년(선조 8)에는 묘향산으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제자가 되어 선리(禪理)를
참구하다가 43세 되던 해 옥천산의 상동암에서 마침내 무상(無上)의 법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1589년에는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己丑逆獄)에 휘말려 투옥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났는데,
이는 당시의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했던 시대상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자 그는 스승 휴정을 도와 승병을 일으키고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워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1594년(선조 27)에는 외교밀사로 일본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와 네 차례 회담하면서
명과 일본의 비밀회담 내용을 탐지해 내 조선의 위기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전후에는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회담하여 강화를 협의하는 등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러한 외교활동에 관해서는 뒤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0여 년의 호국활동 후 64세에 세속의 일을 정리하고
해인사로 내려가 정양(靜養)하다가 1610년(광해군 2) 67세에 법문하였다.
사명이 활동했던 시대의 조선 정국과 불교의 위상
사명 시대의 조선은 정치적으로나 불교사적으로 매우 불행하고 암울한 시기였다.
조선을 창건하면서 표방한 정도전(鄭道傳)의 유교주의는 고려의 쇄망이 불교의 지나친 국정개입과
속세참여로 정치와 사회가 문란해진 데 따른 것이었음을 감안할 때 당연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시일이 경과하면서 점차 불교에 대한 배척이 도를 넘게 되었다는 것이다.
태종은 사원과 승려 수를 제한하고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감축시켰고,
세종은 승록사(僧錄司)를 폐지하고 흥천 흥덕사를 제외한 도성 내 모든 사원을 철폐했다.
세조 대에 일시 흥불 시책들이 추진되었으나, 연산군에 이르러
선종본사인 흥천사와 교종본사인 흥덕사까지도 철폐하여 관청으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승들을 궁방의 종으로 삼게 하는가 하면 승려를 환속시켜 관노(官奴)로 삼게 하였다.
이어 중종도 사원의 전답을 향교에 부속시켰고, 불상과 종을 녹여 무기를 만들게 하였다.
불교의 경제적 기반은 거의 대부분 무너져 파불(破佛)의 지경에 이르고,
사회적 위상과 승려의 신분도 철저하게 격하된 것이다.
명종 대에 이르러 수렴청정(垂簾聽政)하던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승과가 부활되고
도승제(度僧制)가 다시 시행되면서 휴정과 사명이 발굴되기도 하였으나,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후 불교가 위치할 곳은 산간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산중승단불교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정치, 사회적으로도 연산군의 무오사화(戊午士禍) 등
4대사화(四大士禍)의 여파로 축적되어 온 갈등과 모순이 한꺼번에 표출되고 있었다.
사화의 영향은 그 후 조선의 역사에서 치명적 상처를 남기게 되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림파(士林派)와 훈구파(勳舊派)의 정치적 입장과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대립이 사화들을 거치면서 더욱 증폭되어 갔다.
선조 즉위를 전후하여 사림파 간의 치열한 내부 투쟁이 일어나고
여기에 잔존 훈구파들이 가세하면서 본격적인 당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특히 1589년(선조 22) 정여립 역모사건을 기점으로 정치세력이 붕당(朋黨)화하면서
정치가 더욱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빚게 된다.
이러한 붕당정치의 지속은 지배계층의 혼란과 부패로 이어지고
국가재정이 고갈되면서 다시 일반 백성들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이어져,
농민들이 수취를 피해 도망하거나 도적이 되는 위기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사명이 살던 시대는
이러한 조선사회의 내부 모순으로 인해 국가체제가 효율적으로 운용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筆者未詳 平壤城奪還圖 세로 97.9cm, 가로 39.7cm, 가로 37.6cm[국립중앙박물관]
아쉬운 점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등 승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명군 중심의 전투기 묘사된 점이다.
승병장으로 변신한 사명대사
이러한 정치, 사회적 혼란의 상황에서 일본군이 침략하자
조선은 위기 대처 역량에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파당적 이해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던 상황을 감안하면 전쟁 초기의 비참한 패퇴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592년(선조 25) 일본군의 침공 사실도 3일 후에나 알게 된 조선 조정은 일본군이 빠른 속도로
북상하자 선조는 서울을 사수한다던 약속을 어기고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파천(播遷)했다.
임진강 전투에서도 패전하자 이덕형(李德馨)을 청원사로 삼아
명에 원병을 청하기로 결정하고 선조는 압록강 의주로 피란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선발대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평양성을 함락하자
선조는 압록강을 넘어 랴오둥으로 가서 명에 내부(內附)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유성룡(柳成龍)은 “임금이 한 발짝이라도 우리 땅을 떠나면
조선은 더 이상 조선이 아닙니다(朝鮮非俄有也)” “동북의 여러 고을이 아직 건재하고,
충의에 찬 의병이 곧 들고일어날 것”이라고 하면서 선조를 계속 설득해 겨우 랴오둥 내부를 막았다.
의주 행재소로 피란한 조선 조정은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静)을 초치해
세란(世亂)을 구해 줄 것을 당부하고 그에게 승군(僧軍)을 관장하게 하였다.
휴정은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한편,
스스로 모집한 승병 1500명을 거느리고 순안 법흥사에 주둔했다.
당시 금강산에 머물던 사명은 의승(義僧)을 모으고 있었는데 휴정의 격문을 보고 법흥사에 합류했다.
사명이 법흥사에 합류하자 73세의 고령인 휴정은
실전의 모든 책임을 사명에게 맡기고 그를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삼았다.
그는 승병군을 이끌고 일본군이 점령한 평양성 인근에 주둔했는데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의승군의 수는 무려 5,000여명에 이르렀다.
1592년 12월 명나라 원군이 도착하자
1593년 1월 관군과 사명의 승군이 합동으로 평양성을 공략해 평양성을 탈환했다.
평양성 탈환 후 개성까지 회복한 관군과 명의 원군은 서울 수복을 위해
일본군을 추격하며 전투를 벌이던 중 벽제관(碧蹄館) 부근에서 크게 패하였다.
그러나 승병군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장군과 함께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고,
이어 노원평(蘆原坪) 전투에서도 사명의 승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선조는
사명을 당상직(堂上職)에 오르게 해 승려를 당상관으로 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1594년(선조 27) 4월 이후 일본군은 남쪽으로 퇴각하고 사실상 휴전상태로 들어가고 있었다.
사명대사는 산성수축에 착안하여 산성개축에 노력하는 한편,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고, 투항한 일본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전수받도록 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서산대사가 승병을 지휘하여 평양탈환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十月의 밝은 달밤 湘南으로 義兵들 건너가는데
나팔소리 깃발 휘날리니 江과 城도 感動한듯
갑속의 보배 칼을 빼드니 밤중에 범이 성낸듯
바라건데 倭賊 무찔러 나라에 報答 할 것을
明·日 비밀회담과 소외된 조선
1593년(선조 26) 평양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명군은 서울 바로 북쪽인
벽제관에서 일본군에 패하고는 개성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평양으로 후퇴해 버렸다.
일본 역시 벽제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도 서울에 머물지 않고 남쪽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1592년 4월 시작된 조·일 전쟁은 이듬해 6월 진주성이 함락된 이후
1597년 2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기까지 4년 동안 전투가 없는 소강상태에 이른다.
왜 승리한 일본군이 남쪽으로 퇴각하고 휴전상태로 들어간 것인가? 이 4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명은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일본군과 격전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다.
일본과 강화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명군의 총책인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우리가 왜와 원수질 까닭이 없다. 속국이 넘어지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특별히 군사를 일으켜서 서울과 평양을 수복시켜 주었다. 조선도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군의 선봉인 고니시 유키나가도 임진강을 끼고 대치하고 있으면서 강화에 적극 응했다.
명은 1592년 9월 심유경(沈惟敬)을 평양으로 보내 고니시 유키나가와 회담하고
그 결과를 당시 조선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에게 알려 왔다.
“일본군과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50일 기한으로 왜병은 평양 서북쪽 10리 밖으로 나가서
약탈하지 말 것이고, 조선군사도 10리 안으로 들어가서 왜군과 싸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명·일 양국이 이미 휴전에 합의했던 것이다.
이러한 명·일 강화회담에 조선은 완전히 소외되어 어떤 내용이 오고 가는지 모르고 있었다.
이 같은 회담의 동향을 눈치챈 사람이 재상 유성룡(柳成龍)이었다.
유성룡은 명 제독 이여송에게 일본과 강화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간곡히 설명했으나,
이여송은 이 문제가 명 황제와 조정의 결정이니 자신이 바꿀 수 없다고 하면서
방해하면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처단하겠다고까지 했다.
그리고 명은 조선에 패문을 보내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보복하지 말라고 하였다.
휴전을 성사시킨 심유경은 북경을 다녀온 뒤
1593년 4월 용산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다시 비밀리에 만나 회담한 후, 명의 사절로 일본을 방문했다.
명의 사절에게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음 7개항의 강화조건을 제시했다.
1. 황제의 현숙한 여자를 일본의 후비로 삼는다.
2. 관선과 상선의 왕래를 허용한다.
3. 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서약서를 쓴다.
4. 조선의 8도 중 4도만 조선국왕에게 주고 4개 도는 일본이 갖는다.
5. 조선의 왕자와 대신 한두 명을 일본에 보낸다.
6. 두 왕자(순화군·의화군)는 돌려보낸다.
7. 조선의 대신이 위약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쓴다.
그런데 심유경이 명에 돌아가 회담결과를 보고할 때는 히데요시가 제시한 7개항을 보고하지 않고
국서를 변조하여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내용만 포함시켰다.
이어 1596년 9월 일본에 파견된 명의 사절은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는 명 황제의 칙서를 전달했다.
이것이 히데요시에게 전달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더욱 믿기 어려운 일은 북경으로 돌아온 명의 사절이 다시 표문을 위조해서
‘수길(秀吉)이 책봉을 받고 사은(謝恩)하였다’고 보고했다.
양국의 국서가 위조되는 상황에서 화의가 성사될 리 없었다.
히데요시는 결국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고 1597년 2월 조선을 재침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에도시대에 그린 사명대사와 교섭을 벌인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최초 가토의 부하인 오오키 도네리가 그리고 1800년대에 다시 모사한 초상화 [혼묘사 소장]
에도 말(19C초)우타가와 쿠니요시(歌川国芳) 作 고니시유끼나까(小西行長) 구치에(口絵, 卷頭畫)
일본군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를 찾아간 외교밀사 사명
휴전상태가 지속되고 고니시와 심유경이 극비리에 강화회담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원수 권율과 명군 장수 유정(劉綎)이 사명대사를 외교밀사로 위임해
당시 울산 서생포(西生浦)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의 제2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미 경쟁관계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왜 사명에게 이러한 중대한 일을 맡겼는지 기록된 바는 없으나
가토가 불교신자였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가토와 경쟁관계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였던 독실한 천주교도였다.
동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생포 성은 바다와 육지를 잇는 길목으로 당시 일본군의 요새였다.
1594년(선조 27) 4월 12일. 사명대사가 이 성으로 가토 기요마사를 찾아갔다.
사명의 목적은 물론 적정을 탐방하고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는 명·일 회담의 내용을 탐문하려는 것이었다.
적진에 들어간 사명은 ‘북해 송운(松雲)’이라 자칭하고
‘대선사(大禪師)’라 소개하면서 가토를 대면하였다고 전해진다. 가토가 휘호를 청하자,
‘자기 물건이 아니면 털끝만치라도 취하지 말라’는 필묵을 써 주었다고 한다.
사명은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른 불승(佛僧)의 필담으로 가토를 압도하는 한편,
가토와 고니시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정보도 적절히 이용했다.
그래서 그동안 명·일 간에 은밀히 추진되어 온 강화조건이
‘조선 8도를 분할해서 남쪽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왕자 1인을 일본에 보내 영주시킬 것’ 등이 포함된 5개 항임을 가토로부터 알아냈다.
그리고 이 5개 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시한 7개 항 중에서 2개 항을 제외시킨 것인데
그것은 고니시가 명나라와 강화를 쉽게 성사시켜 공을 차지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가토와의 경쟁에서도 이기기 위해서였던 것인데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가토는
오히려 고니시에게 공을 뺏기지 않기 위해 사명대사에게 그 내용을 털어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명은 이 내용을 명의 유정과 조선의 김명원에게 보고(淸正營中 探情記)하여
명·일 강화를 저지시켜야 함을 설파했다. 이후 사명은 1594년(선조 27) 7월 10일,12월 23일
그리고 1597년(선조 30) 3월 18일 등 3회에 걸쳐 서생포로 다시 들어가 가토와 회담했는데,
마지막 회담은 가토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두 번째 왕래 후에는 선조에게 적을 토벌하고 백성을 보전할 글(討賊保民事)을 올렸다.
또 네 번째 방문 후인 1597년(선조 30) 4월에는 일본의 재침이 분명히 예상되므로
사태를 방치하지 말고 병력을 총동원하여 육로와 수로로 협공하여 적을 섬멸시킬 것을 건의했다.
허균이 쓴 석장비문에는 서생포에서 가토와 사명이 나눈 ‘설보화상(說寶和尙)’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가토가 “너희 나라에 보배가 있느냐”고 묻자 사명은
“우리나라에는 보배가 없다. 보배는 일본에 있다”고 대답했다.
가토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묻자 사명은 “우리나라에서는 네 머리를 보배로 알고 있다.
그러니 보배는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고 답했는데 이 말에 가토는 놀라서 탄복했다고 한다.
이런 일화 때문에 사명은 설보화상 즉, ‘보배를 말한 스님’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비공식 외교사절로 대마도 방문
서생포 회담은 명·일 간의 조선영토 분할 획책 등
중대한 정보를 파악해 이를 저지하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고,
가토와 고니시 사이의 갈등조장으로 적진의 분열을 유도했으며,
적정탐문을 통해 군사적 대비를 가능케 했다는 점을 성과로 요약할 수 있다.
조·일 전쟁은 열전을 방불케 하는 외교전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시에도 중단되지 않고 전개된 사명과 가토와의 서생포 회담은
명·일 비밀회담으로 분할될 위기에 있던 조선을 구한 최고의 외교전이었다고 평가된다.
전쟁은 본국에서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599년(선조 32) 일본이 조선과 화친을 원한다며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그 뜻을 조선에 보내 왔다. 조선으로서는
원수와 화친을 맺을 수 없다는 대의명분론과 중신들의 파쟁으로 인한 의견불일치로 결정을 미루어 왔다.
이렇게 여러 해를 끌던 중 1604년(선조 37) 대마도주가 다시 사신을 보내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이라면서 강화에 응하지 않으면 다시 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전해 왔다.
조정에서는 우선 사절을 만나 진의를 파악하는 한편,
일본의 동향을 직접 살펴보기로 하고 사명을 대마도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서 왜 대마도가 조·일 강화에 적극 나섰는지부터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일 전쟁으로 가장 타격을 입은 곳이 대마도였다. 대마도는 조·일 간의 길목일 뿐 아니라
조선과 무역을 해야 먹고살 수 있는 곳인데 조선과 무역이 10년 동안이나 단절됐기 때문이다.
새로이 일본 열도를 장악한 도쿠가와가 조선과의 강화를 열망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대마도가 먼저 앞장서서 조선과의 화의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왜 이러한 대마도의 제의와
일본의 재침의지를 파악하기 위해 조선의 정식 사절이 아닌 사명을 보내야만 했을까?
우선 전쟁에 군대를 파견했던 명과의 관계를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명과 상의 없이 조선이 단독으로 일본과 외교교섭을 재개하면 명과의 정치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선이 정식 대표를 파견하기 곤란했을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의 정식 사절을 일본 수도에 보내지 않고
비공식 사절을 대마도에 보내 진위 여하를 타진해 보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대외교에서는 ‘막후채널’로 불리는 이러한 비공식 외교통로를 자주 이용한다. 그리고 특별히
사명을 선택한 이유는 이미 서생포 회담에서 검증된 사명의 외교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마도에 도착한 사명은 양국 화친을 추진하고 있는 대마도주와
평조신(平調信) 승려 겐소(玄蘇) 등을 만났으나 자세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대마도에 도착해서 서산사에 머물렀으며 겐소 스님으로부터
일본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고,
대마도주도 일본이 재침 의지는 없을 것으로 본다고 사명에게 알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대마도 측에서 후일 조선에 보내 온 서한을 보면,
사명이 대마도 측과는 물론 일본과의 화친의 필요성에 공감한 것으로 보이며,
이때 대마도에 있던 조선인 포로의 송환을 요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회담과 포로 3000명 송환의 진실공방
대마도에서 3개월 동안 머문 사명은 11월경 예정에 없던 일본 본국으로 떠난다.
당시 조선은 사명에게 대마도를 방문하여 도쿠가와의 재침 위협에 대한 진위 여하를 탐문하라는 것이었다.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논의하는 문제에 관해 아직 결정을 하지 못하고
미루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 본국은 방문 대상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사명이 조정으로부터 위임받지 못한 일본까지 가게 된 것일까?
그 배경에 관해 기록된 바는 없지만,
사명의 일본 방문 결과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 동기를 역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후일 대마도주가 조선에 보낸 서한이 실록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사명은 대마도와 화친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일본 본국과 화친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을 우려했다.
그러자 대마도주가 도쿠가와에게 편지를 보내 그 뜻을 전달했는데
도쿠가와가 “송운대사(사명)를 인도하여 일본에 오면 성의를 다하겠다”고 연락해 와서
사명이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사명은 대마도주의 주선과 도쿠가와의 요청에 의해 일본에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사명이 귀국 후 대마도의 승려 겐소와 대마도주의 측근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당시 사명은 일본에 가서 국정을 직접 탐문하고, 신의에 입각한 화평 가능성을 타진하며
일본에 잡혀간 피로인(被擄人)을 송환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명은 가토와 서생포에서 회담할 때도 불자의 입장에서 일본과의 화평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음을 볼 때
대마도주의 권유와 도쿠가와의 요청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새로운 통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명은 도쿠가와와 1605년 2월과 3월 두 차례 후시미 성에서 만났지만
일본의 공식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고, 관련 자료들을 통해 이 회담 내용의 일부만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까지 발굴되고 연구된 일본 측 기록과 사명의 귀국 보고, 그리고 일본 측과 오고간 서한,
석장비 등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후시미 성에서 협의된 사항을 정리해 보면,
1.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략하지 않는다.
2. 상호 화평의 상징으로 통신사를 교환한다.
3.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을 송환한다.
4. 전란 중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범인을 조선에 인도한다는 것 등이다.
일본 측 자료에서는 “이 회견에서 일·조 간의 화의가 정해졌다”는 기록도 발견되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회담하는 사명의 신분은 정식 외교사절이 아니고
국서도 가지지 않은 평범한 승려 신분에 불과했지만,
그는 일본 막부의 최고 책임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외교 담판을 벌인 것이다.
이 자리에서 도쿠가와는 자신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지 않았으며
도요토미 막부와는 다른 정부라는 입장을 밝히고 조선과 강화를 맺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한 데 대해
사명은 강화에 앞서 그 징표로 먼저 일본이 전쟁 책임을 인정하는 내용의 국서(國書)를 조선에 보내고,
왕릉 도굴범을 송환하도록 요구했다는 점에서 이 회담의 의미는 매우 크다고 평가된다.
사명이 일본을 다녀오면서 ‘남녀포로 3,000여 명을 스스로 준비한 양곡을
먹이면서 데리고 돌아왔다’고〈석장비문〉과 〈행적(行寂)〉 등에 적혀 있음과 관련하여
이러한 포로쇄환설의 사실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사명의 귀국 시 피로인 송환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명은 귀국 후 일본의 승려 겐소 등에게 서한을 보내
도쿠가와가 약속한 포로송환을 이행하도록 촉구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명의 귀국 무렵인 1605년 5월에 대마도에서 1,390명의 포로가 송환되었고,
2년 후 1607년에는 후시미 성 합의에 따른 제1차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된 후
송환된 포로가 1,249명이었다는 역사 기록은 확인되고 있으므로
사명이 귀국 시에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는 기록은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포로송환 정황을 세월이 지난 후세에 개괄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四溟大師와 德川家康의 문답시
사명대사가 선조의 부름을 받고 국서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8개월 동안 노력하여 강화를 체결하고 왜군에게 잡혀간 3,5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 때 일본 군주 덕천가강과 함께한 자리에서 읊은 시다.
◇ 德川家康(1542~1616) 問詩
石上難生草 (석상난생초) 돌에는 풀이 나기 힘들고
房中難起雲 (방중난기운) 방 안에는 구름이 일기 어렵다
汝彌何山鳥 (여미하산조) 너는 도대체 어느 산에 사는 새이길래
來參鳳凰群 (래참봉황군) 여기 봉황의 무리에 날아 들었는가?
◇ 四溟大師(1544~1610) 答詩
我本靑山鶴(아본청산학) 나는 본시 청산에 사는 학이려니
常遊五色雲(상유오색운) 언제나 오색 구름을 타고 노닐었느니라
一朝雲霧盡(일조운무진) 어느 날 갑자기 오색 구름이 사라지는 바람에
誤落野鷄群(오락야계군) 잘못해서 여기 들닭 속에 떨어졌느니라
대마도주가 변조한 외교문서로 국교가 정상화된 조·일 관계
사명이 도쿠가와와 회담한 지 몇 개월 후,
소 요시토시 대마도주가 도쿠가와의 인장이 찍힌 국서와 도굴범 두 명을 보내 왔다.
이 국서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우리가 전대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것은 지난해 유정(惟政)에게 말한 대로다’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국서는 대마도주가 변조한 것이었다. 조선은 국서가 변조된 것을 알아챘다.
서체와 연호 등 과거 일본의 국서와 달랐기 때문이다.
도굴범도 선조가 직접 국문했지만 진범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조선은
변조된 국서를 불문에 부치고 도굴범 두 명을 처형한 후 조·일 관계를 정상화하기로 결정했다.
왜 그런 것일까? 우선 조선으로서는 7년의 전란 복구와 민생회복이 시급했다.
이러한 전란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가운데 한반도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세력을 넓히면서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남과 북으로부터 적을 두기에는 안보적 부담이 너무 컸다.(실제로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했다.)
그리고 일본과는 끌려간 포로의 송환도 필요했다.
그래서 국서위조를 알고도 눈감고 1607년 사절단을 일본으로 보내 국교를 정상화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 대마도주는 왜 사명을 도쿠가와에게 데리고 가고,
국서를 변조하면서까지 조선과의 국교재개에 적극적이었던 것일까? 이유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대마도는 섬의 대부분이 산지로 농작물을 경작할 땅이 거의 없어
오랫동안 한반도를 약탈해 온 왜구의 소굴이다. 세종대에 이르러 대마도를 정벌하고
도주에게 왜구를 단속하는 대가로 독점 무역권을 주어 생존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전쟁으로 조선과 무역이 10년 동안이나 단절돼 타격을 입게 되자 섬은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그래서 대마도주는 조선과의 끊어진 관계를 재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이다.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지 않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을 침략할지도 모른다고 위협해
조선 사신을 대마도에 파견하도록 유인하고, 국서를 변조해 조·일 관계 정상화를 공작한 것이다.
생존을 위해 ‘벼랑끝외교’를 구사했던 것이다.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에는
당시 선조가 1607년 일본 막부의 장군 히데타다(秀忠)에게 보낸 국서가 전시돼 있다.
대마도주의 위조 국서에 대한 조선 국왕의 회답을 그대로 전달할 수 없어 대마도주가 다시 위조한 것이다.
전시관에는 위조한 옥새(玉璽)도 함께 전시돼 있다.
1607년 우여곡절 끝에 조선은 여우길(呂祐吉)을 정사(正使)로 하는 통신사(通信使)를 일본에 파견했다.
파견된 1차 사절단의 이름은 ‘회답 겸 쇄환사’였다.
일본이 보낸 국서에 답하고 조선인 포로를 찾아온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양국은 국교를 정상화하고 조선은 1811년까지 12회의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게 된다.
1655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행. 조선통신사는 ‘쇄환사’의 후신이다.[국립중앙박물관]
일본에 보낸 조선통신사는 선진 문화외교의 대사절단
조선에서 파견된 통신사 일행은 400~500명으로 구성됐다.
일행은 대마도에 도착한 뒤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오사카(大阪)까지는 뱃길로,
오사카에서 에도(지금의 도쿄)까지는 육로로 이동했다. 평균 10개월~1년이 소요되는 긴 여정이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통신사가 지나가는 곳마다 성심으로 이들을 대접했다.
통신사 접대 경비로 쓰인 돈이 100만 냥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1709년 에도 막부의 세입이 약 76만~77만 냥이었다고 하니 그 환영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쇄환사의 명칭은 네 번째 방일 때인 1636년부터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로 바뀌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자, 문인, 서예가, 화가 등이 다수 포함됐는데 사절단이 묵는 객사에는
사람들이 찾아와 시문이나 서화를 의뢰하거나 필담을 나누려는 학자들로 줄을 이었다고 한다.
《해유록(海遊錄)》(대마도가 발간한 조선통신사 자료집)에는
‘조선통신사의 방일로 물자뿐만 아니라 예술 학문 등의
교류도 왕성하게 이뤄져 현재 일본 문화의 주춧돌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 앞에는 지금도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이라고 새겨진 현창비가 있고
자료관 입구에는 고려문과 조선통신사비가 세워져 있다.
대마도는 1980년 이즈하라 항 축제 때부터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했는데
지난해 고려 보살좌상과 신라 금동여래입상이
대마도의 절에서 반출된 사건이 일어나 통신사 행렬 재현이 중단됐다고 한다.
일본은 이 조선통신사 유적 유물들을 2017년까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 측에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반대할 이유는 없겠으나
문제는 조선통신사의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양측의 시각이 다르다는 데 있다.
일본은 일본 근대산업시설(군함도 등 조선인 강제노동 현장 포함)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는데
이 과정을 보면서 통신사 유산 등재에 대한 우리의 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통신사 역사에 대한 우리의 연구가 매우 미진한 반면,
일본은 조선통신사의 유적 유물들은 물론 당시 조선통신사들을 안내하고 예우한 기록들까지
잘 보존하고 학계의 연구도 상당한 수준에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조선통신사’라는 호칭이다.
조선통신사는 일본에서 조선에서 온 통신사를 부르는 명칭인데
우리나라에서 여과 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통신사의 역사가 왜곡될 빌미를 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를 ‘일본통신사’, 혹은 ‘통신사’로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조선통신사라는 명칭을 변경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통신사는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단임이 명백하므로 ‘조선통신사’ 대신에
‘대일 조선통신사’라고 공식명칭을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조선에서는 저평가, 일본에선 고평가
사명대사의 외교 업적이 다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숭유배불(崇儒排佛)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조선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일본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일본의 역사책 《근대일본국민사》에는 ‘승장군 유정(惟政) 송운대사(松雲大師)는
승려로서는 아까운 인물이라 할 정도로 지모와 변론을 구비하였다.
그의 대담함은 아무도 따라갈 수 없다. 같은 승려이지만 일본의 겐소나 승태 등과는
완전히 그 자질의 차원이 다르다’고 기록하면서 사명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명대사가 에도 방문 시 머문 곳으로 알려진 오오츠카 본법사의 지근 거리에 위치한
흥성사에는 ‘만기의 앞을 지나 삼계의 위를 초월한다’는 내용의 유묵이 걸려 있는데
그 말미에 ‘송운(松雲)’이라는 사명의 친필이 선명하다.
불교에서 선(禪)의 득도를 표현한 글로 400여 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구마모토(熊本)현은 조·일 전쟁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로 그와 관련된 유품만을 전시한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여기에도 사명의 친필유묵 넉 점이 400년 동안 보관되어 있다.
이 유묵은 절의 초대 주지인 일진 스님이 사명대사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일진 스님은 가토 기요마사의 스승으로 조선 침공 시 가토와 함께 조선에 왔는데
이때 사명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사명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아주 인색했다.
사명대사의 외교활동과 업적에 대한 역사기록은
조정의 유교주의 관료들로부터 의도적으로 폄하되고 평가절하된 것이 여러 자료에서 발견된다.
이들의 사명에 대한 인식은 승병장으로서의 전투능력이나 축성 및
노역의 지휘감독으로서 승도의 통솔능력을 인정하는 정도에서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대사가 불교를 배척하는 조선의 외교사절로
대일 외교활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명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 시(詩) 한 수가 항간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莫通廟三老在 安危都府 一僧歸).’
‘조정에는 세 정승이 있다고 하지만 나라의 안위는 승려 한 사람의 귀국에 달려 있다
당시 왕조실록의 사관(史官)조차도
‘조정에 얼마나 지모가 없으면 왜적의 사신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여
서로 돌아보며 어쩔줄 몰라 하는가. 승려가 아니고서는 국가의 긴급한 대책을 맡길 사람이 없었는가.
조정의 여러 신료들이 평상시에는 묘당에 높이 앉아 있다가 이같이 급한 일을 당해서는
아무도 계책을 내지 못하니, 나라를 구할 계책을 가진 자가 오직 유정 한 사람뿐이던가!
아아, 통탄할 일이로다’라고 적고 있다.(《조선왕조실록》)
일본을 매료시킨 佛僧外交의 소프트 파워
사명대사는 세속을 떠난 선문(禪門)에서는 법맥의 적통자였고,
전장에서는 용맹한 승병장이었으며, 외교에서는 상황을 유리하게 이끈 탁월한 외교 인물이었지만
역사에서는 폄하되어 후세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의 위업은 민중의 구전(口傳)으로 전승되었고 민족의 영웅으로 회자되어 면면히 이어져 왔다.
사명대사의 전설은 조·일 전쟁 당시 민간에 떠돌던 이야기를 수록한 《임진록(壬辰錄)》에서부터 시작된다.
70여 종의 이본이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책으로 일제 때는 금서(禁書)로 지정되기도 했다.
임진록에는 사명의 활약과 함께 사명이 일본 왕을 항복시킨 민족의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암울했던 전쟁 와중에 탁월한 힘을 가진 민족적 영웅의 출현을
소망하는 민중의식이 《임진록》을 통해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738년(영조 14)에는 사명대사의 전란수습의 공로가 인정되어
표충비(表忠碑)가 그의 고향 경남 밀양시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 경술국치, 3·1운동, 6·25 등 나라의 위기 때마다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고 해서 세간의 관심을 모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해 과학계는 고온 다습한 바람이 찬 비석에 닿아
표면에 이슬이 맺히는 결로(結露)현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이 표충비 땀에 대한 사실 여부를 떠나 표충비가 다시 부각된 것은 아직도 어려운 시기를 맞으면
사명대사의 신비한 힘을 기다리는 민중의 소망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사명대사의 대일외교는 호국(護國)외교이자 문화외교였다.
사명의 어떤 힘이 가토를 감화시키고 도쿠가와를 설득할 수 있었으며,
400년이 지나도록 일본에서 높이 평가되는 이유,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 외교력의 기반은 불자(佛子)로서 높은 경지의 내공과 법리의 득도(得道),
그리고 과단성 있는 성품과 학문적 소양 등이 기초가 되어 구성된 힘으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실천적 지성인이자 문장가였다. 특히 사명의 초서(草書)는
당대 최고의 경지에 있었음을 유성룡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높게 평가하고 있다.
사명의 외교력을 오늘날의 개념으로 설명하면 소프트파워에 해당한다.
소프트파워는 물리적 힘이 아닌 문화적 가치로 상대를 감동시켜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말한다.
외교에서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과를 도출해 내는 설득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외교력의 핵심요소이다. 사명이 수행한 외교교섭의 결과가 사명의 소프트파워의 정도를 웅변해 주고 있다.
사명의 선문(禪門) 필담(筆談)이야말로 일본인을 사로잡는 소프트파워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문화재 환수를 주도하고 있는 혜문 스님은 일본으로부터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궤를
환수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문화대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조선시대 협상의 대가였던 사명대사의 외교적인 수완을 이어받았다고 인정받은 것 같아 영광”
이라고 소감을 피력해서 사명의 불승외교를 부활시켰다.
오늘날 한·일 양국 학계에서 사명대사의 외교활동을 재조명하고
중국의 역사학자들도 가세해 연구에 진전을 보이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작금의 경색된 한·일 관계를 보면서
사명이 보여준 대일외교 활동과 그의 탁월한 외교력을 다시 주목해 본다.
아직도 한·일 간에 논쟁이 되고 있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 책임문제, 역사교과서 왜곡 시비,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 들은 과거사 처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아울러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은 외교력이 국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의 부상과 미·중 사이에서 시험대에 오른 한국 외교의 미래을 생각하면서
사명의 외교력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출처/ 월간조선 8월호]
◆ 필자/ 장철균
⊙ 65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駐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駐라오스 대사·駐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저서: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 서희외교포럼대표·前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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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명대사는 "가토 기요마사, 그대의 목이 조선의 보배"라 했다이가환 히스토리텔러 기자 / 경향신문 이기환의 Hi-story / 2023.03.20 06:00
얼마전 문화재청이 강원 고성 건봉사터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승격 지정했습니다.
그런 대접을 받을만 합니다.
건봉사는 금강산 일만이천봉 남쪽 끝인 향로봉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유서깊은 사찰입니다.
520년 고구려 여인(고도령)과 중국 사신(위나라 아굴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또한 ‘염불만일회’의 전통을 간직한 사찰이기도 합니다.
758년 발징 스님이 수행승 31인과 향도계원 1280인과 함께 1만일(27년 5개월)동안
‘아미타불’ 염불을 외며 신생을 닦는 의식을 벌였다죠.
1만일이 되던 787년 어느날 아미타부처의 가호로
31인의 육신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961인의 향도와 함께 극락세계로 왕생했답니다.
능파교(보물)와 불이문(문화재 자료) 같은 문화유산이 존재하고 있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로도 유명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사적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때 약탈되었다가 사명대사가 환수해온 석가모니 부처의 치아 진신사리.
사리 중 12과를 강원 고성 건봉사에 봉안해 두었다.
◆ 선조·광해군이 대를 이어 칭송한 스님
저는 그보다 건봉사를 빛낸 인물에 주목합니다.
그 분이 사명대사 유정(1544∼1610)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보렵니다.
1593년(선조 26) 3월과 4월 선조가 흥미로운 명령을 내립니다.
“승장 유정이 여러차례 전공을 세웠다.
특별히 관직(선교종 판사)을 내려 승병을 통제할 수 있는 지휘권을 주어라.”(3월27일)
“승장 유정의 정예병이 왜적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공을 여러번 세웠다.
그러나 속세를 떠난 유정이 군대의 직함을 원하지는 않을 것 같구나.
특별히 파격적 상을 내려…당상관(堂上官·정 3품 이상)의 직을 제수하여….”(4월12일)
1610년(광해군2) 사명대사가 입적하자 광해군이 애도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산인(山人) 유정은 임진왜란 때 몸을 잊어버리고 난을 구하기 위해 뛰어 들었으니 참으로
의승(義僧)이라고 할 만하다. 지금 그가 죽었으니 매우 슬프다.”(<광해군일기> 1610년 9월28일)
최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승격된 강원 고성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모집한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은 물론이고 건봉사 사적비 및 사명대사 기적비, 경남 해인사 석장비 등에
사명대사의 활약상이 소개되어 있다. |불교중앙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선조와 광해군의 대를 이은 찬사를 받은 겁니다.
이 대목에서 1593년 4월12일자 기사의 말미에 사족을 단 사관의 촌평에 눈길이 머뭅니다.
“…전란을 당해 장수들조차 두려움에 떨었는데 엄청난 전공이 도리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늙은 승려’에게서 나왔다. 이것이 어찌 무사들 만의 수치이겠는가.”
사관은 쉰을 앞둔 사명대사의 분투를 소개하면서 제 몸 하나 피하기 급급했고,
두려움에 떨며 변변히 창칼을 휘두르지 못한 명망 대신과 무사들을 한통속으로 비판했습니다.
최근 사적으로 승격지정된 고성 건봉사. 한국전쟁 전까지는 642칸(속암 전각까지 766칸)에 달하는
대규모 사찰이었지만 한국전쟁 때 거의 전부가 소실되었다. |문화재청·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선승의 참뜻은 백성을 구제하는 것”
사명대사의 공이 얼마나 컸기에 ‘당상관’의 예우로 상찬했을까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의주로 몽진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명대사는 통곡합니다.
“국왕의 깃발이 서쪽으로 향하니 궁성이 텅 비고, 조정의 문무대신들이 길 가운데서 헤맨다…
초의(승려 자신)가 머리를 돌이키니 눈물이 그지 없다.”(<사명대사전집>)
그러나 사명대사는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승군을 이끈 사명대사는 평양성 전투 등에서 큰 공을 세워 선조와 광해군의 극찬을 받는다.
“나라와 백성을 등지고 세상일을 잊어버리는 것이 불자의 도리는 아니고, 산중에서…
마음을 닦는 선승의 참뜻은 결국 세상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분충서난록>)
대사는 건봉사에서 머물면서
“지금 이처럼 어렵고 위태로울 때를 만나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고 설득하며 승병을 모았습니다.
사명대사는 그렇게 모집한 승병을 건봉사에서 훈련시킨 뒤
건봉령을 넘어 평안도 순안까지 천리길을 달려갑니다.(1592년 10월)
그때 남긴 출사표를 보죠.
“왜적이 백성을 어육으로 만들고 길가에 송장이 서로 베고 있네. 통곡하고 다시 통곡하니
날은 저물고 산은 창창하다. 미인(국왕)을 하늘 한 끝에 바라보네.”(<사명당대사집>)
그래도 전쟁이 나자 줄행랑친 임금을 ‘미인’이라고 불러주었습니다.
비단 사명대사 뿐 아니라 이름없는 백성들도 의병의 기치 아래 모였습니다.
이렇게 착한 승려와 백성들이 어디 있습니까. 사명대사는 다음과 같은 시도 남깁니다.
“10월…의병이 건너가니…칼집 속 보검은 밤중에도 울부짖네.
원컨대 요사(왜병)를 베어 성명에 보답코자….”(<사명당대사집>)
사명대사는 승병 2000여 명을 거느리고 대동강 남쪽으로 건너가 왜적의 통로를 차단했습니다.
그런 뒤 1593년(선조 26) 1월 벌어진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특히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은 명나라 군과 함께 모란봉의 적진을 향해 진격하여
한사람의 희생도 없이 적병 2000여명을 죽였습니다.(<건봉사 사적비문>)
선조실록의 사관은 “…전란을 당해 장수들조차 두려움에 떨었는데 엄청난 전공이 도리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늙은 승려’에게서 나왔다. 이것이 어찌 무사들 만의 수치이겠느냐”고 한탄했다.
◆“내가 나서겠다”고 담판을 자처한 스님
비단 전투만이 아니었습니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와의 담판이 눈부십니다.
1594년(선조 27)들어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집니다.
왜군은 서생포(울산)과 거제도. 웅천(창원) 사이 여러 곳에 왜성을 쌓고 지구전에 대비합니다.
사명대사 역시 장기전에 대비, 군량미 충당을 위해 승병을 동원해서 땅을 갈고 보리를 심었습니다.
명나라와 왜 사이에 강화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사명대사는 도원수 권율(1537~1599)과 명군도독 유정(?~1619)의 지시에 따라
서생포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에 들어가 4차례나 회담했습니다.
사명대사는 조정의 명을 받아 울산 서생포에 주둔한 적진으로 들어가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담판을 벌인다.
이때 사명대사는 조선 땅을 떼어줄 것과 조선의 왕자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
왜군이 명나라에 제시한 4가지 강화조건을 알게된다. 사명대사는
“백번 죽는 한이 있어도 일본의 강화조건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버틴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명대사는 선조에게 “허락하신다면 다시 싸움터로 달려나가 왜적을 몰아낼 것이고,
혹시 사절단을 따라 강화회담에 나서라고 하면 반드시 그 일을 성사시키겠다”는 글을 올립니다.
가토와 담판에 나선 사명대사는 명나라와 왜 사이에 추진되던 강화조약의 내용을 알게되었는데요.
4가지 강화 조건은 1)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2)예전처럼 교린할 것,
3)조선 땅을 떼어줄 것, 4)조선의 왕자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이었습니다.
사명대사는 펄펄 뛰었습니다.
“…조선땅을 떼어 일본에 준다고?
일본이 명분없이 군사를 일으켜 함부로 조선의 땅을 짓밟아놓고…
그런 마당에 땅을 떼어줄 리가 있는가…또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낸다? 이게 말이 되는가.”
가토 기요마사는 “명나라와 일본의 조약이 깨져 전쟁이 계속되면
조선 백성들은 한꺼번에 굶어죽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하지만 사명대사는
“조선은 예와 의에 죽고사는 나라다. 백번 죽는 한이 있어도
명나라와 일본의 화약조건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버텼습니다.
당시 가토 기요마사는 ‘악귀’라는 별명을 얻을만큼 악명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당당한 사명대사의 태도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가토는 “강원도 금강산에
귀한 스님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대사가 바로 그 분일 것”이라면서 “이렇게 만나주시니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당당한 사명대사의 태도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악귀’ 가토 기요마사까지도 존경한 스님
그런 가토도 당당한 사명대사의 태도에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가토는 “내가 함경도에 있을 때 ‘강원도 금강산에 귀한 스님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대사가 바로 그 분일 것”이라면서 “이렇게 만나주니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가토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답니다.
종이와 부채를 여럿 가지고 와서 사명대사의 글씨를 받아갔답니다.
사명대사는 가토에게 “옳은 일이 아니면 이로움을 찾지 말라…
진실로 내 것이 아니라면 비록 털 한 올이라도 탐내지 말라.
(正其誼而 不謀其利…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고 써주었습니다.
왜병들은 사명대사의 글을 받아가느라 줄을 섰다는데요.
사명대사는 초지일관, “병으로 일어난 나라는 멸망하는데,
일본은 스스로 그 멸망을 취하고 있다”면서 “조선과 명나라군이 합세했으니
너희 군사들쯤이야 잡담을 나누면서 막아낼 수 있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사명대사는 가토 기요마사가 건네준 부채와 종이에 “옳은 일이 아니면 이로움을 찾지 말라…
진실로 내 것이 아니라면 비록 털 한 올이라도 탐내지 말라”고 충고했다.
가토 기요마사와의 마지막 4차 담판이 백미입니다.
가토가 사명대사에게 “그대 나라의 보배는 무엇이냐”고 묻자 사명대사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답니다.
“우리나라엔 보배가 없다. 우리나라의 보배는 바로 당신의 머리니까….”
가토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자 사명대사는 응수했습니다.
“난리가 난 판국에 보배가 어디 있는가, 오직 그대의 목이 하나 있으면 조선은 전쟁없이
편안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머리를 가장 값비싼 보배로 여긴다.”(<해인사 사명대사 석장비문>)
이와 관련해서는 다른 버전도 돕니다.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은 “가토의 질문에 사명대사가
‘조선에서 그대의 목에 천근의 금과 만가구의 읍을 상으로 걸어놓았으니
어찌 보배가 아니겠느냐’고 대답했다”(‘송운사적’)고 기록했습니다.
사명대사의 일화 중 백미는 역시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 내용이다. 가토가 “조선의 보배가 뭐냐”
고 묻자 사명대사는 “그대의 목이 바로 조선의 보배”라고 응수했다.|대구 동화사·일본 혼묘사 소장
◆‘환속하면 장관시켜주마!’
이와 같은 사명대사의 분투에 선조는 크게 감읍했습니다.
“유정은 스님인데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섬멸하는데 공을 세웠고, 적진에 들어가 적장과
담판을 짓고 있다.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땅히 후한 상급을 내려라.”(<분충서난록>)
선조는 그러면서 “형세가 어려운 지금 그대가 환속한다면
지방장관의 중임을 맡겨 장수로 삼을텐데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아무리 임금이지만 사명대사 같은 고승에게 ‘환속’ 운운했으니 엄청난 결례였습니다.
그러나 그 급급한 시기에 얼마나 인재가 없으면 그랬겠냐는 생각도 듭니다.
선조는 위급할 때마다 사명대사를 찾습니다.
예컨대 강화조약 결렬로 1597년 1~2월 사이 왜군이 재침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선조는 “유정(사명대사)을 찾아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전쟁이 끝난후 적정을 탐지하고 전후처리를 담당할 적임자로 사명대사가 꼽혔다.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에서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며 맞대응했다는 점이 감안됐다.
“유정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이 사람은 비록 중이기는 하나 장수로 쓸 만한 사람이다.
유정은 영남 사람이니 영남으로 내려 보내…승군(僧軍)을 거느리게 하고…
충성을 다하고 있으니 후하게 대우하지 않을 수 없다.”(<선조실록> 1596년 12월5일)
사명대사를 향한 선조의 무한신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명대사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1604년(선조 37) 왜국 사신이 갑자기 서울을 방문하자 조정은 어찌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했답니다.
그때 국정최고기구인 비변사가 “빨리 유정에게 역마(驛馬)을 보내 불러들이자”고 건의합니다.
이 대목에서 실록기사를 쓴 사관이 혀를 끌끌 찹니다.
“세상에 조정에 얼마나 인물이 없으면…적의 사신이 오자 어쩔줄 몰라하며
하찮은 중(사명대사)의 손에 맡기는가…나라 일을 도모할 자가 유정 한 사람뿐이라니
아, 마음 아프다.”(<선조실록> 1604년 2월24일)
일본을 방문한 사명대사를 두고 일본인들은 ‘설보 화상이 나타났다’고 입을 모았다.
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보배로 지칭했다고 해서 얻은 별명이다.
|진성대, ‘사명대사 일본행렬도의 복식연구’, 성균관대 석사논문, 2019에서
◆ 뼈때린 팩폭, 세상에 사명대사뿐!
그러나 사관의 한탄은 ‘뼈 때리는 팩폭’이었습니다.
사명대사 외에 일본과 당당하게 맞설 인물이 없었으니까요.
<선조실록> 1604년 3월14일자에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정(사명대사)이 왕년에 여러 차례 가토(기요마사)의 진영에 드나들며
가토와 협상을 벌일 때 큰소리를 치며 굴하지 않았습니다.
가토가 이를 매우 좋게 여겨 매양 유정의 사람됨을 일본인에게 칭찬했기 때문에….
비변사는 “유정이 일본에 간다면 고승으로 지목되어 왜인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사명대사는 ‘전후처리’라는
막중한 책임을 어깨에 짊어지고 적지로 떠납니다.(1604년 6월 22일)
일본의 승려 및 유명인사들은 사명대사에게서 글과 글씨를 받으려고 줄을 섰다.
사진은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시된 일본 교토(京都) 고쇼지(興聖寺) 소장 사명대사 유묵들.
사명대사는 쓰시마(對馬島)를 거쳐 12월27일 도쿄에 닿았는데요.
쓰시마에서는 전후처리를, 일본 본토에서는 끌려간 포로의 송환문제를 매듭짓는 중차대한 길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사명대사를 보자 “저 스님이 설보화상이다!”라고 환영하며 존경했답니다.
‘설보 화상’이란 사명대사가 일본 진영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보고
“네 머리가 보배”라고 한 것에서 비롯됐습니다. 일본인들은
‘보배를 그렇게 멋지게 설명한 스님이 어디있냐’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거죠.
사명대사는 이때 일본의 유력인사 및 고승들과 교유했습니다.
사명대사는 마침내 1605년(선조 38) 3월 일본과의 화호(和好)를 성립시켜 조선의 근심을 없앴습니다.
특히 일본에 잡혀갔던 3000여 명의 포로와,
약탈해갔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도 환수해왔습니다.
사명대사는 새롭게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회담한 뒤 포로 3000여명과 함께 귀국했다.
◆ 감쪽같이 사라진 진신사리
대사가 환수해온 진신사리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있습니다.
643년(선덕여왕 12)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불두골(佛頭骨·머리뼈)과 불아(佛牙·치아) 등 불사리 100과와,
석가모니 부처가 입었다는 비라금점(緋羅金點·붉은 비단에 금점을 찍은 가사) 한 벌을 가져왔는데요.
가져온 진신사리는 셋으로 나눠 황룡사 탑, 태화사 탑,
그리고 통도사의 계단(戒壇·계를 수여하는 단)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양산 통도사에 난입하여 금강계단에 모셔둔 사리를 탈취해갔습니다.
1605년 사명대사가 그렇게 약탈된 사리를 환수해서 통도사에 다시 모셨는데요.
그러나 또다시 전란이 일어날까 걱정해서
그중 12과는 승군을 일으킨 건봉사 낙서암(사명대사의 본사)에 봉안해두었습니다.
강원 고성 건봉사에 소장되어있던 사명대사 관련 유물들.
그러나 한국전쟁 와중의 융탄폭격으로 소실됐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자료
그러나 전란이 아닌 도굴의 화를 입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1986년 6월10일, 민통선 이북지역이라
출입하기 어려운 건봉사에 도굴꾼 일당이 잠입해서 치아사리를 훔쳐갔습니다.
여기서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때부터 모든 도굴꾼들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사리를 돌려주라”고 꾸짖었다는 겁니다.
하루도 아니고 며칠간이나 계속된 꿈의 계시에 불안에 떨기 시작했답니다.
결국 한달여에 걸친 7월14일, 일당은 서울의 한 호텔에
훔쳐간 사리 12과 가운데 8과를 맡겨놓고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4과는 공범 중 한 명이 달아나는 바람에 증발되고 말았습니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꾸짖음으로 일부나마 사리를 되찾은 이 사건을 ‘불사리의 이적(異蹟)’이라 칭합니다.
사명대사의 사적을 알려준 사명대사 기적비가
한국전쟁 도중 융단폭격으로 파괴되어 주춧돌만 남았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무차별 폭격에 초토화된 건봉사
건봉사의 수난사 중에 한국전쟁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51년 5월10일 유엔군이 후퇴하던 공산군의 중간집결지였던 건봉사에
무차별 공습과 함포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대웅전 지역의 모든 전각이 불탔구요.
이때 국보 <금니화엄경> 46권과 도금원불, 오동향로, 철장 등 사명대사 유물이 모조리 소실됐습니다.
이게 다가 아니었죠. 전선이 고착화하자 건봉사 지역은 2년간 처절한 고지전의 현장이 됩니다.
휴전 직전까지 16차례의 공방전에서 수십만 발의 포탄이 떨어져 그야말로 초토화됩니다.
불이문 외에는 완전히 폐허로 변해 헐벗고 잡초만 우거진 빈 터가 되어버렸습니다.
전쟁 직전 640칸 규모의 건봉사가 사실상 사라진 겁니다.
지금 남은 건봉사는 파란만장한 사연을 담은 건봉사의 역사가 재건된 사찰입니다.
새삼 ‘네 머리가 조선의 보배’라 일갈한 사명대사의 한마디가 떠오르는군요.
<참고자료>
김영태, ‘사명대사의 생애’, <불교학보> 8,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1971
동산법문 전국염불만일회, <금강산 건봉사 사적>, 2003
오경후, ‘조선중후기 사명대사 인식과 평가’, <보조사상> 53권1호, 보조사상연구원, 2019
진성대, ‘사명대사 일본행렬도의 복식연구’, 성균관대 석사논문, 2019
채상식, ‘사명대사의 일본행과 이에 대한 양국의 태도’, <한국민족문화> 27, 부산대 한국민족연구소, 2006
* 사명대사(1544~1610) 생애 요약
1544년(중종 39) 경상도 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1577년 13세 황여헌(黃汝獻)에게서 《맹자》사사
1559년(명종 14) 16세 부모별세로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 됨
1561년(명종 16) 18세에 출가 2년만에 승과(僧科)에 합격
1575년(선조 8) 32세에 묘향산 보현사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제자 됨
1586년(선조 19) 43세에 옥천산의 상동암에서 마침내 무상(無上)의 법리 대각(大覺)
1589년(선조 22) 46세에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己丑逆獄)에 휘말려 투옥, 무죄로 풀려남
1592년(선조 25) 49세에 임진왜란 참전, 전공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1594년(선조 27) 51세에 외교밀사로 1597년까지 일본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와 네 차례 회담
1597년(선조 30) 2월 54세에 정유재란(丁酉再亂)
1604년(선조 37) 비공식 정부대표로 일본 방문 160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와 회담
1605년(선조 38) 3,000포로 송환 및 통신사 교류 발판 마련하고 귀국
1610년(광해군 2) 67세에 해인사 홍제암에서 법문
*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조선시대 승려 유정의 임진왜란 당시 사적을 엮어 1739년에 간행한 역사서.
7권. 목판본. 1739년(영조 15) 밀양 표충사(表忠寺)에서 개판하였다.
유정의 5대 법손(法孫)인 남붕(南鵬)이 전하여 오던 유정의 유고를 이 시기에 새로 출간하였다.
원래는 ‘골계도(滑稽圖)’라는 제명이었던 것을
편자인 신유한(申維翰)이 평석을 가하고 체재를 갖추면서 ‘분충서난록’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내용은 적진을 탐지한 보고서와 상소문,
왜승(倭僧)에게 보낸 서한 등으로 편집되어 있다.
먼저 청정영중탐정기(淸正營中探情記)에는
자신이 직접 가토(加藤淸正)의 진중에 들어가서 담판한 내용과 적정의 허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여기에는 양국간의 화해를 전제조건으로 한 화친의 조건 등이 쌍방에 명시되고 있다.
두 번째는 별고적정(別告賊情)으로서, 고니시(小西行長)와 심유경(沈惟敬) 사이의 화친조약이
맺어지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지니고 있던 가토와의 면담을 수록하였다.
세 번째는 왕알유독부언사기(往謁劉督府言事記)로서 중국사신에게 자신의 적진정보를 술회하는 내용이다.
다음에 있는 상소문 2편은, 적을 토벌하는 방책과, 빨리 백성을 보호하여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끝에는 승태(承兌)·원광(圓光)·현소(玄蘇)·숙로(宿蘆) 등의 왜승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실었다.
이 부분은 대개 유정의 친필이지만,
신유한의 개판 때는 이에 덧붙여서 유정에 관련되는 기록을 발췌하여 실었다.
주로 ≪지봉유설≫·≪난중잡기 亂中雜記≫ 등에서 뽑았으며, 신유한은 적절한 주석을 붙이고 있다.
또, 유정을 추모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내린 각종 공덕문과
공경대부들의 시문(詩文), 그리고 표충사에 관련되는 기록들도 모두 실었다.
이 가운데 적진을 정탐하고 난 뒤의 보고서 2권과
을미년(1595)의 상소문, 그리고 왜승들에게 보낸 서한 등은 유정이 직접 기록한 것으로 믿어진다.
또, 기타의 자료는 비록 그의 친필은 아닐지라도
당시의 불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알리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임진왜란에 관한 종합적 보고서는 아니지만, 전시외교(戰時外交)의 허실,
그리고 적정의 탐지 등을 상세하게 기술한 점 등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 공경대부를 비롯한 일반 지식인들의 불교에 대한 견해와
유정의 폭 넓은 교유를 밝힐 수 있는 시사성을 주고 있다.
유정이 남긴 문헌으로는 문집 4권과 ≪분충서난록≫이 있을 따름인데,
문집에는 대개 시문이 수록되어 있어 그의 승군대장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반면 ≪분청서난록≫에는 비록 단편적인 언급이기는 하지만,
유정의 승군대장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 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당시의 사회·민심·외교·경제 등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가 되며,
가장 신빙성 있는 육전(陸戰)의 기록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 등에 소장되어 있다.
신유한(申維翰)은 《송운대사분충서난록》을 편찬하기도 했지만,
《해유록(海游錄)》이란 유명한 책이 있는데, 원제목은 《해사동유록(海槎東遊錄)》이다.
기행문학의 백미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비견할 만한 커다란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해유록》은 18세기 전반 조·일 관계 및 서방세계로 향한 대외 인식은 물론,
타문화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문학적 감수성을 잘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신유한의 일본 파견은 조선 후기인 1719년, 제9차 통신사가 파견되었던 때이다.
그 전 해인 1718년에 새로 장군직을 맡은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습직을 도쿠가와 바쿠후가 통보하면서
축하 사절로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해왔다. 조선 조정은 많은 논란 끝에 파견을 결정하게 된다.
당시 신유한은 제술관이라는 직책으로 통신사 일행의 문사에 관한 것을 주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문사들과 교류를 담당하는, 말하자면 문화교류를 위한 총책임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가 일본에 체류한 약 10여 개월에 이르는 동안 일어난 일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엮은 것이 《해유록》이다.
합천 해인사 홍제암
https://blog.naver.com/sty5859/223174644208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 전문
https://blog.naver.com/sty5859/223179761957
건봉사 사명대사기적비 전문
https://blog.naver.com/sty5859/223178606993
사명대사 상세정보
https://blog.naver.com/sty5859/223175081963
밀양표충사 상세정보
https://brunch.co.kr/@hhjo/235
사명대사의 죽음과 십자가 유물에 대한 전설
http://www.koreadigitalnews.com/board/view.php?bbs_id=sub_10&doc_num=369
http://www.koreadigitalnews.com/board/view.php?&bbs_id=sub_10&page=&doc_num=438
통도사 소장 사명당영정(泗溟堂影幀)
사명대사 유정의 초상화. 화면 왼쪽 위에 ‘널리 세상을 구하는 스님’이라는 뜻의 사명대사의
시호인 ‘자통홍제존자’에서 나왔다. ‘송운’은 사명대사의 별호이다. |동국대박물관 소장]
왼쪽 사진부터 최치원의 시구를 적은 사명대사 친필, 사명대사의 유묵 ‘벽란도의 시운을 빌려 지은
시’, 사명대사가 일본 승려 엔니 료젠에게 ‘허응’이라는 도호를 지어주고 써준 글씨. 고쇼지 소장
현존 가장 오래된 사명대사 초상화로 알려진 대구 동화사본 초상화[보물 1505호]
공주 태화산 麻谷寺 祖師堂 서산대사 휴정 진영
임진왜란 때 승병활동으로 미족을 구한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의 호는 청허(淸虛)이며
오랫동안 묘향산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서산이라 부른다. 휴정은 스님의 법명이다.
갑사에 출가한 영규대사의 스승이며 조선시대 불교를 중흥시킨 위대한 선승으로서
선교 양종을 통합하여 단일한 붉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명종 4년(1549) 승과에 금제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고 봉은사 주지를 지냈으나
1556년 승직을 그만두고 금강산, 묘향산 등지를 편력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승병을 모집하였다.
이때 제자 유정(惟政)은 금강산에서,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승군을 모았고
자신은 문도 1,500명을 모아 이를 총지휘하여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야을 탈환하였다. 이 공으로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수敎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의 지위에 올랐다. 1
594년 유정에게 병사(兵事)를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원적암)에서 여생을 보내다 입적하였다.
나라에서는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진 대흥사에
1699년 표충하를 건립하고 매년 고위관리를 보내 예물을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
서산대사의 법맥은 중국 5가7종 중의 한 종파인 임제종(臨濟宗)에 속하며
우리나라 임제종조인 보우스님의 7대손이다.
제자가 1,000여명에 이르렀고 후대 한국불교의 주요 법맥을 이루고 있다.
공주 태화산 麻谷寺 祖師堂 사명당 유정 진영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대사(1544~1610)의 속성은 임(任). 속명은 응규(응규)이며,
자는 이환(이환), 호는 사명당(사명당 또는 사명당) 송운(송운)이다 종봉(존봉).
명종 16년(1561) 승과에 급제하고, 선조 8년(1575)에 봉은사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서산대사의 법을 이어받았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워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했고, 정유재란 때 울산의 도산과 순천 예교에서 전공을 세웠다.
선조 37년(1604)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를 만나
강화를 맺고 이듬해 전란 때 잡혀간 조선인 3000명을 인솔하여 귀국하였다.
선조가 승하한 뒤 해인사에 머물다가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초서(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수충사)에 배향되었다.
공주 태화산 麻谷寺 祖師堂 기허대화상 영규 진영
영규대사(?~1592)의 속성은 밀양박씨(密陽朴氏). 호는 기허(騎虛)로 충청남도 공주 출신이다.
계룡산 갑사(甲寺)에 출가하고 뒤에 서산대사의 문하에서 법을 깨우쳐 제자가 되었다.
평소 선장(禪杖)을 가지고 무예를 익히기를 즐겼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공주 청련암(靑蓮庵)에 잇다가 소식을 듣고 3일 동안을 통곡한 뒤
스스로 승장이 되어 의승(義僧) 800여명을 규합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승병이 일어난 것은 영규대사가 최초로서 전국 고곳에서 승병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영규대사가 관군과 더불어 청주성의 왜적을 공격하니 관군은 패하여 달아났으나
스님이 이끄는 승병이 홀로 분전하여 마침내 8월초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이어 의병장 조헌(趙憲)이 전라도로 향하는 고바야가화(小早川隆景)의 일본군을 공격하고자 할 때
스님은 관군과의 연합작전을 위하여 이를 늦추자고 하였다. 그러나 조헌이 듣지 않자
스님은 조헌을 혼자서 죽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슨군은
1592년 8월 18일 금산전투에서 최후의 한사람까지 장렬히 순절하였다.
일본군은 비록 승리하였지만 피해가 워낙 커서 호남침공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청주성 승전의 소식을 듣고 스님에게 당상관의 벼슬과 옷을 하사하였지만
임금의 사신이 도착하기 전에 스님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사명대사 몰아보기 / [BTN특집다큐드라마] 일어나라
https://www.youtube.com/watch?v=n6bh--kfYPo
임진왜란 외교비사, 사명당은 왜 일본에 건너갔나? / KBS 역사스페셜
https://www.youtube.com/watch?v=n6bh--kfYPo
‘그대의 목이 조선의 보배다!’/ 이가환 하이스토리
https://www.youtube.com/watch?v=HsFQLsbIYY8&t=320s
편안한 음악 / 알프스 주변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