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송(悟道誦)
- 진묵대사(震默大師) -
天衾地席山爲枕 (천금지석산위침)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게로 삼고
月燭雲屛海作樽 (월촉운병해작준)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삼아
大醉居然仍起無 (대취거연잉기무)
크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却嫌長袖掛崑崙 (각혐장수괘곤륜)
도리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꺼려지네
진묵대사(震默大師)와의 만남과 임란시 처신에 대하여...
-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2023/08/29 -
생각해보면 진묵대사와의 첫 만남은
2002/03/10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전주 모악산 등정시
구이에서 오른 중턱 대원사에서 잠시 쉬면서
안내판에 나온 진묵의 오도송(悟道頌), 게송(偈頌)을 보고서였다.
하늘을 이불로 삼고 산을 베개로 삼겠다는 저 호방한 기개.
대원사의 마루에 앉아서 모악산록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던 20년 전 금산사와 대원사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듯 생각난다.
그런데 요즈음 진묵대사에 대하여 탐구하면서
대사의 나이 30세에 발발한 임진왜란시
승병 활동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 대사의 행적에 의문이 일었다.
서산대사(休淨, 1520~1604) 임란 발발시 73세
사명대사(惟政, 1544~1610) 임란 발발시 49세
진묵대사(一玉, 1563~1633) 임란 발발시 30세
더구나 진묵 일옥은 소요 태능, 기허 영규와 함께
서산 휴정이 승병을 모집하며 돌린 격문을 보았을 터인데...
동문들 중에도 소요와 진묵은 의승(義僧)으로 나가지 않는 비참여파였고
처능(處能)과 영규(靈圭) 등은 참여파였다니
여기에는 진묵의 평소에 아무것에도 꺼리끼지 않는 성격과
민중친화적인, 재가수행적인 유마사상에 가까운
그의 독특한 사상에 기인한 것은 아닌지 一見 생각되기도 하지만...
1592년(선조 25) 7월20일 장성 남문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호남 오산 남문창의비’에 의하면 백암사의 승려들인
의승장(義僧將) 처능·계묵·계한·덕인·자혜·의관·처한·학인·혜인 등
9명의 승려가 도탄에 빠진 민중을 위하여 참전하였다는데
그러한 기록 어디에도 진묵의 임란 참전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 때에도 바다를 술통삼아 대취하여
봉서사 상운암으로, 변산 월명암으로 떠돌고 있었을까?
또한 백양사 동문 승병장 영규(?~1592) 대사가
1592년 승병을 일으켜 800승병을 이끌고 참여한 청주성 탈환 전투는
임란 때 승병이 최초로 참여하여 승리한 육상전투라는데
이 때 진묵은 영규등의 소식을 듣고 또한 그들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후 영규는 의병장 조헌(1544~1592)이 전라도로 향하는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함께 금산 전투에 참여하여
의병과 승군은 1592년 8월 18일 금산 전투에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 일본군을 막아내었다.
선조가 청주성 승전 소식에 당상(堂上)의 벼슬과 옷을 하사하였으나
그 상이 도착하기도 전에 영규는
금산 전투에서 최후의 한사람까지 전사하고 말았다는데
그러한 전란의 와중에 진묵은 어떠한 처신을 하였을까?
이즈음 이런 생각이 들자 점점
그 호방한 게송시를 읊은 진묵대사에 대하여
요즘 한창 대한민국을 요동치는 거악(巨惡)세력의 행태가 등치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진묵대사 뿐만 아니라 그렇게 염증나는 사회현상과
등지고 살아가는 식자층(識者層)이 꽤 있었던 것 같다.
즉, 일찍이 탐구해본 신사임당의 외손(外孫)이자 이매창의 아들인
임란 발발시 21세였던 조영(趙嶸, 趙士安, 1572-1606)이란 인물도
고향 파주 율곡에서 고군산군도, 강화도로 文友들과 더불어 피난생활을 이어가며
시화(詩畫)와 술로 세월을 보낸 사실을 생각하면
당시에도 국가 대사인 전쟁과 현세를 애써 외면하고
자신들만의 길을 걸어간 식자(識者)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하지만 정여립 사건의 한 복판인 전주지방에 살았던 震黙과
평안도 안산 출신으로 국가에서 시행한 승과 출신인 완산 최씨 西山,
경상도 밀양 출신으로 국가에서 시행한 승과 출신인 밀양 임씨 四溟,
이러한 점이 또한 그들의 종교관, 국가관, 가치관에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도 생각해 본다.
주지하듯이 진묵이 살았던 시대는
국내적으로는 사림세력이 정권을 잡고, 계속된 당쟁사회가 만연된 시기였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이 있었으며,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이라는 수치스러운 큰 변란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일어난 '정여립의 난'(기축옥사, 1589)은
이 지역(전북 고부등 호남) 사람들에게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이 가슴앓이는 이곳의 풍토나 인성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면서
현세에서는 결코 풀릴 수 없는 종두자국 같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진묵이 살던 시기에는 숭유억불 정책도 그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국가는 민중들에게서 불교를 신앙하는 권리를 박탈했다.
그 결과 불교 교단은 공식적으로는 국가나 사회 체제 내에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였기 때문에,
민중들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깊은 산 속으로 스며들 수밖에 없었고
이에 호남민중들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는 핍박과 냉대와 착취를 당하면서
그러한 민중 신앙과 산으로 들어간 불교에 의지하게 되고
정여립에서 전봉준, 강일순, 박중빈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진묵대사와 동향인 전북 고부 출신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이 창시한 증산도에서는
이러한 진묵대사의 당시의 처신에 대하여
일시적인 현실 타개보다는 나라와 우주를 위한 큰 판을 설계하느라
(이를 天地工事라 한다) 판이 작은 현실 참여보다는
큰 판을 위한 수행에 주안점을 두었을 따름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강증산이 구한말 외세(外勢)에 대항한 활동보다는
교세활동에 역점을 둔 사실과 동일하게 설명되기도 한다.
증산도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하여
『仙道의 대가인 최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 안에 끝낼 수 있었고
佛道의 대가인 진묵(震默)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기지 않았을 것이고
儒道의 대가인 송구봉(宋龜峯)이 맡았으면 여덟 달 만에 끌렀을 것』이라고 한다.
『옛적에는 판이 작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느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4:7)
정리하자면 당시의 사회에 있어서
하나는 1589년 발생한 정여립 모반사건이라 하는 기축옥사로
중앙 정부에 의해 무참하게 호남지역이 유린된 역사적 사건이 있었고,
그리고 또 하나는 선초부터 끊임없이 지속된 숭유억불 정책이 존재했다.
불교는 세조, 문정왕후등에 의해 일시적으로 부흥하기도 했지만
유자(儒者)들이 지배한 조선 사회 내내 끊임없이 탄압받아
심지어 국가부역(성 수축)에 동원되는 등 불교는 조선사회에 크게 발붙이기 어려웠다.
임란에 혁혁한 공을 세운 휴정, 유정, 영규등에 대하여
선무 1,2등은 물론 3등공신에도 들지 못했다는 것은
조선이 불교계에 대하여 그들의 헌신에 어느 정도 지위로 대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그리고 진묵의 활동 영역인 전주 지방은
이 곳 출신 진표율사가 중창한(766) 미륵신앙의 본거지 금산사가 위치해있고
서구에서 영국의 크롬웰(1626-1712)이 최초로 주창한 공화정에 대하여
훨씬 먼저 주장했던 정여립(1546-1589)의 본향이란 점에서 느낄 수 있듯이
기득권층에 저항하는 혁신적인 분위기가 면면히 흐르고 흘러 흘러
진묵대사(1563~1633)를 거쳐
동학의 전봉준(1855-1895),
증산교 강일순(1871-1909),
원불교 소태산(1891-1943)등으로 이어졌으리라.
사람이 일생에 한 개의 전란을 겪기도 어려운데
정여립 사건(1589),
임진왜란(1593), 정유재란(1587), 정묘호란(1627)등
경천동지할 사변이 연속되는 生의 한 복판에서
이조 중기의 그러한 사회 현상과 과정을 실재 목도하고 피부로 체득한
진묵대사등 현실 비참여파에 대하여
왜 민생이 도탄에 빠진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칠 자격이 우리에게는 단연코 있을 수 없다고 본다.
배달9220/개천5921/단기4356/서기2023/08/30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호남 백양사 승려들의 임란 참전 사항
[남도 기행]①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암산(白巖山) 백양사(白羊寺)
https://qq9447.tistory.com/2166
한때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수행했고 증산교 강일순이 1901년 大覺했다는 대원사
구이에서 대원사를 거쳐 금산사로 넘어가면서 바라보았던 구이 방면 풍광
장희구 박사 漢詩 향기품은 번안시조(491)
도리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꺼린다네 / 광주매일신문 2023. 02.22(수)
偈頌(게송) / 진묵대사
하늘이불 땅자리에 산 베개 달 촛불로
하얀 구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취해 일어나 춤추니 소매가 곤륜산 걸릴까.
天衾地席山爲枕 月燭雲屛海作樽
천금지석산위침 월촉운병해작준
大醉居然仍起無 却嫌長袖掛崑崙
대취거연잉기무 각혐장수괘곤륜
게송은 산스크리트 가타의 음사인 게(偈)와 의역인 송(頌)을 함께 부른다.
게송은 여러 가지 형식이 있으나 불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8음절을 하나의 구(句)로 해 2개 구가 하나의 행(行)을 이룬다.
다시 2개의 행이 모여서 32음절 시 형식이다.
좁은 의미의 게는 산문 없이 운문만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노래한다.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게 삼고,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삼는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도리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꺼린다네’(偈頌)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고승(高僧)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로 조선 후기의 승려이다.
1568년(선조 1) 봉서사에서 출가했는데, 사미승일 때 신중단의 향을 피우는 직책을 맡았다.
변산의 월명암, 전주의 원등사, 대원사 등에 있었다.
신통력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이적을 많이 행했다고 전한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 삼고 /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삼아서 //
크게 취한 가운데 거연히 일어나서 춤을 추니 / 도리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꺼린다네’
라는 시상이다.
시제가 ‘게송’(偈誦)으로 돼 있어 ‘게송을 짓기 전에 큰 뜻을 담아’로 의역해 본다.
산문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서술한 다음 운문으로 산문의 내용을 집약해 읊어서
‘중송게’(重頌偈)라 한다.
한시로 번역된 게는 외형상 한시와 별 차이가 없으나 압운에 얽매이지 않는 점이 다르다.
선종에서 도를 깨우친 경지를 표현하기 위한 게송은 선게(禪偈)라고 했다.
이 게송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짓는 사람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따라 창작됐다.
그러므로 이 게송은 개인의 창작 요소가 풍부하게 들어간 문학작품이다.
시인은 이와 같은 점을 감안한 나머지 큰 시상 덩이를 시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본다.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 삼고,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삼겠다고 했다.
임서는 과정에서 ‘게송’(偈誦)이라고 하는 시제를 달고도 있지만 ‘게송’(偈頌)이 맞다.
화자는 온 우주를 자기의 터전으로 삼아 더욱 큰 생각에 빠져보려는 시상을 만난다.
크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어 보니, 도리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꺼린다고 했다.
너무 큰 시상에 어안이 벙벙하다.
※한자와 어구
天衾: 하늘을 이불로 삼다. 地席: 땅을 방석으로 삼다. 山爲枕: 산을 베개로 삼다.
月燭: 달은 촛불이 되다. 雲屛: 구름은 병풍으로. 海作樽: 바다를 술통으로 짓다. //
大醉: 크게 취하다. 居然: 거연히. 仍起無: 이에 춤을 추다. 却嫌: 도리어~을 꺼리다.
長袖: 긴 소매. 掛崑崙: 곤륜산에 걸리다. <시조시인·문학평론가(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1633)○ 머리에
朝鮮 明宗 17년 (1562) 지금의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에서 태어나
(萬頃誌=禪師震默生鄕之地於火浦) 인조 11년(1633)에 세상을 떠난 진묵대사는
한국 불교사 가운데 드물게 보는 불교의 실천적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로 꽤나 방만한 중이었다.
거기에다 성격조차 호방해서 스님이라고 하기에는 걸맞지 않는
담대한 기백과 풍류가 항상 진묵의 세계에 넘쳐 있었다.
한국의 승계(僧界)가 그를 가리켜 기승(奇僧)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그가 여느 중으로서 갖는
법도(法道)의 테두리를 이따금씩 떠난 담대한 기백과 넘치는 풍류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묵은 불도의 실천적 사상의 법도를 정신세계에서 찾았던 기존의 불교세계에 도전이라도 하듯
모든 이념적 불교사상을 행동화함으로써 그의 불교입신에 새로운 경지를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절(寺)이란 어디까지나 중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도를 닦는 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파했던 진묵은 그의 법도를 펴는데 절을 이용하지 않고
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마을의 모정이나 길바닥을 택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포교(布敎)의 수단을 법당에서 얻지 않고 직접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군중 속에 뛰어들었던 진묵에게서
한국 불교사를 통해 실존적 불교사상을 폈던 몇 사람중의 하나를 찾을 수 있는 큰 보람을 안기는 것이다.
이러한 진묵의 이른바 불교의 실존적 사상성은
기존 불도의 [카테고리]를 대폭 떠난 이단이 아닐 수 없다 하여 거센 시련을 받기도 했으나,
진묵은 끝내 절은 도를 닦는 중을 위해서만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중생을 위해 절이 있어야 하고
이것이 불도의 정법(正法)이라고 되풀이 강조하면서 그의 실존적 불교사상을 펴나갔던 것이다.
○ 출생과 출가(出家)
진묵대사는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에서 태어났다.
화포는 본래 불거촌(佛居村)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로써
불거촌이라는 이름은 진묵대사 같은 고승을 낳았다 하여 붙여진 것인데,
부르는 과정에서 불(佛)은 우리말의 음독으로 불이 되어 불 화(火)자로 변했고,
거(居)가 개로 변해 갯마을 뜻으로 풀어 포(浦)자를 넣어 화포가 되었다는 것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이곳이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 4구 338번지가 된다. 4구로 나누어져 있는
넓은 화포리 일대의 어떤 동네가 정확하게 출생지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성모암의 주지 조갑술은 말한다.
다만 묘가 있는 이곳과 그 주변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이 산의 등너머가 바로 만경강구(萬頃江口) 서해 바다다.
평야와 바다로만 인연이 되어졌을 뿐 불(火)을 상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화포리(火浦里)라고 동네 이름을 붙인 것은 불거촌(佛居村)의 구음 때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다른 한 가지 이 지방의 독특한 속습으로도 뒷받침되고 있다. 이 지방에서는
들일을 하면서 밥을 먹을 때는 먹기 전에 먼저 한 숟가락을 떠서 "고시레"하고 깨끗한 풀 위에 뿌린다.
이 '고시레'라는 말은 '고씨네'가 변해진 것으로 '고씨네'라고 말하며
입에 대기 전에 한 숟가락 떠내는 것은 '고(高)씨 할머니께' 드린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진묵스님 어머니 묘는 무자손천년향수지지(無子孫千年香水之地)로
묘를 참배하는 향수(香水)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 묘가 진묵대사의 어머니, 즉 고(高)씨 할머니 묘인 것이다.
묘가 있는 곳은 산이라기보다 밭과 논으로 된 들 가운데 조금 불룩한 곳이다.
유앙산(維抑山), 조앙산(祖仰山), 주행산(舟行山)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많지 않은 소나무의 얕은 숲이 아니면 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표고가 10미터 안팎 밖에는 될 것 같지 않은 마치 함지박을 엎어놓은 것 같은
이 소나무 숲이 있는 둔덕의 동남쪽을 향한 면에 잘 손질된 봉분이 있고
그 옆에 서 있는 비석에 '진묵조사존비지묘(震默祖師尊驢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묘에서 왼쪽으로 비켜 내려간 곳에 성모암(聖母庵)이 있다.
이름그대로 성인인 진묵(震默)스님의 어머니를 고 묘를 관리하기 위해 있는 절이다.
스님이 일곱 살에 봉서사(鳳棲寺)로 출가했다는 것은 「유적고」에 기록되어 있다.
봉서사(風棲寺)까지의 거리는 1백2∼30리나 된다. 차라리 금산사(金山寺)가 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지금은 차를 타고 신작로를 따라 가게 되므로 불거촌에서 금산사 가는 길이 가깝지가 않지만
걸어 다니던 옛날에는 금산사 가는 길은 봉서사(鳳棲寺)까지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크고 역사 깊은 금산사를 가까이에 두고 봉서사 까지 일부러 찾아가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일곱 살 어린 나이로 1백2∼30리를 걸으면 빠르면 이틀 아니면 사흘은 걸려야 한다.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점이있다. 그런데 비밀에 대한 해답이 있었다.
진묵대사와전<震默大師臥傳(1983. 保林社)>에 부록으로 실린
'삼례읍 설화'에 몇가지 수수께끼를 푸는 증언이 있는 것이다.
스님의 누님, 나이가 스님보다 몇 살이나 위인지 알 수 없으나
스님의 누님은 스님이 일곱 살 때에 이미 출가하고 있었다. 그 시가가 익산군 춘포면 쌍정리라는 것이다.
스님은 일곱 살 때 누님집에 와 있었다. 모심을 때가 되어 논에 모를 심는 날이었으므로
스님은 누님네 모심는 논에 나가 구경을 했다.
그런데 모판에서 모를 추리던 사람들이 개구리를 함부로 죽이는 것이었다.
개구리를 잡아 땅바닥에 패대기치면 개구리는 두 다리를 쭉 뻗고 발발 떨면서 죽어갔다.
일곱 살 어린 소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나왔다.
죽어가는 개구리가 가엾게 여겨져서 소년은 흐르는 눈물을 쉽게 멈출 수가 없었다.
언덕에서 돌아 앉아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던 소년은 벌떡 일어나
그 길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봉서사(鳳棲寺)를 찾아 갔다.
어린 소년의 걸음으로도 하루 안에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다.
봉서사 아랫마을 신기촌에서 춘포면 쌍제까지는 직선거리로는 12킬로 정도,
도로를 따라 봉정으로 돌아가도 15∼6킬로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진묵스님은 태어날 때 (불거촌)일대의 초목이 마르는 이적을 나타내고
스승 없이도 스스로 아는 그 총명함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었으므로
소년의 이러한 돌연한 행위를 누님은 말리려고도 하지 않은 것 같다.
〇 지혜와 수도(修道)
부처님에 대한 일반적 이해가 대자비이므로
자비와 부처님은 우리민족에 있어서는 같은 의미를 갖는 말이다.
그 자비심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생불(生佛)이라고 불렀던 어린 동자는
총명하다고 말하기에 적당치 않은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
일곱살에 출가하여 처음으로 내전(內典)을 읽기 시작했으나, 마치 칼로 실을 끊듯 도리가 분명하고,
한번 눈에 스치면 곧 외워버렸다. 이러므로 누구한테 물어볼 일이 없어 스승이 필요 없었다.
어린 사미가 이렇게 공부하는 것을 절대 중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경전을 들여다 보는 것을 목격하더라도 그것을 배우기에는 너무 어리고,
물어보는 일이 전혀 없으므로, 어린 사미가 내전을 혼자 읽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내전(內典)만이 아니라 외전(外典)도 스님은 보지 않은 책이 없었던 것같다.
<도감강목(道鑑綱目)>을 빌려 그 집 하인에게 짊어지게 하고 절로 돌아오면서 한 권씩 뽑아 읽고는
다 읽으면 그것을 길가에 던져버렸다. 따라오는 하인이 그것을 다시 주웠다.
절 문에 들어서기까지 그것을 다 읽어버린 스님은 훌훌 빈 손을 털어 버렸다.
나중에 책 주인이 그 까닭을 물으니, 스님은 고기를 잡았으면 발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책 주인이 아무권이나 뽑아들고 물어보니, 스님은 단 한글자의 착오도 없이 암기했다.
이러한 스님의 지혜는 세속인의 따를 바가 아닌 것이다.
〇 심신을 초탈하고
△ 한달동안 정(定)에 들다.
스님이 봉서사의 산내 암자인 상운암(上雲庵)에 계실 때의 일이다.
공부하는 대중들이 결제(結制)를 앞두고 모두 탁발을 나갔다.
결제기간중에는 참선도량에서는 일체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한다.
그러므로 결제기간중에는 사람이 죽어도 그대로 두었다가 해제가 되어서야 다비식을 거행한다.
이렇게 엄한 것이 선방(禪房)의 규율이었다.
상운암의 대중들도 그런 엄격한 규율 밑에서 진묵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공부하고 있었으므로,
3개월 동안 참선을 하려면 그동안 먹을 양식을 미리 탁발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스님만 혼자 남아 집을 보시게 하고 대중들은 한 달 동안을 기약하고 멀리 떠나 갔다.
탁발 나갔던 사람들은 충분히 탁발을 해서 상운암으로 돌아왔다.
진묵스님은 석고처럼 우두커니 앉아서 사람이 돌아 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 가서 보니, 스님의 얼굴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고, 무릎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얼굴에 얽혀 있는 거미줄을 걷어내고, 무릎의 먼지를 털어내며,
이름을 대면서, "돌아왔습니다."고 인사를 드리니, 스님은, "너는 왜 그렇게 속히 왔느냐"고 물으셨다.
탁발을 내보내고 스님은 홀로 남아 앉은 채로 '정(定)'에 들어버린 것이다.
△ 엄삼매 (嚴三昧)에 들다.
스님이 월명암(月明庵)에 오래 계셨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거니와 여기에 계실 때의 일이다.
이곳도 수도처로 신심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올라가기 어려워 먹고 지내기가 힘들었다.
가을이 되어 대중 스님들은 탁발을 나가고 시자 한 사람만 남아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네에 초상(忌故)이 나서 시자는 그곳에 가야 했다.
시자는 때가 되면 스님께서 잡수시도록 공양을 준비하여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스님께 여쭈었다.
"여기에 공양을 차려 놨으니 때가 되면 스님께서 들어다 잡수십시오."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방문을 열어 놓고 능엄경(楞嚴經)을 보시는 채로 그냥 계셨다.
시자는 곧 마을로 내려가 일을 다 보고 다음날 암자로 돌아 왔다.
돌아 와 보니 스님은 어제 그대로 앉아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
시자가 가까이 가서 보니 문지방에 얹힌 스님의 손에서 피가 흘러 그대로 말라 엉겨 있었다.
문지방에 스님의 손이 얹혀 있는데 바람이 불어 문을 밀어붙인 것이다.
스님은 손가락이 깨어져 피가 흘러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삼매에 들어 계신 것이다.
탁자를 올려다 보니 어제 차려 놓은 공양이 그대로 있었다.
시자가 절을 하고 밤사이 문안을 올리니 스님은, "너는 왜 제사 참례 안하고 빨리 왔느냐"고 했다.
스님은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에 들어 하룻밤이 지나갔는데도,
시자가 돌아와 소리내어 문안을 드릴 때까지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마음도 몸도 다 벗어버리고 그것을 초월해 있었던 것이다.
△ 市場바닥에서 좌선
스님은 좌선을 조용한 곳을 찾아 하지 않고,
시끄럽고 편치 않은 곳을 찾아가 경계를 여의고 심신을 벗어나는 공부를 익혔다.
스님은 전주(全州)장이 서는 날이면 봉서사에 내려와 전주장에 갔다.
스님은 장바닥 시끄럽고 복잡한 곳을 누비고 다니면서 안식(眼識)경계를 여의는 공부를 했다.
그 어지러운 장바닥을 헤쳐 다니면서 코 앞만 볼 뿐 그 밖의 것에 눈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스님은 하루 종일 시장을 보되 본 것이 없는 것이다.
또 스님은 장바닥 시끄러운 곳을 골라 거기에 앉아 이식(哥識)경계를 여의는 공부를 했다.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귀에는 들리는 것이 없도록 경계를 떠나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앉아서 잠자는 것이 아니다.
초롱초롱한 상태만 있을 뿐 보이거나 들리는 것이 있어서는 공부가 안 된 것이다.
눈을 감거나 귀를 막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런 공부는 초기의 공부에 속한다.
진묵스님은 이렇게 장을 보고나서 공부가 잘 되었으면, "오늘은 장을 잘 봤다."고 하고,
잡념이 끼어 들어 눈이나 귀가 어지러운 일이 있으면, "오늘 장은 망쳤다."고 일어섰다.
△ 간수 한 독을 다 마시고도
심신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스님의 초탈한 경계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일이 있다.
진묵스님이 누님 집에 가 있다가 출가했다는 이야기는 앞서 했다.
스님은 익산군 춘포면 쌍정리에 있는 누님 집에 가끔 들렸다.
스님은 곡차(술)를 퍽 좋아했으므로 누님은 동생을 위해 곡차를 늘 준비해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이 누님 댁에 들렸더니 누님은 집에 없었다.
밭일 나간 누님을 찾아가 안부를 묻고 돌아서려는데 누님이 집에 곡차를 준비해 두었으니 마시고 가란다.
스님은 그 좋아하는 곡차를 두고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누님이 일러준대로 부엌으로 들어가
술이 담겨 있는 것 같은 조그만 독 뚜껑을 열고 독채로 들이마셨다.
스님은 기분이 좋아서 봉서사에 돌아와 정(定)에 들어 있었다. 들일을 마치고 석양이 되어
집에 돌아 온 누님은 부엌으로 들어가 동생이 곡차를 마시고 갔는지를 먼저 살폈다.
술독이 놓여 있는 곳을 살핀 누님은 깜짝 놀랐다.
술독은 그냥 있는데 그 곁에 있는 간수독의 뚜껑이 뒤집혀 있었다.
심장이 멈춰서는 것 같은 충격으로 두 독의 뚜껑을 벗겨봤다. 간수독은 비어 있고, 술독의 술은 그대로 있었다.
누님은 용수철처럼 뛰어나와 그대로 봉서사를 향해 달렸다. 이미 석양인데 삼십 리 길을 단숨에 뛰었다.
간수 한 독을 마시고 살아남을 사람이 누군가. 아마 황소가 마셨더라도 살지 못할 일이다.
누님은 자기의 잘못으로 동생이 간수를 마시게 됐다고 가슴을 치면서 정신없이 봉서사까지 뛰어간 것이다.
해가 서산 마루에 동그란 얼굴을 반만 걸쳐 놓고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내려오는
산길을 거꾸로 올라 봉서사에 당도한 누님은, 절이 조용한 것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진묵스님이 죽었으면 절 안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묵스님은 조실 방문을 열어 놓고 기분이 좋아 빙그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너무나 의외의 일에 누님은 또 한번 놀랐다.
"곡차가 알고 마시면 곡차가 되는 것이지 누님은 걱정도 많으십니다.
어둡기 전에 어서 돌아 가십시오." 살아 있는 동생이 한없이 고맙고 존경스러웠지만,
해가 져가는 시간에 삼십 리가 넘는 산길을 되돌아 가라니 야속하고 섭섭했다.
그러나, 동생의 신비스런 힘을 믿는 누님이었으므로, 그 길로 돌아서 집으로 왔다.
누님이 집에 다 올 때까지 서산에 꼭 그만큼 걸려 있던 해가 누님이 집에 들어서자
산 너머로 들어가 버리고, 갑자기 캄캄한 어둠이 꽉 차는 것이었다.
진묵스님이 해를 묶어 왔다고 속인들은 이 일을 더욱 재미있어 하지만,스님은 염산성분의 맹독을
마시고도 그것을 인체에 유익한 곡차로 소화하는 자재한 정신력을 가졌다는 점에 더 유의해야 한다.
○ 신통력이 남다른 도승(道僧)
△ 되살아난 물고기
진묵의 기담이라면 먼저 어혼환생진묵(魚魂還生震默)의 이야기가 있다.
진묵이 이미 고승(高僧)이 되어서였다. 그가 속해 있던 절은 무척 가난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진묵이 길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어느 고을인지 탁발을 나갔던 것이다. 머리에는 용수갓을 쓴 채
다 낡아빠진 장삼, 가사에 목탁을 치고 염불을 외우며 어느 마을에 당도하니 때 마침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큰 가마솥에 시뻘건 불을 지펴 놓고 많은 물고기를 끓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 이 고명한 진묵대사를 알아차릴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장난기 많은 사람들은 장대같이 솟은 키에 땟국이 졸졸 흐르는 장삼자락을 움켜잡고
염불을 외우는 이 볼품없는 중을 한 번 골려줄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지나가는 진묵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여보 스님! 오뉴월의 이 긴긴 해에 탁발하러 돌아다니시기에 배도 좀 고프겠소.
그래 스님을 생각하여 이 생선국 한 그릇을 끓여 놓았으니 염이 있다면 한 그릇 해보시는 것이 어떻소."
중이라면 본래 오채를 금하는 법이고 또 더 더군다나 살생을 금하는데 어찌 생명있는 생선국을 먹을 것인가!
이것은 분명히 볼품없는 중을 한 번 골려주기 위한 장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진묵은 태연하기만 하였다.
"후한 인심이로다. 그래 당신들은 왜 먹지 않고 나에게만 먹으라는 거요?"
그러자 한 사내가 대답했다. "실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배가 터지라고 먹었는데
스님에게도 한 그릇 권하고 싶어서. 맛이야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리만큼
천하의 일품이니 염이 있으시면 한 그릇 해보시지요."해 놓고는 모두 깔깔 웃기까지 하는 것이다.
"후한 인심이로다. 정 그렇다면 내가 먹어 볼만도 하이 ‥‥‥‥
진묵은 이렇게 말하고 장삼과 배낭을 풀어 놓을 생각도 아니하고
그대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가마솥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윽고 누가 옆에서 주는
큰 사발을 저만치 던져 버리고는 그 큰 가마솥을 불끈 두 손으로 쳐드는 것이 아닌가.
어느 장사가 그처럼 힘있게 물고기와 물이 가득 든 채
부글부글 끊고 있는 가마솥을 그렇게 가볍게 들 수 있을 것인가.
놀란 것은 물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아니! 이 양반이 ‥‥‥‥
조소에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은 이 느닷없는 이변에 모두 입을 벌려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침내 진묵은 그 가마솥 안에 든 물고기를 한 사발도 남겨 놓지 않고 꿀꺽꿀꺽 다 마셔버리고 만 것이다.
"허, 허, 허허 ‥‥‥‥ 마을 사람들은
진묵의 이 호연지기(浩然之氣)와 역발산(力拔山)의 항우같은 힘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자! 이만하면 어떻소! 덕택으로 잘 먹었소이다. "
이윽고 입을 딱 벌린 채 말 대답조차 못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뒤에 두고 진묵은
똘물을 타고 한참동안 올라가더니 냇물에 벌건 엉덩이를 내놓고 변을 보는 것이 아닌가.
이 무슨 괴이한 변일까. 진묵의 변이 물위에 흘러내리는데 얼마 전까지 가마솥에서 푹푹 삶아져
그의 입으로 들어갔던 물고기들이 펄펄 뛰며 살아서 도랑으로 헤엄쳐 내려오는 것이었다.
꿈속인양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그 때에야 모두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것이었다.
"미흡한 인간들이 미처 고명하신 대사님을 몰라 뵈옵고 ‥‥‥ 황공 무지로소이다.
그러하오나 고기가 다 살아서 저렇게 펄펄 뛰어 노는데
어찌하여 저놈 한 마리는 꼬리가 잘라진 채 소생을 못하옵니까?" 하고 공손히 물었다.
"하나 ‥‥‥ 과연 그렇군! 그놈의 꼬리는 저 가마솥가에 있을 것이요." 아닌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가마솥을 들여다 보았더니 거기엔 잘라진 꼬리 한 토막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엎드려 잠시동안의 허물을 계속 사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진묵이 불도 도통했다는 경지의 이야기이기도 하겠으나
또 어혼(魚魂)이 인도환생(人道還生)해서 바로 진묵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전주지방과 김제, 만경지방에 아직도 전해지는 전설이기도 하다.
△ 8만대장경(八萬大藏經)과 진묵대사
진묵이 도승으로 그 경지를 높였을 무렵에는 가야산 해인사(伽飾山海印寺)에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진묵은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을 줄줄 암송 통독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진묵과 팔만대장경과 얽힌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진묵이 완주 봉서사에 있었을 때였다. 춘하추동 절후를 맞춰 해인사를 가는 진묵이
그가 다녀온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하루는 갑자기 상좌에게 해인사에 갈 행장을 꾸리라는 것이었다.
의아한 상좌가 "아직은 가실 때가 아니온데 어찌 행장을 꾸리라 하시옵니까?" 하고 물을 수 밖에.
그러자 진묵은 "글쎄! 해인사 팔만대장경판(板)에 필유곡절이 생길 것 같구나"하며
그대로 행장을 갖추고 해인사로 내 닿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묵이 해인사에 닿아 잠시 여장을 풀고 첫밤을 맞으려하니
동편의 경판을 소장해 놓은 장각(藏閣) 옆에서 갑작스럽게 불이 일어났는데 멈출줄 모르고
대장경을 소장해 놓은 장각으로까지 번지는 것이었다.
절 안의 수 많은 승려들이 이 난데없는 이변에 모두 나와 발을 동동구르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진묵만은 너무도 태연 자약하며 홀로 석가존(釋迦尊)의 불상(佛像) 앞에서
한참동안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기도를 마친 진묵은 솔잎에 물을 적시어 불길이 번지는 곳에 몇 방울을 뿌리니 이제까지
가는 비로 한 방울 두 방울 뿌리던 비가 갑자기 폭우로 변해 순식간에 불길이 잡아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팔만대장경판이 연소(燃燒)직전에서 위급을 면하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해인사를 둘러싼 경상도 일대에 널리 퍼져 있는 진묵대사에 얽힌 전설이다.
△ 없어진 모기
진묵스님이 지금의 전주시 덕진구 우아동에 있는
용화산 일출암(日出庵)에 머물러 계실 때 절 밑 동네인 왜막촌(왜망실)에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왜막촌은 산골 동네로 개울이 있어 여름이면 모기가 많았다.
어머니가 모기 때문에 밤잠이 편치 않으신 것을 알고, 스님은 산신을 불러 모기를 다스려 주도록 당부했다.
그 뒤로 왜막촌에는 모기가 없어졌다.
적어도 진묵스님 이후(유적고)가 간행된 1850년까지 2백여 년간은 모기가 없었다.
이 밖에도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날려 보낸 일,
국수를 먹겠다고 졸라대는 대중들의 발우에 바늘 한 개씩을 넣어 주고
스님 발우에도 똑같이 바늘을 넣어 스님 발우에는 국수가 가득 차는데
대중들의 발우에는 바늘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일 등 신비스런 일들이 많다.
그러나, 이 모든 신통을 스님은 결코 대도(大道)라고 생각하시지 않으셨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 진묵대사의 호연지기와 인간애
△ 호연지기(浩然之氣)
진묵대사가 태어난 화포는 진봉면과 만경면의 바다를 면한 중간에 끼인 자그마한 포구로
고깃배들이 졸듯 떠 있고, 이름 모를 바닷새들이 한가로이 날며,
끝없는 수평선에 피어오르는 저녁노을이 휘황하도록 눈이 부셨다는 고장이다.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진묵은 어려서부터 익혔을 뿐만 아니라 그 웅대한 대자연에 심취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한국불교사화에 나오는 다음의 시(詩) 한 수는
진묵의 너른 인간적 생애와 그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충분히 엿보게 하는 한 대목이다.
천금지석산위침(天衾地席山爲枕) 하늘 이불 땅자리 山을 베개로
월촉운병해작존(月燭雲屛海作樽) 달을 촛불 구름을 병풍 바다를 술통으로
대취거연잉기무(大酵居然仍起舞) 크게 취하여 벌떡 일어나춤을추니
겁혐장유괘곤륜(却嫌長褙軸掛崑崙) 긴 소맷자락 곤륜산을 걸릴까 하노라.」
세상의 풍류와 호연지기가 한꺼번에 녹아 있는 시이다.
△ 인간애(人間愛)
진묵스님은, 승단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세속기피 의식에 구애되지 않았다.
스님은 출가한 후에도 늘 어머니를 돌보고 '자매(姉妹)들에 대해서 깊은 우애를 가지고 있었다.
출가하면 부모형제의 인연까지도 끊어버리고 만나기조차 회피하는 승려의 세속기피사상은
수행단계에 있어서의 정신적 안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선정(定)에의 출입과 삼매의 현전이 자재한 진묵스님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애 넘치는 보살행이며, 인간본연의 상정적인 것이다.
진묵스님의 대 보살된 인간애를 엿보게 하는 (어머니의 發文)이 전해지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始中十月之恩 何以報地 열달 동안 태중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오리까.
膝下三年之養未能忘矣. 슬하에서 3년동안 길러 주신 은혜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萬歲上更加萬歲 子之心 猶爲嫌焉. 만세 위에 만세를 더하여도 자식의 마음에는 오히려 불만이온데,
街年內 未滿百年. 백년 생애에 백년도 못 채우시니,
母之壽 何其短也 어머님의 수명은 어찌 그리도 짧으십니까.
單飄路上 行乞一僧旣云溫矣 한 쪽 표주박을 들고 길에서 걸식하는 이 중은 이미 말할 것이 없거니와
橫차闔中 末婚小妹 규중에 비녀를 꽂고 들어 앉아 아직 출가하지 아니한
率不哀哉. 어린 누이야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습니까.
上壇7 下壇罷僧尋各雇. 상단불공도 마치고, 제사도 끝나니 스님네는 제각기 방으로 찾아 들었습니다.
前山疊後山重 앞산은 첩첩하고 뒷산은 겹겹한데
魂歸何處 鳴呼哀哉 어머님의 혼은 어디로 돌아가셨습니까. 아! 애 닳으옵니다.
스님의 효심은 단연코 타의 추종을 허락치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서거하신 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밝히지 못하고 있지만,
그 곳이 불거촌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듯 하다. 왜그러냐 하면 진묵스님은 어머니의 만년을
늘 가까이서 모셨고, 진묵스님이 주석하신 곳이 봉서사, 원등암, 일출암 등 전주 일원이고
월명암과 대둔산 태고사(太古寺)까지 연장하여 어머니의 만년을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간다.
아무튼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진묵스님과 두자매가 모두 세상을 떠나더라도
길이 길이 만인의 향화 참배를 받게 되도록(無子孫千年香火之地:
자손 없이도 천년동안 향화를 올릴 명당지)를 찾아 불거촌에 어머니의 묘를 모셨다.
봉서사나 일출암에서 불거촌까지는 백리가 넘는 먼 길이다.스님은 어머니의 유해를 모신
상여를 스님이 태어난 고향땅 불거촌까지 메고 가서 거기에 가서 안장한 것이다. 출가한 신분으로
어머니와 그 자매들에 나타내 보인 이 지극한 효와우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〇 입적 (入寂)
이런 진묵대사도 말년에는 고향을 찾아
부안 변산에서 입산수도를 계속하다가 1592년(宣祖 25년) 아주 퇴락(頹落)되었던
월명암(月明庵)을 손수 중수하고 거기에서 그의 여생을 마쳤다고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대사의 생향이기도 한 화포리에서 그곳 사람들에 의해 진묵대사를 영원히 추모하기 위해
주행 조앙사(舟行 祖仰寺)라는 조그마한 절간을 세워 오늘에까지 보존되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원불포( =현 화포부락)에는 진묵대사의 어머니 묘가 아직도 동그랗고 크나
큰 무덤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묘가 또한 '천년향화(千年香火)'의 명당으로서
진묵이 잡은 것이며 춘하추동 근 4백 년동안의 풍마우세(風磨雨洗) 가운데도
그 윤곽을 뚜렷이 하는 것은 역시 진묵 같은 대각의 대사가 직접
'무자손 천년향화(無子孫 千年香火)'의 명당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북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385-2 震默祖師殿
震默祖師殿 내부의 震默祖師 眞影
전북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성모암 진묵대사 진영
진묵대사와 모친의 영정을 모신 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봉서사 진묵전
봉서사에 모셔져 있으며 6.25전쟁이후 일년에 몇cm씩 커지는 신비로운 진묵대사 부도
범어사 성보박물관 진묵대사 진영
진묵대사(震默大師) 탄생지, 출가지, 입적지등 활동영역
진묵대사는 조선 명종 17년(1562)에 전라도 만경현 불거촌(萬頃縣 佛居村,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성모암 자리)에서 태어나서 임진왜란 시기를 거쳐 인조 11년(1633)에 72세로 입적하였다. 진묵 대사 본인이나 제
자가 쓴 행적(行蹟)은 없는데, 1850년에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짓고 전주 봉서사(鳳棲寺)에서 간행한 '진묵대사유
적고(震 大師遺蹟考)'에 그의 일화가 18편이 전한다. 구전하는 진묵 대사 관련 전설은 현재 32편 정도가 채록되었
다. 운문암 에는 금을 입히지 못한 부처가 있었다. 선조 초기에 진묵대사가 이 암자에 있으면서 불상을 만들다가
완성되기 전에 어디로 가면서 다시 자기가 와서 완성하기 전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부탁해서 그 말대로 하였는데
그 뒤 진묵대사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흙만 바른 부처로 전해오고 있었다고 한다. 이 불상과 관련 깊은 진묵
대사의 본명은 일옥이라 했는데 이상한 행적이 많았다. 어떤 날 저녁 여러 사람의 꿈에 호법신이 나타나서 부처가
차 받드는 일을 하는 것은 황공하다고 했다. 그 때 진묵대사는 그 암자에서 차 받드는 일을 맡았는데 처음은 모두
들 어리둥절하게 생각했다. 이 후에 남녀 나무꾼이 산에서 부랴부랴 쫓겨오면서 대성 통곡을 하여 사유를 들은즉
일옥이라는 중이 불로 지져서 그 기운에 못 이겨 도망쳐 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여러 사람들은 무릎을 치며
진묵대사가 부처임을 깨닫고 더욱 대사를 존경하게 되었다. 화광 삼매로 마귀를 나무꾼에게서 물리친 것이기 때문
이다. 출처 : 일간경기(2016/09/16 http://www.1gan.co.kr)
암자일기
1
나는 1999년 늦은 봄 아내와 전북 완주군 일대 사찰을 두루 돌아 보았다.
일종의 사찰 순례였다
진묵(震黙)대사(1562-1633 .진영)가 출가한 전북 완주군 봉서사와
스님이 머물렀던 원등암. 송광사 등이 목적지였다. 진묵대사의 흔적을 엿보고자 했다
진묵대사가 출가한 봉서사는 서방산 아래 자리 잡고 있었다
좁을 길을 돌고 돌아 도착한 절은 한산 했다
완주 송광사는 평지에 세운 가람이었다
이 절의 부처님은 나라에 큰 변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땀을 흘린다고 해 유명해졌다
봄에 벚꽃이 만개했을 때 송광사 가는 길은 꽃밭을 달리는 기분이 들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웠다
송광사를 지나야 봉서사로 갈 수 있었다
원등암은 나한도량으로 유명하다
길상암에 내가 머물 때 명진 스님은 진묵대사의 일화를 자주 말씀하셨다
명진 스님은 진묵대사를 진실로 존경했다
저녁 공양 후 한가할 때 마주 않아 차를 마시면서 스님이 자주 말씀하셨다.
언제 시간을 내 봉서사와 송광사 원등암 등 진묵대사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을 같이 가 봅시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실천하지 못했다
스님이 그 이듬해 열반하신 탓이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스님이 열반에 드신 그 이듬해 봄 어느 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먼저 들린 봉서사에는 진묵 대사의 부도탑이 있는데
열반에 들면서 뒷날 이 탑이 하얗게 변하면 내가 다시 태어날 것이리 그리 알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부도탑에는 하얀 반점이 여기 저기 보였다
스님이 7살 나이로 공양을 올리던 법당은 10평 미만으생각보다 작았다
하지만 법당으로 가는 돌계단이며 주위에 화단이 아름다운 정자를 연상하게 했다.
진묵 대사의 부도탑은 매년 하얗게 변하면서 부피가 늘어난다고 한다
이 부도탑은 1984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됐다
봉서사에서 당시 주지 서남수 스님으로부터 진묵대사 일대기를 한 권 선물로 받았다
그 책에는 갖가기 이적이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진묵대사는 석가모니부처님의 화신으로 불렸다
스님의 법명은 일옥(一玉)이고 법호가 진묵이다
이조 말 명종 17년 전북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에서 출생했다
화포리는 불거촌(佛居村)이라고 불렀다
부처가 살았던 마을이라는 의미다
당시 진묵대사가 태어나자 불거촌의 모든 나무가 3년간 가뭄든 것처럼 시들 시들해다
마을 사람들이 “큰 인물이 태어났다”며 수근댔다고 전한다
진묵은 어려서부터 마늘과 파, 고기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자비롭고 총명해 사람들은 “불거촌에서 부처님이 태어났다”고 말했다
진묵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7살에 출가했다. 이른바 동진출가를 한 것이다.
그가 처음 출가한 곳이 바로 서방산 아래 봉서사다
그는 기억력이 뛰어나 한 번 듣거나 읽은 내용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았다
2
7살에 출가한 진묵이 처음 한 일은 신장단에 향을 올리는 일이었다
당시 주지스님은 동자승인 진묵에게 신장단의 신장들에게 향불을 피우는 일은 맡겼다
아직 어리니 다른 힘든 일을 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린 진묵은 아침 저녁으로 신장단에 향불을 피웠다.
이렇게 며칠이 지났다
어느 날 주지스님 꿈에 신장들이 나타나 몹시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부처를 호위하는 신장들이요
그런데 어찌해서 부처님의 화신에게 우리들에게 예경하고 향을 올리는 일을 시킨단 말이요
우리가 송구하고 불편하기 한이 없소
앞으로 그분에게 절대 이런 일은 시키지 마시오
그래야 우리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소
깜짝 놀란 주지스님이 잠을 깨고 보니 꿈이었다.
이튼날부터 주지스님은 진묵에게 이일을 시키지 않았다.
스님은 이어 송광사. 원등사. 대원사 등에서 주석하셨다.
스님과 관련한 일화는 이 일대에 널리 전해진다.
스님은 효성이 지극했다
진묵 대사가 전주시에 있는 용화산 일출암에서 머물 때 일이다
스님은 홀로 남은 어머니를 절 아래 왜막촌에 모셔다 놓았다
진묵대사는 아침 저녁으로 마을로 내려가 어머니에게 문안을 드렸다
하루는 어머니의 얼굴이 좋지 않아 어찌된 일인가 살펴보니 모기 때문에 고생을 해 그런 것이었다
대사는 그길로 산신을 불러 왜막촌에 모기가 없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 날 이후로 어머니가 돌아가실때까지 모기가 없었다고 한다
진묵대사의 어머니는 그 후 5년 만에 돌아가셨다
모친의 산소는 전국 김제군 만경면의 유양산에 모셨다
현재는 만경읍 화포리 358번지다.
진묵대사는 노모의 왕생극락을 빌며 영전에 제문은 지어 올렸다
그 내용이 애절해 듣는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열 달 동안 태중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오
슬하에 삼 년 동안 길러주신 은혜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세 위에 다시 만세를 더하여도 자식의 마음에는 부족하온데
백 년 생애에 백 년도 채우지 못했으니 어머님의 수명은 어찌 그리도 짧습니까
표주박을 들고 길거리에서 걸식하는 이 중은 이미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녀를 꽂지 못하고 출가하지 못한 누이동생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상단 불공을 마치고 하단 제사를 모셔 파하니 중들은 각기 자기 방을 찾아 들어가고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중중한데 어머님 영영은 어디로 떠나시렵니까
아 애닯고 슬프도다
누구든지 진묵대사의 노모 산소의 풀을 베고 과일과 음식을 차려놓으면
그 사람의 농사가 풍년이 들었다
이런 소문이 나자 주변 사람들이 앞 다투어 벌초를 하고 과일을 차려 놓았다
산소는 언제든지 말끔히 정돈돼 있다고 한다
이 산소는 자손이 없어도 천 년동안 향연기가 끊이지 않는다는 이른바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라고 한다
다시말해 자손이 없어도 천 년동안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주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곳에는 참배객들의 발길이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3
진묵대사는 생각이나 행동에 걸림이 없었다
자유자재하며 지냈다
스님은 술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술을 술이라고 하지 않고 곡차라고 하며 마셨다고 한다
대신에 술이라고 하면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술을 거르고 있는 모습을 진묵대사가 지나 가다가 보게 됐다
마침 목이 컬컬하던 터라 은근히 술 생각이 났다
그렇다고 대 놓고 술을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슬적 지나가면서 말을 건냈다
지금 무엇을 하는 고
예 지금 술을 가르고 있습니다
진묵대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곳을 지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물었다
지금 거르고 있는것이 무엇인고
술인데요
진묵대사의 속마음을 잘 알면서도 심술궂은 그 스님이 심술을 부린 것이다
진묵대사는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되둘아 갔다
아무리 참고 싶어도 술 생각이 간절해 한 참 후에 그곳으로 가서 다시 물었다
그것이 무엇인고
이것요
술입니다
술
진묵대사는 상대의 속마음을 간파하고 술 마실 생각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러자 진묵대사를 늘 호위하고 다니던 금장장사가 화가 치밀었다
금강장사는 술을 거르고 있는 스님한테로 다가가 몽둥이로 등을 후려치며 고함을 질렀다
감히 부처님의 화신인 진묵대사를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한 번 만 그런 짓을 했다가 그만 두지 않을테니 그리 알아라
그 스님은 그만 혼비백산해 법당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4
진묵대사의 신통력에 관한 일화다
예전에는 출가한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면 칠거지악(七去之惡)에 해당했다
친정으로 쫒겨 나는 일도 허다했다
자식을 못 낳은 것이 여자 만의 책임이 아닌데도 그 시절에는 그랬다
출가한지 몇 년이 지나도 아이를 갖지 못한 인근 마을 아녀자가 진묵대사를 찾아와 간곡히 부탁했다
그 부인은 독실한 신자였다
스님 제발 집안의 대를 잇게 해 주십시오
진묵대사는 어떤 일이든지 자신이 도울 수 있다면 흔쾌하게 대답했다
그 날도 마찬기지였다.
그래 그렇게 하지
스님은 곧장 나한전을 들어갔다
그리고는 목탁으로 나한들의 머리를 차례로 “톡톡”두르리며 말했다
이번에 저 부인이 아들을 낳도록 좀 도와 줘
그날 밤 부인의 꿈에 나한이 나타났다
이마에 혹이 하나 씩 달린 나한은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대는 소원이 있으면 우리한테 와서 직접 말 할 것인지
왜 진묵대사를 통해 우리 머리에 혹만 나게 만든단 말인가
우리 머리의 혹이 안 보이는가
스님의 부탁이니 안 들어줄 수 없지만 앞으로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하지 말게나
그 후 몇 달 후 그 부인은 태기가 있었다
열달 후에 그 부인은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5
진묵대사가 상운암에 머물 때의 일이다
당시는 스님들이 탁발을 해서 생활했다
진묵대사를 모시던 한 스님이 먼 곳으로 탁발을 나가게 됐다
그 스님은 진묵대사에게 미리 말씀드렸다
스님 이번에는 기간이 오래 걸릴 것입니다
공양 잘 챙겨 드십시오
오냐
걱정 하지 말고 다녀 오너라
탁발을 나간 스님이 한 달여 만에 돌아오니 스님은 선정에 들어 있었다
스님 잘 다녀왔습니다
그래도 스님은 대답이 없었다
가까히 가보니 스님 얼굴에는 온통 거미줄이 쳐 졌다
무릎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인 모습이었다
깜짝 놀란 스님이 진묵대사의 얼굴 거미줄을 걷어내고 무릎위의 먼지를 털어낸 뒤 큰 소리로 불렀다
스님, 제가 왔습니다
그러나 스님이 선정삼매에서 깨어나더니 오히려 책망을 했다
아니 탁발나간 사람이 왜 이리 일찍 돌아왔느냐
스님 제가 절을 떠난지 한달여가 됩니다
아니 벌써 그렇게 됐단 말이냐
진묵대사의 말에 스님은 할말을 잊었다고 한다
6
진묵대사에게는 누님이 한 분 있었다
박복했던지 가난하게 살았다
그 누님을 볼 때마다 진묵대사는 열심히 수행하라고 당부했다
누님 부처님 말씀에 따라 마음 공부 좀 하세요
알았네
스님의 누님은 늘 그렇게 하겠다고 해 놓고는 실천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진묵대사는 계속 간곡히 부탁했다
누님 살아서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죽어서 극락에 가지 못합니다
제발 제 말좀 듣고 수행을 하세요
진묵대사가 계속 그렇게 말하자 스님의 누님이 나중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동생이 도인인데 설마 나를 그냥 둘라고
나 대신 기도해서 나를 극락으로 보내 주겠지
내가 걱정할 게 뭐 있겠나
진묵대사가 기가 막힐 지경이었가
그렇다고 누님한테 야단을 칠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시간이었다
진묵대사가 점심을 먹고 있는데 마침 누님이 오고 있었다
진묵대사는 이날 따라 누님이 와도 본척도 않고 밥만 먹고 있었다
이를 본 진묵대사의 누님이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내가 스님의 누님인데 밥을 먹고 있으면서 밥을 먹어느냐고 물어 보지도 않고 그럴 수 있는가
그러나 진묵대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누님 지금 배가 부르지 않습니까
동생인 스님이 밥먹는데 왜 내가 배가 부르겠나 사람 놀리는가
진묵대사가 말했다.
그것 보세요
누님 제가 밥먹는다고 누님 배가 부르지 않지요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공부한다고 누님이 도인되는 거 아닙니다
누님의 업장은 누님이 공부해 씻어야 합니다
누님이 마음 공부를 열심히 하면 누님이 극락가는 것이지 내가 대신 극락가는 게 아닙니다
이제 아셨지요
진묵대사는 그런 다음 누님에게 점심을 잘 대접했다
7
진묵대사가 거처하던 봉서사에서 약 5Km 떨어진 곳에 당시 유학자인 봉곡 김동준이 살았다
두 사람은 서로 오가며 교분이 두터웠다
유학에 조예가 깊던 진묵대사는 어느 날 봉곡에게 주자강목을 빌렸달라고 말했다
이 책은 송나라 주희가 지은 책으로 모두 59권이었다
스님이 보신다니 빌려 드리지요
봉곡은 사람을 시켜 스님 뒤를 따르게 했다
진묵대사는 빌린 책을 바랑에 넣더니 길을 걸으며 한 권 씩 꺼내 읽기 시작했다
속독으로 한 권을 금새 다 읽더니 그 책을 길가에 '휙' 버리는 것이 아닌가
뒤따른던 사람이 그 책을 다 주웠다
진묵대사는 절 까지 가면서 나머지 책을 다 읽었다
얼마후 봉곡이 진묵대사에게 물었다.
책은 다 읽었나요
그럼요
그 내용을 다 알고 있소
다 알다마다요
봉곡이 책을 꺼내 중간 중간 내용을 물으니 진묵대사는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다 대답하는 것이었다
봉곡이 장난기가 발동해 진묵대사에게 다시 물었다
책을 다 읽었으면 돌려 줘야 하지 않소
책을 다 버렸습니다
아니 책을 버리다니요
고기를 잡으면 통발은 버리는 법 아닙니까
8
진묵대사와 나한들과의 장난스런 일화 한토막
진묵대사는 신도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나한전에 들어가
목탁으로 나한들의 머리를 '툭툭'치며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나한들은 이마에 난 혹을 어루만지면서도 진묵대사의 청을 다 들어 주었다
어느 날
진묵대사가 혼자 볼일이 있어 산문 밖으로 나갔다
길을 가는데 마침 사미승이 앞에 가고 있었다
심심하던 차라 함께 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에 큰 개울이 나타났다
그러자 사미승이 진묵대사에게 말했다
스님 제가 먼저 개울을 건너가겠습니다
물이 깊으면 돌아서 건너시지요
그렇게 하려무나
사미승은 성큼 성큼 개울을 건너갔다
이를 본 진묵대사도 개울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중간 쯤 가자 갑자기 물이 깊어지는 것이었다
진묵대사가 물에 빠져 허욱적 거리자 사미승이 급히 들어와 진묵대사를 부축해 물을 건넜다
스님은 물이 그렇게 깊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허둥대십니까
진묵대사는 아차 싶었다
바로 나한들이 진묵대사에게 장난을 친 것이었다
진묵대사는 나한을 보며 시 한 수를 지었다
너희 열 여섯 어리석은 자들아
속가(俗家)의 잿밥만 축내는구나
신통한 술법(術法)은 제법이다만
대도(大道)는 내게 물어야 마땅하리라
9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진묵대사가 길을 가다가 개울가에서 거물로 물고기를 잡는 청년들을 만났다
청년들은 잡은 물고기를 솥에 넣고 어탕을 끊였다
구수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저 미각을 자극했다
스님이 솥안을 보면서 탄식했다
잘 놀던 물고기들이 거물에 걸려 솥안에서 고통을 당하는 구나
이에 한 청년이 물었다
대사께서 어탕을 드시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준다면 나는 먹지
청년이 다시 말했다
그럼 이 솥채로 드릴테니 다 드시지요
진묵대사는 말이 떨어지자 솥을 번쩍 들어 단숨에 어탕을 다 먹었다
이를 본 청년들이 놀라면서도 장난기가 발동해 스님에게 따져 물었다
부처님께서 살생을 금하셨다는데 스님이 어탕을 드셨으니 참 스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진묵대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물고기를 죽인 것은 그대들이지만 죽은 고기를 살릴는 일은 내가 할 수 있지
스님은 옷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더니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많은 은빛 물고기들이 대사의 항문에서 쏱아져 나와 물속에서 뛰놀았다
물고기들아 멀리 가서 놀아라
다시는 거물에 걸려 솥안에서 삶기는 고통을 당하지 말아라
청년들은 신묘한 장면에 말을 잇지 못했다
청년들은 진묵대사에게 절을 하고 거물을 거둬 돌아갔다
10
진묵대사와 대사의 누님과 관련한 일화
스님을 볼 적마다 대사의 누님은 부자좀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애 못 낳은 사람한테 애도 낳게 해 주면서 하나 뿐인 누나 부탁은 왜 안들어 주는가
진묵 대사가 시키는대로 하면 부자가 되도록 해 주겠다고 했다
내일 저녁 사람들이 갈테니 잔칫상을 차려 놓거라
그들을 지극정성으로 대접해 보내세요
알았네
스님은 이튼날 나한전으로 가 목탁으로 나한들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부탁했다
오늘 저녁 누님이 그대들을 위해 잔칫상을 차릴 것이네
정성을 생각해서 부자로 살게 도와 주게
그날 저녁 누님은 손님대접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다
해가 서산턱에 걸릴 무렵 문동병환자. 곰배팔 절름발이 등 병신 16명이 집안으로 들이 닥쳤다
화가 치민 누님은 건성으로 음식상을 내놓았다
부자만들어 달랬더니 웬 병신들만 보내다니
스님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병신들이 음식상을 보더니 숟가락도 들지 않고 이거 먹을 게 없네
그만 가세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튼날 진묵대사가 누님에게 물었다
어제 밤 손님 접대는 잘했습니까
스님도 웬 병신들을 그렇게 보내는가
밥도 안먹고 그냥 갔네
이런
그들이 바로 16나한들입니다
이제 부자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세요
16나한이 병신들로 변신해 복을 주기 위해 누님 집에 갔건만 이를 알지 못하고 박대를 했던 것이다
스님이 한탄하며 중얼거렸다
박복중생은 부처님도 구제하기 못한다너니 그 말이 틀림없구나
11
하루는 진묵대사가 목욕을 하고 새 옷을 갈아 입더니 절 밖으로 나갔다
시냇물을 따라 한 참 걷던 스님은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말했다
저게 바로 석가모니 부처의 그림자였구나
그리고 발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한 뒤 스님들을 불러 모았다
내 곧 떠날 터이니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묻도록 하라
스님들은 진묵대사의 법맥이 궁금했다
진묵대사는 어릴적부터 총명해 스승없이 혼자 공부해 득도했기 때문이다
스님이 열반에 드신 후 어떤 스님의 법통을 이은 것으로 할까요
진묵은 대답이 없었다
거듭 스님들이 간청하자 한마디 했다
서산대사의 문하로 해라
말을 마친 진묵대사는 평상시 모습으로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평생 수많은 이적을 남긴 스님은 1633년 세수 72세 법랍 65세로 입적했다
스님은 열반하면서 나중에 자신의 부도가 하얗게 변하면
내가 다시 태어날 것이니 그리 알라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 봉서사 왼쪽에 서 있는 부도탑은 차츰 힌색으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
10여년 전 당시 주지인 서남수 스님은
대사의 부도탑 둘레가 처음보다 2cm 가량 커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부도탑은지난 1984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됐다
현재 봉서사에는 진묵대사 부도탑과 진묵당 직묵약수가 있다
한가지 더 할 것은 삼례라는 지명에 관한 설화다
진묵대사의 이적에 관해서는 일본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이 이곳을 지나다가 말에서 내려
진묵대사가 주석했던 서방산 봉서사를 향해 세번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후 이곳을 삼례로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백제 법왕 원년(599)창건, 완산주 만경현 출신 진표율사(塵表律師)가 766년 미륵신앙 대가람으로 중창한 金山寺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간행)는 진묵대사의 죽음에 얽힌 비화를 싣고 있다.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의 도술 조화의 능력을 시기하고
질투한 유학자 김봉곡(金鳳谷,1575~1661)에 의해 참혹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는 뛰어난 도력을 지녔으나
몸을 두고 시해(屍解)로 다른 곳으로 간 사이 김봉곡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진묵대사는
조선 중기 명종 17년 임술년(1562)에 태어나 인조 11년 계유년(1633) 10월 28일에 세상을 떠난
고승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나옹懶翁대사와 더불어 석가모니 후신불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름은 일옥一玉이며, 진묵震默은 그의 호로 김제군 만경萬頃면 화포火浦리에서 태어났는데,
이 화포리란 곳은 옛날의 불거촌佛居村으로 부처가 살았던 마을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대사가 태어날 때 불거촌의 초목이 3년 동안이나 시들어서 말라 죽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불세출의 기운을 타고났다'고 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7세 때, 전주 서방산西方山에 있는 봉서사鳳捿寺로 출가했다.
대사는 불가(佛家)의 인물이지만, 이미 그 경계를 뛰어넘어 유불선儒佛仙 삼교에 회통會通한 인물이었다.
타자(他者) 구원보다는 자기구원에만 집착하는 소승불교를 비판하고,
명리승인 서산대사를 비판하면서 중생들의 생활 속에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진정한 보살행을 행함으로써 부처의 화신다운 면모를 보였다. 또한 출가인임에도
모친과 누이동생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천륜과 동기간 우애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중시한 인물로 유자(儒者)보다 더 유자儒者다웠다.
진묵대사는 이땅의 인간들을 위해 천상문명을 지상에 이식하기 위해 '시해선尸解仙'으로
천상에 올라간 사이에 유학자 김봉곡의 시기심과 질투로 인해 대사의 육신은 불타서 사라지고 말았다.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1575~1661)은 자가 이식(而式)이고 호는 봉곡鳳谷이다.
본관은 광산으로 고려조의 시중 문정공 태현의 후손이고, 생원 희지의 아들이다.
서인의 영수격으로 예학에 능통했던 사계 김장생(1548~1631)의 제자로서
그의 추천을 받아 의금부도사와 사헌부 감찰 등을 제수 받았다.
그는 계몽도설啓蒙圖說, 심성서언心性緖言 등의 성리학에 관한 저술을 남길 정도로
성리학적 지식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훗날 그의 묘갈명을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지었다.
다음은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가 쓴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의 일화이다.
조선 인조 때 무더운 여름날 변산(邊山) 월명암月明庵에서 진묵대사를 모시던 시자(侍者)가
때마침 속가에 제사가 있어 공양물을 지어 놓고 산을 내려가 내일 온다고 고했다.
이 때 스님은 방안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손을 문지방에 대고서 능엄삼매楞嚴三昧에 들어있었다.
이튿날 시자가 올라와 보니 밥상은 그대로고 스님의 자세도 그대로인데,
스님의 손에서 피가 흘러 내려 그대로 말라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바람이 불어 닫힌 문이 계속해서 문지방에 댄 손을 찧어 피가 흐르는 데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삼매三昧(수행에 있어서 최고의 정신 집중 상태)에 들었던 것이다.
스님은 이미 시,공간을 초월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삼매에서 깨어난 스님은 평소 좋아하는 술을 거르고 있는 다른 중에게 무엇을 거르는가 하고 물었다.
스님이 평소 술을 곡차(穀茶)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 중은 스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술을 거른다고 거듭 대답하여, 결국 스님에게 곡차 공양을 하지 않았다.
이에 스님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길을 가는데,
얼마 뒤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나타나 그 중을 타살해 버렸다. 이후 절문을 떠나 길을 나선 스님은
냇가에서 천렵(川獵,냇물에서 하는 고기잡이)을 한 뒤 매운탕을 끓이고 있는 소년 무리들을 만났다.
스님이 이 광경을 보고 탄식하면서, "이 무고한 물고기들이 화탕火湯 지옥의 고생을 하는구나!"하니,
한 소년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선사께서도 이 고깃국을 드시겠습니까?"하니
"나야 잘 먹지"하였다. 이에 소년이 "저 한 솥을 선사께 맡기겠으니 다 드시오."하였다.
이에 스님이 솥을 들어 입에 대고 순식간에 남김없이 다 먹어 버리자,
소년들은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어기고 고깃국을 다 먹었다고 조롱하였다.
이에 말씀하시기를 "물고기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지만 그것을 살리는 것은 내게 있다"고 말하며
냇가에 가서 뒤를 보니 무수한 고기들이 살아서 헤엄쳐 갔다.
이에 소년들이 탄복하고는 그물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갔다.
그 물고기들이 ‘중태미’로 중(僧)의 태(胎)에서 나온 물고기란 뜻으로 전북지방에만 있다고 한다.
전주 장날을 맞이하여, 어스름이 찾아올 즈음 어머니를 뵙기 위해
왜막촌으로 가는 길에서 흥이 돋은 스님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天衾地席山爲枕 천금지석산위침
月燭雲屛海作樽 월촉운병해작준
大醉居然仍起舞 대취거연잉기무
却嫌長袖掛崑崙 각혐장수괘곤륜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고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삼아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맷자락 곤륜산에 걸릴까 꺼려지노라.
유유자적하고 무위 자연한 소요유(逍遙遊)의 경지를 보여주면서 호호탕탕한 스님의 모습은
명리를 초탈하여 아무 것에도 속박 받지 않은 대자유인大自由人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윽고 도착한 왜막촌에는 7세 때 출가한 이후 봉양해 온 늙은 어머니가 계셨다.
스님은 그 마을 뒤에 있는 일출암에 머물렀다.
어머니가 해주신 보리밥 한 덩이와 보글보글 맛있게 끓인 된장국에
누이가 거른 곡차로 저녁을 맛있게 먹은 스님은 또다시 입정삼매에 들었다.
만경들녘에는 휘영청 밝은 백중百中일의 보름달이 대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진묵대사는 신통력이 뛰어난 도인이면서도 세상에 초연한,
그러면서도 인간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다정다감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살가움을 지닌 이였다.
그리고 결코 손으로 움켜잡을 수 없는 바람과 같은 인물로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홀로 나아가는 구도자이며 천지만물과 함께 살아가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었다.
다음은 증산 상제님의 말씀 중, 진묵대사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내용이다.
道典 4편 138장) 전주 서방산(西方山) 봉서사(鳳捿寺) 아래에 계실 때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김봉곡(金鳳谷)이 시기심이 많더니 하루는 진묵(震默)이 봉곡에게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빌려 가면서 봉곡이 곧 후회하여 찾아올 줄 알고 걸어가면서
한 권씩 보고는 길가에 버려 봉서사 산문(山門) 어귀에 이르기까지 다 보고 버렸느니라.
봉곡이 책을 빌려 준 뒤에 곧 뉘우쳐 생각하기를
'진묵은 불법을 통한 자인데 만일 유도(儒道)까지 정통하면 대적하지 못하게 될 것이요,
또 불법이 크게 흥왕하여지고 유교는 쇠퇴하여지리라.' 하고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책을 도로 찾아오게 하니, 그 사람이 뒤쫓아 가면서 길가에 이따금 한 권씩 버려진 책을
거두어 왔느니라. 그 뒤에 진묵이 봉곡에게 가니
봉곡이 빌려 간 책을 돌려달라고 하거늘 진묵이 '그 책은 쓸데없는 것이므로 다 버렸노라.' 하니
봉곡이 크게 노하는지라. 진묵이 말하기를 '내가 외우리니 기록하라.' 하고 외우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봉곡이 이로부터 더욱 시기하더니,
그 뒤에 진묵이 상좌(上佐)에게 단단히 이르기를 '내가 8일을 기한으로 하여
시해(尸解)로 천상에 다녀올 것이니 절대로 방문을 열지 말라.' 하고 떠나거늘
하루는 봉곡이 봉서사로부터 서기가 하늘로 뻗친 것을 보고
'내가 저 기운을 받으면 진묵을 능가할 수 있으리라.' 하며 즉시 봉서사로 올라갔느니라.
봉곡이 서기가 뻗치는 법당 앞에 당도하여 진묵을 찾으매 상좌가 나와서
'대사님이 출타하신 지 얼마 안 됩니다.'하니 봉곡이 '옳거니, 법당의 서기를 이 참에 받아야겠다.‘
하고 '법당 문을 열라.' 하매 상좌가 '대사님께서 자물쇠를 가지고 가셨습니다.' 하거늘
봉곡이 큰 소리로 호령하며 기어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뜻밖에 진묵이 앉아 있고 그의 몸에서 서기가 뻗치더라. 봉곡이 잠시 당황하다가
문득 진묵이 시해로 어디론가 갔음을 알아차리고
'서기를 못 받을 바에는 차라리 돌아오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상좌에게 '어찌 시체를 방에 숨겨 두고 혹세무민하느냐!
중은 죽으면 화장을 해야 하느니라.' 하며 마침내 마당에 나무를 쌓고
진묵의 시신을 화장하니 어린 상좌가 울면서 말리거늘 봉곡은 도리어 화를 내며 상좌를 내쳤느니라.
이 때 마침 진묵이 돌아와 공중에서 외쳐 말하기를
'너와 내가 아무 원수진 일이 없는데 어찌 이러느냐!' 하니
상좌가 진묵의 소리를 듣고 통곡하거늘 봉곡이 '저것은 요귀(妖鬼)의 소리니라.
듣지 말고 손가락뼈 한 마디, 수염 한 올도 남김없이 잘 태워야 하느니라.' 하며 일일이 다 태워 버리니
진묵이 다급한 음성으로 상좌에게 '손톱이라도 찾아 보라.' 하는데
봉곡이 상좌를 꼼짝도 못하게 하며 '손톱도 까마귀가 물고 날아갔다.' 하는지라.
진묵이 소리쳐 말하기를 '내가 각 지방 문화의 정수를 거두어 모아
천하를 크게 문명케 하고자 하였으나 이제 봉곡의 질투로 인하여 대사(大事)를 그르치게 되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오. 나는 이제 이 땅을 떠나려니와 봉곡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질을
면치 못하리라.' 하고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갔느니라.' 하시니라.
이로써 대사의 뜻은 좌절되고, 깊은 원한을 품은 채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넘어갔다.
또한 거의 동시대에 서양 의 천주교를 동양에 뿌리내린
이마두((利瑪竇,마테오리치 신부,1552~ 1610) 대성사는 아래 말씀처럼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넘어가 서양의 과학문명을 일으키게 된다.(17세기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정여립(1546-1589)의 저항 근거지 천반산과 죽도 위치도
1567년 선조의 즉위로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정국을 장악한 사림세력은 1575년 이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그
동안 양쪽의 조화를 주장하던 이이가 서인이 되면서 서인이 정파로서의 틀을 잡게 되는 1582년부터 본격적인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한때 정국의 우세를 장악했던 서인은 이이가 죽은 뒤 선조의 견제를 받으면서 위축되고, 동인
이 권력의 핵심에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때 이이의 천거로 청현직에 오르기도 했던 동
인 정여립은 이이가 죽은 후 그를 배신했다 하여 선조의 미움을 받고 고향인 전주로 쫓겨갔다. 정여립은 전라도·
황해도 일대의 세력들과 결탁하여 '대동계'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모역을 꾀하였다. 그는 천하는 공물이라는 전제
아래 혈통에 의한 왕위 계승이 결코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 하고, 주자학적인 '불사이군론'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당시 동인 중 조식(曺植)이나 서경덕 계열의 사람들에게서 많이 보여
지던 것인데, 정여립은 선조의 한계에 적극적으로 반발하여 모역을 준비했던 것이다. 옥사는 황해도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1589년 10월 황해감사 한준 등의 고변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정철 등 서인세력은 사건을 처리하면서 이
를 정권장악의 기회로 삼아 동인을 제거하고자 옥사를 확대하였다. 정여립은 진안군 죽도로 도망했다가 자살하고
그 아들 옥남은 잡혀와서 처형되었다. 정여립의 친척인 정언신·정언지·이진길과 평소 정여립과 친분이 깊었던
이발·이길·백유양·이급 등이 일당으로 몰려 심문 도중에 죽고, 이산해(李山海)·정인홍 등 다수의 동인 핵심인
물들이 관직에서 밀려났다. 특히 조식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은 역모의 또 다른 괴수로 인식된 길삼봉으로 지목
되어 옥사하고, 서경덕의 제자인 정개청도 일당으로 지목되었다가 '절의를 배척했다'는 죄목으로 옥사하였다. 그
결과 동인은 크게 위축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으나, 서인의 지나친 세력 확대는 선조의 반발을 불러일
으켜 정철이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다가 밀려나면서 다시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후 동인은 서인 처리에 대
한 온건과 강경의 입장 차이로 이황(李滉) 계열의 사람들이 남인으로, 조식과 서경덕 계열의 사람들은 북인으로
나뉘는 조짐을 보이게 된다. 이 사건은 붕당 운영 방식이 미숙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사림정치의 한계 를 드
러낸 것이지만, 이후의 붕당 전개과정에서 북인의 정인홍 등이 서인을 공격하는 주요한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금강 물줄기가 천반산 자락을 원으로 그리면서 흘러 한반도 모양을 이루었다. 전북 진안군 천반산은 수직 융기로
해발 650m의 산이 되었다. 오른쪽에 있는 산이 죽도다. 산죽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여립은 죽도에서
관군과 대항하다 죽었다. 지금도 그가 살던 김제 금구면 일대에는 많은 전설이 남아 있다. 시비를 가리며 싸움질
이 벌어지면 구경하던 사람들이 “정여립을 불러와 판정을 받아야겠구먼”이라며 참견했다고 한다. 그만큼 정여립
이 옳고 그름을 잘 가렸다는 뜻이다. 또 정여립이 부리는 말이 명마였는데, 어느 날 말에게 활을 쏘면서 활보다
먼저 달려가 목표 지점에 가지 않으면 죽이겠노라고 했다. 정여립이 일정한 지점에 활을 쏘고 달려갔지만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성급하게 칼을 꺼내 말의 목을 쳤다. 그런데 화살이 뒤늦게 날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정여립
의 말무덤이 지금도 논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아무튼 그 뒤 이 사건을 빌미로 호남 인사들의 등용을 억제했고
끝내 그곳에서 동학농민전쟁이 터졌다. 분명히 밝혀 둘 것은 정여립이 왕조시대에는 이런 핍박을 받았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개혁자로서 우뚝한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반역사건이 결국 우리 역사를 한 구
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기에 어떤 의미로든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몇 초 차이 왼쪽부터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의 새로 공개된 한양 압송 사진(위)과 기존 사진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의 모습으로 유일하게 알려져 있던 사진의 이본(異本)이 23일 공개됐다. 기존 사진
은 당시 한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사진가 무라카미 덴신이 촬영한 것으로 전봉준이 1895년 2월27일 서울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서 법무아문으로 이송되기 직전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양상현 순천향대 건축학과 교수는 "이번에
공개된 사진이 기존 사진과 정황은 거의 같으나 뒤편 가마꾼의 얼굴이 돌려져 있어 몇 초의 차이를 두고 촬영된
사진으로 보인다"며 "두 사진에 담긴 전봉준의 표정에도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동양학자 윌리엄 그리
피스의 <그리피스 컬렉션>에서 이 사진을 찾아냈다. 24일은 전봉준 서거 120주년이다.(2015/04/24 경향신문)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458-1 출생 전봉준(1854-1895) 생가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全琫準)(1855-1895)이 살던 집이다. 그는 1854년(철종(哲宗)5)에 당시의 행정구
역으로는 고부군(高阜郡) 궁동면(宮東面) 양교리(陽橋里)에 해당한 이 집에서 아버지 전창혁(全彰赫)의 아들로 태
어났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전봉준(全琫準)은 조선 고종 27년(1890)인 30세 때 동학에 몸을 담아,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그의 신분은 향반(鄕班)으로 자(字)를 명숙(明
淑)이라 했는데, 몸집이 작아서 녹두(綠豆)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고, 얼굴모양이 녹두 같았다고도 한다. 그 후에
전봉준(全琫準)은 아버지처럼 서당의 훈장(訓長)을 할 정도로 학식(學識)도 있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약을 팔아
생계를 꾀하거나 방술(方術)도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관리들의 횡포에 맞서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조직해 동
학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옛집은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앞면 4칸·옆면 1칸의 초가집으로 안채가 구
성된 남향집이다. 동쪽부터 부엌·큰방·웃방·끝방 순서의 일(一)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남
부지역 민가 구조와는 다른 방향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전북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435-1 (신기마을, 객망리) 강일순(1871-1909) 탄생지
강일순(姜一淳)은 진주 강씨(晉州姜氏)이고 이름은 일순(一淳)이며 자는 사옥(士玉)이며, 호는 증산(甑山)이다.
1871년 9월 19일 고부군 답내면 서산리에서 아버지 흥주(興周)와 어머니 권 씨(權氏)의 아들로 전북 정읍시 덕천
면 신월리 신송마을 438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 신흥종교의 비조(鼻祖)라 칭하는 증산은 30세가 될 때까지 조선
8도를 돌아다니며 수행을 하고 1901년 7월 5일 모악산 대원사에서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증산의 종교 사상은 최
수운(崔水雲)의 동학사상과 함께 우리나라 근세 사회의 사상의 효시이다. 동학사상은 인내천으로 [사람이 바로 하
늘이다]라는 인간 존엄 사상을 자각시켰으며 후천개벽으로 지상 선경을 이룬다는 것으로 현실의 기존 질서를 타파
하고 혁명적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것이 갑오동학혁명으로 발전한 것이고, 증산 사상은 이보다 더 적극적이고 구
체적인 것으로 발전했다. 증산 사상의 핵심은 천지공사라는 형태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는 옥황상제의 만능의 권
능으로 천, 지, 인의 삼계를 모순된 선천에서 후천으로 뜯어고친다는 것이다. 천지공사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오
직 인간이니 인간은 가장 존귀한 것이다. 사람의 노력에 의하여 자연, 문화, 사회가 재조될 수 있다 하였으니 자
연 생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인위의 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1909년 6월 24일 동곡리 김형렬 집에서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증산교가 성지라고 하는 모악산 금산사를 중심으로 18개의 교단이 집결되어 있다.
증산도에서 말하는 진묵대사(震默大師)
도(道)의 원전(原典) 도전(道典) 속 인물, 송구봉과 진묵대사, 그리고 최풍헌의 도력(道力)
[도전道典 4편 7장]
지난 임진왜란에 정란(靖亂)의 책임을 ‘최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 일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震默)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송구봉(宋龜峯)이 맡았으면 여덟 달 만에 끌렀으리라.’ 하니
이는 선도와 불도와 유도의 법술(法術)이 서로 다름을 이름이라.
옛적에는 판이 작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느니라.
※ 또 어느날 상제께서 말씀하시길
《... 진묵(震默)을 불교의 종장(宗長)으로, ... 각각 세우노라 》고 하셨도다
※ 진묵대사의 탄생
진묵대사는 조선 명종 17년(1562)에 만경강 하구와 인접한
해안가에 자리 잡은 전라도 만경현 불거촌(佛居村)에서 태어났다.
*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이며, ~
* '불거촌(佛居村)'이란 부처님이 거(居)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 진묵의 탄생지로 알려진 조앙사(祖仰寺)는 1915년에 창건했으며, ~
* 조앙사 뒤쪽 산속에는 진묵대사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임을 알리는 '고승 진묵대사 유허비' 가 세워져 있다.
* 《진묵조사유적고》에는 진묵의 어머니가 조의씨(調意氏)라고 기록되어 있고,
* 조앙사 가까이에 위치한 성모암(聖母庵)에서는 진묵의 어머니 진영을 모셔놓고 ~
* ~ 《비화경(悲華經)》을 인용하여 진묵대사가 부처의 화신이란 점을 은연중 암시하기
* 진묵대사의 법명(法名)은 일옥(一玉)이며
* 진묵(震默)은. 법호(法號)를 나타낸다
* 인조 11년(1633) 10월 28일에 72세로 입적하였다
* 임진왜란 시기를 민중과 더불어 살면서 대중교화에 온몸을 바친 인물이 진묵대사이다
* 진묵대사는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행을 실천한 부처의 화신으로,
* 대승적인 명리(命理, 하늘이 내린 목숨과 자연의 이치)를 도외시(度外視 , 상관하지 아니하거나 무시)하고
* 자기 구원에만 집착해 명리(名利 ,명예와 이익을 아울러 이르는 말)를 추구하는 소승불교를 비판하였다.
* 대사는 불가(佛家)의 인물이지만, 이미 그 경계를 뛰어넘어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에 회통(會通) 하였다.
잔잔한 음악 / 맑은 영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