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가(靑山歌)
- 나옹화상(懶翁和尙) -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惜兮 (료무애이무석혜) 사랑도 벗어 버려, 미움도 벗어버려,
(탐욕도 벗어버려, 성냄도 벗어버려)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 나옹선사의 시 「청산가(靑山歌)」에 붙여풀소리 최경순/ 2023/06/08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 이준관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마당이 내 집이었지.
내가 송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 다녔을 때
푸른 들판이 내 집이었지.
내가 잠자리처럼 은빛 날개를 가졌을 때
파란하늘이 내 집이었지.
내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집은 많았지.
나를 키워준 집은 차암 많았지.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국어교과)
“어른들도 누구나 다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Saint-Exupéry)가 그의 유명한 소설 『어린왕자』 서문에 쓴 문구입니다.
어때요? 동의하시나요? 채송화꽃처럼 조그만 아이였을 때 생각이 나시나요?
저는 세 살 때 기억이 나요.
충주 시골에 살던 저는 엄마 등에 업혀서 버스를 갈아타고
원주 병원에 입원해 계신 아버지를 만나러 갔었어요. 버스를 타러 가던 풍경.
중간에 길을 물어보던 두 명의 아저씨. 함께 차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
원주 시내 도로를 가로지르는 철로. 병원. 2층 계단 옆 첫 번째 있던 중환자실.
첫 번째 침대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 웃으시며 서랍에서 꺼내 주신 군밤.
1층 복도에 있던 도자기로 된 분수식 수도. 마당에 있던 커다란 파초 세 그루.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내려 고개를 하나 넘어가야 했는데, 이미 밤이 되었어요.
등불을 빌리러 한 집에 들렀는데, 주인아저씨가 마당에서 대야에 물을 담아 발을 씻다가
등불을 빌려주었어요. 주인아주머니가 빌려주기 싫어했던 것도 생각나요.
문경 대승사 묘적암에 전해오는 나옹선사 영정입니다.
묘적암은 나옹선사가 20세 때 이곳의 요연(了然) 스님을 찾아서 출가하였던 곳입니다.
영정은 1803년(순조 3) 제작되었습니다. 왼쪽에 용장식이 화려한 총채처럼 보이는 것이
불자(拂子)입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8호입니다.
너무 장황했나요. 이렇게 세 살 기억도 또렷이 가지고 있는데도,
저도 일상에서는 예전에 어린아이였던 것을 잊고 살아요.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세상이 온통 내 집이 아니라,
이리저리 밀려나는 느낌입니다. 사람은 우주와 맞먹는 크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자꾸자꾸 작아지기만 합니다.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요. 그 의문을 가지고
고려 말의 큰 스님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년(충숙왕 7)~1376년(우왕 2))를 만나러 갑니다.
靑山歌(청산가)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누가 지은 지는 모르지만 어디선가 보았죠. 그것도 많이요.
이 시를 지은 이가 바로 나옹선사입니다. 이 시를 보면 저는 마음이 참 편해집니다.
말없이, 티 없이, 사랑도 벗어놓고 미음도 벗어놓으면 물같이 바람같이 살 수 있을까요?
힘들겠지만 노력해보고 싶어요.
경상북도 영덕에 있는 장육사입니다. 나옹화상은 자신이 태어난 곳 근처에 장육사를 세웠습니다.
나옹스님은 20세에 출가합니다. 28세 되던 1348년(충목왕 3) 11월
원나라 수도였던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을 향해 출발합니다.
다음 해 3월 연경 법원사에서 118대 조사(祖師) 지공선사(指空禪師)를 만납니다.
인도에서 오신 지공선사는 나옹선사를 으뜸 제자로 삼습니다.
어느 봄날 절에 매화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매화꽃을 본 지공선사는 게송(偈頌) 지어 나옹선사에게 주었습니다.
참고로 게송(偈頌)은 ‘부처님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葉靑花發一樹一(엽청화발일수일) 꽃잎도 푸르스름, 피었구나 매화야. 그렇듯 한 송이만 피었구나
十方八面無對一(시방팔면무대일) 매화야. 하늘과 땅 사이라 짝할 이 그 누굴까?
前事不問後事長(전사불문후사장) 알아 무엇하리 가벼린 날들이야, 앞날이여, 길이길이
香氣到地吾帝喜(향기도지오제희) 고운 빛만 물고 오리니, 그 내음 깨지는 곳마다 기뻐하리 우리 님.
이에 나옹선사가 화답합니다.
年年此樹雪裡開(연년차수설리개) 해마다 눈 올 때면 매화야 너는 피었겠지. 나비는 훨훨 돌아오고
蜂蝶忙忙不知新(봉접망망부지신) 벌은 바삐 날아가도, 목을 빼어 기다릴 뿐 새봄인 줄 몰랐구나.
今朝一箇花滿枝(금조일개화만지) 이 아침, 매화꽃 다시 피고 그 꽃 한 송이 살포시 문, 가지 끝을 따라
普天普地一般春(보천보지일반춘) 온 하늘 온 땅 가득 왔구나 봄아.
무비(無非) 스님이 번역한 『나옹스님 어록』을 참고했는데,
무비 스님의 번역이 너무 좋아 원본 그대로 옮겨봅니다.
무학대사 승탑입니다. 뒤로 보이는 승탑은 지공선사 승탑입니다.
지공선사 승탑 뒤 계단을 오르면 나옹선사의 승탑이 나옵니다.
고려 말 지공선사 - 나옹선사 - 무학대사가 사승관계로 이어지는데,
이들의 승탑이 나란히 있는 것 매우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무학대사 승탑은 보물 제388호이고, 지공선사 승탑은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9호입니다.
나옹선사는 31세 되던 1350년(충정왕 2)
중국 남쪽으로 내려가 임제선(臨濟禪)의 고승 평산처림(平山處林)을 만납니다.
평산스님이 나옹스님의 그릇을 금방 알아봅니다. 그리고 가사(袈裟)와 불자(拂子)를 전해줍니다.
가사는 승려의 옷이고, 불자는 고승들이 들고 있는 총채처럼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전해준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전해준다는 뜻입니다. 평산스님은 이때 게송을 짓습니다.
拂子法衣今付囑(불자법의금부촉) 오늘, 이 가사와 불자를 그대에게 맡기련다.
石中取出無瑕玉(석중취출무하옥) 그대는 돌 속에서 꺼낸 티 없는 옥이로구나.
戒根永淨得菩提(계근영정득보제) 영영 맑은 그 계행을 깨달았기 때문이지.
禪定慧光皆具足(선정혜광개구족) 선정과 지혜의 빛 함께 갖춘 그대여.
나옹선사는 39세 되던 1358년(공민왕 7) 고려로 돌아옵니다.
다음 해 평생의 제자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년(충숙왕 14)∼1405년(태종 5년)를 만납니다.
나옹선사의 법이 무학대사로 전해져 조선 불교의 중추가 됩니다.
無學(무학)
歷劫分明若大虛(역겁분명약대허) 억겁토록 분명하여 허공 같은데
何勞萬里問眀師(하로만리문명사) 무엇하러 만 리에 밝은 스승 찾는가
自家財寶猶難覓(자가재보유난멱) 제 집의 보물도 찾기가 어려운데
得髓傳衣枝上枝(득수전의지상지) 골수를 얻어 가사를 전하는 것, 가지 위의 가지다
나옹선사가 42세 되던 1361년(공민왕 10) 왕의 요청으로 궁궐에 들어가 설법을 합니다.
그날 설법의 첫머리를 『나옹화상 어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佛眞法身(불진법신) 부처님 참 모습이야
猶若虛空(유고허공) 텅 빈 하늘 같건만,
應物現形(응물현영) 부르면 벌써 오시네
如水中月(여수중월) 물 속 저 달처럼.
설법을 들은 왕태후의 요청으로 개경(開京, 개성) 신광사(神光寺)에 주지로 부임합니다.
곧바로 홍건적의 20만 대군이 쳐들어와 개경이 함락되고 왕은 안동으로 피난 갑니다.
난을 피하기 위해 개경이 온통 아비규환이 되었음에도 나옹선사는 신광사를 지켰습니다. 물론 홍건적이
신광사에도 들어왔지만, 장수들이 오히려 선사에게 설복되어 선사에게 공손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신광사가 무사했음은 물론이고요.
전망대에서 바라본 회암사지(檜巖寺址)입니다. 회암사는 나옹선사가 오랫동안 머무르던 절입니다.
지공선사의 바람대로 이곳을 대가람으로 중창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합니다.
회암사는 고려 말에는 262칸에 거주 스님이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지금 남은 잔해만 보아도 그 화려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370년(공민왕 19) 원나라 사도(司徒, 가장 높은 벼슬 중 하나) 달예(達叡)가
사신이 되어 고려로 올 때 지공선사의 영골(靈骨, 뼈)과 사리를 함께 가지고 옵니다.
나옹선사는 지공선사의 영골과 사리에 참배하고 시를 짓습니다.
來無所來(내무소래)
如朗月之影現千江(여랑월지영현천강) 왔어도 온 것이 없으니 밝은 달그림자가
去無所去(거무소거) 강물마다 나타난 것 같고 갔어도 간 곳 없으니
似澄空之形分諸刹(사징공지형분제찰) 맑은 허공의 형상이 모든 세계에 나누어진 것 같다
且道指空畢竟在什麽處(차도지공필경재십마처) 말해보라 지공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나옹선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대체로 고려 공민왕(恭愍王) 집정기와 일치합니다.
아시다시피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쓰면서 고려의 독립을 위해 애쓰던 분입니다.
당시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신정권,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면서 타락하고 해이해졌습니다.
뭔가 새롭게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때 불교 혁신에 앞장섰던 분이 나옹선사와 태고(太古) 보우선사(普愚禪師)입니다.
공민왕은 나옹선사를 왕의 스승인 왕사(王師)로 삼습니다.
그러나 허물어져가던 고려처럼 피폐해진 불교를 되살리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국정을 새롭게 장악해가는 신진사대부들은 나옹선사를 내몹니다.
우왕(禑王)은 사대부의 주장에 밀려 나옹선사를 밀양 영원사(瑩源寺) 주지로 내려 보냅니다.
양주시 회암사에 있는 나옹선사 승탑입니다. 회암사지 뒤에 있는
회암사 대웅전 옆 능선 위에 있습니다.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50호입니다.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楊州檜巖寺址禪覺王師碑)’입니다.
나옹선사의 시호(諡號)가 ‘선각(禪覺)입니다. 회암사지 뒤에 있는 회암사의 맨 위 건물인
삼성각 옆으로 난 등산로 계단을 오르면 능선에 있습니다. 비각에 놓여 있었는데,
1997년 산불로 비각이 타면서 그 열기로 비석이 산산조각이 났고 귀부만 남았습니다.
1999년 그 앞에 복제해서 다시 세웠습니다. 보물 제387호입니다.
몸이 좋지 않던 나옹선사는 밀양에 도착하지 못하고 여주 실륵사에서 입적합니다.
때는 1576년(우왕 2)으로 스님의 속세 나이 57세였고, 스님이 된 나이 법랍(法臘) 37세였습니다.
한 달 뒤 불교식 화장인 다비(茶毘)를 하였는데, 155과의 사리가 나왔습니다.
사리는 나옹선사가 중창한 회암사와 여주 신륵사를 비롯한 여러 곳에 모셨습니다.
회암사와 신륵사에는 탑비도 세웠습니다. 비문은 고려의 대 문장가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년(충숙왕 15)~1396년(태조 5)) 선생이 지었습니다.
비문 중 돌아간 이를 찬양하는 시(詩)인 명(銘) 일부를 보겠습니다.
普濟尊者諡禪覺塔銘(보제존자시선각탑명)
展也禪覺(전야선각) 惟麟之角(유린지각) 참으로 참선을 깨치신 이여, 기린의 뿔이로다.
王者之師(왕자지사) 人天眼目(인천안목) 임금님의 스승이요, 사람과 하늘의 밝은 눈이로다.
萬衲宗之(만납종지) 如水赴壑(여수부학) 수행자라면 다 우러러 물이 골짝으로 모이듯 했으나,
而鮮克知(이선극지) 所立之卓(소립지탁) 세우신 그 가르침 우뚝함이여, 아는 이가 참 드물었다.
- 중략 -
空耶色耶(공야색야) 上下洞徹(상하통철) 없음인가 있음인가? 위아래로 훤히 밝았나니,
邈在高風(막재고풍) 終古不滅(종고불멸) 아득해라, 빼어난 모습이어, 길이 함께 계시리.
나옹선사는 시를 잘 지은 스님으로도 유명합니다.
좋은 시들이 참 많지만, 지면의 한계가 아쉽네요. 아쉬움 때문에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孤舟(고주)
一隻孤舟獨出來(일척고주독출래) 배 한 척이 외롭게 나갔다가
滿江空載月明歸(만강공재월명귀) 빈 배에 가득 밝은 달만 싣고 돌아오네
魚歌獨唱歸何處(어가독창귀하처) 어부가를 홀로 부르며 어디로 돌아가는지
佛祖從來覔不知(불조종래멱부지) 부처와 조사는 도무지 찾을 줄을 모르네
나옹선사의 시와 어록을 읽으면서 저는 마음이 많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저는 아래 소개하는 정현 시인의 시 「어리광」을 읽으면서
큰 스님의 법어(法語)처럼 느꼈습니다. 저도 맘 놓고 어리광 부릴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누군가가 맘 놓고 어리광 부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어리광 / 정현
(정현 시집 『하루』 북랩, 2021년)
오늘 밤을 제쳐두고
흰눈이 말하네요
내가 왔다고
이렇게도 많이 내리며
계속해서 말하네요
내가 왔는데
도대체 어딜 보냐며
밤의 색을 지워가네요
내가 봤다고
나는 이 자리에서
너를 계속 봤다고
달래고 얼러도
멈추지 않고 내리네요
■ 회암사와 나옹화상
- 태조 이성계의 사찰에서 사지가 찢긴 불상이 널브러져 있었다 -
- 경향신문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2022/08/09
경기 양주 천보산(423m) 자락에 자리집고 있는 양주 회암사터 항공사진.
발굴결과 산 아래쪽 계곡에 차곡차곡 쌓은 8개의 석축 위에서 70여개 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발굴 현장을 그대로 노출시켜 놓았다.|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경기 양주 천보산(423m) 자락에 고색창연한 절터가 버티고 있다. 회암사터이다.
산의 아래쪽 계곡에 차곡차곡 쌓은 8개의 석축 위에 그대로 노출된 70여기의 건물터와 함께
그곳에서 활약한 고승들의 기념물까지…. 사적으로 지정된 구역만 1만여평(3만3391㎡)에 이르는
절터에 서면 600년의 시공을 초월한 듯한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들게 된다.
회암사 하면 절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일화가 떠오른다.
양녕대군의 ‘살아서는 임금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 이야기다.
양주 회암사터. 효령대군이 머문 사찰이다. 형인 양녕대군이 들판에서 잡아온 짐승들을 절간에서 굽자
효령대군이 “절간에서 무슨 짓이냐”고 힐난했다. 그러자 양녕대군은 “나는 살아서는 국왕(세종)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효령대군)의 형이니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고 했다.|양주시립 회암사지박물관 제공
1446년(세종 28) 4월23일 효령대군(1395~1486)이 회암사에서 법회를 열고 있었다.
그때 양녕대군(1394~1462)이 들판에서 사냥해온 짐승으로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
형이 신성한 절간에서 고기를 굽자 효령대군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니 지금 불공을 들이고 있는데…. 좀 심하지 않느냐”고 힐난했다. 그러자 양녕대군이 했다는 말….
“나는 살아서는 국왕(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불자(佛者·효령대군)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세종실록>)
회암사 복원도. 목은 이색의 ‘회암사수조기’는 “회암사 전각만 모두 262칸이고 15척이나 되는 불
상이 7구, 10척인 관음상 1구가 조성됐다”고 기록하고 “장대하고 미려하기가 동국(고려)에서 으뜸
이고,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사찰이라고 하니 과장된 말이 아니다”라 했다.|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 살아서는 임금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
세종대왕 3형제의 유쾌한 일화를 전하는 회암사의 창건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12세기부터 존재했던 사찰이었다.
다만 인도 승려인 지공 선사(?~1363)의 감화를 받은
제자 나옹(1320~1376)이 1374년 중건불사를 했다는 기록이 이색(1328~1396)의 <목은시고>에 실려있다.
“지공 스님이 회암사의 지세가 천축의 나란타사와 같다고
나옹(지공의 수제자)에게 말해 이곳에 회암사를 창건하게 했다.”
지공이 언급한 ‘나란타사’는 인도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와 학문의 요람이었다.
631년 이곳을 찾았던 당나라 고승 현장법사(602?~664)는
“상주하는 승려가 1만 명, 교수가 2,0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회암사는 선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선종(불교의 종파) 사원이다. 경전과 교리를 중시하는 교종과
차이점이 있다. 선종에서는 부처를 모시는 불전, 탑보다 현신의 부처인 주지의 공간인 방장과 수행
공간인 승당, 중료 등이 핵심시설이며, 수행 공동체 생활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건축물이 배치되
어 있다.|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이 사원의 마지막 졸업생이었던 지공은 원나라를 거쳐 1326년 3월부터 2년7개월 동안 고려에 머문다.
고려 백성들은 “석가모니가 환생해서 고려땅에 왔으니 어찌 뵙지 않겠느냐”고 추앙했다.
지공 스님은 “천보산 자락이 (어릴 적 수학했던) 나란타사의 지형과 비슷하다”면서
“‘삼산 양수간(三山兩水間)’에 있는 회암사를 중창하고 머물면 불법이 크게 일어난다”고
제자(나옹)에게 전했다.(1357년) 회암사는 삼산(삼각산)을 안산으로,
양수(임진강과 한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야말로 ‘삼산양수간’인 것이다.
나옹의 주도로 시작된 회암사의 중창불사는 1374~76년 사이에 이뤄졌다.
중창 1년 뒤인 1377년(우왕 3) 이색이 남긴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는
262칸이나 되는 사찰 건물의 규모와 위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회암사와 관련된 삼화상. 나옹 스님이 “천보산 자락에 사찰을 세우면 불법이 일어난다”는 스승인
지공 스님의 말에 따라 회암사를 중창했다. 조선 초에는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주석했다.
“보광전 5칸은 남쪽으로 면했는데 그 뒤에는 설법전 5칸이 있으며
그 뒤에는 사리전 1칸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정청(正廳) 3칸이 있다…
회암사 전각만 모두 262칸이고 15척이나 되는 불상이 7구, 10척인 관음상 1구가 조성됐다.”
그러면서 이색은 “장대하고 미려하기가 동국(고려)에서 으뜸이고,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사찰이라고 하니 과장된 말이 아니다”라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실제로 1376년 4월 열린 회암사 낙성식에는 감당할 수 없을만큼 전국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전국의 백성들이 포백(布帛·삼베와 비단)·과일·떡 등을 가지고 가서 바쳤다.
앞다퉈 들어오려고 절 문이 메워질 정도였다.
즉시 부녀자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관문을 닫으라고 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고려사>)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고려 조정은 나옹 스님에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죄’로 경상도 밀성(밀양)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그러나 나옹 스님은 유배지로 가는 도중 여흥(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다.
회암사는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이 수학한 나란타사를 본따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회암사의 지세
가 천축의 나란타사와 같다고 제자(나옹)에게 말해 이곳에 회암사를 창건하게 했다는 것이다. 지공이
언급한 ‘나란타사’는 인도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와 학문의 요람이었다. 631년 이곳을 찾았
던 당나라 고승 현장법사는 “상주하는 승려가 1만 명, 교수가 2,0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 유네스코 잠정목록인 이유
최근 14세기말, 즉 나옹의 주도로 중창한 회암사 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다는 소식.
잠정목록 등재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필수적인 관문이다.
최소 1년 이상의 준비과정을 거친 뒤 세계유산등재를 위한 신청 자격이 부여된다.
회암사터는 과연 어떤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세계유산 등재의
핵심조건)’가 있다는 걸까. 문화재청과 양주시 등은 이 유적이 ‘14세기 동아시아에 만개했던
불교 선종 문화의 번영과 확산을 증명하는 탁월한 물적 증거’라는 점을 꼽았다.
즉 회암사는 선종 사원이다. 선종은 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종파이다.
경전과 교리를 중시하는 교종과 다르다.
따라서 선종 사원의 핵심시설은 부처를 모시는 불전과 탑보다는 ‘
현신의 부처’인 주지 스님의 공간(방장)과 수행공간 등이다. 회암사가 바로 ‘14세기 수행공동체
위주로 조성된 선종 사원의 모델’이라는 점이 세계유산 등재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라는 것이다.
2000년 5월 회암사터의 6단지 보광전 네 모서리 중 두 모서리에서 출토된 명문 청동풍탁(풍경).
풍탁에서는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무학대사)’와 ‘조선국왕(朝鮮國王·이성계)’,
‘왕현비(王顯妃·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세자(世子·방석)’ 등의 명문이 보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풍경에 매달린 태조 이성계 부부의 체취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종교적인 가치에만 시선을 두고싶지 않다. 양녕대군 일화가 보여주듯
회암사에는 너무나 풍부한 스토리가 담겨있는데 그런 어려운 불교 사원 이야기만 하겠는가.
지금부터 22년 전인 2000년 5월로 돌아가보자. 당시 절터를 발굴 중이던
경기도박물관 조사단원의 눈에 심상치 않은 유물이 잇달아 출토되었다.
회암사의 중심건물인 보광전터의 두 모서리에서 명문 청동기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천보산 중턱 회암사 보광전 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이라는 뜻의 명문내용이었다.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 134자를 검토하던 조사단은 이 금탁이 여느 풍경과 다르다는 점을 금방 알게 됐다.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무학대사)’와 ‘조선국왕(朝鮮國王·이성계)’
‘왕현비(王顯妃·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세자(世子·방석)’….
‘홍무 27년(1394)’이라는 제작연대까지 보였다.
“천보산 회암사 보광명전의 네 모서리를 금으로 단장하여…
금탁을 매달아 부처님께 바칩니다…조선이라는 이름이 만세토록 전해지고,
전쟁이 영원토록 그쳐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함께 하는 인연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하소서.”
청동 풍탁(풍경)에 새겨진 명문 134자.
“천보산 회암사 보광명전의 네 모서리를 금으로 단장하여…금탁을 매달아 부처님께 바칩니다…
조선이라는 이름이 만세토록 전해지고, 전쟁이 영원토록 그쳐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함께 하는 인연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하소서”라는 내용이다.
이 보광전 불사의 공덕주(시주자)는 환관인 ‘판내시부사 이득분’이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신덕왕후 강씨가 위독해지자 이득분의 집에서 치료했으며,
그곳에서 승하했다. 이득분은 강씨와 강씨의 소생인 세자 이방석의 든든한 후원자였음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마디로 태조 이성계(1392~1398)가 1394년 회암사 보광전을
‘무학대사와 총애하는 신덕왕후, 그리고 세자 방석을 위해’ 호화롭게 꾸몄다는 이야기였다.
흥미로운 것은 명문에 이 보광전 불사의 공덕주(시주자)로 등장하는 ‘환관(판내시부사) 이득분’이다.
<태조실록>에 이득분과 관련된 심상치 않은 기록이 보인다.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1356~1396)가 중병이 들자
이득분의 집에 머물며 치료를 받았고, 결국 4일만에 그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태조실록> 기록(1396년 8월9·13일)이 심상치 않다.
환관 이득분이 태조 부부의 총애를 받았다는 증거이다.
이득분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인 방석(세자·1382~1398)과 방번(1381~1398)의 후원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득분의 기세도 강씨가 서거하고(1396년),
1차 왕자의 난(1398년)으로 방석과 방번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후 꺾이고 만다.
‘외방종편(죄인의 의사에 따라 서울 이외의 지방에 거주하게 하는 제도)’의 처분을 받게된 것이다.
<정종실록>은 “1399년(정종 2) 3월1일 이득분이 불사를 행하도록 임금(태조)에게 권하여
국고를 탕진하게 만들었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상소를 기록한다.
이득분에게 회암사 보광전을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꾸민 죄를 물은 것이다.
회암사터에서는 일반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높은 위상의 유물들이 출토된다. 청기와는 물론이고 세종
의 형인 효령대군의 이름을 새긴 수막새와 임금의 상징인 봉황문 수막새 등이 쏟아져 나왔다. 회암사
가 또하나의 궁궐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양주 시랍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 목 잘리고 토막난 불상의 정체는?
회암사터에서는 또 한가지 의미심장한 발굴 결과가 드러났다.
발굴 현장 곳곳에서 때로는 짓이겨져 부서진 채,
혹은 머리가 무참히 잘린 채 몸통은 이쪽, 머리는 저쪽으로 흩어진 불상들이 수습된 것이다.
예컨대 동자상은 네 토막으로 잘린 채 발견됐는데 각각 반경 50~60m 떨어진 채 확인됐다.
몸뚱이는 5단지, 머리는 6단지, 팔과 다리는 7단지와 8단지, 뭐 이런 식으로 흩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누군가 불타는 적개심으로 불상들을 훼손시켜 사정없이 내던졌다는 뜻이 아닐까.
대체 회암사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고려말 선승들의 수행 공간으로 중창된 회암사는 조선 개국과 함께 위상이 달라졌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인 무학대사(1327~1405)가 머물던 사찰이었다.
태조 역시 회암사에 자주 들렀다.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1402년(태종 2)에는 아예 회암사 안에 궁실을 지어 그곳에서 지냈다.
그러다 무학대사가 입적하고(1405년) 태상왕인 태조가 승하(1408년)한 뒤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회암사터에서 확인된 높은 위상의 유물들. 궁궐 건물에 걸맞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이 아니던가.
불교와 회암사를 지탱해온 두 사람이 사라지자 억불(抑佛)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1434년(세종 16)4월10일 회암사에서 문제가 생겼다.
태종 부인인 원경왕후(1365~1420)의 수불(繡佛·자수로 부처나 보살을 표현)이 걸려있던
보광전의 수리를 핑계로 대대적인 축하 법회를 연 것이다. 무엇보다 행사를 열면서
왕실과 사족 부녀자들로부터 막대한 시주를 받은 것이 물의를 빚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행사에 참석한 부녀자 들이 “시주를 한다”면서 승려들의 무애희(불교의 악극) 때
옷을 벗어 주고, 심지어 승방에서 여러날 머물며 숙식을 했던 일이 드러났다.
참석자 가운데는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어머니인 안씨(?~1444)까지 끼어있었다.
이 때문에 회암사의 불사를 비판하는 상소문이 빗발쳤다. 이때 효령대군이 나서
“문제삼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는 등 설왕설래하다가 일반 사대부 여인들만 처벌 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후 50년이 지난 1484년(성종 15) 9월 9일에는,
승하한 정희왕후(1418~1483)의 국상 중에 종친과 저자의 부녀자 150여 명이 회암사에서 악기를 울리며
불공을 드리고 유숙까지 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사헌부가 나서 처벌을 요구했지만
성종은 “무식한 회암사 주지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냥 두라”고 봐줬다.
회암사터에서 출토된 백자 인물상과 용문양 암막새. 사찰 건물이 궁궐의 위상에 걸맞은 규모를 자랑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양주 시립 회암사지박물관 제공
◆ 노비 혁파 후 토지 하사
심한 억불책을 쓴 임금들마저 회암사에 관한한 관대한 처분을 내린 이유가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고, 태종의 능침사(왕릉을 수호하는 절)로 지정되었으며,
효령대군(세종)과 인수대비(1437~1504·성종)의 비호까지 받았던 사찰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419년(세종 1) 11월 27일 상왕으로 물러나있던 태종이
회암사에서 일어났던 스님들의 여자종 능욕사건을 거론했다.
“회암사 중들이 부녀자(여자 종)들과 가까이 있는데, 어찌 여자종들을 범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상왕은 사찰이 부리고 있는 노비들을 혁파하는 극강의 억불책을 폈다.
그러나 이틀 뒤인 29일 <세종실록>에 흥미로운 기사가 보인다.
“하루 아침에 사찰의 노비를 혁파했다.
중들이 ‘이젠 사찰의 땅까지 없애려 하는건가’하고 걱정할 것 같다.
불교를 물리치려고 하지만 갑자기 다 없앨 수는 없다.
회암사 같은 이름난 절에는 땅을 더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게 좋겠다.”
사찰의 노비를 혁파해놓고 좀 미안했던지, 회암사에 전토를 더 얹어 주었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그래도 여노비 능욕사건을 일으키는 사찰에 그런 은전을 베풀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만큼 회암사는 임금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만큼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던 사찰이었던 것이다.
회암사 보광전 모서리에서 청동금탁이 출토되는 순간.
회암사가 어느날 갑자기 폭삭 무너져 내렸음을 암시하고 있다.|경기문화재연구원 제공
◆‘쓸모없고 못난 선비’라 욕설 퍼부은 세종
유생들은 끊임없이 불교와 회암사의 폐단을 거론했지만 소용없었다.
임금들은 조종(祖宗)의 유습이라든가, 종실의 효성이라고 하면서 유생들의 입을 막았다.
세종은 한술 더 떴다. 부인(소헌왕후)의 승하(1446년) 이후 잇달아 불사를 추진한다.
아들(수양대군)을 시켜 <석보상절>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 하고,
손수 <월인천강지곡>을 찬술했으며, 철폐했던 내불당을 다시 건립했다.
세종은 불사를 극력 반대하던 조정 유신들에게
‘쓸모없는 선비(迂儒)’, ‘못난 선비(竪儒)’라며 욕설까지 퍼부었다.
세조의 경우 “나는 비록 불교를 믿지만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뒤의 임금도 나를 본받아서는 안된다”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불교와 도교를 이단으로 여긴 성종은
할머니인 정희왕후(1418~1483)와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신앙생활을 어쩌지는 못했다.
1492년(성종 23) 도첩제 자체를 폐지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아버린 성종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교 자체를 없앨 수는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요승 보우의 업적은 휴정·유정대사 발탁
억불의 물결 속에도 나름 건재했던 회암사는 연산군(1494~1506)의 폐불로 위축됐다가 다시 살아난다.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였던 문정왕후(1501~1565) 덕분이었다. 문정왕후에 의해
발탁된 보우(1509~1565)는 불교의 세속적 권리를 회복하려고 선·교 양종과 승과를 부활했다.
그런데 이 승과 부활은 문정왕후와 보우의 간과할 수 없는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왜냐. 1552년(명종 7)의
제1회 승과에서 휴정(서산대사·1520~1604)이,
1561년(명종 16)의 7회 승과에서 사명(1544~1610)이 합격했기 때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은 73살의 노구를 이끌고 승병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세,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유정은 어떤가. 역시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다.
유정은 1604년(선조 37) 일본으로 건너가 강화를 맺고,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귀국하기도 했다.
한음 이덕형(1561~1613)은 1610년(광해군 2) 입적한 유정을 위한 제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슬프다. 길고 짧은 것을 대보면 모두가 같고…유교와 불교가 어찌 다르랴,
오직 그 진리를 보전하여 마침내 세상에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이덕형의 <한음선생문고> ‘제송운문’)
성리학자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덕형이 승려를 위해 제문을 쓴 것도 파격이지만
“유교와 불교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설파한 것 역시 예사롭지 않다.
문정왕후와 보우가 승과를 부활시키지 않았다면 휴정과 유정의 스토리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문정왕후에 의해 발탁된 보우 스님이 부활시킨 승과에서 급제한 휴정과 유정대사.
두 분은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
◆ 폭삭 내려앉은 절터
그러나 두 사람의 불교 중흥의 꿈은 금방 산산조각난다.
보우는 순회세자(1551~1563·명종의 첫아들)가 13살의 나이에 요절하자
“복을 기원해야 한다”면서 회암사 무차대회를 기획한다.(1565년)
쇠락해가는 불교세력을 확장하고 왕실의 후원을 얻기 위한 행사였다.
무차대회는 승려·속인·남녀노소·귀천의 차별 없이 잔치를 벌이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행하는 불교의례를 가리킨다.
그러나 “전국에서 승려들이 수천명 몰려오고 있고,
그 행사가 너무 화려하다”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친다.
공교롭게도 문정왕후가 행사 도중 병환을 얻으면서 무차대회 또한 중지된다.(4월5일)
그러나 문정왕후는 결국 승하하고 만다. 이후 보우와 회암사는 유생들의 공적이 된다.
1년 여 뒤인 1566년 4월 20일 <명종실록>은 심상치않는 기사 2건이 보인다.
“문정왕후 승하 이후 제주도에 유배된 보우가 제주 목사(변협·1528~1590)에게 주살 당했다”는 내용과,
“송도의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내용 등이다.
회암사가 정말로 유생들에 의해 불에 탔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30년 후인 1595년(선조 28) 6월4일 “회암사 옛 터에 불탄 큰 종이 있다”는
<선조실록> 기사를 보면 회암사가 유생들에 의해 파괴되고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어떤가.
회암사터에서 왜 불상들이 목이 잘리고 몸통이 갈기갈기 찢긴채
흩어져 있었는지 어렴풋 그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은가.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보물).
1565년(명종 20) 중종 계비 문정왕후(1501~1565)가 명종의 만수무강과 왕비의 후손탄생을 기원하며
제작한 400점의 불화 중 하나이다. 회암사의 낙성에 맞춰 조성된 것이다. 문정왕후가 발탁한 보우
스님이 쓴 화기(畵記)에 따르면 당시 석가약사·미륵·아미타불 등 모든 부처와 보살을 소재로 하여
금니화(金泥畵)와 채색화(彩色畵) 각 50점씩 조성했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제 회암사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올랐으니 얼마 있으면 정식으로 등재될 가능성이 커졌다.
종교시설 뿐 아니라 각종 스토리가 차고 넘치는 회암사의 가치를 찾기를 바란다.
(이 기사를 위해 김종임 양주회암사지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