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성, <승무도>, 1937, 비단에 채색, 198×16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승무(僧舞)
- 조지훈 / <문장>(1939) -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승무 : 장삼과 고깔을 걸치고 북채를 쥐고 추는 민속춤. 끝내 수행을 이루지 못한 고뇌를 법고를
두드려서 잊으려는 파계승의 심정을 나타낸다.
* 고깔 : 중이나 무당 또는 농악대들이 머리에 쓰는, 위 끝이 뾰족하게 생긴 모자.
* 나빌레라 : 나비로구나
* 지는데 : 여기에서는 달빛이 ‘비치는데’의 의미
* 외씨보선 : 오이씨처럼 생겨 맵시가 있는 버선
* 삼경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셋째 부분.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
캘리그라피 : 조지훈의 승무 - 윤재선 / 출처 : http://bwithmag.com/archives/1835/
낙화
- 조지훈 / <상아탑>(1946) -
1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2
피었다 몰래 지는
고운 마음은
흰 무리 쓴 촛불이
홀로 아노니
꽃 지는 소리
하도 하늘어
귀 기울여 듣기에도
조심스러라.
두견이도 한 목청
울고 지친 밤
나 혼자만 잠들기
못내 설어라.
* 성긴 : 드문드문한
* 우련 : 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 저허하노니 : 우려워하노니. 마음에 꺼려하노니
완화삼(玩花衫)
- 목월(木月)에게 / 조지훈 / 『상아탑』 5호, 1946. 4 -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움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봉황수(鳳凰愁)
- 조지훈 / <문장>(1940) -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鳳凰)새를 틀어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
르른 하늘 밑 추석( 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泉)에 호곡(呼哭)하리라.
* 봉황수 → 봉황의 슬픔, 봉황은 우리 민족의 상징임.
* 벌레 먹은, 빛 낡은, 풍경소리 날러간 → 사라진 지난날의 영화로움
* 산새, 비둘기 → 나라를 좀먹는 무리와 외세의 침략자 상징
* 큰나라 섬기다 → 사대사상
* 거미줄 친 옥좌 → 왕조의 패망, 주권의 상실
* 쌍룡 대신에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 우리가 중국을 섬겨서 천자의 상징인 쌍룡을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사물로 사용하지 못하고 봉황새(나약한 조선 왕조의 상징)를 사용했다는 뜻.
*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 국권을 상실하기 전인 조선 왕조 시대에도 당당하게 국가적 영광
을 제대로 한번 펼쳐 보지 못한 우리 민족의 역사적 현실
* 추석 → 벽돌같이 다듬어진 돌
* 추석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 어느 곳에도 당당히 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 망국인의 모습
* 패옥(佩玉) → 옛날 조신(朝臣)들이 입던 예복의 좌우에 늘이어 차던 옥.
* 패옥 소리도 없었다. → 국권 상실의 현실 상징
* 품석 → 대궐 안 정전 앞뜰에 계급의 품계를 새겨 두고 정일품부터 종구품에 이르기까지 두 줄로
세운 돌
*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 식민지 지식인의 설 자리의 부재함, 국권 상실의 허망감이 드러남.
*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 운명을 슬퍼하여 눈물짓는 일은 속되고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
눈물이 속된 것인 줄 알기에 울지 않는다는 것(비애를 속으로 삭이는 지사적기품이 엿보임)
* 봉황새 → 국권상실의 비운을 당하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우리민족 또는 시적 자아 자신의 표
상 (감정이입)
* 구천 → 하늘의 가장 높은 곳
* 호곡하다 → 소리내어 슬피 울다.
석문(石門)
- 조지훈 / <조지훈 전집>(1973) -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
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
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에 바람처럼 사
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 열릴 돌문 → 임에 대한 지극하고 오랜 기다림.(기다림의 돌문)
*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 → 화자의 위치를 말함. 전설과 관련시키면 신방(新房)이 될 것이고, 뭇사
람과의 대비에서 생각해 보면, 화자의 정신적 위상을 드러내는 말이다. 뭇사람들의 조바심을 불러일
으키는 대상의 높이를 드러내는 말이기도함. 이 시가 지니는 나르시시즘적 성격을 드러내는 말.
*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임이 오지 않았음을 의미함.
* 촛불 → 기약없는 기다림의 표상.
* 천년이 지나도 눈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 → '한'이 서서히 응결되고 있음을 나타냄.
*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 → 기다림에 지친 눈물
* 푸르러 가는 입술 → 화자의 슬픔을 드러내는 모습.
*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 절개를 지키겠다는 매서운 의지를 나타냄.
* 열리지 않는 돌문 → 임에게조차 열리지 않을 굳건한 문으로 의미가 변화됨. (원한의 돌문)
*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년토록 앚아 기다리라고, → 한을 전가하는 심리(보상심리)가 드러남.
혜원 신윤복 미인도 비단에 채색 114.2*45.7cm 간송미술관
고풍의상
- 조지훈 / <문장3호>(1939) -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珠簾)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 밤이 두견(杜鵑)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힌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胡蝶)인 양 사풋이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 부연 : 처마를 뒤쪽으로 올라가게 하여 멋을 내도록 쓰는 짧은 서까래
* 풍경 :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 속에는 붕어 모양의 쇳조각을 달아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
소리가 난다.
* 주렴 : 구슬 따위를 꿰어 만든 발.
* 호장 : 회장(回裝). 여자 저고리의 깃, 끝동. 결마기, 고름 따위에 대어 꾸미는 색깔 있는 헝겊
* 동정 : 한복의 저고리 깃 위에 조붓하게 덧대어 꾸미는 하얀 헝겊 오리.
* 운혜 : 울이 깊고 작은 가죽신으로 앞 코네 구름 무늬를 수놓음.
* 당혜 : 예전에 사용하던 울이 깊고 앞 코가 작은 가죽신. 흔히 앞 코와 뒤꿈치 부분에 꼬부라진 눈
을 붙이고 그 위에 덩굴무늬를 새긴 것으로, 남녀가 다 신었다.
* 호접 : 나비
* 아미 : 누에나방의 눈썹이라는 뜻으로, 가늘고 길게 굽어진 아름다운 여인의 눈썹을 이르는 말
가족들과
청록파 (좌로부터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청록집〉 출판 기념회(1946. 9.)에서
앞줄 왼쪽부터 곽종원,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 뒷줄 왼쪽 세 번째부터 조연현, 김동리
* 조지훈(趙芝薰, 1920-1968)
1920년 경상북도 영양 출생
1939년 『문장』에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 졸업. 오대산 월정사 불교 전문 강원 강사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 협회 조직
1947년 고려대학교 교수
1950년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
1968년 한국시인협회장
1968년 사망
본명 동탁(東卓)이며, 경상북도 영양(英陽)에서 출생하였다.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고 독학
으로 중학과정을 마쳤으며,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 현 동국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39년 《고
풍의상(古風衣裳)》이 《문장(文章)》에 추천되면서 등단하였다. 같은 해 《승무(僧舞)》, 1940년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 후,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
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과 함께 1946년 시
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경기여고 교사를 지내다가 고
려대학교 문리과(文理科)대학 조교수로 취임하여 교수에 이르렀다.
1952년에 시집 《풀잎 단장(斷章)》, 1956년 《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을 간행했으나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어 민권수호국민총연맹, 공명선거추진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조지훈의 시풍의 전환을 맞게 되었다. 그 이전의 시가 자연과 무속 등을 주제로 한
서정적인 동양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이었다면, 이 시기에 발표한 시집 《역사(歷史) 앞에서》이후에
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표출하였다. 《지조론(志操論)》은 이 무렵에 쓰인 것들로 민족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다. 1962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사대계(韓國
文化史大系)》를 기획, 《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 《신라가요연구논고(新羅歌謠硏究論考)》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 등의 논저를 남겼으나 그 방대한 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
했다. 서울 남산에 조지훈 시비(詩碑)가 있다.
낙화(조지훈) / 시낭송 오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