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
- 박봉우 / <조선일보>(1956 신춘문예 당선작) -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한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악의 봄
- 박봉우 -
내 영혼이 시달리는
시가지에도
내 고독이 회색되어 가는
자유항에도 눈물 같은
봄은 내린다.
산과 공원과 포도 위의 가로수는
청색을 머금는데.....
내 나무는 귀로에 서서
더욱 심야를 부른다.
울어도 끝없이 울어도
우리 가난한 시민을 위해
그 누가 보듬어줄 것인지.....
내 영혼은
지치고 시달린 시가지에서
빛나는 아침 해를
안아보고 싶은데
자꾸만 의미를 잃은 계절이
나의 주변 가까이 와서
악의 꽃씨를 뿌리게 한다.
모든.....
사랑한 체 하는
立像들에게서 떠나고 싶은,
영원히 부드러운 무덤의
육체여, 음악이여, 바람이여,
나의 고요한 나무여.....
* 박봉우(朴鳳宇, 1934∼1990)
호는 추풍령(秋風嶺). 전라남도 광주(光州) 출생.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1959년 전남대학교 문리과대
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956년『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
였다.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風景(풍경). 아름다운 風土(풍토)는 이미 高句麗(고구려) 같은
정신도 新羅(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우리 무엇에 불
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와 같이 그의 시는 분단 조국의 현실을 날카로이 응시하고 고
발하는 시 「휴전선」으로부터 시작된다.
4·19혁명 후에는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라는 시처럼 타락한 현실에 대한 허무감과 비판의식을
드러내는 데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현실인식은 시 「나비와 철조망」·「젊은 화산(火山)」 등을 통
해서 분단의 현실을 노래하기도 하며, 「서울 하야식(下野式)」에서는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와 저항
을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시 「백두산」에서는 “무궁화도/진달래도/백의(白衣)에 물들게 하라/서
럽고 서러운/분단의 역사/우리 모두를/백두산에 올라가게 하라”와 같이 분단 극복의지로서 통일의
염원을 노래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는 분단 비극의 시인 또는 통일지향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시로서 저항하다가 불행하게 사라져간 비극의 시인,
불운의 시인으로서 그는 시사에 기록될 수 있다. 전라남도문화상·현대문학 신인상(1962)을 수상하였
다. 시집으로는 『휴전선』(정음사, 1957)·『4월(四月)의 화요일(火曜日)』(성문각, 1962)·『황지
(荒地)의 풀잎』(창작과 비평사, 1976)·『서울하야식』(전예원, 1985), 그리고 『딸의 손을 잡고』
(思社硏, 1987)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 『시인(詩人)의 사랑』(1988)이 있고, 죽은 뒤에 『박봉우집
중연구』(시와 시학, 1993. 겨울호.)로 문학과 생애가 집중 조명되었다.
휴전선(박봉우) / 시낭송 이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