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에
- 김종길 / 시집 <성탄제>(1969) -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 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성탄제
- 김종길 / 시집 <성탄제>(1969) -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김종길(金宗吉), 1926-2017)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영문학자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본명은 김치규(金致逵)이다. '종길(宗吉)'은
그의 아호이다. 대중들에게는 제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성탄제라는 시의 저자로
잘 알려져있다. 1926년 11월 5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동면 지례동에서 태어났다. 혜화전문학교와 고려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고려대학교 졸업 후 대구공업고등학교 교사, 경북대학교 강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부임해 1992년까지 재직했다. 시인으로서는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1947년 <문>이 입선되어 등단한 이래, 1969년 <성탄제>, 1977년 <하회에서>, 1986년 <황사 현상>을
펴냈고 198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2017년 4월 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설날 아침에(김종길) / 시낭송 선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