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장대 동백숲
- 정끝별 -
오백 년 동안 축축 늘어진 동백나무 가지가
바닥에 철렁 내려놓으며 들여놓은 동백나무 방들
미처 널어 말리지 못한 채 몇 철이나 쌓인
낙엽에 진 꽃에 어룽 햇살을 금침으로 깔아놓고
시간 없어 나 한 번 밖에 못했다며
젊은 아줌마를 앞세워 동백그늘을 나오는 아저씨라든가
그 나이에 한 번 허면 됐다며
추임새 좋게 동백 그늘에 드는 늙은 아줌마라든가
동백의 몸통은 쌍춘년 동백처럼 불끈불끈
동백의 팔다리는 춘삼월 정맥처럼 구불구불
봄이 길다는 춘장대 옆 마량리 화력발전소 뒤
그렇게 한 오백 년 동안
춘정의 봄군불을 때다 그만 벌겋게 데기도 하는
오백 년 된 동백숲의 온 몸 동력
내연(內燃)의 한 천년은 들고나겠네
기나긴 그믐
- 정끝별 -
소크라테스였던가 플라톤이었던가
비스듬히 머리 괴고 누워 포도알을 떼먹으며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며 몇 날 며칠 디스커션하는 거
내 꿈은 그런 향연이었어
누군가와는 짧게
누군가와는 오래
벌거벗고 누운 그랑 오달리스크처럼
공작새 깃털로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살짝 돌아서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는 팜므의 능선들
그 파탈의 능금을 깨물고 싶었어
누군가에게는 싸게
누군가에게는 비싸게
오 마리아의 팔에 안긴 지저스 크라이스트!
누군가의 품에 그렇게 길게 누워
나 다 탕진했노라 쭉 뻗은 채
이 기립된 생을 마감하고 싶었어
누군가는 하염없이 울고
누군가는 탄식조차 없고
검은 관 속에 누운 노스페라투 백작처럼
그날이 그날인 이 따위 불멸을 저주하며
첫닭이 울 때까지 아침빛에 스러질 때까지
내 사랑의 이빨을 누군가의 목에 꽂고 싶었어
누군가처럼 목욕탕에서 침대에서
누군가처럼 길바닥에서 관속에서
다시 차오를 때까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
- 정끝별 -
쭉쭉 뻗은 봄솔숲 발치에 앉아
솔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자니
저 높은 허공에
부러진 가지가 땅으로 채 무너지지 못하고
살아있는 가지에 걸려 있다
부러진 가지의 풍장을 보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와 함께 무너지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를 붙잡고 있는 저 살아있는 가지는
부러진 가지가 비바람에 삭아 주저앉을 때까지
부러진 가지가 내맡기는 죽음의 무게를 지탱해야 한다
살아있는 가지 어깨가 처져 있다
살아있는 가지들은 서로에게 걸리지 않는데
살아있다는 것은
제멋대로 뻗어도 다른 가지의 길을 막지 않는데
한 줄기에서 난
차마 무너지지 못한 마음과
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이
얼마 동안은 그렇게 엉켜 있으리라
서로가 덫인 채
서로에게 걸려 있으리라
엉킨 두 마음에 송진이 짙다
큰벗아 울었대요 ❔유퀴즈 온 더 이화 / 정끝별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