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 -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2004) -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시인의 후기 : 단 세 줄로 된 짧은 시 <너에게 묻는다>는 1990년대 초반 전교조 해직교사 시절에
쓴 시입니다. 제 스스로 뜨거운 사람이 되고 싶은 꿈을 가슴 깊숙이 넣어 두고 살 때이지요. 첫 줄의
명령형과 끝 줄의 의문형 어미가 참 당돌해 보이지요? 밥줄을 끊긴 자의 오기 혹은 각오가 이런 시를
만들어 낸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 시의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따지듯이,
나무라듯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화자는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함부로 말할까 하고 생각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 시를 볼 때마다 제목을 고칩니다. '나에게 묻는다'라고요.
연탄 한 장
- 안도현 /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2004) -
또 다른 말도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네, 나는.
그대에게 가고 싶다
- 안도현 /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 -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뜻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버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한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 안도현(安度眩, 1961-)
출생 : 1961. 경상북도 예천
소속 : 단국대학교(교수)
학력 :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
데뷔 : 1981년 대구매일신문 '낙동강' 등단
수상 : 2007년 제2회 윤동주문학상 문학부문
경력 :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61년 12월 15일 경북 예천 출생.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낙동강」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전통
적 서정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안도현은 개인적 체험을 주조로 하면서도 사적 차원을 넘어서 민족과
사회의 현실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그려내는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순수한 젊음의 시각에서 삶과 역사를 서정적으로 그려낸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 주변 삶의
쓸쓸함과 현실에 대한 성찰이 담긴 『모닥불』(1989), 시대적 문제와 마음의 갈등을 다룬 『그리운
여우』(1997), 바닷가 우체국과 시골 이발관 등 사소해 보이는 풍물을 애잔하고 낭만적으로 다룬
『바닷가 우체국』(1999) 등의 시집을 간행하였다. 이외에도 『바닷가 우체국』(2003), 『너에게 가
려고 강을 만들었다』(2004),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05), 『간절하게 참 철없이』(2008)
등을 간행하였으며, 소설집으로 연어의 모천회귀를 성장의 고통 및 사랑의 아픔에 빗대어 그린 『연
어』(1996)가 있다.
연탄 한 장(안도현) / 시낭송(박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