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부는 날
- 김종해 / <사랑아, 나를 몰아 어디로 가려느냐> 글빛 / 2004년 05월 -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
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
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운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항해 일지 1 - 무인도를 위하여
- 김종해 / <문학세계사>(1984) -
을지로에서 노를 젓다가 잠시 멈추다.
사라져 가는 것, 떨어져 가는 것, 시들어 가는 것들의 흘러내림
그것들의 부음(訃音) 위에 떠서 노질을 하다.
아아, 부질없구나.
그물을 던지고 낚시질하여 날 것을 익혀 먹는 일
오늘은 갑판 위에 나와 크게 느끼다.
오늘 하루 집어등(集魚燈)을 끄고 남몰래 눈물짓다.
손이 부르트도록 날마다 을지로에서 노를 젓고 저음이여
수부(水夫)의 청춘을 다 바쳐 찾고자 하는 것
삭풍 아래 떨면서 잠시 청계천 쪽에 정박하다.
헛되고 헛되도다. 무인도여
한 잔의 술잔 속에서도 얼비치는 저 무인도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다.
그러나 눈보라 날리는 엄동 속에서도 나의 배는 가야 한다.
눈을 감고서도 선명히 떠오르는 저 별빛을 향하여
나는 노질을 계속해야 한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 <그대 앞에 봄이 있다>(문학세계사, 2017) -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김종해(1941-)
시인, 출판인
출생 : 1941. 7. 23. 부산광역시
소속 : 문학세계사(대표)
데뷔 : 1963년 자유문학에 시 '저녁' 신인상 당선
1965년 〈경향신문〉신춘문예 시 당선
수상 : 1982년 제28회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시협상, 공초문학상, PEN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수상
경력 : 2004.03~2005 제34대 한국시인협회 회장
시집 『인간의 악기』『신의 열쇠』, 『왜 아니 오시나요』『천노, 일어서다』, 『항해일지』『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별똥별』『풀』『봄꿈을 꾸며』, 『눈송이는 나의 角을 지운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김종해) / 시낭송 이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