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사
- 이병률 / <바람의 사생활> 창비 / 2006년 11월 -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힌 한 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혔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만하면 받치고 굳을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정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
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바람의 사생활
- 이병률 / <바람의 사생활> 창비 / 2006년 11월 -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봉인된 지도
- 이병률 / <바람의 사생활> 창비 / 2006년 11월 -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
달이 커보였던 때
일년은 팔백일이었고 하루는 열한 시간이었을 때
덫을 놓아 잡은 짐승을 질질 끌고 가는 당신,
당신이 낸 길을 없애려 눈은 내려 덮이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이 있었다
다시 얼음 녹으면서 세상은 잠시 슬퍼지고
그 익명의 밤은 다시 강처럼 얼고
언 밤 저편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강가에 모여 불을 피우자
밤 이편의 사람들도 강 건너를 걱정하느라 불을 피웠다
그 어두운 밤 서로를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당신은 그만 손가락을 잘랐다
지구와 달의 자리가 가까워 달이 커보였던 때
일년은 오백일이었고 하루는 열여섯 시간이었을 때
당신은 나를 데리러 왔다
신(神)과의 약속 발설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백스물 아흔 여든두 살 쭈글쭈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다
허나 내가 지켜야할 약속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
달과 지구의 자리가 멀어져 달이 작아 보일 때까지
일년은 삼백육십오일이고 하루는 스물네 시간일 때까지
* 이병률(1967-)
*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좋은 사람들」 「그날엔」 두 편이 당선되어 등단.
*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찬란』『눈사람 여관』, 산문집 『끌림』 등.
* 제11회 현대시학 작품상, 발견문학상을 수상
여름 감기(이병률) / 시읽는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