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百年)
- 문태준 / <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사 / 2008년 07월 -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百年이라는 글씨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가을 강처럼
- 문태준 -
내 몸을 지나가는 빛들을 받아서 혹은 지나간 빛들을 받아서
가을 강처럼 슬프게 내가 이곳에 서 있게 될 줄이야
격렬함도 없이 그냥 서늘하기만 해서 자꾸 마음이 결리는 그런 가을 강처럼
저물게 저물게 이곳에 허물어지는 빛으로 서 있게 될 줄이야
주름이 도닥도닥 맺힌 듯 졸망스러운 낯빛으로 어정거리게 될 줄이야
빈집의 약속
- 문태준 / 시집『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별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경당 별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두듯 마음에 봄 가을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 시인의 말 :
어느 때, 가끔
내 존재와 정체성에 대해서 스스로한테 묻습니다.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어디쯤이냐고?
우리는 그렇게 잠깐 멈춰서 나를 확인하기도 하지요.
시인은 바로 그런 시심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 향기님들은 이 시를 읽으시고 어떠하신지요?
가을입니다.
그리고 한가위를 한 사나흘 앞 둔 날입니다.
고향엔 나를 받겨주실 부모 형제가 계시는지요?
아님, 나를 찾아 줄 자손은 몇이나 있으신지요?
* 문태준(1970-)
1970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 1995년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 1994년《문예중앙》신인문학상에 시 〈處
署〉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그늘의 발달』등이 있음.
제21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수상.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中
빈집의 약속(문태준) / 시낭송 김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