步月
- 崔素月 -
나를 생각하는 나의 님
這(저)구름 나를 생각
차츰차츰 건일며(거닐며)
這(저)달에 나를 빗최려(비추려)
徽笑(휘소:아름다운 미소)로 울어러봄에(우러러보며)
검음으로 애를 태우고
누름으로 나를 울니라.(울리니라)
빽빽한 運命(운명)의 줄에
에워싸인 나를 우는 나의 님
따듯한(따뜻한) 품속에 나를 갖추려(감추려)
그 깁흔(깊은) 솔밧(솔밭)으로 오르리라
총에 맞은 병사 / 로버트 카파
벨지엄의 勇士
- 崔素月 / <學之光> 제2호, 1914. 11. 3 -
山嶽이라도 뻐개지는 大砲의 彈알에
너의 阿只(아지, 아기)는 벌써 碎骨이 되었고
野獸보다도 暴惡(포악)한 게르만의 戰士에게
너의 愛妻는 恥辱으로 죽었다
인제는 사랑하던 家族도 없어졌고
너조차 逃亡할 길을 잃어 버렸다
배 불러도 더 찾는 慾心꾸러기에게
너의 財産을 다 바쳐도 不足이다
正義가 없어졌거든(없어졌거늘) 平和가 있을게냐
다만 저들의 꿈속의 弄談이다
너, 自我 以外에는 野心 많은 敵 뿐이요
敗北는 너의 政府 弱한 까닭 뿐이다
벨지엄의 勇士여!
最後까지 싸울 뿐이다!
너의 옆에 부러진 槍이 그저 있다
벨지엄의 勇士여!
벨지엄은 너의 것이다!
네 것이면 꽉 잡아라!
벨지엄의 勇士여!
너의 Body는 너의 것이다!
너, 人生이면 權威를 드러내거라!
벨지엄의 勇士여!
瘡口(창구)를 부등키고 일어나거라!
너의 피 괴이는 곳에
벨지엄 子孫 불어나리라
벨지엄의 Hero여!
너의 몸 쓰러지는 곳에
거 누구가 月桂冠을 받들고 섰으리라
긴-숙시(熟視)
- 崔素月 / <近代思潮>, 1916. 1. -
저는 저의 고향을 항상 생각한다. 저와 저의 고향과는 거진 일체가 되었다.
저 없이는 저의 고향을 볼 수 없고 저의 고향 없이는 저를 인식치 못하게 되었다.
저는 얼마나 저의 고향을 그리워할까, 사랑할까, 얼마만큼이나 저의 정이 간절할까, 모르면
모르거니와 저는 저 외에 저의 애달픈 마음 또 알 사람은 없을 것이라 한다.
저는 이와 같이 부르짖는다.「그대여 그대는 무엇이길래 내가 이처럼 그대를 생각하는가,
사랑하는가, 나는 그대를 다만 땅덩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한다. 나는 그대를 나의 생명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와 같이 그대를 사랑한다. 그대는 나의 생명-모든 것이다. 그대가 있음으
로 하여 내가 이 세계에 태어났고 그대에게 포용되었고 그대에게 감화를 받았고 그대에게서
해방되었다. 그대는 나의 생명의 근원이다」라고.
저는 저의 지금의 고향을 바라본다. 해 밝은 대낮에도 음침한 밤에도 저는 동자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저의 고향을 항상 바라본다.
저는 사막을 본다. 어두운 구름으로 가린 석양의 하늘에 냉정한 바람에 거칠어지는 묘망한
사막이 비껴 놓였다. 종려도 야자도 없고 사초(莎草)도 없는 사막이다. 단샘물이나 가는 시
내도 없는-황량하고 적막한 사막이다. 그 곳에는 주인으로부터 잃어 버리고 길 우에 어둑이
는 적은 양의 무리가 비애에 떨리어 하늘을 우러러 한숨지으며 방황한다.
저들에게는 인식이나 위로나 모든 행복이 없어졌으므로. 저는 눈물을 머금고 또 부르짖는
다.「오 그대여 어떻게 하여 이 경우에까지 이르게 하였는가. 죽어 가는 문둥병 환자에게
깨끗한 물병이 있지 아니한가. 말라가는 포도 뿌리에 생명의 샘물이 있지 아니한가.
저들에게는 공포의 어두움이 포위한다. 전율할 고통이 침투한다. 그대여 그 암운을 헤치고
그 독기있는 모래를 젖히고 그대의 전날의 빛, 영원한 그대의 빛을 비치어라」라고.
사막의 전일은 낙원이었다. 붉은 장미, 흰 백합도 피었었고 무궁화도 미소를 가지고 자긍하
였었다. 금색의 모래 여울에는 맑은 샘물도 흘렀었고 녹음진 괴나무 밑에는 단꿀도 피였었
다. 피면 지고 지면 또 피고 흐르면 괴이고 괴이면 또 넘쳐서 꽃다운 향기가 먼 곳에까지
둘리였었다. 귀여운 양들은 맑은 샘물을 마시고 흰 나비의 뒤를 쫓아 뛰어 다니기도 했었고
단꿀에 배불리어 나무 그늘 밑 푸른 융단에서 낮잠도 잤었다. 향기에 끌려 오는 먼 곳의 여
객은 그 향기에 취하여 깊이 잠들던 자도 적지 않았었다.
저의 보는 바 지금의 사막은 전의 사막이 아니다. 전에는 옥토였었다. 광명이 찬란하던 붉
은 토지였었다. 지금의 사막은 본래의 옥토였었다. 한것이려니 맹렬한 광풍에 당하여 지금
에 보이는 독기 있는 모래로 덮혔다. 북으로부터는 고비의 모래가 삭풍에 몰리어 남으로부
터는 사하라의 모래가 쌓이어 왔다. 허나 그 심도는 한 길에 불과하다. 그 밑은 본래의 옥
토다. 옥토는 의연히 전개하였다. 영원한 옥토가 꽃뿌리와 향기의 원천도 그대로 사려 있고
맑은 물살은 그대로 스며 흐른다. 한 길의 모래만 파서 헤치면 그리워하는 영원한 옥토가
거기서 드러날 것이다.
저는 또 부르짖는다.「너희들이여! 파거라. 그 독기 있는 모래를 파거라. 헤치거라. 그 모
래를 헤치거라. 너희들의 뜨거운 눈물과 짜거운 땀과 보배로운 피를 짜내서 그 모래를 적시
어라. 파거라. 헤치거라. 하면 너희들의 주인, 영원한 옥토가 보일 것이다. 너희들이 좋아
하는 새싹이 나올 것이다. 맑은 샘물이 솟을 것이다. 오 그대여 저희들에게 능력을 주거라.
마음을 굳게 하여라」라고.
시간은 쉬임없이 경과한다. 석양도 지나갔다. 흑막이 사위에서 내려진다. 사막은 어두운 밤
이다. 냉정한 바람은 더욱 극렬하다. 저는 어두움 사이로 여전히 바라본다- 두 볼로는 눈물
이 가로 세로 흐른다. 양의 무리는 머리와 입으로 모래를 파며 네 발로 헤친다. 모래가 날
아든 두 눈에서는 눈물, 터럭이 돋은 여윈 몸에는 땀이 부풀어 터진 입술과 찔리어 헤어진
네 발에서는 피가 모래 우에 방울방울 떨어진다. 떨어져서는 스며 들고 스며 들어서는 옥토
에 흐르며 물들인다.
긴긴 밤이다. 저는 계속하여 생각에 잠겨 바라본다. 흐느끼며 목메여 운다. 양의 무리는 피
곤하여 통곡한다. 하나 그침없이 파며 헤친다. 파며 헤친다. 긴긴 밤이다....
시간은 많이 경과한 모양이다. 동편 하늘-지평선 우로서 멀찌기 새벽빛이 나타난다. 회색
안개의 장막이 서서히 걷혀진다. 그 몽롱한 가운데로 저는 양의 무리가 여전히 움직이는 것
과 이슬기 있는 연한 붉은 빛지면이 드러남을 본다. 저는 인제 더 흐느끼지 아니한다.
(1915.4.15)
출산의 고통
- 晶月 羅蕙錫 / <東明> 母된 感想記, 1923 에서 -
박박 뼈를 긁는듯
쫙쫙 살을 찢는 듯
바짝바짝 힘줄을 옥죄는 듯
쪽쪽 핏줄을 뽑아내는 듯
살금살금 살점을 저미는 듯
오장이 뒤집혀 쏟아지는 듯
도끼로 머리를 부수는 듯
이렇게 아프다 할까나
아니다 이도 또한 아니다.
* 素月 이전에 素月 있었다!
'진달래 꽃'의 金素月 시인은 잘 알아도 崔素月 시인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소월(1892~1917 본명:崔承九)은
김소월(1902~1934 본명:金廷湜) 보다 한발 먼저 알려진 천재시인이었으나,
26세 아까운 나이에 스러진 못 다 핀 한 떨기 꽃봉오리였다.
六堂 崔南善, 春園 李光洙, 玄相允, 金岸曙 등과 함께
1910년대 중반에 등장하여
한국 근대초기 시단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면서도,
너무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작품수가 많지 않아 빛을 보지 못한 불행한 시인이었다.
또한 최소월 보다 더 오래 살면서 필명을 날린 동명이인 김소월의 그늘에 가려 잊혀진 비운의 천재였다.
그의 작품은 동경 유학시절인 1914~5년 그의 나이 23,4세에 유학생회지 '학지광(學之光)'에 발표한
5편의 시와 수필, 죽기 일년전에 '近代思潮'에 실린 산문시 1편,
그리고 사후에 발견된 유작노트의 25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김소월 아닌 최소월의 존재에 관하여는
1972년 5월에 동아일보('소월에 동명이인 있다')와
주간조선('제2의 소월이 있었다')에 처음 보도되었고,
그에 관한 연구도 70년대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나마 제대로 단행본으로 정리된 '崔素月作品集'(김학동/형설출판사)은 1982년에야 출간되었다.
최소월은 친구 李 沖군의 외삼촌!
최소월 시인에 관해 처음 알게 된것은 지난 5월 미국에 있는
친구 李 沖(South Carolina 대학 정치학 교수)군으로 부터였다.
최시인은 바로 이 충군의 외삼촌으로, 그의 시집이 출판된게 있다는데 구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모처럼의 부탁인데다가 새로운 소월에 대한 호기심이 솓구쳐 바로 작품집 찾기에 나섰다.
이미 절판된지 오래라 한권도 남은게 없다는 출판사의 말에 실망하면서,
이어 교보문고등 여러 대형서점 그리고 고서점 십여군데에 수소문하고 기다렸지만 헛수고였다.
마지막으로 국립도서관에는 당연히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여기도 없다는 허탈한 소식이 아닌가!
우리 시문학사상 중요한 시인이라는데도 이렇게 작품집 한권 못 갖춘 국립도서관이라니...
한탄이 절로 나왔다. 결국 출판사의 호의로 창고를 깡그리 뒤져서
겨우 한권을 찾아 낸 것은 넉달만의 일이었다.
비운의 시인 최소월의 작품집은 사후 88년만에 비로소 그의 생질의 손에 무사히 도달하게 된것이다.
소월 최승구 시인은 1900년대 최남선과 1920년대 주요한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문단의 주역이었다.
26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시인 최승구.
그의 묘에는 사랑했던 여인 라혜석(근대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 세운 사랑의 증표가 있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가 남긴 아름다운 시를 따라
항일저항시인이자 아나키스트였던 최승구 시인과 라혜석 화백의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의 발자취가 있다.
* 최소월(1892-1917 본명:崔承九)
시인.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소월(素月). 경기도 시흥(始興)출생. 아버지는 대현(大鉉)이다.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거쳐 1910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예과과정을 수료하였다. 처음에는 사학(史學)을 전공하려고 하였으나,
학비난에다 폐결핵까지 겹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당시 전라남도
고흥군수로 있던 둘째형 승칠(承七)의 집에서 요양하다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요사하였다.
재기발랄하고 다정다감한 그의 시재(詩才)는 일찍이 최남선(崔南善)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또 시작 뿐만 아니라 연극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직접 극본을 써서 연출, 연기를 맡아 하기도 하였다.
그의 문단활동은 일본유학 당시 《학지광 學之光》의 편집에 참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치하의 울분과 저항정신을 고취한 시 〈벨지엄의 용사〉를
1915년 《학지광》 제4호에 발표하는 한편, 〈정감적 생활(情感的生活)의 요구〉·
〈남조선의 신부(新婦)〉 등의 수필과 평문류(評文類)를 역시 《학지광》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밖에 시작품으로는 유고시집(遺稿詩集)노트에 실려 있는 시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벨지엄의 용사〉 이밖에 〈종 鐘〉·〈사랑의 보금자리〉·〈박사 왕인(博士王仁)의 무덤〉·
〈나의 고리(故里)〉·〈불여귀 不如歸〉 등 25편을 남기고 있다.
이들 시편들은 대체로 그 이전의 개화기 시가들에서 보이는 집단적이고 민중적인 발상법과는 달리,
주정적(主情的)이고 개아(個我)의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히 〈보월 步月〉과 〈조(潮)에 접(蝶)〉을 비롯한 일련의 시작들에 나타난 서정성,
즉 감상(感傷)과 향수를 기조로 한 낭만적 속성은 당시 ‘민족주의’를 표방하였거나 아니면
그것을 주제로 하여 직설적이고 웅변적인 어조로 노래하고 있는 개화기 시가보다는
한층 진전된 단계의 것으로 간주된다.
한마디로 최승구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부터
주요한(朱耀翰)의 〈불놀이〉 등 일련의 시작에 이르는 한국 근대시사에서
중간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시적 전환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으로서,
그가 담당한 과도기의 교량적 구실은 우리의 근대시사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저로는 1982년에 간행된 《최소월작품집 崔素月作品集》이 있다.
* 여류화가 라혜석과의 애달픈 첫 사랑
부유한 개명관료의 집안에서 태어난 라혜석은 수원삼일여학교(현 매향여자정보고),
서울진명여고보를 거쳐 동경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 다녔으며
오빠 라홍석, 라경석과 함께 1913년 일본 유학을 떠난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로
26세에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개인전(1921년)을 열어 전문가로서의 자질을 보인다.
나경석은 이러한 라혜석에게 천재적인 문학소질을 가진 최승구가
잘 어울리겠다고 짐작해 ‘생활과 예술을 함께 할 수 있는 배필’로 여겼다.
스웨덴의 여성사상가 엘렌 케이가 규정했던
‘연애의 이상’에 꼭 들어맞는 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최승구와 라혜석은 동경 유학생 사회에서 최고의 커플이 되어 화제를 뿌린다.
그러나 최승구는 유부남이었기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봉건적 가족제도와 유교적 결혼관 때문에 이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이혼풍속은 본처는 고향에서 시부모와 함께 살고,
남자는 마음에 드는 여성과 함께 따로 살림을 꾸리는 이중결혼의 양식을 취했다.
최승구의 숙부는 차라리 첩으로 두는 한이 있더라도 이혼은 안 된다며 크게 반대했고,
라혜석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최승구는 가족의 이혼 반대로 유학비 지원이 끊기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통으로 끝내 깊은 병을 앓게 된다. 폐결핵이었다.
최승구는 폐결핵으로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1915년 말 고흥군수로 있던 둘째형 승칠(承七)의 집으로 요양을 가 군수관사에 머문다.
그러나 병세는 점점 악화되고 라혜석과 매일 주고받던 편지도 뜸해졌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낀 최승만(사촌동생)은 라혜석에게 한번 다녀가라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다.
학기 중이던 라혜석은 어렵게 최승구를 찾아가 종일 그를 보살피다
학업 때문에 그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음날 최승구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둔다.
일본으로 돌아온 라혜석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이없게도 최승구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죽음을 재촉했다는 심한 자괴감에 빠진다.
최승구가 떠나고 1년 뒤 수필 <회생한 소녀에게>를 발표해 그의 죽음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며,
그의 곁에 조금 더 머물렀더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회환을 털어놓았다.
사랑했던 연인의 죽음은 라혜석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고 그녀를 비련의 여인으로 몰아넣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라경석의 소개로 김우영과 약혼을 한다.
김우영은 교토대 법학부를 나와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정신여학교 3·1운동사건 주동자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의 재판에서 변호를 맡았으며,
황옥경부 폭탄사건 때 폭탄가방을 숨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압송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던 인물이다.
* 최소월과 김여제1. 최소월에 대해서
1892년 경기도 시흥에서 출생한 최소월의 본명은 최승구이다. 일본에서 유학중에
폐결핵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고흥 군수인 둘째 형 최승칠의 집에서 요양하다가 사망했다.
제1세대 여성 작가인 라혜석과 연인 관계였다.
근대 문학의 발전에 기여했던 김억과 친구였다.
김억의 제자였던 김정식은 최소월 선생의 호를 계승하여 호를 소월이라 정하고 김소월로 활동했다.
최소월의 시재는 일찍이 최남선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최소월은 또 시작뿐만 아니라
연극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직접 극본을 써서 연출·연기를 맡아 하기도 하였다.
최소월의 문단 활동은 일본 유학 당시 ‘학지광‘의 편집에 참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치하의 울분과 저항정신을 고취한 시 ’벨지엄의 용사’를 1915년 ‘학지광‘ 제4호에 발표했다.
최소월의 대표작인‘벨지엄의 용사‘는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여
벨기에를 전쟁 물자로 이용했던 상황을 바탕으로 한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시인은 벨기에의 청년들에게 독일군에 맞서 싸우라고 말한다.
이 시는 민족 해방 의식이 아주 투철하다고 볼 수 있다.
시에서 ‘벨지엄의 용사’는 조선의 청년들을 말하며 ‘벨지엄은 너의 것이다.
네 것이면 꽉 잡아라’라는 부분은 조선의 청년들이 일제에 항전할 것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신체시의 형식과 운율을 띠면서도 긴박감이 넘치는 독특한
비유법을 통해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 의지를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항일 저항시로 평가받고 있다.
2.김여제에 대해서
평안북도 정주 출신. 호는 유암. 1918년 3월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시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여 줄곧 특대생으로 장학금을 받았다.
시작품은 양적으로 극히 한정되지만, 학지광 5호에 실린 “산녀”를 비롯한
“한끗”, “잘짜” 등 몇 편의 시작품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최남선·이광수에 뒤이어 현상윤·최소월·김안서 등과 함께 주요한이 등장하기 이전,
1910년대 신체시단의 일원으로서 과도기적인 징검다리 역할을 한 시인이다.
그 시대로 보아 ‘산'을 의인화한 시의 제목조차도 특이하지만, 그 전체의 표현기법도 고도하다.
당시의 시작들에 나타난 외형적 음수율이나 행련법의 제약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부터 ’불노리’에 이르는 한 과도기적 작품치고는 시적 구조,
곧 이미지와 은유는 물론, 시어구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자유시형에 가깝게 접근시키고 있다.
전대의 개화기 시가나 최남선과 이광수의 시작에 나타난
민중적 집단의식과는 달리 개아의 서정성을 시의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 라혜석의 연인 최승구...그는 누구 인가
https://cafe.daum.net/JungHee404/858h/3601?q=%EC%B5%9C%EC%86%8C%EC%9B%94&re=1
라혜석이 세운 최소월 시인의 묘비를 찾아라
소월 최승구 시인은 1900년대 최남선과 1920년대 주요한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문단의 주역이었다.
26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시인 최승구.
그의 묘에는 사랑했던 여인 라혜석(근대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 세운 사랑의 증표가 있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가 남긴 아름다운 시를 따라 항일 저항시인이자 아나키스트였던 최승구 시인과 라혜석 화백의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나를 생각하는 나의 님
這(저)구름 나를 생각
차츰차츰 건일며(거닐며)
這(저)달에 나를 빗최려(비추려)
徽笑(휘소:아름다운 미소)로 울어러봄에(우러러보며)
검음으로 애를 태우고
누름으로 나를 울니라.(울리니라)
빽빽한 運命(운명)의 줄에
에워싸인 나를 우는 나의 님
따듯한(따뜻한) 품속에 나를 갖추려(감추려)
그 깁흔(깊은) 솔밧(솔밭)으로 오르리라
-최소월 시인의 시 <步月>에서
윤동주, 이상, 김소월, 김만옥, 김민부, 오장환, 백석, 송유하, 기형도 등등.
우리 문학사를 돌아보면 천재시인들은 대부분 단명했다.
자신의 혼을 불살라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킨 최승구도 그러했다.
1910년대 우리 근대문학이 서서히 꽃필 무렵,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소월 최승구. 최근 그의 생애와 작품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필자는 그의 묘지가 전남 고흥에 있다는 자료를 확인하고,
그것을 찾으려고 지난 3년간 그의 흔적을 추적해 왔다. 그의 삶에 다가갈수록,
그가 남긴 문학적 성과보다 라혜석과의 애절한 사랑, 그리고 그녀가 오매불망했던
한 남자의 짧은 생애가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아 그의 삶에 더 관심이 쏠렸다.
최승구 시인은 1916년 4월, 전남 고흥군수 관사에서 26세의 짧은 생을 마쳤다.
그곳에서 현해탄 너머 사랑하는 연인 라혜석을 그리며 눈을 감았고
고흥읍내 오리정 공동묘지에 묻혔다. 후에 라혜석이 와서 묘비를 세웠다.
최승구 시인은 아나키스트였다
한국 근대문학의 시작은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에서 시작되어 주요한의
<불노리(1919)>로 연결된다. 그 중간지점인 1910년대를 이어주는 시인이 최승구를 비롯하여
오산학교 교장을 지낸 김여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초대 고려대총장을 지낸 현상윤이다.
소월 최승구는 경기도 시흥 해주 최씨 최대현의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부의 보살핌을 받아 서울 보성중, 동경 게이오대학에서 수학했다.
동경 유학시절 동인지《학지광》의 편집인과 인쇄인을 지냈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학지광 4호(1915.2)》에 <벨지움의 용사>라는 시를 발표했으며,
이후 폐결핵을 앓고 있던 와중에도 1년여 동안 25편의 시와 수필, 평론을 썼다.
그의 작품으로 시 <왕인박사의 무덤>, <불여귀>, <보월>이 있으며,
산문 <정감적 생활의 요구>와 <너를 혁명하라> 등이 있다.
<벨지움의 용사>는 독일의 벨기에 침공을 빌려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한 시로
신체시의 형식과 운율을 띠면서도 긴박감이 넘치는 독특한 비유법을 통해
일제에 강한 저항의지를 표현했다.《근대시조(1916)》에 실린 그의 마지막 작품
<긴 숙시>는 현실인식과 저항정신을 낙원 상실의 이미지를 빌어 유려한 산문시로 표현했다.
최승구 시인은 한동안 잊혔다가 동아일보(1972.5.4)에 <소월에 동명이인 있다>는 제목의 기사와
주간조선 <창조기 한국문단에 제2의 소월이 있었다>는 제목으로
연달아 기사화하면서 그에 대한 조명이 시작됐다.
최초의 여류서양화가, 신여성 라혜석을 만나다
소월 최승구는 당시 조혼 풍조로 보성중을 졸업하자마자 충주출신의 여인과 결혼했지만,
동경고등공업학교 재학시절 학우였던 라경석의 소개로 라혜석과 사랑에 빠진다.
라혜석은 근대미술 사상 최초의 여류화가이자,
단편소설 《경희(여자계,1918)》를 발표한 근대문학 최초의 여성작가다.
또한 3·1운동 때 이화학당만세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렀으며,
후에 무정부주의 저항단체인 의열단의 뒤를 봐주기도 했다.
그녀는 여성해방론자로서 ‘신여성’의 대표자로 인정받고 있으나, ‘연애대장’이라는 풍문과
<이혼고백장(1934)>을 연재함으로써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녀가 동경유학시절부터
일관되게 주장해온 여성해방의 논리와 실천에 대한 접근이 최근 이뤄지고 있으며,
라혜석의 고향인 수원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명이 생기는등 역사적 인물로 재조명 받고 있다.
부유한 개명관료의 집안에서 태어난 라혜석은 수원삼일여학교(현 매향여자정보고),
서울진명여고보를 거쳐 동경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 다녔으며
오빠 나홍석, 나경석과 함께 1913년 일본 유학을 떠난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로 26세에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개인전(1921년)을 열어 전문가로서의 자질을 보인다.
라경석은 이러한 라혜석에게 천재적인 문학소질을 가진 최승구가 잘 어울리겠다고 짐작해
‘생활과 예술을 함께 할 수 있는 배필’로 여겼다. 스웨덴의 여성사상가 엘렌 케이가 규정했던
‘연애의 이상’에 꼭 들어맞는 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최승구와 라혜석은 동경 유학생 사회에서 최고의 커플이 되어 화제를 뿌린다.
그러나 최승구는 유부남이었기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봉건적 가족제도와 유교적 결혼관 때문에 이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이혼풍속은 본처는 고향에서 시부모와 함께 살고, 남자는 마음에 드는 여성과 함께
따로 살림을 꾸리는 이중결혼의 양식을 취했다.
최승구의 숙부는 차라리 첩으로 두는 한이 있더라도 이혼은 안 된다며 크게 반대했고,
라혜석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최승구는 가족의 이혼 반대로 유학비 지원이 끊기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통으로 끝내 깊은 병을 앓게 된다. 폐결핵이었다.
최승구의 죽음으로 비련의 여인 되어
최승구는 폐결핵으로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1915년 말 그의 형이 있던 전남 고흥으로 요양을 가 군수관사에 머문다.
그러나 병세는 점점 악화되고 라혜석과 매일 주고받던 편지도 뜸해졌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낀 최승만(최승구의 사촌동생)은 라혜석에게 한번 다녀가라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다. 학기 중이던 라혜석은 어렵게 최승구를 찾아가 종일 그를 보살피다
학업 때문에 그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음날 최승구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둔다.
일본으로 돌아온 라혜석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이없게도 최승구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죽음을 재촉했다는 심한 자괴감에 빠진다.
최승구가 떠나고 1년 뒤 수필 <회생한 소녀에게>를 발표해 그의 죽음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며,
그의 곁에 조금 더 머물렀더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회환을 털어놓았다.
사랑했던 연인의 죽음은 라혜석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고 그녀를 비련의 여인으로 몰아넣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라경석의 소개로 김우영과 약혼을 한다.
김우영은 교토대 법학부를 나와 일본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정신여학교 3·1운동사건 주동자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의 재판에서 변호를 맡았으며,
황옥경부 폭탄사건 때 폭탄가방을 숨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압송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약혼한 상태에서 그녀는 춘원 이광수와도 가깝게 지낸다.
당시 이광수와의 연애담이 동경시내에 자자했으나, 오빠 라경석의 반대로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광수의 소설 <어린 벗에게>에서 ‘김일련’이란 이름으로 라혜석에 대한 부분이 나오지만,
한편에서는 YWCA에서 활동했던 김필례(전 수피아여고교장)라는 주장도 있다.
라혜석은 그림뿐만 아니라 뛰어난 글재주도 있어 문인들과 뭇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신혼 여행길에 묘비를 세우다
김우영의 끈질긴 구애에 라혜석은 국내 최초로 일간지에 청첩광고를 내고
1920년 4월 정동교회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김우영은 본처와 사별하고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당대의 인습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라혜석은
결혼조건으로 “일생을 두고 지금처럼 나를 사랑할 것”,
“어떤 경우에도 그림을 그리는 데 방해가 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을 것”,
“애인(최승구)의 묘지에 묘비를 세워줄 것”을 내걸어 승낙을 받았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떠난다. 이들 신혼부부가 찾은 곳은 최승구의 묘지였다.
라혜석은 옛 애인을 영원히 잊기 위해서라며 비석을 세워 달라고 청했고,
착한(?) 남편 김우영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생활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또 다른 인물 최린과의 만남이 문제의 씨앗이었다.
황옥경부 폭탄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일본의 제의로 이들 부부는 유럽 유학길에 오른다.
김우영은 베를린으로 법학공부를 하러 떠나고,
라혜석은 파리에서 프랑스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드나들면서 그림공부를 하다
최린을 만나 사랑을 불태운다. 그러나 파리에서 맺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귀국 후 어려운 생활 때문에 라혜석은 시댁인 부산 동래에 머물게 되었으며,
김우영은 서울에서 변호사사무소를 개업하여 딴살림을 차렸다.
시댁살이에 적응하지 못한 라혜석은 최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최린은 친구 권승렬 변호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권승렬은 연회장에서 이를 발설했고
결국 남편 김우영이 알게 되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는 협박에
결혼 10여년 만에 3남1녀를 두고, 그녀 나이 서른둘에 이혼도장을 찍어야 했다.
이혼 후 <이혼고백장>파문으로 비난
라혜석은 이혼하면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던 최린의 말을 그대로 믿었지만,
최린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홀로 된 라혜석은 아이들 때문에 멀리 떠날 수 없어
수원에 작업실 겸 미술교습소를 차려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하지만 생활은 몹시 궁핍했고 부정한 여자로 낙인찍혀 냉대와 질시를 받는다.
그즈음 김우영은 총독부 상공과장으로, 최린은 중추원 칙임참의로 승승장구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라혜석은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장(1934)>을 연재하면서 파문을 일으킨다.
<이혼고백장>은 몇몇 일간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그녀가 경성법원에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궁지에 몰린 최린은 위자료를 주고 합의했으나, 라혜석에게 돌아온 것은 사회적비난과 멸시뿐이었다.
이후 작품활동에 전념하면서 일본제국미술원 전람회와 제10회 조선미전에 입선하는 기쁨도 잠시,
이 두 사건으로 고립되어 그녀의 외로움은 병으로 이어지고 만다. 그 무렵 큰아들을 폐렴으로 잃고,
일엽스님(동경유학친구 김일련)이 머물던 수덕사 견성암으로 찾아간다.
일엽스님은 그녀에게 불교에 귀의할것을 권했지만, 구속을싫어했던 라혜석은 끝내머리를 깎지않았다.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 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가자.
四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1935년(40세) 라혜석
쇠약해져가는 몸으로 근처 수덕여관에 머물며 그림 그리는 일로 무료함을 달래며,
가끔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정도 외에 별반 외출도 하지 않았다.
일엽스님과 김태신 화백(일엽의 아들)이 가끔 찾아주었으며,
이따금 고암 이응노 화백이 들를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건강이 악화되어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양로원 등을 떠돌다가,
1948년12월10일 길거리에서 객사체로 발견된다. 파란의 그녀가 52세를 일기로 외로운삶을 마감했다.
불행히도 행려병자로 화장되어 묘지조차 남아 있지 않다.
라혜석의 마지막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고독, 그 자체였다. 이혼 후 18년 동안 혼자였다.
큰아들을 잃고 3남매가 있었지만, 자식들은 그녀를 어머니가 아닌 탕녀로 여겼고
평생 그녀의 혈육임을 부정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시대를 풍미했고, 관습에 당당히 도전한 근대여권운동의 선구자였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문화관광부에서는 이점을 높이 평가해 2000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박인경 화백(고 이응노 화백부인)이다.
라혜석이 잠시 안양 경성보육원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당시 보육원은 박인경 화백의 외사촌 오빠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우리 보육원에 여류화가가 있으니 미대생으로서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는
외사촌 오빠의 말에 그곳을 찾았다. 박인경 화백은 그녀가 늙고 병들어 있었지만,
뒷모습은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다고 회고했다. 그 이후, 거리에서 차가운 시체로 발견되기까지
라혜석의 행보를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혹시 그녀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사랑했던 옛 연인 최승구의 묘지가 아니었을까?
그녀가 세운 비문은 무엇이었을까?
2004년 라혜석을 소재로 한 소설 《춘하추동》을 출간했다. 작가 함정임 씨는
최승구시인의 발자취를 찾아 고흥을들러 그가 마지막을 보낸 옛 고흥군수 관사터만 확인했다고 한다.
라혜석의 일대기를 그린 평전도 출간했지만, 구체적으로 접근한 것은
2000년에 출간한 이상경의《인간으로 살고 싶다-영원한 신여성 라혜석》이다.
그 이전에는 미술평론가 이구열의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라혜석일대기(1974)》를 출간해
라혜석에 대한 실체적인 접근을 처음으로 시도했었다.
이구열 씨가 출간할 당시는 라혜석을 기억하는 이들이 생존해 있어
라혜석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필자가 이구열 씨에게 확인한 결과
70년대 초반 고흥에서 최승구 시인의 묘지에 대한 연락이 왔었다고 한다.
당시 최승구의 묘지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묘가 쓰러지고 묘비도 나뒹굴고 있다는 제보였다.
최승구 시인의 묘지는 현재 고흥중학교가 1979년에 옮겨오면서 운동장 건설과
읍내 입구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외곽으로 이전했다.
당시 연고묘지는 대부분 유족에 의해 이장했으며, 무연고 묘지만 고흥읍 등암리로 이장했다.
그러나 묘지를 이전하기 전의 주월산 일대와 이전한 공동묘지를 샅샅이 뒤졌지만,
최승구 시인의 묘지와 묘비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임종을 지켰던 사촌동생 최승만(1984년 사망)이 묘비와 함께
그의 고향인 경기도 부근의 선산으로 이장했을 것이라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최승만의 유족을 찾으면 최승구 시인의 묘지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여러 군데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그의 부인이 6·25때 납북되어 확인할 길이 없었다.
라혜석은 과연 그 비석에 어떤 비문을 새겨 넣었을까. 필자의 상상으로 그려본다.
아! 사랑하는 님이여! 영원히 잊지 못할 님이여!
그대를 잠시 잊기 위해 여기 묘비를 쓰노니
훗날 저 하늘에서 만나거든
우리가 못다 한 사랑 다시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노라.
편히 잠드시오.
정월 라혜석作 소설 “경희” 줄거리
일본 유학생 ‘경희’는 잠시 집에 다니러 와 있다. 일에서 기쁨을 느끼는 경희는 오래간만에 만난
오라버니댁과 시월이와 함께 바느질을 하며 일본 이야기에 한창이다. 어머니를 만나러 온 사돈마님이
아니나다를까 경희를 불러 고된 공부 고만하고 시집가야 않겠냐며 걱정이다. 경희는 만나는 이마다
일치된 이 걱정을 들으며 ‘배우고 알아야 사람’이라 속으로 다짐한다. 아들의 설득에 넘어가 경희
를 유학보낸 어머니 김 부인도 같은 걱정이지만, 한편으론 경희가 배울수록 의사가 나는 것이 기특하
고 과연 여자도 남자와 같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이철원 역시 반듯한 경희의 사고와
행실을 기특해 하나 과년한 나이에 좋은 혼처를 놓치기 싫어 이번에는 꼭 시집을 보내리라 결심한다.
아버지의 강권에 경희는 선택을 두고 깊은 회의에 빠진다. 부잣집 며느리로 탄탄대로를 밟을 것인가,
험하고 천대받는 어려운 길을 택할 것인가… 제가 배운 것이라봐야 아직 아무 것도 아닌데, 의지가
강고한 자가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실력과 희생이 함께 따르는 길인 것이다. 고민 끝에,
“그리로 시집가면 좋은 옷에 생전 배불리 먹다 죽지 않겠니?” 묻는 아버지에게 ‘먹고만 살다 죽으
면 사람이 아니라 금수’일 뿐, ‘보리밥이라도 제 노력으로 제 밥을 먹는 것이 사람’이며 ‘조상이
벌어놓은 밥 그것을 그대로 받은 남편의 그 밥을 또 그대로 얻어먹는 것은 우리집 개나 일반’이라
한 제 답이 옳았음을 확신하며, 경희는 있는 힘을 다해 일하며 살겠다는 기도를 올린다.
*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라혜석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라혜석
경복궁 서쪽 담을 끼고 영추문을 지나 백악산 가까이 창성동에 가면
넓은 장소에 커다란 건물이 들어서있는 곳이 있다.
이곳은 현재 청와대 경호동인데 1989년 이전까지는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당대의 명문여학교 중의 하나였던 진명여자고등학교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였다.
근대기에 세워진 다른 사립 여학교들이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것에 비해,
이 학교는 한국인에 의하여 설립된 최초의 여학교라는 데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학교를 설립한 사람은 고종의 후궁으로 영친왕의친모인 '엄귀비(嚴貴妃, 1854-1911)'였다.
그는 교육 사업에 관심이 많아 진명여학교 외에 숙명여학교, 양정의숙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최초 여성 서양화가 라혜석
1906년에 설립된 진명여학교는
1912년에 진명여자보통학교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분리되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이시기 진명여학교를 다닌 가장 유명한 인물은 정월(晶月) 라혜석(羅惠錫, 1896-1948)이다.
일제강점기 1세대 유화가이자 첫 여성 서양화가이며 문학인이기도 하다.
라혜석은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1910년 수원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진명여학교에 편입한다.
1913년 졸업할 때에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최우등으로 졸업하여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하였다고한다.
화실에서의 라혜석
진명여학교 졸업후 라혜석은 일본에 먼저 유학한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한다.
'도쿄여자 미술전문학교'는 일본 최초의 여자미술학교다.
라혜석이 그림을 전공하게 된 것은 어려서부터 그림 재주가 있는 것을 눈여겨 본
오빠 하경석이 미술학교 입학을 권유하였기 때문이다.
라혜석은 학교에서 그림을 가장 잘 그렸으며,
꽃이나 벌레 등을 그려 선생에게 찾아가면 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도쿄여자 미술전문학교' 는 라혜석 이후 백남순, 정온녀, 박래현, 천경자 등
뛰어난 후배들이 들어온다. 이들은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된다.
특히 이곳에는 도쿄미술학교의 뛰어난 화가들이 교수로 재직 수준 높은 미술 교육을 받을수 있었다.
김우영과의 결혼식
1918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라혜석은
귀국하여 숙명여학교 미술교사로 잠시 재직하다 건강 문제로 사직한다.
1921년에는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개인 전시회를 여는데,
한국 여성으로서는 처음 하는 미술 개인전이었다
당시 이 전시는 천재적인 여류화가의 전시라 하여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라혜석은 자신의 뛰어난 역량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에게 미술을 보급하기 위한 것이라는 공익적인 포부를 밝혀 여성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세계일주 여행을 위해 만주로 떠나는 라혜석과 김우영
개인전이 끝나고 남편 김우영(金雨英, 1886-1958)이 만주국 안동의 부영사가 되자,
안동에서 살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지낸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화가로서 한계를 느끼고 몹시 힘들어 한다.
마침 1927년에 남편 김우영이 유럽과 미국을 시찰하러 가게 되자 함께 여행길에 올라
한국 여성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르는 인물이 된다. 그는 구미 여행길에서
많은 견문을 넓혀 자신의 미술 세계에 혁신을 가져올 정도로 많은 발전을 한다.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89*76cm, 수원시립미술관, 1928
라혜석은 1933년 '여자미술학사'라는 미술학원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고자 한다.
이미 1922년 만주 안동에서 '여자야학'을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경성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화숙을 경영하고자 한 것이다.
'여자미술학사'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자신이 도쿄에서 유학한 모교 '여자미술전문학교'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이 화숙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불륜과 이혼 등 사회적 문제에 얽혀 삶이 흐트러지자 곧 문을 닫고 만다.
라혜석<스페인 해수욕장>,1928
김우영과의 이혼 후 라혜석의 삶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화가로서의 활동도 위축된다.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오빠의 경제적 지원도 끊긴다.
계속 이어지는 급진적인 사상의 글과 개인사적 소송 등이 이어지며 사회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듣고,
아이들까지 보지 못하는 고통으로 라혜석의 심신은 병들어갔다.
화령전 작약, 목판에 유채, 33.7*24.5cm, 193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 1928
1935년에는 수덕사에서 불공을 드리며 자신을 찾아온 학생들에게
유화를 가르치기도 하나 정상적인 화가로서의 삶은 아니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게 되어 방랑생활을 한다.
점차 몸은 피폐해지고 1944년에는 인왕산 자락 모교 근처에 있는
청운양로원에 들어가는 등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다.
이후에도 여러 곳을 떠돌던 라혜석은
1948년 12월 원효로에 있는 시립 자제원(慈濟院) 병동에서 무연고자로 세상을 떠난다.
죽음을 맞이한 4개월 후인 1949년 3월 14일이 되서야 무연고자 시신 공고가 나며
신원이 밝혀져 죽음이 알려지게 된다. 한 시대를 풍미한 뛰어난 화가의 참으로 허망한 죽음이었다.
자화상, 1933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화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 불리는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은
1909년 도쿄미술학교로 유학하여 유화를 공부한다. 이어 김관호(金觀鎬, 1890-1959)가 1911년,
김찬영(金瓚永, 1889-1960)이 1912년에 계속해서 같은 학교에 입학한다.
이들 세 사람은 도쿄미술학교에서의 뛰어난 평가로 한국의 미래 서양화단을 짊어질 것이라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귀국한 후 곧이어 서양화단을 떠나고 만다.
라혜석은 비슷한 시기에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이후
한 평생 거의 서양화를 손에서 놓지 않고 산다.
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남편을 따라 구미를 돌아다닐 때에도 그림을 그렸고,
세상을 버리고 산 중에 있을 때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는 천생 화가였다.
당시는 여성이 사회적 활동을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나, 라혜석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세상과 맞서며 여성으로서의 주체적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성격이 더욱 세상에서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그때마다 그를 지켜준 것은 그림이었다.
그는 여러 역경이 있을 때에도 항상 붓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무희(캉캉), 41*33cm, 1927~28, 국립현대미술관, 1940
현재 라혜석의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평생 많은 그림을 그렸으나 1933년경에 화실에 불이 나
그림 대부분이 타버려 전하는 것이 적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페미니스트 화가 라혜석
라혜석은 도쿄에서 미술을 주로 배웠지만, 그 외에 문학 활동에서도
재능을 보이고 당시 새로운 사조로 관심을 끈 여성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는 자유연애에 깊이 빠졌는데, 유학시절 '최소월(崔素月)'이라 불리던
감성적인 문학청년 최승구(崔承九, 1892-1917) 와의 일화가 유명화다.
최승구는 1917년 26살의 이른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시국 사건으로 자신의 변호를 맡아 온 변호사 김우영의 집요한 구애를 받는다. 라혜석은
다시는 연애를 하지 않을 결심을 하였으나, 김우영의 진지함에 결국 굴복하여 결혼을 하게 된다.
이때 라혜석은 결혼 허락의 조건으로 세 가지 조건을 붙여 세간의 화제가 된다.
김우영에게는 전처와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
지금 사랑하는 것처럼 평생 자신을 사랑할 것.
시부모 봉양과 아이들 돌보기를 요구하지 말 것.
자신의 화가 생활을 방해하지 말 것.
특히 두 번째로 요구한 '시부모 봉양과 아이들 돌보기를 요구하지 말라는 것'은
당시 시대상으로 보았을 때 아주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김우영이 받아들여 결혼에 이른다.
그러나 라혜석은 이에 머물지 않고 김우영과 신혼여행을 가는 대신에
김우영의 돈으로 최승구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 세간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라혜석의 자유로운 사고는 결국 유럽 여행 중 파리에 놀러갔다가
명사 고우(古友) 최린(崔麟, 1878-1958)을 만나게 되며 이를 눈치 챈 언론의 물음에
라혜석은 최린과의 연애를 인정하지만, 최린은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며 부정해 버린다.
그 당시 남편 김우영은 외유 중이었다.
그는 돌아와 이미 소문난 라혜석의 불륜에 화가 나 간통죄를 빌미로 하여 이혼을 요구한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한다. 이에 라혜석은 '이혼고백서'를 써
최린의 태도를 비난하고 거액의 위자료를 청구한다.
경제적 여유가 많았던 최린이 이를 수락하여 배상하자 이 스캔들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최린과의 한때 사랑으로 라혜석은 많은 것을 잃고 결국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혼고백서의 내용 요약
- 정조는 취미이자 자유다.
- 불륜은 부부관계를 돈독히 만든다.
- 성적으로 자유로운 창녀가 부럽다. 여창을 넘어 남창을 만들자
- 남자는 바람을 피우고 아내를 괴롭게 만든다.
- 남자는 여자에게 정조를 강요하고 자신은 정조를 지키지 않는다.
- 아이는 부모의 살을 좀먹는 악마다.
- 모성애는 학습과 세뇌의 결과물이다.
- 결혼은 여성의 지옥이고 임신은 불행이며 육아는 저주이다.
라혜석은 화가와 여성 운동가로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지만
결국 피폐해진 몸을 이끌고 자신이 청춘 시절을 보낸 진명여학교가 있는
서촌의 요양원에 왔다가 얼마 후 원효로의 자제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라혜석의 시와 그림은 후대에 남아 감명을 주고,
선구안을 가진 근대기 첫 페미니스트로 기억되고 있다
※ 라혜석과 연인들
라혜석(1897-1948) : 52세卒
최승구(1892-1917) : 26세卒, 5년 연상
김우영(1886-1958) : 73세卒, 11년 연상
최린(1878-1958) : 81세卒, 19년 연상
김우영 초상, 1928년, 수원시립미술관
책<신여자>2호(1920. 4) “살롱 드 경성” 중에서 p182, 저것이 무엇인고, 목판화
파리 풍경, 목판에 유채, 23.5*33cm, 1927~28, 개인 소장
피카소, Woman with a Chignons
선죽교, 23*33cm, 개인 소장
수원 서호, 목판에 유채, 30*39cm, 개인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