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처럼
- 김민정 / <우리, 사랑할래요?> 샘터 / 2007년 10월 -
내가 주저앉은 그 자리에
새끼고양이가 잠들어 있다는 거
물든다는 거
얼룩이라는 거
빨래엔 피존도 소용이 없다는 거
흐릿해도 살짝, 피라는 거
곧 죽어도
빨간 수성사인펜 뚜껑이 열려 있었다는 거
반투명
- 김민정 /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
스스로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눈으로
그가 벽시계를 보고 있다.
오래 보느라 노려보는 거
그렇다,
한쪽은 어느 하나의 기면이라
신은 아침을 믿고 아침은 그를 믿어
그는 아직 신을 믿는다.
다만 아침은 아름다우니
그는 혼잣말을 내뱉는데
침대 아래로 손에 쥔 둥근 붕대가 미끄러진다.
스스로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팔로
휘적거리면서 그가 잡으려는데
집까지 굴러가는 테니스공이라 하고
십자로 칼집을 내었다 하니
식탁 의자는 여섯
다리는 넷씩이니까
도합 스물네개의 테니스공
하루 스물네시간 의자 발에다가
신겼다 벗겼다 하는 아홉살 자폐의 소년이 있어
저녁이면 그의 턱에 흰 수염이 새로 자란다.
스스로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발로
차는데 그의 이불은 흘러내리지 않고
걸쳐진다,
헤이 거기 모자 바이 여기 모자
허공중의 모자는 아직 제 얼굴을 못 찾아
쀼루퉁한 입을 부풀려가며 기다리는 함박
눈.
그게 뭐나 되는 것처럼 밤새
눈이 내린다.
유리창에 달라붙는 눈에
눈이 추위로 점점 커진다.
흰 침대보를 사물함에서 꺼내 터는 새벽
누구일까,
들었는데 팔이 긴 가면만이
저 눈을 감길 수 있다 한 이였는데.
* 김민정 : 1976년 인천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수료. 1999년 <문예중앙> 신인
문학상을 통해 등단.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아름답
고 쓸모없기를』, 산문집 『각설하고,』. 문학동네 임프린트(계열사) ‘난다’ 편집자 및 대표로 재직 중.
문학, 꽃 피다(김민정) / 인문예술과학특강(대구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