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 이병기 / <가람시조집>(1936) -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 함께 나아오더라
달은 넘어 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비2
- 이병기 / <가람시조집>(1936) -
짐을 매어놓고 떠나시려 하는 이 날
어두운 새벽부터 시름없이 내리는 비
내일도 내리오소서 연일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내리는 비
저으기 말리는 정은 나보다도 더하오
잡았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 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
냉이꽃
- 이병기 / <가람시조집>(1936) -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때 밥을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도 읊고 싶구나
지난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 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어떨 건가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두 송이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풀벌레
- 이병기 / <가람시조집>(1936) -
가까이 멀리에서 제서 쌍져울다
외로 울다 연달아 울다 둑 끈쳤다
다시 운다 그 소리 단조하고 같은 양해도
자세 들으면 이놈의 소리 저놈의 소리 다 다르구나
볕
- 이병기 / <가람시조집>(1936) -
보릿잎 포롯포롯 종달새 종알종알
나물 캐던 큰아기도 바구니 던져두고
따뜻한 언덕머리에 콧노래만 잦었다
볕이 솔솔 스며들어 옷이 도리어 주체스럽다
바람은 한결 가볍고 구름은 동실동실
난초
- 이병기 / <가람시조집>(1936) -
1
한 손에 책(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2
새로 난 난초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3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4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 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받아 사느니라.
* 김정희 ‘불이선란(不二禪蘭)’ⓒ 국립중앙박물관, 손재형의 소장품중 김정희의 작품으로 '세한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불이선란(不二禪蘭)'이라 불리는 난초 그림이다. 이 그림에
관련된 이야기 또한 전설적이다. '불이선란'은 작품도 우수할 뿐만 아니라, 작품 제작 과정에 대한
내력이 흥미로워 관심을 끈다. 또한 완성된 이후 소장자가 바뀌어 가는 과정의 굴곡이 심해 미술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난초를 그리지 않던 김정희가 20
년 만에 다시 난초를 그린다는 재미있는 화제가 붙어있다. 본래 이 작품은 '달준(達俊)'이라는 어린
시동에게 그려주려 했던 것인데, 마침 집을 방문한 전각가 '오규일(吳圭一)'이 보고 좋다고 하며 잽
싸게 빼앗아갔다는 뒷이야기까지 쓰여 있다. 이런 우스우면서도 재미있는 내용이 작품 위에 적히며
이 작품은 명품으로서의 아우라를 만들어 간다. 이렇게 특별한 배경을 지녔던 탓인지 이 작품은 오규
일의 손에 들어간 이후 파란만장한 여정을 시작한다. 먼저 오규일과 같은 추사 문하였던 김석준에게
넘어갔다가 다시 장택상에게 넘겨진다. 장택상은 정치가로 미술품을 많이 수집하였던 사람인데, 이
작품을 오래 가지고 있지는 못하고 얼마 후 이한복에게 넘겨준다. 그런데 이한복이 또한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세상을 그와 가까웠던 손재형에게 넘어간다. 그런데 오랫동안 지니고 있을 것
같았던 손재형은 갑자기 정치 참여의 바람이 불어 대부분의 소장품을 처분할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당시 개성 부자로 명동의 유명한 사설금융업자인 이근태에게 잡혔다 되찾지 못한다. 그러나 이근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동종 업종에 있던 같은 개성 사람 손세기에게 넘겨 지금까지 그의 집안 소장품으로
이어오고 있다. 다행히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어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 속에는 작품의 내력을 알려주듯 소장자의 인장이 많이 찍혀 있는데, 각 인장의 수준이 높아 한
국 미술품 중에서 인장의 멋을 잘 살린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힌다.
별(이병기) / 노래(소프라노 신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