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sr]들꽃세계

[스크랩] 비운의 화가 이인성의 작품...

이름없는풀뿌리 2009. 10. 12. 16:34

      ●  이 인 성 
      
      
      ▲  붉은 배경의 자화상(Self-Portrait in Red)
      1940년대, 18X10.5cm, 나무판에 유채 
      일찌감치 통행금지가 내려진 골목길을 술 취한 취객 하나가 걷고 있었다.
      “누구냐. 정지”
      돌연 거리를 차단하고 있던 치안대원이 지나가던 사내의 발걸음을 막아 세운다.
      “나 말요, 나. 천하의 나를 모르오? 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나를 모르오. 
      난 이인성이오. 천하의 천재 이인성이오.”
      치안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내의 기세가 너무나 등등하여 
      고위층의 인물인가 은근히 겁도 나서, 
      일단은 치밀던 화를 자제하고 집으로 보내준다. 그리고 경비소로 돌아온다.
      “누구 저기 위에 사는 이인성이라는 사람 알어?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뭐하긴 뭐해. 환쟁이지.”
      “환쟁이, 아니 그 자식이 환쟁이야?”
      치안대원은 뛰쳐나간다.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종전의 사내가 들어간 집 대문을 발길로 걷어찬다.
      “누, 누구요.”
      술 취해 자리에 누워 있던 이인성이 옷도 입기 전에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치안대원의 총이 잠결에 뛰쳐나온 이인성의 이마를 향한다.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적막을 찢는다. 이인성은 쓰러진다.
      작가 최인호가 오래 전에 화가 이인성의 최후를 
      소설적으로 각색해 쓴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의 한 부분이다. 
      한국의 고갱이요 세잔으로 불렸던 이인성은 1950년 늦가을 
      서른아홉 나이로 북아현동 집에서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최후를 마친다. 
      어떤 기록은 이미 집 근처 술집에서부터 경찰관과 시비가 있었다고도 전한다. 
      이인성의 최후는 이 땅에서 예술 한다는 것의 자리매김이 
      어떠했는가를 소스라치게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어쩌면 천하의 이인성이라고 했을 때 치안대원은 
      당시의 세도가 중 이기붕 일가쯤의 한 사람으로 지레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당시는 이씨 천하였으니까. 그래서 어떤 기록에 보면 
      취한 이인성을 정중히 ‘모셔다 드렸다’고 나온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는 세도가는 커녕 일개 ‘환쟁이’였던 것. 치안대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이다.
      글쓴이는 묻는다.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 그리고 스스로 대답한다. 
      “우리 곁의 천재를 죽인 것은 너와 나 우리 모두”라고, 
      나는 그 시대에 살지 않았다. 총을 쏘지 않았다 말하지 말라”고. 
      허다한 우리 곁의 천재적 예술가를 멸시하고 심지어 죽음의 길로 까지 내몰고 나서 
      추모비, 기념비를 세운다 호들갑 떨지 말라고.
      “너 커서 이인성 되겠구나.”
      한때 대구에서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에게 ‘화가 되겠구나’ 대신 그렇게 말했다 한다. 
      그는 1912년 대구 남성동에 있는 작은 음식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근대 화가들이 대부분 지주나 자본가 혹은 관료가문 출신의 
      자제들이었던 데 반해 이인성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가의 길을 갔다.
      그가 쓴 어떤 글에 의하면 부친은 그의 뜻에 극구 반대하여 
      몽둥이를 들고 나올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세계아동작품전에 슬며시 출품하여 특선하였으나 
      정작 부모님은 화를 내시는지라 서럽기까지 했노라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난과 주변의 몰이해에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당시 구로다세이키가 빠리로부터 돌아와 일본 화단에 일으킨 
      외광파의 영향을 받은 일인 미술교사들에 의해 서양화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한국 고미술 연구가로 이름 높던 시라카미 쥬요시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어 태평양 미술학교에 적을 둔다. 
      그는 메이지(明治, 1868-1911) 말기로부터 
      다이쇼(大正, 1912-26) 초기에 걸쳐 이입된 후기 인상주의적 기법을
      ‘조선의 향토색’으로 수용하여 토착화시킨다. 
      이를테면 평범한 주변의 일상적 사물을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한국적 색체, 형태와 정서로 덧입혀갔던 것이다. 
      그에게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가져다 준 <경주의 산곡에서>와 같은 작품은 천년 영화가 
      몇 개의 기왓장으로 나뒹구는 폐허가 된 고도 경주와 
      힘없는 어린 소년들을 대비시켜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는데, 
      헐벗은 아이들과 매미와 산하를 통해 당시의 민족상황을 표현하였다. 
      동시에 붉은 황토색을 통해 특유의 조선정서를 형상화시킨 것이다. 
      그는 도시에서 출생하여 도시에서 살다간 도시인이었지만 
      대부분의 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토착에 탐익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 세련된 근대적 감각을 불어 넣었다. 
      버터 냄새나는 서양 기름 물감을 토장국 맛 나는 
      카슬카슬한 조선 황토의 토착미감으로 바꾸어버린 이인성. 
      아니다. 인위적으로 바꾸었다기보다는 체질로 풀어내고 
      토해냈다는 편이 낫다. 조선의 붉은 토지와 맨드라미, 
      조선 여인의 흰 저고리와 검은 무명치마 같은 색채의 대비로써 
      그는 암묵적으로 민족적 미의식을 드러낸다. 
      투쟁적 모습을 보이거나 목청 높여 드러내놓고 민족주의를 부르짖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그의 그림은 향토 정서 이상의 울림을 주고 있다.
      그가 그린 <아리랑 고개>와 그 그림에 관한 고백은 그의 이런 생각의 뼈대를 가늠하게 한다.
      
      
      ▲  아리랑 고개
      1934, 57.5X77.8cm, 종이에 수채, 호암미술관 소장
      “보리타작 시즌은 과연 아름다운 볼거리다. 모두 ‘예술적 콤포지션’의 하나이다. 
      다른 나라에 없는 조선의 보리타작이라서일까? 몸을 가볍게 들어서
       ‘도리깨’를 번쩍 들어올리는 그 순간의 이즘(ism)은 얼마나 대륙적인가? 
      여기저기서 흘러오는 아리랑의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며 또 걷기 시작한다. 
      황혼의 들길은 끊없이 아름답고 ‘감정적’이다.” 
      - 1935.6.19. 유족 소장의 신문자료-
      그는 거의 독학으로 수채화와 유화를 공부해 열여덟 나이에 
      선전(鮮展)에 입선한 이래 연달아 입. 특선을 거듭하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약관 26세 나이로 추천작가가 되었던 식민지 화단의 별이었다. 
      경쾌한 붓터치와 동양화의 파묵법(破墨法, 거친 먹그림 기법의 하나)을 연상시키는 필세에 
      토속적 정감 넘치는 소재의 화면들. 그 위에 강한 명암 대비에 의한 미묘한 긴장과 울림, 
      넘치는 문학성 등으로 ‘이인성류’는 선전(鮮展)뿐 아니라 
      해방 후의 국전 작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  경주 산곡에서
      1935, 130.5X195.6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그의 선전(鮮展) 참여 이력이 때로 그를 평가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그가 한국적 미의식을 명료히 드러낸 작가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인성의 아들 채원씨는 그 부분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아버님이 줄곧 선전(鮮展)에 참여하셔서 각광을 받았대서 
      그 부분을 약점으로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신 분으로서 
      그런 제도적 관문을 거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화가로 입신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처럼 화랑이 많아 개인전을 통해 자신을 알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니까요. 
      비록 선전(鮮展)에 참여는 했지만 아버님은 끊임없이 우리 그림을 그리려 애쓰신 분입니다. 
      아버님의 그림은 숫제 동양화입니다. 저희는 아버님께서 고이 간직해 오신 미발표 작품 
      백여 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는 종이에 그린 수묵화가 많습니다. 
      제 짧은 눈에도 아버님의 수묵화는 아버님의 개성과 기질을 유화 쪽에서 보다 휠씬 잘 
      발휘하신 것으로 보였습니다.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었대서 서양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수채와 유채를 주로 쓰긴 했지만 아버님의 그림은 한국화였습니다.” 
      
      
      ▲  가을 어느날
      1934, 96X161.4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그는 도시인이었으면서도 우리 산, 우리 물의 아름다움은 물론 심지어 
      공기의 흐름까지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때로는 일상의 풍경에서 암울하고 애잔한 
      식민지적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세잔의 <생 빅트와르 산>은 알아도 
      이인성의 <경주의 산곡>에는 무지하다. 고갱의 <타히티 여인>의 그 원시적 생명력은 
      예찬하지만 <어느 가을날>의 황막한 들판에 반나(半裸)로 선 조선여인에는 무심하다. 
      모네의 <수련>을 누가 모르랴. 그러나 이인성의 <해당화>는 낯설다. 우리는 거의 늘 그랬다.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리의 눈으로 허다한 일본인 화가들이 
      식민지 청년 이인성의 재능을 시샘했지만 나라 안에서 그 이인성은 
      정작 보잘 것 없는 ‘대구의 식당집 아들’이었을 뿐이다.
      
      
      ▲  정물(해당화)
      1940년대 후반, 48.5X31.5cm, 종이에 수채
      1936년 24세에 일본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던 김옥순과 결혼한 그는 귀국 후 
      장인되는 김재명의 남산병원 3층에 현대식 화실을 꾸며 
      안정된 가운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940년 상처하고 실의에 잠기면서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1947년 김창경과 재혼하면서 이듬해 서울 동화화랑에서 재기전을 갖게 되고 
      다시 일어서기까지 그는 참으로 감내하기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1950년 장남 채원군이 탄생하고 제2의 전성기가 열리는가 했지만 
      그 해 11월 4일 그만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  계산동 성당
      1930년대 중반, 35.5X45cm, 종이에 수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서양화로 조선의 ‘향토색’을 담으려 노력했던 이인성의 흔적은 대구에서 찾을 길이 없다. 
      이인성의 활동 반경을 짚어주는 것으로는 봉산 문화거리 입구에 
      사각의 표석이 하나 서 있을 뿐이다. 
      옛 정취와 연경되는 것은 그나마 약전 골목, 그리고 메마른 도시의 향기같은
      한약 냄새가 끝나는 지점의 계산동 성당. 하늘에 닿을 듯한 뾰족 십자가에 
      남북으로 길게 익랑(翼廊)을 단 이 고딕식 성당을 이인성은 몇 차례나 화폭에 담았다. 
      서쪽 하늘을 물들인 이인성의 그림 속의 그 붉은 빛 구도 안에 서 있건만 
      천지간에 화가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  김병종의 화첩기행
      
      
      ▲  <<온일 : Warm Day>>
      1930년대 중반, 종이에 수채, 72*90cm
      mid - 1930'0, Watercolor on Paper
      
      
      ▲  <<백장미 : White Reses>>
      1940, 나무판에 유채, 45.3X37.3cm
      1940, Oil on wooden board
      
      
      ▲  <<어촌(덕적도 풍경 : Fishing Village)>>
      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32X41cm, 개인소장
      later 1940's, Oil on canvas
      
      
      ▲  <<해당화 : Sweet Brier Flowers>>
      1944, 캔버스에 유채, 228.5X146cm, 호암미술관 소장
      1944, Oil on canvas, Collection of Ho-Am Art Museum, Yongin 
      
      ◎  글출처: 한잠님이 이메일(8/24)로 보내주신 자료중에서 - 돌고지
      

    출처 : 그저 그냥~
    글쓴이 : 돌고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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