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계룡산 남부능선(향적산 - 황산성) 종주기 (06/07/15)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3. 16:01

 

 

 

 

 

계룡산 남부능선(향적산 - 황산성) 종주기

 

- 전국에 걸친 폭우로 고통을 겪으시는 많은 분들께 위로의 말씀을 올리며... -

 

1) 산행계획

06/7/22(토) 서울에서 산을 좋아하는 손님들이 오신다기에, 부분별로는 가봤지만 필자도 아직 未踏인 구간이 많은 계룡산 남부능선[암용추-천왕봉-머리봉-숫용추-맨재-향적산 국사봉-함지봉-황산성-연산]을 계획했었다. 그런데 땡볕을 무릅써야하는 한여름에 當日 종주하기엔 너무 길고 밋밋한 구간이 많을 것 같다는 이시관 사장님의 意見에 따라 7/22일에는 [암용추-천왕봉-숫용추-용천령-신원사]를 設計하기로 하고 今週에는 농협 오병관 사장님과 [엄사리-향적산 국사봉-함지봉-황산성-연산]을 縱走하기로 하였다. 국사봉까지는 자주 가봤는데 그 이후로는 아직 未踏인 區間이어서 설레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연일 오락가락하는 장맛비가 산행을 망설이게 하였으나 우비까지 준비한 산행에의 의지를 꺾지는 못하였다. 홍수로 온 나라가 난리인데 웬 산행이냐고 아내가 말렸지만 우리나라 일기는 믿을게 못된다고 우기고는 출발하였다.

 

2) 엄사리 청송약수터-맨재(4km, 80분, 08:40-10:00)

이 길은 錦南正脈 줄기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너무나 밋밋한 길이어서 정맥의 허리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지난 봄 연녹색을 자랑하던 芳草들은 盛夏의 新綠에 묻혀 엎드려 있고 그 싱그런 잎사귀들은 봄꽃을 피우느라고 기운을 다하여 풀썩 주저앉아 있다. 날씨는 찌뿌듯한데 이따금 숲 사이로 드러내는 保安이 엄격한 계룡대 건물들을 바라보며 간간히 뿌리는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아가니 계룡대 제2정문으로 내려가는 곳과 무상사로 가는 길, 그리고 맨재로 가는 삼거리에 다다랐다. 여기서 맨재가 있는 513봉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다면 험난한 길일 것이다. 맨재에 오르니 북쪽으로 계룡산 천왕봉은 구름에 가려 아예 보이지도 않고 그 아래 정도령이 계시는 머리봉도 머리만 조금 내밀고 있다. 머리봉에서 2001년 11월 종주한 용천령에서 뻗어내려 여기까지 당도한 산줄기가 흡사 용이 꿈틀거리는 것과 같다. 낮은 구름이 깔려있어 숫용추에서 飛龍이 昇天하려는 것만 같다. 서쪽으로는 구름장 사이로 언뜻언뜻 상월면 들판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맨재  아래로 최근 설립한 금강대학이 보인다. 동쪽으로는 우리가 올라온 금남정맥의 산줄기가 엎드려 있는데 상봉과 백운봉, 그리고 금남정맥의 산허리에 의해 庇護되는 계룡대는 역시 天下明堂임을 알겠다. 저기에 이성계가 도읍하려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500여 종교들의 본거지였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남쪽으로는 구름에 가려 향적산만이 겨우 보일락말락이지만 그 뒤로 구름의 베일에 가려진 수많은 連峰들이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3) 맨재-향적산 국사봉(+1=5km, +30=110분, 10:00-10:30)

여기서부터는 그저 우측의 황산벌과 좌측 천마산과 천호산으로 대둔산까지 이어지는 금남정맥을 眺望하며 마루금을 사뿐사뿐 밟으며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오늘은 구름에 가려 어렴풋하게 보이지도 않지만 그로인하여 그 신비감은 오히려 더한다. 가는 도중 마치 떡시루 4개를 엎어놓은 모습의 자연 돌탑을 만나고, 헬기장을 만나고, 장군바위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나고 그렇게 눈 맞춤하며 가니 TV송신탑을 아래에 거느린 향적산 국사봉 정상이다. 천왕봉이 845m인데 여기가 574m라니 近洞에서는 꽤 높은 편이다. 더구나 이곳에 영험한 뜻을 내포한 비석 2기가 서있어서 유명한데 그 하나는 오행비(五行碑)로 「五, 火, 聚, 一」의 네글자가 음각되어 있고, 또 하나는 천지창운비(天地創運碑)로「天鷄黃地, 佛, 南斗六星, 北斗七星」이란 글씨가 각각 새겨져 있다. 이 碑엔 한반도가 천년 이상 동방예의지국이 유지 되도록 하는 단군 성조의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이 비석은 일제 후반기에 평양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趙미양할머니가 국사봉에서 기도한 결과 묘향산 구월산에 깃든 단군성조의 얼이 이곳에 옮겨왔슴을 靈通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 후 8.15와 6.25를 정확히 예언하기도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수많은 정치인과 재벌들이 북새통을 이뤘다는데 1948년 할머니가 별세하자, 며느리 孫씨가 시어머니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 碑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전국의 巫俗人들이 모여 이 비석 앞에서 일 년에 두 번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정상의 바위에는 제사를 지낼 때 쳤던 천막을 지지하기 위한 기둥을 박기 위한 구멍이 여러개 나 있슴을 지금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상에 잠시 걸터앉아 구름 사이로 이따금 드러나는 인간세계를 내려다보니 神仙이라도 된 기분이다.

 

4) 국사봉-신명고개-윗산명재-아랫산명재-365봉(+70=180분, 10:30-11:40)

국사봉에서 그렇게 조미양할머니를 생각하며 황산성 8.7km란 표지판을 바라보며 나아가니 커다란 조망바위가 나타난다. 정상부가 워낙 가팔라서 오사장님이 오르기를 주저 하신다. 그러나 디딜 곳을 안내해드리니 오르셔서는 천하절경에 감탄 연발이다. 雲霧 가득한 공간에 둘이 서 있으니 空中浮揚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다. 지난번에 아내와 왔을 때 아내는 결국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조심하면 될 것을... 아내가 죽어라고 나를 따라다니는 이유가 이렇게 내가 너무 모험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아내의 말) 하지만 그러기에 아내는 지금까지 별다른 병치레가 없는지도 모른다.

 

5) 365봉-주산(308봉)-함지봉(+110=290분, 11:40-13:30)

이 곳 함지봉까지 오는 동안 약간 길을 헤매기도 하였다. 그러나 누군가 오솔길 양 옆으로 제초 작업을 해놓아서 금세 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대단한 정성이다. 이 먼 길을 제초작업을 해놓다니... 수많은 봉우리들이 있었지만 지난번의 [만인-식장]능선상의 봉우리들보다 높지는 않았고 그만큼 부드러운 솔잎 길을 밟으며 오사장님과 인생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산행을 할 수 있었다. 국사봉으로부터 여기까지 오는 길에는 패랭이꽃이며, 돌양지꽃, 자귀나무꽃등 야생화가 수를 놓고 있어서 고단한 다릿님을 가볍게 하여 주었다. 지난 번 한밭 수목원에서 패랭이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야생의 꽃을 보니 더욱 아름답고 어여쁘다. 색깔 또한 진하고 앙증맞다. 그러한 패랭이꽃이 지천으로 깔려 있어서 마치 天上花園을 걷는 느낌이다. 가며 보니 光州의 백계남씨란 분이 표시한 이정표식이 눈에 띄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초행길이어서 두렵기까지 하였는데 윗산명재에서부터 발견한 백선생님의 표식이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함지봉 정상에 安山에 사시는 김정길씨라는 분이 전국의 1500山을 순례한다며 매달아 놓은 표식이 있었는데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산을 좋아하는 분들이 계시기에 이 山河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6) 함지봉(386.5)-깃대봉(319)-황산성(+8.7=13.7km, +50=340분, 13:30-14:20)

함지를 엎어 놓은 듯 한 함지봉에 다다르기까지 몇 번의 소나기를 만났는데 간이우비를 둘러쓰고 쉬지 않고 전진한 덕에 몇 개의 가파른 小峰을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말짱하기도 하고 금세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고 굵은 빗줄기 뿌리기를 반복하였다. 함지봉을 넘어서니 드넓은 개활지가 펼쳐진다. 흡사 지난여름 아내와 갔던 덕유산 중봉평전에 온 듯 한 느낌이다. 그 너머로 왕건에 의하여 후백제군과의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명명했다는 天護山의 連峰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길게 드리우고 누워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 왔다. 그 산자락 아래 왕건은 기념으로 호국사찰 개태사를 개창하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삼국시대 때에는 백제와 신라의 接境地로 싸움이 잦았고 후백제 시대에는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맏아들 신검군과의 전쟁터였으니 이곳은 恨 많은 冤魂들이 떠도는 땅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저 황산벌은 황톳빛으로 물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는 그러한 원혼들을 달래려 이곳에 오백년 도읍을 세우려했는지도 모르겠다. (개태사 소개 : blog.naver.com/jcjkks/220917865172)

 

7) 황산성-약사암-연산사거리(+4.3=18km, +60=400분=6시간40분, 14:20-15:20)

계백 장군의 전설이 살아있는 황산성에 올라 주변을 살피니 과연 요충지임을 알겠다. 우측으로는 황산벌, 그리고 좌측으로는 신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한 계룡의 南陵이 50여리를 달리다 그 숨을 다하여 벌판에 가라앉은 그 끝자락에 이러한 城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의 형세였다. 여기서 계백을 비롯한 백제의 병사들은 그렇게 장렬하게 싸우다 죽어 갔으리라. 또한 어린 花郞 관창이 單騎匹馬로 이곳으로 뛰어 들었을 때 계백장군은 여기서 그를 살려 되돌려 보냈으리라. 그리하여 城이 함락되자 계백의 결사대는 한사람도 남김없이 장렬히 순직하였으리라.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몰래 계백의 시신을 거두어 저 너머 탑정 저수지 인근의 충곡리에 장사를 지냈으리라. 그러한 전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최근에야 계백의 무덤으로 재발견되어 유적지로 단장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想念에 잠겨 황산성을 내려오니 약사암이다. 그 암자의 보살님의 정성어린 접대에 오사장님이 기꺼이 금일봉을 내놓으신다. 천주교를 신봉하시는 분이 절에 금일봉을 내놓으시다니 오사장님이야말로 종교 간의 갈등이 심한 이 시대에 종교를 떠난 진정한 신앙인이 아닌가 싶다. 약사암 우측으로 가 황산성 안내판을 들여다보고 좌측의 임도를 따라 내려오니 갈 길이 끝 간데를 모르겠다. 차량 통행용 도로인 듯 한데 산허리를 돌고 도는 길이다. 오사장님이 장마철에 산에 온 죄로 하나님께서 지난번 [만인-식장]이 20km였는데 20km를 채워주시려나 보다고 중얼거리신다. 그렇게 도라지 꽃밭이 찬란한 관동리를 지나 연산읍에 오니 16:00어간이다.

 

8) 後記

연산에 왔으니 유명한 연산순대를 맛보고 싶어 물어물어 원조집을 찾았는데 맛이 별로이다. 그래도 막걸리 두 사발과 더불어 시장기를 달래고, 엄사리로 가기 위한 택시를 알아봐도 택시들은 길옆에 있는데 운전수가 행방불명이다. 할 수 없이 부처님같이 후덕한 모습의 어느 분께 사정을 하니 흔쾌히 태워다 주시겠다고 하신다. 이야기를 해 보니 그 분도 山을 워낙 좋아하는 분이었다. 계룡산, 천호산, 개태사에 얽힌 이성계와 왕건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니 그러한 이야기는 처음 들으신다며 오히려 고마워하신다. 謝禮를 하려 하니 손사래를 저으신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하시면서 후덕하신 웃음을 잃지 않으신다. 대전에 오시면 월평동의 사무실에 꼭 들으시라 당부 드렸다. 제발 점심 한 끼라도  접대할 기회를 달라하였다. 그렇게 즐거운 기분으로 계룡산 남부능선의 산행을 마감할 수 있었다.

 

배달 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7/15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산행사진 - 휴대폰 사진으로 선명치 못함-

 

1) 엄사리 청송약수터-맨재(4km, 80분, 08:40-10:00)

 

 

 

계룡시 엄사리 청송약수입구 (국사봉까지 5km,왕복 10km), (황산성까지 13.7km)

 

 

 

 

 

밋밋한 금남정맥의 허리를 오르면 맨재의능선이 보임

 

 

 

숫용추에서 용천령 그리고 맨재에 이르는 능선(구름에 가려진 곳이 상봉)

 

 

 

맨재 아래 삼거리, 국사봉1.56km 청송약수3.44km

 

 

 

맨재가 있는 513소봉으로 오르는 길

 

 

 

513소봉에서 바라본 지나온 길

 

 

 

513소봉에서 본 신도내 계룡대

 

 

 

513소봉에서 바라본 상봉은 운무에 가려있고 그 밑에 이어진 계룡남부 능선

 

 

 

513소봉에서 바라 본 상월면 금강대학

 

 

 

513소봉에서 금남정맥으로 내려가는 길

 

 

2) 맨재-향적산 국사봉(+1=5km, +30=110분, 10:00-10:30)

 

 

 

출입금지? 고압적? 산림보호요원?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 바로 주인?

 

 

 

4층 떡시루탑

 

 

 

그 앞에 서신 오늘의 동행인 오병관 사장님

 

 

 

홍두깨탑이 없으면 떡을 어찌 지으랴?

 

 

 

천황봉은 가지마라는 국사봉 아래의 표지판

 

 

 

조미양 할머니의 전설이 깃든 천지창운비가 건재한 국사봉

 

 

 

그 속의 일부이고져 서 있는 속세의 드난이

 

 

 

지난 번에도 있지 않았던 비석 - 이리하여 국사봉에는 비석이 3개?

 

 

 

여기서는 천왕봉을 가도 되고? 황산성이 8.7km

 

 

3) 국사봉-신명고개-윗산명재-아랫산명재-365봉(+70=180분, 10:30-11:40)

 

 

 

이러한 패랭이꽃밭이 천상화원을 이루었다.

 

 

 

디카를 가져오지 못한 후회

 

 

 

무섭지 않아요. 어서 올라오세요.

 

 

 

 

 

 

 

 

 

 

 

 

 

 

 

 

 

 

 

 

4) 365봉-주산(308봉)-함지봉(+110=290분, 11:40-13:30)

 

 

 

두견이를 부르는 자귀나무

 

 

 

모여든 두견이들은 붉게 물들고

 

 

 

지리산 세석평전인가? 그 너머로 천호산

 

 

 

드디어 나타난 엎어진 함지 - 사실 여기까지 이런 봉우리 10개는 넘은 것 같다.

 

 

 

이 패찰을 보고야 함지봉임을 알았다. 그런데 386.5m로 정정

 

 

 

뒤돌아 본 함지봉, 1500산을 오르다니 대단하시다.

 

 

5) 함지봉(386.5)-깃대봉(319)-황산성(+8.7=13.7km, +50=340분, 13:30-14:20)

 

 

 

 

 

 

 

광주 백계남씨! 이 분의 패찰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깃대봉을 내려와 뒤돌아 본 함지봉

 

 

 

그리고 깃대봉

 

 

 

마침내 황산성에 오르는 잡초 속의 썩어가는 나무 계단을 찾다.

 

 

 

이 성돌들에도 계백의 손때가 묻어 있을 터.

 

 

 

황산성에서 본 깃대봉과 함지봉

 

 

 

 

잡초만이 우거질대로 우거진 황산성내의 공터

 

 

6) 황산성-약사암-연산사거리(+4.3=18km, +60=400분=6시간40분, 14:20-15:20)

 

 

 

약사암에서 황산성에 오르는 길의 리기다소나무는 웬지 어울리지 않음.

 

 

 

그러나 한국홍송 두 그루 아래의 돌탑은 정겨워 보였다.

 

 

 

능선 너머의 왕건이 명명한 천호산

 

 

 

황산성 오르는 오솔길

 

 

 

노성산성과 더불어 사비성을 지키는 축이었다는 설명.

 

 

 

그러나 함지봉은 264m가 아니라 386m랍니다. 논산시 문화재과장님!

 

 

 

여기서 백계남씨 설명대로 96.5봉으로 가야 했는데 관동리로 향하여 고생.

 

 

 

관동리의 정겨운 도라지꽃밭과 참깨밭

 

 

 

 

계룡산 남부능선-엄사리 만운사 구간 종주 코스NAVER 희망찾기님의 글 (http://blog.naver.com/padam_padam/80009907100) [1코스] 고양리대나무밭-94.3고지-시루봉-황산성 2.5K/55분황산성-장대지-깃대봉-함지봉-향적산 국사봉 8.6K/2시간 50분향적산 국사봉-만운사/엄사중 4.5K/1시간총 15.6K / 휴식.중식 포함 6시간 [2코스] 연산향교-약사암-황산성 0.4K/10분황산성-장대지-깃대봉-함지봉-향적산 국사봉 8.6K/2시간50분 향적산 국사봉-만운사/엄사중 4.5K/1시간총 13.5K/휴식.중식 포함 5시간 *주요 지점 고도*1코스:고양리 대나무 밭(40M)-94.3고지-시루봉(230M)-황산성(246M)2코스:연산향교(70M)-약사암(160M)-황산성(246M)황산성(246M)-황산성 장대지(264M)-깃대봉(310.2M)-함지봉(386.5M)-366.2봉-아랫산명재(280M)-300봉-370봉-윗산명재(310M)-國事峰(436.5M)-452봉-500봉-농바위(532M)-향적산 國師峰(574.9M)-헬기장(450M)-460봉-헬기장(310M)-헬기장(350M)-340봉-330봉-헬기장(260M)-310봉-만운사(200M) *주요 구간별 소요시간*1코스:고양리대나무밭-1.5K/30분-시루봉-1K/25분-황산성2코스:연산향교-250M/5분-약사암-150M/5분-황산성황산성-0.2K/5분-황산성 장대지-0.6K/15분-깃대봉-1K/30분-함지봉-2.1K/15분-366.2봉-2.7K/1시간-국사봉-2K/45분-향적산 국사봉-4.5K/1시간-만운사/엄사중

 

 

 

 

 

 

 

 

 
 
  풀뿌리   황산성 [黃山城]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표정리에 있는 백제시대 성지(城址). 지정번호 충청남도기념물 제56호 지정연도 1985년 7월 19일 소장 국유 소재지 충남 논산시 연산면 표정리 산20 시대 백제시대 크기 둘레 870m 분류 성지(성곽) 1985년 7월 19일 충청남도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다. 둘레 870m이다. 백제의 웅진시대와 사비시대에 걸쳐 축성되었다. 해발 264m의 험준한 산자락에 위치한다. 북쪽은 적의 침입이 어려운 지형조건을 이용하여 자연석으로 축성하였고 나머지 지역에는 활석(滑石)을 사용하였다. 일명 황성(黃城)이라고도 불린다. 현재는 거의 허물어진 상태지만 동서남북에 문의 흔적이 있고 군량을 보관했던 군창지도 확인된다. 성 안에서 ‘황산인방(黃山寅方)’, ‘대안(大安)’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고 백제 특유의 삼족토기(三足土器)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고려시대 와편·자기편(磁器片)과 조선시대 백자편(白磁片)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시대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주변의 고분군(古墳群)과 함께 백제 말기 황산벌싸움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전면으로는 황령산성 깃대봉·산직리산성·모촌리산성·국사봉 등의 성지가 일직선상에 위치하여 신라군 침입을 막는 역할을 맡았고, 뒤편에 있는 이 산성은 본진(本陣)의 백제군 사령부가 있던 중요 성지로 추정된다.  2006/07/19 13:27:13  
     
     
 
  풀뿌리   황산벌싸움
660년(의자왕 20) 나당(羅唐)연합군이 쳐들어올 때 황산벌(논산시 연산면)에서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에 벌어진 싸움. 이 싸움은 백제가 멸망의 비운을 맞이한 싸움이었다. 당(唐)나라와 신라의 대군이 동서로부터 침입하여 당군은 백마강(白馬江) 북안에 상륙하고, 신라군은 탄현(炭峴)을 넘어 황산으로 밀려왔다. 이에 백제의 용장 계백(階伯)도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의 험조(險阻)한 곳을 택하여 진을 치고 신라군을 맞았다. 이때 계백은 백제가 위태로움을 미리 알아차리고 출전에 앞서 "살아서 적의 노비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이고 싸움에 임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사가 3방면으로 나누어 네 번의 치열한 공격을 가했으나 번번이 막아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계백도 전사하였다. 이때 신라의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이 용감히 전진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전사함으로써 전군의 사기를 북돋운 이야기는 유명하다.  2006/07/19 13:29:14  
     
     
 
  풀뿌리   계백 [階伯, ?~660]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르렀다.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강점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였다. 고립상태에 빠진 신라는 당(唐)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하였다. 당나라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신라를 돕게 하여, 이른바 나당 연합군의 5만 병력이 백제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백제의 의자왕은 사치와 연악(宴樂)에 파묻혀 충신들의 훌륭한 작전계획도 물리치고 있다가, 사태가 위급해지자 계백을 장군으로 삼아 적을 막도록 하였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면서, 이미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살아서 적의 노비(奴婢)가 됨은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여 비장한 결의를 보였다. 황산(黃山)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옛날에 구천(句踐)은 5,000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 70만 대군을 쳐부쉈으니 오늘날 마땅히 각자가 있는 힘을 다하여 최후의 결판을 내자”하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의 장군 품일(品日)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니, 관창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생포되었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으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예감하였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과 충곡서원(忠谷書院)에 배향되었다. 2006/07/19 14:36:53  
     
     
 
  풀뿌리   관창 [官昌, 645~660]
신라의 좌장군(左將軍)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어려서 화랑이 되어 널리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수련을 쌓았으며, 15세 때 이미 말 타고 활 쏘는 데 능하여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에게 천거되었는데, 왕은 그를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660년 신라가 당(唐)과 합세하여 백제를 칠 때 황산벌에서 신라군·백제군 사이에 대격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 중 관창은 단신 적군 속에 돌입하여 백제의 포로가 되었는데, 계백은 그 어린 소년의 용맹에 탄복하여 죽이지 않고 신라군에게로 돌려 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재차 적진에 돌입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다시 포로가 되었다. 계백은 그의 목을 벤 후 말안장에 매달아 신라군에게 돌려 보냈다. 신라군은 관창의 분전과 용기에 고무되어 모두 결사의 각오로 싸워 마침내 백제군을 대파하였다. 무열왕은 관창의 용전(勇戰)을 가상하여 급찬(級湌:신라 17관등 중의 제9등급)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2006/07/19 14:37:58  
     
     
 
  풀뿌리   개태사 [開泰寺]
대한불교법상종에 속한다. 936년(태조 19)에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神劍)을 무찌르고 삼국을 통일한 것을 기려 황산을 천호산이라 개칭하고 창건하였다. 그 후 조선조시대에는 퇴락하여 폐사로 있던 것을 1930년 김광영(金光榮)이 새로 짓고 도광사(道光寺)로 이름을 고쳤다가 다시 태광사(泰光寺)라고 하였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19호인 사지석불입상(寺址石佛立像), 충남민속자료 제1호인 개태사철확(鐵鑊), 충남문화재 자료제247호인 5층석탑과 제275호인 석조(石槽)가 있다. 예전에 이 절에서 쓰던 철확, 즉 큰 가마솥은 승려들의 식사를 위해 국을 끓이던 것으로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이다.  2006/07/19 14:44:00  
     
     
 
  풀뿌리   반굴 [盤屈, ?~660]
성 김씨. 경남 사량(沙梁) 출생. 660년(진평왕22) 7월 백제군과의 황산회전(黃山會戰)에서 아버지의 교훈에 따라 충효(忠孝)를 다할 것을 맹세하고,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분전 끝에 전사하였으나, 관창(官昌)과 함께 신라군의 사기를 높여 황산벌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2006/07/19 14:50:12  
     
     
 
  박원   풀뿌리님 산행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언제 한번 종주하고 싶군요.
사진은 폰카로 찍으신 것 같습니다. ㅎㅎ  2006/07/24 21:48:08  
     
     
 
  풀뿌리   언제든 미리 연락주시면 구름의 일어나고 스러짐을 보며, 풀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그 꽃들을 바라보며 가렵니다. 감사합니다. 배달 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7/25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6/07/25 14: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