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을 건립한 정조대왕은 과연 현명한 군주일까?
1. 탐방 계획
지난 금요일(2008/5/2)
동생 미술대전 보러 오신 어머니,
우리 집에서 쉬시다 오늘(2008/5/5) 歸鄕.
수원역으로 배웅 간 김에
아내와 오랫동안 벼르던 수원 화성 일주 계획.
2. 유산(遺産)
전체 둘레 5.74km(들고 나고 포함시 6km) 1시간 40분 소요.
내가 가 본 백제수도 공산성이 2.5km, 청주 상당산성이 4.2km이니
수원 화성의 규모가 만만치 않음을 알겠다.
[행궁주차장-서장대-화서문-장안문-동장대-화홍문-봉수대-팔달문-서장대]
팔달문 근처만 빼고 완벽하게 복원한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
그런데 한 번도 전쟁도 치루지 않고, 긴요하게 쓰이지도 않은
수원화성 공역을 왜 정조대왕 이산은 엄청난 경비를 들여 그리 고집스레 진행하였을까?
그리고 불과 2년여 만에
생각보다도 훨씬 드넓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성채를 완성한
정약용과 체재공, 조심태등의 기술이 놀랍다.
3. 정조는 과연 현명한 군주였을까?
실학과 중상주의가 대두하던 시대에
단지 孝라는 명분으로
지금 수원의 8km 남측에 있는 華山 아래의 수원읍성을 폐하고,
수많은 성읍민과 더불어 관아를
팔달산 아래에 막대한 국고를 들여 華城을 건립하여 옮기고,
양주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稜을
풍수상 명당이라는 수원읍성이 있던 華山으로 옮기는
엄청난 기획을 한
조선시대 현명한 군주 중의 한 명이라고 알려진 정조대왕.
당시엔 짧지 않은 거리인 수원까지
장대한 행렬을 이끌고 이동하며
유숙하고 군사훈련을 하고 팔달문을 통하여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행궁을 건립한
그의 행적은 과연 현명한 군주의 행위였을까?
아니면 일국의 군주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비명에 죽어간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려는
지극히 생산적이지도 않고
개인적인 목적달성만 추구한 독재자의 행위에 다름아닐까?
오늘날로 말하면 평화의 댐공사 같은 행위는 아니었을까?
그런 덕택에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의 그로인한 민초들의 고통은 어떠했을까?
그에 동참한 번암대감 체재공 또한 올바른 신하였을까?
조심태는 실무자로 차치하고라도
실학자로 알려진
정약용의 동참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
4. 華城 行宮
자료1)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둘레 5,744m, 길이 5,520m, 높이 4.9m~6.2m이며, 면적은 18만 8048㎡이다.
수원성은 단순히 토축(土築)된 읍성(邑城)이었으나,
조선 정조 때 성곽을 새로이 축조함으로써 이후로는 화성(華城)이라 하였다.
성내에 어목헌지(禦牧軒池)·관청전지(官廳前池)·문루전지(門樓前池)·객사후지(客舍後池)
등의 못이 있었다. 화성이라 할 때는 그 안에 장안문(長安門)·팔달문(八達門)·화홍문(華虹門)·
장악당(長樂堂), 북동(北東)·북서포루(北西砲樓), 봉수당(奉壽堂)·낙남헌(洛南軒)·서장대(西將臺)·
방화수유정(訪花隨柳亭)·강무당(講武堂)·북옹성(北甕城)·북포루(北鋪樓)·남암문(南暗門)·
적대(敵臺)·남옹성(南甕城)·만석거(萬石渠)·남장대(南將臺)·영화정(迎華亭)·창룡문(蒼龍門)·
남공심돈(南空心墩)·화서문(華西門)·남수문(南水門)·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북암문(北暗門)·
동북노대(東北弩臺)·서포루(西砲樓) 등을 갖추게 되었다.
정약용(丁若鏞)의 성설(城說)을 설계지침으로 하고,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조심태(趙心泰) 등의 진력으로 이룬, 뛰어난 과학적인 구조물이다.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크게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자료2)
원래 수원은 지금보다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산(華山) 아래가 그 중심이었으나,
정조에 의해 현재의 팔달산 아래로 계획적으로 옮겨졌다.
1799년 정조(正祖)는 자신의 생부(生父)
장헌세자(壯獻世子)의 원침(園寢)인 현륭원(顯隆園 : 후에 융릉으로 추증함)을
양주(楊洲) 배봉산(拜峰山)에서 현 위치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그 아래에 있던 읍치(邑治)와 민가들을 수원 팔달산(八達山) 아래로
집단 이전 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에 따라 현재의 수원화성은 1794년(정조 18)에 축성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에 준공되었다.
수원화성 건설의 계획자는 다산 정약용이었고,
공사 책임자는 당시 좌의정이었던 체재공이었다.
조선시대 성곽 중에서 화성은 구조물(構造物)을 가장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건축유산이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石材)와 전(塼)을 병용한 것,
그리고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뿐만 아니라
총포(銃砲)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
또한 용재(用材)를 규격화하여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에서
기존의 성곽을 혁신하는 새로운 것이었다.
성곽 전체길이는 5.52km이며,
동문으로 창룡문(蒼龍門), 서문으로 화서문(華西門),
남문으로 팔달문(八達門), 북문으로 장안문(長安門) 등 4대문을 내고
암문(暗門) 4개, 수문(水門) 2개, 적대(敵臺)4 개, 공심돈(空心墩) 3개,
봉돈, 포루(砲樓) 5개, 장대(將臺) 2개, 각루(角樓) 4개, 포루(鋪樓) 5개,
치성 10개 등의 다양한 구조물을 규모 있게 배치하였다.
그리고 팔달산 아래에는 행궁(行宮)을 지어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하는 임금이 일시 머물 수 있게 제반 시설을 갖추었다.
그런데 약 200여년이 지나는 동안 성곽이 퇴락되고 제반 구조물이 많이 무너졌다.
특히 한국전쟁을 통해 문루(門樓)가 파손되었지만,
1975년부터 5년간 복원(復元)하였다.
1997년 12월 4일 21차 세계유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팔달문]
화성의 남문(南門)인 팔달문(보물 402호)은
1794년에 화성의 축성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석축의 홍예(虹霓) 위에 중층(重層)의 우진각 지붕으로 된 문루가 있고,
문루 주위에 여장(女墻)을 둘러쌓았고,
전면에는 반원형(半圓形)의 옹성(甕城)을 쌓았고 옹성 좌우에는 적대(敵臺)가 있다.
축문방식(築門方式)은 서울의 남대문(南大門)이나 동대문(東大門)과 같으나,
다만 문루의 네 귀퉁이에 고주(高柱)를 세우지 않은 점이 약간 다르다.
문의 규모는 홍예의 높이가 3.17m , 너비 3.56m, 두께 6.4m이며,
문주는 정면이 9m(3칸), 측면이 3.6m(2칸)이다.
이 문은 다행히 한국전쟁 때에도 별로 큰 전화를 입지 않아
비교적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화서문]
화서문(華西門, 보물 403호)은 화성(華城)의 서문이다.
문의 제반 시설과 규모는 동쪽의 창룡(蒼龍)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문을 보호하는 옹성(甕城)도 동문옹성과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문루(門樓)는 홍예문 위에 단층으로 되어 있고
바깥쪽으로 벽돌로 쌓은 평여장(平女墻)이 설치되었다.
문의 안쪽편에는 수문청(守門廳)이 있었고,
문의 바깥쪽은 반원형의 옹성이 있어 굽어 드나들도록 되어 있다.
옹성은 모두 벽돌로 쌓고 현안 3개와
여장에 네모꼴 총혈(銃穴) 19개와 사혈(射穴) 6개가 뚫려 있다.
서북쪽에 있는 공심돈(空心墩)은 화서문과 같이 축조된 2층으로 된 망루(望樓)로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인데 이 같은 망루는 수원성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공심돈은 계단을 따라 위로 오를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하여 총안(銃眼)-포혈(砲穴)이 뚫려 있고,
위에는 단층의 목조누각을 만들어 총안이 뚫린 판문(板門)시설을 하여
원거리 목표물로부터 근거리의 목표물까지 한꺼번에 방어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성벽 아래로 접근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현안(懸眼)이 마련되어 있는 점에서 볼 때 치성(雉城)·적대(敵臺) 등과 기능이 동일하지만
성벽보다 위로 치솟았으므로 독특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자료3)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자료4)
수원화성의 성곽의 특징
화성의 성곽은 도심부 전체를 둘러쌓는 모양으로 길게 뻗어있습니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정상에서 각각 남북 산등성이를 따라 평탄한 곳으로 내려와서
다시 동쪽의 낮은 구릉으로 이어지면서 불규칙한 형태를 이룹니다.
이것은 조선시대 도성이나 지방 읍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성벽의 길이는 대략 5.4KM정도입니다.원래는 4.2km정도였는데 쌓고보니 더 커졌다는군요.
전체적인 모양은 버들잎 모양입니다.
다음 나머지 전체를 포하마한 방어시설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화성의 방어시설은 약 100m마다 설치되어있습니다.
성문은 4곳-창룡문(동),화서문(서),팔달문(남),장안문(북)
암문은 5곳-동,서,남,북암문과 서남암문
수문은 2곳-북수문(화홍문),남수문
적대는 4곳-북문의 동과 서,남문의 동과 서
장대는 2곳-서장대와 동장대
노대는 2곳-서노대,동북노대
공심돈은 3곳-서북공심돈,남공심돈,동북공심돈
봉돈은 1곳
각루는 4곳-동북각루(방화수류정), 서북각루, 서남각루(화양루),동남각루
포루(砲樓)는 5곳-북동포루,북서포루,서포루,남포루,동포루
포루(鋪樓)는 5곳-동북포루(각건대),서포루.북포루,동푸로,제2동포루
치성은 8곳-북동치,서1치,서2치,서3치,남치,동1치,동2치,동3치
포사는 3곳-중포사,내포사,서남암문포사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문은 일반적인 출입을 하는 성문과 암문,수문이 있는데 성문은 동서남북 네 군데에 존재하고,
암문은 모두 다섯군데로 적의눈에 잘 띄지 않는 후미진 곳에 만들어져있습니다.
개천 상류에서 물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곳에는 북수문이,밖으로 빠져나가는 곳에 남수문이 있지요.
대는 주로 높은 위치에서 적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습니다.
적대는 성문의 좌우에 놓입니다.
북문과 남문의 좌우에만 두었습니다.
장대는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거나 성 안팍을 관망하는 곳으로,
지대가 높은 곳이나 군사들을 모아 놓고 지휘하기에 좋은 넓은 곳에 세워졌습니다.
서장대는 팔달산 꼭대기에 있고
동장대는 동쪽 넓은 곳에 위치해서 군사를 훈련시키는 연방장구실을 합니다.
장대옆에는 노대라는 높은 대를 같이 세웠었는데
이곳에서는 명령에 따라 특정한 색깔의 깃발을 흔들어 명령을 전하기도 하고
또 쇠뇌라는 큰 화살을 날리기도 했습니다.
돈은 대와 비슷한 시설인데 주변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세우고
대포와 같은 공격용 시설을 두거나 주변을 감시하는 망루를 두었습니다.
공심돈은 망루와 같은 것이고,
봉돈은 봉화불을 피우는 일종의 굴뚝입니다.
봉돈은 서해안에서 오는 횃불 신호를 받아 용인으로 전달하기 편리하게 성 동쪽에 세워졌습니다.
각루는 성곽 가운데 주변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곳,
즉 성밖의 동태를 잘 감시할 수 있는 요충지에 세워졌습니다.
특히 동북각루는 용연 바로 위 연못과 바위가 어우러진 곳에 세워져
경치를 감상하기에도 매우 좋아서 따로 방화수류정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서남각루는 화양류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 각루가 있는 곳은 성곽의 바깥입니다.
화양루가 있는 곳은 지세가 우뚝하고 좁아서 만약 이곳을 적에게 내주게 되면
성안을 공격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성벽에 암문(서남암문)을 만들고,
암문 밖으로 좁고 긴 통로를 만들어 그 끝에 각루를 별도로 세웠습니다.
이 통로를 용도라고 합니다.
포루(砲樓)는 돌출시킨 성벽의 내부에서 적을 공격하도록 한 군사 시설물입니다.
내부에 3개 층의 공간으로 나누고 각 층에 군사를 머물게 했는데
특히 3층에는 불랑기를 설치해서 포를 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포루(鋪樓)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몸을 숨길 수 있도록 지은 집입니다.
치성은 성벽을 돌출시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만든 시설인데,
치성 가운데에서도 중요한 위치마다 포루를 세웠습니다.
또 공격시설없이 단지 군사가 머무르는 집을 포사(鋪舍)라고 합니다.
성벽에 매복한 군사가 포를 쏘아 신호를 하면 성안 포사에 있는 군사는
깃발이나 포로써 그 신호를 성안 사람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포사는 성내 가운데에 중포사를, 서남암문 위에 서남암문포사를,
화성행궁 뒷담 안쪽에 내포사가 있습니다.
화성에 설치된 시설물들은 장대나 포루, 치성처럼
이미 기존 성곽에서 부분적으로 설치되었던 것들도 있지만
적대와 공심돈처럼 종전엔 한번도 설치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여러 군사 시설들이 하나의 성곽안에
그것도 매우 촘촘히 갖추어졌다는 점은 화성만이 지닌 가장 큰 특징입니다.
배달9205/개천5906/단기4341/서기2008/5/12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1. 서노대, 서장대
2. 서장대 해설
3. 서노대에서 본 서장대
4. 서장대에서 화서문 방향으로 내림.
5.
6.
7. 아래는 근무군인들의 온돌방
8. 화서문
9.
10. 화서문에서 뒤돌아 봄
11.
12.에서 장안문 방향
13. 장엄한 장안문
14. 장안문에서 뒤돌아 본 팔달산 서장대
15. 화홍문
16. 동장대(연무대)
17. 연무대 앞의 안내도
18. 창룡문
19. 봉돈
20. 남수문
21. 팔달문
영조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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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뿌리 | | 영조 [英祖, 1694~1776]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 탕평정책을 시행하여 붕당의 대립을 완화하였고 여러 차례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렸다.
《농가집성》을 보급하고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계천을 준설하고 신문고를 설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재위 1724년~1776년
왕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정순왕후(貞純王后) 아버지 숙종(肅宗) 어머니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 (諱) 금(昑). 자 광숙(光叔).
숙종이 양성(養性)이라는 헌호(軒號)를 내렸다. 숙종의 2남으로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 1699년(숙종 25) 6세 때
연잉군(延礽 君)에 봉해지고, 172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1704년(숙종 30) 10세 때 맞은 군수 서종제(徐宗悌)의 딸이 첫 왕비
정성왕후(貞聖王后)이고, 1757년(영조 33) 왕후의 승하로 1759년에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를 계비로 맞았다. 1721년
왕세제 책봉은 경종이 숙종을 이어 즉위한 그 해에 정언 이정소(李廷熽)가 왕이 건강이 좋지 않고 아들이 없는 것을 이유로 그를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먼저발의하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중추부판사 조태채(趙泰采), 중추부영사
이이명(李頤命) 등 이른바 노론 4대신들이 인원왕후(仁元王后) 김대비(숙종의 계비)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소론측은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를 필두로 시기상조론을 펴 반대했으나 노론의 뜻대로 책봉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후 노론이
대리청정으로까지 몰아가자 소론이 역공의 명분을 얻어 이 일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보냈다(신축옥사). 이듬해
1722년에 소론은 기세를 모아 영수 김일경(金一鏡) 등이 남인 목호룡(睦虎龍) 등을 시켜 노론이 삼수역(三守逆: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3가지 방법)까지 꾸며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고 주장하여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 명을 처형, 170여 명을 유배 또는 치죄
하였다(임인옥사). 옥안(獄案)에는 왕세제도 혐의가 있는 것으로 기록하여 왕세제가 김대비에게 사위(辭位)도 불사하겠다고 호소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나 1724년에 경종이 승하하여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2008/06/30 13:14:50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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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뿌리 | |
노론과 소론 사이의 치열한 정쟁 속에 즉위한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즉위와 동시에 당습(黨習)의 폐해를 하교(下敎)하는 한편, 신임옥사(辛壬獄事)를 일으킨 소론 과격파를 축출, 노론을 불러들
이는 조치를 내렸다(을사처분). 그러나 노론 내 강경파인 준론자(峻論者)들이 소론에 대한 공격을 일삼자 1727년에 이들을 축출하였다.
이 무렵 그는 붕당이 아니라 국왕이 명실상부하게 정국을 주도하여야 요 ·순의 시대처럼 탕탕평평의 치세가 실현될 수 있다는 왕정관
을 명백히 표시하면서 이에 따르는 자들만을 등용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729년에는 노론 ·소론 가운데 자신의 탕평책
을 따르는 온건파, 즉 완론자(緩論者)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기유처분). 이 때는 노론 ·소론 사이에 균형
을 맞추는 이른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인사정책을 폈으나 점차 유재시용(惟才是用), 즉 능력 위주로 전환해 가면서 왕권을 지지하는
탕평세력을 구축해 갔다. 1728년에 소론 ·남인 등의 일부 과격한 분자들이 영조의 왕위 자체를 부정하는 반란(이인좌의 난)을 일으킨
것이 이러한 새로운 체제 확립의 결단을 더 앞당겨 주었으며 탕평정국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1741년에 이조전랑(吏曹銓郞) 통청
법(通淸法)을 혁파하였다. 이조전랑이 삼사(三司)의 언관들의 인사권을 장악한 제도는 언관들의 언론권을 대신들의 영향으로부터 독립
시키면서 활성화하는 의도 아래 시작되어 붕당정치의 맥점을 이루던 것이었으나, 이 무렵에는 이미 자파 세력강화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어 붕당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혁파조치가 불가피하였다. 탕평론은 요 ·순 임금의 경지를 이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주
스스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노력을 최대로 기울여야 하는 조건을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조는 학식있는 신하들과 강론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을 재위 52년간 무려 3,458회를 열었다. 연평균 66회에 달하는 이 횟수는 조선일대에 최다 기록이었다. 그는 학문적으로 특히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 1758년에 성균관을 방문한 것을 기념해 《대학》에 〈어제서(御製序)〉를 붙였다.
1746년에 《자성편(自省編)》을 지은 것을 비롯해 《정훈(政訓)》(1749) 《대훈(大訓)》(1755) 《경세문답(警世問答)》(1762) 《경세편
(警世編)》(1764) 《표의록(表義錄)》(1764) 《백행록(百行錄)》(1765) 등 후세 왕들을 위해 왕자가 걸어야 할 길을 밝히는 저술들을
다수 남겼다. 2008/06/30 13:16:13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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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스스로 검약 ·절제의 생활로 일관하는 한편, 재위중에 여러 차례 금주령과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렸다.
요 ·순의 치세를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탕평정치는 민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여러 가지 폐단들을 고치는 개혁
적 조치들을 많이 단행했다. 먼저 양반관리, 사족들이 백성들에 대해 사형(私刑)을 많이 행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
여 형정을 쇄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이 취해졌다. 1725년에 압슬형(壓膝刑), 1732년에 낙형(烙刑)을 각각 폐지
하고, 1740년에는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형벌[刺字]을 금지하였다. 1743년에 《수교집록(受敎輯錄)》을 속편하고 이
듬해에 이를 발전시켜 《속대전(續大典)》을 《속오례의(續五禮儀)》와 함께 편찬한 것은 왕조의 법치체계 전반을
재정비하는 의미를 가졌다. 농업정책과 수취제도의 개선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734년에 농정의 기본방향을 잡기
위해 세종조에 민을 이끌어 농사에 힘쓰게 한 성의를 관리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농가집성(農家集成)》을 대량 인쇄
하여 보급하고, 1748년에는 세입 ·세출 제도의 확립을 목적으로 《탁지정례(度支定例)》를 편찬하고, 1750년 7월에는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여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양역 변통의 논의를 종결지었다. 일반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양역(군역)조의 납포량을 일률적으로 1필을 감하고 어염세 ·결전세(結田稅) 등을 부과해 결손을 채우게 했다. 1774년
에 노비 신공(身貢)을 전면 혁파한 것도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되었다. 영조의 삼대 치적으로는 탕평 ·균역 외에 준천
(濬川), 즉 청계천(淸溪川)을 준설한 것이 꼽힌다. 도성 가운데를 흐르는 개천을 오랫동안 준설하지 않아 홍수 때 범람
이 잦아 1760년에 준천사(濬川司)를 세우고, 수만금을 출연하여 인부를 사서 흙을 파내는 대역사를 진행시켰다. 1773년
6월에는 개천의 양변을 돌로 쌓아 흙이 내려가지 않도록 하였다.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변란시 도성을 버리고 다른 곳
으로 피난하지 않고 도성민과 함께 지킨다는 전략을 새로 세워 1745년에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3군문이 도성
을 분담하여 보수 관리하게 하고 1751년 9월에 수성윤음(守城綸音)을 내려 도성의 5부 방민이 유사시 삼군문 지휘 아래
방어할 구역을 분담하여 실제 훈련을 하기도 하였다. 왕조 초기의 오위(五衛)제도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지고 1742년에
《병장도설(兵將圖說)》을 편찬한 이래, 5군영의 병권을 병조판서 아래로 귀일시켜 왕권을 뒷받침하도록 하는 체제를
꾀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8/06/30 13:17:01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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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보고, 듣기 위해 재위 25년째 이 후 50여 회나 궁성을 나와 거리 행차를 하였으며, 1773년에는
경희궁 건명문(建明門)에 신문고를 달게 하였다. 같은 해 2월 세손의 건의를 받아들여 양로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1740년에 개성부 행차 때 정몽주의 충절을 기려 선죽교에 비석을 세운 것을 비롯해 역사상의 충신들에 대한 추존사업을
크게 벌였으며 1771년 10월에는 왕조의 시조묘가 없는 사실을 깨닫고 전주 경기전에 조경묘(肇慶廟)를 건립하게 했다.
1770년 정월 편집청(編輯廳)을 설치하여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할 때 상위고(象緯考) 편찬 단계에서
(4월) 세종조의 측우기 만드는 법을 터득하여 호조에 명해 양궐 및 서운관에 만들어 설치하게 하는 한편, 양도(兩都)
·팔도에 분송하여 매번 비가 올 때마다 강우량의 척촌(尺寸)을 재서 보고하게 했다. 학교고(學校考)를 편찬하는 순서
(6월)에서는 주(州) ·부(府) ·군(郡) ·학에 6현(賢)을 함께 배향하게 하고, 형고(刑考)를 만드는 순서에서는 포도청
에서의 난장(亂杖)을 금하는 명을 내렸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의 편찬사업의 목적이 정사의 개선에 있었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탕평정책으로 붕당의 대립과 벌열의 발호를 크게 억제하였으나 꺼지지 않은 불씨들이 있었다. 1755년에 을사
처분(乙巳處分)으로 귀양간 윤지(尹志) 등이 나주 괘서사건을 일으켜 정국이 소용돌이쳤으며, 1762년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벌열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였다. 2008/06/30 13:17:46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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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뿌리 | | 정순왕후 [貞純王后, 1745~1805]
조선 제21대 영조의 계비.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해 비변사 ·관찰사
· 수령 등 통치 질서의 확립을 강조했다. 본관 경주(慶州). 성 김(金).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한구(漢耉)의 딸.
정식 칭호는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소숙정헌정순왕후김씨(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昭
肅靖憲貞純王后金氏)이며, 정순이 시호이다. 영조비 정성왕후(貞盛王后)가 죽자 1759년(영조 35) 15세로 51세 연상인
영조와 결혼하여 왕비로 책봉되었다. 친정이 노론의 중심가문이었음에 비해 사도세자는 소론에 기울어져 노론에게
비판적이었고, 그 내외가 어머니뻘인 자기보다 10세나 연상인 데서 빚어지는 갈등 때문에 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오빠 김구주(金龜柱)가 이끄는 세력이 영조 말년에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洪鳳漢) 중심세력과 맞서고, 친정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벽파(僻派)가 정조대에 시파(時派)와
대립하는 데 중요한 정치적 배경이 되었다. 1800년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신료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수렴청
정을 실시하였는데, 스스로 여자국왕[女主 ·女君]을 칭하고 신하들도 그의 신하임을 공언하는 등 실질적으로 국왕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행사하였다.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
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때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 인(恩彦君)과
정조의 친모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 등은 처형되었다. 다음해에는 격렬한 천주교 탄압을 일으켜
정약용(丁若鏞) 등의 남인(南人)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질서를
부정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친정인물인 김관주(金觀柱) ·김일주(金日柱) ·김용주(金龍柱) 및 영의정 심환지(沈煥之) 등
이 뒷받침하였다. 일반 국정에서는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해 비변사 ·관찰사 ·수령으로 이어지는 통치질서의 확립을 강조
하였다. 그러나 시파 김조순(金祖淳)이 벽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결정대로 딸을 순조(純祖)의 비로 들여 국왕의
장인이 된 상황에서 1803년 12월에 수렴청정을 그치게 되자, 정세가 바뀌어 벽파가 조정에서 숙청되고 친정인물들도 대부
분 도태되었다. 능호는 원릉(元陵)이다. 2008/06/30 13:42:40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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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뿌리 | | 혜경궁홍씨 헌경왕후 [獻敬王后, 1735~1815]
조선 영조의 아들 장조(莊祖:사도세자)의 비(妃)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자신의 일생을 회고한 기록 《한중록》
은 궁중문학의 대표작이다. 본관 풍산(豐山).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영조 20)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고, 1762년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 아들 정
조가 즉위하자 궁호(宮號)도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1815년 12월(순조 15) 서거한 후에 이듬해 헌경이라는 시호
를 받고 사도세자의 현륭원에 합봉되었다. 1899년(고종 36)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의황후(懿皇后)에
추존되었다. 저서 《한중록(閑中錄)》은 사도세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일생을 회고한 기록으로 궁중문학의
대표작이다. 2008/06/30 13:45:03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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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뿌리 | | 장조 [莊祖, 1735~1762]
조선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로 영조의 노여움을 사 뒤주 속에서 죽었다. 아들 정조가 장헌(莊獻)으로 상시(上諡)
하고, 1899년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追尊)되었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선(李煊), 자는 윤관(允寬), 호
는 의재(毅齋)이다. 조선 후기 영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영빈(映嬪) 이씨(李氏)이며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洪鳳
漢)의 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 후에 진종(眞宗)으로 추존됨]가 일찍 죽고 난
후 태어난지 1년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0세에 혜경궁 홍씨와 결혼하였다. 어려서는 학문을 열심히 하여 자신이
지은 시문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아주 총명하였다. 세자 시절에는 소론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0세 때는 경종 때 발생한 신임옥사(辛壬獄事) 사건을 노론들이 잘못 처결하였다고 비판하여 일찍부터 노론의 미움을
받을 빌미를 제공하였다. 1749년(영조 25) 15세가 되던 해 영조의 명을 받고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되었을 때 세자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경우 이미 정권을 장악한 자신들의 입지가 위축될 것을 우려한 노론들은 정순왕후(貞純
王后) 김씨와 함께 그의 잘못을 영조에게 과대포장하여 무고하는 등 세자의 지위에서 끌어 내리고자 하였다. 아버지
영조를 무서워한 그는 궁궐 내에서 칼을 휘두르고, 함부로 궁녀를 죽이는가 하면,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갔다
오는 등 정신질환과 같은 비정상적인 행보를 계속하였다. 이후 1762년 김한구(金漢耉)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洪啓禧)·
윤급(尹汲) 등은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크게 세력을 떨치자 그 일파를 몰아내고 세자를 폐위시키고자
윤급의 종 나경언(羅景彦)을 사주하여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영조에 올리도록 하였다(나경언의 상변). 이 일로 인해
세자의 비행을 올린 나경언을 참형에 처하고, 영조는 세자를 불러 조목조목 다그치고 자결할 것을 명하였으며, 세자
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만에 굶어죽게 하였다. 이후 영조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그에게 사도(思悼)의 시호를 내렸으며, 1777년(정조 1) 그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올라 장헌(莊獻)으로
추존하고, 묘(廟:사당)를 경모궁, 묘(墓)를 영우원이라 하였다. 정조는 동대문구 배봉산에 있던 묘를 수원으로 옮겨
영우원을 현륭원(顯隆園)이라 고쳤고, 자주 능행을 하면서 백성들에게 효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광무(光武)
3년(1899)에는 장조(莊祖)로 추존되었으며, 현륭원을 융릉(隆陵)이라 고쳤다. 2008/06/30 13:47:28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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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뿌리 | | 나경언의 상변
1762년(영조 38) 나경언이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변한 사건. 나경언은 액정국별감(掖庭局別監)
나상언(羅尙彦)의 형으로, 형조판서 윤급(尹汲)의 청지기였다. 그는 장헌세자가 그의 빈(嬪)인 혜경궁(惠慶宮) 홍씨
(洪氏)를 죽이려 했고, 비구니를 궁중에 끌어들여 풍기를 어지럽혔으며, 부왕의 허락도 없이 평양으로 몰래 놀러다
녔고, 북성(北城)에 마음대로 나가 돌아다닌 일 등 10여 가지 비행을 들어 형조에 고변하였다. 이 고변으로 영조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되자, 세자에게는 물론 세자의 비행을 알면서도 왕에게 고하지 않은 신하
들에 대해서까지 격노하고 문책하였다. 이에 대해 세자는 나경언과의 면질(面質)을 요구했으나 부왕의 꾸지람만 받았
을 뿐이다. 나중에 세자가 포도청(捕盜廳)을 통해 나경언의 가족을 심문해 본 결과, 나경언은 우의정 윤동도(尹東度)
의 아들 광유(光裕)의 사주를 받아서 고변한 것임이 드러났다. 당시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파
(時派)·벽파(僻派)의 싸움이 있었고, 그 중에 벽파는 세자를 배척하는 파였다. 그러므로 나경언의 고변의 배후에는
벽파의 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자신이 모르는 세자의 비행을 알려준 나경언을 충직한 사람으로 보아 그를 살려
주려 했으나, 남태제(南泰濟)·홍낙순(洪樂純) 등이 나경언을 세자를 모함한 대역죄인으로 극론했기 때문에 결국 처형
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자의 비행 문제는 그것으로 종결되지 않았고 다시 확대되어 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게 되는 사건
으로 진전되었다. 2008/06/30 13:50:38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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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뿌리 | | 정조 [正祖, 1752~1800]
조선 제22대 왕(재위 1776~1800).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다. 전제(田制)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규장각 제도를 일
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재위 1776년~1800년 왕비 효의왕후(孝懿王后) 아버지 장조(莊祖)
어머니 헌경왕후(獻敬王后) 이름 산(祘). 자 형운(亨運). 호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
世子:思悼世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惠嬪)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해 5월에 아버
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1775년(영조 51) 12월 노병이 깊어진 국왕이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이 이를 방해하여 조정이 한때 크게 긴장하였다.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 기대를 모을 위치였
으나, 탐포하고 무지한 그를 세손이 비천하게 여겨 멀리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로서
어미와 함께 권세를 부리던 정후겸(鄭厚謙)에게 붙어 세손의 적당이 되었다. 홍인한은 세손을 고립시키기 위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궁료 홍국영(洪國榮)·정민시(鄭民始) 등을 참소하기까지 했으나 세손이 이를 듣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손이 대청(代聽)의 명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를 극력 반대하면서 대청을 명하는
왕의 하교를 받아쓰려는 승지를 몸으로 가로막기까지 했다. 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
왕비를 왕대비로 올리면서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도 진종
(眞宗)대왕으로 추숭하고, 효장묘도 영릉(永陵)으로 격을 높였다. 그 다음에 생부의 존호도 장헌세자로 높이고,
묘소도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고 경모궁(慶慕宮)이라는 묘호(廟號)를 내렸다. 자신의
왕통에 관한 정리를 이렇게 마친 다음 곧 홍인한·정후겸 등을 사사(賜死)하고 그 무리 70여 명을 처벌하면서
《명의록(明義錄)》을 지어 그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밝혔다. 즉위와 동시에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
기고 규장각(奎章閣) 제도를 시행하여 후원에 그 본각인 주합루(宙合樓)와 여러 서고 건물들을 지어 문치의 왕
정을 펼 준비를 다졌다. 2008/06/30 14:15:49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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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뿌리 | | 세손 때부터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로
자신을 도운 홍국영을 도승지로 임명하고, 숙위소 대장도 겸하게 하여 측근으로 크게 신임하였다. 그러나 홍
국영이 1779년에 누이 원빈(元嬪)이 갑자기 죽은 후 권력 유지에 급급하여 종통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여
그를 내쫓고 정사를 직접 주재하기 시작했다. 그 후 재위 5년째인 1781년,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
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각신(閣臣)들은 이때부터 문한의 요직들을 겸하면서 조정의 문신들의 재교육 기회인
초계문신(抄啓文臣) 강제(講製)도 주관하였다. 이 제도는 조정의 37세 이하 문신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들
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그 성과를 시험을 통해 확인하여 임용 승진의 자료로 삼고자 한 것으로 규장각이
이를 주관하게 하여 왕정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신하들을 확대해 나갔다. 근 20년간 10회 시행하여 100여
명을 배출하였다. 무반의 요직인 선전관(宣傳官) 강시(講試)제도도 함께 시행하여 1783년의 장용위(壯勇衛),
1791년의 장용영(壯勇營) 등 친위군영 창설, 운영의 기초로 삼았다. 정조는 숙종·영조의 탕평론을 이어받아
왕정체제를 강화하여 진정한 위민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1784년에 지은 《황극편(皇極編)》을 통해 주자·
율곡의 시대에는 붕당정치가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을 구분하여 전자가 우세한 정치를 꾀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각 붕당 안에 군자·소인이 뒤섞여 오히려 붕당을 깨서 군자들을 당에서 끌어내어 왕정을 직접
보필하는 신하로 만드는 것이 나라를 위해 더 필요하다고 논파하였으며, 편전의 이름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
室)이라고 하여 이를 실현시킬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재위 21년째인 1797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
明月主人翁自序)》에서 백성을 만천에 비유하고,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명월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
라고 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닿는 지고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을 정리해 보였다. 2008/06/30 14:16:53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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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뿌리 | |
그는 만천에 비치는 밝은 달이 되기 위해 선왕 영조 때부터 시작된 궁성 밖 행차뿐만 아니라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으로 나와 많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만들었다. 100회 이상을 기록한 행차는 단순한 참
배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하는 기회로도 활용하였다. 그는 재위 3년째에 상언(上言)·격쟁(擊錚)
의 제도에 붙어 있던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능행(陵行) 중에 그것들을 접수하도록 하였다. 《일성록(日省錄)》과 실록에 실린 상언·격쟁의
건수만도 5,000건을 넘는다. 재위 13년째인 1789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소(園所)를 수원으로 옮긴 뒤로는 능
행의 범위가 한강 남쪽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그는 수원도호부 자리에 새 원소를 만들어 현륭원(顯隆園)이라 하
고 수원부는 화성(華城)을 새로 쌓아 옮기고, 이곳에 행궁과 장용영 외영을 두었다.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
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만들었는데 그 횟수가 10회를 넘었다. 재위 9년에 경강(京江), 즉 한강의 상인들 소유
의 배를 편대하여 각 창(倉)별로 분속시켰는데 14년에 주교사(舟橋司)를 세워 그 배들을 이에 소속시켜 전라도 조
세 운송권의 일부를 주면서 행차 때 배다리를 만들게 했다. 정조는 재위 2년째인 1777년에 대고(大誥)의 형식으로
자신이 펼 왕정의 중요 분야를 민산(民産)·인재(人才)·융정(戎政)·재용(財用) 등 4개 분야로 크게 나누어 제시
했다. 민산을 일으키기 위해 민은(民隱), 즉 민의 폐막부터 없애야 한다는 신념 아래 즉위 직후 각 전궁(殿宮)의
공선정례(貢膳定例)를 고쳐 궁방의 법외 납수분을 호조로 돌리고 궁방전의 세납도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
하고 본읍에서 거두어 호조에 직납하도록 바꾸어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그리고 2년에는 내수사(內需司) 도망
노비를 추쇄하는 관직을 혁파하였다. 이렇게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인 다음에 감사·수령들로 하여금 민은을 살피는
행정을 강화하도록 하는 한편 어사 파견을 자주하여 악법을 잘라내고 무고를 펴도록 하였다. 심지어 지방의 상급
향리들까지 소견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직접 물었다. 2008/06/30 14:18:09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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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산의 대본인 농업 발전을 위해 여러 차례 응지(應旨) 상소의 기회를 만들고 생산력 증대에 관한 많은 의견들을
수렴해 보급에 힘썼다. 측우기와 점풍간(占風竿)을 설치하여 세정의 합리화를 꾀했으며 진휼을 위해 여러 차례 내
탕(內帑)을 출연했다. 1782년에 서운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달력을 계산하여 천세력(千歲曆)을
미리 편찬·간행하게 했다. 민산은 경계(經界)에서 비롯한다는 견지에서 전제(田制)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
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으나 치세 중에는 실현을 보지 못했다. 도시로 모여든 이농인구가 중소상인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1791년에 이른바 신해통공(辛亥通共)의 조치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없애 상업활동의 기회를
균등히 했다. 백성들이 부당한 형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영조 때 시작된 형정의 쇄신을 계승하여 재위
2년째에 형방승지를 의금부 형조 등에 급파하여 기준을 어긴 형구(刑具)의 실태를 조사해 이를 고치게 하고, 그
기준을 《흠휼전칙(欽恤典則)》에 실어 각도에 배포하였다. 책에 실은 자의 길이와 같은 유척(鍮尺)을 만들어 함
께 보내면서 준수를 엄명하고 어사들로 하여금 이를 자주 확인하게 하였다. 재위 7년부터는 의금부와 형조 등의
결옥안(決獄案)을 초록하여 매월 말에 보고하게 하고, 4분기마다 책자를 만들어 왕에게 올리도록 하였다. 사형수
의 결옥안은 밤을 새워가면서 10번이나 확인하여 억울함이 없도록 힘썼다. 그 심의 기록이 《심리록(審理錄)》이
라는 책자로 전한다. 9년째 되던 해에는 역대 법전들을 모아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하여 법치의 기반을
다졌다. 인재의 양성을 위해서는 초계문신 문강(文講), 선전관 무강(武講) 제도를 시행하는 한편, 성균관 월과
(月課:월별 수강과목 지정)제도를 시행하고, 유생들이 관내에 상주하면서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 사찰 승려들의
회식제도를 도입하여 식당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2008/06/30 14:18:47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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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으며, 만년에는 각도에서
행해지는 소과(小科:흔히 道科라고 불렸다)도 혁신하고자 주나라의 고사를 빌려 빈흥과(賓興科)로 이름을 고쳐 시행
했다. 빈흥과는 국왕이 직접 출제하여 이것을 규장각신이 가지고 현지에 내려가 과장에서 개봉·게시하고 답안지를
거두어 규장각에 가지고 와서 국왕의 주관 아래 채점하여 합격자를 발표하도록 하였다. 각 지역별 성과를 〈경림문희
록(瓊林聞喜錄:한성부, 1792)〉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영남, 93)〉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강원도, 1794)〉
〈탐라빈흥록(耽羅賓興錄:제주도, 1795)〉 〈풍패빈흥록(豊沛賓興錄:함흥, 1795)〉 〈관북관서빈흥록(關北關西賓興錄:함경
·평안도, 1800)〉 등으로 각각 간행하여 도과(道科:소과의 별칭)의 새로운 전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무과에서도 몇 차례의
경과(慶科)를 통해 다수의 출신(出身)들을 배출하면서 《병학통(兵學通, 9년)》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14년)》 등
정예병 양성에 필요한 병서들을 편찬하여 보급했다. 융정으로는 기존 5군영보다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중심으로 병력을 강화
하고 서해의 해방(海防)을 위해 교동의 통어영(統禦營)과 강화도 경영에 힘썼다. 재용면에서는 중앙 각 관서와 군영의 보유
양곡수를 조사하여 《곡부합록(穀簿合錄)》, 환곡행정의 전국적 현황을 조사하여 《곡총편고(穀總便考)》, 전세 징수의 기본
상황을 파악하여 《탁지전부고(度支田賦考)》를 각각 편찬하여 재정의 혁신을 위한 준비를 하였고, 실제로 각 관서간의 급대
(給代) 관계의 개선을 통해 각 계층의 부당한 부담들이 경감되는 추세를 보였다. 재위 중에 치세의 방향 모색과 관련하여 규
장각을 통해 어정(御定)·어명(御命)으로 저술사업을 벌여 근 150종의 신저술들이 이루어졌다. 문장에 관한 것으로 《사원영
화(詞苑英華)》, 《시악화성(詩樂和聲)》, 《팔자백선(八子百選)》 등 다수, 경학에 관한 것으로 《경서정문(經書正文)》,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 등, 사서로 《송사전(宋史筌:72)》, 《사기영선(史記英選:95)》 등, 유가서로 《주서백선
(朱書百選)》, 불서로 《범우고(梵宇考)》, 지리서로 《도리총고(道里摠攷)》, 축성서로 《성제도설(城制圖設)》, 왕조의
의례관계로 《속오례의(續五禮儀)》 등 수다한 저술이 이루어졌다. 2008/06/30 14:19:41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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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 영조 때 한국의 제도문물의 내력을 쉽게 알아보기 위해 편찬한 《동국문헌비고》를 크게 증보하여 《증보동국문헌비고
(增補東國文獻備考)》를 만들고, 1782년에는 역대 선왕들의 치적을 담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완하였다. 보감은 세조
때 태조·태종·세종·문종 4조의 것을 편찬한 이후 숙종 때 《선조보감》, 영조 때 《숙묘보감》을 편찬하는 데 그쳐 그
사이에 12조의 보감이 궐문이었는데 이를 보충하고 《영조보감》을 새로 만들어 합쳐 1768권으로 완성시켰다. 1784년에는
보감을 종류별로 재편집하여 《갱장록》이라고 하였다. 1781년에 강화도 외규장각을 설치하여 역대 왕실의 의궤들의 원본을
안치하여 영구보전을 꾀하였다. 비단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의 치적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단군·기자·삼국·고려의 시조
등의 왕릉을 수리하고 수로왕릉과 신라의 제 왕릉에 두루 제사지냈으며, 삼성사(三聖祠) 제의를 바로하고, 온조왕묘를 숭
열전(崇烈殿)으로 이름붙이고, 고려 4태사묘에 사액하였다. 외적 격퇴에 공이 큰 인물들의 전기 편찬에도 힘써 《이충무공전
서(李忠武公全書)》를 비롯해 《김충장유사(金忠壯遺事)》, 《임충민실기(林忠愍實記)》, 《양대사마실기(梁大司馬實記)》
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왕조 전기에 만들어진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쳐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로
편찬 간행하고 향촌질서 유지에 필요한 각종 의례들을 종합 정리하여 《향례합편(鄕禮合編)》을 펴내게 했다. 이 많은 저
술들의 출판을 위해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 ·생생자(生生字:목활자)·정리자(整理字)·춘추관
자(春秋館字:철자) 등 여러 가지 자체의 활자를 80여 만 자 이상 만들었다. 그러나 재위 중에 활자로 간행을 한 것은 전체
신저술 중 1/3 정도였으며 순조 연간에 어느 정도 간행이 후속되었으나 현재 대부분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근신인 규장각
각신들로 하여금 중요 정사를 매일 기록하게 하여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새로운 연대기 작성을 시작했으며, 경연 석상
에서 한 말은 참석자들이 기록하여 《일득록(日得錄)》으로 편집되었다. 1791년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 등이 천주
교 신자가 되어 제사를 거부하고 가묘의 신주를 불사른 진산(珍山)사건이 발생하여 천주교 박해를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졌
으나, 정학(正學)을 신장하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억제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극형은 윤지충·권상연 두 사람에만 한정하
고 탄압으로까지 발전시키지 않았다. 2008/06/30 14:20:36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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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천주교뿐만 아니라 명나라 말, 청나라 초 패관소품의 학을 속학(俗學)이라 하여 경계의 뜻을 함께 보였는데, 재위 초
부터 문체가 날로 흐트러지는 추세를 바로잡으려는 뜻을 본래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자신의 측근 가운데 천주교에 가까이
간 사람들이 많은 한편, 공격하는 측에 후자의 경향을 띤 자들이 많은 상황을 간파하여 양쪽의 잘못을 지적하여 위기를 넘기
고 새로운 발전을 다지려는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1795년에 어머니의 회갑연을 아버지의 원소가 있는 화성유수부에
서 열어 전국의 노인들에게 두루 혜택이 돌아가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였다. 즉 이 행사를 기념해 조관(朝官)은 70세 이상, 일
반 사서(士庶)는 80세 이상, 80세 전이라도 해로한 자 등에게 1계를 가자(加資)하여 모두 75,145인이 혜택을 보았는데 《인서
록(人瑞錄)》이라는 책으로 이 사실의 자세한 내용을 남겼다. 1793년의 현륭원 참배를 계기로 비변사로 하여금 원행정례(園行
定例)를 저술하게 하여 원행의 절차, 행렬 규모와 의식 등을 정례화하고, 1795년 잔치의 모든 사실은 《정리의궤통편(整理儀
軌通編)》으로 남겼다. 재위 10년째에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자 24년째 정월에 수빈(綏嬪) 박씨 몸에서 난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다. 재위 18년째인 1794년에 발병한 절후(癤候), 즉 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이 격무와 과로로 아주 심해져 1800년
6월 28일에 49세로 일생을 마쳤다. 타계하기 한 해 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저술을 손수 편집하여 예제(睿製) 3책을 남겼고 자
신의 저술·강론 등도 수년 전부터 각신들에게 편집을 명하여 생전에 《홍재전서(弘齋全書)》 100권으로 정리된 것을 보았으며,
1814년에 순조가 규장각에 명하여 이를 간행하였다. 유언에 따라 현륭원 옆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시호를 문성무열성인
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라고 하였으며, 왕조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1900년에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다. 2008/06/30 14:21:13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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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뿌리 | | 효의왕후 [孝懿王后, 1753~1821]
조선 정조의 비. 슬하에 소생이 없어 수빈 박씨가 아들을 낳자 왕세자로 삼았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공양하여 칭송을 받았다. 일생을 검소하게 지냈다. 본관 청풍(淸風).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 1762년(영조 38) 10세 때 세손빈(世孫嬪)에 책봉되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잘 섬겨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고, 슬하에 소생이 없어 1790년(정조 14)
수빈(綏嬪) 박씨가 아들을 낳자 왕세자로 삼았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와 혜경궁 홍씨를 공양하여 칭송을 받았다. 일생을 검소하게 지냈으며, 수차에 걸쳐 존호(尊號)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했고,
1820년(순조 20) 68세가 되어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 휘호는 예경자수(睿敬慈粹)이고,
능은 건릉(健陵:水原)이다. 2008/0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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