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해외여행산행

2003 유럽 여행 낙수[3-1일] -바티칸 시국-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28. 13:59

 

 
 
□ 제3일 2003/4/9(수) 전일 로마 시내관광 ◆ 05:15-06:15 로마 시내 방향 조깅, 소나무 가로수, 1800년대식 건물 즐비, 로마의 아침->간단한 식사, 시내는 지저분한 느낌, 인도가 별도로 없슴, 시내 초입에서 돌아옴 ◆ 07:00-08:00 호텔조식 서양뷔페식 ◆ 08:00-08:45 바티칸 시국 박물관 이동, 인구 800, 로마등서 1,000명 출퇴근, 스위스 군인 무료 숙위, 범죄율 세계최고 이(伊)의 20배, 0.44km2, 1929.2 뭇솔리니와 교황의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독립, 1527 디오11세 교황 끝까지 지킨 스위스 청년, 성벽 따라 500m 줄섬, ◆ 09:00-11:00 시스티나 소성당(1475-1481), 천정그림->1481-1483미켈(산비에타, 다비드상, 모세상 1508-1512완성) 1531-1535 최후의 심판(351명 등장), 중정공원에서 설명->조각관->시스티나-> 바티칸 정원 내다봄->회랑 천정화->나선계단 ◆ 11:30-12:10 중식 바티칸 근처 식당, 우중충한 거리, 스파게티, 포도주, 바글바글한 사람들, 중정식 구조, 대문-> ㅁ자 방, 중정 ◆ 12:10-12:30 한국인 상점서 선물용 넥타이 구입 ◆ 12:30-12:40 성 베드로 이동 ◆ 12:40-13:40 성 베드로성당, 1C티버강 원형경기장서 죽은 베드로 육신 이동 안치 기념 16C 쥴리어스 2세 5만수용 210*125m 크기 10명 화가 150년 걸려 지음, 궁륭돔:미켈 작, 324-349 베드로 무덤, 콘스 대제 모(母) 헬레나 성녀, 베로 성녀 수건->약탈 파괴->브라만테설계->안토니오->미켈, 우르바누스8세, 광장 베르니니 설계, 30만수용, 분수:성수 ◆ 13:40-14:00 콜롯세움(CLOSSEO, 거대하다는 뜻) 이동, ◆ 14:00-14:20 포로로마노(FORO ROMANO)관람, 베네치아-콜롯세움 중간, 로마의 시작 팔라티노 언덕, 퀴리날레 언덕, 시저가 화장된 곳, 원로원 건물(현 시청), 로물로스신전, 티터스 개선문(나폴레옹 본떠 파리에 건립) ◆ 14:20-15:00 콜롯세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188*156M, 지름527M, 높이 48M, 4층 ◆ 15:00-15:30 카타콤베(Catacombe) S. SEBASTIANO 방문, 초기 기독교 지하묘지 로마근교 30개, 지하 5층, 길이=20-50KM, 10만구 이상의 유해 ◆ 15:00-15:30 트레비분수, 아내와 사진, 베르니니 원안, 아이스크림, 동전-> 로마 재방문 ◆ 15:30-16:00 스페인광장, 바티칸 주재 스페인 대사관 터, 137계단, 연인들의 집합처, 성 Sebastiano성당, 길이=20-500km, 10만구 이상 유해안치, 현재 대부분 유해는 없음 ◆ 19:00-19:30 로마 버스이동 호텔 JOLLY MIDAS 한정식식당(Upgrade)
 
■ 바티칸시국 범죄 지구상의 가장 작은 독립국인 로마시내의 바티칸 시국(市國.면적 0.44㎢)이 세계 최고의 범죄국가로 꼽히고 있다. 바티칸 검찰당국이 8일 처음으로 발표한 지난 1년간 범죄통계에 따르면 절도, 사기 등의 형사사건이 6백8건 발생했다. 인구가 4백55명이므로 통계로만 보면 1인당 연간 1.3회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얘기다. 1인당 범죄율은 이웃 이탈리아의 약 20배에 달한다. 가장 흔한 범죄는 바티칸 박물관과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찾는 관광객들을 노린 절도며, 이어 뇌물과 사기, 경찰과 공무원들에 대한 모욕 등의 순이다. 범죄 유형은 소매치기로, 이 중에는 로마 등지로부터 원정 온 좀도둑들도 포함돼 있다. 입장을 위해 500여 미터 줄지어 서 있다가 내부로 들어가 본다. 왼쪽에는 바티칸시국을 경비하는 스위스 용병들이 서 있다. 그들은 파랑, 노랑, 빨강색의 제복을 입고 있는데, 이 역시 미켈란젤로가 디자인 한 것이라고 한다. 성당 입장시 주의하실 것은 무릎 위가 보이는 짧은 스커트나 반바지 차림이나 어깨의 살이 보이면 내부 입장이 금지된다. ■1. 바티칸 시국의 형성과 바티칸 박물관 바티칸 시국( - 市國, 라틴어: Status Civitatis Vaticanæ 스타투스 치비타티스 바티카내[*], 이탈리아어: Stato della Città del Vaticano 스타토 델라 치타 델 바띠까노[*], 문화어: 바띠까노 시국)은 이탈리아의 로마 시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경 역할을 하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내륙국이자 도시국가이다. 바티칸 시는 바티칸 언덕과 언덕 북쪽의 바티칸 평원을 포함하며, 0.44㎢의 면적에 약 400명 정도의 인구를 지녔으며 면적과 인구로 보아 매우 작은 독립국가이다. 이전에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넓게 차지한 교황령(756-1870)이 있었으나, 19세기 이탈리아 왕국에 강제 합병되었고, 10년 후인 1870년에는 로마와 더불어 나머지 다른 지역도 모두 이탈리아에 합병되어 소멸했었다. 바티칸 시국은 이 교황령의 회복을 목표로 한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의 체결로 독립을 성취하여 오늘에 이른다. 바티칸 시국은 교황이 통치하는 일종의 신권 국가로,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총본부이다. 바티칸 시국의 공무원들은 대부분 성직자나 수도자로 이루어져 있다. 국제 관계에서는 성좌(聖座, Sancta Sedes)로 호칭된다. 바티칸 시민 824명(2008년 기준)[6] 가운데 거의 대다수는 바티칸 성벽 안에 거주하며 그 외 나머지는 외국 주재 교황대사관에서 성좌의 외교 활동을 맡고 있다. 바티칸 시민은 대체로 교황청의 공무를 수행하는 성직자와 스위스 근위대 이렇게 두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티칸 인력의 과반수를 이루는 3천 명의 평신도 일꾼 대다수는 바티칸 밖에 거주하는 이탈리아 국민이며, 이탈리아 외 다른 나라의 국민은 소수이다. 사실상 바티칸 시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가톨릭 신자이다. 바티칸 시국의 공용어가 이탈리아어이다. 가톨릭교회의 공식 문서 가운데 권위 있는 것들에는 라틴어가 자주 쓰이며, 입법과 공식 보도에는 이탈리아어를 사용한다.[7] 또한, 바티칸 시국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일상 언어 역시 이탈리아어이다. 스위스 근위대에서는 명령 계통의 언어로는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충성 서약을 할 때는 근위병 개개인마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또는 이탈리아어 등 각자의 언어로 한다. 현재 바티칸 시국의 공식 웹사이트 언어들은 라틴어,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중국어, 아랍어이다. ‘바티칸’이란 이름이 생겨난 것은 기독교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의 시대로, 바티칸 언덕을 뜻하는 라틴어 ‘Mons Vaticanus’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티칸 시국의 영토는 로마의 북서부에 있는 바티칸 언덕과 그 앞 인근에 성 베드로 대성전, 사도 궁전과 시스티나 경당 그리고 바티칸 미술관 등의 건물들이 세워진 평원이다. 이 지역은 1929년까지 로마의 보르고 지구의 일부분이었다. 로마 시와 분할된 것은 레오 4세가 테베레 강 서쪽 연안에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길게 성벽을 쌓아 올린 때부터이며, 이후 레오 4세의 벽을 포함하여 바오로 3세, 비오 4세, 우르바노 8세가 새로 쌓아올린 성채 덕분에 면적이 더 확장되었다.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을 맺으면서 이탈리아 정부가 바티칸의 영토를 환상선에 의해 둘러싸인 구역을 경계선으로 명시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일부 국경 지역은 벽이 없는 대신 어떤 건물들로 선을 긋는 것으로 대신하였으며, 국경의 작은 일부분에는 현대식 벽을 건설하였다. 바티칸의 영토에 포함된 성 베드로 광장은 로마의 나머지 부분과 격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이탈리아 정부와 바티칸은 대체적으로 성 베드로 광장 밖의 비오 12세 광장 구역을 상상의 경계선으로 보고 있다. 성 베드로 광장 앞에는 테베레 강까지 닿는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화해의 길)와 이어져 있는데, 이 웅장한 도로는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한 기념으로 무솔리니에 의해 건설되었다. 또한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교황청은 이탈리아 영토 안에 일정한 소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카스텔간돌포와 대주교좌 성당들 그리고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에 산재한 교황청 소속의 관청이나 사무소 등으로 이러한 소유지는 외국 대사관의 지위와 유사한 치외 법권을 누리고 있다. 카스텔간돌포와 대성전으로 지명된 시설은 경찰들이 정기적으로 순찰하며, 이들은 이탈리아 경찰이 아닌 바티칸 시국 소속이다. 성 베드로 광장은 일반적으로 바티칸과 이탈리아 양국이 공동으로 치안을 유지한다. 바티칸이 자리잡기 전에 이곳 바티칸 언덕(Mons Vaticanus)은 원래 고대 로마인들이 로마 신화의 키벨레와 그 배우자 아티스를 숭배하던 곳이었으며, 점을 치는 언덕(ager vaticanus)이라 부르며 오랫동안 신성하게 여겨왔다. 그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곳에 거주민들의 통행과 정착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서기 1세기 초에 대 아그리피나(BC 14년 - AD 33년 10월 18일)는 바티칸 언덕과 그 주변에 물을 대고 그 자리에 자신의 개인 정원을 건립하였다. 또한 로마 황제 칼리굴라(37년 - 41년)는 이곳에 거대한 원형경기장(Circus Gaii et Neronis)을 만들었고, 나중에 황제 네로 시대에 완공되었다. 성 베드로 광장 중앙에 장식된 오벨리스크는 본래 칼리굴라가 원형경기장을 꾸미기 위해 서기 37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로마로 가져와 경기장의 장식에 사용되었다. 서기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 이후 바티칸 언덕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성 베드로도 이 순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 베드로는 원형경기장에서 거꾸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원형경기장 맞은편에는 비아 코르넬리아를 경계로 삼아 고대 로마 시대의 공동묘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4세기 초에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이 언덕은 다신교의 각종 이교 신들을 위한 제단과 무덤, 비문 등이 지어졌었다. 이러한 고대의 잔재들은 수세기에 걸쳐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사를 할 때 빈번하게 발견하였으며, 교황 비오 12세 치세에는 본격적으로 대규모적인 발굴작업을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326년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최초의 성당인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이 지어졌고, 5세기 초에 대성전 근처에 교황의 궁전이 지어지면서 이 지역은 점차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황의 권력은 점차적으로 커져갔으며 19세기 중반 신흥국가인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기 전까지 약 천년 동안 로마와 그 주변 지역들을 장악해 교황령이란 이름 아래 다스렸다. 이 시기의 대부분 동안 교황들의 거주지는 바티칸이 아닌 라테라노 궁전이었으며, 아비뇽 유수기(1309년 - 1377년)를 제외한 최근 세기 동안에는 퀴리날레 궁전이었다. 19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이 창궐하면서 교황청은 차츰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갔으며, 1870년에는 마침내 수도인 로마마저 점령당하면서 교황의 소유지들은 불확실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1861년부터 1929년까지 60여 년 동안 이러한 로마 문제라고 불리는 상태가 유지되었다. 이로 인해 천년 동안 이어지던 교황령은 종말을 고하고 교황을 비롯한 교황청의 상층부들은 바티칸으로 대거 피신했다. 이후 교황들은 로마 및 기타 지역에 대한 이탈리아 국왕의 권한을 인정하라는 이탈리아 정부의 주장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당한 요구라며 항의했고 바티칸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교황령이 이탈리아에 병합된 이후에도 이탈리아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교황청의 이탈리아로부터 독립적인 국가로서의 지위를 계속 인정하였다. 이탈리아는 바티칸 안에 있는 교황청에 대한 무력행사를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퀴리날레 궁전을 포함하여 교회 재산의 상당수를 몰수해갔다. 교황령의 마지막 통치자인 교황 비오 9세는 로마를 잃은 이후 스스로를 ‘바티칸의 포로’라고 표현했다. 이런 상황은 1929년 2월 12일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간에 라테란 조약을 체결되면서 종식되었다. 라테란 조약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교황 비오 11세 양측으로부터 전권을 이양받은 베니토 무솔리니와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에 의해 각각 조인되었다. 이 조약으로 이탈리아는 바티칸 시국을 독립국가이며 교황청의 소유와 국제법상 치외법권을 인정하였으며 가톨릭교회를 이탈리아의 국교로 삼았다. 바티칸 또한 로마를 수도로 한 이탈리아 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더불어 양측은 라테란 조약에 반대되는 이전의 모든 법들을 폐기하였다. 라테란 조약은 파시즘 정권이 물러나고 1947년 이탈리아 공화국이 들어선 후에도 그대로 채택되었다. 다만 1984년 양측 합의로 가톨릭 교회를 이탈리아의 국교로 존속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의 새로운 정교 협약으로 수정되었다. 바티칸박물관(Musei del Vaticano)은 바티칸거리(Viale Vaticano)에 접해 있다. 성당에서 나와 왼쪽 대로로 걸어가다가 막바지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져 올라가면 된다. 문 닫는 시간이 5시 이전이므로 서둘러야 한다. 토요일, 일요일에는 오후 1시 45분에 닫아버린다. 최소한 문 닫기 한 시간 전에는 입장해야 한다. 바티칸 궁에는 20개의 미술관, 박물관, 예배당이 있는데, 모두 바티칸박물관으로 통칭되고 있다. 수많은 종교화와 라파엘로의 걸작 '아테네학당'이 있는 라파엘로의 방, 미켈란젤로의 '창세기'와 '최후의 심판'이 있는 시스티나예배당등 예술품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 정문위에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대리석상이 조각되어 있다. 정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이 분리되어 있는 나선형의 계단이 나타난다. 입구에는 환전소와 화장실, 매표소가 있다. ■2. 라파엘로의 방 바티칸박물관을 들어가 홀의 끝에 이르면 라파엘로의 방(Stanze di Raffaello)이 나타난다. 원래 이 방은 교황 나폴로 5세 때 만들어졌는데,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이곳을 자신의 주거용 아파트로 개조하기 위해 내부를 새롭게 장식하기로 하고, 브라만테를 불러 들였는데, 브라만테는 다시 25세의 젊은예술가 파엘로를 로마로 불러 교황에게 추천하였다. 라파엘로의 방은 제 1실과 2실, 3실, 4실로 나뉜다. 제 1실은 '보르고의 화재'의 방이라고 불리운다. 이 방은 가장 마지막에 완성되었는데, 대부분 라파엘로의 제자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보르고의 화재는 서기 87년 바티칸 근처의 성벽 마을 보르고에서 발생한 대화재를 그린 것인데, 교황 레오 4세가 불타는 이 마을을 향해 소능로 십자가를 그리자 기적적으로 화재가 진압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왼쪽 벽에 있는 그림은 '교황 레오 4세의 사라센에 대한 승리'를 그린 것이다. 서기 846년 사라센인들이 서해안 오스티아에 상륙해 로마로 침입하였는데, 이때 성 바울 성당과 성 베드로성당이 약탈을 당한다. 그 후 3년이 지난 다음 재침입하였는데, 이때는 바다에서 그들을 격파했다고 한다. 제2실은 라파엘로의 '성사에 관한 토론'이 있는 곳이다. 1509년에 완성된 것으로, 상하좌우의 대칭을 살려 지상과 천상에서신앙의 영광이 주제가 되고 있다. 제단위의 성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그림 맞은편에 있는 것은 라파엘로의 대표작인 '아테네 학당(Scuola d'Atene)'이다. 이 그림에는 고대의 철학자들이 모두 등장한다. 이 그림의 중앙역에 있는 두 인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인데, 그들의 이상인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상징한다. 원근법을 이용한 완벽한 배치로 건물의 사실적 묘사가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그림에서 묘사된 인물 중에는 당대 유명한 철학가들의 얼굴이 몇몇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라파엘로도 자신의 얼굴을 이 그림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우선 중앙을 보면 흰 수염과 붉은 천을 두른,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사람이 플라톤이며, 그 옆에 푸른 천을 걸치고 손바닥으로 땅을 가리키는 인물이 아리스토텔레스란다. 플라톤의 손가락은 그의 사상인 이상주의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를 각각 상징하고 있다. 다음으로 플라톤의 왼쪽으로 녹색의 외투를 걸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너 자신을 알라'의 소크라테스. 그림의 맨 앞 중앙 부분에는 한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인물이 바로 비관주의자로 유명한 헤라크리투스이다. 이들 철학자들은 당대 미술가들의 얼굴을 빌린 것이라고 한다. 이상주의자 플라톤의 얼굴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얼굴에서 빌려 온 것이고, 비관주의자 헤라크리투스의 얼굴은 미켈란젤로, 그리고 그림의 하단 오른쪽에서 콤파스를 가지고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에우크리드는 브라만테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그럼, 라파엘로 자신의 얼굴은 어디에다 그려 놓았을까? 이 그림의 맨 하단 오른쪽을 보면 흰 색의 외투를 걸치고 누런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이 라파엘로의 스승인 페루지노이며, 라파엘로는 바로 그 옆, 검은 모자에 수염이 없는 얼굴이라고 한다. 제3실은 '엘리오도로의 방'이라 불리운다. 이 방에 있는 '엘리오도로의 벌'이라는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그림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보물을 훔친 엘리오도로를 추방하는 내용인데,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인들을 쫒아내는 것을 암시한다고 한다. '볼세나의 기적', '베드로의 해방'이라는 그림도 볼 수 있다. 제4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방'이라고 불리우는데 콘스탄티누스황제의 전설적인 삶이 그려져 있다. 라팔엘로가 그린 그림들은 아니고 모두 제자들이 완성한 작품들이다. 벽에 있는 '막센티우스의 패배'라는 그림도 있다. 콘스탄티누스군대가 밀비오 다리에서 막센티우스군대를 격파하는 내용의 그림이란다.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에서 기독교적으로 순화된 고대 철학을 그렸다. <아테네 학당>을 관찰하다 보면 둥근 아치 형태의 구조물로 테를 두른 거대한 르네상스 전성기의 건축물에 시선이 머물 게 된다. 이 이상적인 건축물은 실제의 역사적 사건과는 무관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상적인 회합을 위한 틀을 이루고 있다.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으로 평가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앙에서 열심히 토론하며 서 있다. '신 플라톤주의'로서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의 예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자신의 이상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인 듯, 플라톤은 오른손으로 위쪽을 가리키고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오른손을 앞쪽에 보이는 사물을 향해 쭉 뻗은 상태다. 철학적인 기본 입장이 이렇게 설득력 있게 묘사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에 있는 네 개의 계단을 통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전경에 있는 두 그룹의 철학자들에게로 연결된다. 계단에 비스듬히 누운 인물은 디오게네스로 알려져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와 오른쪽에 있는 무리들 사이에 매우 분명한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다. 이와 달리 플라톤과 왼쪽에 있는 무리들 사이의 연결은 조금 약해 보인다. 이는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헤라클레이토스 때문인데, 이 인물은 미켈란젤로의 모습을 본뜬 인물상이다. 라파엘로는 왼쪽에 피타고라스와 에피쿠로스를, 오른쪽에 유클리드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가 브라만테, 프톨레마이오스, 페르시아의 짜라투스트라를 그려 놓았을 뿐 아니라 중세의 7학예(문법,수사,논리,대수,기하,음악, 천문)도 묘사해 놓았다. 왼쪽의 무리들은 비실용적인 지식과 기둥 뒤에 보이는 스핑크스의 머리가 상징하는 비학(자연의 신비로운 특성과 힘에 대한 이론)에 몰두하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위쪽에 있는 인물은 그가 들고 있는 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이다. [내부 천장의 프레스코화는 《구약성서》 〈창세기〉장면과 예언자 및 무녀들, 제단 뒤 동쪽벽의 《최후의 심판》은 B.미켈란젤로 작품, 좌우벽면은 S.보티첼리·D.기를란다요·페루지노에 의해 그려졌으며, 오른쪽의 북측벽 중앙부 6구화는 세례로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생애》, 왼쪽남측벽 중앙부 6구화에는 《모세의 생애》가 그려져 있다.] ■3. 시스티나 예배당
이탈리아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 로마의 모든 길은 바티칸으로 통한다. 그리고 바티칸의 모든 길은 바로 시스티나 예배당(Capella Sistina)으로 통한다. 라파엘로의 방과 바티칸의 박물관의 여러 개의 방을 통과하면 결국 시스티나 예배당에 이르게 된다. 입구에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다. 이것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 벽면에는 '모세의 생애(구약성서)'와 '그리스도의 일생(신약성서)'이 각각 6면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1981년부터 시작된 '최후의 심판', '천지창조' 등의 벽화와 천정화에 대한 대대적인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1994년 4월, 14년만에 작업이 완료되었다. 지난 450년간의 묵은 때를 벗고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이 복원 사업은 철저한 고증과 자문을 거쳐 99.9% 원래 색채와 형태를 재현했다고 한다. 이 사업에 일본의 민영 텔리비젼 방송사인 NHK가 2천 3백만 달러를 지원했다고 한다. 벽화 '모세와 그리스도의 일생'은 시스티나 예배장의 왼쪽 벽면에 있는 그림이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그림들을 살펴보면 내용상 서로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제단의 그림부터 순서대로 살펴보자. 1.'이집트에서의 모세 부부와 모세 아들의 할레'(판투리끼오와 페루지노 작) -칼을 든 천사가 아들에게 할례를 하지않은 모세를 제지하는 내용 2.'모세 이야기'(보티첼리 작) -모세의 청년시기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음. 모세가 양치기들을 몰아내고, 또 이집트인들을 살해한후 예트로의 딸들을 위해 우물물을 퍼올리고 있고, 왼쪽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인도하고 있음. 3.'홍해를 통과하는 모세'(코지모 롯셀리 작) -교황 식스투스 4세의 교황군대가 1482년 칼라브리아의 알폰소공이 이끄는 나폴리군대를 캄포마르테에서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짐 4.'시내산에서 십계명판을 받는 모세'(코지모 롯셀리작)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심계명판을 받아 내려오다가 이스라엘 민족들이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을 보고 십계명판을 내동댕이 친다는 내용 5.'코라, 다탄, 아비론의 처형'(보티첼리 작) 6.'십계명을 여호수아에게 주고 있는 모세와 그의 죽음'(루카시뇨렐리와 바르토로메오 델라 갓따 작) 다음으로 반대편을 보자. 역시 제단에서부터 차례로 살펴보자. 1.'그리스도의 세례'(페루지오 작) -하늘에 전지전능의 신과 천사들이 있고, 그 아래에 그리스도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있는 장면. 머리에 있는 비둘기는 성령을 의미. 2.'유혹을 받으심'(콧티첼리 작) -사탄의 시험을 받는 그리스도를 그린 것임. 사탄이 그리스도에게 '네가 신의 아들이라면 아래로 뛰어 내려라'라고 시험하는 장면과 그 완쪽에 '돌을 빵으로 만들라'고 하는 장면, 또 오른쪽에는 사탄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줄 것이라고 유혹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음 3.'성 베드로와 성 안드레아를 부르심'(기를란다오 작) -미켈란젤로의 스승인 기를란다이오의 작품. 그리스도가 베드로와 안드레를 제자로 택하는 내용 4.'산상 설교와 나병 치유'(코시모 롯셀리와 피에로 디코스모 작) -산상 설교하는 그리스도와 나병환자를 치유하는 그리스도를 그린 것임 5.'천국의 열쇠를 주심'(페루치노 작) 6.'최후의 만찬'(코시몸 롯셀리 작) ■4. 천지창조
이번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정화 '천지창조'이다. 이 그림은 시스티나 예배당의 대표적인 그림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이곳이 내부 장식을 담당할 화가를 찾던 중 그 당시 최고의 화가였던 미켈란젤로를 추천받게 된다. 미켈란젤로를 만나 교황은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12사도와 장식용 도안을 그리도록 지시하였으나,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그림을 작업하지 않는다면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말해, 끝내는 교황의 허락을 받고 천정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약 8백 평방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공간을 초인적인 노력 끝에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작업시작 4년 5개월 만에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작업 진행 중 어느 누구도 이곳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한번은 교황이 작업 진행상황을 보고자 내부로 들어가려 했지만 미켈란젤로의 강력한 반대로 좌절되었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교황은 그 자리에서 미켈란젤로를 구타했으며, 이 일을 당한 미켈란젤로는 즉시 천정화 작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려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교황은 즉시 미켈란젤로에게 달려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사과하고 약간의 금화로 미켈란젤로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노력한다. 진심어린 교황의 사과에 감동한 미켈란젤로는 마음을 돌려 다시 작업에 임해 끝내 불후의 명작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천정에는 중앙에 크게 9개의 그림이 있다. 이곳 천정이 너무 높아서 키가 작으신 사람들은 언뜻 이 그림을 못 찾을 수도 있다. 제단 쪽에서부터 그림들을 순서대로 보면, 1.'빛과 어둠의 창조' 2.'해와 달의 창조' 3.'식물의 창조' 4.'아담의 창조' 5.'이브의 창조' 6.'원죄와 낙원으로부터 추방' 7.'노아의 제물' 8.'대홍수' 9.'술취한 노아'

 

 

[B. 미켈란젤로 그림, 1537∼41년, 로마바티칸궁전 시스티나성당]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궁 시스티 나 예배당의 벽화를 의뢰 받았을 때(1508) 성당 옆벽에 이미 15세기 화가에 의해서 모세전과 그리 스도전의 주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 그는 구약성서 속의 장면 들로써 이를 완결지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것은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노아의 이야기에 이르는 장면,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예언 하는 사람들, 즉 선지자들과 여자 예언자격인 무녀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선조들의 모습이 이에 해당된다. 그때 율리우스 2세 묘당을 위해 제작을 추진 중에 있었다. 그것이 중단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이 천정화를 위해 회화의 세계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천정화를 입구에서 제단쪽 으로 진행하였고 표현형식도 4단 계-천지창조연작, 예언자와 무당 및 구약성서: 그리스도의 조상- 로 나누어 발전시켰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로부터 요구되어진 천장벽화의 주문을 거역하고 논쟁을 벌였다. 미켈란젤로는 장식 계획의 확장을 원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당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시오"라는 말로 율리우스 2세는 갈등을 끝냈다고 한다. 540평방미터 넓이의 천장 프레스코화를 완성하는 것은 거의 4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만큼 방대한 작업이었다. 대부분 그림의 주요 장면은 연대기적으로 전개되는데, 미켈란젤로는 작업 당시 이와 반대로 연대기를 거스르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작업했다. 1510년 8월까지는 <술 취한 노아>에서부터 <이브의 창조>까지 천장의 첫 번째 다섯 개의 장면이 완성 되었다. 나머지 네 개의 장면인 <아담의 창조>에서 <빛과 어둠의 창조>까지, 그리고 창문 위의 반달 모양의 공간에 그린 그림들은 1512년 10월에야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몸에 심각한 무리가 왔다. 갑상선종이 점점 더 커지고 목덜미와 가슴에 통증이 악화되었으며, 신장과 골반이 뒤틀리는 몸의 불균형이 나타났다. <시스타나 천장 벽화>에는 결코 미켈란젤로가 혼자 생각해 낸 것으로는 볼 수 없는, 매우 지능적으로 고안된 신학적인 내용들이 담겨있다. 그 아홉 개의 주요 장면들은 구약성서의 「창세기」편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에서부터 노아의 만취까지를 담고 있다. 양쪽에는 구약에 나오는 일곱 명의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했던 다섯 명의 <고대 무녀들>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천장의 반달형 공간에는, 신약의 시작인 「마태복음」에서 열거된 '그리스도의 선조'들이 그려져 있다. 중앙 화면의 구석에 있는 삼각형의 벽면 네 곳에는 신약의 사건과 예형학적으로 관련된 구약성서의 네 장면이 각각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수많은 주변 인물들이 살고 있는 하나의 건축학적인 체계 속에 주요 그림들과 인물들을 고정시켰다. 그는 예언자들과 고대의 무녀 사이에 부조 형태의 푸토(벌거벗은 동자상)들이 떠받치고 있는 낮은 주춧대를 설치했다. 그로부터 천장의 구획을 나누어 그림의 경계를 만드는 가름대가 형성된다. 주춧대 위에는 나체의 청년상인 <이뉴디>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아홉 개의 주요 장면들 중, 비교적 작게 그려진 다섯 개의 그림들을 네 명의 이뉴디가 둘러싸고 있다. 그들에 대한 해석은, 주춧대를 떠받치고 있는 <대리석 느낌의 푸토상>이나 원형의 <청동상 느낌의 청년들>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논란이 되고 있다. 바사리는 이뉴디를 황금 시대의 전령으로 보았다. 이와 관련해 푸토들과 이뉴디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알레고리화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창조'와 '예언자들과 고대의 무녀', '그리스도의 선조들'과 연결될 수 있다. ■5. 최후의 심판 이제 '최후의 심판(Giudizio Universale)'이다. 시스틴 예배당 제단 뒷편에 있는 그림이다. 천정화의 그림도 만만치 않다. 폭은 '최후의 심판'과 거의 같고 길이도 한 40m 정도인데, 그걸 혼자서 그렸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를 시기하던 화가들조차도 이 그림들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당시 유럽의 정신적, 정치적 황폐화의 시기에 미켈란젤로 자신도 부친과 형제를 사별하는 슬픔과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천정화에 비해 음울한 기분을 준다. 이 벽화는 미켈란젤로가 천정화 완성 후, 그의 고향인 피렌체로 갔다가 22년 후인 1534년 이곳으로 다시 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장장 7년이라는 긴 세월을 소요한 끝에 완성한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이 그림의 하단 부분은 지옥을, 그 윗부분은 천당을 나타내고 있다. 하단 좌측 부분에는 지옥에서 천당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묘사되어 있고, 우측 하단부분에는 반대로 지옥에서 천당으로 올라가려는 것을 막는 장면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거대한 벽화의 상부 중앙을 보면 그리스도가 오른손을 들고 있고, 그 옆에 성모가 있다. 그 아래에는 성 바르톨로메오가 인간의 가죽을 들고 있다. 성 바르톨로메오는 가죽이 벗겨지는 처형을 당하였는데, 가죽에 있는 얼굴은 순교당한 성 바르톨로메오가 아니라 실제로는 미켈란젤로 자신의 얼굴이다. 대화가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죄와 무가치함을 이렇게 신앞에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그림은 그림에 묘사되어 있는 3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나체로 묘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 외설적이라 하여 후에 교황이 다니엘라 볼테라에게 명하여 나체를 가리는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볼테라는 '기저귀 화가'라는 별명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어찌됐든 이 세상 마지막 날 구세주가 나타나 그 동안에 행한 행동으로 선과 악을 가려 각각 천당과 지옥으로 보낸다는 이 그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을 초월해서 항상 경외감을 갖게 하는 영원한 걸작으로 남아 있다. 천정의 대형그림들을 바라다보면 목이 뻣뻣해진다. 미켈란젤로는 저 그림들을 다 어떻게 그렸을까? 이리봐도 저리봐도 참으로 위대한 화가라는 생각이 든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는 일을 맡겼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작업의 프로그램을 짜고 거기에 따라 일을 진행해나갔다.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물감을
칠해나가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로 인해 목과 눈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혼자서 4년 만에 이 대작을 완성하였다.

이 천장화는 성서의 〈천지창조〉의 순서와는 반대로 노아에 관한 3가지 이야기,
즉 입구 쪽에서부터 그려졌는데, 완성까지는 4단계를 거쳤다. 첫번째 단계는 2개의 곡면
벽화에 그린 3가지의 노아에 관한 이야기와 8명의 나체상으로
1509년 9월 15일에 완성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낙원추방〉과 〈이브의 창조〉, 4명의 나체상,
두 명의 예언자, 4개의 삼각형 벽화, 2개의 곡면 벽화로 1510년 8월에 완성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아담의 창조〉 〈하늘과 물의 분리〉 〈달과 해의 창조〉
〈빛과 어둠의 창조〉의 4가지 이야기와 8명의 나체상, 5명의 예언자, 4개의 삼각형 벽화,
2개의 곡면 벽화로 1511년 1월과 8월 사이에 완성되었다. 네 번째 단계는 나머지
모든 원형 벽화로 같은해 10월부터 1512년 10월 사이에 완성되었다.

그려나간 순서에 따라 화면은 점점 단순화되어 가는데, 이것은 높은 곳에 그려지는
천장화의 특수성을 미켈란젤로가 차츰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림은 1512년 완성되어 같은 해 만성절인 11월 1일 제막식을 가졌다.
그후 500여 년 동안에 이 벽화는 여러 차례에 걸쳐 덧칠과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다.
1982년에는 일본의 한 방송사의 후원으로 최첨단 기법을 동원한 복원작업이
9년에 걸쳐 실시되어 그림을 덮고 있던 때와 후대에 이루어진 덧칠이
제거되어 본래의 색채와 형태가 되살아났다. 
 
 
 
 
1. 바티칸 시국 박물관
 

 

 

 

 

1-1. 바티칸 성벽을 따라 줄지어 선 관광객

 

 

1-2. 바티칸 시국 박물관 입구

 

 

 

1-3. 바티칸 정문 근위병(스위스 용병으로 무료 숙위)

 

 

아폴로 

 

 

 

 

 

 

 

 

1-4. 바티칸 시국 박물관의 이모저모 

 

 

 

 

1-5. 바티칸 박물관 중정에서

 

 

 

1-6. 시스티나 소성당으로 입장하기 전에 바티칸 박물관 솔방울 정원에서

 

 

 

2. 시스티나 소성당의 장관

 

 

 

2-1. <아테네 학당 (프레스코/밑면 770cm/1510~1511년작/부분)> (Raffaello, Sanzio di Urbino/1483~1520/이탈리아)

전면/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디오게네스

 

2-2. 미켈란젤로 자화상

 

 

 

2-3. 시스티나 외관

 

 

 

 

 

 

 

 

2-4. 시스티나 내부 천정화(미켈란젤로), 촬영금지

 

 

 

 

 

 

 

 

 

 

 

 

 

 

 

 

 

 

 

 

 

 

 

 

2-5. 시스티나 관람 후 돌아 나오는 나선형 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