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해외여행산행

2003 유럽 여행 낙수[제1일] -인천, 로마- (2003/04/07-14)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28. 13:53
 [1차 유럽 여행( 03/04/07-13)/이태리/스위스/파리] □ 제1일 2003/4/7(월) 로마로 이동 ◆ 05:20 기상, 항공백 2개 끌고 누리 아파트 정문까지 걸어감, 택시 안 옴, 겨우 잡아타고 이동 ◆ 06:35-09:05
정부대전청사 앞에서 인천공항으로 이동, 천안 휴게소 10분 쉼, 안산서 서해고속도 쪽으로 가다 영종도로 진입, 신공항은 처음 감, 1992착공, 2001개항, 2020년 완공, 영종대교(상부6차, 하부4차+철도) ◆ 09:05-09:30
환전, 사진, 아내와 담소 ◆ 09:30-10:00
3F B-C아일랜드 9번 데스크에 11명 집결, 에넥스 구태완 이사 부부, 김휘성 부장, 고려산업개발 김인태 부장 부부, 쌍용건설 김동환 과장, 벽산건설 강상혁 대리, 롯데관광 GUIDE 김태원씨 <참고자료> 1. 준비물 항공백2, 배낭2, 랜드로바, 조깅화, 체육복, 파카, 봄옷, 속것5, 허리쉑, 썬그래스, 비디오 테이프5, 비디오 밧데리2, 필름, 컵라면, 고추장, 소화제, 팩소주, 비디오카메라, 디지털카메라, 카메라, 비자카드, 100만원 유로화, 비누, 치약, 칫솔, 면도기, 명함, 카드, 이태리.유럽소개서 2. 국제전화 00 82 42 487 4220 3. 관계자 연락처 ENEX 구태완이사 02-2185-2012, 011-214-0163, 김휘성부장 011-214-0132 ◆ 10:00-10:30
출국카드 작성, 출국심사대 통과 ◆ 10:30-12:00
면세점 관광 ◆ 12:30-16:30
아시아나 OZ541 프랑크푸르트행, 7시간 시차(썸머타임), 10-11시간 소요, 인천-발해-북경-울란바토르-고비사막- 시베리아-모스크바-헬싱키-발틱해-프랑크푸르트, 고도 7.9-11.4km, 속도 833-907km/hr, 외기 영하34-60도, 고비사막 시베리아 만년설 보임, 독일인들 과자 던지기 불쾌 ◆ 16:30-19:40
푸랑크푸르트 공항대기, 우거진숲, 그림같은 집 인상적, 활주로3개, 1936개항, 독일실질 수도, 황제대관식, 금융 중심지, ◆ 19:40-21:30
ALITALIA항공 AZ407, 알프스 5km상공, 달빛 속 알프스 장관, 로마 레오나르도다빈치 공항, 시내까지 34km, 1961개항, 1990철도연결, 로마 가이드 이성우씨 안내 ◆ 21:30-23:00
공항에서 버스이동, 호텔 JOLLY MIDAS (로마 외곽지대) 534호, 한식도시락 ◆ 로마 현지 가이드 이성우씨 소개 로마 역사 정리 - BC3000 에게문명, BC1600아카이아인 미케네문명, 그리이스에 영향 줌 - BC1200 트로이전쟁, 팔리스 왕자(양치기)9년 전쟁, 라오콘이 계략 알려줌 - BC900 폴리스시대, - BC753 팔라티노언덕 로물루스건국, 2750년 전 로마건설, 1000년 수도, - BC479 페르시아전 승리,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헤로두토스 활약, - BC431-404 펠레포네소스 전쟁, - BC334 알렉산더제국, BC168 마케도니아 멸, - BC264-146 포에니1-3차전쟁, 칸나의 전투에서 로마패, 짜마전투에서 카르타고패->로마시대 - BC100-44 시저시대, BC60삼두정치1차, BC58갈리아원정, - BC44.3.15회의중 암살 - BC27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제정시대, - AD117 로마인구150만, 331콘스탄티누스대제 비잔티움이동(서로마), - 375 게르만대이동 ->동서로마분열, 4C말 기독교국교, - 476 서로마 亡->프랑코왕국(게르만), - 9C말 로마네스크:기둥연속, 반원아치, 작은창, - 12C 고딕:두개원호 뾰족한 머리, - 16C 르네상스:이태리중심, - 18C 바로크독일중심, - 962 오토1세 대관식, 십자군원정(1096-1291)7차->상인중심, - 1453 동로마분열->터키, 1608신성로마제국, 1648:30년전쟁독네스분리, - 15-17C항해시대, 식민정책시대, 100년전쟁, - 1861통일(파시즘), - 토스카나지방:세계10대 비경, 움브리아 지역, BC8C에트루리아인거주지, 농경, 해상, 산정에 집을 지음->수로건설, 전쟁시 방어 유리, - 로마 280만, 5700만명, 30만km2, 한반도1.5배, 1170km장화형, 시칠리아(900개화산), 샤르데냐등 섬17%, 국민소득 2만불, GNP6위, 로마에 6층이상 불허 200-500년 된 건물 부지기수, 伊주력:패션, 건축, 자동차(피아트), 중장비, 무기, 관광, 토스카나(가죽), 농업(올리브, 포도주16-18도시보관) - 한국과 비슷한 지형, 구릉지대, 민둥산, 20개주로 구성, 남쪽은 스파게티, 북쪽은 피자, 배타적, 정붙이기 어려움, 친해지면 마음 줌, 장수6위(1위일본), 70%이상중소기업, 올리브(최고급가구재, 기름) 덧붙임) ■1. 인천국제공항 - 인천광역시 중구에 있는 국제공항. - 구분 : 국제공항 - 설립연도 : 1992년 11월 - 소재지 : 인천 중구 운서동 2172-1 - 부지면적 : 5만 6202㎢(1,700만 평) - 여객 터미널 : 49.59㎢(15만 평) - 관제탑 높이 : 100.4m - 활주로 : 길이 3.75km, 너비 60m, 두께 105cm(2개), 활주로 간격 414m - 여객 : 2,700만 명/년 - 화물 : 170만 t/년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동에 속한 섬이다. 2001년 4월 현재 인천국제공항 건설에 따른 부지확장공사로 인해 면적은 공사 이전보다 훨씬 넓어진 63.81㎢이고 3,470여 세대에 8,9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서쪽과 서남쪽으로 신도(信島)․ 시도(矢島)․ 삼목도(三木島)․ 용유도(龍遊島)․ 무의도(舞衣島)와 마주하며, 삼목도․ 용유도와는 연륙도로로 이어져 있다. 원래 이름은 제비가 많은 섬이라 하여 ꡐ자연도ꡑ(紫燕島)라고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부 소속 영종진으로, 1875년 인천부로 이속되었다가 1914년 부천군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옹진군으로 편입되었다가 1989년 인천광역시 중구로 편입, 영종동으로 개칭되었다. 섬 중앙에 솟은 백운산(白雲山:255.5m)에는 1,300여 년 전인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고찰 용궁사(龍宮寺)가 자리 잡았으며, 개펄 등 자연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는 학생해양탐구학습장이 유명하다. 특산물로는 신선한 어패류와 영지버섯, 쌀과 태양고추가 있으며 굴․백합의 양식업과 염전업(鹽田業)도 이루어진다. 2001년 3월 29일 인천국제공항이 개항되어 영종도와 수도권을 연결하는 공항전용 고속도로가 뚫려 있다. 21세기 수도권 항공운송의 수요를 분담하고 동북아시아의 허브(Hub)공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를 매립하여 1992년 착공하여 8년 4개월 만에 총공사비 7조 8,000여억원이 투입되어 2001년 3월 29일 개항하였다. 1992~2000년까지 8년간의 제1단계 공사가 완성되어, 연간 17만 회의 항공기 운항을 통해 2,700만 명의 여객과 170만t의 화물을 수송하게 되었다. 1995년 기본계획에서 공항 인접 동쪽에 배후지원단지와 이주단지를 조성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이 일대를 활주로 확장에 대비한 유보지로 남겨두고 공항에서 1.7km 떨어진 영종도 중심부로 이전하였다. 시설은 여객터미널, 화물터미널, 계류장시설, 항행안전시설, 교통시설 등으로 구분된다. 여객터미널은 체크인 카운터가 270개, 여권심사대 120개, 보안 검색대 28개, 출발여객 처리용량은 시간당 6,400명이다. 화물터미널은 항공기 24대를 동시에 세울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연간 화물처리능력은 170만 t이다. 계류장 시설은 33만 평으로 60대를 동시에 계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관제통신시설은 지상 22층 높이의 100m의 관제탑이 설치되었으며, 활주로의 시정거리가 200m인 상태에서도 항공기의 착륙이 가능하도록 계기 착륙시설과 표지시설을 갖추고 있다. 인천 신공항을 중심으로 한 영종도 일대는 단독, 주택용지에 6,200여 가구가 건설되어 입주할 예정, 공공시설 용지에는 교육시설과 공원 등이 조성될 예정이다. 인천국제공항의 마스코트는 허비(Huby)이다. 향후 제2단계 공사가 마무리되는 2020년 이후에는 현 활주로 2개가 4개로 증대되며, 여객 터미널 규모 875㎢, 여객수 1억 명, 화물 700만 t, 운항 횟수 53만 회(연)로 증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영종대교는 인천지역(북인천IC)에서 진입차량들과 병목정체를 사전에 방지하고, 악천후시에도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도록 2층 구조(상부도로, 하부도로)로 만들어져 있다. 상부도로는 왕복 6차로이며, 하부도로는 왕복 4차로와 공항철도(미개통)가 왕복으로 통행한다.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의 상징인 영종대교에는 풍속에 따른 안전운전 권고기준을 만들어 운전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통행하는 차량이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영종대교 현수교의 주탑 2곳과 상부 및 하부도로에 원격계측되는 풍향풍속계 5개가 설치되어 있어서 풍속과 풍향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 또한 영종대교 진입 전에 풍향풍속을 계측할 수 있는 기상정보시스템이 설치되어있어서 교량진입전의 풍속상황과 교량상의 풍속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 ■2. 영종대교(기념관) 인천공항고속도로에 진입, 신공항영업소(톨게이트)를 통과한 후 4㎞ 정도 가면 거대한 기와집을 연상케 하는 영종대교가 바다 위에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길이 4,200m , 주탑높이 107m, 교각수 29개. 이 다리에 올라서면 싱그러운 봄바다와 강화도 등 서해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종대교 하부도로 진입로에 위치한 영종대교기념관(032-560-6400)도 탁 트인 바다와 점점이 흩어진 섬들을 조망할 수 있어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지상 3층 지하 1층의 이 기념관은 영상실, 전시실 등을 갖춘 국내 최초의 교량과학관. 관람시간은 오전10시~오후5시(월요일 휴관)이며, 관람료는 무료. 영종대교는 영종도와 인천 육지부를 연결하는 총 연장 4,420m의 서해 횡단 교량으로 현수교 550m, 트러스교 2,250m, 강합성교 1,620m로 구성된 복합교량군이다. 주항로부에 건설된 현수교는 도로, 철도 병용 3차원 자정식 현수교로서 주탑기초 공법으로 뉴매틱케이슨 공법이 채택되었으며, 상부구조는 상층부(도로6차로) 하층부(도로 4차로 및 철도복선)로 된 2층 구조의 Warren Truss형식이다. 세계 최초의 3차원 형상으로 시공된 주케이블은 교량 상층부에 직접 정착된 자정식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전통 한옥의 처마곡선을 형상화한 조형미가 뛰어난 교량으로 대한민국을 찾는 세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줄 것이다. ■3. 프랑크푸르트공항 [Frankfurt Main Airport] -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있는 국제공항. - 구분 : 국제공항 - 설립연도 : 1936년 8월 - 소재지 :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 부지면적 : 1900만㎡ - 터미널 규모 : 여객 터미널 2동(70만 4000㎡), 화물 터미널 6동(110만㎡) - 활주로 길이 : 4,000mx60m, 4,000mx45m, 4,000mx45m(3개) - 연간발착횟수 : 142만 대(1999) - 여객 : 4500만 명(1999) - 화물 : 151만 4267톤(1997) - 취항항공사 : 105개 프랑크푸르트 중심지에서 남서쪽으로 약 9㎞ 떨어진 곳에 있는 국제공항이다. 도심에서 택시로 약 20분 거리에 있으며 프랑크푸르트 역에서 기차로 11분 거리에 있다. 약어는 FRA이다. 1924년 처음으로 시험 비행하였으며 1936년 8월 개항, 루프트한자(Lufthansa)항공사가 취항하였다. 그 후 1949년 제2활주로가 완공되었으며 1992년에는 제2터미널이 완공되었다. 공항 면적은 1900만㎡이다. 활주로는 4,000mx60m와 4,000mx45m, 4,000mx45m 길이의 3개가 있으며 수용 능력은 시간당 76회를 운항할 수 있다. 계류장의 면적은 256만㎡로 항공기 92대가 동시에 머무를 수 있는데 터미널 지역에 36대, 터미널 이외 지역에 56대가 가능하다. 주차장은 3만 6470대를 동시에주차할 수 있다. 여객 터미널은 2동(70만 4000㎡)으로 연간 4500만 명(1999)이 이용하며, 화물 터미널은 6동(110만㎡)으로 연간 화물 수송량이 151만 4267톤(1997)이다. 항공기 운항 횟수는 연간 142만 회(1999)이다. 취항 항공사는 105개 사이며 233개 도시로 취항하고 있다. 1948년 발족된 프랑크푸르트공항공단(Flughafen Frankfurt Main AG)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운영 시간은 5시~24시이다. ■4. 레오나르도다빈치공항 [Leonardo da Vinci Fiumicino Airport] -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 근교에 있는 국제공항. - 구분 : 국제공항 - 설립연도 : 1961년 - 소재지 : 이탈리아 로마 - 부지면적 : 1457만 5000㎡ - 터미널 규모 : 여객 터미널 2동(17만 5000㎡), 화물 터미널 2동(6만 1000㎡) - 활주로 길이 : 3,900mx60m(2개), 3,295mx60m(1개) - 연간발착횟수 : 24만 5727회(1997) - 여객 : 2500만 1038명(1997) - 화물 : 28만 8167톤(1997) - 취항항공사 : 90개 사 로마 도심에서 서쪽으로 34㎞ 떨어진 곳에 있다. 약어는 FCO이다. 1961년 개항하였으며 1990년 로 마 중심가와 철도를 연결하였다. 공항 면적은 1457만 5000㎡로, 활주로는 3,900mx60m 크기 2개와 3,295mx60m 크기 1개가 있으며 수용 능력은 시간당 68회 운항할 수 있다. 계류장은 항공기 77대가 머무를 수 있다. 주차장은 1만 6400대가 동시에 주차할 수 있는 규모이다. 여객 터미널은 2동(17만 5000㎡)으로 연간 20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화물 터미널은 2동으로 면적이 6만 1000㎡이다. 취항 항공사는 90여 개 사이다. 1997년 기준으로 항공기 운항 횟수는 연간 24만 5727회이며, 여객수 는 2500만 1038명이고, 화물 수송량은 28만 8167톤이다. 여객 편의 시설에 비즈니스 센터, 렌터카 빌딩, 예배실, 장애인용 휴게실, 유아방 등이 있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에 시각 장애인들이 원하는 장 소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파일럿 라이트(Pilot Light)라 불리는 레이더 안내 시스템과 농아용 모뎀 전화가 있다. 도심에서 공항행 교통편은 고속도로 및 전철이 편리하게 공항까지 직접 연결되어 있다. 남부 유럽의 주요 관문으로서 2005년까지는 신규 여객시설의 건설 및 위성형 터미널 건축, 2층 의 6차선 도로 건설 등의 공항 개발 계획을 갖고 있다. 공항은 1974년 설립된 ADR(Aeroporti di Roma SPA:로마공항주식회사)에서 관리 및 운영하고 있다. 운영 시간은 24시간이다. ■5. [ 로마 ] Roma 고대와 현대가 함께 숨쉬는 곳, 도시 전체가 살아있는 역사를 증언하는 박물관, 고대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 고대의 영웅들을 만난다. 초대 기독교의 증인들이 참 신앙의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는 곳, 르네상스와 바로코의 걸작들이 당신을 기다리는 곳, 바로 로마 (ROMA)이다. 약 2,750년 전에 세워진 로마는 한때는 힘으로, 한 때는 예술로, 한 때는 종교로 세계를 지배하였다. 로마를 보노라면 "모든 길은 로마(ROMA)로 통한다."는 말을 실감 나게 한다. 이태리의 유혹은 그 역사만큼이나 크고 깊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이라면 "로마(ROMA)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것이다. 로마(Roma)의 모든 것을 알아보자. 로마의 일곱 언덕 중에 하나인 팔라티노(Palatino) 언덕은 기원전8세기(B.C.753년) 에 로물루스(Romolo)에 의하여 로마가 건국된 곳이다. 로마가 건국된 후 왕정시대(기원전753-510), 공화 정 시대(기원전510-29)를 거치며 제국으로서 기틀을 마련하는 시기는 B.C. 264-146년 사이에 있었던 카르타고(Cartago)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부터이다. B.C.202년 로마장군 쉬피오네(Scipione)는 카르타고(Cartago)와의 전쟁에서 카르타고(Cartago) 장군 하니발(Annibale)를 물리친다. 이를 기점으로 계속적인 정복전쟁을 통하여 영토를 확장하여 나아갔다. B.C.60년경에는 로마의 폼페오(Pompeo) 장군이 동터어키(Turchia)와 시리아(Siria), 팔레스티나(Palestina) 등을 정복하였다. 이후에 쥴리오 체사레(Giulio Cesare)는 내전에서 폼페오(Pompeo) 장군을 물리쳐 로마를 통일시킨다. 하지만 그는 B.C.44년 그의 심복 부루토(Brutto) 에 의하여 칼을 맞고 "부루토(Brutto) 너마저도"라는 한마디를 남긴 채 피살된다. 쥴리오 체사레(Giulio Cesare)가 죽은 후에 그의 조카 오타비아노(Ottaviano)는 안토니오(Antonio), 레피도(Lepido)와 함께 삼 두 정치로 로마를 다스렸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의 사랑에 빠져 로마의 많은 영토를 그녀의 자손에게 주는 안토이오(Antonio)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던 옥타비아노(Ottaviano B.C.29-A.D.14)는 그를 제거한 후 로마제국시대(기원전 29-476)를 열었다. 이때부터 A.D.2세기 까지가 로마제국의 최 전성기였다. 트라이아노(Traiano) 황제가 죽은 해인 A.D.117년의 로마인구가 15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로마는 이후 A.D.331년 코스탄티노(Costantino)대제가 로마제국의 수도를 비잔티노(Bizantino)로 옮기기 전까지 1000년 이상 로마제국의 수도로 고대문명의 중심을 이루었다.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던 로마 공회장(Foro romano)은 전 세계로 연결되는 도로를 발달시켜 세계를 지배하였다. 쥴리오 체사레(Giulio Cesare)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의 소식이 전해진 곳도 이곳이다. 르네상스, 바로코 시대 때는, 로마가 건축, 문화,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고 현재는 카톨릭 교회의 중심지로 바티칸 교황청을 중심으로 세계도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6. 로마의 역사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BC 753년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테베레강 하구에서 우안의 홍적층 대지와 좌안의 알바노 화산군의 용암에 의해 좁아지고 있는 지점(현재의 티베리나섬 부근)까지 작은 배가 올라갈 수 있었고, 그보다 좀더 상류에는 아펜니노의 구릉지대에 이르는 중요한 교통로였던 아니에네강이 합류하였다. 바로 이곳은 에트루리아, 라틴, 사비누스의 3종족이 접하는 곳이기도 하며, 그러한 교통의 요소에 시장도시로서 기원한 것이 바로 로마였다. 그 뒤 로마는 한때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시벽(市壁)을 갖춘 도시로 발달했다고 한다. BC 6세기 말에는 에트루리아계(系) 왕을 추방하고 귀족에 의한 공화제를 실시함으로써 로마는 여러 라틴 도시의 맹주(盟主)가 되어 고대 로마 국가의 중심이 될 기초를 닦았다. 현재 ꡐ종착역(테르미니)ꡑ 부근에 그 일부가 남아 있는 세르비우스 왕의 시벽은 BC 4세기의 것으로, 이 무렵부터 로마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는 국가의 중심으로서 발전하였다. 270년경 제정로마 시대의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축조한 시벽은 주위 46km에 이르며, 현재 그 대부분이 남아 있다. 그러나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막센티우스 왕을 폐위하고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여 산피에트로대성당과 개선문을 세운 무렵부터 로마는 제국의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밀라노와 라벤나로 이탈리아반도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이 옮겨졌으며, 이후 중세에 걸쳐서 로마는 산피에트로대성당을 갖는 로마가톨릭교의 중심지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962년 신성로마제국의 성립으로 로마는 형식적으로는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고 역대 황제는 대관 때문에 로마로 오게 되었으나, 로마는 교황권과 황제권이 충돌하는 무대를 이루게 되었다. 12세기가 되자 로마, 라쵸의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코무네가 성립되었고, 황제의 지지를 얻어 교황과 자주 대립하였으나, 로마의 코무네는 북이탈리아, 중부이탈리아의 코무네처럼 강력한 경제적 기초는 없었고 여전히 산피에트로대성당을 중심으로 한 종교도시적 성격이 짙었다. 따라서 아비뇽에 교황이 옮겨가 있던 14세기는 로마가 가장 침체했던 시기로 1348년 페스트가 유행했던 무렵에는 인구가 2만도 안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5~16세기에는 식스투스 4세, 알렉산데르 6세, 율리우스 2세 및 레오 10세 등의 르네상스 교황이 등장하여 교황의 세속적인 권한이 크게 신장되었고, 그들의 학예보호 시책에 따라 로마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 이 시대에는 테베레강의 좌안, 바티칸의 대안 부분에 대규모의 도시계획이 이루어져 현재까지 남아 있는 로마 구시가의 기본적인 형태가 만들어졌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일어났던 ꡐ로마의 약탈ꡑ(1527) 때문에 일시적 중단은 있었으나, 로마가톨릭교의 중심으로서 로마의 발전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의 바로크시대까지 계속되었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많은 궁전과 광장이 건설되었다. 이와 같이 ꡐ교황의 도시 로마ꡑ로서, 또 중부이탈리아에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교황국가의 수도로서 존재해온 로마는 19세기 이래 공화주의운동과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이에 교황은 프랑스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1849년에는 마치니, 가리발디 등의 지도를 받는 시민 공화체제를 붕괴시키고, 다시 1861년 이탈리아왕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로마와 그 주변을 계속 지배했으며, 이탈리아왕국의 수도는 처음에는 토리노, 다음에는 피렌체에 두었다. 로마가 이탈리아왕국군에게 점령된 것은 1870년에 이르러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문에 로마를 방비했던 프랑스군이 허술해졌을 때이다. 이듬해인 1871년 로마는 이탈리아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이에 화가 난 교황은 바티칸 궁전에 들어앉아 스스로 ꡐ바티칸의 죄수ꡑ라고 칭하며 이탈리아왕국과 대립하였다. 그것이 이른바 로마 문제였는데, 문제가 해결된 것은 1929년 무솔리니와 교황 피우스 11세 사이에 ꡐ라테란협정ꡑ이 체결되고 바티칸시국이 성립되어 이탈리아에서 가톨릭교회의 특수한 지위 등이 인정되었을 때부터였다. 로마의 도시로서의 발전은 통일 이탈리아 국가의 수도가 된 뒤 급진적으로 이루어져서 1871년 22만이었던 인구가 1900년에는 40만, 1936년에는 115만에 이르렀고, 그것이 다음 30년 동안에 배로 증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공군의 폭격을 당하였으나, 연합군이 북상할 때는 무방비도시를 선언해서 전쟁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귀중한 문화재가 전화로 파괴되는 것을 모면할 수 있었다.  
 
 

  

1. 동북아 허브 인천공항  

 

 

1-1.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에서

 

 

 

2. 로마에서

 

2-1. 로마 숙소 JOLLY MIDAS 호텔 앞에서

 


 

2-2. 로마 시내 지도외 시네전경

 

 



루벤스작 로물루스와 레무스

 

2-3. 로물로스 형제와 이태리 전도

 

 

 


 

로마의 건국 기원

일반적으로 인간이 윤리적이나 어떤 행위를 바로 잡는 역할을
맡아주는 형태의 종교를 갖지 않을 경우 짐승과 같은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기 정화 체계를 가져야 한다.

 

종교는 그것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선 결코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법은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효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사이 이기 때문에 법은 필요하다.

이 법의 필요성에 처음 눈을 뜬 사람들이 바로 로마인들이다.

 

한편으로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신에게 요구하지 않은
그리스인들은 그 역할을 철학에 요구했다.

 

오늘은 로마 건국 신화 이야기를 해보자.

 

기원전 6세기 경 로마국가를 건설했었던 초대 로마인들은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만 못하고,

체격이나 군사력면에서는 켈트인(기원전 6세기에 이동)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 에투루리아인보다 못했으며,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졌지만
타민족과 문화를 개방적으로 융화해 이질적인 요소들을 서로 동화해 나가는 개방성은

누구보다도 뒤떨어지지 않은 민족이었다.

 

* 에투루리아인 :

 

로마의 티베레강과 아르노강 사이에 발흥한 민족으로 주변에 광산이 많았으며

각종 광물을 수집 가공 제작하는 기술력이 높았으며, 나중에 로마에 융합된 뒤

로마가도를 닦을 대업에서도 에투루리아 인이 참여해서 건설한 공로는 지대하다.

 

그 지역의 명소로는 피에솔레 평야, 피렌체, 토스카나 등등의 지방.

 

지중해 서쪽 근해 이름을 티레니아 해로 부른 것도 바로 에트루리아인의
바다란 뜻이다.

 

한편 로마 남쪽에 그 당시 세력을 떨치던 그리스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건설한 * 도시국가도

벙성해서 농업과 목축업에만 의조하던 당시의 로마는 소외당한 채 에투루리아 인과

서로 교역을 했다고 한다.

 

* 도시국가

 

나폴리, 타란토(현재 이탈이라 해군기지), 쿠마, 크로토네, 남부 프랑스에 마르세유,
시칠리아 섬[메시나,시라쿠사,아그리젠토 도시] 등에 해운과 교역에 유달리 강한
그리스인들이 진출해 도시 폴리스 국가를 형성시켰음.

 

태어난 그 당시의 로마는 북부의 에투루리아와 남부 이탈리아 및 지중해 전역에

통상과 무역으로 뿌리를 내린 그리스란 부족 들 양대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온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네들이 로마의 독립을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네들이 자기네 세력권 안에 넣고 싶어

할만한 매력이 없는, 즉 농업과 목축업에만 전념하는 척박한 지역 때문이기도 했다.

 

그 당시 로마인들은 아테네 장인들이 만든 아름다운 항아리도, 에트루리아 인들이
종교히 만든 금속기구를 살 돈도 없었다.

이리하여 로마는 유년기에 주변의 강대한 적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로마 국가의 탄생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크로이 란 섬의 전쟁에서
그리스의 아가멤논 사령관이 이끄는 침략군에 의해 전쟁에서 진 나라 황족인 아이네이아스의

국외 탈출에서 시작된다.

 

 

       아이네이아스에게 지혜를 주는 어머니 아프로디테 미의 여신

 

아이네이아스는 멸망한 트로이 왕족인 안티세스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 난 아들이다.

트로이 전쟁 마지막 날 풀리아모스의 딸 크레우사와 결혼했지만 피난 도중 서로 떨어지게 된다.

 

목마 속에  숨은 그리스 군대에 의해서 트로이가 함락되자, 아프로디테의 경고를 받은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를 탈출하는데, 그의 아버지인 앙키세스는 늙어서 빨리 걸을 수가
없어서 그의 아들 어깨에 매여 갔다고 한다.

 

그들 일행은 배를 타고 트라키아, 크레타, 델로스에 거쳐 디도 여왕이 사는

 

   디도 여왕이 통치하고 있는 리비아 해안의 아이네이아스

 

북아프리카를 거친 뒤 다시 시칠리아 등을 거쳐 헤스페리아 ( 지금의 이탈리아 땅 ) 해안가에

도착하게 된다.

 

 

       배를 타고 지중해를 겉도는 아이네이아스 트로이족

 

그는 여기서 시빌레를 만나 ( 신들의 신탁을 고하는 무당 ), 돌아가신 아버지 앙키세스를

만나서 후세에 위대한 제국을 세울 예언과 지혜를 들으라는 시빌레의 충고를 받아들여

지금의 폼페이 베수비오 산 근방의 유황이 있는 동굴 속에 있다는 사자의 세계인 지옥을

다녀온 뒤, 아버지의 영혼과 재회하여 미래의 게시를 듣는다.

 

지옥을 다녀 온 뒤 테베레 강가에 듳을 내리게 되는데 당시 이족 지방을 통치하는 사투르누스

의 3대손인 라티누스가 통치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이 왕은 늙었고, 그에겐 아주 아름다운

라비니아 란 딸이 있었는데, 라티누스는 이웃 부족의 왕인 루톨리아 부족의 왕인 트루누스

에게 마음을 두고 사위로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이윽고 트루누스는 외계에서 온 어떤 인물에게 라비니아를 빼앗기고 그의 자손들은 앞으로

위대한 국가를 세운다는 꿈을 꾸게 된다. 그래서 그와 아이네이누스는 결국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결국 그는 투루누스에게 이기게 되고,훗날 그의 자손인 로물로스와 레무스가 로마

국가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아이네이아스는 결국  로마의 신화의 시조이자 주인공인 셈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 같이 헤스페리아에 정착한 뒤 오랜 시간이 (대략 몇백년) 흐르게 되고,

그동안 수 차례의 트루누스와의 전쟁을 치룬뒤, 아이네이아스와 트루누스는 최후의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여기서 트루누스는 아이네이아스에게 죽는다.

 

          아이네이아스와 하르푸이 사이에 벌어진 전투

 

 

          루툴리 족과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아이네이아스
  (너무 중상이어서 어머니 아프로디테가 몰래 치료해 회생)    
                            

 

싸움에서 이긴 아이네이아스는 라비니아를 신부로 맞아 들이고, 그의 아들 율리스는

알바롱가 시를 건설하는데, 이곳은 훗날 그의 자손인 로물로스와 레무스가 태어난

탄생지로서, 바로 로마의 터전이었다.

 

                   신격화가 된 아이네이아스

 

참조 :

. 그리스.로마신화 - 아이네이아스의 모험
http://blog.daum.net/ro4030/15665776


. 그리스.로마신화 - 지옥
http://blog.daum.net/ro4030/15671962


그로부터 몇백년이 흐른 뒤 아이네이아스의 후손 중에, 한국의 건국신화에 단군이

나오는 것처럼 로마의 건국신화에서도 로물로스와 레무스가 신의 자손으로

탄생하게 된다.

 

 

알바롱가의 왕 누미토르의 딸이자 왕녀인 레실비아와 군신 마르스 신 사이에서
태어난 레무스와 로물루스 쌍둥이 형제가 바로 로마의 시조다.

 

알라롱가 왕의 동생 아무리우스는 왕위가 탐나 형 누미토르에게서 왕을 빼았으려고
그 아들을 죽이고 딸인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 신전의 신녀가 되게 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도록 만들어 버려 두었다.

 

베스타신은 신성한 불의 신, 화로의 신인데 신전에서는 불을 피우고 불을 지키는 일을 한다.

 

만약 이 불이 꺼지면 나라에 불행이 덥친다고 절대로 꺼트리면 안되기 때문에 ,
불을 지키는 일을 신녀들이 하게 되는데 이 때 신녀들은 죽을 때까지 처녀여야만 한다고 한다.


만약 이를 어겼을 시 가혹한 벌인 생매장을 당하게 된다. 신녀가 된 실비아가 베스타헤스티아의

신 앞에 바치기 위해 마르스의 숲으로 물을 길러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르스 군신은 이 실비아를 보고 한눈에 반해 버린다. 

 

그 바람에 로물루스와 레노스가 태어나게 되는데 아무리우스는 그녀의 행위가
너무 화가 나 그녀와 쌍둥이를 티베레 강에 던져 버린다.

 

 

그러나 티베레 강의 신은 죄 없는 그녀를 아내로 맞아 들였고, 쌍둥이가 담겨져 있는 바구니는

강의 범람으로 흘러 내려가다가 팔라티누스 언덕 아래의 무화과 나무 가지에 걸리게 된다.

 

나무 가지에 걸린 쌍둥이들의 울음 소리를 들은  암늑대는 쌍둥이들을 발견하여
젖을 먹여 기르게 된다.

 

 

늑대에게 키워진 쌍둥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나가던 목동 파우그툴르스의 눈에 띄어
그의 손에 자라게 되는데, 그러던 어느날 레무스가 아물리우스의 가축을 빼었다고 잡혀간다. 

 

파우스툴르스는 로물로스에게 출생, 가문에 대해 알려주게 되고 로물르스는
알바롱가로 가서 아물리우스를 쓰러트리고 외조부인 누미토르를 왕으로 복귀시키게 된다. 

 

그 후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도시를 세우기로 했는데 둘은 쌍둥이였기 때문에
왕이 선뜻 정하지 못하고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 위에
그들의 마을을 세우게 된다.

 

그 뒤에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알콩달콩 잘 살았으면 좋았으련만, 로물로스는 레무스가 도시의

신성한 경계인 도랑을 뛰어 넘어왔다는 이유로 레무스를 죽여 버리고 로마의 단독 지배자가 된다.

 

로마의 일곱 언덕 중 로물로스는 팔라티우스 언덕에 자리를 잡고,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에

자리잡게 되는데, 당시 테베레 강을 끼고 도는 습지 위에 일곱개의 언덕이 서있는 척박한 땅이

바로 로마였다.

 

그 로마의 일곱언덕 이름은 퀴리날레(현 대통령궁), 비에날레(내무부), 에스퀼리노,
카피톨리노(신들의 거처), 팔라티노, 첼리오, 아벤티노 등의 이름으로 된 언덕들이며
기원 전 753.4.21일, 18세 약관의 나이로 로물로스는 아우인 레무스를 죽이고
인근 유력자 100명의 장로를 모시고 팔라티노 언덕 위에 성을 쌓고,
드디어 로마란 국가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 사비나 족 여인의 강탈

 

 

당시 로마엔 여자가 없었다. 그래서 로물로스 이웃 부족인 사비나 족의 여인을
강탈할 음모를 꾸며 잔치에 사비나 일족을 초대한 뒤 여인을 강탈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로써 사비나 족의 타티우스 왕과 4번에 걸친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결국 로마 남자의 여인이 된 사비나 족의 딸들의 간청으로 결국 화해를 하게 되고
사비나 족들은 로마로 이주해 와 퀴리날레 언덕에 정착하게 된다.

 

        사비나 여인의 화해 

 

서양에는 지금도 신랑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풍습이 있는데
이것은 사비나 족의 여인 강탈 사건이 있은 이후 오늘날까지 그 관습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당시 로마는 인구증가와 병력 증가를 위한 일시적 방책에 불과했지만
로마의 이웃부족에 대한 개방 정책은 이후에도 상당히 훌룡한 성과를 올리게 된다.

 

 

 

그래서 플루타스코스는 이런 현상에 빗대어 로마인을 아래와 같이 칭송했다.

 

"패자도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로마의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 한 것은 없다 !
"

 

 

이외에도 로물로스는 인근 부족과의 싸움으로 점차 로마군을 단련시켜
유명한 백인부대를 고안해 내기에 이른다.

 

 

참고 사이트 :

 

. 로물로스, 레무스 로마 건국신화


http://blog.naver.com/yj651215/140056556441
http://blog.naver.com/liebemilch/120022593629

 

. 사비니 족 여인 강탈 사건
http://mlkangho.egloos.com/10129435

 

.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 , "오딧세이"

 

. 지중해 대탐험
http://spv.sbs.co.kr/viewer/viewer_popup.jsp?image_id=I0001119740

 

. [책]-김문환 기자의 로마문명
http://book.daum.net/detail/review/read.do?bookid=KOR9788987957470&seq=146703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5755

 

SBS 김문환 기자의 지중해 문명기
http://news.sbs.co.kr/journalist/news_column_view.jsp?news_id=N0311766484

 

. [책]-3일만에 읽는 고대문명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8492

 

 

. good all blog Image site

http://www.environmentalgraffiti.com/featured/journey-meet-last-shaman-mikmaq/19912

 

( http://twitter.com/linibiz Name M. Meier / Germany, Hamburg / Recommented site : http://www.bigpictur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