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해외여행산행

2003 유럽 여행 낙수[제2일] -폼페이, 쏘렌토-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28. 13:58
□ 제2일 2003/4/8(화) 全日 로마 인근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카프리)관광
◆ 05:15-06:15 
호텔 주변 고급 빌라촌 골목 1시간 조깅, 
소나무, 종려, 측백. 올리브, 개인정원, 
담장위 기와, 깜깜한 골목 두려움, 빌라
->대학->아파트->호텔->돌아옴, 
날씨 맑음, 상쾌
◆ 07:00-07:30 
호텔조식 서양뷔페식
◆ 07:30-11:35 
폼페이 유적지행, 
로마 외곽 순환도로(그란데 라코르) A1도로 이용 나폴리행 고속도로 진입, 
로마 한국인 가이드 100여명 활약, 
인사 소개
(오후 3시까지 “부온 조루노”좋은 하루 되세요, 
3시이후 “부온 세라”, 
“그라찌예”감사합니다, 
잼잼하면서“차우”친한사람, 
나폴리:캄파니아주도, 인구 107만, 인근 카프리섬, 이스키아섬, 
◆ 11:35-12:10 
폼페이:2만명 거주, BC79베스비우스[Vesuvio Mt.]폭발, 
1281m, 나폴리 동쪽 12km, 초기 오스크인거주, 에뜨루리아인 점령, 
포에니전쟁시 한니발 편(便), 이후 로마에 복속, 1860피오넬리 교수 발견, 
입구->현지 안내인 동행->해변으로 향하는 문->도자기, 인골창고, 
개선문, 마차가 지나는 길, 바퀴 자국, 환락가, 환락가 가는 집 표시, 
홍수시 건너는 징검다리등
◆ 12:30-13:20 
폼페이 유적지 앞 이(伊)해물(새우, 오징어) 스파게티 식당
->아주 짜고 매움, 후식 귤, 사과
◆ 13:20-13:50 
기차로 소렌토(노래의 도시, 돌아오라 소렌토로, 
오! 쏠레미오)로 이동, 시골 사람들 같은 차 안의 이(伊)인들, 
안내인 이 아줌마 애 둘(대학), 
일정 변경-> 환상의 섬 카프리 전격 방문(이유: 파도 잔잔) 
플라타너스, 귤 밭, 종려, 소나무
◆ 13:50-14:05 
소렌토역에서 시내버스로 소렌토 항구로 이동, 
버스 가는 도중 고풍스런 시내, 나무는 종류 야자등 남국적 풍경, 
석회암 흰색 절벽 사이 좁은 길로 항구로 내려감, 
절벽에서 축대 쌓아 건물 축조, 흰 석회암으로 구성된 산 아래 
소렌토 전경 비디오, 카메라에 담음
◆ 14:05-14:45 
카프리 선착장 도착, 
◆ 14:45-16:00 
미니버스로 LIFT승강장 오르는 길 좁음, 울릉도 연상, 
차 2대 겨우 비킴 유리창 밖 천애의 낭떠러지, 
플라타너스 가로수, LIFT승강장 도착, 
◆ 16:00-17:00 
LIFT이용 정상 도착, 지중해 맑은 물, 발아래 채전, 
야생화, 흰 절벽, 카프리 항구, 촌락들, 
내려와 LIFT승강장에서 커피, 음료, 항구로 미니버스 이동
◆ 17:05-17:55 
카페리 도선, 맑은 물, 바람, 나폴리 베네렐로 항구 도착, 
가스텔디 누오보성(불 통치 성) 지저분한 나폴리 거리, 쓰레기, 거지, 전찻길, 
폐가들 즐비, 빨래가 펄럭임, 나폴리 소개:107만, 캄파니아주도
◆ 18:00-22:0 
로마 버스이동 한정식식당(소나무 가든, WC때 응원 식당, 
WC로마인들 냉소적 반응)삼겹살, 상추(큼), 전골등 한국음식이지만 
약간 상이, 호텔 JOLLY MIDAS 534호 돌아옴

[ 나폴리 ] Napoli (3대미항)
이탈리아 캄파니아주(州)의 주도(州都). 
위치 : 이탈리아 캄파니아주(州)
인구 : 100만 470명(2000)
이탈리아의 캄파니아(Capania)주의 주청소재지로 인구는 100만 470명(2000)이다. 
영어로는 네이플스(Naples)라고 한다. 
이탈리아 내의 수도 로마, 상업 중심 도시 밀라노에 이어
이탈리아 제3의 도시이다. 
나폴리만(灣) 안쪽에 위치하는 천연의 양항으로, 
배후는 베수비오 화산의 서쪽 기슭까지 이르고 있다. 
따라서 시가는 동쪽으로 차차 높아지는 경사지에 입지하고, 
토양은 비옥한 화산재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아열대산인 오렌지의 가로수가 끝없이 연속되는 모래 해안은 
배후의 베수비오 화산과 더불어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어, 
예로부터 ꡐ나폴리를 보고 죽어라ꡑ라는 유명한 속담이 전해올 만큼 
세계적인 관광도시의 하나이다. 

도시 형성은 나폴리(Napoli)만 안쪽 기슭에 계단상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배후는 베수비오(Vesuvio) 화산의 서쪽 기슭까지 이르고 있다.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 아래 최저 평균 기온이 8 ℃ 이하로 내려가지 않으며 
연 교차가 적어 이탈리아(Italia)의 도시 중 기후가 가장 좋다. 
여름은 건조하나 사실상의 건기(乾期)는 1개월 미만으로 
농업용수 문제도 다른 도시에 비해 절실하지 않다. 
아주 드물게 눈이 내리는 일도 있으나, 
연중 온난하여  주변 일대에는 
오렌지, 무화과, 올리브, 토마토 등의 과실이 많이 생산된다. 
또한 부근의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에서는 맥류․과실류의 집산가공이 활발하다. 

농업 중심인 남부 지방과는 달리 수공예 (카메오, 세라믹을 이용한 공예가 발달), 
석유 화학, 조선 공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나폴리 항은 항구로서 제노바 다음 가는 이탈리아의 제2의 상업 항구로 
1924년에 확정되어 건설된 후에 항만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나폴리는 그 이름이 말하여 주듯 그리스의 식민도시 네아폴리스가 그 기원이나, 
이에 대응하는 팔레아폴리스가 어디에 있었던가 하는 데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어 일치하지 않는다. 
화산분화를 피해 온 주민들에 의하여 건설된 것으로 짐작된다. 
고대 로마시대에도 번영하였던 항도로 알려졌으며, 
로마시대의 기본적인 가로망은 현재 시의 중심지에 그대로 남아 있다. 

중세를 통하여 나폴리에는 비잔틴문화의 영향이 강하였으나 
12세기 이후에는 에스파냐 세력의 영향이 강해졌으며, 
남이탈리아를 지배하는 나폴리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8세기 말 부르봉 왕조 지배하의 나폴리는 
인구 40만을 헤아려 이탈리아반도 최대의 도시였다. 
1860~1861년 G.가리발디에게 정복되어 
양(兩)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로서의 시대는 끝났으나, 
그 후에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이탈리아의 중심도시로서 
근대공업의 발전도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가장 앞서 있다. 

나폴리항은 제노바 다음가는 이탈리아 제2의 상항(商港)인데, 
이 항구가 1924년에 확장되고부터 현대 나폴리의 발전이 비롯되었다. 
공업은 서쪽 포지리포 지구 및 남동 해안을 따라서 발전하고 
주택지구도 교외에 부단히 발전해 갔으나, 
남부 중심도시로 발달하면서 흘러들어오는 
인구에 의한 빈민문제 등 사회문제도 심각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대부분의 시가지, 항만시설이 파괴되었으나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과 17~18세기의 바로크 양식의 교회, 왕궁 등은 복구되었다. 
나폴리(Napoli)는 베수비오(Vesuvio) 화산과 
나폴리(Napoli)만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자연풍경이 절경을 이루어 
세계 3대 미 항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특히 나폴리(Napoli) 바다 앞에 있는 섬들은 아름다운 경치에 
기온이 온난하고 파도가 없으며 물이 맑아 고대 로마시대부터 휴양지로 발달하였다. 
나폴리(Napoli) 앞 바다 중간에 있는 카프리(Capri) 섬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섬이다. 
이와 연계되는 소렌토(Sorrento), 아말피(Amalpi) 해안의 경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과거 향락, 휴양지였다가 베수비오(Vesuvio) 화산의 폭발과 함께 
2000년 동안 땅속에 잠들다가 발굴된 나폴리 가까이에 있는 
폼페이(Pompei)의 유적은 
2000년 전의 생활상과 향락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여 준다. 
나폴리(Napoli) 박물관에 당시의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1224년에 창설된 나폴리 대학(Universita' di Napoli)은 학문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1737년에 세워진 산 카를로 극장(Teatro di San Carlo)은 
나폴리(Napoli)를 중심으로 한 음악을 활성화 시키고 있다. 
현재 많은 예술가, 연예인, 음악가들이 나폴리(Napoli) 출신들이다. 

공업으로서는 전통적인 식료 ․섬유피혁공업과 병행하여 금속 ․화학 ․기계공업 등도 활발하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시가지 ․항만시설이 파괴되었으나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 주로 17~18세기의 바로크 양식의 교회 ․왕궁 등은 복구되었다. 
나폴리는 베수비오 화산과 나폴리만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세계 3대 미항의 하나로 알려졌으며, 
가까이에 있는 폼페이의 유적이나 
카스텔 누보 등의 건물, 
또 나폴리 민요 ․요리 등으로 관광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나폴리만에 면한 소도시들은 나폴리의 위성도시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으며, 
동시에 활발한 어항, 마카로니 생산의 중심지, 
카메오 등 조개세공의 산지로서 유명하다. 

또한 1224년에 창설된 종합대학과 동양연구대학, 
1737년 이래의 산카를로 가극장(歌劇場) 등이 있어 학예중심지로도 유명하다. 
박물관으로는 BC 79년 베수비오의 화산재로 매몰되었던 
부근의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두 도시의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 해양박물관, 유럽 유수의 수족관(水族館), 육 ․해군기지, 음악학교 등이 있다.  
나폴리를 보고 죽으라(Vedi Napoli e poi muoia)! 
어떤 이가 나폴리를 보고 감탄하여 한 말이다. 
누구는 이태리를 Cantare(노래), mangiare(음식), amore(사랑)의 나라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특히 나폴리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 나폴리왕국 [Kingdom of Naples]
중세부터 1860년까지 남부 이탈리아를 통치한 왕국이었다. 
1282년 구(舊)시칠리아 왕국이 남부 이탈리아․시칠리아섬으로 분리되면서 발족하였다. 
14세기 전반 앙주가(家) 지배하에 번영하다가, 
1443년 아라곤의 알폰소 5세에게 정복되어 시칠리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16~17세기 에스파냐왕이 시칠리아왕을 겸하자, 그 속령(屬領)이 되었다. 
1701~1714년의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결과 부르봉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1734년 에스파냐의 인척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독립하였다. 
페르디난도 4세의 계몽주의정책 시행으로 문화적 부흥기를 맞이하나, 
19세기 초 나폴레옹군의 침략으로 프랑스 지배를 받았다. 
1815년 다시 페르디난도 4세가 복위하여 왕국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양(兩)시칠리아왕국의 발족으로 독립왕조시대는 끝나고,
1860년 G.가리발디(1807~1882)에 의해 양(兩)시칠리아 왕국이 해체되었다. 
국민투표에 의하여 사르데냐왕국에 병합되었다. 
■ [ 폼페이 ] Pompei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灣) 연안에 있던 고대도시.   
지금은 내륙(內陸)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江)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의 관문에 해당하여 농업 ․상업 중심지로 번창하였으며, 
제정(帝政)로마 초기에는 곳곳에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선 
피서 ․피한의 휴양지로서 성황을 이루었다. 
폼페이의 기원은 매우 오래 되었으며, 
교통의 요충, 비옥한 토지를 배경으로 처음에는 오스키인(人)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았다. 
BC 470~BC 424년경에는 에트루리아인(人)이 차지하였고 
교역이 번창하여 농산물․포도주․어패류․경석(輕石)을 산출해 수출하였으며, 
그리스 신전이 세워지는 한편 오스크이탈리아문화도 발전하였다. 
BC 5세기 삼니움인에게 점령되었고, 
누케리아를 맹주(盟主)로 하는 도시동맹의 일원이 되어 귀족공화정체제를 갖추었다. 
그동안 남부 이탈리아에 많은 식민시(植民市)를 건설한 그리스인들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BC 3세기 로마의 진출로 한때 독립하여 헬레니즘․로마문화를 급속히 받아들였다. 
포에니전쟁 때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편에 섰으나 
그 뒤 로마 지배 아래 들어갔으며, 
그 후 동맹시전쟁(同盟市戰爭, BC 91~BC 88) 때에는 동맹시 쪽에 가담하였으므로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술라의 공격에 굴복,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그 뒤부터 급격히 로마화(化)하였다. 
도시제도를 정비하고 라틴어를 수용하였으며, 
극장․베누스신전․이시스신전․목욕탕․바실리카 등을 세워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로마 부유층의 휴양지로서 별장은 
호화로운 벽화․조각․모자이크로 장식되고 수도(水道)․포장로․상점도 갖추어졌다. 
최성기 인구가 약 2만 명에 이르렀다. 
제정로마 초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폼페이는 고대도시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인구는 2만~5만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인구의 계절적 변동폭이 크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에서는 대폭발이 있기 이전인 
63년 2월에도 큰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뒤 다시 복구되어 전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로 재건되었으나,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2~3m 두께의 화산력(火山礫)과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어버렸다. 
당시의 분화상황은 소(小)플리니우스가 실감있게 전해주고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은 참화를 면했으나 2,000여 명이 사망하였다. 
분화가 멎은 뒤 재보(財寶)를 발굴한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15세기까지 폼페이의 존재는 잊혀졌다. 
16세기 말부터 소규모 발굴이 시작되고 
1748년부터 본격 발굴에 착수하여 꾸준히 발굴이 계속되었으며, 
옛 시가의 거의 절반 정도가 발굴되었다. 
벽화를 포함한 초기의 발굴품은 대부분 나폴리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가급적 현지에서 복원한다는 방침이다. 
전성기에 갑자기 멸망하였으므로, 
당시 로마 도시의 일상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었으며, 
그것들은 상당히 쾌락적이고 현세 향락적인 도시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폼페이의 많은 벽화를 통하여 유품이 적은 헬레니즘 회화를 엿볼 수 있다. 
■ *폼페이 최후의 날* 
지진은 로마의 티투스 황제가 집권한지 한 달이 지난 
서기 79년 8월 24일 아침에 시작되었다.
베수비오산 정상에서부터 시작되어 
나폴리만으로 내려오면서 
그 때까지는 단순히 여기저기 농가와 포도밭으로 들어찼던 
산기슭이 검은 연기를 뿜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드문드문하던 진동들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잦아졌으며 
나중에는 계속된 진동으로 산꼭대기에서는 불꽃을 튀기면서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 화산 폭발의 시작은 10세기가 넘도록 활동을 멈추었던 
기존의 화산구 함몰지역에서 새 분화구가 터지면서 아침 내내 계속되었다. 
오후 한 시, 갑자기 베수비오는 굉음과 함께 수 킬로미터의 경석 기둥을 분출시키며 
산꼭대기로부터 큰 소나무 모양의 엄청나게 큰 먹구름을 형성했다. 
갑자기 온 세상이 깜깜해졌고 남동쪽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갔으며, 
먹구름은 지표면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첫 번 굉음 후 반 시간이 지나자 
재와 경석더미 위로 힘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에르콜라노에서 소렌토 해안선 지역과 사르노 유역 안쪽, 
남쪽으로는 파에스툼까지의 지역이 피해를 입었으나 그 중 가장 피해가 심한 곳은 폼페이였다. 
폼페이는 사르노강 하구 화산의 경사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약 17년 전,
즉 서기 62년 이미 지진을 겪었던 곳이다. 
이 천재지변은 로마제국의 가장 비옥하고 아름다운 지역 중의 하나였던 곳을 파괴하였다. 
로마는 이 지진을 공포와 긴장으로 맞아들였고, 원로원은 피해복구를 위해 구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이란 
단지 남은 사람들을 지진의 피해가 없었던 지역으로 피신시키는 일이었을 뿐, 
그 밖에는 그다지 큰 해결책이 없었다. 
후에 몇 몇 사람들이 우물이나 굴을 파서 
매장된 보물이나 재산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이것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근처에 목자들과 농부들의 오막살이가 몇 채 들어서기도 했고, 
화산의 비옥한 토지 경작을 위한 농가, 별장도 생겨났지만, 
바로 그곳 폼페이와 에르콜라노 그리고 스타비아에는 세월이 흘렀고 
그 때 그 사건은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세월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 *폼페이의 유적 발굴* 
폼페이의 유적 발굴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1860년 고고학자 피오넬리 교수가 플리니우스의 직필인 듯한 문서를 발견했다. 
문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기원전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에 전대미문의 대분화가 일어났다. 
거대한 불기둥과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산의 상반 부분은 휙 날아가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암이 화구에서 흘러내려서 
산록의 폼페이와 에르콜나노는 순식간에 멸망했다. 
살아남은 주민은 거의 없었다." 
단서를 잡은 피오넬리 교수는 이탈리아 정부의 원조를 얻어 폼페이 발굴을 시작했다. 
거대한 대경기장의 일부, 로
마의 귀족과 부자들이 휴가를 즐기던 별장의 유적을 비롯하여 
사원, 저택의 문, 목욕탕, 극장, 장터 그리고 공회당 등등의 건물유적들은 
거의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심지어는 빵 가게 앞에는 현재의 우리들이 먹는 것과 똑같은 
고대의 빵이 80여개나 화석으로 되어 있었다. 
번화가의 네 거리에는 육교도 있었고 
산 채로 잿더미에 묻혔던 폼페이 사람들의 해골과 뼈도 나왔다. 
또 여인들의 화장 도구며 꽃병, 촛대, 그릇 같은 것들도 나왔다. 
그런데 교수는 발굴 도중 이상한 것을 알게 되었다. 
문헌에 의한 인구에 비해 거의 시체가 나오지 않는 모순된 점을 말이다. 
골몰해 있던 교수는 마침 화산재에 뒤덮인, 인간의 형태를 한 동굴을 발견했다. 
교수는 이 동굴에 녹인 석고를 흘려 넣고 굳어지자 
석고 주위의 화산을 조금씩 깨뜨려 나갔는데 
그 곳에서 하나의 서고 덩어리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미모의 벌거벗은 여자였는데 
육체와 시간이 함께 썩어 분해해서 생긴 일종의 주형이었다. 
석고상은 희생자의 표정뿐 아니라 
옷의 주름이나 헤어스타일까지 완전히 보여주므로 
그들의 직업과 건강 상태까지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석고상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괴롭고 고통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 베수비오산 [Vesuvio Mt.]
높이 1,281m. 
나폴리 동쪽 12km 지점에 있는 현무암질의 2중식 활화산이다. 
일반적으로 영어명의 베수비어스산(Vesuvius Mt.)으로 널리 알려졌다. 
유럽대륙 유일의 활화산으로 산꼭대기에는 지름 500m, 깊이 250m의 화구가 있고, 
그 안에 중앙화구구(中央火口丘)가 있다. 
소마산(1,132m)이라고 부르는 외륜산(外輪山)과 중앙화구구와의 사이에는 
아트리오라는 길이 약 5km, 너비 600m의 초승달 모양의 화구원(火口原)이 펼쳐진다. 
베수비오산은 BC 8세기에 분화(噴火)했다고 하며, 
63년의 지진으로 산기슭 일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79년 8월의 대분화로 폼페이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삽시간에 죽음의 도시로 변하고 
지하에 매몰되는 대참사가 있었는데 
이 참사는 영국의 작가 E.G.리턴이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 잘 묘사하였다. 
그 대분화 이후에도 수십 회에 걸쳐 산꼭대기와 산허리에서 폭발하여 용암이 흘러내렸다. 
1631년에는 약 반 년에 걸친 진동 후 폭발하여 주변의 주민 1만 8000명이 희생되었고, 
그 후에도 끊임없이 진동이 계속되어 산의 모습이 달라지고 
분화구의 중앙에서 좀 남쪽에 화산구(火山丘)가 생겼다. 
1944년에는 대용암류로 등산전차가 황폐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자동차 리프트로 산꼭대기에 오를 수 있고, 
둘레 72km에 이르는 화산 기슭을 둘러싸고 관광철도가 달리고 있다. 
높이 600m 이하의 비옥한 화산 비탈면에서는 
포도 ․오렌지류 ․호두 등의 재배와, 가축 사육이 활발하다. 
산중턱의 서쪽 높이 약 600m 지점에는 
1845년 세계에서 최초로 건설된 화산관측소가 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분화는 1973 ․1979년이며, 
베수비오산은 나폴리 풍경의 상징으로 많은 노래와 회화, 문학작품에 인용된다. 
■[ 쏘렌토 ] Sorrento 
"돌아오라 쏘렌토로("Come back to Sorrento)"와 
"오! 솔레미오(O sole mio)"는 모두 세계에서 가장 친숙한 가곡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폴리만의 색조와 친숙한 소음, 
그리고 오렌지 숲으로 쌓인 소렌토는 
역사와 예술을 자랑하는 평화와 고요의 천국이다. 
쏘렌토(Sorrento)는 쏘렌타인 반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나폴리 근처의 도시이다. 
예전부터 나폴리와 인접한 해안 휴양지로 명성이 높았다. 
쏘렌토의 수공예 목조품과 
치즈, 올리브유, 리몬첼로(limoncello)라 불리는 지방 특산품을 제외하고 
주요 산업은 관광업이다.
 절벽 위에 지어진 이 작은 도시에서 맑은 바다 빛과 
카프리를 가로지르는 햇살을 비추인다. 
토르쿠아토 타소(Torquato Tasso)가 여기서 태어났으며, 
타란텔라가 여기서 춤을 추었다. 
아름답고, 풍요로움을 갖춘 가구와 그림 
그리고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는 코레알 박물관도 가봄직한 곳이다. 
■[ 카프리 ] Capri 
이탈리아 남부 티레니아해에 있는 섬. 
면적 10.36㎢. 인구 1만 2112(1981). 
나폴리만 남쪽 소렌토반도에서 5㎞ 지점에 있는 
길이 6km, 폭 2km에 총면적 10 평방킬로미터의 카프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푸른 동굴'을 가지고 있는 섬으로 
동쪽에 카프리, 서쪽에 아나카프리 마을이 있다. 
섬의 최고봉은 솔라로산(589m)이다. 
기후가 따뜻하고 경치가 뛰어나며 
푸른 동굴을 비롯한 해식동(海蝕洞)이 있어 국제적 관광지로 유명하다.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폴리에서 배를 타고 카프리 섬에 도착하면 
섬의 전경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워 
'꿈의 섬'으로 불리는 이 섬은 2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근대사의 수많은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지금도 세계 갑부나 유명인들의 별장이 있는 곳이다.
 

1. 폼페이에서

 

1-1. 성채 입구

 

 

1-2. 폭발이 있던 날의 상상도

 

 

 

1-3. 폼페이 전경

 

 

1-4. 그 거리를 거니는 폼페이의 후손들

 

 

1-5. 어느 개인 저택의 모습

 

 

1-6. 폐허의 잔영위에 드리운 동양의 그림자

 

 

1-7. 불을 뿜던 베수비오스는 말이 없고

 

 

 

1-8. 마차가 지나간 길 위에서(얼마나 많은 마차가 지나갔기에 돌타일이 패었을까?)

 

 

1-9. 빵집 앞에서 열정적인 설명을 하는 가이드

 

 

 

1-10. 사람이 화산재에 갇혀 생긴 공동에 석고를 부어 만든 폼페이 시민들의 생생한 모습

 

 

1-11. 폼페이 원형 경기장 외부 모습, 소나무의 외형은 달라도 껍질은 비슷

 

2. 쏘렌토에서

 

 

 

 

 

 

 

 

 

 

 

 

2-1. 쏘렌토 원경

 

 

2-2. 절벽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마을 버스가 내려갔다.

 

 

2-3.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며

   

 

2-4. 쏘렌토 원경, 쏘렌토의 하얀 절벽, 그리고 하얀 집들

  

 

2-5. 쏘렌토가 좋은 어느 사나이의 웃음

 

 

2-6. 쏘렌토여! 잘 있거라.

 

 

 

3. 카프리에서

 

 

3-1. 아나 카프리 사람들의 외출

 

 

3-2. 울릉도 골목길 같은 꼬부랑길을 미니 버스로 올라 승강장에서 리프트를 타고 오르다.

 

 

3-3. 자연에 순응한 사람들의 집

 

 

 

3-4. 지중해 쪽빛을 가르는 쾌속선

 

 

3-5. 산정에서 내려다 본 섬마을

 

 

 

3-6. 점점이 산개한 마을, 그리고 지중해

 

 

3-7. 천애의 절벽 아래로 추락하던 群鳥들

 

 

 

4. 나폴리에서

 

 

4-1. 베수비오스 아래의 아름다운 도시

 

 

4-2. 나폴리항에 내리기 직전

 

 

4-3. 선착장 근처의 보수 중인 카스텔 누오보 성 앞에서 

 


 

[비슷한 경로를 간 분의 사진1] 

 

 

 

[비슷한 경로를 간 분의 사진2] 

 

 

 

[비슷한 경로를 간 분의 사진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