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해외여행산행

2003 유럽 여행 낙수[제4일] -플로렌스-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28. 14:02
□ 제4일 2003/4/10(목) 플로렌스 관광 ◆ 05:30-06:30 아침조깅, 호텔아래 순환도로 근처, 병원 Aurelia Hospital, Holiday Inn, PANORAMA등 건물, 새소리 요란, AGI주유소(상징개:다리5, 입불, 검정) ◆ 07:00-08:00 호텔조식 뷔페식 ◆ 08:00- 플로렌스 버스 이동, 중간 오르비에또(1.5시간) 두오모 성당, 미니버스, 백포도주유명, 산 아래에서 케이블카 이동 산상도시, 방어용 도시, ◆ 13:00- 꽃의 도시, 로마 230km, 50만 인구, 버스 시내 진입 155EH(40만원), 11-13C메디치가문 집권, 양모, 꽃 주 산물, 꽃의 성모마리아성당, 교황5명 배출->예술가 로마진출(미켈, 브라만테, 라파엘로) 현지식당 중식 3시간 시내관광 ◆ 13:15 두오모(dome, domus)->대성당, 마리아 델 피오레작, 외관 토스카나산 대리석(백, 분홍, 녹), 피사광장, 피사사탑, 기적의 광장, 1987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106m, 8각당, 장밋빛돔, 175년걸림 ◆ 시뇨리아광장(piazza della signiria) ; agora(사람모이는 곳), 1504미켈 다비드상(원작아카데미미술관) ◆ 15:45 산타크로체교회 : 고딕양식, 판테온 신전(기베르티, 마키아밸리무덤), 단테상, 시내 관광끝 ◆ 16:00 미켈란젤로언덕 : 오르는 길 키 큰 노간주숲 울창, 1547캄파돌리오광장, 청동다비드상 4.8m, 피렌쩨 시내조망, 지붕 적색, 조망 케네디찬사 ◆ 16:50 피렌쩨 교외 가죽면세점 : 아내 가죽 제품 2벌 구입 ◆ 18:00-19:30 밀라노로 이동, 밀라노 교외 온천지대 호텔 GRAND REGIA호텔(Salsomaggiore)211호, 석식 ■ 오르비에또 [Orvieto] 오르비에또의 화려하고 웅장한 두오모 대성당의 건설은 볼세나에서 일어난 성체 기적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성 마리아 프리스카 성당과 성 콘스탄쪼 성당이 함께 있던 자리에 1290년 11월 13일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볼세나의 성체 기적은 1263년에서 1264년, 보헤미안 신부인 프라하의 피에트로 신부가 성체에 대한 의심을 갖고 있던 중 볼세나의 성 크리스티나 성당에서 미사 중에 밀병에서 피가 떨어지고 성체 보를 적시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 이 기적의 성체 보는 교황 우르바노 4세의 뜻에 따라 오르비에또 성당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1264년 특별 교서를 발표 <주님의 성체>축제를 열게 되었다. (이는 이후 가톨릭의 <성체 성혈 대축일의 기원이 된다) 이 두오모 대성당은 3세기에 걸쳐 여러 건축가들에 의해 건축되게 되는데 처음에는 페루지아의 베비냐떼 수사의 감독하에 아르놀포 디 깜비오가 설계 건축한 것이다. 이후 건축 책임자는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 도입과 위가 둥근 천장과 압시데(abside), 고딕 양식의 요소들을 고루 사용한 죠반니 우구치오네에 의해 계속 되었다. 1300년대 초에는 건물 내부의 문제 때문에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로렌쪼 마이타니가 책임을 맡게 되는데 그의 천재성과 능력은 단지 버팀 벽으로 건물을 강화 유지 시켰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건축물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걸작을 창조하게 되었다. 그는 세 부분의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 정면을 고안하게 되는데 정면의 뾰족탑 형태는 이태리 고딕 건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에 하나이다. 또한 모자이크의 우아함과 화려함, 성당 정면의 놀라운 조각 기술, 건물의 명암과 색채의 완벽한 조화미는 저절로 감탄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마이타니 외에도 그와 함께 한 많은 건축가들이 성당 내부와 설교단과 제대를 1330년 마이타니가 죽는 해까지 완성하게 된다. 이후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계획을 이어 갔는데 그들의 이름을 나열한다면 르네상스식 성당 정면을 첨가한 페데리기와 16세기의 삼미켈리와 죠반네 상갈로 등이다. 오르비에또의 유명한 성 파트리지오 우물(Pozzo di San Patrizio)은 1527년 12월 독일 용병의 로마 점령 때 오르비에또로 피신한 교황 클레멘트 7세 때 만들게 되었다. 그는 계속되는 적의 공격 속에서 가뭄과 시민들의 식수를 보장하기 위해서 우물 건설을 계획하게 되었고 이 계획은 피렌체 출신의 건축가인 안토니오 다 상갈로 죠반네에 의해서 실현되게 되었다. 원래 오르비에또 주변에는 온천이 풍부했는데 1532년 작업 중에 지하 200미터에서 에투르스키인들의 무덤들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1537년 교황 바오로 3세 때에 이르러 우물 건설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우물은 원통형으로 깊이가 약 62미터이고 폭은 약 13.40미터이다. 우물 속은 이중의 나선형 계단 284개로 만들어져 있는데 내려가는 사람과 올라오는 사람이 서로 만나지 않는 독특한 설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물을 가져오는 사람과 내려가는 사람이 마주치는 혼잡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우물 끝까지 내려 갔을 때 우물 천장 위를 올려다 보면 우물 안으로 비치는 태양 빛이 참 아름다울 수가 없다. 이 우물은 1556년부터 성 파트리지오 우물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같은 이름의 성인이 방랑 중에 아일랜드의 한 깊은 동굴 속에서 기도생활 한 곳과 비슷한데서 연유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두 개의 입구에 써있는 라틴어 문장은 [물이 저절로 솟아나게 깊게 판 이 우물을 만들게 된 이유를 기억하라.]고 쓰여있다. 이 성 파트리지오 우물의 이중의 나선형 계단은 후에 1932년 쥬세페 모모가 바티칸 박물관의 이중 나선계단을 설계할 때 그 모델이 되었다. ■ 피렌쩨 두오모 광장 [Piazza del Duomo]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사에 있는 광장. 소재지 :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사 시대 : 중세 영어의 돔(dome)과 같으며 라틴어(語)의 도무스(domus)를 어원(語源)으로 한다. 영어의 돔은 반구형(半球形)의 둥근 지붕, 둥근 천장의 뜻으로 사용되는 데 대하여 이탈리아어의 두오모와 독일어의 돔은 대성당(大聖堂:cathdrale)을 말한다. 106M의 높이, 색상과 디자인도 매우 인상적, 피렌체의 중심이자 상징물, 두오모성당은 화려한 외부경관과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중세의 분위기를 흠뻑 맛보게 해준다. 일명 '꽃의 성모성당(Santa Maria del Fiore)' 이라고도 한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두오모의 하나이자 세계에서 4번째로 큰 대성당이랍니다. 1296년 착공되어 지오토, 피사노, 프란체스코등 유명한 건축가들이 참여하여 1461년에 완전히 대공사가 마무리되었다. 특히 각기 다른 3색의 대리석으로 된 건물 외벽이 참으로 아름답다. 두오모 정면 산 죠반니 세례당(Battistero San Giovani)은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 이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하는 청동문으로 유명하다. 이 문은 조각가 기베르티가 만든 세례당의 북,남,동의 3개의 문 중에서 동쪽문에 해당된다. 10장의 판넬에 아담과 이브의 창조에서부터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에 이르기까지 구약성서의 갖가지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북쪽 문에는 예수의 생애가 묘사되어 있다. 두오모 뒷편에는 성당의 부속박물관(Opera di Santa Maria del Fiore)이 있다. 성당의 장식물들과 조각, 그리고 돔을 지을 때 썼던 도구등이 전시되어 있다. 미켈란젤로의 만년(75세)의 미완성작인 피에타상도 여기에 있다. 기적의 광장이라고도 한다. 광장 중앙에는 동서 길이 100m에 이르는 대성당이 세워져 있고, 동쪽에는 '피사의 사탑'으로 알려진 부속종탑이 있다. 대성당과 종탑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물리학상의 중요 발견을 한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세례당과 무덤(캄포산토) 등이 남아 있어 중세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다. 1063년 착공한 대성당은 5랑식(五廊式) 성당으로서 평면이 그리스십자가 모양이다. 교차부에는 둥근 천장을 얹었고, 파사드는 하얀 대리암으로 만들어 화려하게 꾸몄으며, 3개의 정문은 원기둥으로 구분해 놓았다. 후진(後陣)의 둥근 천장은 모자이크로 장식하였고, 신랑(身廊)의 설교단에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따온 여러 장면들을 새겨 놓았다. 신랑 천장에는 갈릴레이가 '진자의 법칙'을 발견하는 계기를 얻었다는 램프가 걸려 있다. 종탑은 1173년 착공하여 14세기 중반 완성하였으며 바깥 둘레의 지름 17m, 높이 55m이다. 원통 모양으로서 탑 안쪽은 비어 있다. 맨 위층에는 종을 매달아 놓았으며, 층마다 원기둥으로 된 콜로네이드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착공 직후부터 지반 침하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1993년 납과 강철 케이블로 보강해 놓았다. 1153년 건설한 둥근 모양의 세례당은 바깥벽 전체를 대리암으로 된 콜로네이드로 장식해 놓았다. 이곳에 있는 6각 모양의 설교단은 대리암 원기둥 7개가 받치고 있으며, 각 면에 수태고지를 묘사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광장 북쪽에는 1278년 세운 고딕양식의 네모꼴 무덤과 대주교관, 칼리타의료원 등이 있다. 1987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지오토 종탑(Campanile di Giotto)은 두오모를 정면에서 바라볼 때 오른편에 우뚝 솟은 종탑이다. 1334년에 화가이자 건축가인 지오토에 의해 설계된 것이다. 지오토는 지층과 1층을 완성했고, 프란체스코 안드리아 피사노에 의해 이어져 2-3층이 완성되었고, 1539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높이는 87.75M. 고딕 스타일의 상식과 기하학적인 외형사이에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건물의 외벽은 검은 대리석으로 치장되어 있다.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올라 종탑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피렌체의 붉은 지붕들이 정말 아름답다. ■ 시뇨리아 광장 광장 [廣場, open space] 넓은 공간. 여기에서는 도시(都市) 속에 있는 공공적(公共的)인 공지를 가리킨다. 서양의 도시는 이것을 중심으로 해서 발달해 나간 경우가 많다. 이렇게 발달해 온 도시에서의 광장은 바로 유럽 도시구조를 특징짓는 중요한 공간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에는 아고라(agora)라고 하는 광장이 있었다. 이 낱말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란 뜻이다. 이 뜻과 같이 이곳은 시민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어서, 종교․정치․사법․상업․사교 등이 행해지는 사회생활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그 주위에는 공공생활에 필요한 건축물들이 둘러서 있고 회의장․사원(寺院)․점포․주랑(柱廊) 등이 차지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그 내부에는 제단․조각․분수와 연못․나무 등이 있어서 시민들의 휴식 장소가 되기도 했다. 아고라는 도시의 중심부나 항구 옆에 있었는데, 나중에는 시장(市場)을 뜻하게 되었다. 고대 로마의 포룸(forum)도 아고라같이 시민의 사회생활의 중심이 되는 광장이었다. 이 광장은 기능이 세분화되면서, 사법광장(fora civilia)․상업광장(benelie) 등으로 분화되었다. 중세의 도시에서의 광장은 대성당이나 교회 앞의 교회광장(敎會廣場), 왕후나 주요 직분의 저택으로 둘러싸인 시뇨리아(signoria)라는 시민광장(市民廣場), 상업활동이 행해지는 시장광장(市場廣場) 등 3가지로 나누어졌다. 시민광장이나 시장광장은 조각이나 기념물, 수반(水盤), 분수 등으로 장식되었다. 르네상스 이후 근세의 도시광장은 그 기능적인 면에서 전정광장(前庭廣場)․기념광장(紀念廣場)․ 시장광장․교통광장(交通廣場)․근린광장(近隣廣場) 등으로 구분되었다. 르네상스시대의 여러 가지 이상도시(理想都市)는 그 구조 속에 광장을 포함하였다. 대도로의 양쪽에 광장을 두고, 거기에 오벨리스크(obelisk)나 원주(圓柱)를 세워서 광장의 소재를 밝히는 형태로 나타났다. 귀족들이 주택지경영을 목적으로 하여 빈 터에 먼저 광장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왕의 동상을 세우고, 그 주변에 주택을 배치하는 계획으로 도시건설을 추진했기 때문에 여기저기에 광장이 생겨났다. 그러나 산업혁명(産業革命) 이후에 자본주의 도시가 일어나는 근대에는 시민들의 광장에 대한 흥미는 쇠퇴하였고, 광장 대신에 철도나 공장․빌딩 등 산업시설이 도심지에 건설되었다. 그후 광장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된 것은 20세기 후반 공업화와 자동차교통으로 황폐해진 현대도시가 황폐해지면서부터이다. 새로운 도시광장은 재개발되는 도심과 새로 건설되는 주택지의 중심지에 나타난다. 어느 것이나 자동차교통을 거부하고, 시민들의 보행자의 쇼핑이나 산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광장이다. 시뇨리아 광장은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으로 각종 정치와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시뇨리아광장(Pizza della Signoria)은 'L'자 모양으로 피렌체를 대표하는 각종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으며, 광장 곳곳에 각종 예술작품들이 산재해 있다. 시뇨리아광장에 우뚝 서있는 동상은 코지모 1세의 동상이다. 피렌체의 제1대 영주였던 사람으로 이 동상은 코지모 1세를 기념하기 위해 1594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피렌체 스타일로 만들어진 정교한 초상화식 동상이며 예술적 가치보다는 역사적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 우피지 미술관 우피지 미술관(Uffizi Galleries)은 연중 인산인해로 여름철에는 최소한 한두시간은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이곳은 아침 일찍 찾는 것이 좋다. 15세기 피렌체의 화가들이 코지모 영주에 의해 집대성되기 시작해 역대의 영주들에 의해 각종 훌륭한 예술품들이 수집되게 되었다. 우피지 미술관을 크게 두 곳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다. 먼저 조각품들... 조각품들은 주로 그리스, 로마시대의 진품과 모조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연대별이 아니라 무작위로 전시되어 있다. 다음에는 연대별로 전시되어 있는 회화들이다. 특히 주목할만한 작품은 전시실 10-14까지의 메디치가의 초상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그려냈던 보디첼리의 작품들이다. '봄(Primavera)'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은 놓치기에 아까운 작품들이다. 25번방에는 미켈란젤로의 '성가족(Sacra Famiglia)', 26번방에는 라파엘로의 '자화상(Autoritratto)'이 있다. 그외에도 봐야 할 그림은 28번방에 있는 티티안의 '우르비노의 비너스(La Venere di Urbino)', 35번방의 틴토레토의 '레다(Leda)', 44번방의 렘브란트의 '자화상', 45번방의 카날레토의 '베네치아의 두칼레궁 풍경(Veduta del Palazzo Ducale Venezia)'등이다. Museum은 고대 그리스에서 학예·시·음악 등을 관장하는 여신 ‘뮤즈’에게 제사를 드렸던 제단이나 신전을 일컫던 ‘무제이온(Museion)’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Museum은 우리말로 박물관으로 번역되는데 외국에선 미술품만 전시하는 미술관(gallery)도 박물관이라는 말을 쓰지만 흔히 MoMA라고 부르는 뉴욕의 현대미술관 (Museum of Mordern Art), 미술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처럼 갤러리라고 쓰는 경우도 많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은 1560년에 착공, 1584년에 완공되었는데 유럽의 유명한 부호가문, 바로 메디치가문의 미술품을 전시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바로 이 우피치미술관의 미술품을 전시하는 전시공간이 긴복도-회랑(gallery)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에 미술관을 갤러리라고 불리게 된것이다.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 - http://www.thebritishmuseum.ac.uk/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Louvre) 박물관 - http://www.louvre.fr/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 www.metmuseum.org ■ 베키오 다리 우피지 미술관에서 나와 왼쪽으로 올라가면 바로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가 나온다. 피렌체에는 7개의 다리가 있는데 그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가 바로 베키오다리이다. 원래는 목조다리였는데, 나중에 석조다리로 개축되었다고 한다. 다리위에는 온갖 보석가게들은 다 모여 있다. 15세기부터 각종 금,은,세공업자들과 보석상이 들어서기 시작해 현재까지도 이탈리아 최고의 보석거리로 자리잡고 있다. 다리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상점으로서의 기능도 하고 있는 셈이다. ■ 산타크로체교회[Chiesa di Santa Croce]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성당. 산타 크로체교회(Basilica di Santa Croce)는 베키오 다리 아랫편에 있는 하나 그라찌에다리(Ponte alle Grazie)를 건너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된다. 오른편에 보이는 큰 건물은 국립도서관인데 넓은 광장에 산타 크로체 교회가 서 있다. 유럽에서 성행한 고딕양식도 고유의 오랜 전통과 맑은 풍토의 나라 이탈리아에서는 충분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극히 적은 예를 제외하면 이 나라 특유의 절충적 작품이 얼마간 있을 뿐이었다. 이 성당도 이러한 과도기의 상황 속에서 생긴 건축의 하나이다. N.피사노의 제자인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를 바탕으로 1294년에 탁발승단의 프란체스코회수도원 성당으로서 착공, 1442년에 완공되었으나 그 동안에 당초의 설계는 계속 변경되었으며, 말기에는 브루넬레스키도 참가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바실리카를 연상케 하는 T자형의 간결한 플랜에, 폭이 넓은 바닥과 상승감(上昇感)이 없는 낮은 천장 등 모든 면에 걸쳐 고딕 양식과 대립되는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물론 열주의 들보 길이와 측랑(側廊)의 공간을 구분짓는 첨두(尖頭) 아치, 또는 제실(祭室)의 구성 등에 고딕건축의 특징을 발견할 수는 있으나 이것은 반드시 건물 전체에 있어 본질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성당 안에는 조토작(作)의 벽화 《두 요한》과 《성(聖)프란체스코전》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교회 안에는 미켈란젤로의 무덤(교회 안 바로 오른쪽)이 있고, 그 옆에 단테의 무덤이 놓여져 있다. 갈릴레오와 롯시니도 이곳에 잠들어 있다. ■ 미켈란젤로 언덕 캄피돌리오광장 [Piazza del Campidoglio]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도시광장의 하나. 고대 로마의 발상지로 전해지는 7개 언덕의 하나인 카피톨리노언덕 한 모퉁이에 미켈란젤로의 구상으로 1547년에 건설되었다. 큰 계단 위에 전개된 이 광장은 좌우 양쪽의 한 쌍의 건물, 즉 카피톨리노미술관(1644~1655)과 팔라초 콘세르바토리(1564~1568) 및 안쪽 정면의 시청사(1592년 완성)의 3개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좌우 건물이 마주보는 간격은 투시효과(透視效果)의 조화를 위하여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향할수록 넓어지게 배치되어 있다. 광장 중앙에는 로마의 현제(賢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광장과 건물의 디자인은 그 수법의 독창성과 공간통일(空間統一)의 탁월성으로 해서 미켈란젤로의 가장 뛰어난 건축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 카피톨리노언덕 [Mons Capitolino] 고대 로마의 일곱 언덕의 하나. 캄피돌리오(Campidoglio)라고도 쓴다. 고대 로마의 가장 신성한 언덕으로 생각되었으며, 원래는 언덕 위에 있었던 유피테르 신전(神殿)을 가리켰으나 언덕 전체를 가리켜 말하기도 한다. 이 신전은 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의 3신을 제사한 신전이며, BC 509년에 완성되어 로마 국가종교의 중심이었다. 집정관 ․속주총독(屬州總督)의 취임서약, 개선장군의 환영도 여기에서 행하여졌다. F.페트라르카가 월계관을 받고, E.기번이 《로마 제국 쇠망사》를 착상한 곳도 이 언덕이다. 언덕 위의 신역(神域)에서 산기슭의 포룸 로마눔으로 성도(聖道)가 통해 있고, 길 옆에 타브랄리움(公文書保存館)의 유적이 남아 있다. 1547년 미켈란젤로의 구상으로 건설된 캄피돌리오광장에는 로마의 현제(賢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 기마상(騎馬像)을 중심으로 카피톨리노미술관과 팔라초 콘세르바토리가 있다. ■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3.6 ~ 1564.2.18]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시인. 국적 : 이탈리아 활동분야 : 화가, 조각가, 건축가, 시인 출생지 : 이탈리아 카프레세 주요작품 : 《다비드》(1504)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1541) 카프레세 출생.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나, 양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13세 때에 기를란다요(Ghirlandajo)에게 입문하였고, 이듬해 조각가 베르톨도(Bertoldo di Giovanni:1420?~1491)에게로 옮겨 도나텔로의 작품을 배우면서, 메디치가(家)의 고대 조각을 연구하였다. 그 때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1449~1492)에게 인정받아, 그의 집에서 체류하게 되어, 인문 학자들과도 접촉, 고전문학이나 신구약 성서를 탐독함과 동시에, 조각을 위한 인체 해부에도 전념하였다. 블랑카치성당 마사초의 벽화 앞에서 토레지아니와 논쟁하다가 코뼈가 부러진 것도 그 때의 일이며, 이때의 작품으로는 피렌체의 카사 보나로티에 남아 있는 도나텔로풍의 《스칼라의 성모》와 고전적 격조를 보인 《켄타우로스족과 라피타이족의 싸움》의 부조(浮彫)가 있다. 1492년 메디치가의 로렌초가 죽은 후,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볼로냐로 피난, 거기서 J.d.퀘르치아의 조각도 배웠다. 1496년 로마로 나올 기회를 얻어 고전 예술에 접촉, 조상 《바쿠스》(피렌체 바르젤로미술관 소장)를 제작,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피에타 Pieta》를 프랑스 추기경의 의뢰로 완성한 것은 1499년경이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으로부터 《다비드》의 대리석상을 부탁받아 1504년에 완성하였다. 이 거상은 시청 문 앞에 놓여 피렌체 자치 도시를 지키는 상징으로 간직되었다. (현재는 아카데미아미술관 소장). 이 무렵의 작품으로 성모자(聖母子)를 다룬 2개의 원형 부조 (런던 왕립미술아카데미와 바르젤로미술관 소장)와 원형화 《성가족》(우피치미술관)이 있다. 1504년 피렌체 시청에 《카시나의 싸움 Battle of Cascina》의 벽화를 의뢰받아, 건너편 벽면에 《안기리의 기마전》을 그리게 되어 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경쟁하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듬해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 로마로 가서, 그 기념 묘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브라만테가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개축에 착수한 이래, 율리우스 2세가 냉담해지자, 이에 성이 난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다시 《카시나의 싸움》 제작에 전념하였다. 1506년 레오나르도도 화고(畵稿)를 완성, 벽화를 착수하였으나, 쌍방 모두 진전이 없던 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은 화고도 없어지고, 모사화(模寫畵)가 남아 있을 뿐이다. 1506년 말 미켈란젤로는 다시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가, 볼로냐에서 화해하고, 1508년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天障畵)를 위촉받았다. 벽화에는 경험이 없다고 사퇴하였으나, 허용되지 않아 적대자 브라만테의 간계를 물리치면서 제작을 시작하였다. 일은 진척되지 않고, 보수도 지불되지 않고, 형제들로부터는 금전을 강요당하고, 교황과도 충돌하는 악조건하에서 1512년에 마침내 완성하였다. 《천지 창조》 《인간의 타락》 《노아 이야기》의 3장 9화면을 구약 내용의 순서와는 반대로 그리기 시작, 그 화면 사이에 예언자나 천사(天使)나 역사(力士)를 배치하고, 복잡한 모습을 부여하여, 묘사된 대리석상 같은 인간군상을 부각하였다. 천장화 완성의 다음해에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현안의 묘비를 실현시키게 되어, 1513~1518년에 묘비의 중심조상(彫像)이 될 《모세 Moses》의 거상(巨像)과 부속 인물인 《노예》를 만들었으나,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가 새로이 피렌체의 산 로렌초성당의 파사드의 건축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그 후 율리우스 2세의 묘비는 중단되었다. 교황이 갈릴 때마다 계약이 수정되어 마침내 1542년의 제5회째의 계약에서는 최초의 거대한 구상과는 달리, 앞서 말한 《모세》를 중심으로 새로이 만든 《레아》와 《라헬》의 두 협시(脇侍)가 산 피에트로 인 빈코리성당의 쓸쓸한 묘비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1520년 피렌체의 메디치가 묘묘(廟墓)의 제작을 의뢰받아, 1524년에 착수, 10년간이나 걸렸으나 끝내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묘묘를 구성하는 로렌초와 줄리아노의 조상과 그 각각의 아래의 관(棺)에 누워 있는 《아침》 《저녁》 《낮》 《밤》의 네 우의상(寓意像), 그 중 《저녁》과 《낮》의 두 남성상(미완성)과 《성모자상》(미완성)은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 사이 산 로렌초성당 부속의 라우렌치아나도서관의 건축에 종사하였고, 1529년에는 독일의 칼 5세군(軍)의 피렌체 포위를 맞아, 방위위원으로서 축성에도 임하였다. 그 후 메디치가(家)의 전제군주 알렉산드로와 반목하여, 메디치가 묘묘를 미완성의 상태로 둔 채 1534년에 피렌체와 영원히 결별하여 로마로 옮겼다. 그 해 새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성당의 안쪽 벽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다음 해부터 혼자 착수, 고생 끝에 6년 후인 1541년에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을 완성하였다. 그리스도가 ꡐ성난 그리스도ꡑ로서 거인처럼 군림하여, 천국에 오르는 자와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가 좌우로 크게 회전하는 군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 구도(構圖)와 동적 표현은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을 해체하여 격정적인 바로크 양식에의 추이(推移)를 보였다. 그 제작 중, 독신이었던 그가 교양 높은 페스카라공(公) 미망인 비토리아 코론나를 알게 되어 영혼의 위로를 받게 된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인데, 이 부인도 타계하여, 그는 다시 고독해졌다. 1542년에는 바티칸궁의 파올리나성당의 장식도 위촉받아 《바울로의 개종》과 《베드로의 책형(刑)》을 1550년에 완성하였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기도 하고, 파라초 파르네제의 건축에 종사하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여, 1547년에는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조영 주임이 되어 1557년 대원개(大圓蓋)의 목제 모델을 완성하였다. 그 사이에도 《피에타 Pieta》의 군상을 3체(體)(피렌체 대성당, 팔레스토리나, 론다니니)나 만들었고, 어느 것이나 미완성으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힘 없이 쓰러지는 그리스도를 성모들이 슬피 부축하는 군상의 생생한 끌 자국에는 끝없는 고뇌의 영혼이 영원의 휴식을 추구하는 것 같은 그의 만년의 심경이 엿보여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 무렵 로마에도 동란이 일어나, 고향 피렌체에의 향수에 젖으면서, 병을 얻어 르네상스로부터 초기 바로크에 이르는 89세의 오랜 예술적 생애를 마쳤다. 메디치가(家)나 교황에의 봉사를 끝없이 요구당하면서도 언제나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여 싸운 그의 괴로운 심경은 남겨진 편지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예술은 모두 이와 같은 인생의 고뇌와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분개와 우울과 신앙의 미적 형상화이며, 더욱이 그것은 초인적인 억센 제작력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1. 플로렌스 가는 길
 

1-1. 피렌체로 가는 도중 아름다운 성이 있어 케이블카로 올라가 한바퀴 돌았다.

 

 

1-2.오르비에또라 하였는데 두오모도 있고 지금도 살림집도 있는 마을이었다.



1-3.오르비에또 두오모(Orvieto Duomo)

 

 

2. 플로렌스 두오모

 

 

 

 

 

 

3. 시뇨리아 광장에서

 

 

 

 

 

 

 

 

 

2-1. 이곳 다비드 상은 모조품이라함.

 

 

2-2. 원본 다비드상은 아카데미미술관에 있다하나 가 보지 못함.

 

 

 

3. 산타크로쩨성당 앞에서

 

 

 

 

 

 

3-1. 산 죠바니 성당 앞에서

 

 

 

 

3-2. 산타크로쩨 성당 앞에서

 

3-3. 시뇨리아 광장옆 골목

 

 

3-4.단테 생가]

  
4.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4-1.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청동 다비드상을 배경으로

 

 

 

4-2.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피렌쩨 두오모를 배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