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누가 원균(元均)장군에게 돌을 던지는가?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31. 14:56

[글을 시작하기 전에]
KBS에서 [불멸의 이순신]이란 대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지금은 물론 [이순신=성웅, 원균=간신배]이란 등식을 믿는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되지만
얼마 전 신문(아래)을 보니 딱히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이순신을 말하면 원균은 조연으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원균 장군에 대하여는 반드시 언급되리라 사료되어
몇 년 전 원균 장군에 대하여 필자 나름대로 탐구하여 써두었던 글을
탈고(脫稿)하여 글을 몇 회에 걸쳐 게재하려 한다.
부디 시나리오 작가님에게 참고가 되기를 빌어본다.

 

[목 차]

1. 프롤로그
2. 공부는 안하고

3. 놀라운 사실에 대한 여정의 시작

4. 원균(元均)의 원혼이 지하(地下)에서 통곡하고 있다.
① 그의 흔적
②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③ 무엇보다도 선조의 논공행상이 이를 말해준다.
④ 원균이 비겁한 장수라는 데는 수정선조실록도 한 몫 하였다.
⑤ 원균을 폄하시키는 데는 분단이란 상황하의 군사문화도 한 몫 하였다.

⑥ 원균이 용맹한 무장이라는데 그 증거는?
㈀ 개전 전의 양국 병력
㈁ 개전 초기의 양국 병력
㈂ 개전 초기의 전황과 원균의 처지
㈃ 용맹 무상한 원균의 작전

⑦ 그렇게 합동작전으로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그들이 멀어지게된 원인은?
⑧ 신출귀몰한 선조의 용병술
⑨ 갈등과 불화는 애증을 낳고, 죽음을 낳고...

⑩ 조선의 창과 방패
㈀ 누가 유능한 장수인가?
㈁ 이순신에 대한 해외의 평가
㈂ 조선의 창과 방패

5. 에필로그


 

누가 원균(元均)장군에게 돌을 던지는가? -라강하-


1. 프롤로그


이제부터 시작하려는 이야기는 지금부터 약 30여 년 前, 필자가 남산에 있던 국립 중앙 도서관으로 공부하러 다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국립 도서관이 지금은 서초동에 현대식 건물을 지어 이전한 것으로 아는데 그 당시에는 남산 중턱에 있었다. 군 복무를 끝내고 복학한지 얼마 안 되어 고시공부를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남들처럼 절간이나 고시원에 들어 갈 형편이 못되어 주로 국립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좁디좁은 국립도서관의 도서실에서 고시공부를 한다는게 생각같이 쉬운일은 아니었다. 새벽 5시에 반지하의 자췻집에서 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허위허위 남산 비탈길을 올라 도서관 앞 안중근 의사 기념관 광장에 도착하면 학생들이 벌써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이삼백 미터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리하여 도서관에 입장하면 밤 10시 폐관할 때 까지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러한 여건에서 공부하느니 만큼 집중력있게 공부에 매진하였던 기억이 있는데 공부하고자하는 마음만 있다면 굳이 고시원이나 절간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도 했다. 당시는 중동특수(中東特需)가 단절되어 지금보다도 더 취직이 어려워 기술(技術)을 전공한 이들에게도 고시(考試)등 공무원 시험이 최고의 인기였었다. 그렇게 공부하여 1차는 몇 번 되었건만 2차에서 번번이 떨어져 결국 국영기업체에 취직하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보아도 나의 일생에 후회없이 마음껏 공부해 보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때 거기서 만나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 중에는 지금은 내가 넘볼 수 없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나 자신도 그러했지만 사시, 행시, 외시, 기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여 모두 다 심산유곡의 절간이나 고시원에서 공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그 때 깨달았다.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꽤 많이 어울려 공부하였던 것이다. 각설하고... 이따금 머리를 식히려 가끔은 창 밖을 내다보곤 하였는데 창 밖의 세상은 나에겐 경외의 대상이었다. 삼팔선같은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엄청나게 다른 풍경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봄이면 남산 식물원 주위로 온갖 기화요초(琪花瑤草)가 흐드러지게 피었다간 지고, 가을이면 현란하게 울긋불긋한 단풍이 어우러진 창 밖의 풍경은 고리타분한 도서관을 어서 뛰쳐나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고즈넉한 공원 숲 사이사이로 쌍쌍이 거니는 데이트 족속들이 시야에 어른거릴때면 20대의 피 끓는 나에게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때의 부러움으로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나던 때 남산이 우리의 만남의 장소로 되기까지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창 밖의 풍경은 고요한 평정 속에서 공부에 몰두하여야할 젊은 청춘을 쥐어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러한 경계선 너머의 유혹을 참자니 많은 사람들이 왜 고시원이나 절간을 찾아가는지 이해 할 것도 같았다.


2. 공부는 안하고

그럴 때마다 그토록 미치도록 아름다운 창 밖의 풍경을 애써 피하려 도서관 바로 맞은 편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 광장에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이라 각인(刻印)된 선돌(立石)에 눈길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여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공부에 방해될까봐 아예 창 밖을 내다보지 않고 틈틈이 자유 열람실에 들어가 머리를 식힐 겸 역사와 문학에 관한 책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일반 도서관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책이 많이 있었다. 나는 어려서 증조부의 영향으로 그래도 한문에는 조금 자신 있었기에 희귀한 한문 서적도 그 때 거기서 참 많이 빌려 보았다.

 

그 당시 중앙도서관 사서주임이 미모(美貌)의 노처녀였는데 젊은 사람이 한문 서적을 빌려보는 것을 보고 호기심 있게 생각했나 보다. 나중에는 그녀와 친밀하게 이야기도 하고, 소장도서 중 희귀도서에 대한 정보도 주고, 절대 대출되지 않는 책(所藏本)까지 마구 빌려주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만 이었음) 그녀 덕분에 당시에는 금기시(禁忌時)된 납북.월북작가들의 작품들도 접해 볼 수 있었다. 金起林(片石村), 韓雪野, 李箕英, 鄭芝鎔, 白石, 安含老, 林和, 李泰俊... 지금은 다들 웬만큼 알지만 당시에는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운 작가들이었다.(金○○로 표현) 徐廷柱(未堂), 李光洙, 柳致鎭, 金東煥, 朱耀翰등이 친일 부역 작가들이요, 오히려 납북.월북작가들이 민족의 자존(自尊)을 지킨 작가들이란 사실도 나는 이미 그 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역사와 문학에 빠지다 보니 나중에는 고시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그런 책들에 푹 빠져 틈틈이 섭렵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번번이 고시 2차에서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남들은 죽어라고 고시공부만 해도 붙을둥 말둥인데 머리식힌다는 핑계로 하루에 몇 시간씩 그런 분야에 투자했으니 당연한 결과였을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도 후회는 없다. 오히려 그 당시에 그리 못했으면 지금 후회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羅州 羅氏의 기원(起源)에 관하여 관심을 갖고 서적을 뒤지다가 [조선 왕조 실록]을 보게 되었다. (당시에는 실록이 완역되지 않고 번역 작업 중이었다.) 실록에 조상님 중 한 분이 상술(詳述)되어 있어 알아 볼 일이 있었던 것이다. 주지(主知)하다 시피 [조선 왕조 실록]은 단일 왕가의 역사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 방대한 기록이요, 그 정확성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공정한 기록을 위하여 당대의 임금은 눈을 감을 때까지 자신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없었을 뿐더러 실록의 기본 자료인 사초(史草)를 쓰는 사관은 임금이 한밤중 소변을 보러 나갈 때도 쫓아 다녔다고 한다. 그러한 어머 어마한 실록 복사본을 뒤지던 중 어느 날 참으로 놀라운 사실하나를 발견하였다.

 

 

3. 놀라운 사실에 대한 여정의 시작

그 놀라운 사실이란... 1604년(선조37년) [선조실록] 6월25일자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을 보니 문신(文臣)으로는 이항복과 정곤수가 호성(扈聖) 일등공신으로, 무신(武臣)으로는 이순신·권율·원균이 선무(宣武) 일등공신으로 명기돼 있는 게 아닌가? 지금은 사극(史劇) 조선왕조오백년 "임진왜란"편이나 다큐 "역사 스페셜"등에 소개되어 [이순신=영웅, 성웅], [원균=간신, 역적]의 등식(等式)을 믿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그 당시는 군부 통치 시절로 노산 이 은상 편저 "성웅 이순신"과 교과서를 통하여 [이순신=성웅], [원균=역적]으로 알고 자란 나에겐 원균(元均)이 일등공신이었다는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지금도 [원균=역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꽤 많이 있는 것 같다.


임진왜란의 영웅이자 충신으로 평가돼온 이순신과 일반적으로 ‘역적'으로 알려진 원균이 4백 년 전 전란 직후에 그 전란을 몸소 겪은 조정에서 똑같이 일등공신으로 책봉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필연적으로 논공행상이 있게 마련이고 그 논공행상은 당시 전쟁을 직접 겪은 선조 임금 이하 중앙 고위 관료들에 의하여 엄정한 심사를 거쳐 결정된 사안이었을 것인데 일견 그냥 흘려버릴 수도 있겠지만 [원균=간신, 역적]으로 알고 있던 나에게는 그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던 나에게 그것은 절대 그냥 흘려버릴 사안이 아니었다. 이러한 호기심과 의문을 가지고 나의 조상님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원균에 대한 오랜 기간의 추적 작업의 여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이렇다.

 

 


4. 원균(元均)의 원혼이 지하(地下)에서 통곡하고 있다.

① 그의 흔적


5만분지 일 전국 지도책의 펴서 경기도 평택, 안성 근처를 보자. 서울에서 일번 국도를 타고 내려가다 오산과 평택 중간쯤을 보면 [신리]라는 동네가 나온다. 이 [신리]에서 안성 쪽으로 눈길을 주면 대대로 원씨 일가의 터전인 [도일동]이 나오는데, [도일동]은 뒷편으로 덕암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앞으로는 도일천을 두고 있으며, 조선시대만 해도 삼남대로가 지나가던 교통의 요지였다. 그 [도일동]의 뒷동산이 바로 원씨 문중의 선산이다. 그 원씨 선산(先山) 한쪽 귀퉁이에 원균 장군 묘소가 있다. 물론 가묘(假墓)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내려가 충청도지경을 넘으면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생가가 있는 아산 백암리 현충사이다. 두 분은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자랐고 나이는 다섯 살 터울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이순신 장군이 서울 건천동에서 출생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어린 시절은 아산 백암리에서 보냈으므로 두 분이 지근거리에서 자랐다고 하여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기록이 없어서 어릴 적 서로 교류가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영웅은 가까운 거리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400여년이 지난 지금, 한 사람은 만고의 청사(靑史)에 빛나는 민족의 성웅(聖雄)으로 존숭(尊崇) 받으며 대대로 민족의 참배를 받고 있고, 한 사람은 정치와 정략과 권모술수에 의하여 오랫동안 만고의 역적이요 비겁한 장수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지하에서 통곡하여야만 하였다. 기억하는 이도, 찾는 이도 별로 없이 잡초에 묻혀 단지 이름 없는 가묘(假墓)로만 그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다.

②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승리자가 기록한 역사와 더불어 주변 상황을 수집하고 분석해 보는 혜안이 필요하다. 역사는 자아를 버리고 바라 볼 줄 알아야 한다. 자기가 속한 조직, 나라, 사상, 이념까지도 벗어 던지고 냉정하게 바라 볼 때 그 실체를 조금이라도 객관적으로 감득해 볼 수 있으리라. 그렇다고 역으로 이순신이 간신이요 역적이란 이야기는 아니다. 둘 다 똑같이 우리 후손들이 존경하여 마지아니할 자랑스러운 선조들이다. 여기에 부연하자면 이순신을 미화하고 영웅시하기 위하여 단지 원균이 희생양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런 엄청난 오해는 왜 생겼을까? 그 증거는?

③ 무엇보다도 선조의 논공행상이 이를 말해준다.

 
선조가 누구인가? 임진왜란을 직접 겪고 어찌되었건 그 난간을 헤쳐나간 주관자다. 그런 그가 앞서 언급했듯이 전란 후 수 차의 오랜 포상심사회의를 거쳐 1604년(선조37년) 6월25일 중신회의에서 문신(文臣)으로 이항복(李恒福1556-1618)과 정곤수(鄭崑壽1538-1602)를 호성(扈聖) 일등공신으로, 무신(武臣)으로는 이순신(李舜臣1545-1598), 권율(權栗1537-1599), 원균(元均1540-1597)을 선무(宣武) 일등공신으로 봉작하였다. 이 글에서 논하려는 원균이 일등공신으로 책봉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임란 3대첩의 하나라는 1차진주대첩의 주인공 김시민조차 2등공신이었고 사명대사, 서산대사, 홍의장군 곽재우, 조헌, 영규등 숱한 영웅들이 있었지만 비겁한 장수였다는 원균이 어떻게 그들을 누르고 선무 일등공신에 올랐을까? 참으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왕조 국가에 있어서 일국의 군주는 절대적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선조만큼 온갖 정보를 접하고, 그 정보를 토대로 종합 판단하여 상세한 정황을 철저히 파악할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던 인물도 드물었을 것이다. 아니 임진왜란의 실체를 가장 꿰뚫어본 인물이 바로 선조라고 단언하여도 좋다고 생각한다.

 

한때 그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파천했다하여 비겁하고 나약한 임금이라 평가하였지만 최근 사료에 의하면 선조의 탁월한 국제정치감각과 적재.적소.적시에 인재를 발탁.배치한 난관극복 능력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그러한 선조(宣祖)가 있었기에 풍전등화의 조선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신병기 조총을 가진 절대적 군사적 열세로 무너지는 조선군대 앞에 일국의 군주가 한양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선조는 개인이 아니라 왕조국가에 있어서 국가 수뇌부 자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허위허위 쫏겨가는 임금과 조정에 백성의 동요가 있었지만 그대로 한양에 머물렀다가 국가 수뇌부가 몰살당했다면 국가적 혼란은 더욱 극심하지 않았을까? 물론 요동망명 발상은 선조의 나약한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를 받아들여 의주파천으로 결론지은 장본인도 바로 선조 자신이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끝까지 고집하여 패망한 군주가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선조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철회할 줄 아는 군주였던 것이다. 이 점이 바로 그가 무능한 군주가 아니라 유능한 군주였슴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선조가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했슴은 실록의 어전회의 기록에 잘 나와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도 반드시 "나는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하는데 경들이 알아서 참작하여 시행하라."라고 말하고 있슴을 보게 된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우유부단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결단을 내릴 때는 단호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결론 내린 사안이 진행되지 않을 때는 왜 진행되지 않는지 신하들을 힐책하는 모습도 보이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선조가 알려지지 않은 어떤 형식으로든 제왕학(帝王學)의 과장을 거쳤다고 생각될 정도이다. 또한 학문 토론을 좋아하여 전란 중에도 주역(周易)강론회를 열고 있슴을 실록 기록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이 점도 그가 범인(凡人)이 아니었슴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북으로는 여진, 남으로는 왜의 준동등으로 심상치 않은 조선 주변의 정세를 감지하고 흐트러진 국방체재를 정비하고자 인재의 발탁부터 추진하였슴이 실록에도 잘 나와있다. 그리하여 임란 발발 2년 전부터 신진 무인들을 대거 천거받아 중용하였는 바 그들 중에 바로 이순신, 이억기, 원균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임란 직전 그들을 남해에 배치하게 되는 것이다. 

 

적재.적소.적시의 인재등용과 정확한 상황 파악, 적절한  외세(明)이용, 신하들의 의견 존중, 전란 중의 학문 토론등은 차치하고라도 유능한 세자(광해군)를 파견하여 분조활동을 함으로써 의병활동을 지원하고 적의 후방 교란작전, 그리고 효과적인 전투지휘등은 유성룡을 비롯한 유능한 막료들의 힘입은 바 크지만, 어찌 되었든 최종 판단은 선조의 몫이었다. 선조의 이런 능력들을 우리는 그동안 너무 폄하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전란을 총 지휘한 그가 왜 만고의 역적이라는 원균을 숱한 임란의 영웅들을 제치고 이순신, 권율과 더불어 선무 일등공신으로 책봉하였을까?

④ 원균이 비겁한 장수라는 데는 수정선조실록도 한 몫 하였다.


임금이 돌아가시면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고 사관들이 소집되어 승정원일기 및 사초의 자료를 토대로서 실록을 작성하게 된다. 그리고 남은 사초는 사관이 직접 세검정으로 가지고 가 흐르는 물에 사초의 먹물을 씻어 소각할 정도로 관리가 철저하였다. 그렇게 작성된 실록은 왜곡을 우려하여 한번 작성되면 수정되지 않는 게 불문율이고 당대의 임금은 죽는 순간까지 사초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정치논리에 의하여 실록이 수정된 예가 딱 세 번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修訂宣祖實錄]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西人)들은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이 북인(北人)의 입장에서 씌어져 다른 당인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됐다고 지적했다. 대제학 이식(李植)은 상소를 올려 실록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선조실록]은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세력들에 의해 수정되었다. 이식이 누구인가? 바로 이순신과 같은 덕수 이씨가 아니던가? 그는 또한 인조에 시장을 올려(1643년) 이순신에게 충무(忠武)란 시호를 받게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 정도로 이순신을 숭앙하고 있던 인물인 것이다. 각설하고 인조반정은 이이의 제자들인 서인들이 주도하고 이황의 제자들인 남인(南人)들이 동조해 성공한 쿠데타로 이순신은 남인 영수 유성룡의 추천을 받았으므로 남인으로 분류되었다. 반면 왜란 말기 조정에 비호자가 많았던 원균은 북인으로 분류되었다. 따라서 [선조수정실록]은 이순신을 후하게 기록한 반면 원균에 대해서는 박하게 기록했던 것이다.

⑤ 원균을 폄하시키는 데는 분단이란 상황하의 군사문화도 한 몫 하였다.


5.16이후 박정희 철권 시절, 북으로는 북한 침략이 잠시도 끊일 날이 없었고 그러한 난세에 난국을 타개한 영웅을 미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적임자로 자연스레 떠올린 인물이 이순신이다. 영웅을 미화시키려면 당연히 그를 시기하는 간신이 필요하다. 그리하여야 영웅은 한층 세인의 우러름을 받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40,50대에겐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시절 기억이 있겠지만 그 즈음 세대치고 아산 현충사에 소풍을 안 가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때 거기로 소풍가서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을 가지고 있는데 커다란 두 개의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활터 앞에서의 기억이 뚜렷하다. 이순신이 활을 쏘며 청운을 품으며 전쟁놀이를 했다는 그 활터였다.

 

군사 정부는 1962년부터 1969년까지 7년간에 걸쳐 사당(祠堂)겸 서원(書院)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현충사가 있는 백암리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고 대대적으로 성역화 작업을 시행하게 된다. 그의 전기(傳記) 작업은 노산 이은상씨가 맡게 되었다. 이은상씨가 누구인가? 그 또한 이식(李植)과 같은 덕수 이씨 아니던가? 그렇다고 이식이나 이은상씨가 무얼 크게 잘못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자기 직계조상을 냉정하게 객관적인 관점에서 묘사할 후손이 있을까? 누구든지 조상의 아름다운 점만을 강조함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난중일기에 원균이 수시로 이순신의 진중(陣中)에 들어와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렸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일의 원인(原因)과 전후 사정을 가리지 않고 술이나 먹고, 행패를 부리고, 모함이나 일삼는 졸장부로 평가함에 커다란 모순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순신이 귀양 가거나 백의종군하게 된 원인을 원균의 모함에 전적으로 뒤집어씌우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극(極)에 달한 느낌이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공연된 오페라[이순신]도 왜곡이 너무 많이 되어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단지 한사람의 영웅(英雄)을 성웅(聖雄)으로 미화하기 위하여 또 한사람의 위대한 영웅을 졸장부로 격하시킴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⑥ 원균이 용맹한 무장이라는데 그 증거는?

㈀ 개전 전의 양국 병력

경상우수사 원균의 당시 입장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임진왜란 발발 전후의 조선과 일본의 상황을 고찰 할 필요가 있다. 조선 초기에는 국민개병제가 엄격하게 지켜지고 군제의 운용이 치밀하게 이루어졌으므로 군비와 병력이 확충되어 정규군을 약 15만 명 선을 유지하였다. 보인(補人)까지 합쳐서는 도합 50만 명 선의 군사력을 꾸준히 보유할 수 있었다. 자료에 의하면 세조 연간에 이르러서의 통계를 보면 군병 27만 명과 보정 58만 명으로 도합 85만 명의 병력이 있었다. 그러나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군정의 문란으로 병력은 장부상으로만 존재하였으며 실 병력은 전무하다시피 하였다. 또 수군의 경우도 편재 상으로는 대소전함 722척과 48,800명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으나 실재로는 총 488척의 대소 전함을 보유하고 있을 뿐 병력 역시 편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에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찍이 해외정복을 구상하여 1586년경부터 방대한 선박건조계획을 수립, 임진왜란 개전 직전에 1천여 척의 병선을 확보하였으며 전쟁 말기에는 3천여 척의 선단을 보유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군은 조총·창·궁시·왜도(倭刀)의 4가지 개인 무기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고 개개인의 실전 경험도 풍부하여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선조 24년(1591년, 일본 天正 19년) 3월 9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휘하 중신인 5명의 타이로(大老), 3명의 쥬로(中老), 5명의 부교(奉行) 등을 오사카(大阪)성에 소집하여 출정을 논의하였고 그의 계획대로 원정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8월, 전국의 대명들을 교토(京都)에 소집하여 조선 출병의 결의를 선포하고 전쟁준비명령을 하달하였다. 큐수의 나고야(名護屋)를 출항지로 결정하고 10월에 전진기지격인 성(城)을 구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1592년) 2월에 완공,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하였고 이키(壹山支)·쓰시마(對馬島) 등의 섬들이 병참기지(兵站基地)로 결정되어 시설들을 구축해 나갔다. 또 조선(造船) 명령 포고령은 선박건조(船舶建造)에 소요되는 시일을 감안하여 원정 발표 이전인 1591년 3월에 이미 발령되어 전국의 영주들에게 2천여 척의 전함과 그에 소요되는 선원들을 차출하도록 하였다. 또한 전국의 대소 대명 88명을 동원대상으로 지정하여, 각 대명의 영지와 미곡 수확량에 따라 차등을 두어 병력을 동원하게 하였다.

㈁ 개전 초기의 양국 병력


이리하여 동원된 일본군의 총수는 30여만 명,

㉠제1선은 병단(조선 출정부대) 9개군 158,700명

㉡제2선은 병단(대본영 대기부대) 8개군 102,960명

㉢수군(해상작전 및 엄호부대) 4개대 9,200명

㉣대본영 직속부대 5개대 29,000명으로 편제하여 전쟁 준비를 조직적으로 해나갔다.

그리고 1591년 12월 현재, 나고야성에는 48만 명분의 1년치 군량과 기타 군수물자가 모여졌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간바쿠의 자리를 조카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다이코(太閤)이 되어 전쟁지도에 전념하였다.

 

정리하면 조선은

㉠관군:17만 2천4백 명(이는 문서상 전국 각지의 주. 군. 현에 분산. 배치되었던 병력으로 실제 병력 수는 극히 적었다.)

㉡의병:2만 7천명

㉢명군:4만 3천명(전쟁 발발 8개월 후 도착)으로 구성되었고

 

일본은

㉠육군:15만 8천 7백 명

㉡수군:6만 명

㉢후방군:11만 9천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수치는 전쟁 후 전반 적인 병력 수의 개황이고

개전 초,

조선의 병력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4월의 농번기를 맞이하여 재택근무중이었던 것이다.

 
㈂ 개전 초기의 전황과 원균의 처지


1592년 3월 1일, 일본군은 코니시 유키나가가 거느리는 1군의 오사카 출발을 시작으로 속속들이 출발하기 시작하여 4월 12일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다. 부산포의 첨절제사(僉節制使) 정발(鄭撥)은 이 사실을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홍(朴泓)과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에게 알렸고 박홍은 이를 각도의 수사와 조정에 알리고 그 자신은 도주한다. 임란 발발 3개월전 경상우수사에 부임한 원균도 이 사실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에게 알렸다. 임란 초기 왜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던 경상좌우수영이 거의 궤멸되어 원균은 휘하의 이운룡, 우치적, 기효근, 이영남등과 더불어 소수의 군선을 거느리고 조경래등 의병장과 연통하며 절치부심 섬 그늘에 은거해야만 했다.

 

당시 수군은 상시 운영체재가 아닌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비상시에 대부분의 병력이 소집되는 예비군 체재였기에 경상수영측은 미처 손 쓸 시간이 없었고 누가 경상수사의 직에 있었더라도 원균이나 박홍과 같은 처지가 되지 말란 법은 없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더구나 원균은 임란 발발 3개월 전에야 부임하여 준비할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이순신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반면에 전라수영측은 경상수영의 연통을 받고 즉시 예비군을 소집하였고 전쟁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순신의 평소 전쟁에 대비하는 자세도 한몫 하였다. 더구나 이순신은 임란 발발 1년 2개월 전에 부임하여 원균에 비하여 많은 준비기간을 가질 수 있었슴은 하늘이 도와 준 결과였고 선조의 인재 운용능력으로도 평가하여야 한다고 본다. 경상수영의 그러한 처지를 우리는 살펴 보아야지만 임란 초기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용맹 무상한 원균의 작전

 

전라수역 인접지의 섬그늘에서 불과 4척의 전선으로 10여척의 적선을 고군분투 당파(撞破)하기도 하면서 원균은 다섯번이나 이순신에게 지원 요청을 하였지만 이순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원균 관할의 남해현령이 현청을 비운 사이 현청및 식량창고등 남해현을 청야작전의 일환으로 불지르게 되는데 이는 이순신의 판단 착오로 밝혀지고 있다. 그 후 이순신은 조정의 지시와 그의 측근인 선거이, 정운등의 강권으로 출전을 결심하게 된다. 즉 임란 발발 한 달 후에야 수군 연합함대가 구성되는데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그리고 경상우수영의 합동작전이 개시되면서 원균은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원균의 전투 스타일은 과감한 당파(撞破)작전으로 조선의 선박이 견고한 이점(조선배=소나무, 왜군배=삼나무)을 이용하여 우선 왜의 배와 부딪혀 배를 가라앉히면서 근거리 전투를 쓰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는 원균이 종성부사 시절 이일의 주도로 단행된 여진과의 전투에서도 활용했던 전법인데 강력한 소수기병의 돌격으로 적진을 혼란에 빠트려 일단 예봉을 꺽어놓고 시작하는 전법으로 이때 이미 싸움의 절반은 이기고 시작하는 거와 마찬가지였다. 

 

 원균은 이때의 전법을 해전에서도 활용하였는데 무턱대고 돌격하고 보는 무식한 전법이 아니라 삼나무는 소나무보다 강도가 약하여 조선배가 부딪히면 여지없이 박살나고 마는 특성을 활용한 과학적인 전법이었다. 일본에는 난대지방에 인접하고 해양성 기후인 관계로 침엽수인 소나무보다 삼나무가 번성하여 일본배는 대부분 삼나무로 만든 군선이 대부분이었다. 실재로 필자가 일본에 가서 보니 온 산이 온통 삼나무 천지였고 소나무는 아주 드물었다.

 

흔히 이순신이 당파전법을 쓴 것으로 오해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사료 어디에도 그러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파전법은 용맹무쌍한 원균만이 쓸 수 있었던 전법인데 원균이 대군단을 이끈 이순신에게 빌붙어 전투를 하다보니 그러한 오해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 즉 이순신이 빠른 선박의 이동과 막강한 화력을 동원한 원거리 포격 위주의 공격 방법에 능통했다면 별다른 장비가 없는 원균을 비롯한 경상우수영 제장(諸將)들은 당파이외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당파전법은 조총 등으로 근거리 전투에 우월함을 보이고 있는 왜군들과의 전투에서는 손실이 크며 위험 부담감이 매우 큰 전투 방법이었으나 원균과 그의 장수들은 그 이외에는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그들의 관할지 경상도를 탈환해야겠다는 경상우수영 제장들의 결의도 한 몫 하였다.

 

여기서 반드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이순신이 세웠다고 알려진 전공의 대부분은 원균을 앞세워 싸운 임란 초기(1592-1594)의 수군 연합으로 이뤄진 것들이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이순신의 무패신화를 말하며 이순신의 승리로 알고 있는데, 분명한 것은 전라 좌우수군및 경상우수영 연합함대의 승리란게 공식적인 기록이다. 다만, 이순신이 거느린 전라좌수영이 수군 연합군중 제일 막강하여 주장(主將)역할을 한 이순신의 공이 제일 크지만 연합군의 두 사령관, 원균과 이억기를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있었기에 무패신화를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경상우수영 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적선으로 뛰어들어 당파로 적의 예봉을 꺾어 놓으면 멀리서 포위하고 관망하던 전라좌우수영에서 달려들어 전공을 세우곤 했다. 일명 학익진(鶴翼陣)전법으로 그 선봉은 매양 원균 장군이었다. 이후 원균이 충청병사로 전출된 1594년 12월 이후 1597년 백의종군하기까지 한산도에 웅거하고 출전하지 않는다.

 

이순신은 수차에 걸친 선조의 명에도 적진의 동향을 핑계로 출전치 않자 선조는 "한산도의 장수는 잠만 자고 있는가?"하였다하며 이러한 한산도 은거 생활은 이후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는(1597년 2월) 원인이 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원균이 모함하여 인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되었다고 알고 있으나 한산도 은거가 직접적인 백의종군 원인인 것이고 이 점이 집중적인 탄핵 대상이었슴은 실록의 어전회의 기록에도 뚜렷이 나와있다.

 

다만, 원균이 전라병사로 전출(1596년 7월)되었던 즈음 수군 운용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올린 상소문이 실록에 소개되어 있다. 이것이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전거가 되고 있기도 한데 이는 원균이 수군을 운용한 경험으로 국가를 위하여 자신의 생각을 조정에 상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본다. 전시의 지휘관이 군작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상부에 진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오히려 그러한 건의를 못하는 장수가 비겁하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다만 그러한 일선 지휘관들의 정보보고서를 종합하여 정책을 입안하는 것은 조정의 몫이었다. 이를 가지고 원균을 모함꾼으로 몰아부친다면 잘못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미 이순신이 출전치 않는 것에 대하여 원균의 상소 이전에 조정에서 많은 논의가 되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순신에게도 한산도 은거의 원인은 있었다. 이즈음 왜군은 수전 패배의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삼나무 전선을 소나무 전선으로 대폭 교체하고 수군 전력을 한층 강화하여 조선수군을 압도하고 있었으니 유능한 지장이라면 한산도 길목을 차단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자세히 알리 없는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수차 출진명령을 내리게 된다.

 

각설하고 원균의 이러한 돌진형 전투 스타일은 이순신과는 상반된 스타일로써 이순신이 심사숙고와 장고(長考)한 작전 수립에 의해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면서 완벽한 승리를 추구하는데 반해 원균은 용맹을 바탕으로 근거리 접전 방식을 사용했으니 이들 두 용장이 함께 싸우는 전투는 패배란 있을 수 없는 환상의 콤비였던 것이다.

 

⑦ 그렇게 합동작전으로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그들이 멀어지게 된 원인은?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개전 초기의 여러 전쟁에서 의기투합했던 이순신과 원균은 전공(戰功)을 조정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선조 26년(1593) 8월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에 겸임 발령되자 원균이 반발하면서 두 사람은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부터 무인이란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는 속성이 있다. 또한 전공하나를 바라보고 전투에 임하게 된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보통 위인전을 읽으면 가정을 버리고, 사심을 버리고, 자신의 몸을 바쳐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진충보국하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하지만 성인이 아닌 바에야 전공을 바라고 또한 그러한 전공을 올바로 평가받을 때 한층 사기가 고양됨이 일반적인 군인들의 생리이리라.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원균과 이순신은 서로 다투지 않고 전투에만 전력투구하기 위해 전공에 대한 장계는 일체 올리지 않기로 최초의 전투에 임하기 전 합의하였다 한다. 이 약속을 어기고 먼저 자신의 전공만 부각시킨 장계를 올린 이가 이순신이요, 더구나 그 장계에서 경상우수영의 전공은 하나도 보고하지 아니하여 원균 이하 경상우수영의 분노는 극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원균이 진중에 술 먹고 들어와 행패를 부렸다는 대목이 많이 나오는데 바로 그 즈음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원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간신도 아니었고 군사작전에 실패만 하는 무능한 장수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순신에게도 인간적인 결점이 있었다는 지적도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이순신의 전공 분배에서의 태도를 보면 [선조수정실록]에도 그 같은 상황을 전하고 있다. "처음에 원균이 이순신의 원병을 청하여 적을 격파하였을 때 연명(聯名)으로 상주할 것을 바라니 이순신이 '천천히 하자' 하여놓고 밤에, 원균이 군사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으며 적을 격파하는 데도 공이 없었음을 자세히 갖추어 보고하니 원균이 듣고 크게 감정을 가졌다. 이로부터 이들은 각각 따로 보고를 올렸고 양인의 간격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이순신도 전쟁의 공을 내세울 때는 자신의 것을 과장하여 보고하는 한사람의 인간이었고 이순신의 이중적인 태도에 분노하는 원균의 인간적인 본심 또한 후세에서 잘못만을 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⑧ 신출귀몰한 선조의 용병술


그러한 앙금을 안고 이들의 공동 활약이 계속되면서 점점 갈등의 요소가 나타날 수 밖에 없었는데 결정적으로는 전공의 분배 문제에서 나타났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순신이 문신의 자질을 갖춘 智將 스타일이라면 원균은 그야말로 야전에 적격인 勇將형의 장수였다. 이순신은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여러 시조 등을 남겼으며, 피란 정부에 올리는 장계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그 유려한 글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이순신이 직접 몇 일을 고민하여 유려한 문구로 쓴 전공 보고서를 쓴 반면에 원균은 아주 단순한 형식의 장계 밖에 올리지 못했으며, 그나마 아주 서툴게 써 보냈다고 한다. 또한 이순신은 지력을 겸비한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의 친구인 서애 유성룡을 통해서 당시 피난 가 있는 조정의 내부 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서 전공의 표출 양식이나 방법에서 원균보다 훨씬 세련되고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원균 입장에서는 이순신의 이러한 전략적 태도와 이기주의적인 모습이 매우 못마땅하게 보였을 것이며, 급기야는 감정 표출로까지 발전해서 상호간의 협조적 관계가 깨어지고 선조는 이러한 양 장수들 간의 갈등 상황을 탐지하고 작전권을 한사람에게만 부여하는 방안을 강구하여 전례에 없는 삼도수군통제사란 직책을 만들어 양자를 교묘히 균형질하면서 직책을 교대로 부여하는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결국 이런 불화로 인해 1593년 8월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자 원균은 1594년 12월 충청병사로 전임되었으며 얼마 후에 전라병사가 되었다.

⑨ 갈등과 불화는 애증을 낳고, 죽음을 낳고...

 
그러다가 1596년 정유년에 왜군이 재차 침략하자 조정에서는 한산도에만 웅거하고 출진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듣지 않는 이순신 대신 원균을 수사로 재기용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되자 원균은 1597년 1월 경상우도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삼도의 수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부임하여 보니 한산도에 웅거한 이순신에게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개전 초기 수군의 실패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하여 자신들의 배의 약점을 파악하고 왜군은 조선 소나무(거제도産)로 조선(造船)한 군선을 대폭 증강했을 뿐더러 육군, 수군 할 것 없이 조선수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전력증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출전치 않는 이순신의 책임을 묻고 원균에게 지휘권을 맡긴 조정의 성화를 감내하기는 힘들었다.

 

출전하면 패전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었다. 야전의 장수가 파악하는 정세와 조정의 시각이 달라 결국 원균은 도원수 권율의 강제적인 명령으로 칠천량으로 출진하게 된다. 출진에 앞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도 이순신과 같이 조선 함대가 부산 출전 시 배후 위협이 될 가덕도와 안골포의 왜 해군기지를 해륙합동으로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으나 도원수 권율 장군은 군권을 앞세워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원균을 곤장 치고 강제 출전시켰으며, 전과 없이 칠천량에 돌아오자 재출전하라고 다시 곤장을 쳤던 것이다. 이때 성격이 괄괄한 원균은 술을 마시고 자탄하게 된다.

 

역사는 이를 가지고 원균의 비열함을 논하게 된다. 이 때의 왜군은 조선점령을 위해서는 수군을 격파해야 한다는 각오 아래 이전보다 훨씬 증강된 600여 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있었다. 반면 우리 수군의 배는 134척뿐이었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실도 모른 채 진격만을 강요하였고 이 해전에서 원균은 대패하여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등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후 백의종군에서 돌아온 이순신이 남은 13척의 전선을 수습하여 200여척의 적선을 쳐부순 명량해전이란 만고에 빛날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되는데 이의 설명은 생략키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드라마틱한 반전으로 인하여 원균의 칠천량 패전이 원균 일개인의 책임으로 매도 당함은 안타까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한다. 수군의 총책임자로써 책임까지는 좋은데 간신배요, 역적이라고 난도질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누가 나아가 싸울 것이가? 군인은 패할 때도 있고 승리할 때도 있다. 승리자에 찬사를 보냄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패배자에게 우리는 위로의 말을 던질 수는 없단말인가?

 

원균은 자신을 위하여 싸운 것이 아니고 국가를 위하여 싸우다 죽은 사람이다. 심지어 그의 외아들, 아우등 가족들까지 희생하며 필사적으로 싸우다 죽은 사람이다. 이 시대에 그러한 대한민국 군인이 있을까? 만일 지금 일본과 전쟁이 난다면 지금 지휘관들 중에 원균처럼 싸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일본은 2차대전의 전범들을 일본에서 제일 큰 규모로 지은 야스꾸니 신사에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뿐더러 주변국들의 결사반대와 그로 인한 외교마찰을 감내하면서도 그들의 수상이 직접 참배하고 있다. 왜? 그들은 패배자이지만 일본을 위해서 싸웠기 때문이다.

 

논공행상 자리에서 선조는 “왜적을 토벌할 때 원균은 죽기를 결심하고 매양 선봉이 되어 용맹을 떨쳐 승전하고 노획한 공이 이순신과 같다. 그런데 그 공을 이순신에게 빼앗긴 것이다"라며 이순신을 폄하하고 원균을 옹호하는 입장을 피력했다. 또 선조는 원균이 대패해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한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 대해서도 패인이 원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원균을 윽박질러 출정을 명령한 도원수 권율에게 있다고 하였다.

 

물론 일부 사가(史家)들은 이순신의 혁혁한 전공을 시기한 선조가 일부러 이순신을 깎아 내리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고도 하고 남해의 백성들이 이순신을 따르니 이순신의 인기에 그의 권위가 위협받을 것을 염려하여 그랬다고도 하나 어찌되었건 선조의 말은 오늘날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선조가 이순신의 인기를 시기하여 폄하하고 경계했다는 추측도 가능하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절대 왕조국가에서 이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선조가 무엇이 부러워서 신하를 시기한단 말인가? 오히려 그러한 신하를 기특히 여겨야 한다고 본다. 왜냐면 신하와 임금은 대등한 관계도 아닐 뿐더러 우월적일 정도가 아닌 하늘과 땅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는 왕조국가의 특성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현대의 소설가들의 발상에서 상상한 추측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선조가 이순신을 시기하고 경계할 지경이었다면 이순신은 역적으로 몰려 죽었어야 했다. 선조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원균 사후 이순신에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 그때 원균은 출전하면 반드시 패할 것이라는 정황판단이 있었기에 출전치 않으려 했으나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금으로 말하면 참모총장에게 환갑에 가까운 해군 제독이 구타당하면서 출전하였던 것이니 패전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나 이제나 전투란 장비와 병력 수보다는 전투에 임하는 사기가 상당부분 차지한다고 본다. 그러나 자신들의 사령관이 수모를 당하면서 억지로 출전한 조선수군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곧 이미 패배가 예고된 전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용맹했던 우리의 원균 장군은 조정과 권율의 판단착오로 패할 것을 알면서도 출전하여 용감하게 싸우다 소나무아래에서 쫓아오는 왜적의 칼을 맞고 죽은 것이다. 여기에서도 원균을 깎아 내려는 무리들은 매일 술과 고기를 먹어 피둥피둥 살찐 원균이 도망가다 지쳐 소나무 아래 주저앉아 왜적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는둥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는 근거없는 비굴한 태도를 유포하고 있으나 이는 모함이라고 생각되며 우리의 원균장군은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어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⑩ 조선의 창과 방패

㈀ 누가 유능한 장수인가?


요컨대 임진왜란의 진행과정에서 이순신의 활약이 뛰어났음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훌륭한 인품과 탁월한 전략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음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가 성인(聖人)이나 신인(神人)의 반열에 오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에게도 인간적인 면이나 단점은 있었던 것이다. 원균에 대해서도 칠천량 해전에서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는 있지만 그를 역적이나 졸장부로 치부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도 전란 중에 아들 원사웅(元士雄)을 잃었고 아우들을 참전시켰고 자신마저 희생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도 나름대로 무장으로서는 용감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은 곧 한 명은 조선의 방패요, 또 한 명은 조선의 창이었으니 한 때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지만 조선의 창과 방패가 서로 힘을 합쳐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고, 이 창과 방패가 어우러져 기나긴 전쟁을 마감하게 된 공로에 관해 칭송은 못할지언정 후세 사람들은 원균에 대한 일방적 매도는 불필요하다 할 것이다. 실로 한 명은 조선의 창이요 한 명은 조선의 방패로써 한민족의 해상 전투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불굴의 영웅들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균이 후일 그렇게 역적으로 평가 절하된 것은 이순신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후손이 절손되다시피 한 데에도 원인이 있었으며 그에 관한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은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남겨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수 있었으며 임진왜란 경과 보고서인 [징비록]도 그의 친구 유성룡의 저술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에 의하여 지나치게 이순신을 성웅(聖雄)시 했던 데 대한 반작용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 이순신에 대한 해외의 평가

 
해전사 연구가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Bollard)는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그가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그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그는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의 무적함대를 물리쳐 일약 영웅이 된 일본의 도고해이 하찌로 제독도 다음과 같이 이순신 장군을 칭송했다. "나를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비교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소리이다. 나는 천황 폐하의 부름을 받고 온 국민의 정성어린 지원으로 단 한번의 싸움을 이겨냈다. 그러나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조정에서조차 버림받고 국민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무기를 만들고 스스로 식량을 조달하여 수없이 일본군대를 쳐부숨으로써 그가 지키는 지역에는 일본 군대가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당대 어떤 과학자가 거북선이라는 우수한 과학 병기를 만들 수 있었겠는가? 그뿐이 아니다. 군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놓고 볼 때 동서고금을 통해 이순신 장군에 비할 장군이 누가 있겠는가? 나를 이순신 장군에게 비교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모독이다." 라 하였다 한다.

 

이와 같이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의 영웅을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지키고 본받으려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우리의 영웅을 비하하거나 포기하여서도 아니 될 것이다.

㈂ 조선의 창과 방패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균은 이순신 만큼의 지략은 없지만 용맹성과 불굴의 정신을 갖춘 또 다른 한 명의 영웅이었으니 이들 두 사람은 조선의 방패요, 조선의 창이라고 자랑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조선의 창과 방패가 서로 끝까지 힘을 합쳤으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이고,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더라도 이 창과 방패가 어우러져 기나긴 전쟁을 마감하게 된 공로에 관해 후세 사람들은 존숭할지언정 원균에 대한 일방적 매도는 불필요하다 할 것이다. 실로 한 명은 조선의 창이요 한 명을 조선의 방패로써 한민족의 해상 전투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불굴의 영웅들인 것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진단 말인가? 그것은 곧 우리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5. 에필로그

역사에 있어서 이렇듯 한사람의 영웅을 미화하기 위하여, 혹은 어느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한사람을 매도한 예는 비일비재하다. 왕건과 진훤(견훤), 김부식과 묘청, 성삼문과 신숙주, 석가와 데바닷다, 예수와 유다의 경우와 성서(The Bible), 불경(佛經)의 예를 살펴보자.

 

송악의 부유한 상인에서 출발하여 고려를 개창한 왕건의 조역 진훤은 일개 군졸에서 주군이 되기까지 비정규 코스를 밟아 포악무도하여 자식에게서 버림받고, 나중에는 왕건에 귀부하여 자신의 나라 후백제를 멸망시킨 인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후백제 멸망 직전까지 후삼국 기간 내내 패전을 모르며 연전연승을 구가한 진훤은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통치역량, 인품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났음이 밝혀지고 있다. 호족을 규합하기 위해서였다지만 수십명의 부인을 둔 왕건은 바람둥이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지렁이의 후손이라느니 아버지와 부자의 연을 끊고 또한 자식에게서 버림받은 진훤이 아니라 진정한 군주의 인품을 지니고 있었으며 단지 공산전투라는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계기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사람의 일생이건 국가의 흥망성쇠건 역사에는 하나의 커다란 변곡점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정주영의 변곡점이 소값을 가지고 가출한 것이라면, 진훤의 변곡점은 공산전투였던 것이다. 고려의 썩어빠진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여 평양천도를 주장한 묘청에 대하여는 혹세무민한 괴승으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지만 최근에는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중화를 자처한 사대주의자로 기득권을 수호한 인물이요, 묘청이야말로 그 당시 부패한 귀족세력에 대항한 신진 개혁세력의 선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에 저항하여 죽음을 불사한 성삼문에 대하여는 절의(節義)의 상징으로, 세조에 빌붙은 신숙주에 대하여는 변절자요 비겁자로 알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 선비로써의 절개와 지조를 지키고 실질적 군왕 능력이 없는 어린 단종을 옹호하며 죽음으로 대의명분을 수호한 성삼문과 현실주의자로써 실질적인 군왕의 자질을 갖춘 수양대군 편에서 그의 정치현실을 전개한 신숙주 둘 중 누구에게 우월함을 부여할 것인가? 성삼문은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음은 분명하지만 냉철한 전략가로써의 자질은 부족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하고 싶으며, 현실적인 정치 감각 면에서는 신숙주 보다는 떨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선악 논리에만 사로잡혀 우유부단함과 전략 수립의 미비로 세종 대부터 꾸준히 양성한 집현전 엘리트들을 떼죽음으로 몰고 가 인재의 공황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신숙주의 역사적 업적은 잊혀지고 그의 앞에는 항상 변절자란 수식어로만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반면에 국정의 움직임에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으나 짧은 생을 마감한 성삼문의 지조는 역사에서 충절의 신하라는 평가를 받으며 지금까지 빛을 발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광수의 “단종애사”란 소설과 각종 TV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여 [성삼문=선, 신숙주=악]으로 규정되어버린 면이 없지도 않다. 성삼문의 가치관으로는 단종에 대한 절의는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꿋꿋한 것이었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신숙주는 단종의 폐위와 죽음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갈 길을 갔다.

 

성삼문은 젊은 나이에 자신이 확신했던 바를 목숨과 바꿨으니 그 또한 훌륭한 일이다. 그는 집현전 부제학이 되어 영화가 보장됐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세조가 통치한 기간에 받은 봉록을 한 푼, 한 알도 쓰지 않고 곶간에 쌓아두었다고 한다. 죽음 직전에는 거적을 깔고 살 정도로 곤궁했으나 절개를 굽히지 않았으니 그 또한 비범한 일이었다. 신숙주가 자신의 학문적 정치적 벗들이 참형을 당하는 순간 인간적 괴로움이야 없지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신을 부끄러워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왕정의 비능률성이 인위적으로 제거되지 않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신숙주가 일신의 영달만을 도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 신숙주가 살아남아 세조를 도와 한 일은 무엇인가?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건국 초기 불편했던 조일(朝日) 관계를 정상화시켰고, 강원도와 함길도(咸吉道)의 체찰사(體察使)로 파견되어 여진(女眞)의 침략을 막았으며, 몇 십 년 동안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로 국가에 봉사했으니 세조에게는 신숙주가 있어 왕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말하는데 홀로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 홀로 “그렇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용기가 필요하다. 만약 신숙주가 성삼문의 편이 되었다거나 성삼문이 신숙주의 편이 되었더라면 역사는 오히려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교에서 악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석가세존을 끝까지 괴롭혔다고 알려진 "데바닷다(提波達多)"라는 인물도 사실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수행방법을 들고 나온 석가세존에 반대하여 검소하고 전통적 수행방법을 고집한 보수적인 인물에 불과할 뿐이요, 모함이나 하는 소인배가 아니라는 설이 유력하다.

 

예수님을 은 30냥에 유대인 제사장에 팔아넘긴 "가롯 유다(Judas Iscariot)"도 사실은 예수의 원(願)에 의하여 예수의 소재지를 알려준 신실한 제자에 다름 아니다는 설이 유력하다. 집정관 본디오 빌라도의 병사가 체포하러 오기까지 충분히 피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예수님은 도피하지 않고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졌다는 것을 그 유력한 증거로 들고 있다. 따라서 가롯 유다는 배반자도 이단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 세계의 2대 종교인 불교와 기독교에도 한사람의 성인의 위대함을 부각하기 하여 오랜 세월동안 또 한사람의 평범한 사람을 악인으로 둔갑시켜 온 것이다.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라는 성경과 불경도 도 마찬가지다. 성서의 해석은 참으로 무궁무진하지만 최근에는 정경(正經, Canon)이외의 외경(外經, Apocrypha)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은 수차에 걸쳐 열린 성서 공의회에 의하여 가필이 이루어져 결집되게 된다. 그때까지의 성서자료 중 성서에 채택된 부분을 정경이라 하고 버려진 자료와 최근 나일강가나 동굴에서 나오는 초기자료들을 외경이라 하는데 알려지지 않은 외경에는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을까? 그 외경에 오히려 예수나 하느님의 원래 말씀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이 있지나 않을까?

 

불경이라는 것도 석가세존 생전에는 경전이란 것이 없었고 석가의 말씀을 암송하여 전해지다가 석가 사후 500나한이 모여 구술(口述)하여 원시경전을 만들고 여기에 수많은 가필을 하여 대장경이란 것을 만들었는데 그것마저도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에서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문도 지나(중국)한문, 조선한문, 삼도(일본)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오류를 거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팔만대장경이란 이렇게 성립된 것이다. 성경은 수많은 나라로 번역되어 읽혀지고 있다. 불경도 많은 번역과정을 거쳐 읽혀지고 있다.

 

흔히 번역이 70%이상 뜻이 전달될 정도 되면 완역이라고 한다고 한다. 아무리 완벽한 번역을 해도 30%정도는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읽는 성경이나 불경이 성인의 생전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반영하고 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슬람의 코오란은 하느님의 말씀을 그래도 가깝게 담고 있다 하겠다. 알다시피 코란은 번역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이슬람어로만 읽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진리라 숭앙하는 성전들도 결집과정과 번역과정에서 이렇게 와전이 되기 일쑤인데 하물며 사람들의 이해집단의 주관적 논리로 씌어지는 승리자의 기록인 역사에는 그러한 베일이 없다면 이상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인류의 삼대성인인 석가세존도, 공자도, 예수도 한결같이 중용(中庸)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냉전시대(冷戰時代)의 산물(産物)인 "모" 아니면 "도"의 흑백논리에 대하여만 사고해오지 않았는가? 반성해볼 일이다. 중도의 길을 걷는 사람을 회색분자로 치부해 오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성현들은 한결같이 사랑과 자비와 효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약간의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자는 관점에서 보면 석가와 공자와 예수가 어찌 이리도 다같이 똑같은 말씀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인생 여정 구비 구비가 어찌 이리도 서로 유사한가?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성경(The Bible)과 불경(佛經)의 내용과 결집(結集)과정이 어찌 이리도 유사한가?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도덕가치 기준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흔히 씌어진 사료적 사실을 그대로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오로지 판단 자료일 뿐이다. 왜냐면 쓴 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가 분명히 사료적 가치가 있으나 어디까지나 중화인의 입장에서 쓴 사료에 불과할 뿐이다. 중국과 대등한 경쟁을 했던 만리장성 너머를 변방이라 하고 거기 사는 민족을 오랑캐라고 하면 거기 사는 민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이 변방이요, 오랑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의 사기나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의 자료 등 사료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사료를 토대로 논리 정연한 상황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각종 자료에서 결론을 내린 이순신과 원균의 분석이었는데 어느 분은 나의 글은 소설이고 허구라고 한다. 과연 허구라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정녕 우리는 두 사람의 영웅을 더불어 가질 수 없단 말인가?

왜 하나의 영웅만이 필요한가?

그래야만 하나의 영웅이 돋보일 수 있단 말인가?

승리자만을 추앙하고 패배자는 무조건 매도한다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가 나라를 위하여 나아가 싸우겠는가?

오히려 패배자를 더욱 사랑하여야 한다고 본다.

유구한 우리의 역사가 존속하는 동안

국가를 위하여 싸우다 이름없이 죽어간 수 많은 영령들이 있다.

원균 장군과 그들 영령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배달9219/개천5900/단기4335/서기2002/2/6(초고)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7/2(퇴고)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씀.

(http://kanghan8.kll.co.kr)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의 美 사실 여부를 떠나서 새로운 시도와 해석을 하셔서,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 보앗습니다. 문장이 머무 길어서 완전히 이해는 못 하였지만, 말슴 하시고자 하는 의미는 알것 같습니다. 역사을 어떻게 해석하고 볼것인가 라는 명제에 대하여 수도 없이 많은 주장이 있지만, 결국은 강자의 논리에 의한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알수 있습니다. 물론 원균도 한 나라의 장수이니 범인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한번의 작전에 실패하였다면 패자의 역사에 서게 되는 숙명도 어쩔 수없다고 보여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좀 뛰어 쓰기를하셨으면 독자로서 좋지 않았나 말씀드립니다 2006/04/17 19:27:52  
풀뿌리 사려깊은 평가 감사드립니다. 저는 평범한 역사이야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왜곡된 역사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가 승리자의 관점에서 씌여졌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승리자의 기록인 역사의 이면 속에 숨어있는 패배자의 저간의 사정에 대하여 아무리 조리있게 설명하여도 글쎄?하며 믿질 않습니다. 삼도(일본)와 지나(중국)의 역사왜곡이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역사는 곧 과거의 반성이고 미래의 비젼이기에 현재를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거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7/2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6/04/17 21:50:21  
풀뿌리 [만물상] 진주(晋州) 정신
1592년 10월 왜군이 진주성으로 쳐들어왔다. 인근에서 싸우던 병사(兵使) 유숭인이 전투에 패해 혼자 말을 타고 성으로 들어오려 했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상급자인 유숭인을 돌려세웠다. “전투를 앞두고 주장(主將)을 바꾸면 지휘체계가 무너진다”는 이유였다. 말을 돌린 유숭인은 결국 전사했다. 그러나 의병장 곽재우는“이로써 진주성을 보전할 수 있었으니 진주 사람의 복이다”라고 했다.
▶왜군은 곡창 호남으로 가는 길목 진주성을 무너뜨리려 3만 대군을 보냈다. 김시민은 병력이 3800명뿐이었지만 왜군 조총을 본떠 총통 170자루를 만들고 화약 150근을 구웠다. 넉넉히 대비한 덕에 화약을 짚에 싸 성밖으로 던져댔다. 1주일 공방 끝에 적은 물러났다. 학봉 김성일은“늙고 약한 남녀들도 돌을 굴리고 불을 던져 성안에 기와나 돌, 지붕 이엉이 다 없어졌다”며 진주 백성의 기개에 찬탄했다. 노량·행주와 함께 임란 3대첩에 드는 진주성대첩이다.
▶김시민은 전투 마지막 날 적병 총탄에 숨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패전을 두고두고 수치로 여겼다. “다시 진주를 공격해 전날의 분함을 씻으라.”이듬해 왜군이 10만 군사를 몰아 진주성을 포위하자 늙은 기생이 김시민 없음을 탄식했다. “전에는 장졸이 서로 사랑하고 호령이 한결같아 이겼으나 지금은 병졸이 장군과 익숙지 못하다.”며칠 만에 성이 함락됐다. 왜군은 민·관 7만명을 살육했다.
▶선조는 1604년 김시민을 선무(宣武) 2등공신에 올리고 노비와 밭을 하사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다. 이 교서가 일제 때 일본인 학자에게 넘어갔다가 작년 말 도쿄 경매시장에서 고서적상에게 1200만엔에 낙찰되면서 모처럼 소재를 드러냈다. 진주정신의 상징 김시민 공신교서를 그대로 둘 진주 사람들이 아니다. 시민단체들이 모금운동을 벌이고 민속예술단체들도 모금공연에 나서 교서를 되사오기로 했다.
▶진주 사람들이 매년 10월 개천예술제로 진주성싸움을 기린 지 60년이 다 돼간다. ‘이기주소 이기주소/ 우리 군사 이기주소/죽여주소 죽여주소/ 왜놈들을 죽여주소’(쾌지나 칭칭나네). 노인 아이 없이 돌을 던지며 고향을 지켜낸 진주 사람들의 호국혼은 구전 민요에까지 담겨 내려온다. 충절(忠節)의 고장, 예향(藝鄕)이자 문향(文鄕) 진주의 곧은 얼은 일본의 수중에 떨어진 김시민 교서의 얄궂은 운명을 종내 바로잡으리라 믿는다. 김기철 논설위원 kichul@chosun.com 입력 : 2006.05.25 23:29 50' 
풀뿌리 [이덕일 사랑] 史官과 實錄
동양사회에서 사관(史官)의 대명사는 사마천(司馬遷)이다. 그는 흉노 토벌에 나섰다가 포로로 잡힌 이릉(李陵) 장군을 옹호하다가 한(漢)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거세 형벌인 궁형(宮刑)을 당했다. 궁형을 당하느니 죽음을 택하는 게 사대부의 일반적 처신이었지만 그는 살아남아 ‘사기(史記)’를 썼다. ‘사기’ 본기(本紀)는 사마천이 속했던 한(漢)나라의 개국(開國) 시조 고조(高祖)의 본기보다 그와 싸웠던 항우(項羽) 본기를 앞 순서에 두었다. 그리고 자신을 궁형에 처한 무제를 미신이나 좋아하는 용렬한 군주로 그렸다. 무제는 크게 화를 냈지만 그것으로 죄를 주지는 않았다. 역사 기술은 사관의 몫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사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김일손(金馹孫)이다. 연산군 4년(1498)에 발생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사화(史禍)라고도 하는 이유는 김일손·권경유(權景裕)·권오복(權五福) 등의 사관들이 사지가 찢겨 죽는 능지처참을 당했기 때문이다. 경상도 청도군(淸道郡)에서 지병인 풍병(風病)을 치유하던 김일손은 의금부에서 내려오자 “내가 잡혀가는 것이 사초(史草·실록의 기초기록) 때문이라면 반드시 큰 옥사(獄事)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 사화를 예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이미 죽은 스승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에 실으려다가 화를 당했다. 이는 단종을 의제(義帝)에, 세조를 항우(項羽)에 비유해 “신하가 임금을 찬시(簒弑·자리를 빼앗고 죽임)했다”고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조의제문’에 “충분(忠憤)이 깃들어 있다”고 덧붙인 것이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같은 훈구(勳舊) 공신들의 촉수에 걸리면서 옥사(獄事)가 발생했던 것이다. 조선의 임금은 ‘실록(實錄)’을 볼 수 없었다. 사고(史庫)를 지키는 고지기는 임금이라도 실록을 보려고 하면 제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번에 일본으로부터 일부가 반환되는 ‘조선왕조실록’은 이런 체제적 강점과 목숨 걸고 절대권력을 비판했던 김일손 같은 이들의 사관(史官) 정신이 녹아 들어 있는 민족사의 보고이다. 혼돈한 이 시대에 역사가 무엇인가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입력 : 2006.06.04 22:40 30'] 2006/06/05 14:46:20  
풀뿌리 [이덕일 사랑] 임진왜란과 김성일
조선일보 2006.12.28 조선이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한 이유를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김성일(金誠一)의 보고에서 찾는 경향이 많다. 서인인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이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하자 동인인 김성일이 당파심에서 달리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조보감’ 선조 24년(1591)조는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해서 김성일이 달리 말했다고 전한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을 만날 때 황윤길은 뜰에서 절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성일은 국왕이 아니라 관백(關白)이니 당(堂) 위에서 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만난 후에 답서(答書)도 주지 않고 현재의 오사카 계시(界市)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자 김성일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황윤길은 서둘러 떠났는데,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는 ‘억류를 당할까 두려워서’였다고 쓰고 있다. 겨우 받은 답서에 ‘조선국왕 전하(殿下)’가 정승의 호칭인 ‘합하(閤下)’로 되어 있자 김성일 혼자 강하게 항의한 것도 그런 예다. 그러나 김성일은 유성룡이 “만약 병화(兵禍)가 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하는가?”라고 물었을 때는 “인심이 놀라 당황할 것이므로 해명한 것이다”라고 전쟁 가능성을 시인하기도 했다. 전란의 조짐은 김성일의 귀국 보고를 뒤덮을 만큼 많았다. 풍신수길의 답서에 ‘명나라에 쳐들어갈 테니 조선이 앞장서라’는 구절이 있어서 조야(朝野)는 이미 충격을 받았다. 임란 1년 전 조선에 온 일본의 회례사(回禮使) 평조신(平調信)은 침략을 공언했고, 이들을 접대했던 선위사(宣慰使) 오억령(吳億齡)은 ‘명년(1592)에 침략할 것’이라고 정확히 보고했다. 그러나 선조를 비롯해 조정엔 전쟁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풍신수길이 미치지 않고서야 설마 공격하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자신들은 전혀 몰랐다는 듯 김성일을 희생양 삼아 빠져나갔다. 진정한 평화주의자는 0.1%의 전쟁 가능성에도 대비하는 사람이지 불확실성에 의존하는 ‘설마주의자’가 아니다. ‘설마가 사람 죽인다’는 속담은 이래서 가치가 있다. 2006/12/29 15:4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