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원균 장군의 편지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31. 14:19

어느날

내 꿈 속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피범벅이 된 寃鬼 하나가

손을 휘저으면서

무언가 애절하게 하소연하였다.

말을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안타깝게 호소하는 듯한 눈빛을 던지다가

한 마디 말도 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뒤돌아서

사라져 갔다.

그러다가 그 귀신이 쓴 것으로

생각되는 편지 하나가

나에게 배달되어 왔는데...

 

 

 

 

원균 장군의 편지



지금 이내 영혼이 방황하는

땅 속이 너무 너무 추워.

내 묘는 경기도 평택의 도일동

우리 원씨 선산에 있지만

내 원혼은 바람 부는 남해의 바닷가를

지금도 울부짖으며 떠돌고 있어!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너무 싫어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나의 묘와 시신과 영혼이

따로따로 돌아댕기기 때문이지.

그렇게 따로따로 노는 이유는 잘들 알겠지?

 

그 날, 칠천량 해전이 있던 날,

늙은 내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소나무 아래 주저앉아 버렸었지.

그리하여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쫓아오는

왜놈들의 칼을 고스란히 받으니

육신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고 흩어져

나의 머리는 백골이 되어

남해안의 이름모를 야산의 소나무 아래 나뒹굴고

나의 육신은 썩어 문드러져

갈비뼈 몇 대만 승냥이 밥에서 벗어나

천길 벼랑아래 묻혀있게 되었던 것이지.

 

그러니 나의 원혼이 떠도는

이 땅 속이 어찌 춥지 않겠나?

이장군처럼 전장에서 총알을 맞아 장렬하게 죽었던들

이렇게 춥지는 않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나는 무인으로서 정코스를 밟았다고 자부해!

이장군이야 유장관과 정장관의 추천으로

32세에야 늦깍이로 급제하였지만

특진에 특진을 거듭하였지.

20대에 급제했으면서도 정부에 연줄을 대기 싫어한 나야

오로지 밑에서부터 박박 기다시피 하여 올라갔지.

그러니 나는 야전형(野戰型)이라고 자부해.

 

함경도에서 부산까지 팔도강산의 변방 구석구석

안댕겨 본 데가 없지만

무인의 전형적인 저돌성 하나로 모든 난관을 극복했지.

그런데 변명아닌 변명을 하자면

그 날 새까맣게 몰려오는 왜군들에게는 어쩔 수 없었어!

 

내가 맡은 경상우수영 뿐 아니라

부산첨사 정발, 동래부사 송상현도 대패하였고

경상좌수사 박홍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지.

그러나 나는 줄행랑을 치지는 않았어!

폐선같은 전함들은

왜놈들 손으로 넘어가면

수리하여 아군을 공격할 무기로 돌변할 것이 염려스러워

전부 불태우고 쓸만한 전선 4척만을 수습하여가지고

게릴라 전법으로 부하들과 힘을 합쳐

왜선을 박살내었지. 


그러니까 내가 경상우수영을 맡은 것은

왜놈들이 쳐들어오기 석 달 전이었어.

막상 내려가 보니 장부상으로

75척이나 된다던 전함은 폐선이나 다름없었고,

수천명이나 된다던 병사들은 농번기 재택근무중인지라

우수영을 지키는 극수수의 병사들만이

헬레레한 모습으로 반겨주더구만.

 

왜놈들이 부산 앞바다를 새까맣게 덮어오자

내 수하중 우치적, 이운룡으로 하여금 전선을 정비하라하고

죽창을 들고 나에게 달려온 의병장 강덕룡, 조경래와 함께

부랴부랴 사천, 고성, 곤양등지를 돌며

농번기 재택근무하는 병사들을 소집하고,

전함을 수리하여 대처 하던 차에

왜놈들이 벌떼처럼 상륙하여 달겨든게야.

 

수군의 당시 사정은 경상우수영뿐이 아니고

비슷한 시기에 부임한 박홍, 이장군, 이억기등도

다 마찬가지 사정이었어.

다만 전라좌수영만큼은 왜놈들이 들이닥치기

1년 2개월 전에

이장군이 여수에 위치한 해군사령부에 부임하여

그나마 전선을 수리하고 병사들을 소집할

타이밍을 확보할 수 있어서 천만 다행이었지.

그리고 농번기 재택근무하는 병사들에 대하여

우리가 필사적으로 전라수역으로의 진출을 저지하는 사이에

이장군이 평소 꾸준히 전력을 증강하고 비상소집훈련을 해놓은 덕에

나의 연통으로 비상소집이 가능했어.

 

그전에 이미 우리 군부에서는

왜적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하고

수차 전력증강을 건의했지.

그래서 선조 대통령은 나와 이순신, 이억기등

신진 사령관들을 부랴부랴 남해에 배치했던거지.


그렇게 나와 무인들은 큰 전장이 다가옴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어.

누구라 예기 안해도 알테지만

황가와 김가란 사람이

똑같이 왜놈들의 동태를 살피고 와서는

한사람은 곧 쳐들어 온다하고

한사람은 절대 안쳐들어온다하고

도무지 갈피를 못잡게 틀리게 보고하니

그리쟎아도 쌈박질만 일삼는 문신들이

쌈박질에 정신이 팔려

애시당초 올바로 판단하긴 글렀지.

 

더구나 그들 붓자루 쥔 문신들이 인사명령을 내리고

국가운영을 기획하던 시대였으니

무인들은 가라면 가라는 대로,

오라면 오라는 대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선조대통령의 통찰력으로

우리 신진 사령관들이 남해안으로 배치되어 내려갔을 때는

시간적으로 턱없이 부족했었던거야.

 

앞서도 예기했지만

나는 폐선이 되다시피한 우수영의 전함들이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면 우리를 공격하는 무기가 될 것이므로

모조리 불사르고 그래도 쓸만한 전선 네척을 끌고

전라좌수영 인접지인 한산도로 가 

임시 사령부를 설치하고

이장군에게 지원요청을 하는 한편,

우치적, 이운룡등 부하들과 왜놈들을 결사적으로 막았지.

이 부분을 왜 자꾸 예기하냐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 때문이야.

무서워서 무인도에 숨어있다 나왔다는둥 하는데

이때 나의 처신은 의병장 강덕룡등

저승에 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증언을 들을 수 있을거야.

 

그 때 나와 내 부하들은 극소수의 전력으로

게릴라전법을 구사하여 섬그늘에 숨어있다가는

갑자기 돌격하여 짖부수는 당파전법으로 적선 10척을 분멸하였지.

흔히 우리 수군의 최초 전공은 이장군이

이룬 것으로 아는데

그것은 조정에 장계를 올린 공식적인 기록이고

우리는 그때 이미 당파를 써서 왜선을 박살 내었어.

 

그럼 왜 장계를 올리지 않았냐구?

우리 관할지인 경상우수영마져 빼앗긴 판에

그게 무에 큰 자랑이라고 장계를 올리나?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고

자랑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장계까지 올린다는 것은 생각도 몬했어.

그러나 이장군에게 지원 요청을 하면서

그 편지에 우리의 전투 내용을 적어 보냈지.

후세 사람들은 그것도 가짜라고 한다더만.

내 참! 기가막혀서...

 

어쨋튼 한산도에서 왜놈들을 막고 있는 동안

전라 수영 쪽은 그나마 대비할 수 있는

타이밍을 갖게 되었던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지 뭐.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다섯번이나 나의 지원요청은 받은 이장군은

이상하게도 움직여주지 않았어.

 

물론 자기관할 구역이 아니라

제승방략체재하에서 쉽게 지원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러나 글쎄? 

국가가 위급한 전시이니 만치

제승방략이고 뭐고간에 달려왔어야 맞다고 생각해.

선조대통령도 제승방략이라하더라도

위급시에는 출전 여부는 지역사령관의 판단에 맡긴다고 하셨거든.

그런데 내가 몇 번이나 연통을 하고

국방부에 보고하고 교서를 받고도 이장군은 움직이지 않았어.

그의 부하인 선거이와 정운이 출전하여야한다고 강압하고 나서야

전라좌수영 이억기의 의사를 묻고나서는 

우수영 이억기 사령관과 연합전선을 구성하여 천천히 나타났지.

 

그러니까 4월초에 왜놈들이 부산포에 들이 닥쳤는데

청야작전(淸野作戰)을 한답시고

나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우리 관할지인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지였던

남해현의 창고와 무기를 송두리채 불사르다가

5월 2일에야 내 앞에 나타났어.

나중에 이장군이 연합작전을 위해 우리 진영에 나타났을 때

내 부하들이 이장군에게 그 일에 대하여 항의도 하였지만

그 때 형편으로 볼때 경상우수영의 보급기지였던 남해현의

식량창고와 무기들을 불사를 일은 아니었어.

남해현이 텅텅 비었다는 첩자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불사를 일은 아니었어.

그 때 내 부하인 남해 현령은 재택근무자 동원을 위해

현청을 비우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던거야.

어쨋튼 누란의 위기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뒤늦게에야 나타난 이장군이 그때는 야속했어.

아! 이 땅 속이 너무 춥다, 추워.



그런데 말이야!

내 성격이 문제였어!

나는 거칠게 야전에서 커서 불불한 성격이었지.

그런 반면에 화끈했어.

한마디로 머리 굴리는 놈은 내 밑에서 배겨나지 못했지.

 

최선을 다하고 용감한 놈은

쫄병이라도 대작(對酌)을 하였지.

뒤늦게 나타난 이장군과의 합동작전에서도

내 관할지 경상우수영 제장들은

한시 바삐 진영을 탈환해야겠다는 일념으로

항상 선봉에 서서 단단한 우리 배로

돌격 앞으로 해서 왜놈 배를 왕창 때려 엎으면

멀리서 관망하던 전라수영 군단이 달려들어 마무리 했지.

연합작전은 거개가 그런 스토리로 전개되었어.

 

요즘 KBS에서 방송하는 무인시대를 보면 알 거야.

무인들이란 공명심과 명예로 죽고 사는 족속들이야.

그 점에서 이 장군과 나는 같은 부류라고도 할 수 있어.

다만 내가 겨우 보고서(報告書)나

쓸 정도의 문장 실력일 정도 밖에 안 되는

전형적인 불학무식한 무부(武夫)에 불과했지만

이장군은 달필에 명문장을 구사하는

지장(智將)이었던 점은 나도 인정해.

 

그 놈의 성질머리 땜시 무인으로써 출세도 했지만

나의 어눌한 문장실력은

오히려 단점이 더욱 많았던 것 같아.

긍께 무얼 해먹더라도 글은 배워야 해!

그러니 지금 내가 있는

이 으스스한 추위에 견딜 수가 없는 거야.

나 좀 살려줘. 나 좀 꺼내줘.



그래서 이장군과의 합동작전에 앞서

전쟁 결과 보고서(장계)는 아예 올리지 말거나

나중에 합동으로 작성하자고 합의해 놓고

전투에 임했던 거야.

왜냐면 장계를 다투어 올리다 보면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자중지란이 날 것을 염려했던 거지.

 

우리는 서로 무인이었기에

그러한 현상에 대한 예견은 충분히 할 수 있었어.

그런데 말이야! 이장군이 그 약속을 깬 거야.

 

아무리 소수 병력으로 한산도에 빌붙어

전투에 임했을망정

선봉대는 경상우수영 병사들이었는데

그의 화려한 달필(達筆)로

전라수영 병사들만의 전과인 것처럼

전공 장계를 올린 것을 안 내 부하들은

내 앞에 와서 이를 갈았지.

 

그러던 어느 날 술을 잔뜩 마시고

그의 집무실로 찾아가 좀 다투었지.

솔직히 나는 술 좀 좋아했지.

주사(酒事)도 있었어.

그 정도 가지고 이장군은

그의 일기에 내가 행패를 부렸다고 썼다더군.

 

나는 글재조도 없거니와 한바탕 술먹고 싸울망정

쩨쩨하게 글로써 비난하는 짓은 죽어도 않해!

내 체질에 맞지 않아!

나중에 알고 보니 일기에 나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하여

나쁜 짓을 다 적어놓는 것도 부족하여

장계를 써서 조정에도 알렸더군.

 

그러니 후세의 사가들도 나를 술주정뱅이에

졸장부로 표현하게 되는 거지.

그러니 이 땅 속이 춥지 않겠어.

이 오뉴월에도 으스스하니 추워.

무서워.



바다를 지켜야 할 나와 이장군이

왜놈들은 쳐부수지 않고

그렇게 쌈박질만 일삼으니

조정에서는 걱정이 태산 같았지.

생각다 못한 선조대통령은

나를 충청도지사로 전출하고

이장군을 해군참모총장(삼도수군통제사)으로 임명하셨지.

 

그런데 묘한 일은 이장군은 이때부터

한산도에서 칩거하며 왜군과 싸우려들지 않았지.

그저 바닷길만 차단하는 수비 작전으로 일관했지.

그러니 조정에서 이장군의 정적들이

용맹한 원균이 곁에 없어 이장군이 출전치 않는다고 모함하게 되고

혹자는 내가 그들을 사주했다고들 하는데 

맹세코 그런 사실은 없었어.

맹세해.

난 그런 째째한 사람이 아니야.

 

나중에 내가 다시 해군참모총장이 되어 현지에 가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지만

결과적으로 이장군이 이때 판단은 옳았어.

역시 이장군은 지장(智將)이야.

 

급기야 조정에서는 명령불복종으로

이장군을 이등병으로 강등시키고

나를 그 자리에 임명하였지.

왕조시대에 대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기에

구국을 위한 신념대로 행동한 이장군의 불행은

이때만큼은 지장다운 처세가 아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나도 납득이 안가.

아무리 군대를 움직일 형편이 아니라 하더라도

형식적으로라도 약간의 군선으로

왜군 진영을 찝쩍거리는등

얼마든지 현명하게 철리할 방도가 있었을 터인데

요지부동으로 한산도에 은거한 이유를 모르겠어.

 

분명히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은 점은

사람들은 내가 모함하여

이장군이 그리 된 것으로 아는데

그건 완전한 와전이야.

나는 그런 째째한 사람이 아니야.

물론 이장군의 이기적인 장계에 대해

조정에 내가 아는 이들에게 불만을 토로하긴 했지만

같은 무인으로써 고매한 이장군을

모함할 정도로 졸장부는 아니야.

나를 스스로 멋있고 화끈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웃을 테지만 진짜로 그랬어.

지금은 비록 음산한 구천을 헤매지만 말이야.



그래서 선조대통령은  다시

이장군을 이등병으로 강등시키고

나를 해군참모총장으로 임명하여 남해로 보냈는데

현지에 부임해서야

이장군이 왜 움직이지 않았는지를 알았지.

 

왜놈들은 내가 쓴 당파전법에

그들의 배가 왜 박살났는가를 면밀히 분석하고

연약한 일본 삼나무를 쓰는 대신

그들이 점령한 조선의 해안에서 직접

아주 단단한 조선 해송(海松)으로 군선들을 대량 건조하여

서해로 진격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해안에 철옹성같은 왜성을 연달아 쌓아

채전을 가꾸며 조선의 처첩을 거느리고

아주 눌러앉을 양으로 버티었던거지.

 

그런데 육지에서의 연전연패로 우리는

병사들의 수도 턱없이 모자랐을 뿐더러

인력이 부족하니

군선을 만들어 낼 틈도 없었고,

더불어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군선이 부서져 나가니

날이 갈수록 군선이 부족해진 거야.

 

그러니 이때는 우리가 스스로 전투를 걸거나

쳐들어가면 자멸할 것이 뻔할 뻔자였지.

그래서 이장군은 한산도에서 큰 칼 옆에 차고

절치부심하고 있었던 게지.

 

나도 이장군의 수비작전에 동감하고

내부 단속에 신경을 썼지.

그러는 한편 

왜놈을 칠려면 철옹성같은 보급기지부터 박살내자고

권장군에게 건의하였지만 무시되고

삼군사령관 권율은 늙어빠진 나를

쫄따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곤장을 치며

바다로 출전하라고 하니

죽을 것을 알고,

전멸할 것을 알고 출전하였던 게야.

생각해봐!

왜군들의 근거지인 왜성을 놔두고

지는 공격두 안허구 해군들만 공격허라구허니

공격해봤자 패배는 뻔한것 아니것어?

해군사령관인 나를

삼군사령관인 지가 직급이 높다구

쫄다꾸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큰 대자로 누워 치도곤을 맞는 광경을

한번 상상해봐!

으, 춥다. 추워...

 

권율 하면 지금 사람들 행주대첩을 이룬

불세출의 영웅으로 알지만

행주대첩은 사실 이름없는 민초들과 땡중들과

조선의 신무기를 만든 무기제작기술자들이

승리한 전쟁이야!

미련곰탱이 권율이 한 것이라고는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며 뽐낸 것 밖에는 아모것도 음써.

실록에도 권율은 아둔하고 미련하기가

곰탱이같다고 나와있지.

 

아버지 권철이 영의정까지 지내

그 후광으로 일찍 출사할 수 있었지만

과거에 수차 떨어지고 천신만고끝에

46살 먹던 해에 식년무과에 급제 했으니

얼마나 아둔한 사람인지 알겠지.

그러니 만치 얼마나 벼락출세한 인물인지 알만하지?

나를 비롯한 이일, 신립등 무인들은

대부분 20대에 무과에 급제하여

변방을 엄청고생하며 떠돌다가 그러한 경험을 갖고

사령관에 겨우 임명되었지만,

이순신 장군만 하더라도 3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고속승진했고

임란당시 이장군의 수하였던 선거이, 정운등 많은 참모들이

무과급제 년도로 따지자면 이장군보다 훨씬 선배들이었어.

아무튼 그런 선배들을 포용한 이장군의 능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해.

 

어쨋튼 그런 아둔한 권장군에게

해상작전 사전작업으로 육지의 보급로 먼저 차단해야한다는

건의는 애시당초 통 먹히지가 않았어.

그 미련 곰탱이는 정부에서 수군을 동원하여

한시바삐 왜적을 쳐부수라는 명령을 이행하는 것 밖에는 음썼어.

자기는 꼼짝도 안하면서

수군만 드립다 달달 볶아대었지.

비참한 죽음은 예고된 것이었어.

지금 생각해도 권장군이 미워.

수전(水戰)은 쥐뿔도 모르면서

직급으로 눌러 나를 비참하게 죽게 했으니 말이야.

 

그러나 패장(敗將)은 말이 없어야 하는 법,

아무리 매를 맞아 출전했어도

모든 책임은 사령관인 나에게 있는 법,

내 부하들에게 이장군같이 백의종군할망정

출전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야.

 

그들을 설득하고 전쟁을 위한 만반의 준비기간을

갖게 하지 못한 내 인덕의 부족함,

그리고 옹졸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어.

용서해줘!

지금 세상 사람들은 나를

피둥피둥 살만 찐 게으른 겁장이에,

시기와 질투로 똘똘 뭉친 모사꾼에,

부하들을 못살게 군 술주정뱅이 졸장부로 묘사하는데...

난 그들에게 묻고 싶어.

방산비리에, 자식들 군 면제에, 성추행에

많은 비리를 저지르는 장군님들!

전쟁이 나면 가족들을 출전시켜 싸우게할 수 있겠는가?

내 3형제, 조카, 내 외아들이 전쟁에 참여해

싸우다 죽음을 맞은 우리 일족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그들에게 한번 묻고싶어.

내 금쪽같은 외아들 원사웅은 방년 18세에

왜적과 싸우다 전장에서 죽었어.

나라에서 징집한 것도 아니고 어린 나이에

못난 애비따라서 보국충정으로 그렇게

이슬처럼 사라져 간 거야.

 

그런데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고

수백년을 손가락질만 받으며 도일동에 가묘로 묻힌 나의 신세여!

세상 사람들에게 도일동에 꼭 한번 오라고 권하고 싶어.

거기 가묘의 비석에 적힌 내 행장기를 보고도 손가락질을 한다면...

이 나라가 전장에 처했을 때

누가 맨 몸으로 전장에 나가 싸우겠는가?

와서 최소한 목례라도 해준다면 난 원이 없겠어.

보상은 그거 하나로 족해.

 

이런 편지 안쓰려 했는데

400년 이상을 갖은 음해 소리를 들으며

구천을 헤매다 보니 한번 맘먹고 써 본거니까 용서해주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성격상

남을 헐뜯고 싶지 않지만

지금은 나와 다른 저승세계에 있는

권장군이나 이장군에게

손해되는 예기도 한것 같은데 이해해줘.

그러나 그게 진실이야.

 

어찌 되었던 그것이 내 운명이었고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였지만

요즈음에야 나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려는 노력이 있으니

이제야 구천생활을 그만두고

권장군과 이장군이 계신 

하늘나라로 훨훨 날아 올라가려 해. 

가서 그들과 쐐주 한잔 하면서

구름 아래 우리가 지켜낸

대한민국을 내려다보며

화해하려해.

사실 그들과 화해할 것도 음써.

그 때 우리의 목적은 같은 것이었고

결국 목적을 달성했응께.

비록 반토막났지만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타이틀로

당당히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존재하고 있으니깐.

 

이제 이런 편지도 썼으니

남해의 해안에 버려진 내 해골과

뼉따귀 조각 따위에는 전혀 미련이 없어.

그저 나의 영면(永眠)을 기원하는

이런 조사(弔詞) 한마디만 있으면 돼.

“원균 장군이시여! 이제

이 조그만 반도에서 일어난 일은

잊으시고 편히 잠드시라.”

 

각께 다메바. 

 

 

 

덧붙임)

 

1. "원균장군의 편지"를 쓰게 된 배경(2004-08-21)

 

박재석님께

아래 제 글에 답글을 다셨더군요.

 

우선 수정 선조실록입니다.

원균은 북인으로 일반적으로 분류되었고

선조실록이 북인의 입장으로 씌어진 것이라하여 서인들이 주도되어 수정하였고

유성룡이 속한 남인이 동조하여 이뤄진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1)실록은 수정된 예가 딱 세 번 있었다.

 

2)그 중 하나가 바로 [修訂宣祖實錄]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西人)들은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이 북인(北人)의 입장에서 씌어져 다른 당인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됐다고 지적했다. 대제학 이식(李植)은 상소를 올려 실록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선조실록]은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세력들에 의해 수정되었다. 이식이 누구인가? 바로 이순신과 같은 덕수 이씨가 아니던가? 인조반정은 이이의 제자들인 서인들이 주도하고 이황의 제자들인 남인(南人)들이 동조해 성공한 쿠데타로 이순신은 남인 영수 유성룡의 추천을 받았으므로 남인으로 분류되었다.

 

3)반면 왜란 말기 조정에 비호자가 많았던 원균은 북인으로 분류되었다. 따라서 [선조수정실록]은 이순신을 후하게 기록한 반면 원균에 대해서는 박하게 기록했던 것이다.(제 글 "원균 장군의 편지 중에서) 

 

그리고 윗글 실록을 살펴 보자면

 

비변사가 아뢰기를, [선조 057 27/11/28(임인)]

" ...원균의 경우는 당초 이순신과 협력하여 역시 적의 선봉을 꺾는 성과를 올렸으니, 이 두 사람의 충성과 공로는 모두 가상합니다... 원균이 10여 세 된 첩자(妾子)를 군공(軍功)에 참여시켜 상을 받게 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이것을 불쾌히 여긴다 합니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대개 공다툼으로 이와 같이 되었다 합니다. 당초 수군이 승전했을때 원균은 스스로 공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순신은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선거이(宣居怡)가 힘써 거사하기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순신의 공이 매우 크지도 않은데 조정에서 이순신을 원균의 웃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원균이 불만을 품고 서로 협조하지 않는다 합니다."하고, 정곤수(鄭줸壽)는 아뢰기를,

“정운(鄭運)이 ‘장수가 만일 가지 않는다면 전라도는 필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부득이 가서 격파하였다 합니다.”정곤수가 아뢰기를, “순신의 부하 중에는 당상관에 오른 자가 많은데, 원균의 부하 중에 우치적(禹致績)이나 이운룡(李雲龍) 같은 자는 그 전공이 매우 많은데도 그에 대한 상은 도리어 다른 사람만도 못하기 때문에 서로 분해 하고 있습니다.” 저번에 남방에서 올라온 사람에게 원균에 대해 물었더니 ‘습증에 걸린 몸으로 장기간 해상에 있으나 일을 싫어하는 생각이 없고 죽기를 각오하였다.’ 하니, 그의 뜻이 가상하다. 정탁(鄭琢)이 아뢰기를, “소신이 남방에 가서 들으니, 왜적이 수군을 무서워한다 합니다. 원균은 사졸이 따르니 가장 쓸 만한 장수요 이순신도 비상한 장수인데, 단 이들이 다투는 일이 매우 못마땅합니다.

 

이상 실록의 내용을 정리 하자면

 

1) 당시 군 수뇌부인 국방부(비변사)에서는 개전초 원균이 소수병력이지만 선봉에서 싸운 점을 인정하고 있다.

 

2)원균은 서자이지만 10여세된 피붙이까지 전투에 참여 시켰다. 이는 나쁘게 보자면 시빗거리가 될 수도 있으나 적자인 외아들 원사웅도 약관의 나이로 전투에 참여 한 기록을 보면 원균이 전투에 최선을 다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3)조선 병영체재가 제승방략(자기지역만 방어)체재여서 이순신은 개전초 원균의 5번의 원조요청에도 출전치 않다가 전시에 너와 내가 있을 수 없다는 선거이, 정운 장군의 반협박으로 경상방면으로 출전하여 전라수영(이억기)경상수영(원균)등과 연합 작전으로 연전연승하게 된다.

 

4)그런대도 이순신은 타지역 연합 장군들의 공은 슬며시 거론치 않고(고의적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됨.) 전라 수영의 전과만을 보고 함으로써 원균 진영의 심한 반감을 사게 된다. 여기에서 문장 실력이 우수한 이순신의 장점이 부각되고 문장력은 형편 없고 고지식하게 전투에만 전념하는 무인간의 갈등을 엿볼 수 있다.

 

5)원균은 사령관임에도 수창에 걸린 몸으로 병사들과 장기간 해상 근무를 하는 살신성인의 실행 현장이 제삼자에 목격되어 보고되고 있슴을 증언하는데, 이는 원균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겁쟁이가 아니라 매사에 최선을 다 하는 전형적인 무인이었음을 증언한다하겠다. 또한 이순신을 비호한 정탁조차도 원균에 대하여 왜적들이 무서워하고 사졸들이 따르는 쓸만한 장수라고 임금 앞에서 고변하고 있다.

 

6)이순신은 더 말할 나위 없이 훌륭한 우리 겨레의 자랑이지만 원균도 사졸들이 죽기살기로 따르는 쓸 만한 장수였슴을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임진왜란이라는 민족 최대의 시련기에

비록 칠천량 패배라는

400척의 왜군에 170척으로 대처할 수 없음을 알고

좀더 준비기간을 갖고 나가자고 조정에, 삼군사령관 권율에게

간청했지만 받아들여주지 않아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곤장을 죽사발나게 맞아 가며

출전했으니 이는 원균의 한계였읍니다.

원균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수군 사령관에게 그 책임은 물을 수 있지만

원균이 간신배요, 겁쟁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도 외아들 원사웅을 잃고 그 자신 최선을 다 했지만

오명까지 뒤집어 써서야 되겠습니까?

사료에는 원균의 부정적인 면이 분명 많지만

긍정적인 부분도 많습니다.

이는 원균이 이순신처럼 인격적으로 고매하거나 성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간신배나 역적은 아니요

왜적이 겁낼만한 위대한 군인정신을 소유한 장수였슴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순신은 세계에 자랑할만한 우리의 성웅입니다.

그러나 원균도 그에 버금가는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첨언)

원균을 겁쟁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의 또 하나의 주장이 개전 초 경상우수영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 시피 우수영에는 25척이라는 전함이 있었지만 이는 장부상의 숫자이고 쓸만한 전선은 4척이었습니다. 제승방략의 체재하에서 수군들은 평상시 어업, 농업등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시에 소집되어 전투에 임하게 되는데 전란 발발 3개월 전 경상우수사로 부임하게 된 원균에게 새까맣게 부산 앞바다에 몰려드는 왜적에 대하여 원균에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으로 장렬히 싸우다 죽든가

둘째, 전선 21척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 수리하여 아군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가 되는니 소각하여 버리고 쓸 만한 전선4척과 남은 병사들을 데리고 전라좌수영 인접지 한산도로 들어가 전라 수영 병사들과 연합작전을 펴 후일을 도모하든가

 

여러분 같으면 어떤 방법을 택했을까요?

원균은 후자를 택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원균 비난론자들은 아군 전선 25척을 비겁하게

소각하고 물러났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연합작전에서 연전연승함을 볼 때 이 때의

원균의 선택은 당연했다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이름없는 풀뿌리 나강하(서)

 

 

2. "원균장군의 편지"를 쓰게 된 배경(2004-08-21)

 

이종택님께 답글 드립니다.
귀하의 정성들여 쓰신 답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간단히 귀하의 의견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답하고자 합니다.

첫째, 원균 장군에 대한 고찰이 헛수고이며 전주이씨들에게서 뇌물 받고 쓴 글이 아니냐?
저는 건설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평소에 역사에 대하여 관심이 있어 쓴 글임은 이미 본인의 글에서 밝혔습니다. 어떠한 댓가를 바라고 쓴 글이 아니고 순수하게 본인의 사견입니다. 전주 이씨와 덕수 이씨가 그렇게 견원지간인 줄도 님의 글을 통하여 알았습니다. 그러면 “그 정도의 글을 돈도 안 되는데 뭐 하러 정성들여 쓰느냐?”의 의문이 들 수 있겠지요? 저는 달리기란 운동을 좋아합니다만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팔월의 한낮에도 뛴다고 돈 한푼 주지 않는데도 42.195km를 검게 그을리며 죽을둥 살둥 뜁니다. 왜 그럴까요? 달리고 나면 좋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단지 역사탐구가 좋기 때문입니다. 역사탐구에서 나 자신에 대한 수양과 교훈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취미생활로 할애할 정도로 한가한 직업을 가졌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지요? 저는 건설업에 종사한 관계로 결코 한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촌각을 다툴 정도로 바쁘지요. 본문에서도 밝혔지만 그 글은 벌써 오랜 기간의 자료 수집을 통하여 2년 전 써놓고 탈고에 탈고를 거듭한 글입니다.

둘째, 김탁환 교수의 “불멸”처럼 이순신 장군을 오도하려는 것 아니냐?

말씀드렸지만 저는 마음 닦는 방편으로만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도 아닌 산야에 널려있는 이름 없는 풀뿌리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불멸”이나 “칼의 노래”에 대한 논란은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저는 아직 그 소설들을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읽고는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읽었지요. 제 글에 그 소설과 유사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제 글은 그 소설가들보다 먼저 써놓았던 글입니다. 그저 객관적으로 고찰해본 무명인의 생각입니다.

셋째, 영웅이 둘이면 더 좋지 않으냐?

이 부분은 저와 동감이군요. 저도 어릴 적 노산 이은상씨의 “성웅 이순신”을 읽으며 영웅적인 진충보국의 삶을 꿈꾸며 살아 왔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훌륭하시다는 데 지금도 이의가 없습니다. 단지 이순신 장군을 미화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영웅 원균 장군을 사실보다 과장하여 비하시키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도 밝혔습니다만 이식, 이은상이 무얼 크게 잘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후손으로서 그 후손이 전기를 쓸 때 객관성이 결여될 수 있고 선조를 미화하기 위하여 여러 자료 중 유리한 자료만 인용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게 반복되다 보니 원균 장군 같은 희생양이 나오게 마련이고요.  


따지고 보면 저도 어느 무명의 장군의 후손입니다. “나세”장군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흔히 최무선이 화약을 우리나라 최초로 발명하여 왜구들을 무찔렀다고 알고 있지요? 그런데 최무선은 “나세”장군의 부하이고 최초로 화약을 써서 승리한 “진포대첩”의 총사령관이 “나세”장군이란 사실을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거북선이 이순신 장군이 아닌 “나대용”에 의하여 만들어졌듯이 이순신 장군의 명에 의하여 나대용이 만들었어도 "거북선=나대용"이 아니고, 일반적으로“거북선=이순신”이듯이 “최초화약전쟁=나세”이어야 할 텐데 왜 사람들은 "최초화약전쟁=최무선으로만 기억하고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정치에 휩쓸리지 않고 오로지 군인이란 본분을 버리지 않고, 78세란 노구에 이르도록 진중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나세”란 장군은 기억하지 못할까요? 심지어 고려에 절개를 지키지 않고 조선에 빌붙어 살았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지만 나세 장군은 정치에는 전혀 관여치 않고 임금이 바뀌어도 게의치 않고 78세란 나이에도 불구하고 병영에서 국가에 헌신하다 돌아가셨음을 최소한 방산비리, 정치군인등이 난무하는 현대에 존숭받아 마땅한 인물이 아닐까요? 이는 최무선은 “경주 최씨”로 후손들이 많고 “나씨”는 희귀성으로 후손이 적다보니 자연스레 역사에서 사라져간 결과라는 게 본인의 판단입니다. 


태종 때의 실록을 보니 “나세 78세로 진중에서 순직하다. 한양성에 조기를 내걸다.”란 기록이 있었습니다. 고려의 장수가 조선대에도 늙어서까지 군인이란 신분으로 봉직하다 죽어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그 글귀 하나를 발견한 저도 그랬는데, 이식이나 이은상씨는 방대한 자료를 갖고 더구나 임란의 최후를 승리로 장식하고 세계의 군사전력가들로부터 찬탄을 듣고 있는 조상에 대하여 온몸을 던져 온갖 미사려구를 동원하여 훌륭한 전기를 썼다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그러다 보니 또 하나의 영웅 원균은 영웅은커녕 “간신배, 역적”으로까지 호도되고 있는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최무선은 “경주 최씨”로 후손들이 많고 “나씨”는 희귀성으로 후손이 적다보니 자연스레 역사에서 사라져간 결과이듯이 원균 장군의 외아들 원사웅이 정유재란 때 전사하여 직계후손들이 절멸하다 시피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귀하의 홈페이지 잘 보았습니다.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시군요. 저보다도 10여년 연상이신 것 같은데
저 나이에 컴퓨터를 한다는 것도 쉬운 게 아닌데 홈페이지를 운영하시고
이순신 장군의 숭고한 뜻을 사업과 연관하여 운영하심에 경의를 표합니다.
사업의 번창을 비오며....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6/28 이름 없는 풀뿌리 나강하


 

3. "흑백논리는 무의미"(2004/7/30)

 

우리 네 큰 고질병 중의 하나가 흑백논리이다.

 

김일성이 나쁜 사람이냐? 좋은 사람이냐?
박정희가 나쁜 사람이냐? 좋은 사람이냐?


가롯 유다는 나쁜 사람이냐? 좋은 사람이냐?
데바닷다는 나쁜 사람이냐? 좋은 사람이냐?

 

연개소문이, 김유신이, 묘청이, 경대승이, 정여립이
나쁜 사람이냐? 좋은 사람이냐?

 

이순신은 나쁜 사람이냐? 좋은 사람이냐?
원균은 나쁜 사람이냐? 좋은 사람이냐?
선조 임금은 나쁜 사람이냐? 좋은 사람이냐?

 

***


우리 사회에서는 한 쪽에 서야 한다. 반드시 한 쪽만을 말해야 한다.

"나쁜 면도 있었지만 좋은 면도 있었다."라는 말을 함부로 했다간 회색분자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양다리를 걸치다간 돌팔매를 맞아야 한다.
한 다리를 걸치더라도 확실히 걸쳐야지 양 쪽을 왔다갔다 저울질하다가 한 다리를 걸쳐도
집단 따돌림(이지메)에 흠씬 두들겨 맞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한반도란 좁은 울타리에 너무 오래 갇혀 지낸 결과가 아닌가 싶다.
그것도 냉전의 산물인 좌, 우의 극단체재로 두 동강나 살아가다 보니
확실한 선택을 해야 하는 습관이 젖어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본다.

그러나 우리가 한반도에 갇혀 지낸 것은 일만년 역사의 극히 일부분이다.
우리는 그렇게 옹졸한 민족은 아니었다.

 

언젠가 "이순신 장군은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시지만
연합작전에서 원균 장군도 용감히 싸운 부분은 인정하여야 한다.
그리고 비겁하다고 알려진 선조 임금도 민족 최대의 시련기에 군주의 직분을 맡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주군이었다고 생각한다."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가 혼난 적이 있다.

 

인간이란 완벽한 존재는 아니다. 때론 실수도 있고 우를 범할 수도 있다.

 

***

 

이러한 게시판에 글을 쓸 때는 또한 그러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돌이야! 나의 이마에 날아 오거라. 맞아 주마.
피가 철철 나도록 맞아 주마.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

 

이순신 장군은 더할 나위 없이 우리 민족의 자랑이요, 보배이다.
나는 진심으로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다.

 

그러한 장군님도 두 번의 백의종군을 겪어야 했다.
만일에...
만일에...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대패하여
조선의 수군은 전멸하고
이순신 장군만이 겨우 탈출하여 어느 무인도에 올라

소나무 아래 앉아서 지친 다리를 주무르다 왜적의 칼을 받았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평가 할까?

장군의 두 번에 걸친 백의종군에 대하여
지금처럼 모함으로 희생된 측은함으로 장군을 바라볼까?

 

만일에...
만일에...
권율이 원균이 제안한 수륙 병공작전을 받아들여 육지에서는 남해의 왜성을 철저히 쳐부수고
바다로 달아나는 왜적을 원균 장군은 칠천량에서 철저히 수장시켜
임진왜란을 종결지었다면 원균은 지금 어떻게 평가될까?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서

술주정에 욕설과 험담을 일삼았다고 기록된 세칭 간웅이라는 원균!
그 원균 장군은 지금처럼 간신배, 역적으로 평가될까?
전라병사 시절 올린 장계는 이순신에 대한 모함으로 비쳐질까?
아니면 그의 수전에 대한 자신감이 담긴 명문장으로 후세의 심금을 울릴까?

 

- 원균의 칠천량 해전의 패배,
- 이순신의 노량해전의 승리 그리고 전사,


그 귀결점만 가지고

그 두 분의 전 생애를 평가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가능한 일일까?

 

우리가 어떻게
이순신 장군은 모든 것이 선(善)이고
원균 장군의 모든 것은 악(惡)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조상의 일생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고
"그의 인생의 실패가 무엇이고 그의 가치관은 무엇이었던가?
그가 비록 실패했지만 잘한 점은 무엇이었고 못한 점은 무엇이었다."라는
객관성으로 바라보아야하지 않을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는
원균 장군이 행한 것은 무엇이던 지간에 다 잘못이고, 못된 짓이고

그에게 선무일등공신을 내린 선조임금 또한 그의 행동거지 전부가 잘못이고
비겁하고 나약하고 신하들을 저울질한 노회한 정치인이라고
흑백논리로 몰아가는 우(偶)를 범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미 "원균 장군의 편지"에서 제가 탐구한 결과를 발표하였지만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1) 원균은 여진족, 왜구등의 정벌이 있고 꽤 용맹한 장수였슴은 여러 기록이 말해주고 있다.

 

2) 이순신은 너무나 자료가 많으므로 거론이 불필요할 정도로 그 또한 지장으로서 우리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무장임에 틀림없다.

 

3) 다만 원균은 지적(智的)인 부분이 취약하여 문서의 기안능력이 좀 떨어지는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고려의 무인정권을 보더라도 일자무식한 장수들이 많았고 그러한 사람들이 국권을 잡았던 예가 있지만 비록 원균이 그 수준은 아니었을지언정 명문장을 구사할 실력은 아니었다.

 

4) 이순신은 한시에 능할 정도로 출중한 문장력을 구비한 문무를 겸한 명장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더라도 문인을 능가할 실력을 구비하고 있었슴을 알 수 있다.

 

5) 그러기에 이순신의 기록은 풍부한 반면 원균의 기록은 전무하다시피하고 간접적인 기록만 남아 있는 이유이다.

 

6) 지금도 게티즈버그 연설등은 교과서에까지 남아 있는 반면 대통령의 가십은 한번 듣고 잊혀지기 마련인데 원균은 장계는 올렸으되 그 문장이 수준이하여서 기록에서 제외되고 신하들의 회의물로만 남아있는 것이다.

 

7) 원균은 몇 척의 군함 밖에 없었지만 그러기에 이순신과의 합동작전에서 선봉에서 싸웠다.

 

8) 이순신의 입장에서 볼 때 원균이 선봉에서 싸웠다 할지라도 주력군은 전라수영이었으므로 원균 예하 장병들의 용맹스런 당파를 언급하지 않았을 수는 있다.

 

9) 무인들이란 원래 속성이 공과 명예를 위하여 죽고사는 사람들이다.

 

10) 원균도 그러한 무장의 하나였기에 뛰어난 문장력으로 비록 소수이지만 자신들의 공을 언급치 않은 이순신에 반감을 갖기에는 충분한 조건이 있었다.

 

11) 이순신 또한 원균의 수준은 아닐지라도 어쩔 수 없는 무인이었기에 원균을 경계했을지도 모른다.

 

12) 흔히 선조가 이순신을 시기 질투하여 원균이 반대급부적인 이익을 얻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13) 왕조국가에서는 절대권력이 왕에게 집중되어있고 명망있는 신하를 총애는 할지언정 시기할 이유가 전혀 없다.

 

14) 흔히 선조를 의주로 파천하여 비겁한 임금으로 아는데 이 또한 잘못이다.

 

15) 밀려오는 왜적과 한양에서 싸우다 국가 수뇌부가 몰살당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까?

 

16) 의주 파천은 당연한 선택이었고 승병, 정규군, 의병등을 적절히 조율하며 유능한 세자 광해군을 순유케하여 균형적으로 공세를 조절한 선조가 있었기에 임란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필자는 믿는다.

 

17) 이는 필자의 의견이 아니고 최근 임란을 연구하는 군사전략가들의 이야기이다.

 

18) 따라서 필자는 선조를 임란극복 1인자로 추천하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19) 그러한 선조가 원균을 많은 반대를 뿌리치고 선무1등공신으로 책봉하였다.

 

20) 그러한 원균을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왜구와 마지막 순간까지 장렬하게 싸우다 순국한 원균에게 우리는 왜 돌을 던지는가? 돌을 던지는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원균의 1/10이라도 봉사했는가?"하고 묻고 싶다.

 

21) 결론은 이순신은 구국의 명장이요, 자랑스러운 선조이다. 그리고 원균도 구국의 명장이요, 자랑스러운 선조이다. 원균장군이시여! 비록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명언을 남기지는 못했을 망정 온 몸이 갈갈이 찢겨지도록 왜적과 싸우다 죽은 원균 장군이시여! 당신에게 돌을 던지는 후손들의 죄를 너그럽게 이해하시고 이제는 편히 잠드시라. 다 잊어버리고 영면하시라.

 

이름없는 풀뿌리 나강하(서)

 

 

4. 선조대왕과 원균장군에 대한 소견(2004-10-29)

- 이 글과 관련한 토론과 논쟁은 환영하나 개인의 인신공격이나 비방은 사양합니다.-

 

임진왜란 연구에 있어서 여러가지 방향에서 접근되어 연구되고 있으나

최근 선조와 원균의 역할에 관한 새로운 분석도 그 한 예이다.

 

임진왜란에 대하여 선조 일개인의 무능 차원에서 접근함은

역사에 대한 편협한 시각이며

초기 조선 사회 전체의 맥락과 그 궤적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 당시 싹튼 붕당과 사림파의 대두, 집권자등 조선 전체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선조임금만 하더라도 여러 설이 있으나

신료들의 붕당과 궤멸되다시피한 조선군을 이끈

전쟁 지휘자로써 그를 다시 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선조임금을 두둔하거나 미화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단, 냉정하게 임란을 지휘한 총책임자인 선조의 입장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한양탈출, 의주파천, 요동망명계획, 원균두둔 등

그의 비판거리는 이미 거론되었으므로 생략하고 그에 대한 나 개인의 소견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1) 조선 초기의 진관체재로 공고해진 국방체계가 명종대부터 거론되어 이일에 의해 정립된

제승방략체재의 도입으로 명령체계가 일사불란하지 않았고

병농일치제로 농번기에 군대 소집이 어려웠다. 

또한 예절과 격식과 이기논쟁에 열중한 사림파들의 득세로 조선군대는 육군, 수군 할 것 없이

장부상의 수치와 실재 병력수, 무기보유상태 등은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

 

2) 그러한 상태의 조선에서 섬으로 건너 간 사림 출신 외교관 황윤길과 김성일은

똑같이 똑같은 눈으로 일본에 머무르며 풍신수길이 장기간 전쟁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을

1년간이나 자세히 들여다 보고도 돌아와서는 전혀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왜적이 절대 쳐들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김성일의 훗날 변명을 들어보면

만일 왜적이 쳐들어 온다고 말하면 국가적으로 대혼란이 일어 날 것 같아서 였다고 했는데

그렇게 주장했던 그도 왜적침입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란 1년 2개월 전부터 남해에 부임한 이순신의 예를 보더라도

이 때 만일 두 분이 사실대로 왜적의 침입이 임박했으니

한시바삐 절대적으로 대비하여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던들

무인지경으로 몰아 부쳐 불과 18일만에 한양성이 탈취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는다.

여기서 한 개인의 판단이 역사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다 하겠다.

물론 김성일은 훗날 경상도 방면에서 왜적 토벌에 공을 세워

어느 정도 그의 실수를 만회하지만...

 

3) 그러한 가운데서도 선조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경상수영과 전라수영의 나이많은 수사들을 파직하고 임란 발발 1년, 혹은 몇개월전에

신진장수들로 이들 지역에 재배치한다.

 

4) 경상수영에는 박홍, 원균 전라수영에는 이순신, 이억기가 그들이다.

 

5) 이 중 박홍의 기용은 잘못됐음에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6) 원균은 임란 2개월 전 함경도에서 한단계 승급하여,

이순신은 1년 2개월전 정읍현감에서 6단계를 승급하여,

이억기 역시 30대의 젊은 수사로 파격적으로 기용하였으니

 

7) 이들 모두는 많은 반대가 있었슴에도

제신들의 발탁으로 선조가 용단을 내려 배치한 것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4명 중 3명이 남해를 지켰으니 잘한 인사였다고 생각한다.

이 중 이순신만이 조기에 발탁하여(임란 1년 2개월 전) 충분한 준비기간을 가질 수 있었고

이순신 특유의 부지런함, 근면, 성실성과 함께 철저한 방비를 할 수 있었다.

원균, 이순신, 이억기등의 연합함대는 육지에서 왜군이 함길도까지 휩쓸 동안에도

남해를 굳게 지켜 그들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왜군이 평양, 한양에서 철수하고 남해안까지 후퇴하게 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의병장, 명군, 조선 관군 등의 노력도 있었으나

보급로를 손에 넣은 조선 수군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이다.

이는 추위와 굶주림을 못이겨 투항한 항왜(降倭)들의

숫자를 보더라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침략 일본군은 대체적으로 15만명이었는데 항복한 왜인이 2만에 이르렀다고 하니

따뜻한 일본에서 살다 엄동설한을 겪고 해상수송로를 봉쇄당한 굶주림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알 수 있겠다.

 

8) 한양 탈출을 선조의 비겁으로 인식함은 잘못이다.

궤멸한 조선군, 밀려오는 왜적 앞에

꿋꿋하게 한양을 지키다 국가 수뇌부가 몰살당했어야 옳았을까?

 

9) 선조가 요동으로 망명하려 도모했음은 사실인데 이는 비판받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현명한 대신들의 반대를 받아들여 요동 망명을 접고 의주파천으로 결론내었다.

그 또한 망명계획은 비판하되 최종 판단은 의주파천으로 그쳤으니

그것으로 평가하여야 마땅하지 않을까?

어느 군주라도 잘못된 판단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신하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잘못된 판단을 접을 줄 아는 군주는 드물다.

더우기 봉건 왕조 국가에서 임금의 뜻은 곧 하늘의 뜻이다.

그런데도 선조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접고 현명한 신하들의 뜻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선조의 용단에 무게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10) 또 한가지는 선조의 우유부단함을 드는데

조선왕조실록을 자세히 읽어보면 선조임금이 얼마나 현명한 군주였는지 금새 알게 된다.

어떤 사안을 신료가 제기하면 선조는 항상

"내 생각은 이러이러한데 이러한 점을 참작하여 시행하라."라고

많은 부분을 신료들의 논의로 이뤄지도록 재량권을 부여하고 있슴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잘못한 건의가 올라오면

"그것은 이러이러하므로 그렇게 하지 마라."라고 단호한 입장을 보이는

최종 결단을 내리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신료들은 아무리 임금의 의사에 反하더라도

임금의 생각이 옳지 않으면 10번 까지도 상신하여 관철하는 대목을 발견하는데

이는 조선의 왕조체재가 그렇게 허약한 체재는 아니었으며

선조대왕 자신도 철저한 제왕학의 과정을 거친

왕으로 제왕답게 처신한 왕이었슴을 알 수 있다 하겠다.

봉건 왕조 국가에서 사사건건 일어나는 모든 사안들은

세세한 부분까지도 임금에게 보고되었으며

임금은 최종 단안을 내려야하는 외로운 위치에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무능한 임금도 있었고 유능한 임금도 있었다.

그러나 실록을 통독하여 본 필자의 소감으로는

노련한 선조대왕을 가졌기에 궤멸되다시피한 조선군을 이끌고

그나마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라는 민족의 난국을 타개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11) 선조가 원균을 두둔하고 이순신을 경계했다고 함도 잘못이다.

오히려 이순신을 아껴 그를 6단계 넘어 승급하여 수사에 명했다.

또한, 실록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임란전 수군을 없애자는 대신들의 주장이 있었는데

황해도 수군은 없앴지만 이순신의 장계를 받아들여 경상, 전라의 수군은 보존케 하였다.

 

12) 논공행상에서 원균을 1등공신에 봉한 것은

선조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나

원균이 칠천량에 패했을지라도

북변에서나 임란초기 용맹한 장수였다는 것은 의병장 강덕룡등 제3자의 증언과

조정 신료들이 조정에서 회의 도중 오고 간 인물 평가를 기록한 실록의 자료로,

또한 초기의 수군 연합작전에서 원균이 선봉에서 싸웠음은

이순신 개인 기록과 실록에도 자주 등장하는 바

원균 선무1등공신 책봉은

전쟁을 총 지휘한 선조임금이 주관자 입장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평가했다고 생각한다.

 

13) 단, 원균이 이순신만큼의 인품과 기지를 지니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조선을 위하여 죽은 그를

간신배, 간웅, 역적이라고 함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5. 원균의 출생지와 그의 가족들의 참전 상황

 

1) 원균의 출생지는 도일동이라는 곳으로 옛 평택시와 송탄의 경계 부근이다.

2) 도일동은 크게 하리, 내리, 상리로 나뉘는데

원균의 가문인 원주(原州) 원(元)씨가 동족 마을을 이루고 사는 곳은 하리(下里)마을이다.

3) 도일동의 원주 원씨 가문은 대대로 무인(武人)집안으로 이름이 났는데

입향조(入鄕祖)였던 원임(元任)(또는 원몽이라고도 함)도

세종 때 무과에 급제했던 무인출신이며,

 

4) 원준량도 홍문관 교리와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던 무인이었다.

5) 원균(元均)은 원준량의 아들로 원균에게는 여러 형제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뛰어난 무인(武人)들이었다.

6) 차남이었던 원연(1543-1597)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향리에 은거하다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며, 

정유재란 때에는 적성현감을 제수받아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7) 또 셋째 원전은 무과에 급제 한 후 임진왜란 당시 고성현감으로 있다가

원균 부대의 종사관으로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였다.

8) 또 원연의 아들이었던 원사립(1569-1610)도 무과에 급제한 뒤

진주목사, 김해부사 등을 지내며, 여진족과 왜군의 토벌에 공을 세웠다.

 

9) 그리고, 원균의 아들 원사웅도 부친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가

방년 18세의 나이로 칠천량에서 전사하였다.

 

실록에서 (원사웅에 관한 글)

정원에 전교하였다.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이 전후 누차에 걸쳐 병기(兵器)를 올렸는데 이번에 또 보내온 크고 작은 조총(鳥銃)이 70여 자루에 이르고 있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의 전공(戰功)을 알 수 있어 매우 가상한 일이다. 그것을 가지고 올라온 원사웅(元士雄)에게 직을 제수하라.”
【태백산사고본】 29책 50권 30장 A면
【영인본】 22책 259면

 

 

 

선조 56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0월 8일(임자) 6번째기사
경상 우수사 원균의 전황에 대한 장계
  
경상 우수사(慶尙右水師) 원균(元均)의 장계에,
“9월 29일부터 10월 2일까지 장문포(場門浦)에 둔거(屯據)한 적세(賊勢)와 접전한 절차에 대해서는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2일 평명(平明)2622) 에 다시 장문포에 진격하였는데, 전보다 약간 많아 무려 백여 명이나 된 것이 필시 둔처(屯處)한 왜병을 청원(請援)한 것이었습니다. 세 곳의 높은 봉우리에 모여 있으면서 많은 깃대를 세워놓고 무수히 총을 쏘아댔는데, 우리 병사들이 강개(慷慨)하여 진퇴(進退)하면서 종일토록 접전하다가 어둠을 이용하여 조금 물러나 외질포(外叱浦)에 진을 쳤습니다. 3일 진시(辰時)에 주사(舟師)2623) 를 동원하여 적진이 있는 장문포의 강 어귀에 줄지어 세워 놓고 먼저 선봉을 시켜 성(城)에 육박하여 도전하게 하니 적의 무리가 시석(矢石)을 피하여 성안에 숨기도 하고, 혹은 성밖에 땅을 파고서 몸을 숨기기도 하였는데, 그 수효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적이 총을 쏘고 대포도 쏘았는데 그 탄환의 크기가 주먹만 하였고 3백여 보(步)나 멀리 날아왔으며, 화력이 전일보다 갑절이나 더했고 설비(設備)는 매우 흉험(兇險)하였습니다. 적진 근처에 마초(馬草)가 무수히 쌓여 있었으므로 신은 정예병을 선발하여 수직(守直)하는 왜병을 쏘아 쫓고 불을 질렀는데 타는 불꽃이 밤새도록 하늘에 닿았습니다. 문제는 육병(陸兵)이 아니기 때문에 육지에 있는 적을 주사(舟師)로서는 다시 어떻게 끌어 낼 방법이 없어 매우 통분스러웠습니다.
신(臣)은 다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육병장(陸兵將) 곽재우(郭再祐),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에게 상의하여 수륙(水陸)으로 합동 공격할 것을 계획하고, 길을 잘 아는 거제(巨濟) 출신 사수(射手) 15명을 뽑아 길잡이를 삼고 신이 거느린 각 선박에 육전(陸戰)을 할 만한 자로서 자원한 31명을 선발해서 곽재우의 지휘를 받도록 하는 일을 단단히 약속하였습니다. 4일 묘시(卯時)에 여러 배로 적진에 돌진해 들어가면서 명화 비전(明火飛箭)을 쏘기도 하고 혹은 현·승자총통(玄勝字銃筒)을 쏘면서 도전하고, 정예선(鄭銳船)을 영등(永登)의 적 소굴에 나누어 보내 서로 들락날락하면서 이쪽저쪽을 공격할 기세를 보여 서로 지원하는 길을 끊도록 하였으나 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아 섬멸할 길이 없어 분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육병장 등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에게 가서 직접 형세를 고하고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서 7일에 돌아갔고, 신 및 주사(舟師)는 그대로 외질포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5일 휴병(休兵)할 때에 신이 거느린 사후선(伺候船)2624) 을 장수를 정하여 정심포관(廷深浦串)으로 보내 적병의 동태를 급히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6일 묘시(卯時)에 사후장(伺候將) 원사웅(元士雄)조준표(曹俊彪) 등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사후선 4척이 편대를 지어 거제오비질포(吾非叱浦)에 도착하여 적선 2척을 만났는데 기를 잡고 돌진해 들어가니 왜적의 반은 이미 육지에 내렸고 배를 지키던 적병도 우리 배가 돌진해 감을 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수문장(守門將) 김희진(金希進) 등과 있는 힘을 다해 집중사격을 가하자 맞아서 다친 왜병이 상당히 많았는데 배에서 내린 적병 30여 명이 총을 쏘면서 지원을 해와서 수급(首級)을 베어오지는 못하였으며, 적선 2척과 기타 실려있던 잡물(雜物)은 모두 불지르고, 막풍석(莫風席)·물통·낫·도끼·노(櫓) 등은 싣고 왔다.’ 하였습니다. 다시 타다 남은 적선을 가지고와서 증거품으로 하라고 하였더니, 7일에 돌아와 고하기를 ‘오비질포에 도착하니 왜적 5∼6명이 길을 잃고 바닷가에서 방황하고 있으므로 뭍에 내려 활을 쏘면서 추격하자 적의 무리가 산골짜기로 흩어져 도망을 쳤는데, 그중에 한 명이 다급하게 되자 칼을 풀고 항복하기에 사로잡아 데리고 왔다.’고 하였는데 타다 남은 2척의 적선도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신의 중위장(中衛將)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은 6일에 행군하여 왜적이 숨어 있는 해변에 복병하고 있으면서 출몰하는 것을 엿보아 재빠르게 배를 움직여 돌진해서 1명을 생포해 왔고, 선봉장 웅천 현감(熊川縣監) 이운룡(李雲龍)은 적진에 달려들어가 왜인이 쓴 작은 판(版)을 탈취해 왔는데, 판본(版本)은 통제사 이순신이 있는 곳으로 보냈고, 한산(閑山)으로 돌아가 진을 치고 정신을 가다듬어 사변에 대비하도록 지휘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3책 56권 12장 B면
【영인본】 22책 363면

 

 

6. 추정 원균 장군의 묘소가 남해에 있다.

"원균 장군묘 철저한 고증 필요" [부산일보 2005-08-19 12:12]

 

 

임진왜란 당시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원균(1540~1597) 장 군의 묘가 경남 통영에 방치돼 있다는 주민들의 주장이 제기돼 학 계의 철저한 고증이 요구되고 있다. 19일 경남 통영시 광도면 일대 주민들과 향토사학자들에 따르면 통영시 광도면 황리 산435 일대에는 흔적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묘 1기가 있으며,이 묘는 칠천량해전이 벌어졌던 정유년(1597년) 7월에 전사한 원균 장군의 묘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곳은 통영 안정국가산업단지에서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 방면으 로 이어지는 황리 무량마을(춘원골) 인근의 국도 77호선변으로부 터 왼쪽으로 20여m 떨어진 야산이다. 주민들은 또 통영군사 편찬위원회가 지난 1985년 10월에 펴낸 통 영군사(統營郡史)의 내용 일부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춘원포(추원포로도 불려짐)는 통영시 광도면 황리 앞바다로 지금 은 안정공단이 조성돼 있으며,돌감나무골은 원균 장군의 묘로 추 정되는 부지 주변이다. 이와 관련,통영시향토역사관 김일룡 관장은 "역사적 문헌이나 기 록 등으로 미뤄 당초 소나무밭이었던 이곳이 원균 장군의 전몰지 라는 사실은 거의 확실해 보이지만 묘소에 대해서는 고증할 수 있 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성훈기자 lee777@ 

 

 

 

7. "단 한 척의 배도, 단 하나의 적도 살려 보내지 말라"

 

서로 피를 흘리지 않고 곱게 돌려 보내고

전쟁을 종료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순신 장군은 왜 그러한 명령을 내렸을까?

나는 이 부분에서 이순신 장군의 현명한 판단에 전폭 지지한다.

명나라 장수들도 요시라의 간계에 놀아나고 수급챙기기에 급급할 때

삼국시대 이전부터 끊임없이 분탕질을 해 온 왜구들을

조선은, 이순신 장군은 결단코 용서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명을 치기 위한 길을 빌려 달라는 정명가도는 명분일 뿐

내부 무력세력의 외부로의 발산및 조선 침략에 그 기본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설령 그리했다하더라도 일본은 종국에는 마각을 드러내고

조선을 합병하여 통치하려 했을 것이다.

 

일본은 조선시대 뿐이 아니고 옛부터(삼국시대 이전)끊임없이 한반도를 노려 왔다.

신라사를 보더라도 왜구는 창궐했고,

백제는 조상의 나라라고하여 백제가 망하던 때 500척의 대군단을 보내어

백강구(금강 하구)전투를 치루기도 했다.

고려조에는 어떤가?

수 많은 왜구 침범으로 날을 세웠는데 그 대표적인게 진포해전이다.

당시에도 500척의 대군단(3만명)으로 쳐들어 왔는데

나세 상원수, 심덕부, 최무선 부원수가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500척의 군단이 불타자

잔당이 육지에 상륙하여 분탕질을 하다가

운봉에서 이성계에 의하여 소탕되었는데 이를 황산대첩이라 한다.

조선초에도 끊임없이 침범하였는데 세종대에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과

공식적인 세견선 파견, 왜관 설치등으로 잠잠해지는가 했는데 임진왜란이 발생한 것이다.

 

각설하고

우리나라 932회의 외부 침략중 3/4이상이 왜구의 침범이다.

일본은 근세에도 대동아 공영이란 미명하에 일제 36년 강점으로 우리민족을 핍박했다.

일본은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지금도...

 

36년 강점기간 근대화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일본 극우주의자들이 떠드는데

우리 스스로 갑오개혁부터 할 수 있게 내버려 두었다면

민족의 맥을 이어가면서 더 잘 추진 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들이 한반도에 철도등 근대화 시설을 한 것은 한반도를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면면히 이어온 한민족 홍익인간 정신을 단절하였기에 민족분단이 일어난 것이고

서구문명과 서양종교를 무분별로 받아들여 지금의 난맥상이 일어남을 알아야한다.

일제가 종결된지 60년이 넘었는데 일제를 정리하지 못해 이제 입법하고 심의하고 논쟁하는데

경제회복을 뒷전으로 하고 과거사에 매달리는 현실이 과연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삼팔선으로 두동강난 남과 북이 쓰는 군사비를 경제에 썼다면 이미 일본을 능가하지 않았을까?

지금의 난맥상은 바로 삼도(왜, 일본)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 열도는 가라앉고 있다고 한다.

환태평양 구조판의 특성상 종국에는 일본 열도는

뜨거운 지구 내부의 맨틀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라고 한다.

그들이 그들의 조상의 나라, 혹은 선인의 군자국에 몹쓸 짓을 한 죄값인지는 몰라도...

그래서 그들은 한반도를 호시탐탐 노리는지도 모른다. 일본에는 지진이 일상화되어 있다.

지진 대피 훈련이 우리의 민방위 훈련처럼 일상화되다 시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지반이 안정된 나라를 노리는 잠재의식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들은 우리가 틈만 보이면 또 쳐들어 올 것이 뻔하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일본의 얄팍한 섬나라 사고 방식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 지켜주신 우리나라를 보전해야 한다.

 

 

8. 지저분한 동명이인 이순신(李純信)


어제의 “불멸의 이순신” 첫방은 실망이었다.

웅대하리라 던 자막은 온통 CG로 범벅되었고

이순신역은 중량감이 덜해보였다.

그리고 동명이인 이순신은 등장하지 말았어야할 인물이다.

그는 임란 기간 중 약간의 공을 세우지만

임란 기간 뿐 아니라 임란 이후에도 사리사욕을 공공연히 남발하여

수많은 탄핵과 파면을 되풀이 했던 인물인데 동명이인이라고 하여

중요인물로 부각함은 대본자의 역사인식이 짧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본인은 대신 정운(鄭運, 1543-1592)을 추천하고 싶다.

이순신보다 2년 연상으로 28세 무과 급제하여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군인의 길로 데뷔하지만

성격이 워낙 강직하여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정3품)였을 때 녹도만호(종4품)였으니

권율, 이순신, 원균등 누구보다도 먼저 무과에 급제하였지만

지독히도 관운이 없었던지 후배 이순신 수사보다

4단계나 아래의 직책으로 근무하면서

이순신과 원균처럼 쟁공관계에 있지도 않았고

이순신의 수하장수로 묵묵히 근무했던 그는

임란 초기 출전을 주저하는 이순신에

선거이와 함께 출전해야한다고 강권하기도 했다.

그는 부산포 해전 승리후 회항 중 왜군의

조총 사격에 전사한 인물이다.

지저분한 이순신(李純信)대신

정운(鄭運)을 이순신(李舜臣)측근으로 추천하고 싶다.

 

 

주류 아버지 "宣祖가 도망간 건 잘못", 비주류 아들 "잡히면 나라 망하는데…"

력 : 2015.03.26 03:00

[父子 역사학자 이성무·이희진]
'징비록의 그림자' 펴낸 이희진… 아버지와 史實·학문 태도 논쟁
父 "大家 되려면 사람 존중해야", 子 "덕담하다간 집단 이기주의"

아버지와 아들의 역사 논쟁은 뜨거웠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아버지 이성무(78) 한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은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은 사람을 존중해야지 잘못만 뒤져서는 안 된다"고 했고, 아들 역사학자 이희진(52)씨는 "덕담하자고 역사 공부하는 게 아니지 않으냐"고 맞섰다. 이씨는 임진왜란 당시 전략을 잘못한 대표적 패장(敗將)으로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지목한 신립 장군을 옹호하며 팩션 형식으로 쓴 '징비록의 그림자'(동아시아)를 최근 냈다.

25일 만난 부자(父子) 역사학자는 사실(史實) 해석부터 학문하는 태도까지 서로 비판하며 날카롭게 대립했다. 아버지 이성무 원장은 국사학계 수장인 국편위원장을 지낸 '핵심 주류학자'. 이 원장의 2남 1녀 중 장남인 이희진씨는 서강대에서 고대사(가야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역사학계의 비주류 반항아'로 자처한다.


	아버지 이성무(왼쪽) 한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은 “대가(大家)가 되려면 작은 잘못만 뒤져서는 안 되고 푹 익어서 사람이 되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고 했다. 아들 이희진 박사는 “서로 덕담하면서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아버지 이성무(왼쪽) 한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은 “대가(大家)가 되려면 작은 잘못만 뒤져서는 안 되고 푹 익어서 사람이 되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고 했다. 아들 이희진 박사는 “서로 덕담하면서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고운호 객원기자

아들은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패전 책임을 실무자인 신립에게 전가하려는 의도가 뚜렷하다"고 말했다. "류성룡은 신립이 조령(鳥嶺)이라는 험한 곳에서 적을 막지 않아 패전했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조령은 서울로 가는 유일한 길이 아니었어요. 조령에 진을 치면 왜군은 전투를 치르지 않고 다른 길로 서울로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적의 동향을 지켜보면서 길목인 달천평야에 방어선을 친 것이죠." 이에 대해 아버지는 "류성룡은 7년 동안 전쟁 총책임자로 실제 경험한 사람이다. '징비록'에는 당시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반성하는 대목도 많다. 신립 군대는 정예군인데 왜군이 이를 피해가려고 했겠나. 작은 것을 들어 일방적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 선조에 대한 평가도 크게 달랐다. 아버지는 "선조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 전쟁이 나면 왕은 죽을 각오를 해야지, 도망을 간 것은 신하와 백성들에게 할 일이 아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도망갈 때 따라간 호종공신만 잔뜩 책봉하고 정작 전쟁을 치른 선무공신은 몇 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아들은 "왕이 잡히면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망하는 데 도망을 안 갈 수 있나. 선조가 서울에서 잡혔으면 더 불행한 사태가 왔다. 도망도 하나의 전략"이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선조는 왕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왜란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고했던 김성일에게 책임을 지라고 했다. 왕권 국가에서 최종 책임은 결국 왕에게 있다. 김성일은 '전쟁이 일어난다고 보고했을 때 불러올 혼란을 걱정했다'고 훗날 말했다. 그는 칼칼한 선비로 처신을 했다"고 말했다. 아들은 "그것도 냉정하게 봐야 한다. 김성일은 헛정보로 국가의 대전략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혼란이 걱정된다면 최고책임자인 왕에게는 제대로 보고한 후 대책을 세워야 했다"고 비판했다.

아들은 류성룡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전쟁이 터지자 조선 정부는 4000명 병사를 모아 먼저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이씨는 "류성룡이 이 병사들이 오합지졸이라는 것을 알았고, 자신이 체찰사가 되어 이끌고 내려가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면서 "신립이 '경험 있는 장수가 지휘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신립이 공(功)을 탐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빠졌는데 이는 전형적인 정략적 제스처"라고 주장했다. 이 원장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흠을 들춰내 평가하면 위인이 생길 수가 없다. 류성룡은 이순신·권율 등을 발탁해 전쟁을 치렀는데 이를 보면 사람 보는 안목이 있었던 것"이라면서 "관점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런지 안 그런지 알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먼지 털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아들은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써야죠. 그런 말은 역사가가 할 말은 아니죠"라며 반박했다.

그래도 끝은 덕담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머리는 좋다"고 했다. 아들은 "아버지는 공사(公私) 구분이 철저한 분이어서 아들이 대학에 자리를 잡는 데 한 번도 도와주신 적이 없다"고 했다. 뼈있는 덕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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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均
출생 1540년 2월 12일 (음력 1월 5일)
조선 충청도 진위군 여방면 도일리
(현 대한민국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사망 1597년 8월 27일 (음력 7월 15일) (57세)
사인 전사
거주지 조선 평택
국적 대한제국 조선
별칭 자(字)는 평중(平仲)
아호(雅號)는 매월당(梅月堂)
학력 1567년 식년무과 을과 급제
직업 군인, 무신,
종교 유교(성리학)
배우자 정경부인 파평 윤씨
자녀 원사웅(아들)
부모 평원부원군 원준량(아버지)
남원 양씨(어머니)
친척 원용(동생)
원연(동생)
원전(동생)
원사립(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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