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으로 본 남대문
두 차례의 외란과 6.25 동란에도 꿋꿋히 자리를 지켜온 숭례문이 어느 우민(愚民)의 방화로 도시의 흉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복원기간만 최소 3년, 복원 비용은 300억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돈도 돈이고 시간도 시간이지만 600년을 지켜온 국보 1호, 숭례문이 상처를 입었다는데 크나큰 안타까움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마저 들지만 이번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제2, 제3의 숭례문 사태를 만들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 또한 든다. 숭례문의 전소한 직접적인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방화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우리 스스로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부재라 생각하여 미력하나마 숭례문의 역사를 기록하여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리려 한다.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 태조 10권, 5년(1396 병자 /명 홍무(洪武) 29년) 9월 24일(기묘)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숭례문의 기록 중 가장 이른 기사이다. 성을 다 쌓자 그 인부들을 돌려 보냈다고 기록하며 8대문의 약력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 흥미를 끄는 단어는 '남대문'이다. 남대문이란 용어는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낮추기 위해 예의를 숭상하는 문(崇禮門)을 그저 남쪽의 큰 대문(南大門)으로 바꾼 것으로 아는 이가 적지 않은데 숭례문의 역사만큼이나 남대문이란 단어의 역사도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숭례문은 1415년(태종 15)에 수해로 안에 있던 행랑이 무너지자 수리한 이래로 수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는데 1447년(세종 29)의 중수로 모습을 완전히 갖추었다 한다. 그러나 현대의 기술로도 3년이라는 긴 시간에 300억이라는 거금이 드는 마당에 500년전에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조선 최고의 전성기인 세종 연간에도 재물과 인력이 동날 지경이며 성종 연간에는 왕이 숭례문 보수공사에 회의를 표하기 까지 한다.
숭례문(崇禮門)을 새로 짓는데 좌참찬(左參贊) 정분(鄭苯) 등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분(苯)이 오로지 토목(土木)의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아서, 영선(營繕)하는 일이 연해 계속되고 미리미리 임금의 뜻에 맞도록 하니, 재물과 인력이 동나게 되었다.
-세종 117권, 29년(1447 정묘/명 정통(正統) 12년) 8월 30일(기축)2번째기사
숭례문에는 종이 달렸던 적이 있었다. 중종 대의 권신인 김안로의 건의에 의해서 였다. 지금이야 어느 곳을 가든 시계가 있어 쉽게 시간을 알 수 있지만 당시엔 주지하듯이 종루의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 하지만 소리가 퍼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소리를 듣지 못하면 불편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보루각 도제조, 김안로는 한양의 문을 닫은 절인 정릉사와 원각사의 종을 떼어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에 걸어 둘 것을 건의하였고 왕은 그의 뜻을 따랐다. 그러나 김안로는 숭례문에 종을 매달자 건의 한 뒤 1년만에 실각하여 사사되고 유생들은 유교국가에서 불교의 종이 웬말이냐며 종의 철거를 주장하였다. 중종은 시각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 변명했지만 결국 그의 아들이 명종 대에 가서 종은 내수사에 보내졌다.
큰 비가 내리니 명하여 옮긴 저자를 돌아오게 하고 숭례문(崇禮門)을 열어 피고(皮鼓)를 쳤다.
-성종 44권, 5년(1474 갑오 / 명 성화(成化) 10년) 윤6월 30일(계축) 1번째기사
전교하였다.
“흉서를 붙인 자를 체포하여 보고하지 못한 것은 수문장과 별장의 죄이다. 더구나 흉서를 본 뒤에 즉시 와서 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군사를 시켜 몰래 찢어버리게 해서 그 자취를 숨기려고까지 하였으니 그 정상이 매우 수상하다. 숭례문 별장 장응명(張應明)·한진하(韓振河)·서유일(徐惟一) 등을 모두 잡아다 추국하라.”
-광해 131권, 10년(1618 무오/명 만력(萬曆) 46년)8월 10일(병인) 9번째기사
“윤광철(尹光哲)은 전례를 따라 사형을 집행할 수 없으니, 마땅히 숭례문(崇禮門)에 친림(親臨)하여 왕법을 통쾌하게 바로잡아 도성의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보도록 하는 것이 적합하다.”
-영조 83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3월 8일(신사) 1번째기사
그러나 조선 후기 문신 이유원(李裕元·1814~1888)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세상에서 전하는 것은 '지봉유설'에서 나온 말이다"라면서 "숭례문은 공조판서 유진동(柳辰仝·1497~1561)이 쓴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유원은 "전에 남대문을 중수할 때 양녕대군의 사손(祀孫) 이승보(李承輔)와 윤성진(尹成鎭) 대감이 문루(門樓)에 올라가 판각(板刻)의 개색(改色)한 것을 보았더니, 후판대서(後板大書)는 공조판서 유진동의 글씨였다 한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문신 홍양호(洪良浩·1724~1802)도 유진동의 시장(諡狀)에 '숭례문 현판 글씨 역시 공이 썼다고 한다'고 유진동 설을 제시했다. 학자 정동유(鄭東愈·1744~1808)는 '주영편(晝永編)' '서화징(書畵徵)'조에서 유진동의 후손인 숙종 때 무신 유혁연(柳赫然)이 문루를 수리할 때 올라가 편액을 내리고 그 뒷부분을 보니 '가정 모년에 죽당이 썼다(嘉靖某年竹堂書)'라는 구절이 있어서 유진동의 글씨임을 알게 되었다고 전한다.
가정(1522~1567)은 명나라 세종의 연호인데, 이 시절에 죽당이란 호를 썼던 사람은 유진동밖에 없다. 서예가 오세창(吳世昌·1864~1953)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유진동의 글씨'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6·25 이후 숭례문을 보수할 때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입회 하에 그 뒷면을 닦아보고 문질러 보았으나 그런 낙관이 발견되지 않아 한창 설득력을 얻어가던 유진동 글씨 설은 수그러들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초의 문신 성현(成俔:1439~1504)은 '용재총화(?齋叢話)'에서 "모화관(慕華館)은 제학(提學) 신장이 썼다"고 밝혔지만 숭례문도 그의 작품인지는 언급하지 않았고 김정희도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덕무(李德懋)의 손자인 이규경(李圭景:1788~?)은 '오주연문장전산고' '인물(人物)에도 빛이 있다는 변증설(人物有光辨證說)'조에서 다른 설을 제시한다.
그는 '동국 패사(東國稗史)', 즉 야사를 근거로 "한도(漢都:서울)에 있는 남문(南門)의 편액(扁額)이 숭례문(崇禮門)인데, 즉 양녕대군의 글씨이다. 임진왜란 때에 액판(額板)을 잃어버렸는데, 그 후 남문 밖 연못가에서 밤마다 빛을 발사하므로 파보니, 이 액판이 묻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꺼내어 다시 걸었다. 그런데 이는 정난종(鄭蘭宗:1433∼1489)이 쓴 것이다"라고 조선 초기 서예가 정난종의 글씨라고 주장했다. 이규경은 같은 책의 '숭례문과 대성전 액자(額字)에 대한 변증설'에서 "정난종은 세조 때 사람으로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어명으로 비판(碑版)이나 종명(鐘銘)을 많이 썼고, ……그 자체(字體)를 보아도 그의 서체(書體)임이 분명하다"라며 정난종의 글씨라고 단정 짓고 있다.
그러면서 양녕대군의 글씨라는 항간의 이야기는 와전된 것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 동시대 인물로서 서예 감식에 일가견이 있던 김정희와 이규경이 서로 다른 설을 주장하니 후인(後人)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至德祠)에는 지질만으로도 500년이 넘어 보이는 '숭례문' 탁본이 현존하고 있다니 양녕대군 설도 근거가 없지는 않다. 두 소방관의 사투로 겨우 보존된 편액 글씨의 주인공 감정 작업도 복원사업의 주요 의제 중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05역사의 뒤안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시대 '장관들' 평균 169일 재임 (0) | 2015.07.31 |
---|---|
잉카, 전설 속의 8대왕 (0) | 2015.07.31 |
만리장성에 얽힌 이야기 (0) | 2015.07.31 |
이슬람에 대한 오해 몇가지 (0) | 2015.07.31 |
정화, 세계사를 다시 쓴다 (0) | 2015.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