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이슬람에 대한 오해 몇가지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31. 15:19

이슬람에 대한 오해 몇 가지

 

 

오해1)무슬림들은 폭력적이고, 테러리스트들이며 극단주의자이다?

 
이것은 이슬람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이며,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미디어들이 이슬람에게 부여하는 끊임없는 공격과 정형화에서 기인한다. 어떤 총을 든 사람이 유대교의 이름으로 모스크를 공격할 때, 혹은 카톨릭 신자인 IRA 게릴라가 도심 지역에 폭탄을 설치할 때, 세르비아 민병대들이 무고한 무슬림 시민들을 억류하고 살상할 때 이러한 행동들은 전체의 신앙심을 정형화 하기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결코 이러한 행동들은 그 범인의 종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slamic, 무슬림 원리주의자 등등’이 폭력과 연관 지어진 단어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가?


소위 “무슬림 국가”들에서의 정치는 이슬람 교리에 기초하거나 혹은 아니기도 하다. 지배자들이나 정치가들이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슬람의 이름을 종종 사용하곤 한다. 사람들은 이슬람의 근본을 알고, 진정한 이슬람의 종교가 말하고 있는 것과 미디어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슬람은 문자 그대로 ‘신에 대한 순종’을 의미하며 ‘평화’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다.


현대 세계에서 이슬람은 이국적이거나 심지어는 극단적인 것처럼 보여진다. 아마도 이것은 이슬람이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삶의 길’로 간주되고 그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세속과 신성함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는데 반해 서양에서는 종교가 일상생활을 지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처럼, 이슬람은 자기 방어로, 종교의 수호로, 혹은 그들의 고향에서 무력으로 내쫓김을 당하는 사람들의 편에서 싸우는 것을 허용한다. 그것은 시민들을 해치고 농작물, 나무들, 가축들을 파괴하는 것에 대한 금지를 포함하는 엄격한 전투 규칙을 규정하고 있다.


이슬람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것을 즐긴다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코란에서 말하길 “너희에게 도전하는 하나님의 적들에게 도전하되 그러나 먼저 공격하지 말라. 하나님은 공격하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시니라.”(코란 2장 190절) “적이 평화 쪽으로 기울인다면 그 쪽으로 향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의탁하라 실로 그분은 들으심과 아심으로 충만하시니라.” (코란 8장 61절)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전쟁은 최후의 어쩔 수 없는 수단이며 신성한 법령에 의해 규정되어진 조건들에 종속되어 있다. 지하드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투쟁하다’라는 의미이다. 무슬림들은 두 가지 종류의 지하드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다른 ‘지하드’는 내적 평화를 얻기 위해 이기적 욕망에 대항하여 모든 사람들이 수행하는 영혼의 내적 투쟁이다.
 
오해 2) 이슬람은 여성을 억압한다?
베일을 쓰고 집에 머물러 있기를 강요당하며 운전하는 것을 금지당하는 전형적 무슬림 여성들의 이미지는 대부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비록 몇몇 무슬림 국가들이 여성들을 억압하는 법들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이슬람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나라들 중 많은 나라들이 샤리아(이슬람 율법) 같은 법으로 통치하지 않으며 남녀평등의 문제에 대한 그들 자신의 문화적 관점을 채용하고 있다.


반면에 이슬람은 남성과 여성에게 다른 역할을 부여하고 두 성(性)간의 평등이 코란과 예언자(그에게 평화가 있기를)의 실례(實例)에서 규정되어 있다. 이슬람에서 여성은, 결혼을 하였든 하지 않았건 간에, 자신의 재산과 소득을 자기 명의로 소유하고 처리하는 권리를 가진 한 개인으로 여긴다. 신랑은 신부가 온전히 자기 개인의 용도로 처리할 수 있는 결혼 선물을 신부에게 준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의 성(姓)보다는 그녀 가족의 성(姓)을 유지한다. 남자와 여자 둘 다 다소 정숙하고 기품 있게 옷을 입는다. 신의 사자(使者)가 말했다. “믿음이 있는 자 가운데 실로 가장 완벽한 사람은 그의 아내에게 가장 예의바르고 친절한 사람이다.”


여성들을 향한 폭력과 무언가를 위해 여성들의 의지에 반(反)하도록 그들을 강요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무슬림 결혼은 배우자 어느 쪽이든지 자유롭게 포함시키는 조건들이 있는 간단하고 법적인 계약이다. 결혼 풍습은 이리하여 나라마다 아주 다양하다. 이혼은 비록 그것이 마지막 어쩔 수 없는 수단으로써 받아들여지지만, 흔하지 않다. 이슬람에 따르면 무슬림 여성은 그녀 의지에 반(反)한 강제적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된다. – 그녀의 부모는 그저 그들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젊은 남자를 제안하기만 한다.
 
오해 3) 이슬람은 다른 신을 경배한다?

알라는 그저 신에 대한 아랍어이다. 무슬림에게 알라는 신의 이름들 중에 가장 위대하고 가장 포괄적인 것이며, 유일한 하나님을 나타내고 어떠한 협력자도 ‘그’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풍부한 의미의 아랍어이다. 유태인들이 히브리어로 하나님을 지칭하는 ‘엘로힘(elohim)’-예수가 하나님에게 기도드릴 때 아람어로 사용했던 그 단어-과 정확히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에서 동일한 이름이며, 알라는 무슬림과 기독교인, 유태인이 찬양하는 동일한 하나님이다. 무슬림들은 알라의 권능이 ‘그’의 가르침과 계율을 복종하는 서약과 찬양속에서 인정되는 것이며, 역사를 통해서 다양한 시대와 많은 장소에 파견된 ‘그’의 메신저와 예언자들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라 믿고 있다.
 
오해 4) 이슬람은 칼에 의해 전파되었고 다른 신앙에 대해 관용이 없다?
학생들을 위한 수 많은 사회학 관련 교과서들은 한 손에 칼을 차고 다른 한손에 코란을 가지고서 정복전쟁을 일으키고 강제로 개종을 시키려는 말을 탄 아랍인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의 올바른 묘사가 아니다. 이슬람은 항상 모든 신앙에 대해 종교의 자유와 존경을 보여왔다. 코란에서 말하길 “하나님은 종교를 이유로 너희에게 대적하고 너희를 추방함에 협력한 자들과 우정을 맺는 것만을 금지하셨나니 그들과 우정을 맺는자 누구든지 의롭지 못한 자들이라.”(60장 8절)라고 하였다. 종교의 자유는 코란 그 자체에 명시되어있다. “종교는 강요가 없느니 진리는 암흑 속으로부터 구별 되니라 사탄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는자 끊기지 않는 단단한 동아줄을 잡았노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들으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라.”(2장 256절)
 
기독교 선교사 T.W. Arnold는 이슬람 전파의 문제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이렇게 의견을 내고 있다: “…비무슬림 사회에 이슬람의 수용을 강요하는 어떤 계획된 시도 중에서, 혹은 기독교를 짓밟을 의도의 계획적인 학대 중 어느 것도 우리가 목격한 것은 없다. 만약 칼리프들이 이런 행동 방침 중 하나를 선택했었다면, Ferdinand와 Isabella가 스페인에서 이슬람을 내쫓던 만큼, 혹은 루이 14세가 개신교를 박해했던 만큼 일찍 크리스트교를 쓸어버렸을 것이다….”


특권을 가진 소수인들의 지위를 보호하는 것이 이슬람법의 기능이다, 그리고 이것이 왜 비무슬림 예배지역이 이슬람세계 여기저기에 넘쳐나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다른 종교에 대한 무슬림의 관용에 대한 많은 예가 역사를 통해 증거된다: 칼리프 오마르가 634년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이슬람은 그 도시에서의 모든 종교적 단체에 예배의 자유를 주었다.


그들의 생명과 재산이 안전하며, 예배의 장소 또한 결코 빼앗지 않으리라고 주민들에게 선언하면서 그는 크리스트교 총 대주교 Sophronius에게 모든 신성한 지역에 그가 함께 방문하기를 요청했다. 이슬람 법은 또한 비 무슬림 소수민들이 그들 스스로 작성한 가정법률로 운영되는 소수민들 소유의 법원을 설치하는 것에 대하여도 허락했다. 이슬람지역에서 모든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은 그 사람이 무슬림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신성하게 간주되었다.


인종차별은 이슬람에서 찾아볼 수 없다. 코란은 인간의 평등과 어째서 신앞에서 모든 인간들이 평등한가에 대해서만 말한다. “사람들이여! 하나님이 너희를 창조하사 남성과 여성을 두고 종족과 부족을 두었으되 서로가 서로를 알도록 하였노라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크게 영광을 받을 자는 가장 의로운 자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관찰하는 분이시라.” (49장 13절)
 
오해 5) 모든 무슬림들은 아랍인들이다?

전 세계의 무슬림 인구는 약 14억명이다. 세계의 4분의 1정도가 무슬인들인 것이다. 이슬람은 세계적으로 그리고 북미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이다. 이슬람은 전 지구적으로 다양한 인종과 민족, 문화에 걸쳐있으며(필리핀에서 나이지리아까지), 공통된 이슬람의 믿음에 의해 결합되어있다. 대략 18%정도만이 아랍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가장 큰 무슬림 교단은 인도네시아다. 대부분이 무슬림들이 파키스탄의 동쪽에 살고 있으며, 무슬림중 30%가 인디아 아대륙에, 20%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에, 동남아시아에는 17%, 아랍세계에서 18%, 구 소련지역과 중국에 10%가 살고 있다.

 

 터키와 이란, 아프가니스탄은 비 무슬림 중동지역의 10%를 구성한다. 라틴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지역에서 무슬림들은 소수에 속하지만, 러시아와 거기서 새롭게 독립한 지역들, 인도와 중앙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미국에도 대략 8백만이 무슬림들이 있다.

 

오해 6) 이슬람 국가는 무슬림 단체이다?
이슬람과 소위 “이슬람 국가”는 두 가지의 다른 종파이다. 무슬림들은 이 단체를 그저 그들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이슬람의 이름을 사용하는 많은 종파들 중 하나라고 여긴다. 그들 사이의 유일하게 공통된 것은 둘 다에게 사용되는 언어인 특정한 용어이다. “이슬람 국가”는 잘못된 용어이다; 이 종교는 그것의 포교자, Louis Farrakhan의 이름을 딴, Farrakhanism이라 불려야 한다.


이슬람과 Farrakhanism은 많은 면에서 기본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이슬람에서 어떠한 인종차별도 없으며 오로지 믿음에서의 차이가 있을 뿐 신 앞에서 모두가 동등하게 간주되는 반면에, Farrakhan은 인종차별주의를 믿으며 ‘흑인’이 최초의 인간이고 이리하여 더 우수하다고 믿는다. ‘국가’의 가르침들이 진정한 이슬람과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 많은 다른 이론적 예들이 있다. 이슬람을 나타낸다고 주장하고 그들의 신자들을 무슬림이라고 부르는 많은 단체들이 미국에 있다.
 
이슬람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생은 진정한 이슬람을 조사하고 찾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모든 무슬림을 묶는 유일한 두 가지 확실한 원천은 첫째가 코란이며 둘째가 정격선법(正格旋法)의 또는 정통 하디쓰다. 모순되거나 혹은 이슬람의 근본적 믿음과 실행의 직접적인 이해와 모순되는 코란과 정격선법(正格旋法) 하디쓰를 구성하는 “이슬람”꼬리표 아래에서의 어떠한 가르침이든지 간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종교는 거짓 이슬람 교단으로 간주될 것이다. 미국에 수많은 거짓 이슬람 교단이 있으며 그것들 중 하나가 Farrakhanism이다. 그러한 교단에 관한 정직한 태도는 자신을 무슬림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들의 종교를 이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일 것이다. 정직의 한 예로 이슬람의 한 분파이지만 자신을 무슬림이라든가 그들의 종교를 이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 Bahaism이 있다. 사실상 Bahaism은 Farrakhanism이 이슬람이 아니듯이, 이슬람이 아니다.
 
오해 7) 모든 무슬림 남자들은 네 명의 여자와 결혼한다?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모든 사회와 시대에서 나타났으며 그래서 다양하게 서로 다른 사회적 요구를 받아들인다. 환경이 또 다른 아내를 얻는 것을 정당화했는데, 코란에 따르면, 남편이 진정으로 공정한 경우에만 그 권리가 수여되었다. 여성이 원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종류의 결혼은 강요될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은 그들의 결혼 서약에서 그것을 제외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일부다처는 강제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권장되지도 않고 단지 허가될 뿐이다. “하렘이 있는 족장”의 이미지는, 남편이 각각의 부인을 공정하게 대하고 그들 각각에게 개별적인 주거지 등을 동등하게 제공하는 등의 엄격한 조건들을 충족할 수 있는 경우에만 최대 4명의 아내가 허용된다는 점에서, 이슬람과 맞지 않다. 일부다처제를 행하는 것에 대한 허가는 단지 애정의 만족과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과부와 고아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관계가 있다.

 

 10명에서 심지어 그 이상의 아내를 두었고 그들을 “재산”으로 여겼던 아랍인들의 일부다처제 관행에 조건을 넣고 제약을 가한 것은 코란이었다. 이런 관행을 규제하고 제한하고 그것을 좀 더 인간적으로 만들고 모든 아내들에게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마련한 것이 이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공정하고 올바르다. 한데 모으면, 결국 코란의 뜻이 이르는 것은 일부다처제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면 그것의 반대이다.

 

이슬람의 일반적 규칙은 일부일처제이지 일부다처제가 아니라는 것은 또한 명백하다. 전 세계적으로 그것을 실행하는 무슬림들은 매우 극소수이다. 하지만, 제한된 일부다처제를 실행하는 것에 대한 허가는 남자와 여자의 본성과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문제,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이슬람의 현실적 관점과 관계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슬람 고유의 융통성보다 훨씬 더 많다.; 그것은 또한 실제적 문제들을 다루는 솔직하고 직접적인 접근이다. 위선적이고 피상적인 순종을 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슬람은 개인과 사회의 문제들에 대하여 더 깊게 탐구하고, 그것들이 무시되었을 때 그 상황이 그대로 놓여질 것보다 훨씬 더 이득이 되는 원칙적이고 고결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법적으로 결혼하고 친절하게 대우 받는 두 번째 아내가 어떠한 법적 권리나 지속적인 안락함이 없는 첩보다 형편이 더 낫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해 8) 무슬림들은 미개하고 퇴행하는 민족이다?

이슬람의 급속하고도 평화로운 확산에 대한 이유들 가운데서 그 교리(이슬람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경배의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요구한다)의 단순성이었다. 또한 이슬람은 인간이 지력과 관찰력을 사용하도록 반복적으로 가르친다. 수년 만에 거대한 문명지역과 대학들이 번성하였다, 왜냐하면, 예언자에 따르면(pbuh) ‘지식을 구하는 것은 모든 무슬림 남자와 여자에게 의무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동양과 서양적 사상과 과거와 함께하는 새로운 사고의 결합은 의학, 수학, 물리학, 문학, 천문학, 지리학, 건축학, 예술, 문학, 역사 등에서 위대한 진보를 이루어냈다.
대수학, 아라비아 숫자, 또한 영(수학의 발전에 있어서 필수적인)의 발견과 같은 수많은 결정적 학설들은 이슬람을 통해 중세 유럽으로 전달되었다. 아스트롤라베와 사분원, 훌륭한 항해 지도를 포함하여 유럽인들의 대항해시대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정교한 기구들이 발명되었다.


오해 9) 무함마드는 이슬람의 창설자이며 무슬림들은 그를 예배한다?
무함마드(pbuh)는 서기 570년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지 전에 돌아가셨고, 그의 어머니도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는 Quraysh의 존경 받는 족장에 의해 삼촌에게서 자랐다. 성장하면서 그의 성실함과 관대함, 신실함으로 이름을 얻었으며, 그로 인해 분쟁이 있을 때마다 그것의 중재를 위해 사람들은 그를 찾곤 하였다. 역사가들은 그를 조용하고 묵상적인 사람으로 설명한다. 무함마드는(pbuh)는 깊은 종교적 천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당시 사회의 타락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메카 근처에 있는 히라의 동굴에서 종종 명상에 잠기는 것이 그의 습관이 되었다. 40살이 되었을 때, 그 조용한 은신처에서 명상에 몰두해 있는 동안, 무함마드(pbuh)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그의 첫 번째 계시를 받았다. 23년 동안 계속되었던 이 계시들은 코란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가 가브리엘로부터 들었던 말들을 암송하고, 신이 그에게 계시했던 진실을 설법하면서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모진 박해를 받았다. 그리고 그 박해가 갈수록 난폭해지자 622년에 신은 그들에게 이주하라는 명령을 하였다.


메디나의 도시를 향해 메카를 떠난 이 사건을 히즈라‛이주’라고 하는데, 이것이 이슬람력(歷)의 시작을 나타낸다. 몇 년 후 예언자와 그의 동료들은 메카로 돌아 올 수 있게 되고, 거기서 그들은 그들의 적들을 용서하고 이슬람을 완전하게 확립한다. 63세의 나이로 예언자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이미 아라비아에서는 무슬림들의 수가 반을 넘었고, 그가 죽은 후 한 세기 되지 않아 이슬람은 서부 스페인과 동쪽으로는 중국까지 확산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5개도 되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예언을 전달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지, 이슬람을 “창시”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슬림들은 이슬람을 이전에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진 신성한 지침서와 같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아담과 모세, 예수와 같은 모든 예언자들이 그들의 민족을 위해서 신성한 지침서와 함께 보내졌다고 믿는다. 모든 예언자들은 그 자신의 민족을 위해서 보내졌지만 무함마드(pbuh)는 모든 인류를 위해 보내졌다.


무함마드는 이슬람의 예언을 전달하기 위해 보내진 마지막이며 최후의 예언자이다. 무슬림들은 그가 겪었던 모든 것과 그의 헌신에 대해서 그를 경배하고 공경한다. 하지만 그를 예배하지는 않는다. “예언자여, 우리가 그대를 보내매 증인으로서 복음의 전달자로써 그리고 경고자로써 보냄이라. 하나님의 허락에 따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선교자로서 불을 비추는 등불로써 보냄이라.”(33장 45~6절)
 
오해 10) 무슬림들은 예수나 다른 예언자들을 믿지 않는다?
무슬림들은 예수-그에게 평화를-를 존경하고 공경하며 그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들은 그를 인간에게 온 신의 사자(使者)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긴다. 무슬림은 그를 단순히 ‘예수’로서만 언급하지 않고 항상 ‘그에게 평화를’(여기서부터는 짧게 (u)라고 붙인다)이라는 어구를 붙인다. 코란은 그의 동정녀 탄생을 확인하고 있으며(코란의 한 장은 ‘성모마리아’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성모마리아는 모든 창조물들 중 가장 순결한 여성으로 여겨진다.

 

코란은 성수태고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보라!” 천사가 말하길, “하나님이 너를 선택하사 청결케 했으며 너를 모든 여성들 위에 노라. 마리아여 경건한 자세로 너의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예배하는 자들과 함께 허리 굽혀 예배하노라. 마리아여 하나님께서 너에게 말씀으로 복음을 주시니 마리아의 아들로써 그의 이름은 메시아 예수이니라 그는 현세와 내세에서 훌륭한 주인이시요 하나님 가까이 있는 자 가운데 한 분이라. 그는 요람과 그리고 성장해서 사람들에게 말을 할 것이며 의로운 자들 가운데 있게 되리라.” 그녀가 말하길 “주여, 제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가 말하길 “그렇게 되리라. 그분의 뜻이라면 창조하시니라. 그분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이렇게 말씀하시나니 있어라 그러면 있으리라.”(코란 3장 42~47절)


예수(u)는 아담을 아버지없이 만들어내었던 것과 같은 힘을 통해 기적으로 태어났다: “실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랬듯이 예수에게도 다를 바가 없노라. 하나님은 흙으로 그를 빚어 그에게 말씀하시니 ‘있어라!’ 그리하여 그가 있었노라”(3장 59절) 예언자로서의 임무 동안 예수(u)는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코란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가 말하길 “나는 너희의 주님으로부터 예증을 받았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진흙으로 새의 형상을 만들어 숨을 불어 넣으면 하나님의 허락으로 새가 될 것이라. 하나님의 허락으로 나는 장님과 문둥이들을 낫게 하며 죽은자를 살게하리라.”(3장 49절) 무함마드(pbuh)든지 예수(u)든지 간에 그 누구도 초기 예언자에 의해 받아들여진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기본적 교리를 바꾸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확인하고 재건하기 위해 온것이다.
 
코란에서 예수(u)는 그가 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 이전에 율법을 있음을 확증하고 너희에게 금지되었던 몇 가지를 허용하기 위해 너희에게 왔으며 주님으로부터 예증을 너희에게 가져왔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나에게 순종할 것이라.(3장 50절)” 예언자 무함마드(pbuh)는 말하였다. “무함마드가 하니님의 예언자이며, 예수는 하나님의 예언자이자 하인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리아에게 숨을 불어 넣어서 나온 영혼이며, 천국과 지옥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으며, 유일무이한 하나님을 믿는 그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에 의해서 천국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다.”(부카리가 전달하는 하디쓰)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09] 예수와 무함마드

  •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입력 : 2011.05.06 23:19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관계는 유라시아 대륙 역사의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7세기에 이슬람교가 성립된 이후 십자군전쟁으로부터 최근 9·11 사건에 이르기까지 양측은 수많은 유혈충돌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두 종교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또 적대적일까? 아니다. 두 종교의 교리는 생각보다 훨씬 공통점이 많다.

이슬람교에서 예수는 신앙의 원수이기는커녕 지극히 중요한 성인이다. 예수는 모든 예언자 가운데 유일하게 신의 말씀으로 예고되었고 처녀잉태를 통해 탄생했다. 쿠란은 또 예수가 죽을 때에도 신이 개입하여 구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십자가 처형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환상일 뿐이며 실제로는 신이 예수를 직접 하늘나라로 불러올린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인간 중 유일하게 죽음을 면한 존재다. 쿠란에 의하면 알라는 인간들에게 마지막 심판의 소식을 전하는 임무를 예수에게 맡겼고, 예수는 무함마드도 하지 못한 여러 기적을 행하며 그 임무를 수행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예수는 무함마드보다 더 우월한 예언자인가?

여기에서 두 종교 간 해석이 갈린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수난은 인간이 원죄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들기 위한 과정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겪는 불안, 베드로의 배반, 십자가의 고통 등 모든 절망의 과정을 예수 자신이 통과한 끝에 인간은 원죄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무슬림의 입장에서는 신의 사자가 그런 굴욕과 패배를 겪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신이 보낸 사자라면 믿을 만한 증인 앞에서 신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고, 또 그 메시지를 받은 민족은 그것을 정확하게 잘 보존해야 한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와 증인들은 모두 그를 버리고 떠났으며, 따라서 예수는 움마(신앙공동체)를 모으지도 못했고, 신의 메시지는 결국 상실되었다. 이슬람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소명은 실패로 끝났다. 예수가 진짜 예언자인 것은 맞지만 그가 받아온 메시지가 불명확하게 된 이상 무함마드라는 마지막 예언자가 다시 필요하게 된 것이다. 물론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무함마드는 거짓 예언자이다. 대부분 유사하되 결정적인 지점에서의 차이, 이것은 결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예수와 무함마드”

크리스천투데이
입력 : 2009.02.17 08:50
한복협 2월 월례회 강승삼 교수 강연 전문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 이하 한복협)는 13일(금) 오전 7시 새문안교회(담임 이수영 목사)에서 ‘나사렛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2월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를 가졌다. 다음은 강승삼 교수(KEF 선교위원장, KWMA 사무총장)의 ‘예수와 무함마드’ 강연 전문.

 

 

 

▲강승삼 교수(KEF 선교위원장, KWMA 사무총장) ssskang@hotmail.com; ijkong@hotmail.comoffice@kwma.org

 

I. 꾸란에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가?

 

꾸란에는 예수님에 대해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러나 꾸란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신성과 삼위일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꾸란의 예수님은 성경의 예수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음은 꾸란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인정하는 내용을 보자.

 

1. 예수의 동정녀 탄생

꾸란 19:16-21 그가 말하길 실로 나는 당신 주님의 사자로서 성스러운 아들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왔느니라 그가 말하길 그렇게 되리라 당신의 주께서 ‘그것은 내게 쉬운 일이라 그로 하여금 백성을 위한 예증이 되게 하고 우리(알라)의 은혜가 되도록 이미 그렇게 명하여진 일이었느니라

(3:45-47) “보라! 천사들이 말했다. ‘오, 마리아여! 알라께서는 너에게 그분의 말씀을 수여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고하신다. 그의 이름은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그분은 현세에서나 내세에서 고귀한 분이시며 알라와 가까이 계실 분이다. 어린아이 시절이나 어른이 되어서나, 백성들에게 말할 것이며 의로운 분이 될 것이다.’ 마리아가 말하기를, ‘오, 나의 주님이시여! 아무 남자도 저를 건드리지 않았는데 어찌 제가 아들을 가지겠습니까?’라고 하자, 천사가 말했다. ‘그렇다 해도 알라께서는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창조하신다. 일을 계획하시기만 하면, 그렇게 되라고 말씀만 하셔도 그렇게 된다.”

 

2. 예수만이 메시야임을 인정
꾸란 3:45 마리아여! 하나님께서 너에게 말씀으로 복음을 주시니 마리아의 아들로서 그의 이름은 메시아 예수이니라..

3. 예수는 죄가 없으시다.
꾸란 19:19 오직 예수만이 그의 삶을 통해 전적으로 죄가 없음을 말합니다.

 

4.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령
꾸란 40:15 가장 위에 계시며 옥좌에 계신 그분이 바로 그분(알라)이시니 그분은 그분의 명령으로 그분이 원하는 종들에게 계시를 내리어 그것으로 상봉할 그날의 인간에게 경고하시고자 함이니라.

 

5. 기적을 일으킨 사람
꾸란 5:113 보라 너는 흙으로 나의 뜻에 따라 새의 모양을 빚어 그곳에 호흡을 하니 나의 뜻에 따라 새가 되었느니라. 또한 장님과 문둥병을 치료하였으니 나의 뜻이었고 또한 죽은 자를 살게 하니 이도 나의 뜻이었느니라 또 네가 그들에게 기적을 행하매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를 음모하여 살해하려하니 내가 이를 제지하였느니라. 이때 그들 가운데 불신자들은 이것은 분명한 마술에 불과 하도다 하더라.

 

6. 예수의 죽으심과 승천
꾸란 4:158 알라께서 그(예수님)르 오르게 하셨으므로 알라는 권능과 지혜로 충만하심이니라.
꾸란 3:55 알라께서 말씀하사 예수야 내가 너를 불러 내게로 승천케 하며 부활의 그날까지 불신자들 위해 있게 하리라 그런 다음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나니 너희들이 달리한 것에 대해 가름을 하여 주리라

 

7. 마지막 때 재림하시며 중재자
꾸란 43:61 실로 예수의 재림은 심판이 다가옴을 예시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일러 가로되 그 시각에 대하여 의심치 말고 나를 따르라 이것이 옳은 길이니라
꾸란 4:159 그 성서의 백성 가운데 그가 임종하기 전에 그(예수)가 심판의 날 그들을 위한 증인이 됨을 믿지 아니한 자 없으리라.

 

8. 복음은 예수의 메시지
꾸란 6:34 알라의 말씀을 위조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며 선지자들의 소식이 그대에게 이르렀느니라.
꾸란 4:136 믿는 자들이여, 알라와 그 선지자 그리고 선지자에게 계시된 성서와 너희 이전에 계시된 성서를 믿어라 했거늘
꾸란 5:69 그들이 구약과 신약과 그들 주님이 계시한 것을 준수했다면 그들은 그 이상의 참된 진리를 맛보았으리라

다음은 꾸란에서 예수에 대해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1. 예수는 육체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다.
꾸란 5:19 알라가 곧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 말하는 그들에게 저주가 있으리라
꾸란 5:75 알라가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고 말하니 그들은 분명 불신자들이더라.

 

2.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꾸란 2:116 그들은 알라가 아들을 낳았으니 그분께 찬미를 드릴지어다 라고 말하나 그렇지 않도다
꾸란 43:81 일러 가로되 자비로운 알라께서 아들을 가졌다면 내가 제일 먼저 경배하는 자가 되리라
꾸란 19:88-92.”지극히 자비로우신 분(알라)이 아들을 낳았다! 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진실로 너희들은 괴상한 말을 하는구나. 그 때문에 하늘이 찢어지고, 대지는 쪼개지고 산들이 무너지려고 한다.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알라)이 아들을 낳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이 자식을 가질 수는 없다

 

3. 예수는 삼위일체 성자 하나님이 아니다
꾸란 112:1-4 일러 가로되 알라는 단 한 분이시고 알라는 영원하시며 낳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아니했나니 그 분과 대등한 자가 세상에 없도다
꾸란 5:119 알라께서 마리아의 아들 예수야 네가 백성에게 말하여 알라가 아니라 나와 나의 어머니를 경배하라 하였느니라
꾸란 5:76 알라는 셋 중의 하나라 말하는 그들은 분명 불신자이라 알라 외에 신이없거늘 만일 그들이 말한 것을 단념치 않는다면 그들 불신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벌이 가해지리라
꾸란 4:171: “그분들은 세 분이오”라고 말하지 말라. 단념하라. 그것이 너희에게 더욱 좋으니라. 실로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시니..

 

4. 예수는 이미 계셨던 분이 아니다
꾸란 5:19 그분의 뜻이라면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와 그의 어머니와 세상의 모든 것이 멸망하게 되느니라.

 

5. 예수도 아담처럼 창조되었다
꾸란 3:59 알라께서 아담에게 그랬듯이 이 예수에게도 다를 바가 없도다 알라는 흙으로 그를 빚어 그에게 말씀하셨다 있어라 그리하여 그가 있었느니라.

 

6. 예수는 선지자이지 구세주가 아니다
꾸란 5:78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로서 선지자일 뿐 이는 이전에 지나간 선지자들과 같음이니라 그의 어머니는 진실하였으며 그들은 매일 양식을 먹었도다.

 

7. 예수는 제한된 시간에 이스라엘만을 위해 오셨다.
꾸란 3:49 예수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지자로 보내리라 나는 너희 주님으로부터 예증을 가지고 왔도다

 

8.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
꾸란 9:31 그들은 하나님 외에 아흐바르 와 루흐반 그리고 마리아의 아들 예수글 그들의 주님으로 경배하나 알라 외에는 경배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었으니 그 분 외에는 신이 없음이라

 

 

II. 성경의 예수님은 주님이시지만 꾸란의 주님은 알라만을 가리킨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본질적인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코란의 이싸(Isa) 간의 구별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들 무함마드와 예수를 비교하려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만일 무함마드를 성경의 인물과 비교하려면 바울이 어떠냐고들 한다.

코란에서 무함마드는 인간일 뿐이고 계시를 지브릴 천사로부터 받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이지만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는 참인간이시고 참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시지만 코란에서 주님은 알라만을 가리킨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와 코란의 무함마드를 비교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무함마드가 예수를 만나다>라는 모 방송 프로그램은 제목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무함마드가 코란에 기록하고 있는 이싸(Isa)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지 않았고 알라에게로 들어 올려져 아직도 자연사하지 않는 인물이며 이슬람에서 이싸는 종말에 이 세상으로 돌아와 십자가를 부수고 세상 사람들이 이슬람을 믿어야 한다고 선포하는 인물이다. 코란과 이슬람에서 설정한 이싸는 도무지 성경의 예수와 동일 인물이 아니어서 무함마드가 예수를 만났다는 제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치 이슬람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코란과 이슬람에는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그리고 이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바라보면 코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무함마드는 성경의 예언자가 아니다.

 

무슬림들이 코란 속의 이싸를 예수라고 번역하여 세상에 내놓으니 아랍어 코란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그 본문의 차이에서 오는 차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 코란의 일부 번역들은 무슬림들이 오래 전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부인하고 기독교를 와해시키려는 의도적인 번역이었다. 그 예로서 무슬림들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가 같다고 기독교인들에게 말하면서 기독교인들은 지옥에 간다고 분명하게 그들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만일 동일한 신을 믿는다면 기독교인들이 지옥에 간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코란에 대한 해석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무함마드 중심의 코란 해석학적 이해 없이는 이런 논리를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III. 무함마드의 삶과 많은 무슬림들의 삶이 다르다.

 

코란에서, 그리고 이슬람에서 무함마드는 가장 훌륭한 사람(the best man)으로 묘사되어 이상적인 인간의 모델로 간주된다. 대부분의 정통 무슬림들은 무함마드라는 이름이 모스크에서 알라(Allah)라는 이름 옆에 쓰이기는 하지만 알라는 신이고 무함마드는 인간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오늘날 무슬림들과 대화를 하거나 그들의 연설이나 강의를 듣노라면 중간 중간 <무함마드가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하면서 무함마드의 어록들을 언급한다. 물론 이슬람의 신앙고백은 <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고 무함마드가 알라의 사성(messenger)임을 증언한다.>고 말하므로 알라와 무함마드를 믿지 않고서는 무슬림이라고 할 수 없다. 알라가 신이라고 믿고 무함마드가 알라의 사성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도나 파키스탄에서 민속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파라다이스에서 살았던 사람이라고 믿고 무함마드가 심판의 날에 무슬림들이 파라다이스에 갈 수 있도록 중개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무함마드를 거의 신처럼 받든다. 이것은 민속 무슬림과 정통 무슬림간의 큰 차이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국에서는 무슬림들이 민속 이슬람보다는 정통 이슬람에 가깝다.

 

무함마드가 설정한 신 개념이 후세 이슬람 신학자들에 의하여 절대적인 단일신론을 주장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에 대한 반론이 코란을 통하여 증명되기 시작한다. 너무 일찍부터 무슬림들은 성경이 변질되었다는 논리를 세워 더 이상 이제는 무슬림들이 성경을 읽지 않게 되었다. 이슬람이 다른 여러 종교보다 우월하고 코란이 그 이전의 어느 경전보다 완벽하다는 논리를 세워 나갔다.

한국의 이슬람 학자들이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들고 나온 것에 우리는 그들이 잘못된 의도를 가졌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무슬림들이 코란을 읽으면 코란에 기록된 이싸가 성경의 예수와 다른 분이라는 것을 잘 안다. 무슬림들이 이싸를 선지자로 믿지만 하나님의 아들로는 믿지 않아 금방 그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란의 이싸를 예수라고 하여 <무함마드가 예수를 만나다>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실 <무함마드가 이싸를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면 전혀 색다른 내용 전개가 되었을 것이다. 코란에는 예수가 아닌 이싸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싸는 코란의 선지자이고 코란에서 상당한 지위를 갖는 분인데 만일 그 방송 프로그램에서 그 이싸가 허구적인 인물이라고 한다면 결국 코란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묘하게 <언어의 장난>을 하여 이싸가 아닌 예수라고 한 것은 한국의 시청자들이 잘 알고 있는 기독교의 예수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거기에는 우리 교계가 그 동안 이슬람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것이 그 첫째요, 최근에 일부 선교 지도자들이 이슬람의 포교에 대한 대처 방식에서 교인들에게 혼란을 부추기는 발표들이 나온 것도 사실은 그만큼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 안에서 연합되고 통일된 대처 방식이 나오지 못한 것이다. 성경의 변질론, 이싸의 십자가 죽음을 부인하고 신성을 거부하는 것 들은 중동의 무슬림들이 자주 기독교를 폄혜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코란에서 알라는 무함마드에게 “경전의 백성(기독교인과 유대인)들과는 논증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논증하며 다가오는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이라고 본다. 지금 이슬람 세계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상당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데 이슬람 근본주의의 태생은 1970년대 이집트에서 하산 알 반나로부터 시작하여 파키스탄의 알마우두디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학자군을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 이슬람을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들 중 이집트나 사우디 아라비아, 파키스탄의 이슬람대학교 출신들이었다. 미국에서 2001년 9.11 테러를 자행한 무슬림들 중 상당수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 추종자들이었다.

 

와하비즘은 타종교 원리주의 뿌리로서 Muhammad Abd al-Wahhab(1703-1787)에서 시작되었다. 와합은 꾸란과 순나(무하마드가 가르친 습관과 종교적 실천) 복귀하여 이슬람에 첨가된 미신적 신앙이나 거짓된 실천과 관습은 다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와합은 이슬람 세계(Dar al-Islam, 평화의 집)와 비이슬람의 세계(Dar al-Halb, 전쟁의 집)로 구분하고 비이슬람 세계는 무력으로 정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와 유대인들을 증오하며 과학과 예술을 철저히 거부한다. 오사마 빈 라덴과 탈레반이 와합주의자들이다.

 

이슬람의 원리주의의 특징은 1) 합리성이 결여된 문자주의며 경전을 임의적으로 해석한다. 2) 자기 종교의 본질을 왜곡한다. 3) 철저히 배타주의다. 4) 폭력사용을 정당화한다. 5) 여성을 차별화한다. 6) 자본주의를 불의의 제구조로 정죄한다. 7) 민주주의와 다원화를 거부한다. 8) 종교의 자유를 거부함으로 기독교와 타종교를 박해한다. 고로 인권침해가 심각하다. 9) 종교적 집단주의로서 개인의 인권을 부정하고 종교적 국가나 공동체우선의 이데올로기다. 10) 거룩한 장소나 모스크를 고집함으로 종교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요르단은 친미 국가이지만 국민의 70% 정도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어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조금도 이스라엘 편을 들지 않고 팔레스타인을 편들기 때문에 한국과 같이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과 등거리 외교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무슬림들의 입장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무슬림들을 보고 이슬람을 이해하는 것과 우리가 코란이나 이슬람 관련 서적들을 보고 이슬람을 이해하는 것과 크게 다르다. 더구나 무슬림들이 전해주는 이슬람에 대한 이해는 무슬림들이 마땅히 그렇게 했으면 좋을 내용들이지만 실제 무슬림들의 삶은 그와 같지 않다. 얼마 전에 K박사가 아랍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무슬림 운전수가 하는 말을 전한다. “지금 무함마드가 이 땅에 내려오면 가관일 것이다. 모든 무슬림들이 무함마드가 말한대로 매일 삶에서 지키며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삶은 무슬림들에게 삶의 표준이 되고 있다. 지난 몇 년 전 우리는 북구라파 어느 나라의 무함마드 풍자만화 때문에 전 무슬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을 보았다. 그 이유는 무함마드를 비난하고 모욕하는 것은 무슬림 각 개인의 삶을 모욕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무슬림들이 각자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IV. 무슬림은 알라와 무함마드에게 복종해야 한다.

 

무함마드와 알라와의 관계는 오늘날 무슬림들의 신앙고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성(메신저)이다” .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이고 메신저라는 고백이다. 코란에서 예언자와 메신저의 차이는 후자가 경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메신저는 예언자가 될 수 있으나 예언자는 메신저가 될 수 없다. 무함마드의 신앙고백에는 알라에 대한 두려움이 필수요소이었다. 이슬람 이전에 알라는 메카 사람들에게 희미하게 멀리 떨어진 존재이었다. 알라가 창조한 것을 통상적으로 돌보지 않는 이신론적 신 개념이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알라가 목에 있는 경동맥보다 더 가깝다고 했다(수라 5:16). 문맥상으로 볼 때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알라와 인간 사이의 내적이고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알라는 인간의 모든 악한 생각들을 알기 때문에 인간이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란이 심판을 날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두려움의 일부이기도 하다. 당시 메카 사람들은 알라를 무시하기도 하였으나 무함마드는 알라가 질투하시고 복수하시는 신으로서, 종국에는 이 신에게서 심판을 받는다고 믿었다.

 

“메신저(무함마드)에게 순종하는 자마다 이미 알라에게 순종한 것이다”(수라 4:80) 이 구절에 대하여 코란 주석가 알꾸르뚜비는 “메신저는 무함마드를 가리키는데 무함마드에게 순종하는 자는 이미 알라에게 복종한 자이고, 무함마드에게 불순종한 자는 알라에게 불순종하는 자”라고 말한다. 무함마드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알라가 무함마드를 그들의 보호자로 보내지 않는다고 코란은 강조한다. 즉 무함마드를 통하지 않고는 알라의 보호를 받을 수 없고 심판의 날 알라 앞에서 중재를 받으려면 무함마드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슬람이 시작될 무렵 메카 사람들이 숭배한 여러 신들을 거부한 무함마드는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고 했고 그로 인하여 “알라”는 무슬림들에게 신에 대한 고유한 이름이 되었다. 이슬람 이전에는 알라가 전체 아랍인들의 어휘 뭉치에서 어느 한 가장자리를 차지하였으나 이슬람의 등장으로 알라가 모든 코란 어휘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코란은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직접 전해준 경전이 아니다. 지브릴 천사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무함마드가 당시 아랍 사람들에게 전한 내용을 후세의 무슬림들이 한데 모아 책을 편찬한 것이 오늘날의 코란이다. 알라가 전해준 지브릴 천사의 계시가 무함마드를 통하여 코란 책이 된 것이다.

 

 

IV. 끝맺는 말

 

우리는 예수와 무함마드는 본질적으로 서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무함마드는 모든 무슬림들의 삶의 모범이 되며 심지어 이슬람 수피들의 모델이 되므로 무슬림들에게는 단순히 이슬람에서 말하는 예언자나 메신저 그 이상이라는 것도 알았다. 무슬림들의 코란에는 무함마드에게 복종해야 알라에게 복종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오늘날 무슬림들이 무함마드를 숭배하는 민속 무슬림을 낳기도 하였다. 코란이 한국어로 제대로 번역된 것이 없어 한국 내 이슬람연구에 한계성을 보이고 언론과 일반인들도 지난 30년간 이슬람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여 이슬람이 편향되게 전달되었다. 서구 중심의 이슬람 사고에서 벗어나 이슬람 세계의 실상에 맞게 이슬람을 이해하자는 한국의 학자들도 현장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어 한 마디로 <이슬람 지식의 혼돈 시기>에 살고 있다고 하겠다.

 

 

 

예수와 무함마드
정가
15000원
판매가
14250원 (5% ↓,750원 ↓)
출판사
지식과사랑사
저자
마크 가브리엘
발행일
2009년 05월 01일
페이지수
327 page
 서평

이 논쟁적인 책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두 인물-20억 명이 믿는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님과 13억 명이 믿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에 대한 사실적인 분석을 제시한다. 마크 가브리엘 박사는 예수님과 무함마드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독자로 하여금 그 두 사람의 생애를 따라가 보게 한다. 독자들은 두 사람 모두 어린 시절에 예언을 받았고 사촌의 지지를 받았으며 고향에서 배척을 받았고 열두 제자의 조력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저자의 균형 잡힌 역사적 비교는 예수님과 무함마드의 거짓된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예수님과 무함마드가 지닌 현대의 영향력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줄 것이다.


목차

머리말

1부 나의 성장 배경
1. 회교도로 성장하다
2. 대학을 떠나며
3. 예수와 무함마드를 나란히 비교해 보다

2부 예수와 무함마드의 생애
4. 어린 시절의 운명
5. 계시의 시작
6. 메시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7. 메시지 전파
8. 말년
9. 연보

3부 두 사람의 말과 행적이 남긴 유산
10. 세상을 향한 그들의 메시지
11. 그들의 서로에 대한 가르침
12. 치유와 기적
13. 거룩한 전쟁의 의미
14. 사랑에 대한 가르침
15. 기도에 대한 가르침
16. 여성에 대한태도
17. 매우 흥미로운 유사한 사건
18. 실제적인 가르침의 비교

4부 결론
19. 핵심 요약
20. 나의 개인적인 결단

후기
부록 A 예수와 무함마드에 대한 자료
부록 B 무함마드에 대한 성경의 예언과 관련된 이슬람교의 가르침
부록 C 예수에 대한 구약의 예언
부록 D 코란과 성경 속의 예수
미주
참고 문헌
저자의 학문적 경력


 작가소개

마크 가브리엘
마크 가브리엘 마크 가브리엘 박사는 이집트에서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로 자라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슬람교 대학인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대학에 진학하여 이슬람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곳에서 가르쳤다. 지난 10년 동안에는 기독교 신자로 살면서 세계 종교 분야에서 석사학위, 기독교 교육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이슬람교와 유대인],[이슬람교와 테러리즘]등이 있다.

 

 

 

이름없는풀뿌리 [만물상] 이슬람 입력 : 2001.10.15 19:28 아랍·이슬람권에서는 이름을 지을 때 본인, 부친, 조부, 증조부의 이름을 길게 이어붙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가계도다. 실생활에서는 본인, 부친, 조부 이름, 성으로 끝맺는 약식 호칭이 주로 쓰인다. 「무함마드 이븐 알리 이븐 무사 알 클라이슈」라고 하면 클라이슈가의 무사의 아들 알리의 아들 무함마드라는 뜻이다. 「이븐」은 누구의 아들이라는 소유격 조사로, 발음 편의상 「빈」으로 쓰기도 한다. 무함마드는 가장 흔한 이름이다. 「칭송받는 자」라는 뜻인데, 우리가 흔히 마호메트라고 부르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이름이다. 메카의 명문 상업귀족 가문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무함마드는 40세에 메카 교외의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다가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610년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그가 이후 22년 동안 전한 「알라의 말씀」을 편찬한 것이 「코란(쿠란)」이다. 「읽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코란」은 신이 일인칭으로 한 말을 정리한 경전이다. 전 114장으로 된 이 「코란」을 모든 이슬람신자들은 「빛나는 생활」의 규범으로 삼아 실천하고 있다. 음주와 도박과 돼지고기 먹기의 금지, 4명까지의 일부다처 허용, 남자의 수염 기르기 등이 모두가 「코란」에 담겨있는 계율들이다. 돼지고기 금지에는 돼지고기가 열사(熱砂) 기후에 부패하기 쉽다든지,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유목 생활에 기르기 적합지 않다는 등 몇가지 설이 있다. 일부다처제는 「우후드산」 전투에서 많은 무슬림남성이 전사하며 생긴 미망인과 고아를 돌보아야 할 사회적 필요와 종족유지를 위해 채택됐다. 수염 기르기는 남성과 여성의 엄격한 구별을 강조하는 모세 아브라함 예수 무함마드 등 선지자들이 모두 실천해온 행적으로 전 무슬림은 이를 따라야 한다는 교리에서 비롯됐다. 이슬람에 대해서는 이처럼 나름대로 다 이유와 역사적 배경이 있다.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10년 동안 포교에 무진 애를 썼지만 그가 622년 메디나로 피신할 때 따라온 신자 수는 100여명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전세계 인구의 5분의 1을 신자로 가진 종교가 됐다. 2025년에는 이 비율이 31%에 이를 것이라고 새뮤얼 헌팅턴은 전망한다. 이런 거대한 실체를 두고 9·11 참사가 있기 전까지 우리를 포함한 세계인은 너무 무지하기만 했다. 2011/05/07 20: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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