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실록으로 본 남대문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31. 15:22

실록으로 본 남대문

 

두 차례의 외란과 6.25 동란에도 꿋꿋히 자리를 지켜온 숭례문이 어느 우민(愚民)의 방화로 도시의 흉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복원기간만 최소 3년, 복원 비용은 300억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돈도 돈이고 시간도 시간이지만 600년을 지켜온 국보 1호, 숭례문이 상처를 입었다는데 크나큰 안타까움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마저 들지만 이번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제2, 제3의 숭례문 사태를 만들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 또한 든다. 숭례문의 전소한 직접적인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방화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우리 스스로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부재라 생각하여 미력하나마 숭례문의 역사를 기록하여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리려 한다.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 태조 10권, 5년(1396 병자 /명 홍무(洪武) 29년) 9월 24일(기묘)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숭례문의 기록 중 가장 이른 기사이다. 성을 다 쌓자 그 인부들을 돌려 보냈다고 기록하며  8대문의 약력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 흥미를 끄는 단어는 '남대문'이다. 남대문이란 용어는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낮추기 위해 예의를 숭상하는 문(崇禮門)을 그저 남쪽의 큰 대문(南大門)으로 바꾼 것으로 아는 이가 적지 않은데 숭례문의 역사만큼이나 남대문이란 단어의 역사도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숭례문(崇禮門)을 새로 짓는데 좌참찬(左參贊) 정분(鄭苯) 등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분(苯)이 오로지 토목(土木)의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아서, 영선(營繕)하는 일이 연해 계속되고 미리미리 임금의 뜻에 맞도록 하니, 재물과 인력이 동나게 되었다.

-세종 117권, 29년(1447 정묘/명 정통(正統) 12년) 8월 30일(기축)2번째기사

숭례문은 1415년(태종 15)에 수해로 안에 있던 행랑이 무너지자 수리한 이래로 수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는데 1447년(세종 29)의 중수로 모습을 완전히 갖추었다 한다. 그러나 현대의 기술로도 3년이라는 긴 시간에 300억이라는 거금이 드는 마당에 500년전에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조선 최고의 전성기인 세종 연간에도 재물과 인력이 동날 지경이며 성종 연간에는 왕이 숭례문 보수공사에 회의를 표하기 까지 한다.
 
 

보루각 도감(報漏閣都監)이 아뢰기를,

“흥인문(興仁門)과 숭례문(崇禮門)에 종을 매다는 일에 있어서 지난달에 이미 모든 준비를 끝냈으나 그때에는 가물 조짐이 있었기 때문에 중지하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가을이 되었으니 종각을 세워 종을 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중종 82권, 31년(1536 병신/명 가정(嘉靖) 15년) 7월 14일(정묘) 2번째기사
숭례문에는 종이 달렸던 적이 있었다. 중종 대의 권신인 김안로의 건의에 의해서 였다. 지금이야 어느 곳을 가든 시계가 있어 쉽게 시간을 알 수 있지만 당시엔 주지하듯이 종루의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 하지만 소리가 퍼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소리를 듣지 못하면 불편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보루각 도제조, 김안로는 한양의 문을 닫은 절인 정릉사와 원각사의 종을 떼어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에 걸어 둘 것을 건의하였고 왕은 그의 뜻을 따랐다. 그러나 김안로는 숭례문에 종을 매달자 건의 한 뒤 1년만에 실각하여 사사되고 유생들은 유교국가에서 불교의 종이 웬말이냐며 종의 철거를 주장하였다. 중종은 시각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 변명했지만 결국 그의 아들이 명종 대에 가서 종은 내수사에 보내졌다.

큰 비가 내리니 명하여 옮긴 저자를 돌아오게 하고 숭례문(崇禮門)을 열어 피고(皮鼓)를 쳤다.

-성종 44권, 5년(1474 갑오 / 명 성화(成化) 10년) 윤6월 30일(계축) 1번째기사

이런 류의 기사의 조선왕조실록 중 숭례문에 관한 기사에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가뭄이 심하면 숭례문을 닫고 비가 오면 숭례문을 열게 한 것인데 가뭄이 난 경우, 북쪽 대문인 숙청문은 열었고 상가를 옮기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과연 문을 열고 닫는 것이 무슨 이해(利害)가 있겠느냐는 회의론적인 사람도 있었다.
 

 전교하였다.

“흉서를 붙인 자를 체포하여 보고하지 못한 것은 수문장과 별장의 죄이다. 더구나 흉서를 본 뒤에 즉시 와서 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군사를 시켜 몰래 찢어버리게 해서 그 자취를 숨기려고까지 하였으니 그 정상이 매우 수상하다. 숭례문 별장 장응명(張應明)·한진하(韓振河)·서유일(徐惟一) 등을 모두 잡아다 추국하라.”

-광해 131권, 10년(1618 무오/명 만력(萬曆) 46년)8월 10일(병인) 9번째기사

숭례문엔 벽서가 많이 붙었나 보다. 기록되어 있지 않아 정확히 무슨 내용의 벽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의 기사처럼 왕이 직접 추국을 지시하고 있을 정도로 꽤나 큰 일이었을 것이다. 이는 숙종 대에도 일어나는데 역시 '말이 지극히 부도(不道)하다'라고만 되어있어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다. 또
 

“윤광철(尹光哲)은 전례를 따라 사형을 집행할 수 없으니, 마땅히 숭례문(崇禮門)에 친림(親臨)하여 왕법을 통쾌하게 바로잡아 도성의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보도록 하는 것이 적합하다.”

-영조 83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3월 8일(신사) 1번째기사

1775년, 나주에선 역모의 기운이 감돌았는데 권력에서 떨어져 나간 소론 계열의 윤지와 그의 아들 윤광철아 중심이 되어 나라를 뒤엎을 작정을 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동지를 규합하고 거사를 하려하였으나 민심을 동요하기 위해 나주객사에 붙인 글이 발각되어 결국 모조리 죽임을 당하였다(나주괘서사건). 영조는 노발대발하여 윤광철을 비롯하여 윤혜, 김요채등을 죽이고 효수하였다. 한편, 이 역모사건 말고도 숭례문에 효시된 이가 더 있었으니 바로 남병사 윤구연이다. 그는 영조의 금주령을 어기고 술을 빚어 마시다 체포되었는데 영조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벌백계로 삼기 위해 그를 참수하고 효시하였다.
 
<이외의 에피소드>
 
숭례문엔 꽤 기이한 일이 많았는데 1413년(태종 13)엔 노루가 숭례문 안에 들어왔고 1646년(인조 24)엔 숭례문의 저절로 닫히기 까지 하였다. 한편, 숭례문을 지키는 수문장들은 꽤나 고초를 겪었나 보다. 1504년(연산군 10)에 성문을 지키지 않은 수문장은 국문을 받기도 하였으며  1550년(명종 5)엔 수문장이 결박을 당하고 칼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이덕일 사랑] 숭례문 편액고(扁額考)
 
숭례문 편액(扁額)이 누구 글씨인가는 수백 년 동안 논쟁거리였다. 사학자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1888∼1939)은 '숭례문 편액'이란 글에서 '양녕대군의 글씨가 아니라고 한다면 대경실색할 것'이라고 말했듯이 일제 때도 양녕대군 설이 대세였다. 문일평은 그 이유를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연려실기술'에서 작자 미상의 '축수편(逐睡篇)'을 인용해 "지금 숭례문 석 자는 양녕대군의 글씨로서, 웅장하고 뛰어남은 그의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라고 적은 것이 계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문신 이유원(李裕元·1814~1888)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세상에서 전하는 것은 '지봉유설'에서 나온 말이다"라면서 "숭례문은 공조판서 유진동(柳辰仝·1497~1561)이 쓴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유원은 "전에 남대문을 중수할 때 양녕대군의 사손(祀孫) 이승보(李承輔)와 윤성진(尹成鎭) 대감이 문루(門樓)에 올라가 판각(板刻)의 개색(改色)한 것을 보았더니, 후판대서(後板大書)는 공조판서 유진동의 글씨였다 한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문신 홍양호(洪良浩·1724~1802)도 유진동의 시장(諡狀)에 '숭례문 현판 글씨 역시 공이 썼다고 한다'고 유진동 설을 제시했다. 학자 정동유(鄭東愈·1744~1808)는 '주영편(晝永編)' '서화징(書畵徵)'조에서 유진동의 후손인 숙종 때 무신 유혁연(柳赫然)이 문루를 수리할 때 올라가 편액을 내리고 그 뒷부분을 보니 '가정 모년에 죽당이 썼다(嘉靖某年竹堂書)'라는 구절이 있어서 유진동의 글씨임을 알게 되었다고 전한다.

가정(1522~1567)은 명나라 세종의 연호인데, 이 시절에 죽당이란 호를 썼던 사람은 유진동밖에 없다. 서예가 오세창(吳世昌·1864~1953)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유진동의 글씨'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6·25 이후 숭례문을 보수할 때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입회 하에 그 뒷면을 닦아보고 문질러 보았으나 그런 낙관이 발견되지 않아 한창 설득력을 얻어가던 유진동 글씨 설은 수그러들게 되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숭례문 편액을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전하는데, 다른 설도 많다. 금석학자이기도 했던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홍우연에게 주는 글〔書贈洪祐衍〕'에서, "지금 숭례문 편액은 곧 신장(申檣:1382~1433)의 글씨"라고 주장했다. 대제학을 역임한 신숙주의 부친 글씨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의 문신 성현(成俔:1439~1504)은 '용재총화(?齋叢話)'에서 "모화관(慕華館)은 제학(提學) 신장이 썼다"고 밝혔지만 숭례문도 그의 작품인지는 언급하지 않았고 김정희도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덕무(李德懋)의 손자인 이규경(李圭景:1788~?)은 '오주연문장전산고' '인물(人物)에도 빛이 있다는 변증설(人物有光辨證說)'조에서 다른 설을 제시한다.

그는 '동국 패사(東國稗史)', 즉 야사를 근거로 "한도(漢都:서울)에 있는 남문(南門)의 편액(扁額)이 숭례문(崇禮門)인데, 즉 양녕대군의 글씨이다. 임진왜란 때에 액판(額板)을 잃어버렸는데, 그 후 남문 밖 연못가에서 밤마다 빛을 발사하므로 파보니, 이 액판이 묻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꺼내어 다시 걸었다. 그런데 이는 정난종(鄭蘭宗:1433∼1489)이 쓴 것이다"라고 조선 초기 서예가 정난종의 글씨라고 주장했다. 이규경은 같은 책의 '숭례문과 대성전 액자(額字)에 대한 변증설'에서 "정난종은 세조 때 사람으로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어명으로 비판(碑版)이나 종명(鐘銘)을 많이 썼고, ……그 자체(字體)를 보아도 그의 서체(書體)임이 분명하다"라며 정난종의 글씨라고 단정 짓고 있다.

그러면서 양녕대군의 글씨라는 항간의 이야기는 와전된 것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 동시대 인물로서 서예 감식에 일가견이 있던 김정희와 이규경이 서로 다른 설을 주장하니 후인(後人)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至德祠)에는 지질만으로도 500년이 넘어 보이는 '숭례문' 탁본이 현존하고 있다니 양녕대군 설도 근거가 없지는 않다. 두 소방관의 사투로 겨우 보존된 편액 글씨의 주인공 감정 작업도 복원사업의 주요 의제 중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