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원효방과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 그리고 변산의 유래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31. 15:41

 

변산 작목사 이규보와 부사의방장

 

아름다운 변산 2006.09.23 23:56

http://blog.daum.net/armnuri/6010284

 

 

앞장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인 이규보(李奎報 1168~1231)는 고려(元宗時代) 최충헌과 최우의 무신 정치 시대에 문신으로 평장사를 지냈으며 변산에는 벌목사(伐木使)로 부임하여 근무하면서 인연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이 시절에 부령 현령 이군 및 다른 손님 6, 7인과 원효방과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을 다녀왔다. 그 후 위위시판사가 되었으나 1230년 팔관회 정란(政亂)에 휘말려 다시 부안 위도 상왕등도(蝟島上旺嶝島)에 유배되는 사연으로 변산과 다시 인연을 맺는다.

그 후 귀향에서 풀려나 (高宗1237년) 문하시랑 평장사로 관직을 물러나게 된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국선생전 등이 있다. 다음은 이규보가 본 변산의 부사의방에 관한 기록과 변산에 대한 찬(贊)가 몇 수를 찾아 적어 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암자에 대해 「신라의 승려 진표율사가 우거하던 곳인데 백척 높이의 사다리가 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방장에 이를 수가 있는데 그 아래는 측량할 수 없는 골짜기이다. 쇠줄로 그 집을 매어 바위에 못질을 하였는데 세상에서는 바다의 용이 한 짓이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부사의방장 터에는 어느 시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기와장이 흩어져 있고, 암벽에는 쇠말뚝 흔적이 있다.ⓒ부안21

 

 

… 이른바 부사의방장이란 곳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서 구경하였는데, 그 높고 험함이 원효의 방보다 만 배였고, 높이 백자쯤 되는 나무사다리가 곧게 절벽에 걸쳐있었다. 3면이 모두 위험한 골짜기라 몸을 돌려 계단을 하나씩 딛고 내려가야만 방장에 이를 수가 있다. 한번만 헛디디면 다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나는 평소에 높이 한 길에 불과한 누대를 오를 때도 두통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아찔하여 굽어 볼 수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는 더욱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올라가기도 전에 머리가 벌써 빙 돈다. 그러나 이 승적을 익히 들어오다가 이제 다행히 일부러 오게 되었는데, 만일 이 방장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또 진표대사의 상을 뵙지 못한다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그래서 어정어정 기어 내려가는데 발은 오히려 사다리에 있으면서도 금방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들어가서 부싯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향을 피우고 율사의 진용에 예배하였다. 율사는 이름이 진표이며 벽골군 대정촌 사람이다.

 

그는 12살 때 현계산(의상봉) 부사의방에 와서 거쳐하였는데 현계산이 바로 이산이다. 그는 명심하고 가만히 앉자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을 보고자 하였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자, 이에 몸을 절벽에 던졌는데, 두 명의 청의동자가 손으로 받으면서 말하기를 "대사의 법력이 약하기 때문에 두 성인이 보이지 않습니다."하였다. 그래서 그는 더욱 노력하여 삼칠일에 이르니, 바위 앞 나무위에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이 현신하여 계를 주고 미륵보살은 친히 점찰경 2권을 주고, 아울러 1백 99생( )을 주어 중생을 인도하는 도구로 삼게 하였다. 그 방장은 쇠줄이 바위에 박혀 있기 때문에 기울어지지 않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바다의 용이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참고문헌·이규보의 삶과 문학(홍성사)

                  작목사(斫木使)

                  權在擁軍榮可詫
                  官乎斫木辱堪知
                  邊山自古稱天府
                  好揀長材備棟樑
                  
           권세가 옹군(임금님이 준 벼슬)에 있으매
           영광을 가히 자랑할 만 한데

           관은 작목(나무베는직職)이라 부르니
           욕된(창피하다) 것을 알겠도다.

           변산은 예로부터 천부를 불리면서
           긴 제목 잘 뽑아 동량 재목에 대비하네.

 

 

           영주산 봉래산(瀛洲山,蓬萊山)

               江山淸勝敵瀛蓬
               立玉鎔銀萬古同
              
           강과 산이 맑고 좋음은
           영주산 봉래산과 겨룰 만 하니
           옥을 세우고 은을 녹인 듯한 것은
           만고에 변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변산

                 一春三過此江頭
                 王事何曾怨末休
                 萬里壯濤奔白馬
                 千年老松臥蒼龍
                 海風吹落蠻村笛
                 沙月來迎浦客舟
                 擁去騶童怪應我
                 每逢佳景立遲留
          
         한해의 봄에 세 번이나 강가에서 지내지만
         나라의 일이오니 어찌 원망할소냐

         만리 큰 물결은 백마가 달리는 듯 하고
         천년이나 늙은 용이 누워 있는 듯 하구나

         바다 바람은 불어 만 촌은 피리 소리에 젖고
         모래 위 달은 갯가의 나그네 배를 맞는구나.


호위하는 추동은 응당 날 괴이하게 여기리라
         좋은 경치 만나면 오래 서서 머물러 있었으니.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

               蚣矗危梯脚低長
               回身直下萬尋强  
               至人已化今無迹  
               古屋誰扶尙不疆
               丈六定從何處現
               大千猶可筒中藏
               完山吏隱忘機客
               洗手來焚一辨香
            
               무지개 같은 사다리 다리 밑이 길어서
               몸을 돌려 곧장 내리니 만 길이 넘네
               도인은 이미 가고 자취마저 없는데
               옛집은 누가 붙들었기에 아직도 쓰러지지 않나
               일장 육척의 불상은 어느 곳으로 좇아 나타날는지
               대천의 세계는 그 가운데 감추어져 있네
               완산의 벼슬아치 숨어들어 나그네임을 잊으니
               손 씻고 들어와 한 조각 향을 사르네

/김길중

 

 

 

 

 

만경출신 청년 진표, 변산에서 ‘미륵’을 만나다.

글 : 서복원 기자 / 사진 : 박종규 시민기자 

 

 

 

 

 

 

 

 

 

 

진표율사가 의상봉 동쪽 50여미터 아래에 터를 닦은 부사의방장

 

 

지난 8일 오전 이 부사의방장을 찾았다. 이곳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비득치 마을에서 의상봉의 공군부대를 거쳐 닿는 길이다. 김형주 선생님, 박종규 시민기자님, 필자를 포함한 취재진이 부대의 협조를 얻어 부근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

그런데 진표율사가 터를 닦은 이 기묘한 방장을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은 필자의 오만이었을까? 그럴리 만무했다. 우리 일행은 30여분을 헤맨 끝에 그 입구를 찾았고 10여미터 가량의 밧줄을 타고 내려가서야 방장과 마주치게 됐다.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곳에 자리잡은 이 곳 암자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삼국유사라는 역사기록물의 도움을 받아 진표율사와의 대면을 피할 수 없으리라.

부사의방장에서 내려다 보이는 청림마을과 바디재

 

 

진표 스승의 뜻에 따라
구도의 길에서 변산에 도달하다

그는 누구인가? 삼국유사 진표전간(眞表傳簡)은 그에 대해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중 진표(眞表)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목全州牧) 만경현(萬頃縣; 혹은 두내산현豆乃山縣, 또는 나산현那山縣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만경萬頃, 옛 이름은 두내산현豆乃山縣이다. <관녕전貫寧傳>에 중 [표表]의 향리로서 금산현(金山縣) 사람이라 한 것은 절 이름과 현縣 이름을 혼동한 것이다) 사람이다.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이요,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며, 성(姓)은 정(井)씨이다. 나이 12세 때 금산사(金山寺)의 숭제법사(崇濟法師) 강석(講席)에 가서 중이 되어 배우기를 청했다.”

진표의 스승 숭제법사는 불가에 입문한 제자에게 수행을 통해 계법(戒法)을 구할 것을 권유했다. 진표가 스승의 말을 따라 변산에 들어와 부사의방장에서 정진을 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진표는 스승의 말을 듣고 명산(名山)을 두루 다니다가 선계산(仙溪山) 불사의암(不思議庵)에 머물면서 삼업(三業)을 닦아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계(戒)를 얻었다. 그는 처음에 7일 밤을 기약하고 오륜(五輪)을 돌에 두들겨서, 무릎과 팔뚝이 모두 부서지고 바위 언덕에까지 피가 쏟아졌다. 그래도 아무런 부처의 감응이 없으므로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다시 7일을 더 기약하여 14일이 되자 마침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뵙고 정계(淨戒)를 받았으니 이때는 바로 개원(開元) 28년 경진(庚辰; 740) 3월 15일 진시(辰時)요, 진표의 나이 23세였다.”

일연이 부사의방장에서 진표의 수행을 이처럼 비교적 간단히 서술하고 있는데 반해 영잠(瑩岑)이 지은 관동풍악(關東楓岳) 발연수석기(鉢淵藪石記)는 보다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일연과 영잠의 기록은 조금 다른 부분이 발견되기도 한다.

영잠에 따르면 스승과 작별한 진표가 ‘변산 불사의방’에 들어온 것은 그의 나이 27세(760년)다. 당시 진표는 쌀 20말을 쪄서 말려 들어와 하루에 쌀 5홉을 양식으로 삼았다. 그 가운데 한 홉은 기르던 쥐의 몫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진표율사는 미륵상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했지만 3년이 되어도 얻지 못했다. 그러자 이때부터 진표가 도전한 구법이 바로 불가의 독특한 수행법 가운데 하나인 망신참법(亡身懺法:육체에 고통을 가해 계율을 범한 죄를 참회하는 수행법)이었다.

 

쇠말뚝이 박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반원형과 사각형의 흔적

 

  

“계(戒)를 구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서 참회하는도다”

진표의 망신참법은 21일 동안 지속됐다고 한다. 이에 대한 영잠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수기를 얻지 못한 진표가 발분하여 바위 아래에 몸을 던지니, 갑자기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들어 돌 위에 올려 놓았다. 율사는 다시 지원(志願)을 내어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도(修道)하여 돌로 몸을 두드리면서 참회하니, 3일 만에 손과 팔뚝이 부러져 땅에 떨어진다. 7일이 되던 날 밤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면서 와서 그를 도와 주니 손과 팔뚝이 전과 같이 되었다. 보살이 그에게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주니 율사는 그 영응(靈應)에 감동하여 더욱더 정진(精進)했다. 21일이 다 차니 곧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들이 오는 모양을 볼 수 있었다. 이에 자장보살과 미륵보살의 앞에 나타나니 미륵보살이 율사의 이마를 만지면서 말했다. “잘하는도다. 대장부여! 이와 같이 계(戒)를 구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서 참회하는도다.” 지장이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彌勒)이 또 목간자(木簡子)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아홉째 간자, 또 하나에는 여덟째 간자라고 씌어 있었다. 미륵보살이 율사에게 말한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니, 이것은 곧 시(始)와 본(本)의 두 각(覺)을 이르는 것이다. 또 아홉번째 간자는 법(法)이고, 여덟 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니, 이것으로써 마땅히 과보(果報)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현세(現世)의 육신(肉身)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이후에 도솔천(兜率天)에 가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 두 보살은 곧 숨었다. 이 때가 임인(壬寅; 762)년 4월 27일이었다.”

뒷쪽으로 보이는 울금바위

 


다시 부사의방장으로 돌아와보자.

두루 명산을 다니며 구법의 길을 걸었던 진표가 부득불 변산에서도 가장 높은 이곳 절벽에 수행의 터를 잡은 이유는 무얼까? 부사의방장은 그 터가 폭 1.5m 길이 7m가량으로 절벽 중간에 걸친 비좁은 공간이며 어른 한명이 앉거나 누우면 더 이상 몸을 가누기 힘든 형국으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망신참법의 진표에게는 몸을 아래로 쉽게 떨어뜨릴 수도 있고 주변 바위에 돌에 몸을 부딪히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만큼의 적지를 찾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망신참법의 적지로서 부사의방장을 조금 더 나아가 보면, 그 앞에 펼쳐지는 시야도 예사롭지 않다. 서쪽으로는 바다가, 앞에는 산이, 동쪽으로는 산너머 들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산, 들, 바다를 우주의 삼라만상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하지만 불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던 진표에게는 속욕에 물든 속세를 떠올리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한편 김형주 선생은 부사의방장에 대해 “결국 핍박받은 민초들이 따르던 미륵불교의 발원지”라며 “진표가 이곳에서 미륵에게 간자를 받은 뒤 미륵신앙은 금산사, 법주사, 낙산사를 통해 전파됐다”고 설명했다.

인간들이 저지른 온갖 죄의 상징으로 ‘육체’를 의미하는 불가의 전제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혹은 진표의 망신참법의 의미에 대한 이해 여하와 무관하게, 이미 현대사회의 인간의 몸은 스트레스와 비만에 찌들어 망가질대로 망가진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진표의 부사의방장을 우리는 어디에선가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글=서복원기자 사진=박종규 시민기자

 

 

진표율사와 부사의방장


  변산 부사의방장에서 미륵불 친견

  통일 신라 경덕왕(765~780) 때의 고승 진표율사(眞表律師:? ~ ?)는 변산 부사의방장에서 득도하여 미륵불과 지장보살을 친견한 후 많은 중생들에게 불법을 전하였으며 미륵불의 강림을 예언하고 많은 기행 이적을 남겼다. 또한 통일신라의 오교구산(五敎九山) 가운데 구산의 하나인 모악산에서 법상종(法相宗)을 열어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하였다.


  그의 출가 동기는 매우 독특하다. 11세 되던 해에 동네 아이들과 산에 놀러가다가 개구리를 잡아 꿰미에 꿰어 물 속에 담가두고는 노는 데 정신이 팔려 그만 잊어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다시 그 자리에 가서 보니 지난 해 잡아두었던 개구리들이 죽지 않고 울고 있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진표는 그날부터 생명의 본질 및 인생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12세 되던 해 부모의 허락을 얻고 출가하였다. 다음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을 토대로 정리한 일대기이다.

진표율사는 전주 벽골군 도나산촌 대정리(壁骨郡 都那山村 大井里, 현재의 김제군 만경면 대정리)사람이다. 12세에 출가할 뜻을 갖자 아버지가 허락하여 율사는 근처에 있는 금산사(金山寺)를 찾아가서 불심이 깊은 숭제법사(崇濟法師)를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불도를 닦기 시작했다. 스승인 숭제법사로부터 진표(眞表)라는 법명(法名)을 받았으며 사미계법을 배웠다. 스승은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과 또한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이라는 책 2권을 주며 말하기를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 지장 두 보살 앞에서 지성으로 참회하여 친히 계법을 받아서 세상에 펴라'고 당부하였다. 점찰계법이란 점을 쳐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선악업보를 관찰하고 참회와 수행을 통해 성불로 이끄는 계법이다.


  율사는 가르침을 받고 물러나와 두루 명산을 돌아다녔다. 어느덧 율사의 나이 27세가 되니 돌아다니기를 중단하고 상원(上元) 원년 경자에 쌀 스무 말을 쪄서 말려 양식을 만들어 보안현(保安縣 : 현재의 부안) 변산에 있는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하루의 식량을 다섯 홉으로 정하고 그 중의 한 홉은 다람쥐를 먹였다.


 

변산의 최고봉(509m0인 의상봉. 동쪽으로 암벽이 병풍처럼 둘렀는데 부사의방장은 절벽 중간쯤에 있었다. 이곳 주민들은 다람쥐절터라고 불러왔다. 사진은 노적리에서 바라본 의상봉. 옥토망월형의 변산 최고의 명당이라 한다.

 

 

  율사가 미륵상 앞에서 정성을 들여 수도하며 계법을 구했으나 3년이 되어도 수기(授記)를 얻을 수 없었다. 이에 실망을 금치 못하여 스스로 죽을 것을 결심하고 근처의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율사가 땅에 떨어지려는 찰나 청의동자가 홀연히 나타나 그를 가볍게 받아서 다시 절벽 위에 올려놓고 사라져 버렸다. 이에 큰 용기를 얻은 율사는 삼칠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행하였다. 망신참법(亡身懺法 : 온 몸을 돌로 찧으며 수행하는 방법)의 수행 3일 만에 온몸의 살집이 터져 피가 흐르며 뼈가 허옇게 드러났다. 죽음과 같은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율사는 수도에 더욱 정진하였다. 7일째 되던 날 만신창이가 된 율사 앞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현신(現身)하여 피투성이가 된 율사의 손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가호(加護)하였다. 손과 팔뚝이 전처럼 되고 보살은 가사와 바리때를 주었다.


  율사는 용기백배하여 또 한번 힘차게 수도에 몰입하였다. 내정한 21일째 되는 날 천안(天眼)이 환하게 열려 도솔천의 무리가 와서 예를 드리는 모습을 보았다. 이어 지장보살이 앞에 나타나 이마를 어루만지며 “장하도다. 대장부여! 계(戒)를 구하기 위하여 이같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지성으로 참회하는구나” 하고 말하면서 계본(戒本 : 불제자들이 지켜야 할 것을 적어놓은 글)을 주었다.

 

12세의 아린 나이로 입문하여 11년만에 부안 변산의 불사의암(不思議庵)에서 삼업(三業/身業, 口業, 意業)을 닦고 망신참(亡身懺)으로써 戒(계)를 얻고 지장보살로부터 정계(淨戒)를 받았으나 그 뜻이 자씨(慈氏/彌勒菩薩) 였으므로 영산사(靈山寺)로 자리를 옮겨 부지런히 정진하였다. 마침내 미륵보살이 감응하여 나타나 점찰경(占察經) 두 권과 간자(簡子) 189개를 주며 이르되 "이 중의 제 8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妙計)를 비유한 것이요, 제 9간자는 더 얻는 구계(具戒)를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고 나머지는 모두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것인데 모든 번뇌를 비유한 것이다. 네가 이것으로 세상에 법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도구로 삼아라" 하였다.


  수도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와 금산사로 가는데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매 갑자기 용왕이 나와 옥가사(玉袈裟)를 바치고 팔만권속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하였다. 진표가 모악산 금산사로 가 있으면서 해마다 법좌를 열어 법시를 베푸니 그 교화가 사방에 두루 미쳤다. 율사는 금산사(金山寺)를 중창하기 위하여 중생들의 정재(淨財:자선이나 불상을 건립하는데 바치는 재물)를 얻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전국에서 모은 쇠로 미륵불상(彌勒佛像)을 주조(鑄造)하기 시작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결실을 보아 33척의 철조장육불(鐵造丈六佛)을 완성하게 되었다. 법사는 완성된 불상을 공사에 착수한 지 3년만에 금당(金堂)에 봉안(奉安)하였다. 율사는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는데 금산사에서 소원을 빌면 묘하게도 성취되는 일이 많아서 이것이 널리 알려지자 전국에서 수많은 불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경덕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맞이하여 보살계를 받고, 祖 77,000석을 주었으며, 왕의 외척도 함께 계품을 받고 絹(견) 500端과 황금 50량을 시주하니 모두 받아 제산사(諸山寺)에 나누어 주어 널리 불사(佛事)를 하였다.


  율사는 금산사를 떠나서 새로운 절을 세우기 위하여 명소를 찾으려고 속리산(俗離山)으로 향하게 되었다. 가다가 길에서 소수레를 타고 오는 이를 만났는데 그 소들이 율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수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율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이 소들은 화상을 보고 웁니까? 화상은 어디서 오십니까?" 하니 율사가 대답하기를 "나는 금산사의 진표라는 중이오. 나는 일찍이 변산의 부사의방에 들어가 미륵과 지장 두 보살 앞에서 계법을 받고 절을 창건하여 길이 수도할 곳을 찾는 중이오. 이 소들이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매우 현명하여 내가 계법 받은 것을 알고 법을 중히 여기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이오." 하였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짐승도 이렇듯 신심이 있는데 우리가 사람이 되어 신심이 없겠는가."하고서는 곧 스스로 낫을 들어 두발을 잘랐다. 율사가 다시 자비심으로 그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계를 주었다. '속리산'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속리산에 도착하여 길상초(吉祥草)가 수북이 난 동굴 옆에서 잠시 머문 후 다시 금강산으로 발걸음을 옮겨 강릉으로, 다시 강릉을 지나 금강산으로 가면서 중생을 교화했다. 금강산에 도착한 율사는 고성군(高城郡)에 위치한 금강산(金剛山)에 발연사(鉢淵寺)를 짓고는 7년 동안 머물면서 불법을 전하기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에 명주 지방에서 심한 흉년이 들어서 그곳 주민들은 나무 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해 나가는 처지였다. 율사는 이것을 안타깝게 여겨 명주해변에 다시 가서 불공을 올리고, 동해바다를 향해서 계법(戒法)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바다 속에서 수많은 물고기떼와 자라들이 해변가에 올라오니 그 양이 작은 동산을 이룰 정도였다. 그리하여 명주 지방의 주민들은 이것들은 식량으로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의 사람들의 쌀과 맞바꾸어 흉년을 무사히 넘기게 되었다 한다.


  율사가 발연사에서 나와 다시 부사의방에 이르렀다가 고향 집에 가서 아버지를 뵙고 간혹 진문대덕방(眞에門大德房)에 가 머물렀다. 어느 날 율사에게 영심과 그의 두 명의 친구가 함께 찾아와 계법을 전수해 주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이에 율사는, 그들의 불법을 얻으려는 간절한 마음에 감동을 하여 스승인 숭제법사에게 받은 두 권의 책과 가사와 바리때를 그들에게 주고는 자신의 법통을 계승시켰다. 율사는 그들에게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자라는 옆에 동굴 근처를 찾아서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불법을 널리 전하도록 하여라”고 영심 등이 해야 할 일을 일러 주었다. 그 길로 대덕영심 일행은 율사에게서 책과 가사와 바리때를 공손히 받아가지고 율사가 가르쳐 준 곳에 절을 지어 길상초가 있는 곳이라 하여 길상사(吉祥寺)라 절명을 작성하고는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다.


  율사는 만년에 고향에 두고 온 아버지가 그리워져서 고향으로 가서 금강산 발연사로 부친을 모시고 와서 돌아가실 때까지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율사는 자신의 죽을 날을 알고는 절 동쪽에 있는 거암(巨岩)위에 올라가서 마지막으로 기도를 한 후에 조용히 입적(入寂)을 하였다. 율사가 입적하자 그 제자들은 율사의 육신을 그대로 모셔두고 공양을 올리다가 세월이 흘러 뼈만 남게 되자 그것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그런데 율사의 무덤에서는 소나무가 솟아 났는데, 수명이 다해 죽으면 다시 그 뿌리에서 다른 소나무가 자라나 계속하여 소나무가 생겨났다.
  진표에게서 법을 얻은 영수(領袖)로는 영심(大德永深)과 보종(寶宗), 진선(眞善), 석충(釋忠), 진해(鎭海), 신방(新房), 체진(體珍) 등이 있는데 모두 산문의 조사가 되었다.

 

  이러한 진표의 행적에 대해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백제 유민의 아픔과 한을 미래불인 미륵 하생을 염원하는 미륵신앙을 통해 수용하여 반신라적인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 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백제 무왕 때 지은 익산의 미륵사는 미륵사상의 중심 사찰이었다. 진표는 이 전통을 이어받아 경주 귀족층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던 학문불교인 법상종의 미륵신앙과는 달리 옛 백제 땅에서 점찰계법을 통해 대중 교화에 노력하였으며, 이는 현실의 고뇌를 해결하고 이상사회로 이끌 구세주의 출현을 기대하는 신앙으로 발전하여 훗날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출현에까지 그 맥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둘째, 미륵신앙을 통한 백제유민들의 저항운동이 심각하였기 때문에 백제유민인 진표율사를 앞세워 백제유민들을 신앙적으로 회유하려는 했다는 것이다. 무명의 사찰이었던 모악산 금산사에 신라의 고승법사인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출현하였다. 숭제법사는 즉 唐(당)에 유학하여 선도삼장으로부터 수업한 후 오대산에  문수보살로 부터 현수오계(現受五戒)한 고승(高僧)이었다. 모악산 금산사는 숭제법사와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보잘 것 없는 소규모의 사찰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21년 임인(壬寅)에 이르러 "진표율사가 미륵가래의 마정수기(摩頂授記)를 蒙(몽)한 후 사지개창(寺之開創)에 착수...."라고 한 <금산사지>의 기록은 통일신라가 오교구산(五敎九山)을 개설하면서 정책적으로 모악산 금산사에 법상종을 개종하여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했다고 보는 것이다.

 

신라는 나아가 백제유민들 중에서 미륵신앙의 지도자를 발굴 육성하여 자기들의 의도대로 이끌어 가기 위해 12세의 어린 동자를 문하에 입교(入敎)시켜 강도 높은 고도의 수련과 함께 신격화(神格化)시킴으로써 백제유민인 진표율사를 개종조(開宗租)로 한 신라체제의 종교정책을 외형상 완성시켰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통일신라의 왕실조정과 통일신라의 고승법사인 숭제법사, 그리고 백제유민 출신인 진표율사와의 삼각관계로 이루어지는 차원 높은 종교정책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수도를 마치고 금산사를 세우려고 산에서 내려와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매 갑자기 용왕이 나와 옥가사(玉袈裟)를 바치고 팔만권속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하여 금산사로 간다. 경덕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맞이하여 보살계를 받고, 祖 77,000석을 주었으며, 왕의 외척도 함께 계품을 받고 絹(견) 500端과 황금 50량을 시주하니 모두 받아 제산사(諸山寺)에 나누어 주어 널리 불사(佛事)를 하였다."라고 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입문한지 11년만에 23세의 젊은 나이에 득도한 백제의 유민출신인 진표율사가 경덕왕에게 계를 주고 엄청난 물량을 시주받았다는 것인데 이는 정책적인 배려가 아니고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진표율사에 대한 이러한 정치적 평가는 무리이며 한국불교사 연구에 있어서 종교현상을 종교현상 그대로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견해이다. 진표가 백제인이었다는 <송고승전>의 기록만으로 진표의 사상과 활동을 정치사회사적 관점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며,‘너는 이 몸을 버리고 대국왕의 몸을 받아 후에 도솔천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는 미륵보살의 수기를 이상국가의 건설을 꿈꾼 것으로 해석한 것과 신라 경덕왕이 진표를 궁으로 초청해 보살계를 받았다는 기록에 대해서 경덕왕과 진표가 밀착했다거나 경덕왕이 진표의 신앙운동을 회유하려 한 것이라는 견해는 종교적인 내용의 기록을 반대로 해석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또한 진표의 미륵신앙을 통해 백제미륵신앙의 성격을 규명해 보려는 시도나 신라말의 사회변혁과 관련지어 이해하는 것은 진표가 백제불교 전통의 부활이나 백제의 부흥을 꿈꾼 반신라적인 인물이라는 가정하에 이루어진 이해이며, 진표의 점찰교법이 영심을 거쳐 심지에게 계승됐다는 기록을 ‘진표의 미륵신앙이 신라의 변방에서 그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억제하려는 노력을 표시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마에 피가 흘러내릴 정도로 참회 수행했던 심지의 종교적 열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해석만을 한 것이기 때문에 수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규보가 가본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

 

  부사의방장은 변산의 최고봉인 의상봉 동쪽 절벽 중간에 있었던 암자이다. 의상봉 동쪽은 기암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으로, 절벽 아래로는 무시무시한 골짜기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채로 내려오는 변산의 가장 깊은 오지이다. 절벽 위에서 백 척이 넘는 나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네 평쯤 되는 반석이 있는데 이곳에 암자를 짓고 사방에 쇠말뚝을 박아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도록 얽어매었다 한다. 이 곳을 다람쥐 절터라고도 하는데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암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신라의 중 진표(眞表)가 우거하던 곳으로서 백 척 높이의 나무사다리가 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면 방장에 닿을 수 있는데 그 아래는 측량할 수 없는 골짜기이다. 쇠줄로 그 집을 매어 바위에 못질을 하였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바다의 용이 한 것이라 한다.

 

  변산의 벌목 책임자로 온 이규보는 부사의방장을 찾아가는 험로와 진표율사의 진용에 참배한 일을 그의 일기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른바 부사의방장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 구경하여 보니, 그 높고 험함이 원효의 방장보다 만 배나 더했다. 높이가 백자쯤 되는 나무 사다리가 바로 절벽에 의지해 있는데 삼면은 다 헤아릴 수 없는 구렁이라, 몸을 돌이켜 층층을 헤아리며 내려가야 방장에 이를 수 있으니, 한 발만 실수하면 다시 어쩔 수가 없다. 내가 보통 때에도 한 대(臺)나 누(樓)에 오를 때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아도 신경이 약한 탓인지 머리가 아찔하여 밑을 내려다 볼 수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서는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서 들어가기도 전에 머리가 빙빙 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 승적(勝跡)을 익히 들었다가 지금 왔는데, 만일 그 방장에 들어가서 진표대사의 상에게 예(禮)하지 못한다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이제 기다시피 내려가니, 발은 아직 사다리에 있으나 몸은 하마 굴러 떨어지는 듯 하면서 마침내 들어갔다.

 

  이규보가 갔을 때 이곳에는 진표의 상이 있었다. 그의 일기 중에 "부싯돌을 쳐서 불을 일으켜 향을 피우고 율사의 진용(眞容)께 예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부사의방장은 조선 중기까지 승려들의 참회 기도처로 이용되다 폐허가 되었다 한다. 이규보는 부사의방장을 방문한 소감을 다음 칠언율시로 남겼다.

 

  蚣矗危梯脚低長  무지개 같은 사다리 다리 밑이 길어서
  回身直下萬尋强  몸을 돌려 곧장 내리니 만 길이 넘네
  至人已化今無迹  도인은 이미 가고 자취마저 없는데
  古屋誰扶尙不疆  옛집은 누가 붙들었기에 아직도 쓰러지지 않나
  丈六定從何處現  일장육척의 불상은 어느 곳으로 좇아 나타날는지
  大千猶可筒中藏  대천의 세계는 그 가운데 감추어져 있네
  完山吏隱忘機客  완산의 벼슬아치 숨어들어 나그네임을 잊으니
  洗手來焚一辨香  손씻고 들어와 한 조각 향을 사르네

 

이규보가 부사의방장을 천신만고 끝에 방문하고 오자, 그를 수행했던 현령은 그를 위해 변산의 최고봉인 의상봉에 있는 망해대(望海臺)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선계(仙界)인지 불계(佛界)인지 모를 비인간(非人間)으로 흠뻑 빠져들었다.

 

  돌아오려 할 때 현령이 한 산봉우리에서 술자리를 베풀어 말하기를, "이곳이 망해대입니다. 제가 공을 위로하고자 먼저 사람을 시켜 좌석을 베풀고 기다리니 잠깐 쉬어 갑소서." 하였다. 내가 올라가 바라보니 큰 바다에 둘려 있는데 산과의 거리가 백여 보에 지나지 않는다. 한 잔 술에 한 수의 시를 읊으니, 정녕 세상의 티끌 생각이 없어지고 속세를 벗어나서 훨훨 육합(六合) 밖을 나는 듯하다. 머리를 들어 한 번 바라보니 바로 뭇 신선들을 부를 듯도 하다. 자리를 함께 한 십여 명이 다 취하였고, 내 선군(先君)의 기일이므로 관현(管絃), 가취(歌吹)만이 없을 뿐이었다.

 

  

 

이규보가 무시무시한 골짜기라 했던 골짜기는 구시골이라 부른다. 말 구유처럼 움푹 들어간 모양이어서 생긴 이름일 것이다. 이 구시골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폭포가 3개 있다. 높이는 다 같이 10여미터쯤 된다.  상류에 있는 것부터 차례로 구시1폭, 구시2폭, 구시3폭으로 불렀다.

 

 

변산의 유래

 

노령산맥이 서해를 향해 달리다 한가닥 던져놓은 산뭉치

 변산반도는 태고(太古)에 한반도(韓半島) 남, 서쪽을 내려 뻗고 있는 노령산맥(蘆嶺山脈)이 어쩌다가 저 넓은 호남평야(胡南平野)를 훌쩍 뛰어 넘어 서해를 향해 한 뭉치 던져 놓은 기묘한 형국으로 남, 서, 북은 모두 바다로 둘려 쌓여 있으며, 깊고 울창한 삼림(森林),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수많은 절경(絶景)과 명승고적(名勝古蹟)들이며, 또한 연연히 이어지는 가지가지의 전설(傳說)과 역사의 향기를 간직한 채 신선(神仙)들이나 살 만한 월태화용(月態花容)의 기령(氣嶺)만으로도 부족하였던지 여기저기 바다에 던져 놓은 점점(點點)한 섬(島)들과 간간이 펼쳐 놓은 은빛 모래 해수욕장, 날마다 연출되는 서해 바다의 독특한 황혼마저 아름다운 변산도원(邊山桃園)을 신령한 조물주는 참으로 마음먹고 만들어 낸 특출한 창작품이라 찬(燦)하지 않을 수 없다.

종종 기회가 있어 이름난 다른 고장의 명승지(名勝地)나 공원들을 기대를 가지고 돌아다녀 보면 산이면 산, 바다면 바다 중 어느 한쪽의 관광꺼리나, 아니면 인위적으로 꾸미고 만들고 보태어 상업적 효용성의 볼거리에 식상한 경험에 비하면, 이곳 변산은 산(山)의 기경과 들(野)의 풍만함, 석양녁 황혼 빛에 물든 찬연한 바다(海)의 웅장한 비경까지를 겸하였음에도 차마 앞서지 않는 겸양의 함조롬으로 조화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해륙야(海陸野)의 종합공원으로 어울려진 명지의 승지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산반도는 부안군의 서북(西北)부에 위치한 <변산면, 진서면, 보안면, 상서면, 하서면>등 5개면에 걸친 산악 일대와 인근 해안선을 포괄하고 있었는데 새로이 조성되는 새만금방조제공사로 인하여 그 좋은 해안선(海岸線) 일부를 잃게 됨은 참으로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변산의 유래

「삼국유사」에 '백제지유변산고운변한'(百濟地有卞山故云卞韓)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뜻을 풀어 보면 백제 땅에 변산(卞山)이라는 산이 있어 변한(卞韓)이라 하였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면 부안의 변산(邊山)은 원래 변산(卞山)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삼한 중의 하나인 변한(卞韓)의 이름은 이 변산(卞山)으로 말미암아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지금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위치한 개암사(開岩寺) 자리가 이 변한(卞韓)의 궁궐터로 변한이란 부족국이
백제(百濟)에 통합되고 난 후 궁궐을 개암사 절(寺)로 바꿨다는 전설이 전한다.

개암사지「開岩寺誌」에서의 변산은 마한(馬韓)의 효왕(孝王) 28년에 변한 주(卞韓主)가 진한, 마한(馬韓)의 난(亂)을 피하여 이곳 변산에 우(禹)장군과 진(陳)장군을 보내어 도성(주류산성 추정)을 쌓게 하고 마한 원왕(元王) 20년 임오(任午)년에 변한의 주(主)가 죽고, 다음 부장 마연(馬延)이 주(主)가 되어 변산으로 이도(移都) 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기록된 것을 고찰해 보면 변산은 보안현(縣)에 있으며 지금 현과의 거리는 서쪽으로 25리 인데 능가산(愣伽山)으로 불리고 영주산(瀛洲山)이라고도 하며 봉래산(蓬萊山) 혹은 변산(卞山)이라고 하는데 말(語)이 떠돌아다니다가 언제부터 변산(邊山)으로 되었다 한다. 변한(卞韓)의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라고 하나 그러한지? 아닌지는 알지 못한다.

이처럼 역사 깊은 변산반도가 아침 연화(蓮花)같은 운무(雲霧)에 쌓인  봉우리들이 백여리를 빙 둘러 높고, 큰 산이 첩첩이 쌓이고 바위와 골짜기가 깊숙하여 나라의 궁실(宮室)과 배(船)의 재목은 고려 시대부터 모두 여기에서 얻어갔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전하는 말에는 ‘호랑이와 짐승들이 사람을 보면 곧 피하여 주었으므로 밤길이 막히지 않은 곳이다.’ 라고 하였다.

고려(元宗)시대 변산에 벌목사(伐木使)로 다녀간 이규보(李奎報)의 기록을 빌리면 ‘변산은 나라 제목의 부고(府庫)이다. 소(沼)를 가릴 만한 큰 나무와 찌를 듯한 나무줄기가 언제나 다하지 않고 층층한 산봉우리와 겹,겹한 나무들이 쓰러지고 굽어지고 퍼져서 그 머리와 끝이 옆구리와 옆구리에 닿은 곳이 몇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으며 산 아래는 푸른 바다로 어울러져 가히 명산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중환(李重換1690~1750)의 택리지「擇里志」에 기록된 ‘변산은 노령 산맥 한 줄기가 서쪽으로 부안에 와서 서해 바다를 밀치며 자리한 곳이 변산이며, 남, 서, 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고 산 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헤아릴 수 없는 골짜기와 깎아지른 듯한 산꼭대기며 평탄한 땅이나 비스듬한 벼랑을 막론하고 모두 낙낙 장송 큰 소나무가 하늘에 솟아 해를 가리었고 골 밖 백성들은 모두 농사를 짓고 소금을 굽고 또는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들이며, 산중에는 기름진 땅이 많으며 주민들이 산에 오르면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것을 업(業)으로 하므로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값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되며 어염시초(魚鹽柴草)가 풍부하다. 다만 샘물에 장기(瘴氣)가 있는 것이 유감이며 여러 산중에 큰 산(山)은 마을이 될 만도 하고 작은 것은 고인(高人)과 은사(隱士)가 지낼 만한 곳이다.’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그때 당시의 부안 지세(地勢)와 백성들의 삶과 민심(民心)까지를 잘 표현하여 기록한 듯 하다.

  조선시대 풍수학에 조예가 깊어 전국 명산을 찾아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긴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는 조선의 십승지지(十勝之地)론에서 이곳 변산을 네 번째의 십승지(十勝地)로 지목한 바 있으며, 「한국의 풍수지리」의 저작자인 최창조(崔昌曺) 박사는 이곳 변산의 굴바위(호암굴虎菴屈)를 십승지(十勝地)로 지적한 바 있다.

/김길중

 

 

 

 
정감록에 기록된 10곳의 은신처 십승지(十勝地)는 어디?
십승지(十勝地)란, 전쟁이나 천재가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열 군데의 땅이라는 뜻이다. 원래 승지(勝地)란 경치가 좋은 곳 …
선비의 발자국 소리를 따라 걷는다…소백산 자락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