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이덕일 사랑] 국왕의 당적(黨籍)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31. 15:34

[이덕일 사랑] 국왕의 당적(黨籍)

 

당적을 지녔던 최초의 임금은 북인(北人) 임금 광해군일 것이다. 그와 북인은 임란 극복에 많은 공을 세웠지만 소수 당파의 정권 독점은 심한 반발을 낳았다. 정권에서 소외된 서인과 남인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축출했다. 광해군이 서인 영수 이항복(李恒福), 남인 영수 이원익(李元翼) 등에게 정승 자리를 주고 행정 부처인 육조(六曹)를 북인에 주는 식의 유연한 정국 운용을 했다면 쫓겨나지 않았을 개연성이 높다.

당적을 자주 바꾼 임금은 숙종이다. 그는 즉위 초 남인을 지지했다가 재위 6년(1680)에는 서인에 정권을 주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을 단행했다. 재위 15년(1689)에는 남인 장희빈의 왕자 생산을 계기로 남인에 정권을 다시 주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단행했다. 숙종은 재위 20년(1694)에는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 정권을 세우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릴 때는 노론을 지지했다. 기사환국 때 효종의 외손자 홍치상(洪致祥) 등 18명이 사형당한 것처럼 숙종이 한 번 당파를 바꿀 때마다 많은 비극이 발생했다.

국왕 당적 보유의 비극이 극명하게 드러난 이가 영조이다. 노론의 도움으로 즉위한 영조는 소론이 경종 독살 혐의를 제기하자 소론도 등용하는 탕평책으로 정국 파탄을 막았다. 그러나 재위 31년(1755) 소론 강경파가 자신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인 나주(羅州) 객사(客舍)사건이 발생하자 탕평책을 붕괴시키고 소론을 내쫓았다. 결과는 재위 38년(1762) 소론 성향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비극으로 나타났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부친을 죽인 노론과 타협하는 통합의 정치를 실천하며 미래를 지향했다. 그 결과 정조는 조선 후기에서 가장 성공한 임금이 됐다.

우리 국민들은 특정 당적을 지닌 대통령에게 표를 주지만 일단 당선이 되면 소속 당파를 초월한 국정 운영을 원하는 성향이 강하다. 국가원수가 당파적 시각을 가질 때의 문제는 왕조시대에 국한되지 않음을 지난 4년 임기는 잘 보여줬다. 탈당한 노무현 대통령의 남은 과제 역시 정조처럼 당파를 초월하는 통합의 정치로 미래를 지향하는 데 있을 것이다. 입력 : 2007.03.05 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