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세종 vs. 정조 리더십 비교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31. 15:37

“다 함께 가자”(세종) “나를 따르라”(정조) [조인스]

조직혁신 어떻게 했나
신료 집단 운용에서 확연한 차이 … 성과는 세종이 훨씬 위대
세종 vs. 정조 리더십 비교 ②


이코노미스트

아무리 훌륭한 비전을 가진 리더라 해도 혼자서 그것을 이룰 수는 없다. 조직이 필요하다. 리더가 자신의 손발과 같은 조직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조직의 생사가 달라진다. 리더 자신은 물론 조직의 미래가 달라진다. 500년 조선 왕조의 두 성군인 세종과 정조는 조직을 운용하는 방식에서도 달랐다.

태종 사후 5∼6년 만에 권한위임과 새로운 혁신 프로젝트를 통해 권위를 확보하기 시작한 세종은 해가 더해 갈수록 조직을 안정화시키고 자신이 내세운 비전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갔다. 세종의 ‘혁신 프로젝트’는 속속 눈부신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세종 반발 불러온 측근정치

세종 16년(1434년)에 장영실을 비롯한 기술관료들은 앙부일구·자격루·혼천의를 잇달아 완성했고, 바로 전해에는 고유의 전래 의학과 중국 의학을 집대성한 ‘향약집성방’을 완결했다. 국방에서는 1∼2년 전 4군과 6진의 개척이라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크고 화려한 군사업적으로 남을 성과를 맺고 있었다. 온 조정이 활기로 넘쳐났다.

하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이다. 어느 시대, 어느 정권에나 뒷공론이 없을 수 없다. 세종 16년 오늘날 검찰 역할을 맡았던 사헌부에서는 두 젊은 감찰어사가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당시 사헌부는 근무시간에도 술판을 종종 벌일 정도로 유난히 술을 즐기는 관습이 있었다. 그들의 불만은 새로 난 인사였다.

“주상의 총애를 받으니 보이는 게 없는 게지.”

“우리가 상소를 올려 봤자 도중에 안숭선이 읽어 보고 마음에 드는 것만 올린다네. 참 가관이야.”

안숭선은 세종이 뽑은 18명의 도승지 중에서도 임기가 가장 길었던(4년 1개월), 세종의 측근 중 측근이었다. 그러나 “성격이 급해 쉽게 성을 내고, 동료들에게 말을 가려서 하지 않는다”는 실록의 평가처럼 결코 원만한 성품은 못 되었던 듯싶다.

 

▶조직은 말이 많게 마련이다. 세종은 측근정치에 불평불만이 높아지자 각 조직에 권한을 배분, 참여기회를 대폭 늘려 뒷공론을 없앴다. 사진은 KBS ‘대왕세종’의 한 장면.

게다가 그는 사실상 인사를 총괄했기 때문에 한편으로 뇌물과 청탁을 받는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왕에게 올리는 상소를 일단 검토한 후 추려서 올렸기 때문에 왕의 눈과 귀를 가린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문제의 시작은 안숭선이 아닌 세종 자신에게 있었다. 인재를 무척 아껴 능력을 확인하면 끝까지 밀어주었던 특유의 인사 스타일, 왕의 비서실 격인 승정원 권한을 강화한 데 따른 잡음이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측근정치에 대한 반발이었다.

세종은 자신이 추진하는 여러 프로젝트를 챙기느라 바빴기 때문에 일반 업무 처리에는 최대한 시간을 절약해야 했다. 특히 인사 문제는 믿을 수 있는 측근과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했다.

승정원의 역할을 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승정원에 올라오는 상소를 일단 한 번 거르도록 한 것도 불가피했다. 어전회의에서는 프로젝트 진행 문제가 주로 논의됐기에 소소한 정치적 논쟁거리가 쉽게 끼어들지 못했다.

하지만 신하들은 개인적인 상소를 통해 문제를 계속 지적했다. 온갖 상소가 세종의 집무 탁자에 수북이 쌓였다.

상소를 승정원을 통하게끔 한 것은 왕의 정치적 부담을 승지들에게 분담케 하려는 의미도 있었다. 상소가 묵살되더라도 “왕의 눈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왕의 눈을 가리려는 승정원의 간신배들 때문에”라고 여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세종은 실제로 상소를 하나하나 읽고 있었다. 그리고 각종 채널을 통해 신하들 사이의 여론을 항상 파악하고 있었다. 안숭선에 대한 불만도 알고 있었다.

리더는 이런 상황에서 현명한 결정을 해야 한다. 보통 이럴 때면 안숭선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거나 안숭선을 비방하는 신하들을 나무랄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반대로 행동했다.

정조 홍국영 카드 버리다

정조 또한 측근을 통한 조직 운영에 커다란 반발을 받았던 적이 있다. 즉위한 지 3년(1779년)째 되던 어느 날 탕약을 들고 온 최측근 홍국영에게 정조가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자네, 요즘 그리 안 좋은 소리가 들리던데.”

“네…넷? 송구하오나, 무, 무슨 말씀이시온지….”

홍국영은 뜻밖의 말에 화살이라도 맞은 듯 허리를 냉큼 굽히며, 말을 더듬었다. 그는 오늘만 벌써 네 번째 정조와 독대하고 있었다.

도승지로서 오전 오후에 두 번, 그리고 임금의 의료를 책임지는 약방의 제조(提調·최고 책임자 바로 아래의 실무급 책임자)로서 아침저녁에 탕약을 올렸기 때문이다. 영의정이라 해도 조회 때 한 번 보는 정도가 고작이고, 독대의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들다.

“의녀들을 마치 첩처럼 끼고 산다는 말이 있어…. 그리고 원로대신들도 입궐할 때는 자네가 있는 숙위청부터 먼저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 한다며?”

“…와전된 것이옵니다. 아니, 모함이옵니다! 제가 약방 제조를 맡고 있으니 의녀들과 가까이 지내는 일이 많지 않겠사옵니까. 그러니 그런 뜬소문이 난 것이고, 전하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다 보니 기찰을 좀 엄중히 하는 것을 가지고 인사를 드리느니 뭐니 왜곡하는 것이지요. 저처럼 새파란 후배에게 어찌 높으신 대신들이 인사를 하겠습니까?”

“흠….”

사실 홍국영의 공식적 지위는 그렇게 높다고 할 수 없었다. 도승지로서 당상관 반열에는 들었으나, 직급으로나 연령(갓 서른)으로나 대신들과는 하늘과 땅 같은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온갖 요직을 겸임하고 있었다.

조세와 물가 조절, 구호 사업을 비롯해 사실상 국가재정의 중심기관이던 선혜청 제조, 외교 실무의 핵심이던 승문원 제조, 새로 설립한 인재들의 양성소인 규장각 제조 등은 물론이고, 훈련대장과 숙위대장을 비롯한 주요 군사 관련 직책까지 한 손에 거머쥐고 있었다. 공식 직급은 중하위였지만 실권은 영의정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는 정조의 조직 장악을 위한 변칙적 체제였다. 정조는 다수 세력인 노론의 견제를 받았고, 신료 집단 전체적으로는 비변사라는 체제에 압박을 받고 있었다. 비변사는 본래 임시기구였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상설화된 일종의 비상대책회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비변사는 삼정승과 육조판서, 군영대장들과 지방의 고위직들까지 아우르는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다. 군사권까지 있었기 때문에 여차하면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도 있어 왕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정조는 즉위한 그날부터 일부는 숙청하고 일부는 회유하는 식으로 권력기반을 구축하는 한편, 세손 시절부터 자신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했던 홍국영이 전체 조직을 장악하도록 하고, 자신은 하루에 몇 차례씩 이뤄지는 독대를 통해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는 식으로 왕권을 행사했다.

“억울하옵니다. 저의 일편단심을 믿어 주소서! 개혁을 흔들어 보려는 기득권 무리들의 날조에 현혹되지 마시옵소서!”

눈물을 쏟으며 간곡하게 외치는 홍국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조는 마침내 홍국영의 등을 쓰다듬으며,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의 충성을 어찌 모르겠나. 하늘이 무너져 내리던 때, 자네가 홀로 내 곁에 서서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치지 않았나. …하지만 충성심만이 전부는 아니야. 충성을 하되, 부시(婦寺)의 충성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부시란 궁궐의 잡일을 맡아 보는 남녀 하인을 말한다. 하지만 홍국영의 행동은 도를 넘어서게 된다. 특히 자신의 누이를 억지로 정조의 후궁(원빈)에 들여 화를 자초했다. 누이가 입궐 후 1년여 만에 의문사하자, “중전이 독살했을 것”이라며 중궁전 나인들을 심하게 문초하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아도 홍국영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세력은 이 일로 일제 공격을 했고 정조는 직위 3년(1779년) 9월 홍국영의 사직상소를 곧바로 수리해 버렸다. 홍국영은 간신히 목숨만 구해 시골로 쫓겨 갔고, 얼마 후 울분을 못 이겨 죽고 말았다. 그와 함께 홍국영을 통해 이뤄졌던 비정상적인 조직운영체제도 끝이 났다.

 

▶천재형이었던데다 세종에 비해 수많은 정적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던 정조는 강력한 카리스마적 통치를 하려 했다. 사진은 MBC ‘이산’의 한 장면.


세종 조선이라는 오페라 지휘하다

측근정치, 밀실정치에 대한 불만의 수위가 높아지자 세종은 이듬해인 직위 17년 2월 안숭선을 도승지에서 해직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몇 개월 뒤 세종은 의정부서사제라는 ‘정부 개혁’을 단행했다.

“육조에서는 맡은 직무를 의정부에 품의하고, 의정부에서는 가부를 의논하여 (왕에게) 아뢴 뒤에 (왕의) 분부를 받아 도로 육조로 돌려보내 시행하게 한다. 단 이조와 병조에서의 관리 제수, 병조에서 군사를 쓰는 것, 형조의 형결은 직접 (왕에게) 아뢰게 하고 사형수 형결은 의정부를 통하게 한다.”

의정부서사제란 의정부가 육조의 보고를 먼저 받고 대강의 사항을 정리한 다음 임금에게 최종 결재를 구하는 것으로, 건국 당시의 제도였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을 지향했던 태종은 의정부 정승들을 의사결정 라인에서 배제한 후 육조의 보고를 직접 받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대신들에게 일반 행정 권한을 크게 위임하기는 했으나 육조직계제라는 기본 틀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신하들의 불만에 따라 왕권의 일부를 의정부에 넘겨준 것인가? 그렇지는 않았다. 당초의 의정부서사제와는 달리 인사권과 병권(兵權) 등은 계속 직계제 형태로 유지했다. 또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론권을 강화해 국정에 대한 비판과 대안 제시를 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해를 넘긴 19년(1437년)에는 세자에게 상당 부분 재결권을 이양했으며, 도승지와 단독으로 인사문제를 심의하던 것을 여섯 승지가 모두 참여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사형수 형결을 의정부를 거치게 한 것은 원로대신의 뜻을 묻기 위함이었다.

결론적으로 세종은 후계자, 원로그룹, 중간간부, 비서실 등에 권한을 배분해 각자의 목소리를 두루 내게 했다. 권한을 늘려주고 참여 기회를 늘려 ‘잘나가는’ 사람들의 등 뒤에서 쑥덕공론할 여지를 없앤 것이다.

물론 권한을 배분해 조직을 탈중심화한다고 항상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무질서와 혼란이 빚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시끄러운 소음 대신 아름다운 화음이 가능했던 것은, 그 자신이 뚜렷한 비전과 달성 목표(문화국가 건설과 그를 위한 여러 문물제도의 정비)를 제시하며 전체적 조정자 역할을 완벽하게 담당했던 덕분이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런 지휘자 역할을 통해 세종은 조선의 신하들과 백성들의 대합창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정조 독창회용 새 강당을 짓다

정조는 세종과 다른 길을 걸었다. 홍국영을 최고의 자리에 끌어올렸다가 4년 만에 내친 정조. 그것이 과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 정조의 계산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홍국영을 실각시킨 정조는 새로운 구상을 실현해 나갔다.

그는 비변사라는 거대한 신권 체제를 정면으로 부수지도, 종전처럼 배후에서 무력화하지도 않았다. 대신 비변사를 실질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외곽에 건설했다. 규장각이었다.

규장각은 본래 왕의 개인 문서를 보관하는 미미한 기관에 불과했지만, 홍국영이 실각한 후 환골탈태했다. 규장각 관원들은 초급관료임에도 여러 예식에서 원로대신과 똑같은 예우를 받았고, 사헌부 감찰 대상에서도 제외되었으며,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도 있는 등 온갖 특권을 받았다.

게다가 정조가 초계문신(抄啓文臣)을 뽑고 그들과 함께 공부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초계문신이란 왕이 직접 시험을 보아 선발한 각 관청의 재능 있는 초급관료들로, 뽑히면 왕을 직접 대하며 가르침을 받는 ‘왕의 제자’들이었다.

정조는 이 과정을 통해 젊은 초계문신들을 확실한 자신의 숭배자로 키워나갔다. 이들이 장차 요직에 앉을 때 조정은 정조 한 사람만의 조정이 될 것이었다.

군사 부문에서는 장용영을 만들었다. 본래 왕의 호위를 맡은 장용위라는 소수 부대에서 출발한 장용영은 홍국영 실각 후 장용영으로 이름이 바뀌며 중요한 통치기구가 되었다.

정조 17년(1793년)에 이르면 장용영은 한양의 내영과 수원성의 외영으로 편제되고, 외영 인근에 둔전까지 갖춘 수만 병력을 포괄하게 된다. 비변사에 통합되어 있는 5군영을 대체할 정조의 친위 병력체제였던 것이다.

세종은 불협화음과 마주쳤을 때 조직의 개방도를 높이고 여러 목소리를 함께 아우름으로써 화음을 이루려 했다. 반면 정조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오직 그의 목소리에만 공명하는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려 했다.

하지만 성과는 세종보다 처졌던 것 같다. 기존 체제가 공고하게 유지된 상황에서 정조 개인의 카리스마와 특권에 힘입은 신진세력들이 쉽게 힘을 내기란 어려웠다. 노골적인 측근정치는 불평과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초계문신 중 일부가 가졌던 ‘이념적 과격성’, 즉 서학(西學)을 익힌다는 사실이 정치 문제로 부각되면서 신진세력들은 기를 펴지 못했다.

정조는 이런 상황에서 신하들의 문체가 경박하다, 도리에 어긋난다는 의 문제를 들춰내 기를 꺾었다. 또 숨가쁠 정도로 자리를 바꾸는 인사정책을 써서 신하들의 결집을 막으려 했다. 이조판서는 고작 2개월, 대사헌은 보름을 버틸까 말까 하는 정신 없는 인사이동이었다.

정조 자신만 말을 하고 조직의 다양한 목소리를 막아버리는 방법을 쓸수록, 보이지 않는 뒷자리에서의 공론은 더 크고 심각해졌다.

개인적인 능력 면에서는 세종보다 오히려 앞섰던 정조는 재위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이루었으나, 그것은 대부분 정조 혼자 힘으로 이루다시피 한 것들이었다. 세종처럼 여러 사람의 재주와 생각을 모아 이뤄낸 것은 적었다. 그래서인지 세종에 비해 근본적으로 혁신적인 업적도 많지 않았다.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정치학 박사)·『왕의 투쟁』 저자
belzebab@hanmail.net
출처-조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