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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03 : 삼도의 借史행위와 역사왜곡]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1:14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03 : 삼도의 借史행위와 역사왜곡]

 

 

[일본의 역사조작]
[2000년 10월22일 일본 마이니치신문 취재진이 촬영한 역사조작 현장] 

2000년 11월5일, 일본 역사학계는 자신들이 어떻게 역사를 조작해 왔는지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이같은 사실은 발굴 조사단장이며, 도호쿠 구석기문화 연구소 부이사장이기도 한, 후지무라 신이치(50)씨가 자신이 소장중이던 구석기 유물을 지난달 22일 새벽 유적지에서 혼자 구덩이를 파고 파묻는 장면을 마이니치 신문이 비디오로 촬영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세상에 폭로될 수 있었다. 역사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 해석하는 수준을 넘어 역사적 사실 자체를 조작하는, 범죄행위나 다름없는 그야말로 세상을 경악케 하는 `차원높은'사기술이었다. 역사날조의 현장은 일본의 구석기 문화를 70만년 전으로 끌어올린 미야기(宮城)현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지. 일본 고고학 발굴단은 10월말 이 유적지에서 70만년 석기 31점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견은 일본에 전기 구석기 문명이 존재했음을 증명함으로써 세계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본인도 조작사실을 시인했다. 후지무라는 지금까지 잇단 석기발굴로 일본 구석기 연대를 끌어올리면서 일본 고고학계에서 `신의 손'으로 불려온 인물. 그는 “작년 이전의 발굴품은 조작하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학계에서는 그가 발견한 상당수 유물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후지무라 단장은 지난 달 하순 이 유적에서 “약 60만년 전 원인의 건물터로 보이는 주혈적과 70만년 전 석기 등 31점을 발견했다”고 발표하는 등 지금까지 일본 구석기 유적 발굴에서는 독보적 존재였다.

 

그는 이번에 유물조작이 드러남에 따라 더 이상 숨길 수 없다고 판단한 탓인지 이에 앞서 올해 전기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알려진 홋카이도 소신후도자카 유적의 석기도 자신이 조작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이에 따라 일본 고교 교과서에도 기재돼 있는 가미타카모리 유적은 신빙성이 떨어지게 됐으며 일본의 전기구석기 연구는 근본적 재검토가 불가피하게 됐다. 후지무라 단장은 고교 졸업 후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 발굴에 뛰어들어 지난 81년 당시 최고의 4만년 전의 석기를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발굴할 때마다 최고기록을 갈아치우는 등 '신의 손’이라고 불리어 온 인물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후지무라는 왜 구석기 시대의 유적을 발굴하고 그 시대를 계속 올려야만 했던가? 이는 간단하다.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보다 역사가 더 오래 되었음을 증명하고 그들의 문화연대가 올라간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하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는 선진인데 과거는 후진인 점이 항상 콤플렉스로 작용하였다고 할 것이다.

 

실지로 구석기의 연대가 올라간다고 해서 곧바로 지금의 일본인의 역사나 문화연대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정복이주사로 볼 때 얼마든지 지금의 일본인은 그 이전의 토착민을 정복한 민족일 수도 있고 그 동안 여러 차례 이민족에 의해 정복과 이주를 반복하였음을 가정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일본인은 구석기 시대 토착민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즉 역사에도 단층이나 단절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업적, 특히 구석기나 전기구석기 문화유적을 중시하는 것은 역사적 실재보다는 신화구성을 위해서 필요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일본은 지금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고대, 혹은 선사시대)에도 일본이 계속 선진국이었으며 세계를 지배하였다고 하는 신화가 필요한 셈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오랠 수록, 역사이전, 청동기시대, 신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 구석기에서도 전기구석기 시대로 올라갈수록 역사적 권위나 문화민족으로서의 위치가 공고해 진다고 믿는 일본인들은 믿고 있는 지도 모른다. 특히 일본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중국이나 한국에서 문화적 수혜를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지금 일본의 문화능력은 중국이나 한국보다 훨씬 우수하며 모든 부분에서 앞서고 있는 형편이다. 일본인으로서는 당연히 자신들이 고대에도, 특히 선사시대에서부터 자신들이 문화적으로 앞섰음을 증명함으로써 미래에도 일본의 세계 지배신화를 계속 쓰고 싶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세계 선사고고학계에 공인된 구석기유적이 적지 않다. 잘 알려진 것으로는 북경 부근의 주구점에서 북경원인(직립원인)의 두개골을 발견한 것도 있고 그 후에도 여러 유명 구석기 유적지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특히 지난 70년대 후반에 발견된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의 구석기 유적지가 현재 세계 고고학계에서 '전곡문화'라는 이름으로 30만년전 유적지로 공인 받고 있다. 이밖에도 한국에서도 여러 구석기 유적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이렇다할 구석기 유적지가 발견되지 않아서 문화적 자존심을 크게 상한 터였다. 일제 실증사학자들은 우리 나라에서는 구석기 유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했던 만큼 한국에서도 나오는 전기 구석기 유적지가 나오지 않아 애를 태워왔다. 이러한 차에 가미타카모리 유적 조작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후지무라의 발굴은 석기가 언제나 그를 거쳐서 출토되는 데 대한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금방 캐낸 석기에 마른 흙이 묻어 있었다”“타제 수법이 수십만 년 전 것이 아니다”는 등 누가 보아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당연한 의문들이 꼬리를 이었다. 그러나 일본 고고학계는 이를 무시했고 더구나 검증하려 들지 않다가 이번에 이런 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더욱이 어처구니없는 역사조작은 그래서 그의 ‘1인 극’이 아니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일본은 지금 집단적 역사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 고대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 문화적 수혜를 받던 입장에서 명치유신 이후 근대화과정에서 이를 역전시킨 일본이 현재의 선진적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과거의 역사마저 저들의 지배사로 바꾸어 버리려는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만 해도 그렇다. 고대에 한반도에 저들의 식민지를 두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발상이 일제 때에 대동아공영권을 발상하게 했을 것이다. 일본이 역사를 조작하는 한 일본은 영원히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조작 자체가 바로 선진국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세계 고고학사적으로 볼 때 고고학자들은 발굴의 꿈에 부풀어 두개골과 유물의 발굴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조작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러한 조작은 아프리카에서도 있었고 인도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처럼 자신들의 문화연대를 올리기 위한 국수주의적인 경우는 없었다. 이는 아직도 일본에서는 국수주의자들이 학계에서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아마도 일본은 이번 사태로 교과서의 내용을 바꾸는 등 앞으로 여러 가지 부분에서 합리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세계 학계로부터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한 범학계적 노력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역사학을 비롯, 인문학에서는 크나큰 타격이 예상된다. 학문이 다른 부문에 비해 권위를 가지는 것은 그 진실성 때문이다. 만약 학문이 진실성을 상실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본은 그 진실이라는 부문에 대해서 범국민적 반성을 하여야 할 것이다. 후지무라가 역사를 조작한 것은 일단 개인의 공명심에 의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사의 연대를 위로 끌어 올리려는 일본 고고학계의 풍토와 천황중심의 역사관도 한 몫을 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천황중심 역사관과 연관된 일본의 사실조작 의혹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880년대 광개토대왕비 비문조작 및 천황가의 3대 보물 중 하나인 칠지도 음각문 조작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 침략주의와 만행을 부정하는 역사의 왜곡 해석을 넘어 사실을 조작하는 몰(沒)역사적 행태에 두려움마저 생긴다. 일본 구석기 유물 조작 사건을 특종 보도했던 마이니치 신문은 28일 이 사건과 관련된 취재 경위를 지면을 통해 공개했다. 마이니치는 지난달 5일 일명 「신의 손」이라 불리며 일본 구석기 유적 발굴 최고 권위자로 꼽히던 일본 도호쿠 구석기 문화연구소 후지무라 신이치 부소장이 유물을 스스로 파묻고 이를 발굴한 것처럼 속였다는 사실을 사진과 함께 보도, 일본열도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마이니치가 처음 「유물 조작」 사실 취재에 나선 것은 8월 하순. 홋카이도 본부에서 갖고 있던 정보가 있었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본사의 한 간부에게 온 전자우편 제보였다고 한다. 즉시 취재반이 구성되고 후지무라의 발굴 현장 추적에 나섰다. 일반 사진기보다 전후 사정을 정확히 알 수 있고 망원 거리도 긴 VCR 카메라도 사용하기로 했다. 1차로 사진을 찍은 때는 9월 5일. 선명하지 못한 탓에 증거 자료로 쓸 수는 없었지만 「의혹」이 「확인」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그리고 10월 22일 아침, 신문에 보도된 사진의 촬영에 성공했다. 마이니치는 그 후에도 『본인에 의한 확인이 이뤄지지 않으면 보도하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보도를 미루고 단독 인터뷰를 신청했다. 11월 4일 센다이시의 한 호텔에서 만난 후지무라는 영문도 모른 채 자기 자랑을 40분간 늘어놓았다고 한다. 이를 듣고난 뒤 취재팀장은 『보여드리고 싶은 영상(영상)이 있다』며 VCR를 틀었고, 후지무라는 10분간 침묵한 뒤 『전부 (조작한 것은) 아니다, 마가 끼었다』고 사실을 고백했다. 마이니치는 『보도 두 달이 지났지만 파문이 점점 커지고 취재 경위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도 커져 이를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내용출처 : http://www.khaan.net/baikal/jojak/japan/2.html

 

 

2. 어째서 日本은 수십 년간 구석기 유적을 날조했는가.(상선약수)

1) 아이누族은 우리나라의 피지배 종족이었다.

日本人들은 자신들의 조상이라 우기는 아이누族이 氷河地帶를 건너 中國에서 列島로 건너간 사람들이라 우긴다. 이 얼마나 독창적이지 못한 주장이란 말인가! 오늘날 日本한테 氷河期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아메리카 先住民은 홍적세(洪積世 : Pleistocene Epoch) 마지막 氷期인 1 만 5 천년 전(이보다 더 오래 전이라는 주장도 있다)에 아시아에서 베링海峽(Bering strait)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지척지간의 韓半島를 놔두고 최단거리도 720km나 떨어진 중국 어딘가에서 건너 왔다는 것이다. 가끔은 수천 km나 떨어진 印度 어딘가에서 건너 왔다고 우기기도 한다. 日本國立遺傳子協會가 공식 채택한 호라이의 단독연구에서 중국인의 遺傳子 25.8%는 8 세기에 이주한 中國倭의 유전자다. 인도인과의 유전자 비교 연구는 한 적도 없다. 척 보기에도 人種上, 生物學上 틀려도 너무 틀리기 때문이다.

◀ 繩文時代의 土偶


제어드 다이아먼드(Jared Diamond)는 죠몬토기(繩文土器)가 지금부터 12,700 년경 전에 만들어졌고, 죠몬문화(繩文文化)는 농경문화가 아닌 수렵-채집민의 것이면서도 주변 자연환경의 생산성이 높아서 정착생활을 영위한 특이한 사례라고 주장한다. 繩文土器가 12,700 년에 만들어졌으면, 繩文人은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新石器 文化를 영위한 종족이라는 거다. 문제는 그런 우수종족이 발전도 없이 내내 조잡한 繩文土器 하나로 10500 년을 버틴, 가장 늦게까지 新石器 生活을 영위한 最後進 종족이라는 거다. 日本은 기원전 3 세기 까지 石器 時代였다.

더구나 수렵-채집민들이 한 곳에 정착하면, 금방 굶어 죽는다. 제아무리 주변 자연환경의 생산성이 높다 해도 짐승도 옮겨 다니고, 과일도 철에 맞춰 영글고, 물고기도 해류를 따라 이동한다. 狩獵-採集民은 짐승을 따라, 과일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해야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倭列島(後代의 日本列島)는 주변 자연환경의 생산성조차 극히 낮은 땅이다. 이는 繩文 末期 倭列島의 인구가 겨우 10 만 내외 였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세리자와 죠수케(芹澤長介), 야마우치 세이오(山內), 고야마슈조(小山周三)]. 韓半島人들이 벼농사법을 가져가 기아에서 해방되기는 했으나, 인구가 팽창한 지난 천년간 기아가 또 다시 倭奴民族을 찾아왔다. 바로 西洋人들 자신이 분석하길, 飢餓 때문에 日本이 2 차 대전도 일으켰다고 했지 않는가.

아이누族이 新石器 민족 繩文人이며 繩文土器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은 日本도 인정한다. 그래서 繩文時代라는 시대명도 생긴 것이다. 그런데 西아시아에서 처음 土器가 만들어진 연대가 5 천 년 전에서 7 천 년 전 사이다. 한국(桓國)도 기원전 7197 년에 開天한 나라다. 그 전에 靑銅器 時代로 진입했을 가능성은 높지만, 東아시아가 아니라, 시베리아에 있었던 나라다. 따라서 아이누族이 10 만 년 전, 혹은 1 만 2 천 년 전에 列島로 이주 했다면 舊石器人 이어야지, 新石器 文明조차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아니면 수천 년 전에 뜻한 바가 있어 列島에서 나가 土器 제작법을 배워 가지고 돌아 왔다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자체적으로 原始土器를 만들어 썼다는 것인가. 前者가 성립할 수 없는 건 日本이 기를 쓰고 氷期를 외쳐대며 걸어서 列島로 건너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의 氷期는 1 만 2 천 년 전후로 끝났다. 지역마다 약간의 시간 차이가 있어 1 만 년쯤이라는 주장도 있다. 後者 역시 성립될 수 없는데, 古代 韓半島人이 이주할 때까지도 新石器 文化라는 낮은 文明 단계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자체 제작 가능성도 사라지고 만다. 列島는 기원전 3 세기 까지 新石器時代였다. 韓民族은 유물 조사에 의해서도 기원전 2700 년경에 靑銅器 文化로 진입했다. 鐵器 時代는 기원전 15 세기 이전에 진입했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기원전 2700 년경에는 이미 鐵器時代로 진입했다. 더욱이 새끼줄 무늬의 繩文土器는 지극히 원시적인 土器로 新石器 初期 단계에 해당한다. 아이누族은 문화가 낮아도 아주 낮은 것이다.

아이누族의 문화가 극히 낮았다는 점에서 아이누族의 列島 이주 시기는 西아시아에 土器가 등장한 연대인 7 천 년전 이전일 가능성은 전무하다. 이주 시기는 더 낮춰 잡아야 한다.

그런데도 죠몬인(繩文人)의 新石器時代가 1 만 2000 년 전에 시작됐다고 우기는 倭奴가 가끔 있다. 이 말은 곧 기원전 3 세기 까지 初期 新石器文化를 영위한 劣等民族이 新石器 文化를 가장 먼저 만들어낸 優秀民族이라는 모순에 빠진다.

사실 日本은 모순이고 자시고 그런 거 신경 안 쓴다.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 주장이나 마구 한다. 모순점을 해결할 머리조차 없는 것이다. 일례로 "새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일본의 베스트셀러인 ‘국민의 역사(國民の 歷史)’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야요이문화[彌生文化 : 기원전 약 3 세기~기원후 3 세기)는 渡來人(韓國人)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일본 선주민인 죠몬인(繩文人)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했고, 야요이(彌生) 문화의 주체는 繩文人 이었으며 북 규슈(北九州)와 南朝鮮(韓國)과는 같은 시기 동일문화권에 가까웠으나 사람의 왕래나 교역이 있었던 것뿐이다.

다시 말하면 기원전 3 세기 까지 新石器 文化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열등민족이 어느 날 갑자기 靑銅器文化는 건너뛰고 스스로 鐵器文化로 진입했다는 것이다.

일본국립유전자협회도 倭奴民族이 韓國人의 遺傳子를 24.2% 가지고 있다고 하고, 다른 나라와 공동연구하면, 韓國人의 遺傳子가 65% 라는데, ‘새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전부 아이누族이라 우기니, 손발이 안맞아도 너무 안 맞는 것이다.

죠몬(繩文)‘人’이자 아이누‘族’도 모자라, 한 종족을 두고 繩文'人'이니, 彌生'人'이니 달리 불렀다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달리 불렀다고 하니, 이후에도 야마토[大和 : 통일국가 大和國이 있었다고 날조해서 만들어낸 시대명. 원래는 倭國이 있었다고 하다가 요즘은 그 의미가 지극히 아름답지 못하다고 해서 야마토국(大和國)으로 바꿨다. 그래도 역사책을 보면, 다 왜(倭)로 써 있다. 눈이 많이 괴롭겠지?]'人', 아스카(飛鳥)'人', 나라(奈良)'人', 헤이안(平安)'人', 가마쿠라 무로마치(鎌倉室町)'人', 아즈치 모모야마(安士桃山)'人', 에도(江戶)'人', 메이지(明治)'人', 다이쇼(大正)'人', 헤이세이(平成)'人'이라 불러야 하지 않는가. 자그마치 12 개다! 한 인종을 두고 12 개의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日本이 舊石器人도 繩文'人'이라고 우긴다면, 13 개가 된다.

‘日本이 4 대 문명의 하나’라고 주장, 70 만부 이상이 팔렸다(필시 지금은 훨씬 더 많이 팔렸을 것이다)는 ‘국민의 역사‘라는 책(?)의 서두는 날조한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으로 시작된다. 倭奴들의 조상인 舊石器人은 가미타카모리人으로 불렀으리라. 日本에는 舊石器 時代에도 ‘民族’이 있었단 말인가. 日本에는 新石器 時代에도 ‘民族’이 있었단 말인가. 가미타카모리人(上高森人?)이 日本人의 조상이란 말인가. 舊石器人은 멸종했다.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회장인 니시오 간지(西尾幹二)는 날조한 유적들을 거론 하면서 “日本 歷史는 자바 원인(Pithecanthropus erectus )이나 베이징 원인(北京猿人)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부심을 가지라”고 했다. 日本이 30 만 년 전, 前期 舊石器 時代 것이라 주장해온 人骨[도치기(鍈木)縣 구즈(葛生)]은 15 세기 것이었다.

日本의 자부심이란 게 겨우 타종족인 舊石器人에 기대어 세계 4 대 문명이 되고, 세계 1 대 문명이 되는 것인가. 우리나라는 오천년(문헌상으로는 9 천 2 백 년)의 역사라고 하지, 韓大陸에서 발견된 舊石器 遺跡을 가지고 수십만 년 된 역사라고 하지 않는다.

倭奴 땅에서는 이런 게 먹혀 들어간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가 倭奴 땅에 이주했고 倭奴民族으로 죽죽 進化해 왔다고 우겨댈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倭奴民族에게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곧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다. 귀찮게 이주는 뭣하러 하나? 조만간 38 억 년 전, 化學進化 時代에 倭奴民族이 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列島에서 單細胞 生物이 태어나고 이윽고 진화해서 倭奴民族이 된 거라고 우기겠지?

아이누族은 日本列島의 舊石器 人種이 아니다. 舊石器人은 좀 있다 검토하고 아이누族이 어떻게 列島로 이동 했는지부터 검토해보자. 이에 대한 단서를 倭奴學者들이 제공한다. 이들은 아이누族이 ‘氷河’를 건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아이누族은 배를 만들어 韓大陸과 日本列島 사이를 이동할 그런 기술이 없었다는 시인이다.

그런데 이미 古考學的 유물 발견으로 韓民族이 4700 년 전부터 靑銅器 文化를 꽃 피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4700 년에는 이미 鐵器時代로 돌입했다. 神市氏가 시베리아에서 南下한 5898 년에 우리 역사에는 東아시아를 무대로 하는 大帝國이 성립했다. 배달 이전에는 시베리아에서 인류 최초의 국가를 세웠다. 기원전 7197 년에 한국(桓國)을 세웠다는 것은 최소한 이 당시부터 靑銅器時代라는 뜻이다.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은, 靑銅器 文化를 가진 韓民族이 남하하자, 新石器文化를 가진 아이누族이 列島로 이주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누族의 列島 이주시기는 기원전 3898 년 이후다. 한동안 우리민족의 지배하에 있었다면, 5 천년 전후로 列島로 이주했다.

港海術이나 造船術이 없었던 아이누族이 列島로 갈 수 있는 방법은 타타르 해협을 건너는 것뿐이었다. 타타르 해협(Tatar strait)의 가장 좁은 부분은 폭이 7km에 불과하다. 11∼5 월에는 얕은 곳이 얼어 붙으니까, 걸어서 海峽을 통과했다.

우리민족은 타종족을 억압하지 않았다. 아이누族이 수렵, 채집 생활을 한다고 농경생활을 강요 하지도 않았다. 華夏族도 4300 년 전까지 수렵, 채집 생활을 했다(中國古代神話). 쌀을 본 적이 없어서 밥을 먹던 慈烏支 한웅의 정복군을 보고 모래를 먹는다고 했다. 자유롭게 떠도는 新石器人이라 구한(九桓)의 최소한의 질서에 편입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던 게 아닐까.

기원전 3 세기 부터 韓半島人들이 개별적으로 오늘날의 규슈(九州) 일대로 이주했다. 狩獵, 採集 생활을 고수하던 아이누族이 혼슈(本州)나 북해도(北海道)로 물러나지 않고, 어째서 기원전 3세기 부터는 벼농사법을 가져간 古代 韓半島人들을 기꺼이 맞이하고 同化되기로 했을까. 어째서 태도를 바꿔 定着生活을 하는 被支配系層의 지위를 받아들였을까.

그건 아이누族(繩文人)의 인구가 식량부족 등으로 대폭 감소했기 때문이다. 식량 위기는 기후변화 때문 이라고 하거나 繩文人이 급격히 늘어나 식량부족 상태에 처했기 때문 이라고도 한다. 어쨌거나 더 이상 수렵, 채집생활을 고수 하다가는 종족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웠던 것이다.

그런데 倭奴民族은 문명의 정도가 극히 낮아 멸종의 위기에 직면했던 자신들의 조상 新石器人들이 자체적으로 靑銅器 時代는 건너뛰고 鐵器文明을 꽃피웠다고 우긴다. 식량위기 부터 타파하지 않으면 멸종을 감수해야 했던 繩文人이 어떻게 철기문명 시대로 자체 진입 할 수 있는가. 他種族의 피지배 계층이 되는 것 외에는 해결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세리자와 죠수케(芹澤長介)는 繩文 末期의 인구를 약 12 만 명, 야마우치 세이오는 약 15 만 명으로 추계한다.

日本 國立 民俗學博物館의 고야마슈조(小山周三)는 1984 년 日本人類學會에 보고한 “繩文時代의 人口”라는 논문에서 아이누族의 인구 변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죠몬말기(기원전 약 3세기) 일본 총인구는 극심한 추위 등의 영향으로 겨우 7 만 5 천 8 백 명에 불과했고, 그후 야요이 시대에 접어들자 59 만 4 천 9 백 명으로 급격히 늘었으며, 하지키(土師器 : 金海 土器. 즉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土器다. 伽倻는 韓半島에 없었다. 百濟土器다)를 사용한 나라시대(奈良 710~784)에는 무려 5 백 39 만 9 천 8 백 명으로 증가했다

 

 

2) 중국을 출발한 구석기인은 빙하를 건너 열도에 도착할 수 없다.

미야기현(宮城縣)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 발굴현장에서 당시 도호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소장으로 발굴 조사단장을 맡았던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가 석기를 땅에 파묻는 장면이 생생하게 보도됐다.
10 월 27 일 일본 언론들이 ‘70 만 년 전 석기 발굴’을 대서특필 하기 5 일 전인 10 월 22 일 아침 6시18분께의 행동이 마이니치 신문(每日新聞) 취재팀이 몰래 설치한 비디오 카메라에 그대로 잡혔다.
(일본은 역사왜곡의 천국인가, 2000/12/12, 주간한국) (每日新聞 2000. 11. 6.)

◀ 미야기(宮城)현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에서 구석기 발굴 작업을 하고 있던 발굴조사단의 동북 구석기 문화 연구소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50) 부이사장은 9 월 홋카이도(北海道) 유적에서 발굴되어진 석기 29 점 모두 자신이 묻고 다시 파낸것으로 밝혀졌다고 6 일자 마이니치 신문이 보도했다.

아이누族은 韓大陸 거주 당시, 韓民族의 피지배종족 이었다. 비록 지배를 거부하고 列島로 이주하기는 했어도.

그런데 倭奴는 아이누族이 자신들의 조상이라 주장한다. 이들마저 韓民族의 피지배층 이라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것이다. 이제 日本에 舊石器 文化마저 없으면 獨立 日本史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 고약한 심보에 韓民族의 지배를 받지 않은 종족을 창조해 내야 한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혔을 것은 분명하다.

90 년대 초반까지 倭奴 땅에는 前期 舊石器 文化가 없었다. 소박하게 後期 舊石器 文化만으로 만족하려 했는데, 과도한 욕심을 부린 후지무라가 연이어 발굴을 조작하면서 불과 몇 년 사이 日本의 역사는 3 만여 년 에서 70 만 년 전 까지 연대가 올라갔다.

후지무라가 발굴한 가미타카모리(上高森) 구석기 유물들은 주변국가들의 구석기 유물과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고 한다. 發掘團長이라는 사람이 유물의 연대를 70 만 년 전으로 끌어 올리려고 자신이 갖고 있던 석기 수집품을 발굴현장에 묻은 것이다. 보나 마나 日本은 이를 두고 자신들만의 ‘獨自 文化’라 주장했으리라.

원래 일본 국사 교과서는 구석기라는 용어 대신 ‘선토기문화(先土器文化)’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다 발굴에 있어서 ‘신의 손’으로 일컬어지는 후지무라(藤村新一)에 의해 잇달아 구석기가 발굴되고 일본의 구석기 연대가 무려 70 만 년 전 까지 올라갔으니 ‘구석기시대’라는 시대 구분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2000 년 11 월 후지무라가 유적지에 석기를 파묻는 모습이 마이니치 신문의 ‘몰래 카메라’에 잡혔다.
한반도에서 전곡리(全谷里) 구석기 유적이 발견될 즈음인 1970 년대 말 부터 일본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후지무라에 의해 10 만 년 전에 근접 하거나 이보다 오래된 유적들이 발견되기 시작 하였다. 전기구석기 유적이 잇달아 발굴된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얻어서 새로운 발견마다 신문 지면을 크게 장식하였고, 학계의 큰 주목을 끌어 일본 국사 교과서까지 바뀌게 되었다.
이번에 발표된 조사결과에서 구석기 유적 중에서 162 곳이 날조된 것으로 결론이 났다. 4 만 년 전 이전의 구석기 유적은 거의 대부분 날조된 것으로 판명이 났다. 오랫동안 대단히 조직적이며 치밀하게 짜여진 날조였다. 물론 지난 80 년대에 일본의 구석기 학자 중에는 이러한 유적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미 지적한 이가 있다. 그럼에도 20 세기가 끝날 무렵까지 날조사건은 드러나지 않았고 결국 고고학자가 아닌 신문기자의 눈에 발각된 것이다.
([기고]日 ‘구석기 날조’ 왜 이제야 공개됐나, 2003년 05월 29일, 경향신문)

이것을 두고 “日本 列島의 사람 흔적을 조금이라도 거슬러 올리려는 집단적 강박 관념과 여론의 압력을 반영하는 것”이라든가, “일본 역사를 70 만 년 전으로 끌어올리고, 이집트 文明과 맞먹는 古代 文明이 존재 했다고 믿고 싶어 하는 日本의 集團意識이 빚어낸 비극”쯤으로 치부하고 만다. 사람 흔적을 조금이라도 거슬러 올리려는 것이 집단적 강박 관념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 구석기 시대가 있다고 하여 이집트 문명과 맞먹는 고대 문명이 존재했던 것이 되는가. 集團的 强迫觀念은 奴隸史를 지우고 文明史로 창조하려 할 때 생겨난다. 이집트 문명과 맞먹는 고대 문명은 철기 문명을 날조할 때(倭奴 땅에는 靑銅器 時代가 없다) 생겨난다.

日本은 지금 역사를 얼마나 끌어 올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韓民族에게 지배받지 않은 先住民을 만들어내는 게 더 시급하다. 억지주장 만을 계속하는 日本도 그 같은 사실을 잘 안다. 무조건하고 新石器 文化도 自生, 鐵器文化도 自生, 舊石器文化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우기고는 있으나, 누가 아이누族마저 被支配種族 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낼까봐 내심으로는 떨고 있다.

日本이 4 만 년 전 이전의 舊石器 遺跡은 다 가짜라고 발표했다 하니, 이런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4 만 년 전 이후의 구석기 유적은 다 진짜란 말인가.

아메리카 先住民이 이주한 1 만 5 천 년 전은 氷期 최성기 즈음 이었다. 이들이 아시아에서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했을 때, 베링 해협의 환경은 어떠했을까?

다른 데서 찾아볼 것도 없다. 뉴턴 한국판 2003 년 9 월호에 나와 있으니까. 뉴턴은 일본 출판사가 발행하는 잡지다. 6 페이지, ‘베링 해협의 초원’이라는 제목 하에 이런 내용이 있다.

당시의 해면은 현재보다 100m 이상이나 낮았다. 그래서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사이에 있는 베링 해협은 육지화(陸地化)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당시의 환경을 알아보기 위해 해협 부근의 지층 속 꽃가루와 식물 화석을 자세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빙기(氷期)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초목류가 무성하게 자라 매머드와 들소 등이 생활할 수 있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베링해협 동부에서는 샐비어(Savia officinalis)류 등이 연중 자라고 있어 매머드의 식용 식물이 된 것도 알려졌다.
한편 해협 중앙부에서는 이들 화석이 발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중앙부의 식생이 듬성듬성 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베링해협(Bering strait)은 오늘날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대륙 사이를 분리시키는 해협으로, 넓이가 약 90km, 깊이가 약 55m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氷期 最盛期 즈음, 베링해협 중앙부의 식생은 듬성듬성했다. 그렇다면 4 만 년 전에는 동중국해가 얼어붙고 인류가 이동할 수 있었는가? 다행이 地球 氷河期에 관한 역사는 잘 알려져 있다.

제4기에 나타나는 마지막 빙하기를 최종 빙기(뷔름기)라 하는데, 이 빙기는 약 7 만 년 전부터 1 만 년 전 까지 계속 되었다. 이 기간 중 기온이 가장 낮았던 최종 빙기 최성기는 약 18,000 년전 경으로 이때의 해수면은 현재보다 약 100m 정도 낮았고, 황해 및 동중국해의 대부분이 육지화 되었었다.
(http://www.gri.pe.kr/hyang/hyang_jeon4.html 참조)

중국에서 일본에 왔다면 가장 가까운 규슈(九州)지방에 도착했을 것이다. 東中國海를 일부라도 건너지 않을 수 없다. 이 당시, 중국과 일본의 최단거리는 육지화 되어 있었는가. 4 만 년 전은 빙기 최성기에서 2 만 2 천 년이나 벗어나 있다. 인심 써서 육지화되어 있었다고 해주자.

이제 중국과 일본의 최단거리를 알아보자. 세계전도를 펴놓고 봐도 베링해협보다 훨씬 넓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최단거리가 720km 라는 글은 라이프잡지 2 차 대전, 일본의 전시생활편에 나온다. 라이프 2 차 대전은 일본의 날조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책이다.

짧은 거리는 목표가 보이므로 직선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거리가 720km나 되면, 보이지 않는 낯선 목표를 찾아 이리 저리 헤매야 하므로 직선으로 이동할 수 없다. 곡선이나 지그재그로 이동해야 하므로 이동거리는 훨씬 더 길어지게 마련이다.

이 시기, 동중국해의 植生은 어떠 했을까. 베링해협도 중앙부의 식생이 듬성듬성 했는데, 중국과 일본은 베링해협보다 8 배나 넓다. 水深은 최대 2700m다. 이것은 동중국해 대부분이 식생으로 덮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냥 얼음 이었던 것이다. 식물이 없으니 동물도 존재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이제 印度를 떠나, 中國을 떠나 氷河地帶를 건너 列島로 이주 한다고 가정해 보자. 도중에는 식량을 전혀 구할 수 없다. 처음부터 먹을 것을 가지고 출발해야 한다. 이 당시, 동물의 힘으로 운반할 수 있었던가. 다시 말해 동물을 가축화했던가.

가장 오래된 家畜의 化石은 1 만 2 천 년 전의 강아지 화석이다. 강아지 가지고는 식량을 운반할 수 없다. 그 다음으로 1 만 년 전, 西南 아시아에서 양과 염소, 돼지를 길들였다. 이것들도 얼음 위에서 식량을 운반할 수는 없다. 양과 염소, 돼지가 식량 아니냐고 하겠지만, 서남 아시아에서 가축화한 것이다. 日本은 제 조상이 서남 아시아에서 왔다고는 하지 않았다. 8,000 년 전 부터 소가 사육 되었지만, 터키 에서였다. 7,000 년 전에는 순록(馴鹿)이 유럽에서 가축화 됐지만, 중국, 인도에는 없었다. 같은 시기에 南아메리카에서 라마(llama)와 알파카(alpaca)가 길들여졌지만, 이 역시 아시아로 유입되지 않았다. 列島에는 4 세기 말 까지 말조차 없었다. 百濟 皇帝가 아직기(阿直岐)를 보내 말 두 필을 하사한 후 부터 韓大陸에서 말을 지속적으로 보내줬다. 결론적으로 中國, 印度에서 이주 한다고 해도 모든 식량을 인간이 짊어지고 운반해야 했다.

舊石器人의 이주는 개인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큰 集團으로 이루어졌다. 집단 내에는 노약자도 있고 여자도 절반이나 차지한다. 老弱者와 女子와 먹을 식량은 어떻게 하는가. 列島로 건너온 舊石器人은 제 부모, 제 자식을 팽개치고 왔나. 아니면 잡아 먹으면서 왔나. 식량만 가지고 다른 것은 포기한 채 이주 했을까? 舊石器人 이니까 가구나 전자제품, 여벌의 옷은 필요 없다. 하지만 얼음 위에 그대로 잘 수는 없다.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허허벌판, 아니 허허 얼음판에서 더구나 氷期가 아닌가. 제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요를 깔고 바람을 막을 천막 이라도 있어야 한다. 이걸 모두 건장한 남자들이 운반해야 한다. 썰매를 이용 했다고? 그러나 썰매를 끌 동물이 없다. 사람이 끌어야 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어린아이를 안고 손잡고 따라왔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군대가 행군하듯 신속하게 이동할 수는 없다. 하루에 잘 해야 10km. 20km 씩 이동한다 해도 중국에서 일본까지 30 일이 넘는다. 한 남자가 가족이 덮고 잘 이불과 천막, 30 일 동안 가족이 먹을 식량을 날라야 한다. 불가능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中國 혹은 印度에서 氷期에 列島로 舊石器人이 이주했다는 소리는 헛소리다.

中國, 印度(과연 日本民族이 100 여년 전만 해도 印度라는 곳을 과연 가본 적이 있었을까. 印度에서 日本民族의 조상이 왔다고 우기니, 처음 이주 후에는 결코 가보지 못한 땅이다. 2 차대전 중 인도까지 침략 하려고 한 적이 있지만, 문턱에서 패하고 도주했다. 주로 제 祖上들을 침략하는 게 日本民族의 天性인 듯)에서 떠났다고 해도 육지로 갔다. 氷河地帶로 갔다고 해도 韓大陸 해안선을 따라갔지, 바다 한복판은 아니다.

차라리 중국 대륙에서 韓半島로 갔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조상들은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다. 육지로 오면 되었으니까.

그래도 日本이 舊石器 遺跡이 있다고 끝까지 고집 한다면, 과연 이들은 어디서 갔는가. 바로 옆에 있는 韓半島인가. 가장 좁다는 大韓海峽은 55.8km이다. 베링해협보다 좁다. 그런데 아메리카 선주민은 1 만 5 천 년 전에야 겨우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90km를 건너는 데는 1 만 5 천 년 전에야 가능하고, 55.8km를 건너는 것은 4 만 년 전에도 가능하다는 것인가.

日本에 정말 舊石器人이 있었다면, 新石器人들처럼 얼어붙은 타타르 해협을 건너 사할린으로 이주하고 역시 얼어붙은 라페루즈해협(宗谷海峽)을 건너 北海道로, 쓰가루 해협(津輕海峽)을 건너 혼슈(本州)로 南下했을 것이다.

가짜 舊石器 遺物을 列島에 묻는 日本人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러고는 後期 舊石器니, 先土器文化니 하고 발표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日本은 2 차 대전을 통해 엄청나게 약탈했다. 특히 우리나라 에서는 자신들이 韓大陸에서 문물을 전수받은 사실을 없애느라, 닥치는 대로 遺跡을 파괴했다. 韓半島만이 아니다. 倭奴는 1905 년 乙巳勒約 이후 滿州에 진출하고, 이어서 동북아, 1937 년 노구교(蘆溝橋) 事件[蘆溝橋는 마르코 폴로가 "세계 驚異의 書(東邦見聞錄)"에서 “세계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아름다운 다리”라 평했던 다리다. 1189 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1192 년에 완공한 蘆溝橋는 당연히 高麗의 작품이다. 이 당시 中奴는 티벳고원 북부도 벗어나지 못했다]으로 中日 戰爭을 시작해 중국 대륙도 태반을 점령했다. 韓國 古代史 문헌 수만 종(어쩌면 수십 만종)을 焚書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무덤 속의 附藏品들 까지 모조리 훔쳐갔다. 그 당시 舊石器遺物도 약탈해 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日本은 생각하면 할 수록 웃끼는 民族이다. 2 次大戰 중에는 日本民族이 그 옛날 太平洋을 표류해 멕시코로 가서 잉카민족이 됐다고 우겼다지? 그 未開人들이 太平洋에 漂流 했으면 바다 속에 다 가라 앉았다. 9 세기에 와서야 외항선을 만들기 시작 했는데, 그나마 다 亂破 당하고 침몰했다. 아이누族도 겨우 얼어붙은 타타르 해협을 건넜다. 5 천 년 전만 해도 列島는 無人島였다. 漂流할 人間은 어디 있단 말인가. 

 

 

  

  昔有桓因(석유환인) 沙月 李 盛 永(육사18기 홈페이지 게재, 增補)



일제가 우리나라 역사의 왜곡(歪曲), 조작(造作), 말살(抹殺) 하는 정책은 크게 세가지로 진행되었다. 그 첫째는 우리 역사서의 분서(焚書)이고, 또 둘째는 역사의 조작(造作)이며, 셋째는 조작된 역사의 보급(補給)이다. 일제의 초대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가 1910년 11월 초부터 국내의 행정력과 군, 경찰을 동원하여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 근 1년 2개월 동안 소위 그들이 말하는 불온문서(不穩文書) 일체를 수색(搜索), 압수(押收), 분서(焚書)하는 범 국가적인 시책을 군사작전처럼 전개하였다. 당시 서울 종로 일대의 서점을 비롯해서 지방의 대, 소 서점,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 사대부가 등 불온서적이 있을 만한 곳은 가리지 않고 수색, 압수하였다.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단군’이란 글자가 들어있는 국내의 사료는 물론 심지어는 대마도 구석까지 손을 뻗쳐 찾아내기도 하였다. 그들이 불온서적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1차적인 것이 단군 관련 사료이고, 다음은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내용의 서적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압수한 서적의 물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총독부가 발행한 관보(官報)를 근거로 하여 판매금지 책자와 압수한 사료가 무려 20여만 권에 달했다고「제헌국회사(制憲國會史)」는 밝히고 있으나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추정이다. 압수한 서적 가운데 그들이 우리의 역사를 왜곡, 조작하는데 유익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태워버리는(焚書)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사료를 분서(焚書), 인멸(湮滅) 해 놓고는 그들이 독일인 리스(Riess: 실증사학의 거두 Ranke의 제자)를 초빙하여 회원 40명으로 된 「사학회(史學會)」를 조직하여 그에게서 배운 소위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사실(史實)의 고증자료 없이는 한 줄의 역사도 기술할 수 없게 하는 간교를 부렸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사이또오(齊藤實)총독은 조선 사람들에게 본격적인 우민화(愚民化), 반(半)일본인 화 시책을 다음과 같이 전개하였다.

①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사, 전통, 문화를 알지 못하도록 하여 민족의 얼과 문자를 잊어버리게 한다.

② 조선사람 선인(先人)들의 무위(無爲), 무능(無能), 악행(惡行)을 많이 들추어내서 이를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 그들 스스로가 선인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기풍화 한다.

③ 조선의 청년들이 조선의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한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되면 실망과 허무감에 빠질 것이므로 그 때에 일본의 인물, 사적, 문화를 가르치면 쉽게 동화하여 반(半)일본인 화 되게 한다.

이러한 식민정책을 뒷받침 하기 위해서 조선역사의 왜곡, 조작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단군사 조작, 한사군 관련 역사 조작, 임나 일본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사를 왜곡, 조작하였다.


▲ 단군사의 조작

단군 관련 사료(史料)를 철저히 압수, 분서를 단행한 후 그들은 역사를 조작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는데 그 효시가 단군사(檀君史)의 조작이다.  단군사의 조작은 삼국유사(三國遺事) 단군고기(檀君古記)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전말은 이러하다.

- 역사서 특히 단군 관련 사료의 압수, 분서 만행이 있은 후  단군 관련 내용이 관심을 끄는 역사서가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 順庵 安鼎福의 주해본) 이었는데 이는 조선 역사학자들도 구해 볼 수가 없었다.

* 단재 신채호는 「朝鮮上古史(조선상고사)」에서 ‘10년을 두고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을 구해 보았으면 하였으나 부득이하였다’고 하였고, 육당 최남선도 ‘삼국유사 정덕본을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으며 결국 정덕본의 진본(眞本)이 한 권도 없음이 이 나라 사학계의 상식인 것 같다’고 하였다.


- 1926년 일본 경도제국대학 후찌후지도라(內藤虎次郞) 교수와 이마니시(今西龍) 조교가 공모하여 〈삼국유사 정덕본〉을 극비리에 사개(詐改: 남이 속도록 개조하는 것), 영인(影印: 서적 등을 사진으로 복사하여 인쇄하는 것)하여 관계 요로에 다수 배부하였다. 이것을‘경도제국대학 영인본’이라 한다.

* 후찌후지도라가 쓴 서문에 의하면 명(明) 정덕(正德) 임신년(壬申年: 서기1512년)에 경주 부윤 이계복이 중간한 삼국본사(사기)와 삼국유사 양본이 다른 곳에서 간행한바 없는 귀한 것인데 임진왜란 때 왜장들이 일본으로 가져가 당시에는 미장(尾張)의 덕천후(德川侯)와 동경의 신전남작(神田男爵)이 각 1본씩 소유하고 있었다.  신전 소유본 삼국유사 정덕본을 동경대학에서 소량 영인 한 것을 경도재국대학 조교 이마니시(今西龍)가 1부 소장하고 있어서 이를 경도제국대학에서 다시 대량 영인하였는데 이를 ‘경도제국대학 영인본’이라 한다고 하였다.

 

- 삼국유사 정덕본 ‘경도제국대학 영인본’이 출간된 후 1932년 9월 서울의 고전간행회에서 이 영인본을 원형 크기로 발행하였고, 조선사학회명의로 활자본의 삼국유사를 상당량 발간 보급하였다.

* 이와 같이 축소 영인본, 원형 크기 영인본, 활자본 등 여러 가지 형태 로 다랑 보급한 것은 그들이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을 개서(改鼠: 쥐 뜯어 먹은 것처럼 글씨를 고치는 것)한 것을 감추기 위한 술책이었다.


- 이 영인본들은 모두 교묘하게 개서, 조작한 것인데  대표적인 부분이 「昔有桓國(석유환국)」을「昔有桓因(석유환인)」으로‘國(국: 口자 안에 玉자가 든 글자)’자를 因(인)’로 개서(개鼠)한 것이다. 즉 口자 안의 玉자를 긁어서 大자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 이는 육당 최남선에게 발각되어 1932년 7월 21일 조선사편수회 회의석상에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고서의 인용을 함부로 개서(改鼠)한다는 것은 심히 부당한 일이다’ 라고 하며 이를‘천인(淺人)의 망필(妄筆)’이라고 엄숙히 항변하자 일본인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 변조된 삼국유사는 최남선의 항변이 있은 후에도 원상회복 됨이 없이 유통되었는데 변절자 육당 최남선도 그 후로는 이 문제를 논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을 보면 일제로부터 엄청난 압력과 위협과 회유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삼국유사 정덕본의 조작이 뜻하는 것


‘昔有桓國(석유환국)’은 ‘옛날에 환국(桓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라는 뜻이다. 이는 삼국유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환국(桓國) 즉 지금의 이름으로 고조선(古朝鮮)이라는 실체적인 나라가 존재하였으므로 우리 민족의 역사는 중국 한족(漢族)에 못지않게 유구(悠久)하고 찬란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는 이것을 「昔有桓因(석유환인)」으로 개서(改鼠), 조작한 것이다. ‘옛날에 환인(桓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로 바뀌는데 이는 고조선의 존재사실은 사라지고, 단군(檀君), 환웅(桓雄)에 이어 환인(桓因)이라는 신화(神話)적 인물의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 이렇게 일본인들이 역사서를 개서(改鼠)하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조작한 것은 반만년의 유구한 조선역사를 삼국시대 이후로 축소시켜 일천하고 보잘 것 없는 역사로 비하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의도는 곧 단군사를 개서, 조작한 장본인인 이마니시(今西龍)의 박사학위 논문 「단군신화설(檀君神話說)」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악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계에 널리 유포되므로서 상당한 사람들이 조작된 단군신화를 그대로 믿게 된 것이다. 또 식민지판 《조선사대계(朝鮮史大系)》상세편에 일본인 어용학자 수우다(少田省吾)가‘단군전설을 몽고의 압박 받은 시대적인 반동(反動)으로 일어난 것이다’라고 씀으로써 일제 어용학자들이 단군의 존재를 한국사에서 국난과 결부시켜 그럴듯하게 부정하는 간교를 부렸던 것이다.


일제의 단군사 조작에 있어서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광복이후에도 일부 단군조선을 신화가 아닌 정사(正史)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고, 일제 식민사관에 젖은 자들이 국내 사학계(史學界)를 장악함으로써 일제에 의하여 조작된 단군신화는 오히려 각급 학교에서 가르치는 등 건재해 왔으며, 심지어는 1960년대 국내 일간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될 정도로 우리 민족의 가슴에 뿌리깊게 물들여 놓았던 것이다. ‘단군은 실제 인물이 아니며, 단군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하나의 신화이지 결코 사실이 아닌 이상 단군의 「이미지」가 현대인에게 어떤 감명이나 공감을 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단군신화는 고려후기 몽고 점령하의 고려인에게 천손민족(天孫民族)이라는 긍지와 독립정신을 고취한 것으로 암담한 현실이 주는 민족정신의 위축을 막는 낭만이었다‚


▲ 본격적인 조선역사 조작작업


단군사(檀君史)의 ‘단군신화(檀君神話)’조작은 조직적인 조선역사조작의 첫 단계 작업이었다. 이렇게 조작된 삼국유사의 단군사는 다른 역사조작과 함께 다음과 같은 조직적인 조선역사 조작작업으로 이어졌다.


- 1922. 12월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로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설립되었는데 고문에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위원에 어윤적, 이능화, 정만조, 유맹, 이마니시, 이나바, 마쓰이, 가시하라 등이 임명.


- 1925. 6. 6일본 천황 칙령 제28호로 「조선사편수회」가 독립관청으로 설치.

고문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구로이따, 핫또리, 나이또, 야마다, 이윤용, 

위원 최남선, 이능화, 어윤적, 윤필구, 현채, 홍희, 유맹, 이진호, 이마니시, 도리이, 마쓰이, 시하라, 오따니, 후지다,

간사 김동준, 정교원, 손영목, 엄창섭, 이대우, 이동진, 홍희, 신필구, 이병욱,

수사관 이나바, 후지다, 나까무라, 스에마쓰, 신석호,

수사관보 이병도 등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정무총감을 회장으로 하여 위원회에서 편찬방침을 결정하고, 실제 편찬업무는 수사관과 수사관보가 담당하였다.


- 1931. 12월에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朝鮮史)」일부가 인쇄 시작.

- 1937년에는 「조선사(朝鮮史)」가 35책으로 완성.

16년 동안에 100만원이라는 거액이 투자된 것이다.



* 단군사 조작에 기여한 사람들


어윤적 1935년에 동사연표(東史年表) 출간

윤필구 1938년 조선사편수회가 끝난후 고향 나주로 돌아가 민족의 정사(正史)가 말살된 것을 애통해 하며 1938년에 제자 서계수와 함께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를 간행함

이마니시 :  삼국유사의 桓國(환국)을 桓因(환인)으로 개작하여 조선 상고사 역사를 신화로 조작함으로써 환국과 단군의 실체를 부정함

이나바 한국사가 단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식민지로부터 시작하였다고 강조

스에마쓰 :  임나흥망사를 지어 가야지방이 고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조작

이병도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吉田東伍, 津田左右吉 등에게 자극을 받아 한국사를 연구하고, 조선사편수회에 관여하면서 이마니시, 이나바, 구로이따 등과 접촉하였다. 이마니시와 함께「조선사」의 신라이전-고려시대까지를 편찬해 한국고대사를 조작하는데 매우 공헌하였다.

 

 

 

 

일본의 역사조작 사례(광개토대왕비와 삼국유사)

 

 

조작의 천재~! 日本 광개토왕비문 조작과정 밝혀지다

일본의 조작기술은 정말 대단하군요 고대사 그전의 구석기 문명 조작부터해서 조작하지 않은 역사가 과연있는지 의문스럽군요. 아래 변조과정을 잘 보시면  일본인의 역사왜곡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알수있습니다 .

 

광개토 대왕비문의 변조과정

 


 

                  

광개토대왕비문 변조  일본 참모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꼬오 가케노부 중위에 의해 광개토대왕비의 주요 글자가 변조되고 지워지게 되었다.


우리 상고사를 말살시키는데는 한 글자를 고침으로 충분했다


『삼국유사』「정덕본」과 「동경제대 영인본」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고치고 동경제대 영인본으로 출판

광개토대왕비문을 조작하여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임마일본부설을 정당화하려고 하였다면 우리 상고사를 왜곡하는데 있어서는 삼국유사의 단 한글자 조작으로 충분했다

"삼국유사" 정덕본의 "고조선기"에는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석유환국)"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초기의 원동중씨가 쓴 "삼성기 하편"에는 환국은 시베리아의 중앙고원(파내류산=천산=파미르고원)과 바이칼호를 포함한 시베리아 전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리의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이 환국의 지도자의 관직명은 환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환국이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고, 신화속 인물로서의 환인만 알고 있다. 이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이것은 일제시대에 일제 식민사학자 이마니시류(금서용)가 이 환국의 "국"를 "인"자로 변조하여, 환국이란 나라의 존재를 없애고 환인을 신화의 인물로 변조 시켰기 때문이다(환국뿐 아니라 뒤에서 설명할 배달국의 환웅, 고조선의 단군도 모두 신화의 인물로 왜곡시켜 한민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없앴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무력정치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하여 문화정치라는 미명하에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얼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는 시책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고대 역사서를 뒤져내어 없애버리고, 유일한 역사기록으로 남겨놓은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나오는 환국의 건국사실 마저도 고쳐 버렸다.

"석유환국"을 "석유환인"으로 바꾼 것이다.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란 말을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로 고쳐 버린 것이다. "환국"이란 나라를 "환인"이란 사람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일제로부터 독립한 지가 54년이나 되었고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었으면 무엇하는가? 아직도 한국사람 대부분은 환인, 환웅, 단군을 신화의 인물로만 알고 있고 제 올바른 역사를 모르고 있으니 일제의 한국인 뿌리말살작전은 진정 성공한 것이 아닌가?

환국과 배달국의 존재 등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관한 자료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조시대 왕조실록 등에 엄연히 존재하며, 일제에 의해 없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 황실문고에 대량으로 소장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환단고기의 내용을 인정하고 국사교과서에 사료로서 반영하고 일본에 건너간 다른 사서들을 다시 찾아와서 우리의 진실된 왜곡되지 않은 고대사를 배울날을 기다려본다 .

 

 

광개토대제비 약사 -상성약수님 정리-

 

1880년 이전
조선시대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39,註解) 지봉유설(芝峰類說) 등에는 집안지방에 皇城이 있으며 그 북쪽 7리되는 곳에 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를 여진족의 유적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1880년경 만주지역의 封禁이 풀린 뒤 청나라 농부에 의하여 발견된 비를 關月山이 조사한 뒤 비의 부분적인 탁본이 북경의 금석학계에 소개됨

1882년경에 만주를 정탐여행중이던 일본군 參謀本部의 밀정 포병중위 酒勾景信(사까와 카게노부)에 의하여 쌍구본 제작 일본 유입.

1889년에 어용기관지인{會餘錄} 5집을 통해 비문 내용을 세상에 처음으로 공표.

1899년경 부터는 일,청 양국에서 선명한 탁본을 얻고자 비면에 석회칠을 하기 시작하였으며,이러한 과정에서 비면의 마멸과 일부문자가 오독되기에 이르렀다.

1928년 집안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등이 2층 비각을 세움

1976년에 관리소홀로 2층비각이 소실되어 비문 일부도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능비 자체가 크게 훼손.

1982년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속에 보존.


탁본의 종류

1) 사까와 쌍구가묵본(酒勾雙鉤加墨本) : 일본 참모본부의 밀정인 사까와 가케노부(酒勾景信)중위 임의로 문자를 판독한뒤 비문에 종이를 대고 문자의 테두리를 그린 이후 문자의 바같쪽을 먹물로 칠하여 가공한 것으로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으로도 불리운다.
2) 원석정탁본(原石精拓本) : 천진(天津)이나 북경(北京)에서 전문 탁공이 파견되기 시작한 1882년 이후의 일인 데,지금까지 알려진 초기 원석탁본은 불과 4-5종에 지나지 않아 능비연구의 최대 난관이 되어 왔다.
일본의 미즈다니(水谷悌二郞)씨가 소장하였던 탁본,대만 부사년도서관 소장탁본,한국의 임창순소장 탁본,최근에 발견된 중국의 북경대학 소장탁본등은 탁출년대에 약간의 異論이 있으나, 능비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인 능비 발견 초기의 원석탁본으로 비교적 선본(善本)들이다.
3)석회가공탁본(石灰加工拓本) : 능비가 발견되어 얼마 지나지 않은 1900년대부터 청,일(淸日)양국에서 탁본의 고가매매(高價賣買)와 참모본부의 해독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면에 진흙을 바르거나 석회칠(石灰塗付)을 하기도 하여,'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러한 짓을 하였을까?' 하는 비문변조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학계의 쟁점이 되어왔다.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탁본이 석회칠을 한 후의 탁본이며,지금도 비면의 일부에는 석회의 흔적이 남아 있어 비문연구의 장애가 되고 있다.
4) 최근의 대표적 탁본 : 최근에 들어와 현대적 기법에 의해 새로운 원석탁본이 중국에서 만들어 지기 시작하였는데 장명선탁본(張明善拓本,1963년)과 주운태탁본(1981년)이 있다.

 

 

 廣開土境好太皇이 정복한 땅은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다. 그렇다면 廣開土境大勳跡碑는 어디에 있었나. 중국 대륙이다. 韓半島와 滿州는 高句麗軍이 밟을 필요도 없는 땅이다. 중국 대륙의 百濟軍이 패해 百濟 皇帝가 항복하면서 百濟의 전영토가 정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동북아에다 비를 세울 이유는 없다. 廣開土境大勳跡碑는 전승기념비다. 廣開土境好太皇은 百濟와 新羅, 伽倻, 東夫餘가 있고 倭가 있는 중국 대륙과 토번(吐蕃)이 있는 중앙아시아[廣開土境大勳跡碑를 보면, 廣開土境好太皇은 즉위 8 년에 吐蕃을 정복했다. 吐蕃은 747 년 고선지(高仙芝 : ?~755)가 정벌할 때까지도 파미르 고원 너머 중앙아시아에 있었다. 廣開土境好太皇은 중앙아시아까지 정복했던 것이다]를 정복한 것이다.

◀ 광개토경대훈적비문중 일부


廣開土境好太皇은 중국을 정복할 필요가 없었다. 중국은 高句麗와 百濟의 상대가 되지 않아, 끝없이 눈치를 보고 있던 소국 이었다. 중국은 朱蒙聖帝 때 정복된 이후 우리나라의 충실한 속국이었다. 역사를 날조한 李成桂는 碑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碑는 축소 韓國史를 증명하는 거짓 증거물 이기도 했다. 그래서 축소 역사에 맞춰 비문 내용까지 바꿔 가짜 비를 제작했다. 廣開土境大勳跡碑를 비롯해서 中原高句麗碑나 울진봉평비(蔚珍鳳坪碑) 등 모든 비가 날조 역사에 맞춰 새로 새긴 가짜 碑다. 원래 廣開土境大勳跡碑는 高句麗 영토에 세웠다. 百濟 영토에 세우면, 당장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百濟 영토를 바라다 볼 수 있는 국경지대에 세웠을 것이다. 廣開土境大勳跡碑가 세워진 구체적인 장소는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었던 百濟 영토에 가까운 西鴨綠江(嘉陵江) 혹은 黃山江(揚子江), 漢水(黃河), 浿水(漢水) 유역으로 압축된다. 漢水 유역에 세웠다면, 訥縣(현 洛陽)과 百濟의 초기 도성이 있던 현 開封 사이의 국경지대이다. 百濟의 제 2 皇城(長沙)이 高句麗 땅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어, 黃山江(揚子江) 유역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진짜 廣開土境大勳跡碑를 어디에 세웠던 간에 가짜 비는 東鴨綠江 유역에 세웠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을 西鴨綠江에서 東鴨綠江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복종하며 쥐새끼처럼 살았던 華夏는 그 사실을 지우고자, 우리나라 문화재들을 방치하고 있다. 훼손되고 붕괴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가짜 廣開土境大勳跡碑文을 깎아낸 것도 모자라, 관리를 내세우며 파괴해 한 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깨어져 나갔다. 碑의 파손을 막는다는 구실로 5 년에 한 번씩 합성 수지액을 주사하는데, 그 부분이 변색되고 표면까지 심하게 마모됐다. 중국이 늘상 하는 짓이지만, 말은 보호한다 면서도 실제로는 훼손하고 있다.

19 세기 말부터 中奴와 倭奴가 비문변조를 합리화하기 위해 비면에 석회칠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 석회칠을 할 때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글자를 마구 집어넣고 불리한 글자는 뺐기 때문에 탁본을 만들 때마다 글자가 다르다. 어째서 일본은 廣開土境大勳跡碑에다 석회칠을 하고, 비문을 깎아 내야만 했는가. 日本이 우리민족의 지배를 받던 하잘 것 없는 “벌거숭이” 왜(倭)라는 사실을 감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日本軍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5 년 동안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 1884 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만듬]을 연구했고, 淸日戰爭을 전후하여 일본군 참모본부의 장교들이 수차에 걸쳐 현지에 가서 비문을 조사했다. 露日戰爭이 끝난 1905 년에는 비를 일본으로 운반할 계획까지 세웠다. 日本軍 주도하에 廣開土境大勳跡碑를 날조하여 이른바 ‘任那日本府’라 하여 倭의 韓半島 진출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고, 나아가 일본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征韓論으로 발전했다. 倭奴의 논리에 따르면, 韓國이 고대 일본을 지배한 사실이 밝혀진 이상, 征倭論 및 미래 한국의 일본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인 셈이다! 倭奴의 논리에 의하면, 노예들 스스로 列島를 우리나라에 바쳐야 하는 것이다! 廣開土境大勳跡碑에 “百濟와의 전과를 최대의 업적으로 현시한 것”은 그 당시 百濟가 동아시아 제1의 대국이었기 때문이다. 유독 百濟만을 百殘이라 하고 百濟 皇帝를 殘主라 한 것은 百濟에 대한 원한이 너무도 깊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百濟를 굴복시킨 것이 廣開土境好太皇의 최대업적 이었다.(상선약수)

 


[Photo] 100년전에 찍은 광개토대왕비
입력 : 2004.08.22 22:52 57' / 수정 : 2004.08.23 11:11 03'
100여년 전 한 조선인이 만주 지안(集安)시 광개토대왕비 옆에서 찍은 사진이 공개됐다. 정성길 경기 화성평화공원박물관장이 22일 공개한 이 사진은 1903년 일본에서 발행된 ‘조선의 명소와 유적’이라는 화보집에 실린 것으로,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쓴 한복 차림의 인물이 눈내린 산야를 배경으로 비석 옆에 서 있다. 사진 설명에는 ‘고구려 호태왕릉비―삼국시대 고구려’라고 적어 고구려가 한국사임을 분명히 했다. /대구=연합

 

 

 

[문화재]조작설 등 해석 분분한 광개토대왕비 비문 입력 | 2005-11-02 03:08 동아일보

 


《광개토대왕비 비문 조작설의 진실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는 자료들이 하나둘 발굴되고 있다. 고구려연구회(회장 서영수 단국대 교수)는 3∼5일 단국대 서울캠퍼스 서관 11층 국제회의장에서 ‘광개토태왕과 동아시아’를 주제로 제11회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다. 이 학술회의에서 쉬젠신(徐建新)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역사연구소 연구원과 가오밍스(高明士) 국립 대만대 교수가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광개토대왕비 탁본보다 더 먼저 만들어진 탁본을 발견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탁본은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 일본 육군대위가 1883년경 중국 현지에서 입수했다는 묵본이다. 이 묵본의 신묘년 관련 기록인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 □□, 신라를 깨뜨렸다’로 해석돼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시됐다. 그러나 후대 탁본에는 ‘渡海破’란 글자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 때문에 조작 의혹을 받아 왔다.

 

▽사코 탁본은 비석에 대고 그린 탁본이 아니었다=쉬 연구원은 지난해 중국 베이징(北京) 경매장에서 자신이 발견한 묵본이 ‘광서 신묘(1881년)에 얻었다’라는 발문 기록으로 볼 때 가장 오래된 묵본이라고 주장했다. 이 묵본의 존재는 지난해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비공개 한중학술대회에서 이미 발표됐으나 사진과 구체적 내용이 국내에 전해진 것은 처음이다. 이 묵본의 신묘년 관련 기록 내용은 사코의 묵본과 같다. 일단 조작설에 불리한 정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존에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으로 알려진 사코 묵본이나 새 묵본이 모두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인 것으로 밝혀져 신뢰도가 더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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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가오밍스 국립 대만대 교수가 찾아낸 광개토대왕비문 원석탁본. 흰 선으로 표시한 부분이 사코 가게노부의 묵수곽전본에 나오는 신묘년 부분의 ‘倭以辛卯年來渡海’에 해당하는데 엷은 묵으로 조심스럽게 탁본을 떠서 거의 알아볼 수 없다. ②사코의 묵수곽전본(1883년)과 ③쉬젠신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이 새로 발견한 묵수곽전본(1881년)의 신묘년 부분. 내용은 같지만 ‘渡’자와 ‘海’자 등 각 글자의 형태가 다르다. ④베이징대 도서관이 소장한 모각본. 모각본은 묵수곽전본처럼 글씨를 목판에 옮겨 새긴 뒤 종이에 찍은 것으로 왼쪽에서 셋째줄 신묘년 부분을 보면 ‘海’자 대신 ‘皇’자가 나타나 있다.사진 제공 고구려연구회

 

 

쌍구가묵본은 비면에 종이를 대서 글자의 외곽선을 따라 그린 뒤 주변에 먹칠을 해서 만든 탁본. 반면 묵수곽전본은 아예 비면에 종이도 대지 않고 글자 형태를 모방해 그린 뒤 주변에 먹칠을 한 탁본을 말한다. 묵수곽전본은 묵본 작성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하거나 조작됐을 가능성이 더욱 높은 판본 형태다. 실제로 사코 묵본과 쉬 연구원이 발견한 묵본만 놓고 봐도 서로 글씨 형태가 다르다. 쉬 연구원이 함께 제시한 베이징대 도서관의 후대 탁본의 경우에는 해(海)자가 황(皇)자로 돼 있다.

▽초기 원석 탁본에선 ‘渡海破’ 형태 알아보기 어려워= 가오 교수는 대만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 푸쓰녠(傅斯年)도서관에서 새로 발견한 원석탁본을 공개하면서 이 탁본이 사코 탁본 이전에 제작된 초기 원석탁본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원석탁본은 비석에 종이를 대고 솜방망이로 먹을 묻힌 뒤 톡톡 두드려 만든다. 지금까지 발견된 광개토대왕비의 원석탁본들은 거의 대부분 1889년 이후의 것으로 확인됐다. 원석탁본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종이를 많이 쓰고, 표면이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종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묽은 먹을 사용해 살짝 두드려 탁본한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한 원석탁본은 종이가 162장이다. 48장까지 줄어든 후대 원석탁본은 물론 133장인 사코 탁본보다 많으며 가장 묽은 먹으로 엷게 탁본된 것이다. 가오 교수는 광개토대왕비가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육안으로 보고 베끼기 힘들다는 점 때문에 묵수곽전본에 앞서는 원석탁본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탁본이 초기 원석탁본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 탁본의 신묘년 관련 기록에선 ‘渡海破’란 글자가 있을 자리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상태다. 한편 중국 동북공정의 이론가 중 한사람인 겅톄화(耿鐵華) 퉁화(通化)사범대 교수는 “스자좡(石家莊)과 창춘(長春)에서 여러 가지 다른 시기의 호태왕비(광개토대왕비) 탁본을 발견했다”고 밝혀 광개토대왕비문 최초 탁본 논쟁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渡海破’ 日 통설에 ‘날조-오독’ 반론▼

사코 탁본의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에 대해 국내외 여러 학자는 일본의 통설과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 해석은 크게 ‘渡海破’ 등의 글자를 그대로 두고 해석한 것과 이를 다른 글자로 놓고 풀이한 둘로 나뉜다.

 

▽원문을 그대로 인정한 경우

 

△위당 정인보=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고구려가) 이를 쳐부수고 백제,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왕젠췬(王健群·중국학자)=일본 통설과 같음.

△박진석 전 연변대 교수=신묘년에 왜구가 왔다. (고구려 또는 광개토대왕이) 바다를 건너가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함으로써 <□□를 왕구로 분석> 저들의 신민으로 삼았다.

 

▽원문 글자를 날조·오독했다고 보는 경우

 

△이형구 선문대 교수=신묘년 이후<倭를 後로 봄>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來渡海를 不貢因의 변조로 분석>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왜구와 신라를 파하여 이를 신민으로 삼았다.

△서영수 단국대 교수=왜는 신묘년부터 (왕의 세력권에 함부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왕<海를 王으로 분석>은 (왕과 맹세를 어긴) 백제와 (그 동조자인) 왜를 공파<□□를 倭降으로 분석>하고 (왕에 귀의한) 신라는 복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

△임기중 동국대 명예교수=왜가 신묘년에 와 경남 사천<海를 泗로 분석>을 건너서 깨부수었다. (그리고) 백제,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김병기 전북대 교수=왜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 신라에 대해 조공을 들이기 시작<來渡海를 入貢于의 변조로 분석>하였으므로, (고구려는) 왜도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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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2개월 동안 조선사(朝鮮史) 편찬업무에 관여해온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은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역사 왜곡에 앞장섰다. 그가 고조선기(古朝鮮記) 중 國字 (국자)를 因子(인자)로 변조했다는 사실을 육당 최남선이 폭로했다.

 당시 조선 총독부는 [조선사]의 강행을 서둘렀다.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35권의[조선사] 가운데 처음 인쇄된 것은 제1편(통일신라 이전) 1,2권과 제2편(신라통일시대) 1권 등 모두 3권으로 1932년 3월 31일 출간됐다.

육당 최남선(1890~1957)
3.1운동시 독립선언문의 기초 책임자로 체포된 바 있으며 해방 후 친일반 민족행위로 수감

 

 조선사편수회는 원고가 탈고되는 대로 인쇄에 넘겨, 원고 작성과 간행을 동시에 추진한 것이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의 편찬이 중요한 사항이므로 최소 2개월에 한번이라도 편찬위원회나 실무수습회를 계속해서 열겠다고 했으나 이러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원고의 심의 없이 조선사의 일부가 간행되자, 육당 최남선이 강력히 시정하고 나섰다. 그러나 조선사편수회의 제6회 위원회가 개최된 것은 조선사의 첫 3권이 나온 지 약 4개월 후인 1932년 7월 21일이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열린 이 모임에는 今井田淸德 정무총감, 권중현, 黑板勝美 고문, 牛島省三, 篠田治吾, 임번장(林繁藏), 어윤적, 松本伊織 , 大谷勝眞, 鄭僚源, 小田省吾, 이능화, 윤재구, 최남선 위원, 위원을 겸임한 松本, 昌變嚴, 稻葉岩吉 간사가 참석했다,

 사전의 협의도 없이 조선사의 일부가 간행된 것에 분노한 육당은 일제의 조선사 왜곡 의도를 간접적으로 지적하여 그들의 사인을 받아낸다.

 六堂 崔南善은 조선사편수회 제 6회 위원회에서 <三國遺事>의 개찬을 지적, [淺人의 妄筆]이라고 울분을 터뜨린다. 六堂의 지적은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의 正本이 발굴되어 今西龍 등 일본인 학자들이 개찬한 것임을 확연히 입증하게 되었다.

조선사편수회 촉탁 위원으로 조선사 편찬에 앞장섰던 今西龍은 <삼국유사>정덕본을 영인 (影印)하며 [단군고기(檀君古記)]에 나오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개찬하여 경도제대영인본이라는 이름을 붙여 각계에 배포했다.

今西龍의 이 같은 개찬작업은 그의 박사 학위논문인 단군신화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악용되었을 뿐 아니라 각계에 널리 유포시킴으로써 지금까지도 일부 <삼국유사> 해설 서적들이 조작된 기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변조한 『삼국유사』[단군고기(檀君古記)]부분

 

 

[옛날에 환국(桓國)이 있었다]는 기사를 환인으로 바꿔, 고조선의 입국(立國) 사실을 깎아 버리고 환인(桓因)과 환웅(桓雄)의 신화적인 존재로 조작한 것이다.

원문은 [昔有桓國<謂帝釋 >庶子桓雄···]으로 되어있다. <삼국유사>에서 단군(檀君)도 [檀君]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유사>정덕본은 1512년 경주부윤 李繼福이 중간한 것이다.

이하는 최남선이 이날 회의에서 발언한 요지이다.

崔南善 : 기간(旣刊) 3권에 관하여 알게 된 것 가운데 그 전의 것과도 관련이 되는 두서 너 가지 점을 참고로 말하겠다.

그 첫째는 [일차(日次)]와 [간지(干支)]와의 대비에 관한 것이다. 제 2편의 범례에 있는 바 와 같이[간지]가 있는 [일차]의 추정을 내무성(內務省) 구간(舊刊, 1880년)의 <삼정종람(三正縱覽))>에 의거하였으나 알다시피 이 종람은 연대를 추산하여 이른바 지나(중국)라고 하는 것도 삭윤(朔閏)의 배정이 중국 당시의 실제 역일(曆日)과 틀리는 부분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조선사 제 2편에서 문무왕(文武王) 9년부터 그 이후 약 1세기 동안에 대략 20회가량이 틀리고 그 가운데는 1년에 2회 이상이나 틀린 것도 여러 번 있을 정도다. 신라의 역법(曆法)은 문무왕 때(14년)에 당(唐)의 [인덕(麟德)] 역법을 전수 받았으며 그 이후에도 대체로 당 나라의 역법을 습용(襲用 ; 그대로 씀)한 것이라고 보여지므로 간지의 추정에 있어서 <삼정 종람>과 실제 역법에 준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나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신라 경명왕 7년 11월의 [朔]은 [庚子]이고 [大盡]이라고 나와 있으나 지나(중국)의 역일에는 [辛丑]이고 [小盡]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9日로 한 [戊申]은 대략 [8日]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약간의 모순 점을 들 수 있다.

이 점은 고려조에 들어와서 <고려사>에 간지의 표시가 개소(個所)에 따라 상세하게 됨과 동시에 여러 가지 실제적인 분착 (紛錯)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 역일(曆日)의 비정(比定)을 요하는 경우에는 <삼정종람>과 같은 일정한 추정 법에 의한 역일보다 차라리 지나(중국) 당시의 실제 역일을 표준으로 하 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고려시대에는 요사(遼史)의 삭고(朔考)에 보이는 요(遼) 와 송(宋)의 역법상 차이도 있으므로 역법의 비정에 각별한 주의도 하였을 것으로 짐작은 되나 참고가 될까하여 말한다.

둘째는 내외(內外) 기사의 대조에 있어서 일본 및 지나(中國)의 왕대(王代)나 연호가 바뀌 는 대목에는 그 바뀌는 월차(月次)를 명시한다면 한층 더 편리할 것이다. 특히 남북의 여러 왕조와 대치하고 있었던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이것을 명백히 하지 아니하면 실제로 불편할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셋째는 원전(原典)의 인용이나 고감(考勘)에 있어서 일하신 분들의 노고가 마음에 걸리는 바 없지 않으나 가일층의 배려를 바란다.

예를 들면 고구려 동명왕의 곳에 인용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고기(檀君古記) 가운데 [석유환국(昔遊桓國)]이라고 되어 있어야 할 곳 을 후에 천인(淺人)의 망필(妄筆)로 말미암아 [환인(桓因)]이라고 고쳐진 것이 그 하나다.

다 알다시피 단군고기는 본시 상당한 여러 고기록(古記錄)을 종합한 것을 극히 간명하게 축약 한 것이므로 짤막한 몇 마디나 글씨 한자에도 어떤 경구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환국(桓國) 즉 [환나라]와 [환인(桓因)]사이에는 전문의 해석상 옛부터 수상(壽常)하지 않게 논쟁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가령 한 자(字)의 잘못(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그전문의 해석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큰 것이다.

이 글은 경도대학(京都大學) 의 영인본(影印本)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그 원서(原書)의 환인(桓因)의 [인(因)]자가 국(國)]자 위에 칠을 하녀[因]자로 고쳐 놓은 것을 일견하여 바로 알 수 있다.

고전을 인용 하는 경우에 가령 극히 명백한 오류라 하더라도 이것을 함부로 경망(輕妄)스럽게 개찬(改竄)한다는 것은 심히 부당하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현재 이 사서에서 도 이점에 대한 경건하고 예민한 배려기 있어야 될 줄 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육당의 지적은 상당히 온건한 편이다. 역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일본인 학자들을 조롱하는 것 같은 대목도 있다.

그러나 육당의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있는 [석유환국(昔遊桓國)]을 [석유환인(昔遊桓因)]으로 바뀌었다는 지적은 조선사 편찬 벽두부터 일제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중대한 폭로인 것이다. 이같은 조작은 조선사 왜곡에 앞장서온 今西龍은 단군신화설을 조작한 장본인이다.

일본 경도제국대학 강사로 있다가 三浦周行 교수를 따라와 조선사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 20일 동안 관여하다가 사망한 今西龍은 1921년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그 모교인 경도제대에 [조선고사의 연구(朝鮮古史硏究)]라는 논문을 제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조선 중종 7년(1512년)경주부윤 이계복(李繼福)이 중간(重刊)한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의 고조선기(古朝鮮記) 중 [국(國)]자를 [인(因)]자로 변조, 출간하여 경도제대의 영인본(影印本)이라 하여 각계에 배포했다.

육당은 제 7회 위원회에는 불참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34년 7월 30일 조선 총 독부 중추원에서 열린 제 8회 조선사편찬위원회에서 단군(檀君)에 관해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조선상고사의 별편 제작을 강력히 요구했다.

육당은 "단군과 기자(箕子)는 조선사의 지극히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본회의 [조선사]는 이를 제 1편의 본문에 넣지 아니하고 주서(註書)에만 약간 기재하고 있다"고 지적 항변했다. 그리고 그는 단군 등 조선상고사는 정편보편(正編補編)을 제작하여 꼭 집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병도사관'에 놀아난 한국역사 2005년 03월 15일 (화요일) 10 : 30  데일리안

[데일리안 박선협]이승만 정권에 빌붙어서 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교육부 장관과 한림원 원장을 맡았던 이병도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그들은 그 이병도를 지금 친일사관의 거두쯤으로 치부한지 오래라. 그는 지금의 강단사학계가 100%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일조한 장본인이다 민족사관을 중심으로한 신진사류들에 의해 그의 일제치하 친일행각은 여지없이 파헤쳐졌다. 그가 끼친 천인공노할 역사왜곡에 찌든 한국민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만, 우리는 다만 그것을 용서하고 기억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다. 무슨 하해같은 도량이 있어서가 아니라 결코 과거를 먹고 살 수는 없다는 철리에 따르고 싶은 민초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수제자를 자처하며 당대의 실세실력가로 군림하는 이른바 대가군(大家群)의 선두주자 S씨에 이르면 생각이 많이 달라진다. 너무나 유명한데다 특유의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그는 그야말로 당대의 실세중에서도 휘영청 뜬별이다. 걸핏하면, 독도의 수호신으로, 독립협회의 변호인으로, 일제의 만행을 갈파하는데 선봉장임을 자랑하는 인물이라 함부로 다루기가 버거운 존재다. S씨 그는, 필립제이슨 재필이가 김옥균이 샹하이에서 홍종우(洪鍾宇)지사에 의해 총맞아 쓰러진 것에 겁이나 걸음아 나 살려라고 도망친 그 일제 그늘에서 자라고 일제의 반간계에 놀아나 이역만리에서 사라진 재필이 만든 독립협회를 민족의 태양쯤으로 자랑의 틀을 씌운 그는 역사와는 상관이 없는 사회학도에 다름아니다. 어쩌다 "독립협회연구"로 일약 스타가 되어 유명세를 거머쥔 뒤 동분서주 이르는 곳마다 환호의 물결을 즐기는 명사대열의 선두주자가 된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결코 그런 그의 출세가도에 찬물을 끼얹거나 괜스레 심사가 뒤틀거린다 해서도 아니다. 오늘날 "독립협회"나 "독립신문" 독립문" 등이 친일역사의 상징으로 재조명되면서 그의 행보에 눈이 쏠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아니치 못하면서 대세가 점진적으로 일제만행 규탄에로 에스칼레이트 하고 있는 사실과 더불어 그의 행적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생각해 보잔 뜻이 있어서다. 그 독립협회의 대변지 독립신문의 날 4월7일을 "한국신문의 날" 로 정한 한국의 언론계가 입장정리를 위해 코페르니크스적 발상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당도한 즈음, 그가 심혈을 기울인 독립협회옹호론이 흔들거릴 가능성에 대한 그의 심중이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따름이다. 잠시 각설하자. 지금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발효됨에 따라 도대체 일제가 침탈한 적나라한 현장이 어떠했던가를 냉철히 뒤돌아 짚어보고 돌아보자. 그리하여 그동안 미처 정리하지 못한.해방60년사의 새 역사에서 "병도의 사관에 놀아나 호박씨를 깐 인물들을 찾아내어 옥석을 구분 하는데 의미를 두고자 한다. 일제는 조선을 총칼로 침탈하고서 다시 영원히 조선을 탈취하기 위하여 광분했다. 조선의 민족혼 자체를 말살시켜 일본인에 동화될 수 있도록 그들의 역사보다 수천 년이 앞선 조선역사의 왜곡과 조작을 조선 총독부에 의하여 노골적이고 조직적인 차원으로 추진했다. 일본은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이후 민족의 근간을 바꾸기 위하여 민족의 서적을 약탈했다. 1910년 11월부터 조선총독부 산하의 ‘취조국’으로 하여금 1911년 12월까지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를 근거로 하여 ‘51종 약 20만권"정도를 약탈했다. 물론 역사서 또한 포함되었다. 서울에서는 종로 일대의 서점을, 지방에서는 서점,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가, 세도가 등을 샅샅이 수색했다. 다음해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 1차 서적 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판매금지한 서적과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광복 후 제헌국회사와 <문정창(文定昌) 저>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가관인 것은 자신들이 1922년 12월에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서 조선사(朝鮮史)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편찬한다. 즉 1938년까지 엄청난 돈을 일본이 부담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한 자기만의 역사서를 편찬한다. 광개토대왕비문 변조 일본 참모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꼬오 가케노부 중위에 의해 광개토대왕비의 주요 글자가 변조되고 지워지게 됐다. 일제가 역사왜곡에 혈안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 고대 일본의 역사가 동방 한민족 역사의 부속사라는 숙명적인 약점 - 역사적 열등감과 이에 수반되는 침략 명분의 부재 -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계획적인 역사날조에 있었다. 대륙개척사를 반도수난사로 둔갑시키고 정신적으로 고유의 주체사상을 말살하여, 당쟁만 일삼는 식민지 백성이라는 패배주의를 심어놓는가 하면, 단군을 하나의 신화로 돌리고, 고조선 실사(實史)를 은폐하여 고대사를 압축하고 만주하북성에서 찬란했던 조선족의 역사를 완전히 말살시키는데 혈안이 됐다. 조선은 자고(自古)로 북은 한(漢)의 식민지, 남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억설을 주장하여 조선강점을 논리적으로 합리화시키려는 기도를 일삼았다. 고고학계의 구석기 유물 조작 폭로라는 지다던 소가 웃을 일을 공공연히 자행하다 들통이 나기도 했다. 즉 일본 고고학계는 지난 92년 70만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되었다고 했다가 2000년 11월 일본 언론에 의해 이것이 한 일본 역사연구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선 총독부 3~5대 총독 시달 교육시책이 있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서,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방조했다. 이로서 한국민은 반드시 실망과 허무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고자 시도한 요결인 것이다. 『삼국유사』「정덕본」과 「동경제대 영인본」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고치고 동경제대 영인본으로 출판 조선 총독부에서 집필한 『조선사의 길잡이』라는 책은 해방 뒤 유네스코에서 한국사를 소개하는 지표로서 번역되어졌고 지금도 읽혀지고 있는 책이다. 『조선사』35권 (made in Japan)을 만들어 냈다. 치밀한 우리들 한국의 역사 개조작업을 서두른 일본은 드디어 1938년까지 35권의 조선사를 편찬하게 된다. 그곳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참여한 사람이 병도였다. 그는 이마니시 류(今西龍), 즉 이마니시의 수서관보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일등 공로자가 됐다. 그것이 맨 앞글에서 밝힌 이승만 정권에 빌붙어서 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교육부 장관과 한림원 원장을 맡게 되어 지금의 강단사학계가 100%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일조한 병도의 행각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병도는 어떤 인물인가? 일제식민지 시대에 우리나라 역사 왜곡의 주역이었던 병도(1896-1989)는 노론(老論) 유력 가문인 우봉(牛峰) 이씨이다. 열두 살인 1907년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일인이 경영하는 불교고등학교를 찾아가 일어(日語)를 배웠다. 나라를 빼앗겨 대한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청년 학도들이 목숨을 바쳤으나 병도의 뇌리에는 애초부터 항일 의지 따위는 없었다. 매국노 완용의 후손 병도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장기적 계략에 포섭되어 일본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1919년에 졸업했다. 이때 일인 학자 요시다(吉田東伍)가 이미 한국의 역사를 변조하여 저술한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을 독파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왜곡의 주역 일인 학자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와 와세다대학의 강사 츠다(津田左右吉)로부터 문헌고증학, 즉 실증사학의 기초를 다지며 한국역사 왜곡에 대한 개인적인 세뇌 지도 교육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귀국한 병도는 이케노우치의 추천을 받아 1925년에 설치된 『조선 반도사』 편수회의 핵심위원으로 들어갔다. 이병도는 촉탁이기 때문에 무보수로 일했다고 변명하면서 이 시절 규장각 도서를 열람할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의 학문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리화하곤 했다. 이 시절 그는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등에 한4군(漢四郡)의 강역을 한반도 내의 존재 설을 강력히 주장하고 고려시대 풍수도참(風水圖讖) 사상, 그리고 조선시대 유학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당연히(?) 일어(日語)로 쓴 것들이었다. 이때 쓴 논문들은 문헌고증학의 관점에서는 꽤 수준이 높은 것이었으나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단제 신채호의 민족주의사학과는 서로 배치되는 논리들이었다. 1920년대 연희전문.보성전문.이화여전 등이 민립대학 건설 운동을 일으키자 일본은 경성제대의 문을 열어 이 운동을 좌절시켰는데, 경성제대는 이런 불순한 목적의 대학답게 식민사학을 맹렬히 전파하여 『조선 반도사』를 합리화 시켰다. 이외에도 호소이(細井肇)를 비롯해 아오야나기(靑柳南冥) 같은 일본 국수주의 국학자들도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과 함께 식민사학을 쏟아내어 조선국은 고대로부터 반도국가로서 미개한 민족이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일황의 칙령에 의하여 『조선 반도사』편찬에 착수한 일제는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반도국가로 왜곡시킨 우리역사를 합리화하고 세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어용 학술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1922년의 조선사편찬위원회와 1925년의 조선사편수회였다. 『조선 반도사』편찬의 고문에는 일인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포함되었는데, 일본측은 경성대 교수인 로이타(黑板勝美).미우라(三浦周行) 같은 학자들인 반면 한국 측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친일 정객 완용.영효.윤용, 중현 같은 역적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이 단체의 고문으로 있었다. 당시 초대조선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조선 반도사』"편찬과"를 설치하고 우리민족의 대 역적인 완용과 중현 등 역적들을 고문으로 앉히고 1916년 1월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참의와 부참의 15명에게 『조선 반도사』 편집 업무를 맡기고, 일본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박사와 일본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 등 3인에게 지도, 감독을 의뢰하였다. 1922년 12월 일황 훈령(訓令) 제64호를 공포하여 『조선 반도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완용, (권)중현 등 역적들과 일본인 어용학자들이 합작하여 한국인 학자들의 외면으로 『조선 반도사』 편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는 "『조선 반도사』편찬위원회"를 “ 조선사편수회 ”로 명칭을 바꾸고, 일황(日皇)의 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이고 확대 개편하였다. 1925년 6월에는 "일황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접 관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독립관청으로 승격된 총독부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조선 반도사』편수회는 막대한 인적.물적 역량을 동원해 삼한과 삼국은 고대부터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에 위치한 부족국가로서 중국에서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 현도군(玄菟郡).진번군(眞番郡)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고대부터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이론을 수없이 쏟아내 조선의 식민지화를 정당화시켰다. 1926년 문을 연 경성제국대학도 식민사학을 전파한 또 다른 기관을 만들었다. 1930년 5월 경성제대 교수와 조선사편수회원, 그리고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총동원되어 청구학회(靑丘學會)라는 어용 학술단체를 조직하는데 이들 역시 조선총독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일제의 한반도 및 대륙침략 의도에 발맞춰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어용 단체는 저술 출판.강연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의 회무감독은 경성제대 교수인 일인 쇼우다(小田省吾)였고, 서기는 조선사편수회 서기인 마에다(前田耕造)였는데, 병도는 신석호와 함께 이 단체의 핵심위원이었다. 또한 병도는 이나바(稻葉岩吉)쇼우다 등의 일본인 및 손진태. 홍 희.유홍렬 등 한국인들과 함께 이 어용 학술단체의 기관지인 청구학총(靑丘學叢)의 주요 필자이며 또 다른 식민사학의 학술지인 조선사학의 주요필자 였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33년 불교전문학교 강사 시절이었다. 일본인 학자들과 함께한 청구학총이 어용단체로 밝혀지자 이를 두려워한 일제와 병도는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1934년 5월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설립하였다. 즉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국내 및 주변 지역에 대한 역사.언어.문학 등 인문학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국 학자의 힘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를 국어로 발표하려는 의도 하에 창립되었다. 초대 편집 겸 발행인 병도(丙燾)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출강하면서 기관지인 진단학보(震檀學報)를 발행하고 일제강점기 1941년 6월 제14호로 종간하고 해산됐다. 그 후 1945년 8.15광복 후 다시 진단학회가 발족된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유포시킨 식민사학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 인데, 그 하나는 사대성이론이며 다른 하나는 정체성이론이다. 한국 역사는 고대부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역사이자, 고대 이래로 발전하지 못한 정체된 사회라는 것이 두 이론의 논리였다. 따라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의 퇴보가 아니라 진보라는 것이 이들의 식민지 지배논리였다. 『조선 반도사』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 등 20여명의 일인 학자들과 한민족의 반역자 이완용의 후손 두계(斗溪) 병도(李丙燾).신석호(申奭鎬).홍희(洪憙) 같은 한인학자들이 참여하여 드디어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이 완간 했던 것이다. 민족반역자 병도는 1922년 12월 일황의 칙령에 따라"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 때부터 1938년 3월까지 만 16년 동안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을 완간하였다. 일본의 계략대로 우리 역사를 왜곡한 병도는 일본의 제 1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일본천왕으로부터 거액의 포상 금과 금시계를 받았다. 1945년의 8.15 해방을 맞아 진단학회의 자진해산 후에도 조선사편수회에는 꾸준히 나가던 병도는 해방 후 경성대학과 그 뒤를 이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곧이어 서울대학 대학원장에 취임했다. 그때 김상기.이상백.이인영.유홍렬.손진태 등 사학자들과 조윤제.이숭녕 등 국문학자들이 서울대 교수로 취임해 진단학회는 친일 학자들이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병도의 해방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해방 다음날 경제사학 계열의 백남운을 중심으로 조선학술원이 결성되고, 같은 날 진단학회도 재건되었으나 진단학회가 곧 “ 친일파 제명운동 ”에 들어간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조윤제가 주도한 이 운동의 제명 범주에 병도가 들어간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병도는 재건된 진단학회를 주도할 수 없었고 송석하와 조윤제가 위원장과 총무를 맡고, 송석하가 사망하자 1948년 8월 이상백이 그 뒤를 이었다. 병도의 일제시대 행보는 떳떳할 수 없는 경력이었다. 그러나 친일파 식민사학자 병도가 남한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950년 6.25전쟁이었다. 6.25전쟁은 많은 민족주의 인사들이 납북됨으로써 남한 학계를 가짜 실증사학의 병도 독무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남북휴전 다음해인 1954년에 병도가 진단학회의 이사장으로 취임 할 수 있었다. 6.25전쟁을 계기로 병도는 친일파 청산 제 1호에서 벗어나 국사학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 병도는 식민사학을 유포하던 경성제대의 후신인 서울대학교 대학원장과 학술원 부원장을 맡아 역사학계의 최고 원로로 부상했다. 병도는 1960년 문교부장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학술원 회장에 선임됐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65년 동구학원(東丘學園) 이사장,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대동문화연구원장에 취임했으며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됐다. 1976년 동도학원(東都學院) 이사장에 선임됐고 1980년 85세의 고령으로 국정자문위원(國政諮問委員)에 위촉됐다. 그 동안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 공로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했다. 1986년 10월 9일(목)자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우리나라 국조이며 "역대왕조의 단군제사는 일제 때 끊겼다" 라는 제목으로 특별기고 하여 우리나라 고대역사 왜곡의 사실을 발표하고 1989년에 죽었다. 또한 병도의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고려시대 연구》등이 있다.


 

◇ 이병도의 말년

 

일제의 역사왜곡에 대하여

 

1. 총독부 우리 史書 20만권 불태워

 

일제는 한국 상고사의 말살을 한국의 강제 병탄이전부터 강력히 추진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강탈한 후 이해 10월 1일 관보를 발행하는 놀라운 기동력을 보인다. 이 관보는 조선을 영원히 탈취할 것으로 착각한 그들이 만든 것이므로 이제는 오히려 일제의 조선 침탈사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이나 아쉽게도 번역이나 집중적인 연구가 되지 않은 실정이다. 1910년, 이른바 그들이 주장하는 '일·한합방'이 되자 초대 총독은 취임하자마자 조선의 관습과 제반 제도 조사를 명령했다.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식민지를 제압하기 위해 설치한 가장 악질적인 기관의 하나로 초기에는 법령의 제정과 형벌을 관장했다. 일제의 무단정치를 악질적으로 수행한 관서였다.선의 관습과 제도조사라는 미명을 내세운 취조국은 1910년 11월 전국의 각 도·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그들이 지목한 불온서적의 일제 압수에 나섰다. 서울에서는 종로 일대의 서점을 샅샅이 뒤졌고 지방에서는 서사(서점), 향교, 서원, 구가, 양반가, 세도가를 뒤졌다. 다음 해 12월 말까지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하였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 다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판매금지한 서적과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권이라고 광복 후 출간된 <제헌국회사>와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문정창)>가 밝히고 있다. 압수대상 서적은 단군관계 조선고사서, 조선지리, 애국충정을 고취하는 위인전기·열전류 및 심지어 '미국의 독립사'까지 포함되었다. 장지연의 '대한시지지(大韓新地誌), 이채병의 '애국정신', 신채호의 '을지문덕' 등이 집중적인 수난을 받았다. 이는 일제가 조선사를 말살하려고 한 공개된 첫 만행이었다. 총독부 취조국은 필요한 일부 서적, 즉 조선사를 왜곡 편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만한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분서하였다. 무단정치로 악명이 높던 寺內正穀는 총독부 취조국이 관장하던 관습·제도 조사업무를 1915년 허울뿐이던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반도사' 편찬을 담당시켰다. 일본인들이 이나라 사서를 인멸했을 뿐 아니라 직접 손을 대어 왜곡 편찬을 노골화한 것이다. 이완용, 권중현 등 부일(附日) 역적들을 고문으로 앉힌 중추원은 1916년 1월 유정수 등 중추원 참의와 경도제국대학의 三浦周行 교수와 경도제대 今西龍 강사 등 3인에게 지도·감독을 의뢰했다. 새로운 조선반도사를 만들려는 일제는 전국에서 압수·분서한 이외, 그들이 조선사 왜곡을 위해 근거 자료로 일부 사서를 남겨두고 총독부 취조국에서 중추원 편찬과로 편사업무를 이전하기 앞서 이들 자료의 철저한 분석과 왜곡 편사 계획을 수립했음이 분명하다. 조선반도사 편찬을 맡은 어용학자들에게 내린 편사지침이 이를 증명한다.

① 조선반도사는 편년제(編年制)로 한다.

② 전편을 상고삼한, 삼국, 통일후의 신라, 고려, 조선, 조선 근세사의 6편으로 한다.

③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 사설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7쪽, 47쪽)

조선총독부는 이 같은 편사 원칙을 세우고 '공명 적확'한 조선사를 편찬하려면 사료가 필요하다는 명목을 붙혀 이번에는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사료 수색을 다시 감행한다. 겉으로는 중추원이 사료 수집을 맡아 대여 방식 등의 다소 완화된 태도를 보였으나 실지에 있어서는 각 도청, 군청, 경찰서 등이 위압적인 방법으로 수색했다. 이 나라 역사와 전통, 문화, 예술, 인물 등 제2차 수색에서는 압수 범위도 오히려 늘어났다. 즉, 전기, 열전, 충의록, 무용전까지도 압수되었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어쩔수 없이 무단정치를 철회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했다.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조선총독은 조선사람들을 半일본 사람으로 만드는 이른바 교육시책의 하나로서 1922년 12월 훈련 제64조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을 제정, 공포하여 새롭게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2. 역사 왜곡편찬 진용확대 개편

 


일제는 「편찬위원회의 조직근거 법령이 조선총독부의 훈령으로 되어있어 유능한 조선인 사학자들이 모이지 않는다」고 지적, 명칭을 「조선사편수회」로 바꾸고 일황의 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였다. 일제는 1925년 6월 일황 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조선총독이 직할하는 독립 관청으로 승격시켰다. 이 편수회의 위원장급 회장들로는 현직 정무총감들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시키고 실무자들의 관직도 높여 상당한 대우를 함으로써 실력있는 학자들을 유혹했다. 새롭게 정비된 조선사 편수회는 사무소를 총독부 중추원에 두고 1925년 10월 8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결정한 주요 사항은 관계 자료의 수집 방안이었다. 강제 수색·압수가 초기에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수장자들이 비장하는 바람에 수집이 어려워지자 일제는 대여하는 형식으로 그 방법을 완화했다. 총독은 관계자들에게 편찬사료 탐방이란 이름으로 광범위한 사료수집을 독려하는 한편 전국의 도·군·경찰서 등 관청에 협력토록 강력히 지시했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는 大正 11년(1922년), 즉 조선사편수회가 확대 개편되기 이전부터 사료를 수집했음을 밝히고 있다.(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92쪽). 1922년 8명의 관계자가 연 122일을 출장했으며, 23년에는 17명이 연204일, 24년에는 12명이 연 176일, 25년에는 15명이 연200일 동안 전국을 누벼 조선사료를 찾아내었다. '조선사편수회'의 제1회 회의에서는 다시 조선사의 시대구분을 재편, 조선상고사를 말살하려는 저의를 보인다. 1923년 1월 8일 '조선사편찬회'가 결의한 제1편「삼국이전」을 다시 끌어내려 「신라통일이전」으로 하고 제2편「신라통일시대」, 제3편 「고려시대」, 제4편 「조선시대전기」, 제5편 「조선시대중기」, 제6편 「조선시대후기」로 편수마저 7편에서 6편으로 1편을 줄였다. 단군조선 등 상고사를 집어넣기로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 때 결의한 사항을 폐기하고 '조선사편찬위원회'의 결의마저도 축소하여 '조선사편수회'에서는 6편으로 편수까지 줄인 것이다. 편수까지 줄인 것은 「삼국이전」과 「삼국시대」를 줄여 「신라통일이전」으로 통합했기 때문이다. 조선사의 시대구분 문제는 조선사가 완간될 때까지 조선 위원들에 의해 거론되고 끈질긴 공방전을 낳았다.


3. 사료 선별수집·복본 행방불명

 


조선사편수회의 회의록 가운데 중요한 부분들을 보기로 하자. 1928년 7월 18일 중추원에서 열린 고문·위원간담회에서 나온 주요 발언은 다음과 같다.

● 山梨 총독 : 앞서 본회가 조선 사료의 수집·정리와 조선사 편찬의 사명을 가지고 창립되자 고문과 위원 각위들은 열심히 그 취지를 원조하고 각 직원들은 근면히 사무에 종사하여 상당한 성적을 올리게 된 것을 다행하게 생각한다. 해가 거듭할수록 인멸되어 가는 사료를 수집하여 공정한 조선사를 만들려는 것은 본회 창립 당시에 비하여 더욱 절실한 소망일 뿐 아니라 조선 통치상으로 보아 긴요한 일로 믿는다. 여러분은 더욱 노력하여 이 사업이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노력해 달라.

● 池上정무총감 : 본회 사업의 경과를 보면 사료의 수집이 예정의 절반을 완료하였다. 이것은 여러분들과 일반인들이 귀중한 사료의 수집과 편찬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편의를 제공한 때문이며 참으로 만족한다. 앞으로 1∼2년이면 일반 수집을 마칠 예정이니 여러분은 물론, 일반인들도 더 한층 편의를 제공하여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 黑板勝美 : 나는 다행히 여기에 참석하여 이 자리에 함께 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조선사의 편수에 관하여 나는 처음부터 상담에 응해 왔다. 최초에는 10개년에 역사 편찬을 완성하게 되었었으나 진재(震災, 1923년) 때문에 연장하여 12년간에 전부 완성하기로 했다. 사료는 각 도, 각 지방에 있는 것은 물론 일본, 지나(중국) 및 만주에 있는 것도 수집하여 가장 공정한 조선사를 편수하는 것이 목적이다. 위원과 고문 각위의 협력으로 벌써 사료 수집도 과반을 마쳤으므로 편수의 체제와 강령을 정하고 그에 따라 편찬을 진전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이 사무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을 단계에는 여러분의 기탄 없는 의견을 듣고자 하나 실은 자료가 너무 호한하고 그 수집 정리 및 편찬에 대해 수사관도 상당히 곤란을 받고 있는 실정이므로 충분히 연구하여 우선 완성한 다음에 심사를 앙청하기로 했다.

1930년 8월 22일 오전 9시 중추원 제5회 위원회.

● 최남선 : 편수에 관하여 질문이 있다. 첫째로는 제1편의 편수 범위에 관한 것이다. 요람에 의하면 「신라통일 이전」이라고 되어 있으나 심히 막연하다. 무릇 반도 안에 살았던 민족으로서 역사상 밝혀진 것은 어느 정도까지 채택하는 것인가? 견해에 따라서는 종래 반도사에서 제외된 것이라도 반도에 심히 복잡한 관계를 가진 민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둘째는 제6편은 갑오개혁까지 편수한다는 것인데 그 이후의 것이라도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다룰 작정인가?

● 今西龍 : 제1편에 관해서는 담당자인 내가 말하겠다. 무릇 고대의 역사를 수찬함에 있어서는 「민족」을 위주로 하느냐, 「토지」를 위주로 하느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따라서 주된 민족의 흐름의 관계가 있는 한, 또한 그 설명상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주변 여러곳의 기사도 당연히 채택한다. 예를 들면 고구려 같은 것은 그 지역이 반도 밖에 걸쳐 있었으니 물론 채입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과 같다.

● 최남선 : 구체적으로 말하면 숙신(肅愼)같은 것은 아직 불명한 채로 남아 있는 민족이나 나는 조선사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 이후에 내려와서 발해(渤海)도 조선사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런 사실들은 어떻게 선택할 방침인가?

● 今西龍 : 「숙신」은 연대상 역사로 취급하기보다는 인류학 민족학의 연구범위에 들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발해도 조선사에 관계가 없는 한 생략하겠다.

● 최남선 : 참고로 말하겠다. 무릇 고대사는 「민족」본위로 하는 경우도 있고 「지리」본위 또는 「문화」본위로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라 하더라도 매우 복잡하고 모호한 상태이겠으나 민족의 기원을 밝히기 위하여는 가능한 모든 전력을 다 할 필요가 있다. 조선 고대 민족에 관한 사료는 조선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지나(중국)의 여러 사적에서도 산견되고 있으므로 조선사를 밝히기 위하여는 사소한 것까지도 면밀하게 조사하여 유루가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조선 민족은 인류학상으로도 아직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조선의 민족문화를 밝히기 위해서는 차라리 동방 제 민족의 관계 사료를 전부 하나로 종합·정리하여 주기를 바란다.

● 今西龍 : 최위원의 말에 대해 담당자로 깊이 감사한다. 다만 여기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사료」와 「사설」을 구별하는 것이다. 「사료」는 될 수 있는 대로 수집하겠으나 「사설」을 수집하면 끝이 없기 때문에 채용하지 않는 것이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 따르면 중추원에 편찬과를 설치(1918년 1월)한 후 조선사편수회로 개편(1922년 12월)하기 직전까지 「상고삼한」, 「삼국」, 「통일 후 신라」, 「조선」 등 4편의 원고를 탈고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들 원고의 일부는 조선사편수에 참고했겠으나 「통일신라 이전」의 2편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 하나 조선사편수회 제4회 모임 때 거론된 대학이나 학교 도서관에 비치하겠다던 수많은 사료들의 복본들 역시 행방이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사편수에 참여했던 일본인 학자들이 스스로 조선의 사료가 너무 많아 본편에 처리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던 이들 사료들과 그들이 작성한 조선상고사의 일부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들이 패망할 때 완전히 소각하지 못했다거나 모두 가져갈 수 없었다면......? 광복 40년만에 뒤늦게 공개되는 이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처럼 우리 나라의 어느 곳에 사장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4 '삼국유사',단군신화설도 조작

 


조선총독부는 「조선사」의 간행을 서둘렀다.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35권의 「조선사」 가운데 처음 인쇄된 것은 제1편(통일신라이전) 1, 2권과 제2편 (신라통일시대) 1권 등 모두 3권으로 1932년 3월 31일 출간됐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의 편찬이 중요한 사항이므로 최소 2개월에 한번이라도 편찬위원회나 실무수습회를 계획해 열겠다고 항의했으나 이러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원고의 심의없이 조선사의 일부가 간행되자, 육당 최남선이 강력히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조선사편수회의 제6회 위원회가 개최된 것은 조선사의 첫 3권이 나온 약 4개월 후인 1932년 7월 21일이었다. 사전 협의 없이 조선사의 일부가 간행된 것에 분노한 육당은 일제의 조선사 왜곡 의도를 간접적으로 지적하여 그들의 시인을 받아낸다.

● 최남선 : 原典의 인용이나 고감(故勘)에 있어서 일하신 분들의 노고가 마음에 걸리는 바 없지 않으나 가일층의 배려를 바란다. 예를 들면 고구려 동명왕의 곳에 인용된 "삼국유사"의 단군고기(檀君古記) 가운데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되어 있어야 할 곳을 후에 천인(賤人)의 망필로 말미암아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고쳐진 것이 그 하나다. 다 알다시피 단군고기는 본시 상당한 여러 고기록을 종합한 것을 극히 간명하게 축약한 것이므로 짤막한 몇 마디나 글씨 한자에도 어떤 경우에는 매우 중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환국(桓國)' 즉 '환나라'와 '환인(桓因)'사이에는 전문의 해석상 예부터 수상하지 않게 논쟁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경도대학의 영인본(影印本)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그 원서의 환인(桓因)의 '인(因)'자가 '국(國)'자 위에 칠을 하여 '因'자로 고쳐 놓은 것을 일견하여 바로 알 수 있다. 고전을 인용하는 경우에 가령 극히 명백한 오류하고 하더라도 이것을 함부로 경망스럽게 개찬한다는 것은 심히 부당하다는 것은 새삼 제론할 필요조차 없다. 현재 이 사서에서도 이 점에 대한 경건하고 예민한 배려가 있어야 될 줄 안다.

이상 지적한 몇가지는 잠깐 동안 발견한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 제6회 위원회에서 「삼국유사」의 개찬을 지적, '천인의 망필'이라고 울분을 터뜨린다. 육당의 지적은 「삼국유사」 정덕본의 正本이 발굴되어 今西龍 등 일본인 학자들이 개찬한 것임을 확연하게 입증하게 되었다. 일본 경도제국대학 강사로 있다가 三浦周行교수를 따라와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 20일 동안 관여하다가 사망한 今西龍은 1921년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그 모교인 경도제대에 「조선고사의 연구(朝鮮古史硏究)」라는 논문을 제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조선 중종 7년(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重刊)한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의 고조선기(古朝鮮記)중 「國」자를 「因」자로 변조, 출간하여 경도제대의 영인본(影印本)이라 하여 각계에 배포했다. 今西龍의 이같은 개찬작업은 그의 박사 학위논문인 단군신화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악용되었을 뿐 아니라 각계에 널리 유포시킴으로써 지금까지도 일부 「삼국유사」 해설 서적들이 조작된 기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옛날에 환국(桓國)이 있었다'는 기사를 환인으로 바꿔, 고조선의 입국(立國)사실을 깎아 버리고 환인과 환웅의 신화적인 존재로 조작한 원문은 '昔有桓國<謂帝釋也>庶子桓雄......>으로 되어있다. 「삼국유사」에서 단군(檀君)도 '壇君'으로 표기되어 있다.



5. 단군,기자도 '신화'로 조작

 


육당 최남선이 단군관계를 집요하게 추궁한 것은 소화 9년(1934년) 7월 30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열린 제8회 조선사편수위원회의 때였다.

◆ 최남선 : 단군, 기자는 '조선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본회의 '조선사'는 이를 수록하여야 할 제 1편에 수록하지 않고 있다. '잔무(殘務)'를 정리할 경우에 정편(正編)이나 혹은 '보편(普遍)'으로 하여 단군, 기자에 관한 사실을 편찬하여 주기 바란다.

◆ 稻葉(도엽) : 단군이나 기자는 제 1회 위원회 때에도 논의가 있었는데 우리들도 결코 등한시하고 있지 않다.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본회의 편찬 방침으로 채용한 '편년체'의 형식에는 이것을 채용할 장소가 없다. 즉 어느 왕,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기사를 넣을 것인가. 그 판연한 年次가 없으므로 우리들도 고심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수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본편에 채입하지 못하였으니 어떠한 방법으로 이것을 채입하여야 좋을지, 별편이냐, 보편이냐 교시하여 달라.

◆ 최남선 : 나는 제 1회 위원회의 일은 모른다. 단군, 기자 문제를 등한시하지 아니한다고 하니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이것을 채입할 장소에 관하여는 필경 기술적인 문제이나 단군, 기자는 그 사실만에 집착하지 말고 그 사상적, 신앙적으로 발전된 것을 종합 정리하여 '별편'으로 편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黑板(흑판) : 단군, 기자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신화적인 것으로서 사상적, 신앙적으로 발전한 것이니 사상적 방면으로 별도로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편년사'에서는 취급하기 곤란하다. 물론 이러한 사상적 신앙적인 것이 정치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은 심히 중요한 문제이나 만약 이것을 '별편'으로 하여 편찬한다고 하면 똑같이 사상·신앙적 방면에 중요한 전개를 하여 온 유교, 불교도 역시 별도로 편찬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본회의 사업이 자꾸 지연되어 있으므로 이 점은 최위원이 양해하기 바란다.

◆ 稻葉(도엽) : 단군, 기자에 대한 우리 편찬자 측으로서 편찬경과에 대하여 잠시 말씀드리겠다. 제 1편의 조선사료에 단군 기사를 수록하지 않았던 것은 해당 사실이 기본 사료로서 결정 채용된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자는 이미 지나(중국) 사료 중에 충분히 수록하였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단군의 기사에 관하여는 고려 공민황 전후의 인물인 백문보(白文寶)가 단군의 연대에 대해 상소한 것이 있고, 또 이조 세종때에 이(檀君)를 사당에 모시어 제사지내는 일을 여러 가지로 논의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서는 '백문보'의 기사 대목이나 '세종'의 기사에 이를 채입하는 것이 어떠할까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는 단군에 관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이를 채입하려고 하였으나 '편년사'에는 이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별편'으로 하는 일은 다시 상담하기 바란다.

◆ 小田(소전) : 단군 문제는 편찬 간사로부터 이것을 채입하려고 하는 고심담도 있었으나 옛날의 '편년사'에 있어서는 이를 '외사(外史)'로 따로 취급한 예가 있으므로 '별편'으로 하여 편찬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 이능화 : 단군, 기자는 심히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대가 불명하기 때문에 본편에 수록하지 못하고 '별편'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에 관한 사료가 아주 적기 때문에 '별편'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삼국유사》, 《동국통감》 및 기타 중국 사람들의 설(設)을 모아서 도엽간사가 말한 바와 같이 고려 '백문보'의 곳이나 '이조세종'의 곳에 수록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 今井田(금정전) : 단군, 기자 문제에 관하여는 여러분의 주장을 고려하여 다시 타당한 방법을 강구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완전한 것으로 할까한다. 본회의 사업은 대체적으로 예정기한을 어기지 않고 소화 10년도(1935년)에 완성하고자 하나 기한 때문에 불완전한 것을 완성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불완전한 부분은 '잔무'로서 정리할 방침을 취하도록 노력하겠다. 또한 이외로 사상, 신앙 및 기타 문화면에 관하여는 후일 다시 고려하겠다. 금후 제위께서 가일층 진력하여 줄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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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이 강력히 조선상고사의 추가수록을 요구하자 今井田 정무총감은 논쟁을 중지시키려는 듯 단군에 관하여는 여러분들의 주장을 고려하여 다시 타당한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얼버무리고 이 회의를 끝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도엽간사와 흑판 고문의 발언이다. 그는 '단군과 기자는 조선사편수회의 편찬방침이 〈편년체〉로 되어있어 포함 할 수 없다'고 강변했다. 흑판은 이 보다 한발 더 나가 단군과 기자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신화〉라고 못박았다. '조선사'의 편찬 방침을 '편년체'로 결정한 것은 바로 단군조선을 없애려는 의도임이 여기서 드러난다. 수천년 전의 고대사를 편찬하면서 '몇년 몇월 몇일'에 그런 사실이 있었느냐면서 자료를 제시하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억지인 것이다. 이렇게 '조선사'의 상고사를 없애면서도 일제는 30권으로 예정했던 편찬계획을 바꿔 35권으로 확대했다. 이는 일본인 고문과 간사가 스스로 밝혔듯이 그들은 수집된 자료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들 사료 중에는 세상에 유포되지 않은 희귀 유일 사료도 있다고 했다. 조선사편수사업개요를 보면 제 7회때 흑판고문이 '사료총간'목록을 각 위원에게 배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흑판고문은 당시 이런 말을 했으며 회의록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수집사료와 규장각 등에 소장된 것 중에는 한번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있다. 특히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당장서화첩(唐將書畵帖)》, 《군문등록(軍門謄錄)》만이라도 먼저 출간해야 한다."

조선사편수회가 위원들에게 나눠 준 목록에 몇 종의 희귀 사료가 수록되어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목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黑板勝美가 출판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 이외에도 상당한 희귀 사료가 포함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黑板勝美가 위원들에게 출판이 시급한 것을 말하라고 요구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일본 위원인 小田省吾는 조선사편수회가 작성한 목록에 이의를 제기, 선정을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小田은 목록을 열람해보니 '文祿의 役(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관한 것이 많다고 그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다음, 선정 방향을 새로 정해 취사하자고 요청한 것이다.

'조선사'를 편찬하기 전부터 사료를 탈취한 일제가 모두 얼마만큼 수집했는지 그 정확한 수자는 알 수 없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는 단지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구성했던 대정 12년(1923년)부터 소화12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4,950종이라고 밝히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일제가 얼마나 많은 사료를 탈취하여 인멸했는지 그 죄상을 밝히는 것 또한 과제인 것이다. 사료의 인멸은 조선상고사를 없애기 위한 전초작업이었기 때문이다.



5. 단군,기자도 '신화'로 조작

 


육당 최남선이 단군관계를 집요하게 추궁한 것은 소화 9년(1934년) 7월 30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열린 제8회 조선사편수위원회의 때였다.

◆ 최남선 : 단군, 기자는 '조선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본회의 '조선사'는 이를 수록하여야 할 제 1편에 수록하지 않고 있다. '잔무(殘務)'를 정리할 경우에 정편(正編)이나 혹은 '보편(普遍)'으로 하여 단군, 기자에 관한 사실을 편찬하여 주기 바란다.

◆ 稻葉(도엽) : 단군이나 기자는 제 1회 위원회 때에도 논의가 있었는데 우리들도 결코 등한시하고 있지 않다.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본회의 편찬 방침으로 채용한 '편년체'의 형식에는 이것을 채용할 장소가 없다. 즉 어느 왕,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기사를 넣을 것인가. 그 판연한 年次가 없으므로 우리들도 고심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수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본편에 채입하지 못하였으니 어떠한 방법으로 이것을 채입하여야 좋을지, 별편이냐, 보편이냐 교시하여 달라.

◆ 최남선 : 나는 제 1회 위원회의 일은 모른다. 단군, 기자 문제를 등한시하지 아니한다고 하니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이것을 채입할 장소에 관하여는 필경 기술적인 문제이나 단군, 기자는 그 사실만에 집착하지 말고 그 사상적, 신앙적으로 발전된 것을 종합 정리하여 '별편'으로 편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黑板(흑판) : 단군, 기자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신화적인 것으로서 사상적, 신앙적으로 발전한 것이니 사상적 방면으로 별도로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편년사'에서는 취급하기 곤란하다. 물론 이러한 사상적 신앙적인 것이 정치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은 심히 중요한 문제이나 만약 이것을 '별편'으로 하여 편찬한다고 하면 똑같이 사상·신앙적 방면에 중요한 전개를 하여 온 유교, 불교도 역시 별도로 편찬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본회의 사업이 자꾸 지연되어 있으므로 이 점은 최위원이 양해하기 바란다.

◆ 稻葉(도엽) : 단군, 기자에 대한 우리 편찬자 측으로서 편찬경과에 대하여 잠시 말씀드리겠다. 제 1편의 조선사료에 단군 기사를 수록하지 않았던 것은 해당 사실이 기본 사료로서 결정 채용된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자는 이미 지나(중국) 사료 중에 충분히 수록하였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단군의 기사에 관하여는 고려 공민황 전후의 인물인 백문보(白文寶)가 단군의 연대에 대해 상소한 것이 있고, 또 이조 세종때에 이(檀君)를 사당에 모시어 제사지내는 일을 여러 가지로 논의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서는 '백문보'의 기사 대목이나 '세종'의 기사에 이를 채입하는 것이 어떠할까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는 단군에 관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이를 채입하려고 하였으나 '편년사'에는 이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별편'으로 하는 일은 다시 상담하기 바란다.

◆ 小田(소전) : 단군 문제는 편찬 간사로부터 이것을 채입하려고 하는 고심담도 있었으나 옛날의 '편년사'에 있어서는 이를 '외사(外史)'로 따로 취급한 예가 있으므로 '별편'으로 하여 편찬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 이능화 : 단군, 기자는 심히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대가 불명하기 때문에 본편에 수록하지 못하고 '별편'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에 관한 사료가 아주 적기 때문에 '별편'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삼국유사》, 《동국통감》 및 기타 중국 사람들의 설(設)을 모아서 도엽간사가 말한 바와 같이 고려 '백문보'의 곳이나 '이조세종'의 곳에 수록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 今井田(금정전) : 단군, 기자 문제에 관하여는 여러분의 주장을 고려하여 다시 타당한 방법을 강구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완전한 것으로 할까한다. 본회의 사업은 대체적으로 예정기한을 어기지 않고 소화 10년도(1935년)에 완성하고자 하나 기한 때문에 불완전한 것을 완성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불완전한 부분은 '잔무'로서 정리할 방침을 취하도록 노력하겠다. 또한 이외로 사상, 신앙 및 기타 문화면에 관하여는 후일 다시 고려하겠다. 금후 제위께서 가일층 진력하여 줄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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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이 강력히 조선상고사의 추가수록을 요구하자 今井田 정무총감은 논쟁을 중지시키려는 듯 단군에 관하여는 여러분들의 주장을 고려하여 다시 타당한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얼버무리고 이 회의를 끝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도엽간사와 흑판 고문의 발언이다. 그는 '단군과 기자는 조선사편수회의 편찬방침이 〈편년체〉로 되어있어 포함 할 수 없다'고 강변했다. 흑판은 이 보다 한발 더 나가 단군과 기자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신화〉라고 못박았다. '조선사'의 편찬 방침을 '편년체'로 결정한 것은 바로 단군조선을 없애려는 의도임이 여기서 드러난다. 수천년 전의 고대사를 편찬하면서 '몇년 몇월 몇일'에 그런 사실이 있었느냐면서 자료를 제시하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억지인 것이다.

이렇게 '조선사'의 상고사를 없애면서도 일제는 30권으로 예정했던 편찬계획을 바꿔 35권으로 확대했다. 이는 일본인 고문과 간사가 스스로 밝혔듯이 그들은 수집된 자료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들 사료 중에는 세상에 유포되지 않은 희귀 유일 사료도 있다고 했다. 조선사편수사업개요를 보면 제 7회때 흑판고문이 '사료총간'목록을 각 위원에게 배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흑판고문은 당시 이런 말을 했으며 회의록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수집사료와 규장각 등에 소장된 것 중에는 한번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있다. 특히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당장서화첩(唐將書畵帖)》, 《군문등록(軍門謄錄)》만이라도 먼저 출간해야 한다." 조선사편수회가 위원들에게 나눠 준 목록에 몇 종의 희귀 사료가 수록되어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목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黑板勝美가 출판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 이외에도 상당한 희귀 사료가 포함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黑板勝美가 위원들에게 출판이 시급한 것을 말하라고 요구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일본 위원인 小田省吾는 조선사편수회가 작성한 목록에 이의를 제기, 선정을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小田은 목록을 열람해보니 '文祿의 役(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관한 것이 많다고 그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다음, 선정 방향을 새로 정해 취사하자고 요청한 것이다. '조선사'를 편찬하기 전부터 사료를 탈취한 일제가 모두 얼마만큼 수집했는지 그 정확한 수자는 알 수 없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는 단지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구성했던 대정 12년(1923년)부터 소화12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4,950종이라고 밝히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일제가 얼마나 많은 사료를 탈취하여 인멸했는지 그 죄상을 밝히는 것 또한 과제인 것이다. 사료의 인멸은 조선상고사를 없애기 위한 전초작업이었기 때문이다.



5. 단군,기자도 '신화'로 조작

 


육당 최남선이 단군관계를 집요하게 추궁한 것은 소화 9년(1934년) 7월 30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열린 제8회 조선사편수위원회의 때였다.

◆ 최남선 : 단군, 기자는 '조선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본회의 '조선사'는 이를 수록하여야 할 제 1편에 수록하지 않고 있다. '잔무(殘務)'를 정리할 경우에 정편(正編)이나 혹은 '보편(普遍)'으로 하여 단군, 기자에 관한 사실을 편찬하여 주기 바란다.

◆ 稻葉(도엽) : 단군이나 기자는 제 1회 위원회 때에도 논의가 있었는데 우리들도 결코 등한시하고 있지 않다.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본회의 편찬 방침으로 채용한 '편년체'의 형식에는 이것을 채용할 장소가 없다. 즉 어느 왕,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기사를 넣을 것인가. 그 판연한 年次가 없으므로 우리들도 고심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수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본편에 채입하지 못하였으니 어떠한 방법으로 이것을 채입하여야 좋을지, 별편이냐, 보편이냐 교시하여 달라.

◆ 최남선 : 나는 제 1회 위원회의 일은 모른다. 단군, 기자 문제를 등한시하지 아니한다고 하니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이것을 채입할 장소에 관하여는 필경 기술적인 문제이나 단군, 기자는 그 사실만에 집착하지 말고 그 사상적, 신앙적으로 발전된 것을 종합 정리하여 '별편'으로 편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黑板(흑판) : 단군, 기자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신화적인 것으로서 사상적, 신앙적으로 발전한 것이니 사상적 방면으로 별도로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편년사'에서는 취급하기 곤란하다. 물론 이러한 사상적 신앙적인 것이 정치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은 심히 중요한 문제이나 만약 이것을 '별편'으로 하여 편찬한다고 하면 똑같이 사상·신앙적 방면에 중요한 전개를 하여 온 유교, 불교도 역시 별도로 편찬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본회의 사업이 자꾸 지연되어 있으므로 이 점은 최위원이 양해하기 바란다.

◆ 稻葉(도엽) : 단군, 기자에 대한 우리 편찬자 측으로서 편찬경과에 대하여 잠시 말씀드리겠다. 제 1편의 조선사료에 단군 기사를 수록하지 않았던 것은 해당 사실이 기본 사료로서 결정 채용된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자는 이미 지나(중국) 사료 중에 충분히 수록하였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단군의 기사에 관하여는 고려 공민황 전후의 인물인 백문보(白文寶)가 단군의 연대에 대해 상소한 것이 있고, 또 이조 세종때에 이(檀君)를 사당에 모시어 제사지내는 일을 여러 가지로 논의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서는 '백문보'의 기사 대목이나 '세종'의 기사에 이를 채입하는 것이 어떠할까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는 단군에 관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이를 채입하려고 하였으나 '편년사'에는 이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별편'으로 하는 일은 다시 상담하기 바란다.

◆ 小田(소전) : 단군 문제는 편찬 간사로부터 이것을 채입하려고 하는 고심담도 있었으나 옛날의 '편년사'에 있어서는 이를 '외사(外史)'로 따로 취급한 예가 있으므로 '별편'으로 하여 편찬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 이능화 : 단군, 기자는 심히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대가 불명하기 때문에 본편에 수록하지 못하고 '별편'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에 관한 사료가 아주 적기 때문에 '별편'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삼국유사》, 《동국통감》 및 기타 중국 사람들의 설(設)을 모아서 도엽간사가 말한 바와 같이 고려 '백문보'의 곳이나 '이조세종'의 곳에 수록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 今井田(금정전) : 단군, 기자 문제에 관하여는 여러분의 주장을 고려하여 다시 타당한 방법을 강구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완전한 것으로 할까한다. 본회의 사업은 대체적으로 예정기한을 어기지 않고 소화 10년도(1935년)에 완성하고자 하나 기한 때문에 불완전한 것을 완성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불완전한 부분은 '잔무'로서 정리할 방침을 취하도록 노력하겠다. 또한 이외로 사상, 신앙 및 기타 문화면에 관하여는 후일 다시 고려하겠다. 금후 제위께서 가일층 진력하여 줄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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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이 강력히 조선상고사의 추가수록을 요구하자 今井田 정무총감은 논쟁을 중지시키려는 듯 단군에 관하여는 여러분들의 주장을 고려하여 다시 타당한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얼버무리고 이 회의를 끝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도엽간사와 흑판 고문의 발언이다. 그는 '단군과 기자는 조선사편수회의 편찬방침이 〈편년체〉로 되어있어 포함 할 수 없다'고 강변했다. 흑판은 이 보다 한발 더 나가 단군과 기자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신화〉라고 못박았다. '조선사'의 편찬 방침을 '편년체'로 결정한 것은 바로 단군조선을 없애려는 의도임이 여기서 드러난다. 수천년 전의 고대사를 편찬하면서 '몇년 몇월 몇일'에 그런 사실이 있었느냐면서 자료를 제시하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억지인 것이다. 이렇게 '조선사'의 상고사를 없애면서도 일제는 30권으로 예정했던 편찬계획을 바꿔 35권으로 확대했다. 이는 일본인 고문과 간사가 스스로 밝혔듯이 그들은 수집된 자료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들 사료 중에는 세상에 유포되지 않은 희귀 유일 사료도 있다고 했다. 조선사편수사업개요를 보면 제 7회때 흑판고문이 '사료총간'목록을 각 위원에게 배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흑판고문은 당시 이런 말을 했으며 회의록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수집사료와 규장각 등에 소장된 것 중에는 한번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있다. 특히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당장서화첩(唐將書畵帖)》, 《군문등록(軍門謄錄)》만이라도 먼저 출간해야 한다."

조선사편수회가 위원들에게 나눠 준 목록에 몇 종의 희귀 사료가 수록되어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목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黑板勝美가 출판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 이외에도 상당한 희귀 사료가 포함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黑板勝美가 위원들에게 출판이 시급한 것을 말하라고 요구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일본 위원인 小田省吾는 조선사편수회가 작성한 목록에 이의를 제기, 선정을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小田은 목록을 열람해보니 '文祿의 役(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관한 것이 많다고 그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다음, 선정 방향을 새로 정해 취사하자고 요청한 것이다.

'조선사'를 편찬하기 전부터 사료를 탈취한 일제가 모두 얼마만큼 수집했는지 그 정확한 수자는 알 수 없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는 단지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구성했던 대정 12년(1923년)부터 소화12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4,950종이라고 밝히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일제가 얼마나 많은 사료를 탈취하여 인멸했는지 그 죄상을 밝히는 것 또한 과제인 것이다. 사료의 인멸은 조선상고사를 없애기 위한 전초작업이었기 때문이다.


8. 개국 기록한 正史는 모두 인멸

 


우리 민족의 기원을 밝힌 개국사(開國史)는 어찌하여 한권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인가? 고려시대의 사서가 몇 종류 있다. 하지만 왜 이들 사서는 삼국 이전의 상고사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고 있을까? 개국 설화를 담은 고문헌마저 5천년 역사를 가졌다는 이 민족은 어찌하여 갖고 있지 못한 것일까? 우리 나라의 역사 서적을 뒤질 때마다 누구나 느끼는 의문일 것이다.

개국설화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인위적으로 없앴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민족 기원과 관련되는 사서들을 모조리 탈취, 소각, 인멸했던 일제는 다음과 같은 문헌만을 남겨 둠으로써 오히려 그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고려시대의 사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7언한시로 된 《제왕운기》가 그것이다. 정사(正史)로 분류되는 《삼국사기》와 야사(野史)라고 한때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삼국유사》는 우리나라 상고사에 관해 판이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는 삼국이전의 상고사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삼국유사》는 '단군'을 불교신화로 각색한 것이다. 결국 이들 두 사서는 '단군'을 부정하는데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현재 우리가 거론하는 '단군'은 《삼국유사》를 전거로 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昔有桓國<謂帝釋也> 庶子桓雄......이라고 기록, 단군을 제석(帝釋)의 아들로 만들어 놓았다. 《삼국유사》는 단군을 불교신화처럼 각색한 것이다.

일제가 조선의 사료를 불태워 모두 없애려고 했지만 한편에서는 우리의 선대들이 새로운 자료를 찾고 다시 저술하여 광복 후 조선의 정사를 쓰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광복 후에도 이들의 노력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가 편찬한 《조선사》는 사료로 활용하면서도 목숨을 내걸고 이 나라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선대들이 만들어 놓은 사서들은 기피하고 있다.

'단군'은 1천 8백 살이나 살았다는 신령이라더라. 고등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지식인들까지도 '단군'을 설화적인 존재로 격하시키는 태도를 알게 모르게 내보이고 있다. 한국의 상고사는 이야기처럼 흘려보내야만 싫증적인 근대 사학을 배운 지식인처럼 오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서의 저본이 된 《규원사화》를 비롯 《조선세가보》, 《동사연표》 등은 단군조선의 왕대(王代)까지 밝히고 있으니 이는 어인 일일까?


9. 《규원사화》도 탈취,소각

 


우리나라의 고사서를 분류하면 유가사서, 불가사서, 도가사서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사서 가운데 '도가사서'는 민족정기를 키우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나 고려 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이후 유학자들로부터 배척당하기 시작했다. 황당무계한 비사(秘史), 비기(秘記), 참서(讖書)라고 하여 이단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도가사서'들은 고가(古家)나 암혈(岩穴) 등에 묻혀서 그 잔질(殘帙)이 연면히 계승되어 왔다. 적어도 '단군조선사'에 관하여는 '도가사서'만큼 풍부한 기록을 남기는 사서들도 없다. 역사의식에 있어서도 '도가'만큼 고유의 전통문화를 자부하고 존중하며 존화사대주의 사상을 통렬하게 비판한 사가들도 없다. 이들 '도가사서' 중 현존하는 사서 가운데 단군조선사에 관하여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가장 방대한 고사기류와 문헌을 바탕으로 하여 비교적 상세하고 합리적으로 저술한 단군실사(檀君實史)가 바로 《규원사화》라고 할 수 있다.

《규원사화》는 지금으로부터 310년 전인 근세조선 제19세 숙종 2년 을묘(단기 4008, AD 1675) 3월 상순에 저술된 사서이다. '단군실사'라고도 하는 이 책의 저자는 불행하게도 이름(실명)을 밝히지 않고 오직 '북애'(北崖老人 또는 北崖仙人, 혹은 北崖子)라는 아호만 서문에 쓰고 있다. 이 《규원사화》는 일제가 소위 '조선사편찬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가 이 나라 사서를 탈취, 소각할 때에 거의 전부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양주동이 감추어 두었던 소장본을 일제 치하인 1940년(단기 4273년) 9월 손진태가 극비리에 필사하여 두었다가 광복 후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서울대학교 도서관 및 국립중앙도서관에 각각 1부씩 기증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존하는 것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필사본뿐이다. 《규원사화》는 그 내용이 ① 서문 ② 조판기 ③ 태시기 ④ 단군기 ⑤ 만설 등 5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화(史話)'는 '유가사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까다로운 범례나 주석 따위는 없으며 문장의 체제도 편년체나 강목체가 아니고 설화체로 되어 있다. 오히려 현대사서에 가까운 자유로운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북애노인이 《규원사화》에 쓴 서문(신학균 역 참조)은 다음과 같다.

북애자는 이미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붓을 던지고 강호에 떠돌아다니기 여러 해가 되었다. 내 발길은 이 나라 구석구석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물에 빠져 죽을까 하는 슬픈 생각도 했다. 때는 양난 (병자호란, 임진왜란)을 겪은 뒤라 삼천리 방방곡곡은 슬픔에 잠겼고 국론은 물끓 듯하며 관리들과 백성들은 울분에 가득 차 있었다.

......<중략>......

동해에 솟아오르는 해를 바라보니 눈물이 흘렀다. 티끌같은 세상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나서 다시 서쪽으로 떠났다. 구월산에 이르러 당장평에 머물며 삼성사(三聖祠)에서는 감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평양을 거쳐 압록강 하구의 용만에 이르렀다. 통군정에 올라 북쪽 요동반도를 바라보니 나무와 구름이 손짓하듯 부르면 대답할 것 같이 가까이서 머뭇거리고 있다.

한 줄기의 압록강을 넘어서면 벌써 우리 땅이 아니다. 슬프다! 우리 조상이 살던 옛 강토가 남의 손에 들어간 지 얼마요, 이제 그 해독이 날로 심하니 옛날이 그립고 오늘이 슬퍼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중략>......

내가 보건데 조선은 국사(國史)가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걱정이다. 우리나라의 옛 경사(經史)는 여러번의 병화를 입어 없어지고 흩어졌다. 그런 중 후세에 고루한 이들이 중국의 책에 빠져 주(周)나라를 높이는 사대주의만이 옳다고 했지 먼저 그 근본을 세워 내 나라를 빛낼 줄 몰랐다. 이는 등이나 칡덩굴이 곧게 뻗어갈 줄은 모르고 얽히고 맺히기만 하는 것과 같다. 어찌 천하지 아니한가.

......<중략>......

내가 일찌기 국사를 써보고자 하는 뜻은 있었지만 본디 그 재주가 없고 또 명산(名山) 석실(石室)에도 진장(珍藏)이 없고, 나 또한 씻은 듯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니 어쩌랴.

그러나 다행이도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 《진역유기》 중 삼국 이전의 고사(故史)를 얻었다. 비록 그것이 간략하고 자세하지는 못하나 항간의 선비들이 구구하게 떠드는데 비하면 오히려 씩씩한 기운이 더 높다. 이에 한사제전(漢史諸傳)에서 글을 빼내 사화를 만들며 자주 밥 맛을 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사람이 있어 이 뜻에 동감하랴.

슬프다.

후세에 만일 이 책을 잡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넋이라고 한 없이 기뻐하리라.


숙종 원년 을묘 삼월 상순, 북애노인이 규원초당에서 서문을 쓴다.

북애노인의 《규원사화》서문은 읽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오늘의 우리는 국사(國史)를 가지고 있는가? 북애노인의 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아! 역시 슬프다.



10. 북애자가 눈물로 쓴 한민족사

 


북애(北崖)가 눈물로 쓴 한민족의 역사 《규원사화》는 개벽(開闢) 신화로 시작된다. 《규원사화》의 개벽신화인 「조판기」는 지금까지 알려진 다른 설화들과 달리, 천지의 개창과정을 언급한 것이 특이하다. 천지가 개창되어 환웅이 하강할 때까지의 기간은 수십만년으로 되어 있다. 「태시기」는 환웅이 동방을 다스리던 궐년(闕年 : 수만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른 바 신시시대다. 이 시대에 치우씨(蚩尤氏), 고시씨(高矢氏). 신지씨(神誌氏), 주인씨(朱因氏) 등의 씨명(氏名)이 등장한다. 물론 이 시대에는 한자가 없었으므로 일부에서 주장하는 약속의 기호인 고유 문자나 구전되어 온 것을 후대에 한자를 빌어 기록했을 것이다. 신시시대의 영토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남방, 즉 중국 동북방에는 치우씨의 족이 거주하고 북동지방에는 신지씨, 그리고 동남지방(한반도 북부)에는 고시씨가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고시씨의 후예는 후에 계속 한반도의 남쪽으로 뻗어 내려왔다. 치우씨는 계속 서남쪽으로 진출하여 중국 제족을 정복하면서 영토를 확장했다. 신시의 천왕 환웅은 말년에 태백 산정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놓고 신선이 되어 승천하였다고 하며 다음은 단군의 시대로 이어진다. 《규원사화》의 「단군기」는 환웅의 아들 환검(桓儉)이 백산(白山) 단목 아래에서 즉위한 후로부터 마지막 왕인 제47세 고열가(古列加) 단군이 아사달의 당장경(唐莊京)에 들어간 1195년 동안의 기록이다. 때문에 「단군조선 실사(實史)」라고 한다. 이 부분이 바로 《규원사화》의 본론에 해당한다.

 

◇ 단군조선역대세계(世系) (재위년수)


1세 시조단군 (壬儉 또는 桓儉, 93)

2세 부루(夫婁, 34)

3세 가륵(嘉勒 , 51)

4세 오사구(烏斯丘, 49)

5세 구을(丘乙, 35)

6세 달문(達門, 32)

7세 한율(翰栗, 25)

8세 서한(西翰, 일명 烏斯含, 57)

9세 아술(阿述, 28)

10세 노을(魯乙, 23)

11세 도해(道奚, 36)

12세 아한(阿漢, 27)

13세 흘달(屹達, 43)

14세 고불(古弗, 29)

15세 벌음(伐音, 33)

16세 위나(尉那, 18)

17세 여을(餘乙, 63)

18세 동엄(冬奄, 20)

19세 구모소(구牟蘇, 25)

20세 고홀(固忽, 11)

21세 소태(蘇台, 33)

22세 색불루(索弗婁, 17)

23세 아물(阿勿, 19)

24세 연나(延那, 13)

25세 솔나(率那, 16)

26세 추노(鄒魯, 9)

27세 두밀(豆密, 45)

28세 해모(奚牟, 22)

29세 마휴(摩休, 9)

30세 내휴(奈休, 53)

31세 등올(登올, 6)

32세 추밀(鄒密, 8)

33세 감물(甘勿, 9)

34세 오루문(奧婁門, 20)

35세 사벌(沙伐, 11)

36세 매륵(買勒, 18)

37세 마물(麻勿, 8)

38세 다물(多勿, 19)

39세 두홀(豆忽, 28)

40세 달음(達音, 14)

41세 음차(音次, 19)

42세 을우지(乙于支, 9)

43세 물리(勿理, 15)

44세 구홀(丘忽, 7)

45세 여루(餘婁, 5)

46세 보을(普乙, 11)

47세 고열가(古列加, 20)

 

여기에 한가지 특기할 사실은 「단군기」에 나오는 47세 단군 1,195년 동안에 조선이 중국의 하(夏), 상(商 ; 殷) 왕조와 전쟁을 한 회수가 대략 8, 9회가 된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제24세 연라(延那) 2년 경인(庚寅 ; 단기 803, BC 1531)에 은(殷)이 조선의 남계를 먼저 침범하다가 격퇴당한 사실이 한번 있었던 것 이외에는 언제나 조선 측에서 하, 상왕조를 먼저 공격했고 대개의 경우 국경을 넘어서 중국 본토에 진격하여 승첩을 거두고 돌아왔다고 한다. 단군조선의 소위 극성(極盛)시대라고 볼 수 있는 제13세 흘달(屹達) 단군 때부터 제15세 벌음(伐音) 단군 때까지 약 100여 년간 (단기 491~595, BC 1843~1739)은 조선의 군대가 하나라의 산서(山西) 지방까지 깊숙히 진격하여 공략하여 마침내 하왕조가 화해를 청해 이를 수락했다는 것이다.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당시 조선에 있던 제사서(諸史書)와 중국 고서에서 사실(史實)을 확인하여 단군조선의 왕대와 중국과의 접전 화해 상황까지 밝힌 북애자는 '한나라는 한나라요.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이니 어찌 당당한 진역(震域)을 견주어야만 만족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북애는 이같은 역사가 선가(仙家)에 살아 있다면서 또다른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북애가 중국 사서에서 찾아 고조선과 중국의 전쟁기록을 삽입하여 고조선의 실체를 규명하고 있는 것이다. 300여년 전의 사화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읽기는 어색한 경우도 없지 않으나 사실(史實)을 대비한 것은 괄목할 사료(史料)의 발굴인 것이다.



11. 역대 임금을 신화적 인물로 날조

 


북애(北崖)의 《규원사화》는 단군조선 역대 임검들의 치적도 밝히고 있다. 신화 속의 인물처럼 외면당해 온 시조 단군은 인간의 시대를 연 분명한 사람으로 《규원사화》는 기록하고 있다. 비록 시조 단군이 신시천왕(神市天王) 환웅의 아들로 신화적인 인물로 묘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가 4명의 아들을 둠으로써 「인간군주」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시조 단군의 등장은 이 땅에서 체제를 갖춘 지배집단의 탄생을 의미한다. 군웅이 할거하던 제족을 통일한 강력한 통치자로 인간시대의 개막을 증거하는 것이다. 시조 단군이 신화적인 가상 인물이 아니라 제족을 거느리고 자손을 낳아 지배체제를 굳혀 나간 실존의 인물이란 것은 그의 개국(開國)의 치적만이 아니라 자손들의 활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들 단군조선 시대 역대 임검들의 치적은 중국과 대응관계에서 두드러지고 있으며 이는 중국의 고사들에서도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규원사화》에 나와 있는 단군조선 시대 역대 임검들의 치적을 우선 살피면서 중국의 고사들과 대비하면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될 것이다. 《규원사화》의 「단군기」에 나와 있는 단군조선 역대 임금들의 치적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제2세 단군 부루 임검은 즉위 후 8년 동안 나라 안을 두루 살피고 예(禮)로서 제천(祭天)하고 제후들에게도 옛날과 같이 제사 지내도록 했다. 부루가 임검에 오를 때 우(虞)나라는 남국(藍國)과 인접한 땅을 영토로 삼은 지 수 십년이 되었다. 부루는 제가(諸加)에게 그 땅을 치도록 하여 이를 다 쫓으니 온 세상의 제후들이 와서 임검으로 섬기겠다고 했다. 그 수가 수십이나 되었다. 이에 「어아지악(於阿之樂)」을 지어 사람들과 신령을 기쁘게 하였다. 「어아」라는 것은 기뻐서 하는 말이다.

「선라」를 「앙숙」땅에 봉했다가 수년 후에 도라(道羅)와 동무(東武)를 함께 맡도록 하고 그 공을 표창했다. 이들 나라는 후에 옥저(沃沮), 비류(沸流), 졸본(卒本) 등이 되었다. 부루는 임검이 된 지 34년 만에 사상을 떠났다.

제3세 단군 가륵(嘉勒) 임검은 성덕이 높았다. 「가륵」은 구실씨로 「용가」를 삼아 더욱 융성했다. 때마침 하왕(夏王)이 덕을 잃어 신하 중에 모반하여 왕의 자리를 노리는 자가 있었다. 이에 「식달」에게 「남국」과 「진번」의 백성을 이끌고 이를치게 하니 나라의 위엄은 더욱 빛나게 되었다. 왕위에 올라 51년 동안 성덕을 펴, 백성들이 모두 그에게 감화되었다. 세상을 떠날 때 가륵 임검의 나이는 84세였다.

제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는 「가륵」의 아들이다. 오사구 임검은 북쪽으로 돌아다니다가 신령한 풀을 얻었고 천하를 21주(州)로 나눴다. 임검 자리에 있을 지 49년 만에 돌아가시니 그의 아들 구을(丘乙)이 제5세 단군이 되었다.

구을 임검이 즉위한 후 하(夏)나라 백성들이 우리나라를 많이 찾아와 암려흘에 살게 했다. 태백산을 막아 일반 백성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왕위에 있은 지 35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그의 아들 달문(達門)이 제6세 단군이 되었다.

달무 임검은 날 때부터 특이하더니 자라면서 덕성이 높아졌다. 달문 임검은 동해 사람 여로(黎老)를 얻어 「용가」를 삼았다. 임검의 덕은 빛나고 백성들은 악한 것을 몰라 번민을 알지 못했다. 말문 임검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왕이 되어 32년 만에 사상을 떠나니 그의 아들 한률(翰栗)이 제7세 단군이 되었다.

한률 임검은 「오직 죄 지은 자는 범한 대로 돌아가고 도를 닦은 자는 이룬다」고 말하여 더욱 덕으로 다스렸다. 즉위한지 25년 만에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서한(西瀚)이 제8세 단군이 되었다.

오사함(烏斯含)이라고도 하는 서한 임검은 조세제도를 만들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생산량의 90분의 1을 바치게 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게 했다. 재위 57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아술(阿述)이 임검이 되니 제9세 단군이다. 어진 아술 임검은 덕이 높았다. 백성 중에 금한 것을 범하는 이가 있다 하니 임검은 「똥구덩이가 비록 더럽기는 하나 그 곳에도 이슬이 내리는 때가 있다」면서 벌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했다. 이에 죄를 범한 이가 감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되었다. 재위 28년 만에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노을(魯乙)이 임검이 되었다.

제10세 단군 노을은 울을 만들어 짐승을 기르게 하였다. 재위 2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도해(道奚)가 제11세 단군이 되었다. 임검이 된지 3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도해의 아들 아한(阿漢)이 제 12세 단군이 되어 27년 동안 재위했다.

아한의 아들 흘(屹達)이 제13세 단군 임검이 되었다. 흘달은 무술이 뛰어나고 용기가 있어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했다. 흘달 임검은 해문(奚門)을 얻어 「용가」를 삼았다. 이 때 하(夏)나라의 덕이 시들어가므로 사람을 보내 그 다스림을 보게 하고 무악(舞樂)으로 시험하게 하였다. 임검에 올라 43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그 아들 고불(古拂)이 단군이 되었다. 제14세 단군 고불 임검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국방에 힘을 기울여 오래도록 태평했다. 제위 29년 만에 사상을 떠났다.

고불의 아들 벌음(伐音)이 제15세 단군 임검이 되었다. 벌음 임검은 훈화(薰華)를 뜰 아래 심어 정자를 만들고 말량(末兩)으로 하여금 「용가」를 삼았다. 임검은 「어린아이도 귀염을 주는 사람에게 돌아가니 백성을 보살피는 도리를 잠시라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같이 덕으로 정치하니 모든 백성이 화답했다. 때마침 「하왕」이 사신을 보내어 도와주기를 바라므로 이에 말량에게 군사를 이끌고 나가 구해 주게 하였다.후에 「하왕」이 다시 군사를 요청했으나 그 무도함을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았다. 상(商)나라의 탕왕(湯王)이 어진 정치를 크게 베푸는 것을 보고 벌음 임검은 「덕이 있는 임검이다. 서로 침범함이 좋지 않다」고 해싿. 이에 군사를 거두고 화해했다. 백성들에게 80분의 1의 세금을 바치게 했다. 재위 33년 만에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위나(尉那)가 임검이 되었다.

제16세 단군 위나 임검 때는 나라 안이 조용했다. 제위 18년 만에 사상을 떠나니 그의 아들 여을(餘乙)이 제17세 단군이 되었다. 임검이 된지 63년 만에 사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동엄(冬奄)이 제18세 단군이 되었다. 동엄 임검 「웅가」 충달이 「어찌 온 바닷물을 마시고 비로소 짠 것을 깨달을 것인가. 황조(皇祖)가 나라의 터전을 잡은 지 7백년에 이르렀는데 반란의 무리가 방자하게 횡포하여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치니 이는 성도가 쇠한 까닭이요. 임검은 덕을 닦으소서」하고 간하였다. 동엄 임검이 크게 선군의 덕을 닦고 충달에게 서쪽 변두리로 나가 백성들을 어루만지게 했다. 왕위에 오른지 몇 해가 안 되어 머리카락으로 신을 결어서 그 덕을 갚았다. 재위한지 20년 만에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구모소(?牟蘇)가 임검이 되었다. 제19세 단군 구모소 임검은 남쪽으로 나가 낙랑홀에 성곽을 수축했다. 즉위한 지 25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그의 아들 고흘(固忽)이 임검이 되었다.

제20세 단군 고홀 임검은 「속진후」가 돈피로 만든 가죽옷을 바치었으므로 이를 잘 보관해 두고 공이 있는 이들을 기다렸다.

단군조선 47세 임검 중 20세 고홀 임검까지의 치적을 대강 간추린 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사실은 제2세 단군 부루 임검 때 무악(舞樂)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무악은 태초의 인간 탄생부터 함께 하였을 것이나 부루 임검 때의 무악은 체제를 갖춘 지배집단의 의식(儀式) 무악으로 발전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악으로 하(夏)나라를 시험했다는 것은 그 당시 중국과 대비하여 단군조선이 상당한 선진 문화를 가졌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또한 조세(組稅)제도가 단군 조선 시대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제9세 단군 서한 임검 때(단기 320년경, B.C. 2014) 백성들에게 수확물의 90분의 1을 바치게 한 것은 국가의 재정을 충당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 세금은 제15세 단군 벌음 임검 때 80분의 1을 바치도록 세율이 높아진다. 세율을 높인 것은 지배집단의 재정적인 압박에 기인할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지배집단으로 강력해진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단군조선 시대 임검들은 제후를 거느린 것으로 되어있다. 이들 봉후국들은 단군조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직접 원조를 하고 중국과의 접전은 이들이 전초를 선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단군 임검을 중심으로 동북아 일대를 지배하는 막강한 협력체제를 구축했었다는 증거자료가 될 것이다.

초기의 단군 조선은 이들 중국 사서에 나오는 하,상나라 등과 접촉했고 군사력이나 문화수준은 중국보다 앞섰다고 「북애」의 《규원사화》는 기록하고 있다. 단군 조선이 하나라의 왕조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군사를 보내 지켜 주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학문으로 승화(?)시킨 역사왜곡학 (1) -상선약수님-

 

에도시대(江戶時代), 朝鮮通信使들이 문맹자가 득실 거리는 日本에 학문을 가르쳐 주자, 간신히 무지에서 깨어난 日本은 자신들의 미개성을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래서 한다는 것이 고작 歷史歪曲으로 日本史를 끝없이 부풀리는 것이었다. 일본이 왜노국(倭奴國, 순종해야 하는 종놈의 나라. 그래도 일본은 倭奴國이라는 사실에 엄청 자랑스러워 한다)임을 알려주는 列島의 유적, 유물을 마구잡이로 왜곡, 날조해서 허구의 소설을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역사왜곡 한다고 세상에 대고 떠벌일 수는 없으니까, 國學이니, 미도학(水戶學)이니, 국수주의니 하고 포장해서 불러오고 있다. 이렇게 만든 소설을 서양에다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다, 우리나라는 칼부림하는 사무라이 까지도 교양과 의리로 똘똘 뭉친 지성인이다”라며 소개했다. 국학 혹은 미도학이라는 역사왜곡학(歷史歪曲學)의 약점은 바로 치밀하지 못하다는 것. 날조사실을 감추기 위해 주인나라를 강점한 35 년 동안, 李氏朝鮮의 역사서를 모조리 강탈, 분서하고 유적, 유물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대체로 조악하고 무식했던 서양의 중세 기사들과는 달리, 일본의 사무라이 계급은 시, 회화, 서예와 기타 예술을 능히 이해했다. ...... 이와 같은 교양을 갖추고 있기는 했지만, 사무라이는 어디까지나 전사였다.

교양있는 인간이 제 배를 칼로 휘젓고 비틀어 갈라서 자살하는 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가? 교양이 공공장소에서 너나없이 뒹굴며 집단섹스하고 칼부림치는 데서 생겨 나는가? 라이프 2 차 대전은 일본의 사무라이 계급이 무슨 대단한 교양과 지식의 소유자인 양 기술하고 있으나, 실상은 하나같이 문맹자들 이었다. 요컨대 조선통신사가 倭奴 땅을 방문하기 이전 까지만 해도 日本에는 까막눈 천지였다. “대체로 조악하고 무식했던 서양의 중세기사”들 조차 일본 사무라이에 비하면, 교양인이고 지성인 이었다.

사무라이라는 것들은 “다만 귀로 듣는 이야기고, 눈으로는 그림만 보게 만든 그림 이야기책(에토키 : 繪解き)를 즐겼”(靑木美智男 外, 祥解日本史)다. 에토키란 회해(繪解), 즉 그림으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놀랍게도 인터넷에는 에토키에 관한 글이 전혀 올라와 있지 않다. 대체 우리나라 일본사 전공자들은 어떤 것을 연구해야 하는지 모르는 모양인데, 에토키가 단연 0순위다. 에토키만 연구해도 “대체로 조악하고 무식했던 서양의 중세기사”들조차 일본 사무라이에 비하면, 교양인이고 지성인일 정도로 倭奴 땅에 있는 문화는 절대 倭奴가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투항한 왜군 1 만 명중 오직 사야가(沙也可 : 金忠善 1571~1642)만이 책을 써 남겼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倭奴 1 만 명중 하나 꼴로 글을 쓸 수 있었다는 얘기다.

사무라이는 미개했던 倭奴 땅에서 朝鮮通信使에 의해 계몽된 마지막 집단 이었다. 그러나 사무라이들이 朝鮮通信使에 의해 직접 계몽된 것은 아니다.

朝鮮通信使가 학문과 문화를 가르쳐 주자, 어이 없게도 倭奴 땅에서는 퇴폐소설 등이 기승을 부렸다. 도시 상공인 쵸오닌(町人)이 주도 했는데, 겐로쿠(元祿) 문화라고 부른다. 겐로쿠 문화의 특징은 한 마디로 퇴폐성이다. 대표적인 것이 우키요조우시(浮世草子)와 가부키(歌舞伎)이다. 기껏 우리나라 문화재를 약탈하고 李氏朝鮮의 陶工과 예술가를 납치하고 朝鮮通信使를 초빙해서 한다는 짓이 섹스고 퇴폐문화의 융성 이었던 것이다.

무식을 자랑하며 장구한 세월을 버틴 사무라이가 글을 읽고 쓰는데, 관심을 가진 이유는 더 웃긴다. 퇴폐소설 우키요조우시(남이 浮世草子를 읽어준다 해보라. 일주일, 한달에 고작 한 권밖에는 못 읽는 걸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를 읽기 위해서였다. 퇴폐소설이 오늘날 일본이라는 국가 발전의 원동력 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倭奴들은 스스로 이렇게 세뇌한다.

[노기(乃木)는] 일본정신을 나타내는 서도, 분재기술, 지성을 고루 갖춘 군인의 대표였다.

에드워드 베르(Edward Behr)의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서양에다 오늘날까지 연신 그렇게 소개했다는 소리다. 언제부터 일본정신이 서도와 분재, 지성을 나타냈는가? 倭奴民族이 언제부터 지성적이었는가? 朝鮮通信使들이 학문을 전파해주자, 고작 퇴폐소설 우키요조우시(浮世草子)나 읽으려고 문맹 상태에서 깨어났지 않았는가? 서예와 분재를 하는 李氏朝鮮의 선비가 그토록 부러웠나?

퇴폐소설 우키요조우시(浮世草子)에는 지성적인 倭奴가 書道도 하고 盆栽도 하는가? 퇴폐소설 우키요키우시에서 깨달음을 얻어 지성적이 되기로 했는가? “아, 미개 일본사를 지우고 찬란한 역사로 날조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전통적으로 서도와 분재를 했다고 날조하는 것이 최고구나!” 싶었는가? 종놈의 티를 감추려고 지난 2 세기 동안 기를 썼구나!

서양에다 일본 사무라이들이 지성적이라고 알릴 수 있었던 것도, 서도를 하고 분재를 한다고 알릴 수 있었던 것도, 다 朝鮮通信使가 學問과 文化를 전수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未開 日本史가 수치스러운 건 아는가?

일본이 언제부터 文盲時代로 추락 했는지는 日本書紀의 일본왕 연대표로 추정할 수 있다. 946 년에 즉위한 59 대 우다(宇多; 집이 많다)부터 도저히 한 나라의 통치자 로서는 가질 수 없는 이름들이 등장한다. 63 대 冷泉(찬 샘) 70 대 後冷泉 (나중에 발견한 찬 샘)이다. 65 대 花山(꽃이 핀 산) 66 대 부터는 주로 가지 하나, 둘, 셋이 나오는데, 그나마 순서대로가 아니다. 빼먹은 가지도 있다.

文字를 안다면, 도저히 지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9 세기 말 부터 暗黑時代로 회귀해서 1607  년 朝鮮通信使가 와서 가르쳐줄 때까지 倭奴民族은 7 백년간 文盲者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1607 년 이 후로도 이상한 이름들이 띄엄띄엄 이어진다. 108 대 後水尾다, 나중에 물의 꼬리가 어쨌는데? 111 대 後西는 서쪽도 아니고 후에 서쪽 이란다! 113 대 東山은 동쪽에 있는 산이고. 114 대는 中御門이다. 御門은 메이지 이전에 日本王을 부르는 호칭 중 하나였다. 그런데 中御門 이라니! 大御門, 小御門도 있었다는 소리 아닌가. 이밖에도 꽤 있다. 아키히토는 今上이다. 임금이란 소리지만, 이런 것을 연호로 쓰고 싶을까.

도대체 한 나라의 통치자 한테도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주지 못하는 저 민족이 지성적일 수 있는가. 기 쓰고 서도와 분재 하면서 日本精神이나 과시하지 말고 우두머리 이름이나 제대로 지어주지. 그게 뭐냐?

그래서 우월감 조차도 날조해야 했다. 그래서 朝鮮通信使 에게서 글을 배우자 마자, 歷史歪曲에 나섰던 것이다. 역사왜곡한 사실을 다른 나라가 알까 두려워 國學이니, 미도학(水戶學)이니 國風이니 하며 불렀던 것이다.

“日本의 이웃나라들에 대한 해묵은 우월감의 발로”(라이프 2 차 대전)란다! 가소롭구나! “해묵은 열등감”밖에 더 가져봤는가? 날조라도 안하면, 倭奴民族이 언제 우월감 이라도 가져 보았을까? 劣等感에 짓눌러 산 민족이 倭奴民族이다.

倭奴民族이 아무렇게나 써대면, 그것이 다 객관적 증거고 실증사학의 근거가 되는가?

실컷 문명을 이식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文明國에서 자진하여 未開國으로 추락한 나라는 세계사에서 일본이 유일무이하다. 문명국에서 미개국으로 떨어진 나라에 또 다시 같은 나라가 대가없이 문물을 전수해준 것은 세계사에서 韓國이 유일무이하다. 한국은 미개 중국에도 온갖 문물을 퍼다 날라 주었다.

日本史를 날조하기 전에는 저 미개민족은 이렇게 살았다.

조선에 파견된 일본의 입국왜인의 수는 조선통신사 보다 훨씬 많은 수이다. 조선 전기, 왜인이 통교를 위해 도항한 횟수는 무려 4,800 여 건에 달한다. 이 중 무로마치(室町)막부 장군이 조선국왕에게 보낸 사절만 65 회에 달하였다. 1467 년 오닌(應仁)의 난 이후 막부(幕府)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막부의 관리도 독자적으로 사절을 파견 하기에 이르렀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의하면 막부가 보낸 일본국왕사, 대호족이나 호소카와와 같은 중심세력이 보낸 거추사(巨酋使), 큐슈탐제사(九州探題使)와 대마도주특송사(對馬島主特送使), 소호족이나 수도서인의 사절인 제추사 등이 파견되어 왔다.
조선 사절의 경우는 순수한 정치 외교적인 사무와 물품사급(物品賜給 : 상국이 하사품을 내리는 것) 등인데 비해, 왜인의 경우는 명나라와의 통교를 주선해 달라는 요청, 국교재개와 수호, 회례(回禮 : 사례로 하는 예)와 보빙(報聘 : 답례로 외국을 방문하는 일), 조선왕실의 경조사에 대한 문위, 조선의 국정 탐색을 하기 위하여 보내어졌다.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으나 무역에 대한 기대가 컸다. 왜인들이 조선에 입국했을 경우는 많은 것을 받아 갔다고 되어 있다.
사절의 규모와 구성은 정확하지 않으나 1424 년(세종 6) 일본국왕 사절이 523 명인 것을 보아 대규모의 사절단이 파견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임진왜란 후 조선측이 요구한 대로 이에야스는 먼저 국서를 보내오게 되어, 1606 년 11 월 다치바나 도모마사(橘智正)가 이에야스의 국서와 범릉적(犯陵賊 : 이씨조선의 왕릉을 도굴한 왜노)을 데리고 와서 국교재개를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도 1607 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나 조선 전기와는 달리 일본국왕사의 상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 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60278 일본 도쿠가와시대의 조선관, (참고서적 : 三宅英利 著, 河宇鳳 옮김 ‘歷史的으로 본 日本人의 韓國觀’, 풀빛, 1990, 三宅英利 著, 趙學允 譯‘近世日本과 朝鮮通信使’, 景仁文化社, 1994, 國史編纂委員會‘韓國史9’, 大韓民國文敎部國史編纂委員會, 1984, 박경희 엮음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日本史’,일빛, 1999)]

使節이란 명목으로, 국교단절 기간을 제외하고, 1 년에 최소 20 회 꼴로 우리나라를 드나든 셈이다. 李氏朝鮮 으로부터 푸짐한 하사품을 받을 욕심에 엉덩이를 열도에 가만히 붙이고 있질 못했던 인간들 이었다. 한달에 두 번꼴. 우리나라 사람들은 倭奴들이 빈수레를 줄줄이 끌고 와서 下賜品을 바리바리 실어 가는 것을 일상생활처럼 보아 왔다는 것이다.

李氏朝鮮에게 있어 日本은 골치 아픈 종놈의 나라(일본민족이 그렇게도 자랑하는 倭奴國)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李氏朝鮮은 번식률이 엄청난 종놈들이 굶어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그 종놈들에게 三浦까지 열어주고 무역을 허락해줬던 것이다. 일본은 무려 400 척이라는 세견선(무역선)을 투입해 우리나라에서 쌀과 면포를 가져갔다. 李氏朝鮮이 日本 列島 전체를 입히고 먹여 살렸던 것이다.

李氏朝鮮이 朝貢貿易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倭奴民族은 아담과 이브처럼 살았을 인간들이다. 대량 이주한 中國倭가 전수한 기모노섹스, 혼욕, 요바이의 결과로 기하급수적으로 私生兒가 불어난 헤이안(平安) 이후에는 기아(飢餓)가 일본민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李氏朝鮮이 三浦貿易을 허락하자, 倭奴들은 면포에서 비단까지 朝鮮에서 수입해 갔다. 삼베는 수출 금지 품목 이었다. 그 당시 화학섬유가 있지도 않았고, 왜노국(倭奴國)이 화학섬유 방직기를 수입한 것은 20 세기 전후였다. 그렇다면 李氏朝鮮이 무역을 하락하기 전에 倭奴들은 뭘 입고 살았을까. 최소한으로 가리고 살았다. 下衣가 아니라, 상의만 입고서.

 

 

7. 학문으로 승화(?)시킨 역사왜곡학 (2)

王仁이 전해준 문자조차 잊어먹어 朝鮮通信使가 다시 가르쳐 주었더니, 歷史歪曲을 무기로 世界列强이란 자리까지 뛰어 올랐다. 여기에다 20 세기에 있었던 일본의 추악한 近代史(일본은 2차 대전 후부터 現代라 부르는 게 통설이다)도 더욱 더 日本史의 歪曲, 날조에 매달리게 하고 있다. 단순히 타국을 침략한 것에 그치지 않고,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 731 부대(石井 부대라고도 한다)의 생체실험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 정도는 거뜬히 능가하는 악랄한 범죄이자 인간성의 타락이었다.

百濟 멸망 후 新羅의 속국에서 大震國의 속국이 되었다가, 中國倭의 이주로 미개의 나락까지 추락했다. 한문화에 中國倭 문화를 접목한 미개저질 문화를 두고, 역사왜곡 하면서 國風이라며 후지와라 시대(藤原時代)라고 이름 붙였다. 1981 년인가, 당시 전두환 구테타 정권은 저 일본의 國風을 여의도에서 재현한다는 취지로 국풍 81을 개최한 적이 있다. 배울 것을 배워야지 국민들의 이성적인 판단을 무력화 시키는 국가권력의 대국민 우민화 정책은 경계해야 마땅한 일이다.

日本의 歷史歪曲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가장 빈번히 저질러지는 왜곡 방법이, 정반대로 기술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日本史 전반에 걸쳐서 2 천년 동안 韓民族이 日本에 문물을 전수해준 사실을 부정하고 일본이 독자적으로 만들었다고 우기거나 오히려 日本이 발전시켜 韓大陸에 전수해 주었다는 식으로 우기고 있다. 일례로 新石器時代 土器가 있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토기는 대부분 빗살무늬 토기로 우리 신석기의 가장 선명한 특징이다. 반면 일본 신석기시대 토기는 거의 대부분 새끼문양이 새겨진 죠몬토기이다. 그런데 일본 큐슈지방 에서만 유일하게 우리나라 것과 비슷한 빗살무늬 토기가 발굴된다. 누가 보더라도 한국의 빗살무늬 토기가 한국과 거리가 가까운 큐슈지방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론 하지만, 아직도 일부 일본 학자들은 정반대로 원시적인 죠몬토기가 남하 하면서 빗살무늬 토기로 변형돼 한국으로 건너갔다고 억지 주장하고 있다.
( http://my.dreamwiz.com/heanpark/scrap/004.htm 참조)

韓國으로 전수해 주기 전에 列島 나머지 지역부터 문물을 전수해주는 것은 잊었는가?

이런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의 유적, 유물까지 적극적으로 훼손, 파괴해 가면서 증거를 날조해 왔다.

웃기는 것은 조작이 들통 나고서도 歪曲 日本史 교과서에서 사실인 양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날조 구석기 유적에 대한 기술을 왜곡 일본사 교과서에서 빼겠다는 것은 하도 세상에 알려져서 날조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 더 수치라는 데 기인한다.

사실이야 어쨌든 오로지 日本을 미화하는 거짓말과 허구만 가르치겠다는 속셈이다. 웃기는 민족 아닌가. 가짜 역사에서도 자긍심이 생겨난단 말인가.

두 번째로 日本史를 美化 시키기 위해 우리나라의 역사를 傳說, 神話로 날조하는 방법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원전 2333 년 朝鮮이 개국한 사실을 神話로 날조한 것이다. 석유한‘國’(昔有桓國)에서 석유환‘因’(昔有桓因)으로 글자 한 자를 뜯어 고침으로써. 한 자도 아니다. 반 자라고 한다. 한국(桓國)은 기원전 7197 년에 개천한 나라이다. 한국의 개천 사실을 부정하고, 배달도 건너뛰고, 기원전 2333 년에 개국한 檀君朝鮮이 없다고 우기는 것이다. 미련해도 보통 미련한 민족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진실한 역사라고 부화뇌동하는 작금의 사학계가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檀君朝鮮의 개국은 고고학적 유물 및 천문기록에 의해 사실로 입증됐다. 우리나라 靑銅器 時代는 이미 기원전 27 세기 까지 밝혀졌다. 倭奴가 석유한‘國’에서 석유한‘因’으로 뜯어 고쳤어도 檀君朝鮮은 實史로 증명 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학자 대부분이 미련한 倭奴를 따라 檀君朝鮮이 없었다고 아직도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檀君을 미신 이라며 미신행위 타파위원회를 발족 시켰다. 심지어 三國史도 초기 역사는 없었다고 倭奴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한다.

야마가와(山川) 출판 고교 신일본사 B에는 문맹국 왜(倭)에 문자를 전해주고 교육을 시켜준 王仁과 五經博士의 전수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說話라며 우기고 있다. 그래도 倭奴民族은 해마다 王仁박사가 살던 곳을 보려고 떼지어 韓國에 몰려온다.

◀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자태

세 번째로 우리나라 유적, 유물을 日本의 것이라고 우기는 방법도 흔히 동원된다.


列島가 古代 韓國의 식민지였던 것은 列島의 유적, 유물을 모두 우리나라가 만들었고 百濟, 新羅의 지명이 널리 사용 됐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적극적으로 일본인이 만든 거라고 우기기도 하고, 제작지 혹은 제작자의 출신지가 한대륙 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음 으로써 일본인이 만든 양 믿게 하고 있다.

도예상 겸 아마추어 도예가인 다니 순제이(谷俊成)씨가 1990 년 고려청자의 유약에 얽힌 비밀을 독자적으로 밝혀내 복원에 성공 했다고 발표 하면서 중견 도예가로 급부상했다.
이듬해 아키타(秋田) 현립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어 호평을 받은 이래 잇따라 일본 국내에서 전시회를 연 것은 물론 93 년 유네스코 파리본부, 95 년 이탈리아 피렌체와 밀라노 등 세계 각지를 돌며 전시회를 가졌다.
밀라노 전시회 당시에는 안브로지노 금화상을 받아 이탈리아 도예계에 깊은 인상을 심는 등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97 년 일본 외무장관 표창을 받았고 일본 미술작가 명감에 작품이 올라 있을 정도의 지위를 확보했다.
올 10월에도 주 오스트리아 일본 대사관과 외무성의 국제교류기금, 교토(京都)부 후원으로 빈에서 개인전을 열어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사기였다. ...... 다니씨의 작품은 한결같이 이천(利川) 도예가들의 작품에 자신의 서명만 넣은 것이었다. 사기극이 드러나자 ......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은 것이 기본적인 동기 였다고 용서를 빌었다.

(주간한국 : 일본은 역사왜곡의 천국인가, 2000/12/12)

전세계를 상대로 11 년간 사기 친 이유가 高麗靑瓷의 우수성을 알리고 싶어서란다! 이런 의문이 든다. 저 사기꾼이 세계를 돌아 다니며 전시회를 열었을 때, 과연 ‘高麗’청자라고 했을까. ‘日本’청자 라던가, 그냥 ‘靑瓷’라고는 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日本이 歷史歪曲할 때의 통상수법이 제작지 내지 제작자의 출신지가 韓國임을 밝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려청자 뿐만 아니라 분청사기의 맥이 끊긴 것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통해 도자기 하나 만들지 못했던 미개 일본이 조선의 도공들을 다 납치해 갔기 때문이다. 수백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간신히 고려청자 제작 비법을 되살렸더니, 일본놈이 냉큼 자신이 알아 냈다고 선수를 친 것이다.

7. 학문으로 승화(?)시킨 역사왜곡학 (3)

네 번째로 日本에 불리하면 적당히 애매하게 기술, 주장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나라가 아니라, 중국에서 전수 받았다는 것이다. 또는 우리나라와 함께 중국에서 동시에 전수 받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自家撞着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 한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에서는 中奴 事大主義, 中奴 植民史觀 이라는 웃지 못 할 사고방식을 자국민에게 가르치고 있다. 물론 미련한 倭奴民族은 이것이 植民史觀인 줄도 모른다.

그 당시 중국 대륙은 우리나라가 지배하고 있었다. 中土라고 해봐야 티벳고원 북부가 전부였다. 우리나라가 高麗 時代까지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

메이지(明治) 때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내세우며 韓民族이 日本民族을 조상으로 한다고, 일본이 아니, 倭奴가 우리나라를 지배 했었다고 누가 봐도 해괴하기 짝이 없는 억지주장[기원전 훨씬 전에 중국 혹은 인도에서 列島에 정착 했다가 일부가 다시 한대륙(동아시아)으로 이주 했다는 미친 소리다. 그래놓고 요즘은 중국의 문물을 한국을 통해 빙 둘러서 전수 받았다고 우긴다. 百濟 문물을 韓半島의 제후국을 통해 전수 받았던 것이다]이 일본에서 대세를 이루었다. 패전 후에는 이 말도 안되는 억지주장을 폐기했다. 그러나 韓民族이 일본민족의 조상이며, 우리나라가 일본을 거두고 키워 주었다는 사실이 들통 날까봐, 우리나라에서 문물을 전수해준 것을 두고 궁색하게 중국이니, 인도니, 심지어 그리이스까지 끌어 들인다. 李成桂와 朱元璋의 날조사에 따라, 중국 대륙에 있던 三國을 중국으로 바꾸고, 인도, 그리이스는 日本史를 더욱 부풀릴 의도로 추가한 것이다.

중국의 벼농사가 조선반도 남부에서 사람들이 이주하는 것과 함께 전해진 것이다 (중학사회)

그 중국의 벼농사인지 쌀인지를 수탈 하느라 倭奴民族이 항일시대에 동양척식회사를 세워서 우리나라 사람들 에게서 농지를 빼앗고 경인선과 경부선을 부설 했었다! 물론 그 철도조차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동원해서 만든 것이고. 왜 중국 가서 중국쌀을 안 빼앗았느냐?

日本 벼는 원래 韓半島 벼다. 기원전 3 세기에 건너간 벼 말고 李氏朝鮮을 병탄한 다음 한국쌀이 일본쌀보다 맛있다고 한국쌀을 가져가 지금의 일본쌀을 만든 것이다. 그 옛날, 育種을 하고 유전자 개량을 했을 리 없으니, 李氏朝鮮에서 가져간 쌀은 기원전 3 세기에 건너간 쌀과 똑같다. 밥맛이 틀려 졌다는 것은 일본의 열악한 토질에 따라 한반도벼가 변했다는 것이다. 남귤북지(南橘北枳) 라고 했는가? 고사성어가 무색해 지는 대목이다.

호오류지(法隆寺) 백제 관음상 등의 목상은 백제나 남조계의 불상의 흐름을 보여준다 (야마가와 출판 고교 일본사 B)

◀ 호오류지(法隆寺)에 있는 백제관음상
아스카시대(552-628) 백제의 승려가 만든 목조불상으로 210 cm의 키를 가졌다.


'百濟' 觀音像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식이다. 중국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던 미개국이다. 중국 대륙 남부를 지배한 南朝는 百濟였다.

아스카(飛鳥) 문화를 낳은 것은 주로 조선제국에서 도래해온 자손 이었으나, 남북조 시대의 중국이나 멀리 인도, 그리이스 문화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도쿄서적 고교 신찬일본사B)

아스카 文化를 낳은 것은 중국 대륙의 百濟가 아니라, 韓半島의 百濟 諸侯國에서 건너간 사람들 이었다. 南北朝는 百濟와 高句麗이다. 현 揚子江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高句麗가, 남쪽에는 百濟가 있었다. 그러나 高句麗는 列島에 문물을 전수해 주지 않았다.

9 세기 말에도 중국 대륙조차 안전하게 건널 능력이 없어서, 스가와라노 미치사네(管原道眞 : 845~903)가 중국 대륙으로 가기를 거부한 日本이 무슨 수로 인도, 그리이스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가. 인도, 그리이스 문화의 영향은 倭奴가 말하는 “한여름 밤의 꿈”같은 소리다.

‘渡來人’도 아니고 ‘渡來人’의 자손이란다! 古代 韓國 藝術家, 學者, 僧侶들은 식민지에 문물을 전수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건너 갔으므로 이주 당대에 문물이 전해졌다.

에도시대(江戶時代)까지는 쇄국정책을 견지 하면서, 倭奴가 해외로 나가려다 발각되면 사형에 처했다. 그러면서도 기독교를 제외한 서양 문물은 시대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며 적극적 혹은 소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메이지 정권이 들어서자, 이런 태도는 돌변하여, 무조건적으로 서양의 것이라면 무엇 하나 안 가리고 무조건 수용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倭奴들을 해외로 적극 내보내기 시작 했는데, 日本의 찬란한 性文化의 전파자라는 역사적 사명을 주어 보낸 것이 아닌가 한다. 어쩌면 인해공세로 세계 각지를 차지해, 미래에 있을 대전의 전비 부담을 줄이자는 속셈이었던 것일까.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에 대한 태도와는 달리, 유럽에 대한 우월성을 갖도록 날조하거나 유럽을 침략 하자는 말은 입 밖에도 안 꺼냈는데,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으로서의 일본민족의 자격지심이 워낙 컸던 탓인가 한다. 그러나 멀지 않아 나올 소리다. 우리나라에 대한 태도도 2천년이나 지나서 바꾼 것이니까.

 

7. 학문으로 승화(?)시킨 역사왜곡학 (4)

다섯 번째로 정반대의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섞는 방법도 있다.


5 세기 초부터 거의 1 세기 동안 5 대의 왜왕은 중국의 남조에 조공했고, 왜국의 왕으로서 지위와 조선반도 남부를 지배하는 장군 으로서의 지위를 인정 받으려고 했다. 이것은 중국 황제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여러 나라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유리하게 꾀한 것이다.
이러한 조선반도에의 진출에 의해 대화정권은 대륙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군사적 으로나 경제적 으로도 큰 힘을 지니게 되었다.
(일본서적, 동경서적, 실교출판사, 자유서방, 삼성당 등)

5 세기 초부터 거의 1 세기 동안 중국 대륙의 南朝가 아니라, 北朝(高句麗)에 朝貢한 倭王은 中國倭였다. 南朝에는 百濟 건국 당시부터 조공 했었다.

자신들의 권위를 타국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한 나라의 왕 으로서의 지위도 인정받지 못한 주제에, 韓半島 지배자 로서의 지위까지 한꺼번에 인정 받으려고 했다고 우기는 것이다. 大帝國 高句麗가 아니라, 티벳고원 북부의 미개국 우두머리에게 인정 받으려 했다고? 中國倭나 華夏나 더도 덜할 것도 없는 미개종족 이었다. 어쨌거나 왜(倭)는 타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왕의 권위도 세우지 못했다는 실토다. 사실이다. 中國倭는 高句麗, 百濟에 이중으로 인정 받아야 왕노릇 할 수 있었고, 日本倭는 百濟에 인정 받아야 왕노릇 할 수 있었다.

5 세기 초의 日本(당시는 倭이다)의 실상을 살펴보자. 日本書紀에는 應神 14 년, 百濟王이 재봉사 眞毛津을 보내 주었는데, 의봉의 시조라고 했다. 재봉사를 보내준 것은 百濟 皇帝가 아니고, 韓半島를 다스린 百濟侯王이다. 제 조상들이 옷도 없이 벌거벗고 살았는데도, 역사왜곡 하면서 百濟王이 재봉사를 ‘받쳤다’고 뜯어 고쳤다. 百濟 식민지 지배자의 복식담당 관리를 吳服造라 불렀는데,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 古代日本王族寶)에 보면, “吳服造는 百濟人 아누사(阿漏史)이다.”라고 되어 있다. 당시 일본은 옷조차 스스로 만들 수 없었다. 新羅의 韓半島 침공으로 급히 만든 군사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응신(應神) 천황 시대에 봉녀(縫女) 두 명을 보내 주어서, 비로소 임금과 신하들이 한복(韓服)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서민들은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모양 이었다고 한다.

토우테이칸(藤貞幹)의 말이다. 천황은 역사왜곡 하면서 붙인 것이다. 옷조차 없어서 벌거벗고 산 일본이 무슨 수로 韓半島로 진출할 수 있나?

韓半島에 교두보를 마련한 新羅를 구축 하고자, 급조한 군사 식민지 倭에다 철제무기 제작자며, 갑옷 제작자등을 파견 했으니까, “군사적 으로나 경제적 으로도 큰 힘을 지니게 되”긴 했다. 정권 운운은 7 세기 말이나 되어야 가능한 소리다.

◀ 아스카테라(飛鳥寺) : 아스카에 남아 있는 유적들을 대표하는 飛鳥寺는 일본 최초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


7 세기의 아스카(飛鳥) 시대라는 것은 야마토(大和) 조정이 성립 하려고 했던 시기였다”(미츠모토 세이초, 도쿄신문, 1972. 4. 1)

日本은 韓半島가 기원전 4 세기에 철기시대로 이행 했다고 우긴다. 철기 제조법도 5 세기 말이나 되어 진하승(秦河勝)의 선조로 부터 배운 주제에 철기 문명을 가진 韓半島(우리나라의 철기 문명은 문헌기록에 의하면, 慈烏支 한웅 때 시작 되었다)를 石器文明(日本에 靑銅器 時代는 없다)의 日本이 지배 했다는 것이다.

저런 희한한 역사를 日本 말고 대체 어느 나라에서 볼 수 있는가. 그래서 아담으로 돌아갈 위기일발의 순간에, 植民地 侯王 應神이 植民母國의 통치자로 부터 縫女를 진상 받았다는 名文章(?)과 왜왕(倭王)은 漢에 예속된 노예나라의 왕이라는 漢委奴國王을 놔두고 기꺼이 1 위에 선정할 수밖에 없었던 歪曲日本史의 왕좌를 차지하는 최고의 명문장이다.

이 무렵부터 고분을 만든 각지의 왕이 야마토 지방의 왕을 맹주로 하여 정치적 연합체를 형성했다고 생각된다. 이를 야마토 정권이라 한다.
(도쿄서적 출판 ‘고교 신찬 일본사B' 23쪽)

야마토(大和)나 가와치(河內) 지역에는 거대한 고분이 수없이 많다. 이것은 이 지역의 호족들이 연합하여 강력한 정권을 만들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정권을 야마토 정권이라 한다.
[야마가와 출판 ‘중학사회(역사적 분야)’ 41쪽]

4 세기 말에야 百濟人들이 列島로 이주했다. 일본의 왕이라곤 4 세기 말에 이주한 應神이 최초다. 그러니 4 세기에 각지의 왕이 있을 리 없고, 왕들의 정치적 연합체나 정권은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소리다. 연합할 호족 역시 없었다.

일본의 수많은 고분은 百濟, 新羅 귀족의 무덤이다. 가와치(河內)는 오우진(應神)이 정착한 땅이다. 이후 한동안 列島로 이주한 百濟 貴族들이 그곳에서 모여 살았다.

저 엉터리 내용을 주입받은 倭奴들은 더욱 발전시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여러 나라 사이에서 나라 빼앗기 경쟁이 성립되기 시작한다. 승자는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주변 국가들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 당시 소국연합 중의 하나가 야마토(大和)이고, 그 왕이 점차 세력을 넓혀서 오키미(大王)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4 세기 경에 성립한 야마토 정권이다.

이 당시는 百濟 최초의 정복왕 應神도 정착하기 전이라 列島에 국가연합은 고사하고 국가도 없었다. 그 밖에 다른 문제도 숨어 있는데, 바로 ‘연합’이다.

왕끼리의 ‘정치적 연합체’가 ‘정권’이 될 수 있나?

연합은 결속력 중에서도 가장 약한 형태이다. 이런 정치 형태 속에서 盟主는 꿈도 꿀 수 없다. 그러니까 두 번째 인용문의 ‘강력한 정권을 만들’었다는 것도 거짓이다. 연합 해서는 절대 강력한 정권을 만들어낼 수 없다. 연합한 다음 순간 누군가 이탈하고 적으로 돌아선다. 누가 다른 한 사람을 위해 자기 나라의 힘을 실어줄 것인가.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고작 연합 밖에 못했다는 것은 語不成說이다. 三國志 魏書東夷傳의 倭人條에 나오는, 히미꼬(卑彌呼) 여왕(中國倭)이 30 소국 연합체를 관장 했다는 기록도 허약한 힘 때문에 각각 독립된 국가(촌락) 형태를 유지 하도록 방치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라. 예로 든 문장이 고작 ‘기업 연합./양국이 연합하다’이다. 국제연합을 생각해 보라. 국제연합에 강력한 ‘정권’이 있는가? 1, 2 차 대전 당시의 연합군을 생각해 보라. 고작 군사면에서 그것도 파견 군대에 한해서 연합 했지만, 언제나 아웅다웅 다투기 일쑤였다. 현대 정치는 곧잘 정당이 연합해서 연정을 구성하지만 그것이 오래 가는가. 일본의 자민당이 성공사례라 우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의 정당으로 합친 것이다.

세계사에 ‘정치적 연합체’의 예가 있다. 어거지 일본은 말고. 티벳고원 북부에 있던 周나라에서 발견된다. ‘周나라의 제후국들의 연합체’를 정권이라 우기는 것과 똑같다. ‘周나라 제후국들의 연합체’의 우두머리를 覇者라고 불렀다. 하지만 정권 창출과는 무관했다. 결론적으로 연합체는 커녕, 혼합체도 안되고 단일체 국가라야 정권을 창출, 지속할 수 있다.

이처럼 거짓으로 일관하다 보니 앞, 뒤 기술에서 마구 모순이 발생한다. 일본문교출판의 기술을 보자. 다른 일본사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야마토 정권은 철이나 대륙의 뛰어난 기술을 구하기 위해 조선반도의 남북에 세력을 뻗쳤다. 5 세기에는 대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 조선반도 남부를 지배하는 지위를 인정 받으려고 했다.

韓半島가 철과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아예 다른 교과서에는 朝鮮이 기원전 4 세기 부터 철기를 사용 했다고 못 막고 있다. 그런데 일본 에서는 철기 무기가 없어서 이를 구하느라 韓半島를 정복 했다는 것이다.

일본 에서는 석기에서 철기로 막바로 넘어 갔다는 점에 주목하자. 청동기 시대는 없었다. 석기의 열등국가가 고도 철기의 선진국가를 정복할 수 있는가. 日本의 鐵器는 韓半島를 침공한 新羅를 구축 하고자 군사 식민지를 세우면서 韓半島에서 전해졌다. 그래 놓고는 티벳고원 북부의 미개 중국에서 자신의 권위를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티벳고원 북부의 중국에 빌붙어 중국에서 철기를 구했다고 해야 거짓말의 모순 이라도 제거할 수 있지 않은가. 그나마 倭는 新羅나 百濟의 선박에 동승하지 않는 한, 중국으로 갈 방법도 없던 처지였다.

大王? 應神과 그 자손은 百濟의 韓半島 侯王 에게서 지원받던 2 류급 候王 이었다. 중국 대륙의 百濟로 사신을 보낼 때에도 韓半島에서 보낸 배에 동승해서 갔다.

7. 학문으로 승화(?)시킨 역사왜곡학 (5)

여섯번 째 역사를 왜곡하면서 보통 1000 년쯤 앞세워서 기술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고지키(古事記), 니혼쇼키(日本書紀) 뜯어 고치기가 있다. 얼마나 뜯어 고쳤으면, 일본학자들도 日本書紀가 반쯤 조작된 역사책 이라고 인정한다. 역사책이 반쯤 조작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 아닌가. 그 지경이면 역사 연구가 아니라 日本書紀 연구이다.

이노우에 미쓰시다는 “日本書紀가 韓國이나 中國의 역사서를 기초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중국 역사책도 베꼈다면, 중국(?)의 일식기록도 베껴야 했다. 한 곳에 집중 되지도 못하고 여기저기 흩어진 일식기록도 베껴야 했다. 그런데 일본의 일식기록은 시대마다 강한 집중성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일식기록에서는 베낄 수가 없는 것이다.

일식기록은 모조리 우리나라 것을 베끼고, 나머지 역사기록은 중국 역사책 에서도 베꼈다? 결국 “日本書紀가 한국 외에 중국의 역사서도 기초로 만들어졌다”는 이노우에 미쓰시다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日本書紀나 일본의 역사책은 오로지 우리나라 역사책만을 보고 썼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우리나라 역사책을 대부분 중국의 역사책으로 할당하다 보니까, “日本書紀가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서를 기초로 만들어진” 셈이 되었던 것이다. 日本은 18 세기 이후 역사날조 하면서 날조 역사책을 참고서로 삼았다. 중국 역사로 할당된 것에 맞춰 중국의 영향도 받았다고 고친 것이다.

이노우에 미쓰시다는 또 日本書紀가 참고한 百濟紀는 연대를 干支로 기록 했는데, 日本書紀 편찬자가 그 기사를 이용할 때 두 바퀴 즉 120 년을 거슬러 올려 썼다고 했다. 그러나 日本書紀 편찬자가 연대를 올린 것이 아니고 18 세기에 역사왜곡학이 발흥 하면서 올린 것이다. 일본의 일식기록이 허위 일식기록을 일률적으로 40~50 % 씩 섞였다는 사실에서 보듯이 역사왜곡은 역대 역사책 편찬자들이 한 것이 아니고, 후대에 한꺼번에 했던 것이다.

‘干支 두 바퀴를 거슬러 올려 썼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18 세기에 古事記, 日本書紀를 왜곡 하면서 120 년씩 끌어 올렸기 때문에 실제 연대를 파악 하려면 다시 120 년을 끌어 내려야 한다는 얘기다. 일례로 日本書紀에는 應神이 270 년에서 310 년까지 왕위에 있었다고 나와 있는데, 실제로는 390 년에서 430 년 전후로 왕위에 있었다는 소리다.

그뿐이 아니다. 나오키 코우지로(直木孝次郞)는 日本神話と古代國家(講談社 學術文庫, 1990)에서 이렇게 반박하고 있다.

◀ 상의만 입었던 왜노들의 현재의 유습

천황의 기원을 가능한 한 오랜 옛날로 늘려 잡기 위해 있지도 않았던 천황 이름을 조작하여 추가 시켰다. 또한 참위설(讖緯說)(천지이변이나 은어에 의하여 인간사회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설)에 입각해서 스이코(推古) 천황 9 년(601) 부터 1260 년 전(B.C. 660)을 진무(神武) 천황의 즉위년으로 만들었다. 이 제1대 진무 천황의 이야기도 천황가의 기원을 설명 하면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조작한 것이며 사실로 볼 수 없다.


列島에 출현한 최초의 통일국가(이때에도 이름만 통일국가 였을 뿐, 百濟系 天智, 新羅系 天武 왕조로 나누어져 있었다)를 기준으로 하면, 기원전 660 년 으로 날조하고 있으니까 1300 년 이상 앞당겼고, 百濟系 최초의 왕을 기준으로 해도 기원전 660 년 진무(神武)가 아니라, 4 세기 말 應神 이니까 1000 년 이상 앞당겼다, 日本史는 이처럼 엉터리다. 우리나라 三國의 초기 역사가 날조라 우긴 것도 日本史 초기 천년이 날조라서 정반대로 우긴 것이다. 하여튼 倭奴民族은 절대 창작할 줄 모르는 민족이다. 그러니 모방능력이 일취월장할 수밖에.

제 나라 역사를 1000 년, 1400 년씩 앞당겨 왜곡하는 나라가 일본 말고 또 어디 있단 말인가. 先史時代도 아니고. 하기야 일본의 역사는 5 세기 까지는 선사시대였다. 문자가 없었다는 얘기다. 王仁이 한자를 전해주지 않았다면, 서양 각국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일 때도 제 이름 하나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잉카는 문자 없이도 찬란한 고대 문명을 이루었다지만, 일본은 韓民族에 의지하지 않고는 물건 하나 만들 줄 몰라서 기원후 5 세기 까지도 생활필수품을 한반도에서 다 실어 날랐다.

 

임진왜란 당시 明과 李氏朝鮮 간의 편지내용을 보면 平秀吉이니 平行長이니 하는 말을 볼 수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시의 왜국에는 姓氏가 없었다는 말이다. 母系社會인 일본은 성씨없이 이름만 있었고, 父系社會인 이씨조선은 성씨를 중히 여길 수 밖에 없었기에 이름앞에 平이라는 칭호를 쓸 수 밖에 없었다. 豊臣秀吉이니 小西行長 이라는 성씨의 창설도 후대의 역사왜곡학의 산물이다.



일부 倭奴學者는 아예 日本書紀가 百濟에서 만들어 졌다고 엉뚱한 주장을 하면서 책임을 우리나라에 전가하기도 한다. 우선 짚고 넘어갈 것은 百濟 植民地史에 관한 역사책은 古事記이다. 日本書紀는 新羅의 植民地史를 쓴 책이다. 단적인 증거로 日本書紀의 일식기록 부터 新羅의 일식기록이다. 百濟는 504 년에 중국 대륙 남부를 高句麗한테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므로 日本書紀가 百濟紀를 참고 했다는 이노우에 미쓰시다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百濟紀를 참고한 古事記의 내용을 日本書紀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百濟 멸망 후 列島에 온 百濟人들이 古事記를 쓴 것은 명백히 本國史와 植民地史를 구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라가 멸망한 상황에서 그냥 百濟가 축소되어 列島로 옮겨 왔다고 써도 될 것을 굳이 古事記를 썼다는 것은 本國과 植民地가 다르고 列島를 본국의 연장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식 때문이다.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自國史를 폄하해서 植民地史를 높였을까.

歷史歪曲은 國學 발흥 후에 진행 되었다. 18 세기 이후 소위 국학자들 이란 인간들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저마다 조작 하면서 점점 더 허구 쪽으로 나아가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고작 하는 짓거리가 자신들이 한 역사왜곡에서 면탈하기 위해 먼 조상에게 책임을 떠 넘긴단 말인가.

백제계인 안마려(安磨呂)가 쓴 고지키(古事記)는 백제 편중의 역사서였다. 이에 신라계가 반발하자 다시 니혼쇼키(日本書紀)를 내놓은 것이다. 이 책들은 편술 당시에는 삼한, 삼국인들의 족적을 충실히 수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일본의 역사는 없다)

古事記, 日本書紀 편찬자는 일본 역사를 쓰려 했던 것이 아니라, 百濟와 新羅의 植民地史를 쓰려고 했다. 고작 식민지사를 기록하면서 자국의 역사를 폄하할 것인가.

에도 시대 중기의 국학자인 모토오리 노부나가(本居宣長)가 30 여년에 걸쳐 저술(?)한 고지키(古事記)全, 보증고지키全 등에서 고대 한국과의 관련 역사를 왜곡시켜 놓더니, 한국병탄을 호시탐탐 노리던 군국주의 체제하의 메이지 시대는 더욱 난도질 당했다. 그 후에도 어용학자들이 총동원 되어 한국침략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계속 변조 되었다(일본의 역사는 없다)

원래 古事記와 日本書紀에는 한국의 식민지라는 기록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다 뜯어고친 다음 “古事記와 日本書紀를 읽고 고대 일본의 크나큰 영광을 찾아냈다”고 철면피들이 주장했다. 정말 고대 일본의 크나큰 영광이 있었다면, 18 세기에 와서야 겨우 찾아낼 수 있는가. 5 세기 까지 벌거벗고, 6 세기 까지 흙구덩이에서 뒹군 것이 “고대 일본의 크나큰 영광”인가.

“고대 일본의 크나큰 영광”은 오로지 종이 위에서만 존재하는 허구다. 李成桂가 韓半島에 우리나라를 모두 집어넣고, 淸이 中國倭의 기록을 삭제해 버리자, 中國倭도 덩달아 종이 위에서 韓半島로 이주한 셈이 되었다. 그것을 두고 日本倭의 韓半島 진출을 창작해낸 다음, 고대 일본의 크나큰 영광이라 불러온 것이다.

 

 

 

[특별기획|역사 모독하는 일본]신동아
일본인도 모르는 ‘진짜’ 일본 고대사
369년 부여족이 왜(倭) 정벌, 신도(神道)는 한국 무속신앙에서 유래
왜가 4세기 가야를 정벌했다? 일본의 지배자 혈통은 ‘서기전 660년부터 한번도 단절된 적 없이 이어온 만세일계의 왕가’다? 현재 일본 젊은이들이 배우는, 어이없을 정도로 왜곡된 고대사다. 4~7세기 고대 일본을 장악한 것이 한국계 혈통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얼마나 실망할까. 1982년 일본 교과서 왜곡 파동 직후, 존 카터 코벨이 한·중·일 고대 역사서 연구를 통해 일본의 역사왜곡을 낱낱이 파헤친 미공개 논문을 최초로 소개한다.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갑옷으로 무장한 고구려 무사. 말에도 갑옷을 입혔다.

일본인들의 9할은 제 나라의 진짜 역사를 모른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마음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일본 교육부는 국가적 자신감을 얻기 위해 고대 이래 현대까지 역사적 사실을 위조하고, 가미카제식의 맹목적 충성을 요구했다. 이는 역사를 들춰보면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외국 역사가들에겐 잘 알려진 반면 일본인에게는 대부분 은폐되어왔다. 이 글은 왜곡된 일본역사 중에서도 가장 분명하고 어이없기까지 한 고대사에 관한 것으로 그간 연구해온 것이 바탕이 되었다.

근대 일본의 젊은이들은 일본의 지배자 혈통이 ‘서기전 660년부터 한번도 단절된 일 없이 백수십대를 이어온 만세일계의 왕가’라고 배웠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교사는 한국 학생들에게도 이런 내용을 주입했다.

‘진무왕은 서기전 660년 신의 계보에서 나온 1대조이고 일본 열도 전체를 통일한 개국자’라고 이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신화는 보편적인 것이 되고, 1930년대 군부는 이를 더욱 강조하면서 이를 믿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다른 어떤 나라도 갖지 못한’ 건국 26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전세계 37개국에서 일본문화를 주제로 한 에세이 공모가 있었다. 필자도 젊은 시절 이에 응모해 ‘일본의 미(美), 시부미’라는 글로 상을 받았다. 이후 내가 일본의 미학이 사실은 한국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를 아는 데 40년이 걸렸다. 일본이 서기전 660년에 나라를 세우고 천황혈통이 한 줄로 이어져 왔다는 기록이 712년과 720년에 각각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두 역사서에 나와 있다. 두 책에는 ‘천황가문은 서기전 660년 건국한 1대 조상으로부터 이어져온 혈통’이라고 씌어 있다. 이는 8세기 당대의 일왕을 합법화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역사 편찬 당시의 일본 왕가는 왕위에 오른 지 겨우 100년 정도 된 집안이었을 뿐이고, 그때도 일본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문자로 기록된 역사서가 없었다. 앞서 7세기에 역사서가 편찬됐으나 왕권 다툼의 전란 속에 불타버렸다.

 

망명 사관들이 날조한 ‘일본서기’

일본 천황은 백제에서 망명한 학자들에게 ‘일본서기’ 편찬을 맡겼다. 조국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원한을 품은 이들은 새로 섬기는 일본 임금에게 충성을 서약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 손에서 만들어진 일본 역사서는 엄청난 모순과 날조로 가득 차게 됐다. 그들이 알고 있는 실제 역사는 오직 300년 전부터였지만, 1000여 년이나 길게 역사를 늘리기 위해 어떤 일왕은 100년도 넘게 통치했다고 썼다. 그 전에는 오랜 가계를 노래처럼 외우던 가다리베(語部)들이 역사서 구실을 했다. 가다리베는 일본말로 가계를 외워 불렀다. 그에 비해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한문으로 씌어 있는데 어떤 경우는 음을 따서 쓰고 어떤 것은 뜻을 차용해 썼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신생 왕가의 역사를 오래된 것으로 탈바꿈시켜야 했고, 신라에 대한 증오에 불타면서 일본어로 들은 것을 한자로 옮겨야 했던 역사학자들의 어려움을 헤아린다면, ‘일본서기’에 수없이 나타나는 모순이나 오류는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그중 대표적인 실수는 없애야 할 사실 하나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그대로 뒀다는 것이다. 즉 일본 최초의 왕조는 4세기경 일본에 온 일부 학자들이 ‘기마족’이라고 일컫는 부족으로, 바다 건너 북쪽에서 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무시해버려도 좋을 일개 유목민집단이 아니라 한 세기에 걸쳐 한국의 북쪽 끝에서 남쪽까지 휩쓴 부여족으로 3세기에 북쪽에서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다. 선진기술을 지닌 부여족이 가야와 백제에 둘러막힌 지역을 버리고 부산에서 바다 건너 새로운 땅 왜(倭)를 점령하러 온 것이 369년 무렵. 이들은 가야와 백제에 많은 ‘사촌’을 남겨두고 떠났다. 그들은 바다 건너 일본땅 남서부에 많은 한국인이 수백년 동안 정착해 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부여족은 야심만만한 부족이었다. 그들은 일본에 최초의 실제 왕조를 건국하고 척박한 그곳에 중앙집권화된 정부체제와 기마병술을 전수했다. 8세기 역사학자들의 첫 임무는 이런 부여족의 일본 정복을 은폐하고 부여족이 이룩한 중앙집권 국가를 당대 천황네 조상들이 만든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대였으므로 이런 작업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서기전 660년의 일본은 구석기 혹은 신석기시대였으며 금속문명은 그때까지 도래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사람들이 최초의 거주민은 아니다. 10만년 전 일본땅에도 인간이 거주해 돌도끼, 돌칼 같은 물건을 남겼다고 한다. (계속)

 

 

[역사 탐구]
“고구려 시조 주몽이 한고조 유방 건국 도왔다”
중국, 고구려 건국 연도 조작의혹
고구려의 건국 연도는 기원전 37년이다. 하지만 옛 문헌과 자료를 근거로 유추해볼 때 그보다 172년 전인 기원전 209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 한(漢)나라의 건국 시기보다 3년 앞선 것이다. 중국의 사가들은 고구려가 중국을 통치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고구려의 건국 연도를 조작했다.

 

한국 고대사 중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건국 연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정설로 삼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은 기원전 37년 갑신(甲申)년이다. 이것은 기원전 57년 갑자(甲子)년에 박혁거세가 건국한 신라보다 21년이 뒤진다. 백제의 건국 연도는 이보다 더 늦은 기원전 18년 계묘(癸卯)년이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고구려 건국 연도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남쪽 학자들이 문제삼는 것은 고구려가 신라보다 늦게 건국됐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북쪽 학자들은 고구려 건국 시기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적어도 100여 년은 앞선다고 본다. 남북학계 모두 고구려 건국 시기에 관한 한 ‘삼국사기’ 기록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공통적으로 인정한다. 그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한(漢)이 건국된 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고구려가 건국된 것은 유방이 한을 세우기 3년 전인 기원전 209년 임진(壬辰)년이다. 이것은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구려가 한나라보다 후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을 조작해 마치 중국 왕조의 번병(藩屛)으로 봉건(封建)을 받은 것처럼 역사를 왜곡했기 때문이다. 결론이 앞서지만, 고구려 건국은 유방이 한을 세운 것보다 3년이 앞선다. 그리고 중국 황제는 고구려의 봉건을 받았다. 고구려는 황제를 봉(封)하면서 이를 ‘장(장)’이라 했다. 지금부터 이러한 사실을 하나하나 고증해본다.

 

“유방이 漢 세울 때 이미 부여왕”

고구려 건국에 관한 가장 확실한 단서는 ‘역림’(‘초씨역림(焦氏易林)’의 약자, 전한(前漢)시대에 씌어진 역술서)에 있다. “사슴을 쫓다 얻지는 못했지만(逐鹿不得), 바닷가로 가서(去之海隅), 바람을 맞으며 술을 뿌리면서(臨風洒酒), 스스로 부여왕이 되다(自王扶餘)”라는 대목이다. 진(秦)나라가 사슴을 잃은 것(秦失其鹿)은 진시황이 죽고나서다. 따라서 추무(鄒牟·고구려 시조 주몽)가 부여왕이 된 것은 진시황 재위 37년인 기원전 210년 신묘년 이후라야 맞다. 또 하나의 단서는 ‘이밀묘지명(李密墓誌銘·고구려 시조의 직계후손으로 수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반란을 일으킨 이밀의 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묘지명을 풀어보면, “처음에는 항우가 패권을 잡았다고 들었으나(始聞楚覇), 마지막에는 유방을 황제자리에 앉혔다(終基漢皇)”고 했다. ‘역림’과 ‘이밀묘지명’ 기록대로라면 초한(楚漢)이 쟁패할 때 추무는 이미 부여왕이었다. 항우가 서초(西楚)의 패왕이 되고 유방이 한왕(漢王)이 된 것은 기원전 206년 을미년이다. 학계에서는 이 해를 한고조(漢高祖) 원년으로 잡는다. 또 유방이 황제에 오르는 것은 고조 5년, 즉 기원전 202년 기해년이다. ‘역림’에는 또 이런 표현이 있다. “성공한 사람은 물러나고, 덕을 품은 사람은 흥한다(成功者退, 懷德者興). 유계가 발분해 자영을 잡아 멸했다(劉季發憤, 擒滅子嬰).” 여기서 유계는 유방을 말하고, 자영은 진(秦)의 3세를 말한다. 자영이 죽은 것은 진 2세인 호해 3년, 즉 기원전 207년 갑오년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추하면 추무는 같이 사슴을 쫓다가 갑오년 이전에 이미 건국에 성공, 즉 부여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가 건국한 해는 진 2세 원년인 기원전 209년 임진년이거나 이듬해인 208년 계사년 둘 중 하나다. ‘한서’ 예악지에서 천마가의 두 번째 부분과 관련해 ‘집서(執徐·秦의 해)’라는 태세(太歲·그 해의 간지(干支))를 명기한 이상 그 시기는 기원전 209년 임진(壬辰)년이다. 이 해는 추무가 서정(西征·서쪽을 정벌)을 하고 돌아와 해본(忽口)에 건국, 건도한 해가 된다. 그렇다면 진나라의 사슴을 얻지 못했으면서 성공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역림’에는 “용과 뱀이 땅에서 일어나니, 천지가 반복한다(龍蛇起陸, 天地反復). 진나라가 그 사슴을 잃으니, 천하가 함께 쫓는다(秦失其鹿, 天下共逐)”라 씌어 있다. 진의 후사가 미정이라 천하의 호걸들이 투쟁에 나섰다는 뜻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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