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34 : 한글에 대한 상선약수님의 견해]
(천문기록으로 찾은 한국사에서)
그렇다면 한글은 정말 李氏朝鮮이 만든 것인가. 世宗이 한글 창제에 밤낮으로 고생한 나머지 안질이 나서 치료하기 위해 요양을 해야 했는데, ‘訓民正音'의 연구는 요양하러 간 행재소(行在所)에서 까지 골몰 했다고 했다. 그토록 힘들게 만들었는데, 이상하게도 한글의 제작과정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별로 없다. 訓民正音 解例本에 닿소리(자음)는 소리를 낼 때 발음기관의 생긴 모양을 본뜨고, 홀소리(모음)는 하늘(·)과 땅(ㅡ)과 사람(ㅣ)을 본떴다고 했다.
최만리(崔萬理) 등의 訓民正音 반대 상소문에서 “설혹 말하기를 비록 옛 글자 전자(篆字)를 모방 하였다 할지라도 소리로써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때가 없다(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라고 해서 옛날 글자를 보고 만들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 崔萬理는 集賢殿 학자로 副提學이다. 그 외 訓民正音 창제과정에 참여 했다는 집현전 학자 이름만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訓民正音 解例本이나 世宗實錄에는 集賢殿 학자가 아니라 世宗이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정말 李氏朝鮮이 만들었다면, 한글 창제 과정을 상세하게 남겨 놓았을 것이다.
李成桂가 韓半島로 내빼고 나서 朱元璋이 빼앗은 高麗의 항해서적이 漢字가 아니라고 했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8 대 후손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에서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민간에서 사용하는 글자가 있었는데 그 수가 다 갖추어지지 못하고 그 모양에 일정한 규범이 없어 한 국가의 말을 적어 내기에는 모자란다고 적었다. 또한 고려와 탐라에서도 한자가 아닌 어떤 고유글자가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청비록[淸脾錄 : 조선 영조·정조 때의 문장가·실학자인 형암(炯庵)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엮은 시평집]에는 10 세기 후반에서 11 세기 초에 장유(張維 1587~1638)가 중국의 강남에 갔을 때 고려에서 떠내려간 ‘슬(瑟)’이란 악기의 밑바닥에 쓰인 글을 중국 사람들이 읽지 못하자 그가 한문으로 옮겨 주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고려에 일정한 고유글자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카톨릭대학교의 이승재 교수는 고려시대 불경 등에 사용됐던 각필과 훈민정음의 자형이 일치되는 예가 무려 17 개나 되며(고조선에 신지글자 있었다, 이종호, 국정브리핑)
中國의 江南은 티벳고원 북부의 怒江 상류 이남이다.
崔萬理의 上訴文에 특히 중요한 대목이 있다. “설사 언문이 전 왕조 때부터 있었다고 하더라도(借使諺文 自前朝有之) ” 前王朝는 물론 高麗다. 향찰(鄕札)은 三國 末에서 高麗 初까지 사용 했으므로 高麗의 航海書籍은 鄕札로 적은 것이 아니다. 한글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신지(神誌)글자는 朝鮮時代의 정책과도 배리되어 世祖, 睿宗, 成宗 시대에 전국적으로 禁止圖書로 정하고 국가적으로 회수 조치”했겠는가. 한글을 李氏朝鮮의 발명품으로 날조하기 위해서다. “李氏朝鮮의 政策”이라 함은 中奴에게 주지 않은 우리나라의 발명품을 모조리 李氏朝鮮의 발명품으로 둔갑 시키는 것이었다.
▲ 훈민정음 서문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가 이것을 매우 딱하게 여기어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히어 나날의 소용에 편리 하도록 함에 있나니라(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訓民正音序文)
우리나라가 漢字를 만들고, 2300 년이나 문제없이 사용해 왔다. 제 뜻을 잘 펼쳤기에 온갖 역사책에 문학서적, 과학서적 등 온갖 책을 다 저술했다. 漢字에 따라 말마저 바꾼 中奴는 역사책 조차 쓴 적이 없었다. 한민족을 수렁 같은 어리석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李成桂와 濊貊族이다.
이도(李祹: 李氏朝鮮의 世宗이라 불리는 濊貊族) 역시 高麗史 날조에 관여했던 濊貊族이다. “恭愍王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太祖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 하”도록 즉 恭愍帝 이후 李氏朝鮮에 유리하도록 날조하고 李成桂에 대한 내용을 한없이 부풀리도록 李祹가 직접 지시했던 것이다.
李祹는 가짜 檀君陵까지 만든 자다. “우리 世宗께서는 檀君廟를 平壤에 설치 하였는데, 世祖 원년에 위패를 고쳐 朝鮮始祖檀君之廟라 하였다(我世宗設檀君廟於平壤 世祖元年改位版曰朝鮮始祖檀君之廟 揆園史話)." 濊貊族의 무덤은 陵이고 檀君의 무덤은 묘냐? 神人王儉은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의 시조가 아니다.
李祹가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나라 高麗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世界史에도 드문 위대한 통치자”는 高麗 皇帝였던 것이다.
李氏朝鮮은 高麗의 온갖 것을 다 베낀 나라다.
국내의 각종 소송 문건 및 서류는 보관하지 않으나 북송 황제의 조서나 어명, 사신들의 글은 왕부 서고에 보물처럼 간직하여 상국의 검열에 대비한다(고려도경)
高麗時代에 訴訟文件을 소중히 보관 했음은 李氏朝鮮이 高麗의 慣習法을 成文法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高麗가 소송문건도 안 남겼는데, 어떻게 李氏朝鮮이 高麗의 관습법을 알 것인가.
李氏朝鮮이 刑法 으로서 刑典에 모순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용했다는 大明律의 실체는 바로 高麗의 法律이다. 明이 高麗의 법률을 그대로 베껴 大明律이라 한 것이다. 明이 高麗에게서 가로챈 것은 실로 엄청나다. 曆法(大統曆), 地圖(大明混一圖)까지 베꼈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鳳皇이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龍은 중국을 상징한다고 李成桂와 朱元璋이 하나씩 나눠가졌다.
◀ 정화 함대의 중심선박인 보선 상상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인터넷판에 실린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훔치는데 이골이 난 明이다. 明 역시 이전 왕조에만 高麗史를 배당한 것이 아니라, 明의 것으로도 가로챘다. 남을 위해 高麗의 역사를 베껴준 明이 자신을 위해 高麗史를 챙겼을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明의 정화함대(鄭和艦隊)가 1421 년 아메리카를 발견 했다고 날조할 수 있었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鄭和艦隊는 高麗의 艦隊다. 高麗는 세계 최고의 造船術과 航海術을 보유하고 있었다. 李舜臣이 壬辰倭亂 때(1592~1598) 倭船에 맞서 사용한 거북선이 高麗의 戰艦이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은 高麗가 만든 지도를 가지고 대항해에 나섰던 것이다.
(高麗 함대가 언제 아메리카 탐험에 나섰을까. 蒙古가 여자를 내세워 高麗의 國富를 갈취할 때는 탐험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럴 돈이 있으면, 나 달라고 했을 나라가 아닌가. 武臣政權 때는 三別抄에 맞서, 高麗 皇帝도 군대를 보유해야 하니까, 그럴 여유가 없다. 鄭和 함대가 탐험 길에 오른 것은 武臣政變이 일어난 1170 년 이전이다)
高麗가 얼마나 찬란한 나라였는가 하면, 高麗史는 중국의 五大十國, 宋, 遼汗, 西夏, 金汗, 蒙汗, 明의 역사로 분배됐는데, 특히 宋에 집중되어 宋學이라는 학문까지 만들어냈다. 그 뿐만이 아니라 高麗史를 일부 챙긴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을 과학의 나라로 끌어올려 韓國史에서 가장 잘난 나라로 만들어 주었다. 저들 나라에 세계 최고,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한아름씩 안겨준 나라다. 淸조차 高麗의 도자기와 칠공예 기술을 계승해 서양에 수출까지 했을 정도다.
蒙汗도 억압하고 멸시한 宋의 역사책을 써주고, 明도 자신들을 억압, 멸시했다는 蒙汗의 역사책까지 써줬는데, 역사날조에 지대하게 공헌한 淸의 正史書를 아직까지도 써주지 않고 있다. 金汗史, 遼汗史, 蒙汗史는 高麗의 역사를 해체 한다는 목적이라도 있지만, 미개한 淸의 역사는 뭐하러 수고스럽게 쓸 것인가. 李氏朝鮮이 高麗처럼 가로챌 역사가 많은 나라 였다면, 淸이 망하자마자 日本하고 거래 해서라도 李氏朝鮮의 역사를 빼돌렸다. 李氏朝鮮에는 자랑할 만한 역사가 단 하나도 없다.
어째서 高麗는 과학문명이 찬란히 꽃피고 李氏朝鮮은 高麗의 발명품을 모조리 빼앗아야만 했는가. 高麗는 5 천년 한문화를 계승한 동아시아의 지배자로서 창의적 역량이 한껏 발휘될 수 있는 열린사회였고,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피지배종족이 지배층으로 있어 창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던 한없이 쪼그라든 폐쇄사회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을 숭상한 나라이고, 李氏朝鮮은 과학기술을 천시한 나라였다. 그래서 高麗는 첨단과학무기로 동아시아를 제패해 찬란한 문명을 만들어냈고, 李氏朝鮮은 韓半島로 쪼그라들었다가 끝내 나라가 망한 것이다.
高麗는 古代社會와 李氏朝鮮을 잇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新羅 영토에서 건국한 高麗는 화약무기를 발명해 三國의 영토를 되찾은 대제국이다. 화약을 발명하고 거북선을 개발한 高麗는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주변 나라들을 모조리 정복했다. 高句麗의 계승국 高麗는 高句麗를 능가하는 나라였다. 高麗 시대에 5300 년의 우리나라 문화는 그 절정에 달해 있었다.
李成桂와 그 후손들은 그런 高麗史를 해체해 中國史로 꾸미고 李氏朝鮮史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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