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31 : 오성취루(五星聚婁)] -상선약수님-
1) 남의 나라 일식기록을 베낀 것은 중국과 일본이다.(8)
◀ 92년 12월 24일 낙산사 일출중의 부분일식
中國은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언제 베꼈을까. 中土에 세워진 모든 나라가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베끼기에 혈안 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천문기록을 갖고 싶다는 생각과 실행은 별개의 문제다. 베낀 사실이 발각될 경우의 보복도 생각해야 한다. 中國의 천문기록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한꺼번에 베꼈다는 것인데, 中國의 왕조(?)는 서로 다른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中土를 차지 하려고 침입한 종족들이 과연 다른 나라의 일식기록까지 신경을 써주었을까. 唐은 鮮卑族이다. 그런 나라가 토착(?) 왕조를 위해 천문기록을 일일이 베껴 주었을까. 隋書에도 기록하지 않았다. 단일국가라는 日本조차 서양 천문학을 배운 자들의 소행이었다.
대대적인 역사날조에 나선 明이 천문기록까지 베꼈던 것이다. 明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멸시 했다는 蒙古의 역사 까지도 날조해준 나라다. 이런 나라이니 만큼 中土에 세워진 나머지 나라의 천문기록도 챙겨주었다.
明의 天文官은 高麗人이었다. 高麗는 여러 곳에서 천문관측한 나라다. 그것을 잘 아는 高麗의 천문관이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마구 베껴 여기저기 흩어놓고, 李氏朝鮮의 영토로 합의한 현 北京에서 관측한 百濟 일식기록 까지 베꼈을까.아니다,,
後漢의 일식기록은 淸 때 새로 베꼈다. 李氏朝鮮의 영토를 가로챈 淸이 원래부터 중국의 강역이 동북아 까지 였다고 우길 심산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遼水도 桑乾河에서 난하로, 현 遼水로 밀어내고, 淮垈, 海垈를 글자까지 바꿔가며 면적을 줄여 明이 1 차로 밀어낸 燕을 揚子江 이남에서 渤海灣으로 또 다시 종이 위로 진출시킨 것은 淸이다.
다른 나라의 천문기록을, 일식기록 마저 베낀 중국이 과연 曆法을 만들 수 있었을까.
◀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을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곽수경 (郭守敬 1231∼1316)은 고려인이다
대통력(大統曆)은 明나라 때의 역법 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元나라 때 수시력법(授時曆法)의 역원(曆元)을 변경하고, 1 년의 길이에 변동이 없다고 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 내용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달리 말하면, 授時曆을 훔쳐 大統曆이라 한 것이다. 漢族國家를 자처하고 문명대국 이라던 明이 유목민족 몽고의 曆法을 베꼈다는 소리다. 이것이 中國史의 실체이다. 他國史를 훔쳐 自國史로 날조하는 것. 대대로 曆法을 만든 中國 이라더니, 明은 어째서 授時曆을 이름만 바꾸어 부를 수 밖에 없었나?
中國이 曆法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明도 만들지 못한 曆法을 유목민족 蒙古가 만들 수 있는가. 曆法까지 스스로 제작할 정도로 고도 문명을 누린 蒙古가 어째서 오늘날 달랑 천막 하나 치고 사는 유목생활로 되돌아 갔는가. 明이 曆法을 만들 줄 몰랐기 때문에 蒙古의 曆法을 中國人이 만들어 주었다는 주장조차 성립할 수 없다.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던 女眞族이 세운 金이 과연 大明曆을 만들 수 있는가. ‘천하고 작은 생선’ 유목민족 선비족(鮮卑族) 唐이 曆法을 만들 수 있는가.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에 중요한 암시를 준다는 고대인의 믿음 때문”에 천문관측한 것이라면, 남의 나라 日蝕記錄을 베끼고 曆法을 베낀 中國은 대체 어떤 나라인가. 당연히 역사책 마저도 베낄 수 있는 비양심적인 나라임을 말해주지 않는가.
우리나라와 주변국들이 이 시기에 남긴 일식기록들 중 천체역학적 계산을 통해 실제로 그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기록의 비율, 즉 실현율이 가장 높은 史書가 바로 三國史記이다. 삼국사기에는 일식기록이 총 66 개가 있는데, 그 중 53 개가 사실로 확인되어 80%의 높은 실현율을 보였다. 특히 200 년 까지의 초기 기록은 그 실현율이 89 %에 이른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천문기록을 베꼈다던 중국사서의 일식기록은 오히려 이보다 실현율이 떨어진다. 중국 일식기록의 실현율은 한(漢)나라 때 78 %로 가장 높고 그 이후부터 당(唐)나라 말 까지는 63~75% 의 수준을 보인다.
삼국사기는 둘쭉날쭉함이 없이 모든 시기에 걸쳐 고르게 실현율이 높다.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이 독자적인 실제 관측에 근거하여 기록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베꼈다면서 어째서 中國의 일식 실현율이 우리나라보다 낮은가. 中國이 왕조라고 우기는 각 나라마다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배당했다. 각 나라 존속기간에 해당하는 일식기록을 포함한 천문기록은 최소한 수백 개에 이를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책을 다 없앴다고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부 다 베끼면 탄로날 가능성을 생각한 中國은 다수의 천문대에서 관측한 기록에서 선택적으로 약간씩 베꼈다. 日本도 우리나라 역사책에 기록된 실제일식과 허구의 일식을 섞어서 실현율이 33~45 % 밖에 되지 않는다.
다수의 천문대에서 관측한, 중국대륙을 제외하고 동아시아 전체에서 육안관측할 수 있는 천문현상 전부를 기록 했으므로 우리나라는 각 王朝마다 역사책과는 따로 天文志를 엮어야 했던 것이 분명하다. 똑같은 내용의 천문현상이 가득한 天文志를 베끼면서, 실수가 없을 수 없다.
우리나라 戶籍을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13.3 %의 주민등록번호가 잘못 기재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 번쯤 답안지를 밀어쓴 경험을 가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선택적으로 베낄 경우는 실수가 더 많이 발생한다. 남의 나라 천문기록을 베끼는 사람이 한 단계 밀려 올라 갔다고 다시 기록할까. 자신만 입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데? 이 당시 朱元璋은 우리나라 역사 전부를 中國史로 둔갑 시키고 있었다. 수만 권의 책을 바꾸어야 했던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식이 三國史記와 중국사서에 공동으로 나오는 이유” 역시 中國이 우리나라 일식기록을 베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일식관측 실현율이 높은 것으로 보아, 천문관측을 얼마나 중시 했는지 짐작 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과연 일어나지 않는 일식을 일어났다 보고하고 기록 했을까. 日蝕現狀은 일식이 일어나는 지역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다. 거짓보고를 하면 당장 탄로난다. 태백주현(太白晝見), 태백월범(太白犯月)도 관측한 나라가, 일식관측을 잘못할 수는 없다.
天文志를 포함한 역사책은 처음 한 권을 만들어 여러 부 필사(筆寫)한다. 현존하는 인쇄본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126 호)이 가장 오래 되었다. 인쇄술을 개발 했다고 해도 모든 책을 인쇄하는 것은 아니고, 최종 단계에 한해 인쇄했을 것이다. 필사를 거듭 할수록 誤字 발생율이 높아진다. 실상 天文官이 쓴 草稿 외에는 모두 誤字가 발생할 가능성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제 결론을 말하자. 三國의 일식기록은 明이 삭제하고 李氏朝鮮이 다시 찾아서 기록했다. 몽고고원 以西, 현 北京, 현 武漢에서 관측한 高句麗, 百濟, 新羅의 일식기록을 李氏朝鮮이 찾아서 기록한 것은 朱元璋이 차지한 땅이 揚子江 이남 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中土는 유목민족의 침입을 끝없이 받았다. 날조사에서 유목민족의 南方下限線이 揚子江이었다. 揚子江 이북을 北朝로 날조했다. 유목민족으로 날조된 高句麗, 百濟, 新羅도 揚子江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옛 長江 까지가 우리나라 영토였다.
李氏朝鮮은 高麗는 물론이고 李氏朝鮮의 천문기록까지 영토가 단계적으로 축소될 때마다 삭제해 왔다. 그럼에도 三國의 일식기록을 삭제하지 못한 것은 그것마저 삭제하면 천문관측 하지 못한 나라가 되기 때문이다.
일식기록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淸이 後漢의 일식기록을 다시 베꼈다는 사실이나 日本이 1824 년 이후에 천문기록을 갖기로 날조 했다는 사실은 아직도 저들이 우리나라 역사책 및 고문헌을 보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특히 日本은 20 세기에 들어 와서도 우리나라 한단사(桓檀史)를 토대로 남연서(南淵書) 등의 날조 일본 역사책을 만들어 왔다. 일식기록의 가치는 이를 근거로 日本과 中國에 우리나라 역사책과 기타 문헌의 반환을 요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2) 5 세 단군 구을(丘乙)은 10 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삼았다 (1)
百濟, 新羅의 일식기록은 건국초 부터 나온다. 百濟는 高句麗에서 분리된 나라이다. 宋書에는 “高句麗가 遼東을 다스렸고 百濟는 遼西를 다스렸다(東夷高句驪國 今治漢之遼東郡......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고 했다. 梁書와 南史에도 백제가 요서와 진평 2 郡을 차지하고 百濟郡을 설치했다(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梁書)고 했다. 周書, 北史에도 고구려의 영토가 “서로는 遼水를 건너 2 천리에 이른다(高麗者......東至新羅西渡遼水二千里 周書 券49).”고 했다.
新唐書 百濟傳에서 "百濟는 夫餘의 별종이다. 京師(수도)에서 동쪽으로 6 천리 영(嬴),빈(濱),해(海)의 남쪽(陽)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越州이고 남쪽으로 倭가 있으며 北으로는 高句麗와 접한다" (百濟夫餘別種也直京師東六千里而嬴濱海之陽 西界越州南倭北高麗 新唐書 百濟傳)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嬴, 濱海의 위치를 집고 넘어가자.
◀ 영(嬴),빈(濱),해(海)의 위치도
영(瀛)- 영으로 발음하고 남을영, 풀다, 싸다, 넘치다, 지나치다로 해석이 되고 물수(水)를 변으로 하는 영은 절운이 같으니 같이 사용했는데 이를 의성 가차법이라 할 수 있으며 지도에 나오는 글자 밖에 없다.
빈(濱)- 발음은 빈인데 물가빈, 끝, 임박하다로 풀이하고 해(海)는 바다라고 풀이하고 넓다, 많다로 풀이 하므로 빈해(濱海)는 바다에 잇닿은 지대로 연해라고 풀이한다.
양(陽)- 볕, 밝을, 거짓, 봄양으로 풀이하고 『시경(詩經)』에 재남산지양(在南山之陽)이나 산남수북(山南水北)으로 사용된 예가 있는데 산으로 할 때는 따뜻한 햋빛이 드는 남쪽을 의미하고 물로 할 때는 햋빛이 드는 북쪽을 의미 한다는 뜻이다.
百濟는 발해만에서 내내 일식관측 했으므로 遼水는 고지도에 남아 있는 첫 遼水인 桑乾河 보다 훨씬 더 서쪽에 있었다. 상건하(桑乾河) 以西에 遼東도 있고, 遼西도 있었던 것이다.
“百濟는 본래 高句麗와 함께 遼東의 동쪽 천 여리에 있었다(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는 宋書의 날조기사는 百濟가 高句麗에서 분리되기 전에는 遼東의 동쪽 천 여리에 있었다가 분리된 후에는 요동의 동쪽 천 여리 밖 즉 발해만 일대에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요동의 동쪽 천 여리에 있던 것은 高句麗이지, 百濟가 아니다. 요동의 동쪽 천 여리도 중국 대륙에 있었던 것이다. 高句麗 역시 중국 대륙에서 건국 했음을 말해준다. 三國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 했다는 사실은 三國 이전의 국가가 중국 대륙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高句麗는 北夫餘에서 국명만 바꾼 나라이다. 北夫餘의 건국자는 해모수(解慕漱)이고, 5 대 고두막한(高豆莫汗)은 北夫餘의 檀帝位를 찬탈 하면서 스스로를 東明이라 하고 北夫餘와 구분하여 국호를 卒本扶餘라 했다(至是卽位於卒本自號東明 北夫餘紀). 7 世에 해당하는 고추모(高鄒牟:朱蒙은 鄒牟의 별명)에 이르러, 高句麗로 개칭했다. 東夫餘에서 도망친 高鄒牟는 北夫餘 6 世 檀君 고무서(高無胥)의 둘째공주(禮氏)와 혼인, 北夫餘를 물려받아 朱蒙聖帝로 高句麗의 건국자가 되었다.
(百濟도 南扶餘로 국호를 바꾸고, 新羅도 斯盧國에서 국호를 바꾸었다. 우리는 南扶餘는 百濟로, 斯盧國은 新羅로 인정 하면서, 어째서 高句麗는 北夫餘와 분리 시키는가. 어째서 高鄒牟를 고구려의 건국자로 인정하는가. 高鄒牟가 北夫餘 6 世 檀君 高無胥의 사위라서? 황위찬탈자(皇位簒奪者) 高豆莫 이후로도 北夫餘가 아닌가. 新羅는 朴, 昔, 金氏가 돌아 가면서 통치자가 되었지만, 하나의 나라로 인정한다. 高鄒牟가 高句麗의 건국자가 된 것은 李氏朝鮮이 三國 以前史를 無로 抹殺했기 때문이다. 高句麗의 역사는 高豆莫부터 시작 되어야 한다)
高鄒牟를 東明으로 착각하는 원인은 물론 三國史記에 高句麗의 건국자를 東明聖王(秋九月王升遐時年四十歲葬龍山號東明聖王)이라 날조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百濟가 東明의 사당을 세웠다는 점이다. 百濟를 건국한 溫祚는 北夫餘 6 世 檀君 고무서(高無胥)의 외손자 였지만, 부친 高鄒牟는 모친이 다른 장자 유리(瑠璃)에게 제위를 넘겨 주었다. 그래서 高句麗처럼 高鄒牟를 신격화해서 받들지 않았다. 溫祚는 부친을 증오해 高句麗에서 갈라져 나왔고, 부친과 같은 姓氏인 것도 싫다고 해서 夫餘氏로 바꾸었다. 대신 자신을 있게 한 外曾祖父 北夫餘 5 世 檀君 東明 高豆莫을 제사 지냈다. 東明이 北夫餘의 檀帝 位를 찬탈하지 않았다면 百濟는 없었을 테니까.
北夫餘의 시조 解慕漱는 大扶餘의 檀帝位를 가졌고, 大夫餘는 朝鮮에서 국호만 변경한 나라이다. 朝鮮은 배달을 계승한 나라이다. 朝鮮은 우리나라 강역을 확장 하지는 않았다. 檀君世紀에 보면, 中土로 영토를 넓혔지만, 中土 자체가 제후에게 준 封土로 원래부터 우리나라 강역이었다.
우리나라는 배달 開天 당시부터 중국 대륙에 영토가 있었다. 한웅(桓雄)이 白山과 黑水 사이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白山은 중국 대륙에 있었다. 神市는 동북아에 있었는데, 배달 14 세 자오지 한웅(慈烏支桓雄:蚩尤天王)에 이르러 중국 대륙에 있는 靑邱로 중심지를 옮기고 정복활동을 벌였다. 그래서 三國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할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三國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한 것은 三國以前의 우리나라, 즉 배달(倍達) 및 朝鮮이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이다.
五行星結集도 朝鮮의 대륙존재를 증명한다. ☞ 五行星結集 동영상 보러가기
13 세 흘달(屹達 또는 代音達) 50 년 무진(戊辰)에 다섯별(五星)이 누성(婁星)에 모였다(戊辰五十年五星聚婁 檀君世紀).
五行星結集은 기원전 1734 년에 일어났는데, 임승국 선생의 서력환산에 의하면, 13 世 屹達 50 년은 기원전 1733 년이다. 한해의 변경, 윤달 등을 고려하지 않아 西曆換算에 오차가 생겼던 것이다.
古代에는 한해의 시작이 달랐다. “옛날에는 계해(癸亥)를 썼고 단군구을(檀君邱乙 BC.2099 년에 즉위)이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써서 10 월로 상달(上月)을 삼아 이것을 세수(歲首 : 한 해의 첫달)로 하였다(舊用癸亥而檀君邱乙始用甲子以十月爲上月是謂歲首 太白逸史 神市本紀)." 한해의 시작을 변경하면, 변경 직전 해는 1 년 보다 짧다. 朝鮮을 개국한 해가 기원전 2333 년 이니까, 13 世 屹達 50 년은 기원전 1734 년 이었던 것이다.
기원전 765 년 4 월의 日蝕記錄이 실제로 기원전 765 년 2 월 10 일에 일어난 것은 이 당시 10 월이 한해의 시작 이었기 때문이다. 한해를 시작하는 달은 언제나 1 월이다. 상달을 한해의 시작으로 하면서 오늘날의 10 월을 1 월로 고쳐 불렀다. 오늘날의 (음력) 10 월은 음력 正月을 한해의 시작 즉 1 월로 했을 때 비로소 10 월이 되었다.
三國時代 천문관측 연구 논문을 발표한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 발표 이후 國史學을 전공하는 어느 학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天文學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왜 남의 학문에 끼여들어 근거도 없는 말을 하느냐라는 것이었다. 무엇이 근거 없는지를 대보라고 하니까 국사학자들이 연구하고 판단한 상식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저는 과학자 입니다. 과학자는 과학적인 결과만 놓고 말할 뿐입니다. 과학적으로 연구 결과가 틀렸다면 얼마든지 정정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결과를 인정 한다면 학문에 있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박교수는 "왜 역사가 국사학자들 만의 것이냐"고 반문했다. 한국인이면 당연히 한국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보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乙卯 원년 (B.C. 6) 봄 정월에 왕은 사신을 高句麗에 보내 국교를 청하고자 하였다(乙卯元年春正月王遣使高句麗請交 迦葉原夫餘紀)." 여기서의 正月은 물론 음력 정월이다. 중국 대륙은 계절의 변화가 韓半島 보다 앞서니까 음력 정월은 봄이다. 後周書와 隋書에는 百濟가 인월(寅月, 음력 정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한다(百濟......以建寅月爲歲首 隋書)고 했지만, 寅月을 한해의 시작으로 변경한 것은 百濟가 아니라 朝鮮이다.
2) 5세 단군 구을(丘乙)은 10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삼았다 (2)
朝鮮時代의 일식 가운데, 기원전 525 년 8 월과 기원전 423 년 2 월의 日蝕은 달까지 일치한다. 이 해의 일식을 기록했던 것이다. 이때 벌써 음력 정월이 한해의 시작 즉 1 월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 년 7 윤법(19 년중 7 년은 윤달을 두어 1 년을 13 개월로 한다)도 시행하기 전이다. 태음력(太陰曆)의 1 년은 354 일로 아직은 시차가 벌어지면, 그 때마다 필요할 만큼 閏日이나 윤달을 두어 조정하던 시기이다. 규칙적인 윤달이나 윤일을 삽입하기 전이라 太陽曆과 달이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다. 기원전 765 년 2 월 10 일(35 세 단군 沙伐 8 년 4 월의 日蝕. 이 당시는 오늘날의 10 월이 한해를 시작하는 1월 이었다) 이후 기원전 526 년 사이에 음력 정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변경했던 것이다. 西曆이 일치하는 것은 마지막으로 바꾼 한해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 용덕리 고인돌과 별자리 실측도.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에서 발견된 고인돌에서 북극성을 중심으로 11개의 별자리에 속하는 별들이 새겨져 있으며 별들의 운동을 감안한 연대는 기원전 2900 년이다.
따라서 17 世 檀君 여을(余乙) 20 년 여름, 29 世 檀君 마휴(摩休) 9 년, 6 世 箕子(?) 2 년 7 월, 32 世 檀君 추밀(鄒密) 13 년 3 월의 일식기록은 기원전 1533 년 여름, 기원전 935 년, 기원전 918 년 7 월, 기원전 837 년 3 월에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단기고사).
“B.C 765 년과 B.C 579 년의 일식은 관측 가능한 지역이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檀君朝鮮時代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일식 그림이 생략되어 있지만, 서쪽은 중국 대륙이 분명하다. 檀君朝鮮時代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은 ”한국, 만주, 중국, 몽고 등지에서 관측가능한 일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관심에서 벗어나 단지 ‘서쪽’이라 쓴 것은 “조선시대의 천문현상기록이 지금의 하르빈 근처에서 이루어졌다고 가정”하고, 기원전 765 년과 기원전 579 년의 일식을 “기록연대의 오차 또는 기록의 비사실성”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阿斯達(도읍)은 전부 중국 대륙에 위치했다. 이 당시는 白岳山 阿斯達(현 殷墟)이 朝鮮의 수도로 현 黃河 하류에 위치했다. 기원전 765 년의 일식은 藏唐京 阿斯達이나 白岳山 阿斯達에서 관측한 기록이다. 檀君世紀, 檀奇古史에 실린 朝鮮時代의 일식이 중국 대륙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朝鮮의 강역이 동아시아임을 말해준다.
“B.C 525 년(39 世 檀君 豆忽 21 년 8 월)과 B.C 248 년(47 世 檀君 高列加=古列加 48 년 10 월)의 일식은 한반도와 만주, 중국 북부에 달의 온그림자가 드리워져 인상적”이다(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일식 그림을 보지는 못했지만, 朝鮮의 도읍(藏唐京 阿斯達과 白岳山 阿斯達)은 중국 북부 가까운 곳에 위치 했으므로 도읍에서 관측한 부분일식일 가능성이 크다. 기원전 248 년의 일식(檀君世紀)은 기록과 5 개월이나 차이난다. 절기의 어긋남을 정반대 계절이 될 때까지 방치하지는 않을 테니까, 윤달의 미삽입 때문이 아니라, 오기가 발생한 것으로 高列加 천황 48 년에 일어난 일식이 맞다. 癸丑四十八年 十月 朔日蝕 원문을 보면, 앞(연도)에 四와 十이 나오고 있다. 四월을 충분히 十월로 착각했을 수 있다.
한단고기에 실린 檀君世紀에는 기원전 2183 년과 기원전 837 년, 기원전 248 년의 일식만 나온다. 그러나 檀奇古史는 원본 檀君世紀를 토대로 날조한 책이다. 檀奇古史에 실린 일식도 원래는 檀君世紀에 다 수록된 일식이다.
檀奇古史는 역대 檀君의 재위년이 군데군데 엉터리다. 10 세 단군 魯乙은 59 년간 제위에 있었는데 58 년으로, 11 세 단군 道奚는 58 년간 제위에 있었는데 57 년으로, 23 세 단군 阿忽은 76 년간 제위에 있었는데 75 년으로, 43 세 단군 勿理는 36 년간 제위에 있었는데 25 년으로, 44 세 단군 丘勿은 29 년간 제위에 있었는데 40 년으로 날조했다. 그런데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이 檀君 즉위년을 桓檀古記를 따르고 있어, 일식기록 역시 엉터리 檀奇古史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箕子를 기준으로 일식발생 연도를 기록한 대목은 사정이 다르다. 檀奇古史의 箕子朝鮮의 실체는 番韓 30 세 서우여(徐于餘) 부터 68 세 수한(水韓) 까지 에다가 가공인물 물한(勿韓 : 12 세)과 기부(奇否 : 41세), 마한(馬韓 : 42 세)을 합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제연도와 크게 어긋나게 되었다. 3 세 기자(箕子)라는 솔귀(率歸)는 32 세 번한(番韓)으로 47 년간 제위에 있었으나 48 년으로, 4 세 箕子라는 임나(任那)는 33 세 번한으로 32 년간 제위에 있었으나 31 년으로, 11 세 箕子라는 해수(奚水)는 40 세 番韓으로 17 년간 제위에 있었으나 10 년으로, 12 세 箕子라는 물한(勿韓)은 가공인물로 21 년간 제위에 있었다고, 13 세 箕子라는 오문루(奧門婁)는 41 세 번한으로 12 년간 제위에 있었으나 48 년으로, 16 세 箕子라는 아륵(阿勒)은 44 세 番韓으로 64 년간 제위에 있었으나 28 년으로, 17 세 箕子라는 마휴(麻休)는 45 세 번한으로 51 년간 제위에 있었으나 27 년으로 ...... 날조됐다.
결국 箕子朝鮮 36 세 箕子로 날조한 人韓 35 년은 檀奇古史에 의하면 기원전 241 년인 반면, 桓檀古記에 의하면 人韓은 64 세 番韓으로 기원전 404 년이다. 桓檀古記에 따르면 마밀(馬密) 2 년은 기원전 918 년이 아니라 기원전 1091 년이고, 내이(奈伊) 1 년은 기원전 579 년이 아니라 기원전 752 년이다.
檀奇古史의 人韓 35 년(B.C. 241)을 기준으로 할 때, 衛滿이 番朝鮮을 훔친 해(檀奇古史에 의하면, 馬韓 25 년)는 기원전 146 년이 아니라, 기원전 17 년이 된다. 연대를 고려했다면, 39 세 箕子로 날조한 山韓을 馬韓이라 했을 것이다. 중요 사건의 연도조차 일치 시키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일식이 발생한 해의 중요 사건을 모두 지웠다. 奈伊 “첫해에 맏아들 次音을 태자로 삼았다. 봄에 일식이 있었다.”가 예외. 그러니 朝鮮時代의 일식기록을 날조 箕子朝鮮에 배당하는 과정에서 실제연도와 일치시켜 쓰지는 않은 것이 분명하다. 기원전 579 년에 일식이 일어난 것은 우연으로 보아야 한다. 원래 기원전 579 년에 일어난 일식을 베끼려고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날조자는 연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으니까.
기원전 918 년에 番韓은 동아시아 서쪽 끝에 있었다. 그러나 檀奇古史의 목적은 箕子朝鮮을 창작해 (檀君)朝鮮과 동등한 위치에 올리는 것 외에 우리나라를 동북아의 나라로 축소하기 위한 것이므로 조금만 생각이 있는 날조자라면, 동북아에서 발생한 일식을 우선적으로 활용하려 했을 것이다.
동북아에서 일어난 日蝕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아마 이런 식으로 고쳤을 것이다. 28 세 단군 해모(奚牟) ‘7 월’의 일식을 6 세 箕子 2 년 ‘7 월’의 일식으로, 17 세 檀君 余乙 ‘1 년 봄’의 일식을 19 세 기자 奈伊 ‘1 년 봄’의 일식으로...... 이 경우 동북아의 일식을 보고 기록한 셈이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식이나 동북아에서 관측할 수 없는 일식이 된다. 기원전 579 년 일식의 관측 가능한 지역이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 역시 일식발생 연도를 무시하고 베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일식이 발생한 달이 틀리는 것이다.
일(日)만 고쳐도 일어나지 않은 일식이 된다. 이런 예를 우리는 日本의 일식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日本의 가짜 일식은 우리나라가 실제로 관측한 일식기록에서 연, 월, 일 가운데 하나 내지 두 개를 고쳐서 만들어냈다. 남의 나라 천문기록을 베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다. 일식 실현율이 낮아도 천문관측한 문명국 행세를 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점을 노렸다.
2) 5 세 단군 구을(丘乙)은 10 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삼았다 (3)
三國의 일식기록은 中國의 것을 베꼈다? 日本이 그렇게 우긴 것도 日本이 우리나라 일식기록을 베꼈기 때문이다. 三國의 초기 역사는 없다? 日本이 그렇게 우긴 것도 日本史가 가짜 역사[일본의 최초 왕(神武는 모든 倭奴가 다 인정하는 가공인물이다)은 기원전 660 년이 아니라, 기원 후 4 세기 말(應神)에 등장한다]에 中國倭史[30 小國 연합체를 관장했다는 야마다이(邪馬台國)의 女王 히미꼬(卑彌呼)나 신공(神功皇后)은 중국 대륙에 있었다. 應神이 세운 倭가 일본 최초의 나라이다]를 합친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사로써의 日本史를 은폐하기 위해 주로 사용한 수법의 하나가 역사 반대로 쓰기(수정)다.
정말로 마밀(馬密) 2 년(B.C. 1091)의 番朝鮮 일식이라면, 고정된 위치에서 관측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番朝鮮은 천문대를 馬密 사후에 설치했기 때문이다. “馬密이 죽으니 丁卯年에 아들 모불(牟弗)이 즉위했다. 乙亥年에 監星을 두었다(馬密立薨丁卯子牟弗立乙亥置監星 太白逸史 番韓世家)." 그러나 이 역시 동북아의 일식을 베꼈을 경우, 한 지점에서 관측한 것이다. 辰韓 지역은 기원전 1916 년 이래로 천문대를 설치했으니까.
결론적으로 箕子朝鮮의 일식기록은 기원전 1091 년, 기원전 752 년, 기원전 404 년의 일식일 가능성이 높지만, 番韓(檀奇古史의 箕子朝鮮)과는 무관한 동북아에서 관측한 일식을 골랐다면, 연도를 무시하고 베꼈다. 이 경우, 날조자가 어느 해의 일식을 베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왜냐하면 朝鮮時代는 2096 년이나 되는 반면, 기록된 일식수는 10 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中國 대륙(朝鮮의 首都)에서 관측한 기원전 765 년, 기원전 525 년 일식 및 기원전 248 년 일식을 제외하면, 7 개로 줄어든다. 무엇보다 일식 발생 년, 월 혹은 日이 생략되어 있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2096 년 동안 동북아에서 일어난 일식 가운데, 月이 같은 일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日本 역사책에 기록된 가짜 일식은 대부분 관측 연, 월,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발생한 일식이 한정되어 있어, 기록과 일치하는 일식을 제외한 나머지 일식에서 쉽게 가려낼 수 있다. 일식기록을 고치면서 일식관측 순서까지 뒤바꾸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하나의 가짜 일식과 비교할 일식 수가 몇 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일식관측지를 알고 있다.
둘째, 일식관측기간이 짧다. 백 년 미만에서 이 백 년 정도이다. 가장 긴 기간이 390 년(794 년에서 1183 년 까지의 黑龍江 중류 일식)이다.
셋째, 日本이 베낀 일식기록이 많다. 일식 수가 시대에 따라 수십 개에서 백 개 이상이다.
넷째, 연, 월, 일 가운데 하나 내지 두 개만 고쳤을 것이므로, 가짜 일식의 앞뒤로 진짜 일식이 오는 경우, 혹은 가짜 일식이 연달아 오는 경우에도 가짜 일식이 어느 일식을 고친 것인지 분명해진다 (하나의 실제 일식에 대응하는 가짜 일식을 두 개 이상 만들어낼 수도 있다. 기록된 일식의 연, 월, 일 가운데 두 개만 서로 다르게 고쳐도 같은 일식에서 두 개의 가짜 일식을 만들어 냈다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일식에서 가짜 일식 셋 이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 월, 일 모두 바꿔야 하고, 연달아 오는 가짜 일식의 관측기간이 너무 좁혀진다는 점에서 하나의 실제 일식에 대응하는 가짜 일식을 여러 개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檀君朝鮮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은 한해 시작의 변경이나 윤달, 윤일 등에 대한 고려없이 쓴 글이므로 실제로는 실현된 일식이 더 많다. 또 檀奇古史에 등장하는 일식기록이 전부도 아니다. 朝鮮時代는 2096 년에 이른다. 한단고기(桓檀古記)의 檀君世紀도 요약본 이지만, 檀奇古史 역시 원본 檀君世紀를 통째로 날조 했다고 하기에는 극히 짧은 글이다. 역대 檀君別로 한 권의 분량도 할애하지 않고서 檀君世紀라 말할 수 있을까. 원본 檀君世紀는 방대한 분량으로 추정되고, 일식기록 또한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는 檀君世紀가 수없이 훼손 되었음을 의미한다.
별자리가 등장한 시기는, 지금으로 부터 최소한 5000 년 전이다. 평남 증산군 용덕리 고인돌이나 평남 상원군 용곡리 고인돌군에서 기원전 30 세기 부터 별자리가 등장한다. 천 수백 년도 넘게 별자리만 있고, 이름은 없었다거나 이름을 확정하지 못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전회 연재물 사진 참조)
“기원전 18 세기는 동양에서 28 수(宿)의 이름이 확정되기 훨씬 전”이 아니었던 것이다. 中國이 우리나라 역사를 中國史로 둔갑시키는 과정에서 후대의 역사로 끌어내린 것 뿐이다. 中土의 나라는 그 수가 우리나라보다 많았기 때문에, 또 후대의 역사부터 날조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역사를 바꿀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중요한 역사만 후대의 역사로 끌어당겨 썼다. 이런 예는 별자리에 한정되지 않는다.
원래 五行星은 婁星에 모였다. 婁星은 바다뱀자리(Hydra)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朱元璋이 韓國史와 中國史를 바꾸면서 별자리의 위치까지 뒤바꾼 탓에 130°나 떨어진 양자리(Aries)가 새로운 婁星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28 宿는 중국의 용어가 아니다. 曆法조차 배달과 朝鮮에서 가져다 쓴 주제에, 明조차 曆法을 못 만들어 授時曆을 그대로 베낀 주제에 어떻게 천문용어를 만든단 말인가. 中國이 28 수를 만들었다면, 제 조상이라 우기는 黃帝(軒轅)를 누락시킬 수가 없다. 우리나라 五帝인 白帝, 靑帝, 赤帝, 黑帝, 黃帝를 명명하기 전에 제 조상이라 우기는 炎帝(神農氏)부터 넣었을 것이다.
高句麗는 자체 천문대를 갖추고 西域이나 中國과는 다른 독창적인 천문체계를 日本에 전할 만큼 천문지식이 뛰어났다고 한다(역사스페셜 1권)
日本(당시는 倭다)에 천문지식을 전한 것은 高句麗가 아니라, 百濟이다. 倭는 百濟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더 중요한데, 倭는 百濟學者가 아무리 가르쳐줘도 배우지를 못해 천문관측할 줄 몰랐다. 마지막으로 가르쳐준 602 년 에서 무려 26 년 뒤인 628 년 부터 日蝕기록이 나온다. 709 년 까지의 최적관측지가 中國 南部다. 日本이 관측한 것이 아니라 新羅의 일식기록이다. 이때부터 李氏朝鮮 중기까지 줄줄이 베꼈다. 李氏朝鮮 중기 이후에는? 朝鮮通信使가 천문관측했다. 제 것이라 우기기 위해 일률적으로 가짜 일식을 40~ 50 %씩 섞었다.
29 세 단군 마휴(摩休) 9 년(B.C. 935) 南海의 조수가 3 척이나 물러갔다 (丙戌九年南海潮水退三尺 檀君世紀)
가장 강한 조석력(潮汐力)이 발생한 것은 기원전 931 년이다(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5 세 檀君 丘乙(B.C. 2099 년에 즉위)이 10 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삼(舊用癸亥而檀君邱乙始用甲子以十月爲上月是謂歲首 太白逸史 神市本紀)”은 걸 계산하면 摩休 9 년은 기원전 935 년이 아니라 기원전 936 년이 된다. 그러나 한해의 시작을 여러 번 변경 했다면, 西曆 변환이 간단치 않다.
한해의 시작을 변경하는 경우, 변경 직전 해가 언제나 1 년 보다 짧은 것은 아니다. 변경 직전의 해에 변경 직후의 해를 합쳤다면, 그 해는 1 년이 넘는다. 게다가 檀君 丘乙 이후 음력 정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삼을 때까지 한해의 시작을 더 변경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10 월 에서 다른 달로 변경 했다가, 다시 10 월로 변경한 후 1 월로 변경하면, 기록이 남지 않는 이상, 한해의 시작을 변경했는지 안했는지 알 길이 없다. 한해의 시작을 여러 번 바꾸면서 한해가 1 년 보다 긴 적이 摩休 9 년 이전에 몇 번 있다면, 摩休 9 년은 기원전 931 년에 근접한다. 摩休 9 년 이후 한해가 1 년 보다 짧은 적이 몇 번 있다면, 오늘날의 西曆과 일치한다.
어째서 한해의 시작을 빈번히 바꾸었을까. 우리나라 역사책을 뜯어고친 書經의 “日月星辰을 역상(曆象)하여 삼가 백성에게 때를 알린다(曆象日月星辰敬授人時)”는 기사처럼, 이 당시는 아직 정확한 曆法이 완성되기 전이었다. 太陰曆의 1 년은 354 일로 윤일, 윤달을 삽입하기 까지 해를 거듭할수록 節期가 어긋난다. 시차가 누적되면, 윤일, 윤달을 삽입하거나 한해의 시작을 바꾸어야 했다. 이 당시에는 年號를 사용하지 않았다. 高句麗 이래로 황제 즉위시에 새 年號를 정한 것처럼 檀君 즉위를 기념하여 한해의 시작을 바꾸는 쪽을 택한 것이 아닐까. 檀君 在位 중에는 윤일이나 윤달을 삽입하고.
어쩌면 기록의 오류 즉 摩休 9 년의 기록이 아닌지도 모른다. 潮汐力이 최대가 되었을 당시, 潮水가 4 척, 5 척 물러났을 가능성도 있다. 즉 “29 世 檀君 摩休 9 년 南海의 潮水가 3 尺이나 물러갔다.”는 潮汐力이 최대가 된 시점의 기록이 아닐 수도 있다. 방대한 분량 이었다면 여러 해의 변동사항을 상세히 기록 했겠지만, 공개된 檀君世紀는 원본도 아니고, 극히 간략한 요약본이다.
▲ 충북 청원 아득이 고인돌에서 나온 성혈도(星穴圖)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가호리 아득이 마을에서 발견된 고인돌에는 246 개의 星穴이 새겨져 있다. 각 성혈의 지름도 13∼17 cm에 달하는 큰 싸이즈에서 부터 6∼7 cm의 중간 크기, 2 cm의 작은 크기 등 다양하다. 아득이 고인돌의 덮개돌에 새겨진 성혈은 피장자의 후손집단 크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 동안 이해되어 왔으나 별자리로 보는 새로운 시각이 제시되어 재검토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곳 고인돌군에서 주목되는 것은 석실에서 발견된 돌판이다. 이 돌판에는 60 여개의 구멍이 뚫려져 있는데, 돌판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원을 그려보면 몇 개의 원 안에 각각의 구멍이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星穴은 가로와 세로 32.6 cm, 23.5 cm 크기의 돌판에 7 mm 지름의 구멍이 2 개, 5 mm 지름의 구멍이 14 개, 3.5 mm 지름의 구멍이 39 개, 아주 작은 2 mm의 구멍이 5 개가 뚫려 있는데 가까운 구멍끼리 선으로 연결 시켜 보면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득이 돌판 구멍들의 분포를 살펴보면 왼쪽 아래에서 북두칠성과 같은 배열을 이루는 7 개의 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배열은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북두칠성의 모습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다. 북두칠성은 七星信仰과 관련되는 별인데 칠성은 사람의 탄생과 길흉화복을 주관 한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칠성판 위에 안치 하는데 생(生)과 사(死)를 인도하는 별자리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고대 별자리 찾기판과 현대 컴퓨터 재생작업을 통해 아득이 돌판에서 찾아낸 별자리로는 작은곰자리·용자리·세페우스 자리 등이 있다.
우리나라 천문 및 기상관측은 철기시대에 들어와 시작된 것이 아니다. 고인돌의 별자리 그림들, 발굴해낸 아득이 돌판 천문도(1978 년 충북 청원군 문의면 가호리 아득이말의 고인돌 유적에서 조그마한 돌판이 별견 되었는데 60 여개의 별들이 그려진 천문도임이 밝혀졌다) 등은 청동기 시대부터 우리나라에 독자적인 천문학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배달 開天 당시 曆法(육계;六癸)을 제정했다.
六癸는 神市氏로부터 신지(神誌)에 명하여 만든 것으로써 癸로 세수(歲首)를 삼았다(六癸自神市氏命神誌所製而以癸爲首 太白逸史 神市本紀) 이는 우리민족이 한국시대(桓國時代)부터 천문관측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맨 처음으로 천문관측한 나라였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뛰어난 실현율을 자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 민족의 천문지식은 세계적 수준을 자랑한다. 첨성대(瞻星臺 : 편자는 경주에 있는 첨성대에 대해서는 그 효용을 의심하고 있다. 차후에 한 번 집고 넘어가 볼 심산이다)가 세계 최고의 천문대다. 711 개에 달하는 수많은 오로라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갈릴레이 갈릴레오보다 1000 여 년이나 앞선 태양 흑점 관찰 기록을 가진 민족이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함께 세계에서 유일하게 2000 년 이상 꾸준히 천문현상을 체계적으로 관측하여 방대한 기록을 남긴 천문왕국이다. 서구의 천문관측의 역사는 고작 300 년에 불과하다. 기원전 5000 년경 부터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등을 새긴 고인돌이 북한 지역에 남아 있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711 개의 오로라(aurora) 기록은 우리나라가 관측한 오로라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보나마나 李氏朝鮮은 한반도에서 관측한 오로라만 남겨 두었다.
우리나라는 天孫民族이라는 높은 긍지로 天文觀測을 해왔다. 그래서 우리나라 천문기록은 실현율이 높다. 中國이 천문관측할 줄 몰랐음은 일식기록 조차 남의 것을 베끼고 曆法조차 남의 역법을 이름만 바꿔 부른 데서도 알 수 있다.
일식기록만으로도 우리나라의 강역이 최소한 朝鮮時代 이래로 동아시아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日本이 베낀 일식기록 만으로도 李氏朝鮮 이후 中國이 역사를 날조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3) 재위 90여 년 동안, 천하는 공허롭게 넓기에 즐거움을 잊고 지냈다 (1)
朝鮮時代의 일식기록은 朝鮮史가 공간적으로 동아시아를 무대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朝鮮은 우리나라 강역을 재통합했지, 우리나라 강역을 넓힌 것은 아니다. 朝鮮은 우리나라 疆域 일부에서 개국했다.
이때에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그 수가 많았다. 국경은 동쪽이 滄海, 서쪽은 遼西, 남쪽은 南海, 북쪽은 서비로(西毘盧)에 이르렀다(檀奇古史)
2 世 檀君 부루(扶婁) 때의 우리나라 영토로 기술되어 있지만, 神人王儉 당시 이미 全 東아시아로 영토를 넓혔을 가능성이 높다. 檀奇古史는 檀君世紀를 토대로 날조 하면서 기사도 옮겼다. 예를 들어 神人王儉 때의 홍수 기사를 2 世 檀君 扶婁 때의 기사로 고치는 것은 물론, 각기 다른 기사[檀君世紀에 의하면, 도산회의(塗山會議)는 홍수와 관련없다]를 하나로 합쳤다.
甲戌 67 년(B.C. 2267) 단군(신인왕검)께서 태자 부루(夫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空)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五行治水法을 전하여 주었다(甲戌六十七年帝遣太子夫婁與虞司公會于塗山太子傳五行治水之法)
丁巳 50 년(B.C. 2284)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단제께서는 풍백(風伯)인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 강을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니 우수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丁巳五十年洪水汎濫民不得息帝命風伯彭虞治水定高山大川以便民居牛首州有碑 檀君世紀)
그때에 홍수가 9 년 동안 천하에 범람하여 中土는 禹가 치수하는데 곤란을 겪고, 朝鮮은 팽우(彭虞)에게 치수를 맡겨 치수가 완료되니, 우(禹)가 塗山會議를 각 나라에 요청하였다. 임금(夫婁)께서는 彭虞를 특명대사로 삼아 禹에게 보내어 치수하는 법을 설명하셨다(檀奇古史)
시간적으로도 檀君世紀, 檀奇古史에 나오는 천문기록의 천문역학적 계산을 통해 밝혀낸 朝鮮史는 유물 발견으로 증명된 朝鮮史와 일치한다. 우리나라 靑銅器 時代는 기원전 27 세기 까지 밝혀져 있다. 朝鮮의 개국 연대는 문헌상에 나와 있는 대로 기원전 24 세기였던 것이다. 고고학상으로 우리나라의 철기문명 진입시기는 기원전 15 세기 까지 밝혀져 있고, 문헌상으로는 기원전 27 세기로 기록되어 있다. 배달 慈烏支 桓雄 때 철을 주조하고 병기를 만든 기록이 三聖紀全 下篇, 太白逸史 등에 있다.
◀산동성 능양하 유적에서 출토된 조선 특유의 팽이형 토기 신용하 교수가 아사달 문양으로 추정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中國의 경우 서기전 9 세기에서 서기전 11 세기에 속하는 서주(西周) 초기의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장식단추를 전의(戰衣)에 달아 방어용 갑옷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중국학자들은 이를 중국 갑옷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朝鮮의 청동장식단추 생산연대는 중국보다 무려 16 세기 정도나 앞선다. 따라서 중국의 청동장식단추는 朝鮮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철기시대 개시 역시 만주지역이 황하유역 보다 앞선다. 평양지역의 강동군 송산리 1 호묘에서 서기전 12 세기 경의 강철로 만든 석경이 출토 되었는데 강철은 연철이나 선철의 생산공정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朝鮮의 철기 생산 개시 연대는 이보다 몇 백 년 앞설 것이라고 박교수는 앞의 논문에서 지적했다.
中國은 서기전 6 세기 경 까지 생철이 그대로 생산되어 제철제강 기술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던 반면 朝鮮은 같은 시기에 거의 모든 지역에서 주철을 생산하기 시작 하였고, 주철로 부터 연철·신철·강철 등을 생산하여 투구와 공구 및 농기구 등에 널리 사용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朝鮮이 뼈갑옷이나 가죽갑옷, 철갑옷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독자적으로 생산 했으며, 이 우수한 갑옷기술과 철기문화가 그대로 열국시대로 계승 되었다고 밝혔다.
朝鮮은 청동기와 철기 시대를 먼저 열었고, 제련기술도 앞서 갔다. 이는 朝鮮이 선진문화·기술국가였을 뿐 아니라 그에 걸맞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대조선(大朝鮮)이 가능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원출처 : 열국시대의 갑옷-고조선 갑옷의 발전에 관한 시론, 박선희)
위치상으로 우리나라와 中國이 아니라, 배달의 도읍 神市가 있던 동북아와 靑邱國이 있던 黃河 하류와의 유물 비교이다. 神人王儉이 三韓으로 나누고 나서부터는 辰韓지역 이었지만, 중심지에서는 비켜나 있었다.
무력과 기술에서 앞선 대제국 朝鮮이 고작 동북아만을 지배할 리는 없다. 무력과 기술에서 열등한 中國이 동아시아 대부분을 지배할 수는 없다. 철을 주조하고 병기를 만들어 정복에 나선 우리나라가 강대국인가, 정복자를 두고 “머리는 구리로 되고 이마는 쇠로 되었다(銅頭鐵額)”고 실성한 듯 헛소리 해댄 中國이 강대국인가.
이 당시는 영토 크기와 인구가 곧 그 나라의 국력이었다. 영토가 크면 당연히 인구도 많았다. 아무리 天孫民族이라 주장해도 영토가 턱없이 작다면, 비웃음이나 당할까, 上國으로 군림할 수가 없다. 거대 영토가 뒷받침 되었기에 天孫民族 으로서 上國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식관측지로 보듯, 高句麗를 비롯한 三國이 中國 대륙에서 건국한 것은, 三國의 영토가 동아시아에 걸쳐 있었던 것은 三國 이전의 국가가 동아시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中國 대륙에서 관측한 朝鮮의 일식기록이다. 朝鮮의 일식기록은 朝鮮의 강역 역시 동아시아였음을 알려준다. 우리나라는 배달시대 이래로 동아시아를 강역으로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와 中國(?)의 일식기록은 현재 알려진 역사가 전면적으로 왜곡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 신시및 청구시대의 지명
黑水와 白水 사이에 있는 현 黃河 유역은 배달 개천 당시부터 우리나라 영토였다. 단 중심지 神市는 동북아에 있었다. 자오지한웅(慈烏支桓雄 : 蚩于天皇)이 중국 대륙으로 중심지를 옮기고 나서도 기원전 18 년 까지 黃河 하류는 중심지가 아니었다[白岳山 阿斯達은 후대의 은허(殷墟)로 현 黃河 하류에 위치하기는 했지만, 서쪽 끄트머리에 있었다]. 배달 및 朝鮮 시대에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평화로웠다. 더구나 우리의 적은 내륙의 중국 이었으므로 黃河 하류에서 무기나 갑옷을 만들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없었다. 기원전 18 년 溫祚가 나라를 세우고 나서 黃河 하류는 우리나라 중심지의 하나로 부상했고, 바로 옆에 있는 高句麗와 기나긴 전쟁에 돌입했다.
결론적으로 고고학적 유물만 봐도 中國文化가 우리나라 문화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가 중국문화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文明은 배달과 朝鮮에서 동아시아 너머로 퍼져나간 것이다. 요컨대 우리나라 문화는 고유문화이고, 중국의 문화는 우리나라 문화 위에서 성립한 寄生文化이다.
3) 재위 90 여 년 동안, 천하는 공허롭게 넓기에 즐거움을 잊고 지냈다 (2)
영금하(英金河)와 음하(陰河) 같은 강 주변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70 여개의 성곽이 발견됐다.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 시대에 속하는 지역으로 이들 성곽이 자리잡고 있는 형태를 보면, 3 만평 정도 되는 큰 성을 중심으로 그보다 규모가 작은 성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다.
인류학에서는 권력의 발생 혹은 국가(state) 발생의 중요한 징표로 성곽을 꼽는다. 기원전 24 세기에 개막해 기원전 15 세기 까지 번성한 夏家店 하층문화 시대에 강력한 국가 체제를 형성했던 집단은 바로 조선이었다(요서지역의 청동기 문화 연구)
▲ 조선 문화의 상징 중 하나인 비파형동검과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꺽창. 특히 길이가 80.3 cm에 이르는 꺽창은 중원문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이다. 능하문화 시기의 청동기인 잔줄무늬 거울.하가점 하층문화 시기의 세발솥은 세련된 솜씨를 보인다 (왼쪽부터).
‘遼西地域의 靑銅器 文化 硏究’는 수수께끼 같은 책이다. 현 遼西 지역이 기원전 2400 년경 까지 신석기 문화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神市에서 비교적 가까운 지역이라 배달이 開天한 기원전 40 세기에는 청동기문화로 이행한 지역이다.
“기원전 24 세기에 개막해 기원전 15 세기 까지 번성한 문화”는 국가체계를 형성했던 집단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기원전 2400 년은 철기시대였다. 현 遼西 지역 청동기문화의 연대측정은 중국의 주장일 것이다. 이 땅은 기원전 3898 년에 국가가 성립한 지역이다. 동북공정. 국가주도로 역사날조 프로젝트를 추진, 천문학적 금액을 쏟아 부어 마지막 남은 韓文明史까지 훔치려 하는 中國이다. 기원전 40 세기의 유적, 유물이 나온다고 해도 中國이 감추거나 파괴할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일식관측지가 말해주듯 朝鮮의 疆域은 동아시아다. 朝鮮의 중심지는 시종일관 中國 대륙이었다. 朝鮮은 국호만 바꾸고, 도읍지(중국 대륙에서 중국 대륙으로)만 옮겼을 뿐이다. 神人王儉의 부친은 배달의 마지막 통치자 檀雄(居弗檀桓雄)이다.
우리민족의 터전 韓大陸은 동아시아를 가리킨다.
재위 90 여년 동안, 천하는 공허롭게 넓기에 즐거움을 잊고 지냈다 (在位九十餘載天下呺呺然忘其樂焉)
거짓말의 향연 같은 규원사화(揆園史話)에도 몇 번인가 사실을 기술했다. 저 글도 그 중 하나다. 한반도와 그 이북만으로 “공허롭게 넓”은 천하라 할 수 있는가. 고작 韓半島와 그 이북을 다스리기에 바빠서 즐거움을 잊고 지냈던가. 神人王儉 당시의 천하는 동아시아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천문기록과 기상기록도 동아시아에 걸쳐 발생했던 것이다.
신라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9 년(A.D.108)에 “홍수로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10 道에 사신을 보내 창고를 열어 구제토록 했다(二十九年 夏五月 大水 民飢 發使十道 開倉賑給 三國史記)” 같은 해, 百濟[百濟 기루왕(己婁王) 32 년]에서는 “봄, 여름에 가뭄이 있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三十二年 春夏旱年饑民相食)”
이 기록은 한반도에서는 절대 발생할 수 없다. 북반구에서는 기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므로 대륙에서 습기가 많고 규모가 큰 저기압이 황해를 건너오면, 도중에 바다에서 수분을 공급받아 백제 영토에 우선 홍수를 뿌려야 한다.
6 개월씩이나 지속적인 가뭄 현상을 일으키는 氣團(블로킹 기단)은 그 규모가 최소한 수백 km에서 수천 km의 반경을 유지하며 요지부동이거나 이동속도가 아주 느린 특성이 있다. 블로킹 기단(blocking 氣團)은 강수현상을 일으키는 공기 덩어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범위가 크고 넓다. 半島史 대로라면, 백제뿐 아니라, 홍수상황에 있는 신라와 고구려까지 가뭄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 백제 지역에서 대규모 홍수가 나고 신라지역에서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월간 신동아 97 년 2 월호)
弘益人間과 敬天愛人의 나라 배달과 朝鮮의 계승국에서 흉년이 들었다고 사람을 잡아 먹었다는 기록은 심히 의문이다. 반면 미개 華夏族 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게다가 中土는 기후조건상 매년 흉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원래 농사가 안되는 땅이다. 아마도 中土의 미개민들의 행동을 슬쩍 우리역사에 집어넣은 것 처럼 보인다.
전직 기상관 정용석 선생에 의하면, 三國史記에 나타난 기상관측 기록들도 中國 대륙에서나 가능하다고 한다.
“新羅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9 년(A.D. 192) 3 월에 서울에 눈이 내려 세 자나 쌓였다. 여름 5 월에 홍수가 나서 10 여 곳의 산이 무너졌다(三月 京都雪 深三尺 夏五月 大水 山崩十餘所 三國史記).”, “신라 내해 이사금(奈解尼師今) 34 년(A.D. 229), 겨울 10 월에 큰 눈이 내려 깊이가 5 자나 되었다(冬十月 大雪 深五尺 三國史記)” 음력 3 월은 양력으로 4 월, 5 월이다. 한반도 남부는 4 월, 5 월까지 눈이 내리는 곳이 없다. 지금의 경주는 따뜻한 해양성 기후라, 4, 5 월에 눈이 3 자나 내려 극심한 피해를 주는 기상이변은 발생할 수가 없다(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일식기록으로 나타난 新羅의 수도 金城은 현 武漢이다. 호북성(湖北省)의 여름은 고온다습한데, 3 자, 5 자나 눈이 내릴 수 있을까. 반면 中土는 눈이 엄청 내리는 기후다. 中國史를 슬쩍 집어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천문기록은 의미를 모른다고 해도 추울 때 눈이 내리는 것은 누구나 아니까.
半島史에서 新羅에 큰 눈이 내려 깊이가 5 자나 되었다면, 홍수 때의 공기이동 처럼 百濟 땅에도 더 많은 눈이 내려야 한다. 湖南의 기상현상은 嶺南지방보다 대개 1 개월 이상 빨리 내리고 늦게까지 내린다. 그런데 같은 시기 百濟 구수제(仇首帝)는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百濟는 저위도 내륙에도 영토를 가진 나라로, 이 당시 百濟 皇帝는 현 黃河 하류나 발해만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저위도에서 사냥을 한 것으로 보인다.
3) 재위 90여 년 동안, 천하는 공허롭게 넓기에 즐거움을 잊고 지냈다 (3)
이주형 메뚜기 떼의 피해는 가뭄 뒤에 발생한다. 癸亥 2 년((B.C. 2093) 5월 황충(蝗蟲)의 떼가 크게 일어나 온통 밭과 들에 가득 찼다(癸亥二年五月蝗虫大作遍滿田野 檀君世紀). 甲戌 6 년(B.C. 767)에도 황충의 피해가 있었다(甲戌六年是歲有蝗蟲大水 檀君世紀). 普乙(46 世 檀君) 15 년에 蝗蟲이 밭곡식을 다 먹어 버렸다(檀奇古史). 朝鮮만이 아니다. 三國도 이주형 메뚜기 떼의 공격을 자주 받았음이 三國史記에 나온다. 高麗史에는 24 회나 이주형 메뚜기 떼의 공격이 기록되어 있다.
◀ 메뚜기(蝗蟲) 떼들의 모습 (동아일보 사진)
대부분의 蝗蟲 피해는 高麗의 경기지방을 중심으로 서해도, 해주, 서북면, 북계 지방에서 발생한다는 한계가 있다. 주로 黃河지대 및 그 이북과 북서 지방에서 蝗蟲이 발생하는 것이다. 蝗蟲이 발생했다는 고려의 영역 중 대부분은 스텝 건조기후대와 건조기후대 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西海, 海州, 西北面이란 감숙성(甘肅省), 내몽고(內蒙古) 서쪽, 신강성(新疆省) 쪽을 말하는 것이며 대륙에서도 기후변동이 심하여 蝗蟲이 자주 발생하기로 유명했던 곳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구조는 3 면이 바다여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이라 언제나 강수량은 충분하고 바다 때문에 급격한 기후변동을 초래하지 않는 온난다습한 지역이다. 스텝건조기후대와 건조기후대에서 주로 발생하는 蝗蟲이 발생할 근본적인 조건과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두자.
가끔은 黃河 이남에서도 이주형 메뚜기의 피해가 발생했다. 高句麗와 百濟의 메뚜기 피해지역 가운데 나라 남쪽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시베리아에 이르는 영토를 가진 高句麗의 남쪽은 어딜까. 수도 이남(?) 장성 이북 지역으로 추정된다. 百濟의 경우는 504 년 까지 수도가 남북에 두 군데 있었기 때문[百濟王은 동서의 두 성에 거처한다(百濟......王居東西二城 新唐書)]에 나라 남쪽은 남쪽 수도가 있는 지역이다. 내륙지방이라 일부를 제외하면 건조기후대에 속한다.
武漢을 중심으로 있던 新羅가 이주형 메뚜기의 피해를 입을 수 있을까. 揚子江과 漢水가 만나는 곳에는 수많은 호수가 널려 있다. 아열대 계절풍 기후대로 봄철엔 날씨 변화가 심하고, 여름은 고온다습하고, 가을은 쾌적하고, 겨울은 건조하고 춥다. 봄과 여름의 교차기에 장마가 있고, 연평균 강수량은 750~1500 mm이다. 그렇다면 건조한 겨울에만 황충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데, 메뚜기도 곤충이라서 겨울에는 동면(알 상태로)을 한다. 게다가 三國史記에 보면, 新羅는 가을에만 그것도 거의 음력 7 월에 蝗蟲의 피해가 몰려 있다. (高句麗와 百濟는 주로 음력 8 월에 황충의 피해가 있었다) 三國史記에는 新羅가 이주형 메뚜기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것으로 나온다. 건국 초기부터 메뚜기의 피해가 기록되어 있다(南解次次雄......二十一年秋九月蝗 三國史記). 中國史 일부를 신라에 배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中土는 기후 조건상 이주형 메뚜기 떼의 피해가 거의 매년 발생한 지역이다.
“신라 眞平王 31 년(509) 봄 3월에 모지악(毛只嶽)산의 땅이 탔다. 구덩이 너비가 4 보, 길이가 8 보, 깊이가 5 척이나 되었고, 10 월 15 일 꺼졌다(毛只嶽下地燒 廣四步 長八步 深五尺 至十月十五日滅)”, “신라 武烈王 4 년(657) 가을 7 월에 동악 토함산의 땅이 타서 3년 만에 꺼졌다(東吐含山地燃 三年而滅).”
毛只嶽山의 비정(比定)은 이 땅의 사학자들조차 두 손 들었다(어디인지 위치를 모르고 설명도 못한다). 吐含山은 慶州에 있는 吐含山으로 본다. 경주에 화산활동의 흔적이 없는 탓에 이 땅의 사학자들은 천연가스의 폭발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東海에 하이드레이트(chlorine hydrate : 물분자들 내에 메탄분자가 포획된 고체 상태의 결정체로 미래의 주요 에너지원이다. 일본이 독도를 제 땅이라 우기는 것도 어장확보 차원을 넘어 동해 아래 매장된 하이드레이트 때문이다. 하이드레이트 아래에는 천연가스와 석유가 있어 경제적 가치가 대단한데다가, 하이드레이트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면 그 위에 있는 일본열도의 지반이 침하된다고 한다. 러시아 과학자들의 판정에 의하면 어마어마한 용량의 하이드레이트가 독도중심 지하에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가 매장되어 있는 것이 전부다. 하이드레이트 아래에 천연가스와 원유층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긴 하다. 그런데 이 천연가스가 경주까지 매장돼 있을까. 이 천연가스가 지표로 분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이드레이트 층을 뚫고, 거기서부터 해발 750 m의 토함산(吐含山)까지 뚫고 올라와야 한다.
◀ 독도전경 : 일반적으로 일본이 독도에 집착하는 이유는 한국에 독도를 양보할 경우 ‘러시아가 차지한 북방 영토를 영원히 되찾지 못할 전례를 남길지 모른다’로 설명했다. 또한 중국과 분쟁이 있는 센가쿠 제도(尖閣諸島)에 대한 영유권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하여 자기네 땅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들 나름대로의 영토 확장 즉 ‘밑져야 본전’이란 식으로 생떼를 부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속셈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그것은 독도에 미래의 에너지원으로 각광받을 메탄하이드레이트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메탄하이드레이트는 천연가스 주성분인 메탄을 함유하고 있는 얼음 상태의 물질로, 메탄 등의 가스 분자가 물분자 안으로 들어가서 만들어지는 기포 모양의 결정체이다. 간단하게 메탄가스가 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알래스카, 시베리아, 극지방 등의 영구 동토지역과 수심 500 m 이상의 해저 심층부에 매장되어 있다. 메탄하이드레이트는 매우 차갑지만 불에 타며 1 ℓ 당 110 ℓ의 메탄가스를 만들 수 있다.
메탄하이드레이트가 주목을 받는 것은 장래의 에너지원으로 개발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류의 주요 에너지 자원은 목재, 석탄, 석유로 변천 되었지만 앞으로는 천연가스가 주종을 이룰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일부 사용되고 있는 천연가스는 석유나 석탄에 비하여 탄소를 포함하는 성분 비율이 작아서 연소했을 때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이 적고 유해 물질도 많이 배출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천연가스 역시 매장량에는 한정이 있어 2060 년경에는 고갈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반면에 전세계에 매장되어 있는 메탄하이드레이트는 천연가스로 환산할 때 1000 조에서 5 경 ㎥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에너지의 200∼500 년에 해당하는 엄청난 량이다.
메탄하이드레이트가 알려진 것은 1930 년대 였지만 이 당시에는 원유나 천연가스가 풍부해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는데 요즈음 다시 각광을 받는 이유는 화석연료인 석탄, 원유 등 에너지 자원이 고갈되어 가는데다가 연소시 이산화탄소의 발생량이 석탄, 석유에 비해 절반에 불과한 청정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메탄하이드레이트는 석유자원이 매장되었는지를 알려주는 표시물이기도 하여 유전개발에 있어 매우 중요시되는 물질이다.
학자들은 시즈오카현(靜岡縣) 앞바다 에서만 6 조 ㎥의 메탄하이드레이트가 발견 되었으며[난카이 해구에는 77 조 ㎥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 다른 지역보다 메탄 함유율이 20 %나 될 정도로 양질 인데다가 이를 추적하면 독도 주변 등 한반도 해역에 엄청난 양이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이 무리한 논리를 내세우면서 독도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만약 慶州 吐含山에서 천연가스가 3 년 동안이나 뿜었다고 한다면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경주 토함산은 화강암석으로 이루어져 천연가스가 나올 수 있는 산이 아니다. 休火山도 아니다. 吐含山에서 천연가스가 분출했으면, 현재 우리나라는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입할 필요가 없다.
전직 기상관 출신인 정용석 선생은 中國 안휘성(安徽省) 소호(巢湖)시 합비(合肥)라는 곳에 있는 含山이 三國史記에 기록된 吐含山일 가능성을 지적했다. 용암을 뿜어내는 活火山일 때는 吐含山이 되지만, 休火山일 때는 토(吐)하지 않기 때문에 함산(含山)으로 불렀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含山은 화산활동을 한 적이 있는 휴화산이고, 그 인근의 合肥 지역은 화산활동의 여파로 토질이 좋아 작물이 잘 자란다. 天文記錄으로 찾은 韓國史 에서 合肥는 上代 新羅의 국경지대쯤으로 본다.
新羅는 지진 및 화산과 더불어 살아온 千年王國이다. 韓半島에서 화산활동이라곤 白頭山과 漢拏山이 전부다. 지금의 慶州 일대에 强震이나 화산이 발생한 적이 없는데도 이 땅의 사학자들은 현 慶州가 新羅의 수도라고 우긴다. 이제껏 우리나라 역사연구는 과학기록을 뺀 문헌의 억지해석에 지나지 않았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韓半島에 들어맞지 않은 三國史記 기록은 모조리 金富軾의 착각으로 돌린다. 金富軾이 한단사(桓檀史)를 생략했으니 三國史도 축소했다고 비난하지만, 金富軾이 쓴 것은 三國史記지, 桓檀史記가 아니다. 三國 건국에서 三國 멸망까지의 우리나라 역사다. 李氏朝鮮 초기 까지도 桓檀史에 관한 책은 수십 종이었다. 日本이 빼돌린 桓檀 역사책은 51 종이나 된다. 金富軾은 한단사를 쓸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金富軾은 朝鮮史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평양(西京)은 본래 仙人王儉이 자리잡은 곳이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三國史記).”고 말할 만큼.
더구나 金富軾이 三國史記에 桓檀史를 기술 했었다는 증거가 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多勿"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三國史記에 桓檀史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쓸 수 없는 대목이다.
현 三國史記는 李氏朝鮮의 시각에서 날조된 책이다. “주로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事大的인 예절 등 유교적 명분과 春秋大義를 견지한 것이지만 반면에 한국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는 특징”을 가진 것은 明의 제후국을 자처한 李氏朝鮮이지, 동아시아에 군림한 皇帝國 高麗가 아니다. 三國史記가 날조되자, 李氏朝鮮의 시각도 고정되고 말았던 것이다. 三國史記는 明이 날조했다는 점에서 “주로 儒敎的 德治主義, 君臣의 행동, 事大的인 禮節 등 儒敎的 名分과 春秋大義를 견지한 것이지만 반면에 한국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는 특징”은 明이 제시한 李氏朝鮮의 통치지침 이었다. 삼국사기는 明과 李氏朝鮮에 의해 날조되고 왜곡되었다.
실상 三國史記에는 “한국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는 특징”도 없는데 李氏朝鮮은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라 자처했다. “지금에 있어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스스로를 ‘小中華’라고 뽐내고 있다(而今 夫 人囂囂然以小華自耀 肯認 揆園史話)." “산의 조종을 곤륜산(崑崙山)이라 떠들어대며 기분 좋아하며, 소중화를 가지고 스스로 달래며 만족한다(唱山之祖宗崑崙欣欣然以小中華自甘宜 太白逸史)."
小中華에 대하여 이를 事大主義의 다른 표현 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우리 조상들의 역사를 정통으로 잇고 있다는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즉, 중화의 땅을 지배해야 할 어떤 당위성의 시각으로 볼 수 있다면 그렇게 비난 받을 일은 아닌듯 싶습니다(편자주).
우리 上古史와 三國時代및 高麗史는 李氏朝鮮에 의해 무참하게 날조되고 폄하 되었습니다. 제가 李氏朝鮮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일제하 식민사관의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역사에 朝鮮은 하나입니다. 단지 후대에 三韓朝鮮이 있었고, 李氏가 있었고, 지금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있을 뿐이지만, 우리역사 속에 朝鮮은 하나입니다. 李氏朝鮮이라는 나무로 인해 大 朝鮮의 숲을 못볼까 우려 됩니다.
3) 재위 90 여 년 동안, 천하는 공허롭게 넓기에 즐거움을 잊고 지냈다 (4)
三國史記 어디에도 高句麗가 자부심의 나라라는 얘기는 없다. 오히려 수시로 中國에 ‘朝貢’하고 ‘郡公’에 봉해졌다고 나온다. 高句麗가 대단한 자부심의 나라라는 얘기는 이 땅의 사학자라는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고는 우리나라 벽화에 표현돼 있다. 하지만 高句麗 벽화가 아니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朝貢이 대등한 외교활동이라 치부하나, 헛소리다. ‘郡公’에 봉해지는 나라가 독립국이라 자부할 수 있는가. 郡公에 봉해졌다는 것은 속국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땅의 사학자들은 온갖 말도 안되는 이유를 갖다 붙인다. 형식적이었다니, 天子를 예우해서 였다니......
그러나 中土의 나라들이 郡公 및 王에 봉해졌던 내내 우리나라 속국이었다. 百濟 皇帝를 郡公에 봉할 수가 없어서, 皇帝보다 더 높다는 뜻으로 廣開土境好‘太皇’[高句麗가 계승한 北夫餘는 檀帝의 나라다. 中國 문헌으로 둔갑한 책에도 高句麗의 통치자는 皇帝로 기록되어 있다. 隋書에는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소열제(昭烈帝), 대무신왕(大武神王)은 대무신열제(大武神烈帝)로 되어 있다. 날조하면서 빠트린 대목이다.
李氏朝鮮 중기에 쓴 太白逸史 조차 廣開土境好太皇이라 했다. 채옹(蔡邕 : 132~192 後漢의 학자)도 "독단(獨斷)"에서 天子라는 호칭은 우리나라가 먼저 사용했다고 했다(天子之號稱始於東夷父天母地故曰天子). 太王으로 표기되어 있는 廣開土境大勳跡碑는 李成桂가 朱元璋과 濊貊族에게 黃河 이남을 주었을 때, 날조사에 맞춰 새로 만든 가짜 비다],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라 했던 것이다.
新羅 皇帝는 신하를 郡公도 아니고 君王에 봉했다. 원성제(元聖帝)는 황위쟁탈전에서 패한 金周元을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했다. 王이 王을 封할 수 있나? 통치자는 郡公이고, 신하는 君王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新羅의 최고통치자가 皇帝였기 때문에 자신의 신하를 君王에 봉할 수 있었다. 新羅가 동아시아를 통일했을 당시 新羅는 天子國이었다. 그래서 日本이 植民母國 百濟를 멸망시킨 新羅에 서둘러 조공했다. 제1의 강대국이 天子國의 지위를 획득했던 것이다.
▲ 중국역사부도에 나와있는 고구려의 강역도
‘朝貢 받았다’가 ‘朝貢 했다’로 날조됐다. 그래서 廣開土境好太皇이 동아시아를 제패했음에도 그 아들 장수홍제호태열제(長壽弘濟好太烈帝)는 中國에 조공하느라 세월 다 보내야 했던 것이다. 長壽弘濟好太烈帝 재위 79 년 동안에 47 회나 조공했다고 나온다. 실제의 우리나라 역사책은 방대한 문헌이기에 中國은 三國에 훨씬 더 많이 조공했다. 中國은 三國의 皇帝에게 돌아가며 朝貢하고 ‘郡公’으로 封함을 받았다.
中國은 우리나라에 얼마나 朝貢을 했을까. 이에 대한 근거가 바로 日本이 李氏朝鮮에 朝貢한 햇수다. 李氏朝鮮 전기(임진왜란 이전 2 백년)에만 무려 4,800 여건의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 거추사(巨酋使), 규슈(九州)탐제사와 대마도주특송사(對馬島主特送使), 제추사 등 온갖 명칭의 倭奴使節을 보냈다.
역사기록의 무수한 모순. 날조됐다는 뜻이다. 역사날조는 절대 어렵게 하지 못한다. 기초 수학공식처럼 간단하지 못하면 불가능한 것이 역사날조다. 방대한 양과 기사 상호 간의 관련성을 참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순이 발생한다.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수천, 수만 번의 거짓말을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다.
우리나라 역사말살에 앞장선 나라는 바로 李氏朝鮮이었다. 李成桂가 우리나라 영토를 朱元璋 등에게 주고, 우리나라 역사를 중국사와 맞바꾸었다는 증거는 너무 많아서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 우선 日本이 베낀 일식기록 부터 李氏朝鮮이 우리나라 일식기록을 삭제했음을 증명한다. 高麗나 三國 등이 16 세기의 일식기록을 삭제할 수는 없다. 日本이 만주에서 관측한 일식기록을 베낀 것(1343 년 부터 1599 년 까지)은 李氏朝鮮이 이미 만주의 일식기록을 지웠기 때문이다.
과연 韓國史와 中國史를 뒤바꾸는 것이 가능한가. 물론이다. 단지 서로의 역사를 바꾸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수천 년의 역사를 순수창작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바꾸는 것은 간단하다(요즘은 회사의 M&A라는 것이 있다. 악의적 M&A도 있지만,, 국가간의 역사 바꿔치기가 李成桂의 李氏朝鮮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민족사 죽이기와 역사서 탈취및 焚書가 李氏朝鮮 전반기를 통하여 자행되었다).
지명도 간단히 바꿀 수 있다. 중국 대륙, 아니 東아시아는 아주 아주 이상한 지형이다. 큰 지형의 축소판이 숨어 있다. 中國은 그 축소판 지형에서 살았고, 살던 곳에서 벗어났을 때, 살던 곳의 지명을 중국 대륙 전체에, 동아시아 전체에 너무도 쉽사리 재배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랑케가 실증사학을 외치기 4 백년도 훨씬 전에 이미 華夏族과 예맥족(濊貊族)은 실증사학에 부합하도록 中國史와 우리나라 역사를 바꾸었다. 우리나라가 실증사학에 따라 5300 년 전 부터 충실하게 역사를 기록해왔기 때문이다.
明은 小國이었다. 李成桂가 우리나라 영토를 포기할 때 까지 中國 대대로 살아온 中土(史記에는 “東夷는 대륙의 동쪽에, 華夏族은 대륙의 서쪽에 있다” 했지만, 中國은 中國 大陸 西部조차 다 차지하지 못했다)에 갇혀 있었다. 기어나온 땅도 고작해야 현 揚子江 이남이었다.
中土에다 여러 異民族들이 세운 나라를 中國의 왕조로 둔갑시키는 작업에 착수한 것은 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明 때 부터 했다.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異民族의 나라를 中國에 포함 시키지 않으면 아무리 문명대국으로 날조해도 中國史는 단속적인 역사, 피지배 종족사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華夏를 漢族이라 날조한 것이다.
秦始王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 漢民族史의 일부인 中國 上古史를 말살함으로써 노예사로서의 中國史를 지우려 했다고? 唐太宗 李世民이 중화사상에 일치시키기 위해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소각하고 중국 역사책을 개찬했다고? 唐高王 이치(李治)가 멸망한 高句麗, 百濟의 역사서를 분서했다고? 거란(契丹)이 大震國 역사서를 분서했다고?
꿈도 꿀 수 없었다. 李成桂가 지어낸 말이다. 明이 우리나라 역사의 대부분을 빼내가자, 둘러댄 것이다. 未開 小國 唐이 高句麗, 百濟 역사를 빼내 自國史를 찬란하게 고칠 수는 없다. 高句麗, 百濟 역사서를 분서했다면, 新羅가 주도해야 한다. 그러나 高麗조차 “우리 천수(天授) 太祖(王建)께서 창업의 바탕으로 高句麗의 多勿이 나라를 세운 풍도(風道)를 계승 하였다(我天授太祖以創業之資承高句麗多勿立國之餘風).” 고 천명했다. 高麗 末 까지 우리나라에는 三國의 역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전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쿄 기요히코(吾鄕淸彦)는 일본 신대(神代)문자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司馬遷의 史記 25 권은 檀君朝鮮이 中國 대륙을 지배 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中國이 檀君朝鮮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 한나라의 漢이라는 국호 자체도 옛날 삼한 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간 것에 불과하다.
천문기록조차 모조리 베꼈다. 하지만 朝鮮史와 中國史를 뒤바꾼 것은 司馬遷이 아니고, 朱元璋이다. 朱元璋은 朝鮮史만 훔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역사를 훔쳤다.
최근 百濟는 동방의 로마(얼마 전에 열린, 학술대회 주제)라는 위치까지 끌어 올려졌다. 그러나 그들은 百濟의 실체를 모른다. 로마가 서방의 百濟였던 것이다.
高句麗가 廣開土境好太皇 이전까지 中國 대륙에서 南進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은 허구의 漢四郡 때문이 아니라, 百濟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高句麗는 5 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4 세기 까지는 百濟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百濟의 전성기는 高句麗의 전성기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百濟는 4 세기 까지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었다.
百濟가 얼마나 강대했는지는 西鴨綠江(일명 遼水)의 위치를 찾아내면 드러난다. 국력이 뒷받침 되었기에 高句麗가 차지한 西鴨綠江 서쪽의 땅조차 획득했던 것이다. 廣開土境好太皇은 그런 강대한 百濟를 정복했다. 太皇. 百濟 皇帝보다 우위에 있다고 해서 붙인 호칭이다.
中國의 歷史歪曲을 걷어내면, 新羅가 三國을 통일했다는 사실만이 남는다. 百濟에 이어 高句麗는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이 되었지만, 이윽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新羅였다.
新羅는 분명히 국력의 우위로 三國을 통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新羅가 강성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百濟와 高句麗의 정치가 혼란스러워도 三國을 통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新羅가 얼마나 강성 했는지는 西鴨綠江의 위치를 찾아내면 드러난다. 西鴨綠江을 차지한 것은 高句麗지만, 그 高句麗를 무너뜨린 것은 바로 新羅이니까.
단언하지만, 西鴨綠江은 三國의 실체만이 아니라, 中國의 실체도 파악할 수 있는, 世界史에서 가장 중요한 江이다.
◀ 기원전 765 년의 일식 : 35 世 檀君 사벌(沙伐) 8 년 4 월 B.C.765 ... 컴퓨터로 재현한 시물레이션에 의하면 B.C.764 년 6 월 실행. 1 년 뒤에 실행 되었네요. (음력 4 월이 6 월 정도에 해당하겠죠) 그런데, 위치가 약간 ... 북쪽에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관측이 불가능 하여서 (물론 중국도 관측이 불가능하죠) 이상한데, 그 경로가 실크로드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관측의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여겨집니다. 중국과는 상관 없는 일식입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주변부는 34.3°에서 관측한 1 세기의 하늘인데, 1 세기에 高句麗의 首都는 國內城이었다. 長安은 수도가 아니었을 때도 天文觀測해온 장소였던 것이다. 長安은 처음으로 監星을 둔 곳이고, 卒本夫餘를 北夫餘에 포함 시키면, 長安을 차지한 모든 王朝가 그 땅에서 한 번 이상 都邑했다. 그렇다면 長安에 도읍하지 않을 때에도 언제나 그곳에서 천문관측 했을까. 기원전 765 년 및 기원전 525 년, 기원전 248 년 日蝕(食)은 黃河 下流의 白岳山 阿斯達(殷墟)에서 관측했을 가능성이 높다. 白岳山 阿斯達은 색불루(索弗婁)가 22 世 檀君으로 즉위한 기원전 1285 년 부터 44 세 檀君 구물(丘勿)이 다시 藏唐京(高句麗 平壤城이며 長安이다)으로 遷都한 기원전 425 년 이전까지, 860 년이나 朝鮮의 都邑이었다. 이 경우, 500 km 남짓 떨어진 長安에서도 천문관측 했겠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前漢의 日蝕記錄에서 찾을 수 있다. 中土의 長安이 首都인 前漢이 존속할 당시(B.C. 202~ A.D. 8)는 北夫餘 시대로 白岳山 阿斯達에 도읍하고 있었다. 이 당시 長安(藏唐京)에서 일식관측했다면(前漢이 베낀 일식기록에 현 西安에서 관측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면), 長安은 기원전 1916 년 이래로 高麗 末까지 천문관측해온 지점이 거의 확실하다.
“水軍 艦船을 이끌고 수백 리(거리도 다 축소됐다. 한반도에 맞춰야 하니까)에 이르도록 바다에 떠서 먼저 浿水로 들어가 平壤과 60 리 거리에서 우리 군사와 마주한 뒤(左翊衛大將軍來護兒帥江淮水軍舳艪數百里 浮海先進 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與我軍相遇 進擊大破之)”라는 三國史記 기사에서 바다는 진짜 바다가 아니다. 高麗는 長安城을 首都로 한 나라이므로 金富軾은 절대 敵이 진짜 바다를 통해 高句麗를 공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옛날에는 너른 평지도 바다로 표현했다고 하지만, 水軍이 陸地를 航海할 수 있는가.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에 “庚寅年에 장정 30 인을 파견하여 선박을 살수(薩水)에서 건조케 하였다. 곧 辰韓의 남해안이다(庚寅遣民丁三十人造船舶于薩水乃辰韓南海岸也)”고 했다. 薩水가 辰韓의 南海岸 즉 江이 바다라는 것이다. 역시 三韓管境本紀를 보면 “기비(箕丕)가 세상을 뜨니 庚辰年에 아들 기준(箕準)이 섰다. 丁未年(B.C. 146)에 떠도는 도적 衛滿에게 유인당해 敗하여 바다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箕丕薨庚辰子箕準立丁未爲流賊衛滿所誘敗遂入海而不還).”고 했다. 北夫餘紀 에서도 箕準이 바다로 들어 갔다고 했다. 그러나 番朝鮮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지역 이었다. 箕準이 들어간 바다는 江이었던 것이다. 水經注에는 浿水가 동쪽으로 바다에 흘러드는 물이라고 했다(出樂浪郡鏤方縣 東方過出於臨浿縣 東入干海 : 浿水는 樂浪郡 鏤方縣에서 흘러나와 동쪽으로 臨浿縣을 지나서 동쪽으로 바다에 흘러든다). 浿水 즉 현재의 漢水는 揚子江으로 흘러든다.
黃氏 始祖는 後漢의 儒臣 이었던 황락(黃洛)으로 28 년, 교지국(交趾國 : 현재 베트남 북부)에 使臣으로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표류 하다가 新羅 평해(平海)까지 왔다고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 나와 있다. 中土에서 東南亞로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揚子江의 물길을 따라 新羅로 들어가 상장강(湘江), 류장강(柳江), 우(욱)장강(郁江)을 거쳐야 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는 陸路보다 水路를 더 선호했다. 平海는 揚子江邊에 있었고, 風浪은 揚子江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風浪에 가깝다고 해봐야 비(雨)로 江의 물살이 거세졌을 경우다. 그러니까 風浪은 李氏朝鮮이 捺造한 말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나라가 中國 大陸을 지배했던 高麗 末까지는 웬만한 江 역시 바다로 불렀음을 말해준다. 中國 大陸이 크다 보니까, 江을 바다로 表記한 것이다. 아직도 江을 바다로 불렀던 흔적이 남아 있다.
티벳고원(靑藏高原) 동북부에 있는 바얀카르(巴顔喀拉) 山脈 북쪽 기슭의 下原을 성숙해(星宿海)라 부른다. 별이 잠드는 바다를 그대로 남겨둔 것은 시적인 표현이라 우길 心算 이었겠지만[티벳고원은 고도가 높기 때문에 공기가 희박해 대기의 간섭(干涉 intervention)이 적다. 그래서 별빛의 흔들림이 적어 별이 또렷이 보인다. 星宿海는 한밤이 되면, 시커먼 강물에 무수한 별빛이 반사되는 것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過去에는 거의 江이나 湖水 등을 바다라 불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사해동포(四海同胞)라는 말에서의 海도 물론 바다를 의미하지 않는다. 통일신라 시대의 靑海鎭에서 海역시 바다를 의미하지 않는다. 靑海省에 있는 靑海鎭을 반도땅 莞島에서 찾으려는 半島史觀은 경계해야될 사관이다.
환단고기 천문학적 증명(서울대 박창범교수) 잃어버린역사S2 |
2005/10/21 |
지나와 일본의 역사적 문화적 한민족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자행된 동아시아 역사 왜곡! 그들은 없는 역사를 있는 역사로 조작 분식하고 있는데 우리는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는 역사마저도 연구해보려고도 하지않고 비판만을 가하고 있는 실정이죠. 민족적 주체성이 있다면 최소한 그 사실여부를 규명해보겠다는 각성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를 통하여 분명히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역사가 사실로 드러난다면 인류의 모든 문명의 기록이 모두 다시 쓰여져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알게 될겁니다. 그리고 현 국제정세에서 가장 민감한 중국 대만간 양안문제 단초가 되어 인류역사상 가장 크고 위험한 미.중.일의 충돌로 동아시아를 넘어서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중국의 대분열과 한반도의 전운... 우리민족이 다시 세계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방송사고급 발언을 한 김용옥교수 MBC 특강 편집내용을 보죠.
천문학으로 증명된 환단고기,단기고사!!
천문학으로 고조선사 증명했다.
[시사저널] 205.206 함병호 93/9/30,10/7
BC 1733년 홀달 단제 시대 단군 조선인들이 보았을 오행성의 결집 현상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역으로 추적하여 컴퓨터 합성 기법으로 시각화했다.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성 사학계로부터 위서 (僞書) 라는 `누명`을 쓰고 버려져 왔던 상고사 서적들에 대한 복권 작업이 젊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관심을 끌고 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표준 연구원 천문대의 라대일 박사는 학계에서 방치해 왔던 상고사 서적들의 내용을 천문학적인 방법론으로 검증한 결과 상당 부분이 당시의 실제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지난 2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에 걸쳐 진행된 이湧?연구는 상고사 서적들에 나타난 당시의 천문 현상 기록을 당시의 실제 천문 현상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서적은, 단군조선 시대에 대한 풍부한 역사 기록과 함께 당시의 천문 현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는 <단기고사>와 <한단고기>에 들어 있는 <단군세기>이다. <단기고사>는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서와 옛 비문, 현장 답사 등 13년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엮은 단군조선사이다. 제1세 단군왕검으로부터 제47대 단군까지 약 2천여 년의 역사를 역대 임금의 재위 기간과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이름만 전해 오던 것을, 구한말의 한학자인 유응두가 중국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행촌 이암이란 선비가 저술한 단군조선 시대 역사서로, <단기고사>의 서술 내용과 큰 줄기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
오행성 결집, 큰 썰물 현상 모두 "사실"
이 서적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일부 내용이 과장돼 있다는 이유로 기성 사학계로부터 사료로서 인정받지 못해 왔다. 그러나 재야 사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이야말로 일제 식민 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해 왔다. 재야 사학계는, 일제 때 단군조선 말살 운동에 앞장섰던 일인 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조선의 고대사 관련 사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밖에 없다. 그 밖의 사서는 사서가 아니라 위서다."라고 주장한 것을 기성 사학계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해 온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한 소국의 역사로 개악하고자 했던 일인 학자들에게, 적어도 고대 조선이 대륙을 사이에 두고 중국 민족과 자웅을 겨뤘던 고대 강국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이들 상고사 서적들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단기고사>와 <단군세기> 에는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군데,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육안으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 현상'이 한군데,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 한군데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천체 현상은 물리 법칙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전개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특정 시점의 행성들 위치를 알면 슈퍼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이 행성들의 과거와 미래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 연구 결과, 이 사서들이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무작위 적으로 날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오행성 결집 현상에 대한 기록이었다. <단기고사>나 <단군세기> 기록에 따르면, 제13대 단군인 홀달단제 50년, 즉 BC 1733 년에 다섯 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돼 있다. 즉 '戊辰 五十年 五星聚婁' 라는 한 줄의 글귀로, 무진 50년에 다섯개 별이 婁星 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박교수팀은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 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샅샅이 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처음에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BC 1733 년으로부터 바로 1년 전인 BC 1734 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이 해 7월 13일 초저녁 다섯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다. 이 날은 왼쪽 하늘에 초승달이 비스듬하게 떠 있어, 별빛이 한층 더 찬란하게 빛났었다. BC 1733 년을 기점으로 하여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 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밖에 없었다. 박교수는 "기록 연수보다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약 3천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 라고 말했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로 맞아떨어질 확률은 박교수의 계산 결과 0.007%, 즉 "세계 지도에서 임의의 한 장소를 지목했을 때 그것이 대한민국일 가능성" 에 비유될 정도로 매우 희박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오행성 결집 현상과 함께 박교수팀이 주목한 것은 큰 썰물에 대한 기록. 두 사서 모두 제29세 마휴단제 9년 (BC 935년) 때 `南海潮水退三倜` 라 하여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 있다. 오행성에 대한 조사와 마찬가지로, BC 935년을 기점으로 전후 2백년 간에 나타난 조석력의 작용을 조사해 본 결과, 기록에 나타난 해로부터 4년 후인 BC 931년 11월 22일에 이 기간중 가장 큰 조석력이 작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기록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후 2백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4년 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박교수는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누군가가 작위로 이 기록을 써넣었을 가능성은 0.04%에 지나지 않았다. 박교수팀이 처음 연구에 착수할 당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은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다. 일식 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에, 일식 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 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단군 조선기에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약 1천 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밖에 안돼 의미 있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다만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 기록이 주나라 때인 BC 776년인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제2세 부루단제 때인 BC 2183년 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중국 기록보다 적어도 1천 4백여 년이나 앞선다는 점, 그리고 10여 개의 일식 기록 중 다섯 개의 기록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중 두개는 해뿐 아니라 달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교수는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 박교수팀이 내린 결론은, 이 사서들이 그 동안 일인 학자들이나 국내 기성 사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전적으로 날조된 것만는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왜곡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확인하기도 어렵지만, 천문 현상은 윤색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사서들의 상당 부분은 단군 조선 당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라고 박교수는 말했다.
기성 사학계도 연구 결과 인정
박교수팀의 연구는 그 동안 이들 사서의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기성 학계의 두터운 벽 때문에 실제 연구 과정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던 고조선사 연구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윤내현 교수 (단국대 사학) 는 "그 동안은 주로 중국 사서들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기록들에 의존해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서지학자들이 참여하여 이 사서들의 내용을 좀더 정밀하게 검토한다면, 단군조선사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했다. 박성수 교수 (정신문화연구원, 사학)는 "기존 학계의 그릇된 통념을 깨는 획기적인 연구다. 이들 역사서의 내용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해도, 연구도 해보지 않고 이를 백안시해 온 학계의 풍토는 개선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박교수팀의 연구에 대해서는 그 동안 상고사 서적들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온 `한국 상고사학회` 측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이들의 연구 결과가 기성 사학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상고사학회는 10월에 발간할 예정인 이 학회 연구 논문집 <상고사학보> 에 박교수팀의 논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단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상고사학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최몽룡 교수 (서울대, 고고학)는 "연구 결과의 중요성을 인정해 논문집에 싣기로 결정했다. 단군 조선에 대한 연구는 결국 한국 문화의 뿌리에 대한 연구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문헌사적인 연구뿐 아니라 자연과학적인 연구도 활발하게 벌일 필요가 있다" 라고 말했다.
박창범 교수의 반박글에 대해
무명이란 사람에 의해 그럴 듯하게 포장된 박창범 교수의 반박에 나는 왜 제대로 책을 읽고 이해한다면 최소한 이런 식의 반박은 나오지 않을 것인데 좀더 많은 최소한 그런 복잡한 천문 지식과 계산을 뒤로 하더라도 기본을 이해하고 반박하길 바란다- 도리어 이 내용의 이해도가 높아질수록 이것이 갖는 가치에 더 커게 눈뜰것이다-
첫째 단군의 건국 연대를 들어 오성취루니 하는 천문을 통한 정확도의 의문을 달고 환단고기 결국 오류투성이 일뿐이다의 견해를 보자 왜 이리도 이해를 못할까 -아니 안하고자 하는 걸까.-. 오성 취루 즉 수성 ,금성,화성, 목성, 토성이 일렬로 서는 천문관측 현상은 상당히 이채로운 천체현상이며 이것이 과거 어느때 이루어 졌는가를 계산하는 것은 과거의 시간 곧 단군 건국 연대와는 상관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무슨 말인가 쉽게 설명 하겠다.
현재 우리는 지구의 자전속도를 통해 한바퀴가 걸리는 시간을 알수 있고 또한 공전의 속도를
통해 지구가 달리는 속도를 알수 있다. 물론 이처럼 오성의 공전 속도를 추적하여
계산을 가해보다 보면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행성이 일렬로 이루어 지는 시간대를 잡을 수 있다.
즉 측정은 지금 현재의 행성의 위치와 공전 속도를 통해 도출하여 보면 앞으로 미래 어느 지점
에서 수십년, 혹은 수백년 이후에 이런 현상태가 나타날수 있음을 계산해 낼수 있다.
- 물론 이것이 가능해 진것은 증명된 수학법칙과 슈퍼 컴퓨터에 의한 현대의 고도로 발달된 과학의
산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 시점에서 과거 수백년 또는 천년, 천이백년전 어느 때 이런 현상이
나타 날수 있는 시간, 즉 연대를 과학적으로 파악할수 있다.
실제 예를 들어 보자
환단고기의 기록을 보면 BC1733년에 일어났다고 기록된 다섯 행성들의 결집 현상을 검증하기 위하여
박창범 교수는 BC2000년에서 BC1450년까지 550년간 오행성들의 위치를 계산하였다.
그 결과 이들이 하늘에서 가장 가까이 모인 때는 BC1953년 2월 25일이고,
두 번째로 가까이 모인 때는 BC1734년 7월 13일이었다. -1년 차이를 보인다.
오행성 결집의 경우 550년간 2회의 강한 결집이 있었고,
그중 하나가 기록과 1년 차이로 있으므로
무작위 과정에 의해 이러한 정도의 일치를 보일 확률은 22/550 = 0.007이다.
이 말은 이 부분에서 만큼은 환단고기를 한 개인의 위작이나 일명 갠또에 의해
자위적으로 쓸수 없음을 엄연히 말하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천문학의 내용을 잘 몰라 피부에 살갗게 닿지 않아 잘 모르지만
이 내용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이 부분에서 만큼은 환단고기는
부정할수 없는 학설도 아닌 사실- 엄연히 고대 고조선의 누군가가 그 당시 분명히 천문 현상을
보고 기록을 남겼고 그 기록의 전승된 내용을 자위적 개작이 아닌 어떤 기록물을 통해
보고 편찬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둘째 무명이란 사람의 삼국시대 천문 반박 주장은 더 웃기다
혼자 헛다리 짚고 수고는 엄청 되더군만여.
신라 기록만을 가지고 한서와 후한서의 기록이니 당연히 중국에서 관측지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것 아니냐 박창범 뭔 코메디 하나 라는 등 이전 이사람 글을
보면 어렵게는 써 놓고 핵심도 모르고 헛소리만 하더군.
박창범 교수야 최대한 쉽게 설명해 놓았는데 그런 식으로 받아 들이는 수준밖에
않되는 것을 가지고 본인들의 해석오류를 알지 못하고 남 탓을 하니.
박창범의 삼국의 일식 기록에서 초기 상대의 기간인 201년까지의 일식 기록에 한서와 후한서의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들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박교수님은 이 점에 대한 기본적인 언급을 했
고-이런 상식없이 천문학자라는 타이틀을 따겠는가-
문제는 기존에 우리가 알기론 식민사관적 입장에서 우리의 고대 천문 기술이나 관측시도 연대
가 지나에 뒤쳐질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이런 일식 기록역시도 당연히 지나측의 것을 보고
차용한 것이라 생각했다.물론 앞서 단군기록을 통해서 천문의 우수성을 밝혔다.
그러나 만약 삼국 상대기간 한서 후한서를 참고했더라면 고구려, 백제 역시도 비슷한 관측
위치에서 나올수 밖에 없는 것임에도 불구 하고 각 삼국의 천문 관측지는 상당히 동떨어진
다른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한서나 후한서의 천문기록이 그들 독자의 기록이라면 같은 위치에서 나와야 함에도 다르게
나왔다 함은 한서와 후한서의 천문 기록은 삼국의 천문을 도리어 차용하여 기록한 것이라
할것이다.
박창범 교수는 이점을 분명히 지적한 것이다.
당연히 한, 후한서의 기록이 지나 독자의 기록이라면 자연스럽게 중원대륙에서 관측될 것은 불
문가지인 것은 당연하며 문제는 지나의 그 기록은 그들 독자의 연구라기 보다는 삼국의 기록을
그대로 모방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그들 지나의 천제 관측 연구나 수준이 우리보다 도리어
뒤 늦음을 의미한다 할것이다. 물론 기타 그들 사서의 기록 정확도는 삼국사기보더 더 덜어진
다.
그리고 재야의 연구는 박창범 교수의 연구를 선하여 따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런 가설을
정사의 원문을 통해 밝혀 책을 냈고 이후 박창범 교수가 그런 결과를 발표한 것임을 알기 바랍
니다.
아래 삼국시대 상대 200년 기간의 신라. 고구려, 백제의 천문기록과 비교한 한서와 후한서의 글을
눈여겨 보길 바랍니다.
분명히 알수 있듯이 한서와 후한서가 독자적 기록이라면 어떻게 그들의 영역도 아닌곳에서
관측지가 동떨어지게 흩어져 나타나는지가 핵심입니다.
물론 동아시아 전체의 천문현상을 함께 비교 설명하였고 도리어 앞서의 단군 기록에 연계해
확실히 천문에서는 우리의 기록이 지나보다 월등히 앞섬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천문의 역량이 주는 그 문화적 우월성이 단순한 민족적 우월이란 주장으로
희석되지 말아야 한다.
(삼국시대 천문기록 연구에 대한 학계의 반응, 그 이후)
삼국시대 천문 기록에 대한 나의 연구 결과가 발표된뒤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중의 하나는
"이 발견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어떻냐"는 것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요즘도 같은 질문을 던지는 분들이 많다
역시 궁금해할지 모를 분들을 위해 그동안 반응을 덫붙여 두고자 한다
자연과학자들은 논문을 쓰면 으레 그 분야의 다른 학자들에게
논문을 보내 사적인 검증 절차를 거친다
이는
동료학자들의 의견을 먼저 구함으로써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 했을 때
발생 할지도 모를 논문에 대한 시비거리를 미리 걸러내고,
스스로도 자신의 연구 방향과 결과에 대해 보다 강한 확신을
다지기 위해서다
나는 먼저 천문학과의 다는 교수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얼마 뒤 천문학회 학술대회에서 단군조선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 다음 단국대 윤내현 교수에게 단군조선과 삼국 시대 논문을 보여주었는데,
윤교수는
삼국시대 일식 관측지에 대한 나의 연구 내용중 백제의 최적 관측지가
발해만 유역이라는 사실이 백제의 요동 경략설에 부합함을 지적했다
반면에 신라의 경우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입장이었다.
또 단군조선 연구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한국상고사학보"에 실었는데,
당시 심사를 했던 서울대 최몽룡 교수는 이 논문이 새로운 역사 접근법을
시도한 점을 뜻있게 평가해 게재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 뒤 한 재야 사학단체로부터 단군조선 연구에 대한 강연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재야단체에서의 강연은 매우 호의적인 반향을 얻었는데,
무엇보다 단군조선을 확고한 국가로 설정하고 있는 많은 재야사학자들의 입장과
나의 연구 결과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연 말미쯤에 이르러,
단군조선 시대의 일식기록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한 점을 강조하다가
결국 아직 발표가 안된 삼국 시대의 일식기록 분석 결과까지 잠시 언급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일식들을 가장 잘볼수 있는 지역이 한반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중국 대륙 동부라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청중들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중 김씨성을 가진 노인 한분은
"내 조상이 그럼 뙤놈이라는 말이요?"라고 항의하여 나를 곤혼스럽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오재성이라는 분이 찾아왔다
그는 얼마 전 재야 사학단체 모임에서 강연을 들은 한 사람으로부터
내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역시 재야사학자 중 한사람이었는데
여러모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그는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 텁수룩한 외모로 전형적인 농민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는 역사에 심취해 생업을 버리고 인생을 역사 연구에 바쳐온
감동적인 사람이었다
역사를 대하는 그의 정열과 애정의 깊이는 놀라웠다
나는 역사가 이렇듯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가져운 연구의 결과였다
그 역시 나름의 방법을 통해 신라와 백제의 강역을 추정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끌어낸 두 나라의 강역이 나의 최적 일식 관측지와 매우 비슷했다
그는 삼국사기의
지명, 교역품, 인물 등을 길잡이 삼아 연구를 했다고 했다
이는 나의 연구배경과 너무 다른 것이라
그의 연구결과를 검증할 수 없었지만
어쨌던 그 내용은 내게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삼국시대 천문기록에 대한 연구 또한 학과 교수들의 검토를 거친뒤
천문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과학사학회의 학술대회에서도 구두 발표를 통해 공개했다
이에 대한 천문학자들과 과학사가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학술진흥재단에 건의해서 우리나라 학문 분류에 고천문학이란 분야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또 몇몇 천문학자들은 고천문학 연구를 시작하겠다며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고대사를 전공한
서울대 국사학과의 노태돈 교수와 송기호 교수가 보여준
학문적 격려와 지적도 잊을 수 없다
특히, 노태돈 교수는 내 연구가 과학적 접근이란 점에 많은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었다
"한국과학사학회지"에 투고를 권한 것도 그였다
한편으론 현재 고대사학계에서 이같은 연구 결과를 수용하기에는
많은 상충점이 있음을 지적해 주었다
송기호 교수 엮시 같은 의견이었다
또한 송교수는 나의 연구내용중
상대 신라의 최적 일식위치가 양자강 유역이라는 결과와 관련해,
가야의 허 황후가 양자강 유역의 허씨 집성촌과 관련이 있다는 설과
후대 신라방이 설치된 곳이 양자강 하구 근처라는 사실 정도가
지금까지 신라와 양자강 유역을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의 전부라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결론적으로
고대사 분야의 역사학자들에게 나의 연구방법은 신선하고 기대되는 바가 적지 않으나
그 결과에 있어서는 상충되는 점이 많아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나의 연구 결과도 다른 연구자에 의해 재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후속 연구를 통해 나의 분석 결과가 설명될 수 있는 내용으로
고대사 일부가 재구성되거나 "삼국사기"의 정체가 밝혀질 것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천문역사학, 천문고고학, 고천문학과 같은 분야에
많은 학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있기를 기대한다
나는 역사와 관련된 이 논문을 쓰려고 할때
처음에는 이를 국제 학술지에 기고할 생각이었다
국내 학술지 어디에 기고해야 할지 망설여져서였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 국내학술지에 싣기로 결정했다
전문가의 연구란 그 학문과 관련된 전문학계에서
먼저 소화, 검증된 뒤에 일반인에게 알려지는 것이 올바른 단계라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국사에 대한 연구결과는 누구보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알 권리가 있고,
여기에서 우선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내학계에 먼저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이 논문들을 발표한 지도 여러해가 되었디
이때의 나의 판단이 과연 옳은 것이 었을까?
한편 이 연구를 하면서 고대 사서에 실린 천문현상 기록들을 하나씩 재연해 보는 일은
내게 커다란 즐거움 이었다
수천년 전에 선조가 남긴 기록과 나의 계산이 꼭 들어 맞을 때,
그리고 켬퓨터 화면을 통해서나마 당시의 하늘을 바라볼때면
마치 초등학교 시절 소풍에서 보물찾기를 할때 꼭꼭 숨겨져 늘 찾지 못했던
보물을 이제야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머나먼 시간을 뛰어넘어 옛사람과 한곳에 나란히 앉아
같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흐믓해지기도 했다
고천문학 속에 펼쳐진 하늘은 이렇듯 시대와 시대를 이어주는 따스한 세계였다
요즘은 아주 먼 엣날까지 천체의 운동을 계산하여 하늘의 모습을 보여주는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나와 있다
여러분도 직접 옛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밤하늘을 재연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빛나는 별등 아래 서 있었을 고대인들의 모습도 상상해 보기를 바란다
(참고지도 : "가라" 추청지역)
(일본학자들의 주장이 그릇된 이유)
이쯤되면 일본 학자들이 그동안 "삼국사기"의 실측 기록들을
중국의 것을 베끼거나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해온 이유가 궁금해진다
일본 학자들이 제시한 근거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신라의 경우 일식을 포함한 천문 현상기록들이 대부분
서기 3세기 이전과 8세기 이후 양분되어 있어
그 시대별 분포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시대의 천문 기록은 가공의 신라초기 역사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꾸며 넣은 장식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둘째
삼국의 일부 천문 기록들이 중국 사서의 기록과 표현이 같은데다
그 중에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것도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의 기록을 무작정 베끼다 보니 실제가 아닌 일까지 옮겨 적게 된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삼국사기" 천문기록에서 보이는 특이점을 이렇게 해석해야 할까?
"삼국사기"가 쓰여질 당시 신라 1,000년의 역사를 충실하게 기술한
참고 사서가 있어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불합리한 논리로 보인다
만약 그랬다면 "삼국사기"를 새로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나 고구려, 백제의 역사는 여러 사서로 나뉘어져 기술되어 있었을 것이고
역사 변천에 따라 사서 내용의 질이 변하고 양이 빈약해진 시대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 연표에는
이같은 고대 사료의 부족문제에 대해 한탄하는 글이 남아 있다
편찬자 김부식은 고려 인종에게 올린 표에서
"우리 나라의 옛기록인 고기에 많은 사적이 빠지고 없어졌으며,
중국의 사서들에는 우리 나라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실리지 않았다"
고 통탄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기록은
"연대가 구원하고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며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또
고기, 화랑세기, 사기, 한서, 후한서, 북사, 양서, 당서, 신당서, 수서, 책부원구
풍속통, 통전, 사이술, 고금군국지 등의 여러 국내외 사서들이 인용되고
비교된 점을 보면,
"삼국사기" 편찬자에 사용된 참고문헌 내용의 분량과 질이 시대에 따라
일관적일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천문현상 기록수가 시대별로 크게 변하는 까닭도 사료의 변동에서
찾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또 천문 현상 기록중 일부가 중국측의 기록과 같다는 사실은
"삼국사기"가 중국의 기록을 베껴 원래 없던 기록을 보충한 증거라고 볼 수 없다
편찬자가 에로부터 전해 오는 삼국의 기록을 여러 참고 사서와 비교하다가
동일한 기록이 있으면 참고 사서의 표현을 빌어 고쳐 썼을 수는 있다
실제로 이러한 가능성이 천문기록에서 보인다
예를 들어
중국 사서에 없는 혜성 기록의 경우 하늘에서 혜성이 나타난 위치가
거의 팔방위로 "삼국사기"에 표현되어 있는데
중국 사서에 함께 나타나는 기록에서는 혜성의 위치가 대부분
중국식 별자리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중국의 참고 사서와 옛기록을 비교하다가
동시 기록이 없는 혜성기록은 그대로 두고
중국측 기록이 있는 경우에는 혜성의 위치를 팔방위 대신
보다 정확하다고 판단되는 별자리 이름으로 표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공동기록은 이와 같이 동시에 관측하여 기록한 것일 수도 있고,
중국사서에 가끔 쓰여 있는 대로 중국이 주변국의 기록을 전해 들어
적은 것일수도 있다
또
일식의 경우 당시의 부정확한 일식 계산법에 근거하다 보니
중국과 삼국이 함께 실수를 범해서 일어나지 않은 일식을 일어 났다고
썼을 수도 있다
일식을 빠트리지 않고 관측하여 왕에게 보고하는 일은
당시 천문학자들에겐
목숨과 직결된 중대 임무였기 때문에 실제로 볼 수 없었던 일식도
예상만으로 관측했다고 보고 했을 수 있다
그렇기에 또 일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식이
고려와 조선 시대에 까지도 한중일 사서에 적잖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어나지 않은 일식이 "삼국사기'와 중국사서에 공동으로 나오는 이유를
단지 베꼈기 때문이라고만 해석 할 수는 없다
어려운 대학수학 문제를 똑같이 틀리게 푼
두 초등학생의 답안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무작정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베꼈다고 단정 할 수 있을까?
엄격히 말하자면 일식기록에 관한 기존의 일본 고천문학자들의 연구는
결론을 내리는 과정이 과학적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결론은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대부분 같은날 중국 사서에도 나온다는 단순 비교와 신
라의 일식기록 분포도가 "이상하다"는 심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수행된 일식 계산 결과는
사실상 일본 학자들이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서 별반 참조되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은 사서 비교를 통해 얻는 단순한 주관적 판단이지
"삼국사기"일식 기록이 중국 기록의 차용인지를
객관적으로 분석·검증한 과학적 결과가 아니다
과학이 학문으로서 공신력을 지니는 까닭은
주어진 자료에 대해 객관적이고 반복 가능한 분석을 통하여
결론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달과 행성의 근접 현상 관측 기록에도 그랬지만,
일본 학자들은 미리 주관적 결론을 세워 놓고
과학적 분석이 가능한 천문 기록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부분적인 분석만 하거나
비과학적 논리를 앞세워 결론을 합리화하려 했다는 혐의가 짙다
("삼국사기"의 일식 관측지는 한반도가 아니었다)
어느 나라가 일련의 일식 기록들을 남겼을 때
이 기록으로부터 어떻게 최적 관측지를 찾을 수 있는가?
일식이 일어나면 지구에는 달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어떤 곳에는
달의 온 그림자가 드리워져 해가 달에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일식을 볼 수 있다.
그 주변 지역에는
달의 반그림자가 드리워지고,
해의 일부만이 달에 가려지는 부분일식이 일어난다.
달이 해에서 좀더 비껴 지나가는 경우에는 부분일식만 일어난다.
어떤 경우이든 어느 한 일식은 지구상의 어느 특정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
동북아시아를 놓고 이야기하자면,
어떤 일식은 한반도와 그 이서에서는 볼 수 있지만 동쪽에서는 볼수 없다
또 한반도와 그 이북에서는 볼 수 있지만
남쪽에서는 볼 수 없는 일식도 있다.
만약 어느 나라가 한반도에서 꾸준히 일식을 관측했다고 하자.
그 나라가 기록한 일식 모두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역은 어디겠는가?
바로 한반도이다.
그 나라가 기록한 일식 중에는
주변국에서 볼 수 없거나 보기 힘든 일식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최적 일식 관측지는 바로 이러한 일식의 성질을 이용하여 찾는다.
그렇다면
실제로 삼국이 각기 일식을 관측한 지점은 어디였을까?
이것을 알 수 있다면 삼국이 정말 독자적으로 천문 관측을 했는지,
또 관측을 한 위치가 어디인지를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나의 일식 관측지 추정 방법의 신뢰도를 확인하기 위해
고려와 한·당·양나라가 남긴 일식 기록들에 대해 최적 관측지들을 추적하고
이를 각 나라의 강역과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가 실제 역사적으로 이미 확인된 강역과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삼국의 최적 일식 관측지를 찾아보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수록된
일식 모두를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지구상 위치는 발해만 유역이다.
그리고
서기 2~3세기에 주로 나오는 고구려의 일식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는
만주와 몽고에 이르는, 백제보다 북위도의 지역이었다.
신라의 일식 기록은
서기 201년 이전과 787년 이후로 양분되어 있다.
그중 서기 201년 이전 상대(上代) 신라의
일식 최적 관측지는 양자강 유역으로 나타났다.
서기 787년 이후에 나오는 하대(下代) 신라에선
한반도 남부가 최적 관측지로 밝혀졌다.
즉, ≪삼국사기≫에는
신라 초기에는 남쪽으로 지나가는 일식이 주로 기록되어 있고,
고구려에는 북쪽으로 지나가는 일식이,
백제에는 그 사이로 지나가는 일식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매우 심상치 않은 결과이다.
중국의 기록을 베꼈다면
당시 중국 나라들이 기록한 최적 일식 관측지와
삼국이 기록한 최적 일식 관측지가 평균적으로 모두 같은 위치로 나와야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식 기록을 분석한 결과
삼국의 관측지가 나라마다 매우 다른 위도상으로 각각 떨어져 나타나고 있다.
≪삼국사기≫가
중국의 기록을 무분별하게 베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 등이
고도의 천체 역학적 계산을 통해 중국 일식 기록을 선별한 다음,
북위도로 지나가는 일식은 <고구려본기>에,
저위도로 지나가는 것은 <신라본기>에,
그 사이의 것은 <백제본기>에 나누어서 삽입하는 등
주도면밀한 편집을 했을리 만무하다.
이 정도의 계산을 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천체 역학적 지식과
첨단의 컴퓨터를 이용한 방대한 수치계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의 일식기록은
각각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관측하여 나온 자료라고 결론지을 수있다.
이를 확률적 계산으로 증명할 수 있다.
컴퓨터를 이용해 중국 사서의일식 기록을 임의로 뽑아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에 나누어 싣는 모의실험을 수천번 해 보면
삼국의 최적 관측지에 이 정도의 위도 차이가 발생할 가능성은 사실상 0임을 알수 있다.
≪삼국사기≫ 의 일식 기록은
중국 기록의 모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위치에서 실측했던 기록인 것이다.
한편
신라와 백제가 한반도에서 일식 관측을 했음에도
'우연히' 최적 관측지의 경도가 모두 중국 대륙으로 나올 확률도 사실상 0이다.
(기존 발표 논문 참조).
이들의 일식 기록은
우연히 최적 관측지가 중국 대륙 동부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실측한 기록인 것이다.
요컨대
삼국의 일식 관측지를 살펴보면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중국측 기록을 베낀 것이라는 기존의 결론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재야학자들과 "협잡운운"마라 박교수의 연구결과는 대륙삼국을 밝히는데 일부분일 뿐이다. 그는 천문학적인 관점에서 정사의 기록을 분석해 놓았을 뿐이다.
(사서학, 천문학, 기상학에서 밝혀진 대륙삼국)
행성 5개 모인 ‘오성결집’ 삼국사기서 발견
동아일보
고구려본기 “149년 동방에 모여”… 전문가 “200∼300년에 한번 일어나”
151년 8월 10일 새벽 동쪽 하늘에 수성, 토성, 화성, 금성, 목성(왼쪽부터 차례대로) 등 다섯 행성이 모여 있는 상상도.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제공
“우리 고대사에는 천문 기록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오성(五星)결집’에 관심이 갔죠. 삼국사기를 살피다가 고구려 때 오성 기록을 처음 발견했습니다.”
오성결집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5개 행성이 하늘의 일정한 영역에 한데 모이는 현상을 일컫는다. 황보승 대구운암고 교사(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회원)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차대왕 4년(149년) 5월에 오성이 동방에 모였다’는 기록을 찾아낸 뒤 올해 초 천문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황 교사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당시 천문 현상을 추적해 보니 151년 8월 10일 새벽 동쪽 하늘에서 오성이 30도 이내에 모였음을 확인했다”면서 “고구려본기의 기록은 이를 관측하고 적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위원은 “2000년 정도 전의 기록임을 감안할 때 1, 2년의 오차가 생길 수 있다”며 “오성결집 현상은 200∼300년에 한 번씩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인 만큼 기록의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오성결집은 고조선 때 한 차례 기록된 바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무진오십년오성취루(戊辰五十年五星聚婁)’라는 구절이 나온다. 천문학자인 고(故) 라대일 박사와 박창범 고등과학원 교수는 이 구절을 기원전 1734년 7월 중순 저녁 서쪽 하늘에 화성, 수성, 토성, 목성, 금성이 순서대로 늘어선 것으로 해석해 1993년 한국천문학회지에 발표했다.
특히 이 기록은 5개 행성이 ‘루’라는 별자리(현재 양자리)에 모였다는 뜻으로 ‘오성취루’라고 불린다.박 위원은 “이번에 발견된 다섯 행성은 지금의 게자리에 해당하는 ‘귀(鬼)’에 위치한 만큼 ‘오성취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충환 동아사이언스 기자 cosm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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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석재
- 한국 천문연구원 연구위원
- E-mail : dr_blackhole@naver.com
- 서울대학교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대학교에서 블랙홀 천..
- 서울대학교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대학교에서 블랙홀 천체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수의 천문학 서적과 소설을 집필하는 등 천문학 대중화에 헌신했고 2005년부터 2011년까지는 한국천문연구원 원장도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우리나라의 천손사상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다. 천재로 알려진 송유근 군의 멘토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블랙홀이 불쑥불쑥>, <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지는 원리>, <별과 은하와 우주가 진화하는 원리>, <아인슈타인과 호킹의 블랙홀>, <블랙홀 박사의 우주 이야기>, <개천기>, <하늘에 길을 묻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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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5.12 06:04 | 수정 : 2015.05.12 08:31
그래, 줄줄이 나올 줄 알았다!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는 황보승 회원이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이 한 곳에 모이는 오성결집(五星結集) 기록을 배달국, 고구려, 고려 역사에서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독자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아는가? 나는 이미 2014년 10월 1일자 24번째 프리미엄 조선 ‘박석재의 우주 이야기’에서 고조선의 오성결집 기록 오성취루(五星聚婁)에 대해 기고했다. 그 칼럼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국사 교과서에서 BC 2333년 왕검이라는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후 고구려가 건국될 때까지는 내용이 거의 없는 ‘블랙홀’이다. 그런데 그 역사의 블랙홀 한복판에 천문관측 기록이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무진오십년오성취루(戊辰五十年五星聚婁)’ 기록이다. 여기서 ‘무진오십년’은 고조선 건국 600주년이 되는 BC 1733년을 말하고, ‘취’는 모인다는 뜻이고 ‘루’는 동양 별자리 28수의 하나다. 즉 이 문장은 ‘BC 1733년 오성이 루 주위에 모였다’ 같이 해석된다.
천문 소프트웨어를 돌려봤더니 BC 1734년 7월 중순 저녁 서쪽 하늘에는,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화성·수성·토성·목성·금성 순서로 오성이 늘어섰다! 특히 BC 1734년 7월 13일 저녁에는 달과 해 사이에 오성이 ‘주옥처럼’ 늘어섰다. 오차가 1년 있기는 하지만 4000년 전 일을 추정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오성취루라고 봐야 한다. 그 당시 달력이 어땠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또한 28수 중 루(婁) 별자리(양자리 β별 주위)가 아니라 성(星) 별자리(바다뱀자리 α별 주위)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 오성취성(五星聚星)이 맞다. 이는 4000년 전 28수가 현재와 다르다고 결론내릴 수 밖에 없다. 지난 24번째 칼럼에서는 오성취루가 정(井) 별자리(쌍둥이자리 μ별 주위)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 오성취정(五星聚井)이라고 했는데 이는 다른 소프트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칼럼에서는 천문학자와 아마추어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정확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Starry Night’ 소프트웨어를 근거로 기술하겠다.
하지만 이미 오성취루로 너무 많이 알려져서 오성취성으로 바로 잡히지는 않을 것 같다. 과학사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중요한 사실은 오성결집이 실제로 일어났고 옛 기록이 옳다는 것이다. 오성취루 같은 천문현상을 임의로 맞추거나 컴퓨터 없이 손으로 계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BC 1734년 우리 조상들은 천문현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조직과 문화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천문대를 가진 고조선은 고대국가였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고조선을 신화의 나라로 치부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천문 소프트웨어로 확인한 오성취루. BC 1734년 7월 13일 저녁 8시 서쪽 하늘의 모습이다.
오성취루 상상도. 왼쪽부터 화성·수성·토성·목성·금성이다.
오성취루를 처음으로 검증해 본 천문학자는 고(故)라대일 박사와 박창범 박사다. 그 검증 결과는 ‘단군조선시대 천문기록에 관하여’ 논문으로 작성돼 1993년에 발행된 한국천문학회지에 실렸다. 이 논문에서 BC 2000년부터 BC 1450년까지 550년 동안 오성결집 현상이 BC 1953년 2월에 한 차례 더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는 오성취루 219년 전이었으므로 오성결집 현상이 최소한 200년에 한 번씩 일어난다는 편견을 심어줬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오성결집이 불과 1년 만에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는 상대적으로 공전 주기가 긴 목성과 토성이 하늘에서 모였다가 멀어지기 전에 수성·금성·화성이 신속하게 다시 결집하면 얼마든지 가능했다.<②편에 계속>
이번 칼럼에서는 배달국 시대의 오성결집에 대해서만 알아보기로 한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 회원들에게 옛 천문기록을 찾아내달라고 호소해왔다. 그러던 중 올해 초 황보승 회원이 오성결집 기록을 여러 개 발견했다고 나에게 알려왔다! ‘그래, 그럼 그렇지! 우리가 누구인가? 천손의 후예 아닌가!’ 나는 쾌재를 불렀다.
배달국의 오성결집 기록은 ‘천문류초(天文類抄)’에서 발견됐다. 이 책은 세종대왕의 명에 의해 천문학자 이순지가 옛 기록들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오성결집에 관련된 기록은 전제(顓帝), 즉 전욱 고양씨(顓頊 高陽氏) 부분으로 아래와 같다.
‘…상고에 해의 이름이 갑인(甲寅)일 때, 갑자(甲子)월 초하루 아침인 동짓날 한밤중에 해와 달 및 오성이 자(子)방에 합하였다. 그래서 일월과 오성이 주옥처럼 모여 이어진 상서로움이 있게 되었고, 그 상서로움에 응해서 전욱 고양씨가 책력을 세우는 기원으로 삼았다(上古歲名甲寅 甲子朔旦 夜半冬至 日月五星 皆合在子 故 有合壁蓮珠之瑞 以應顓帝建曆之元)…’
즉 배달국의 오성결집은 ‘천문류초’의 ‘일월오성개합재자(日月五星皆合在子)’ 기록에 명시돼 있는 것이다. 마치 고조선의 오성결집이 ‘환단고기’의 ‘무진오십년오성취루(戊辰五十年五星聚婁)’ 기록에 근거를 둔 것처럼 말이다. 전욱은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하나로 BC 2513년부터 BC 2436년까지 78년간 생존했다. 따라서 갑인년은 BC 2467년이라야 한다. 천문 소프트웨어를 돌리자니 가슴이 떨렸다. 무려 4500년 전 선배 천문학자의 기록을 후배가 맞춰보고 있는 것 아닌가!
정작 BC 2467년에 오성결집이 나오지 아니하자 숨이 막혔다. 하지만 BC 2471년부터 BC 2465년 사이에 오성결집이 무려 두 차례나 일어났다! BC 2470년 9월 새벽과 BC 2469년 6월 저녁 무렵으로 둘 사이 간격이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동지와 간격도 먼데 4000년 전 오성취루보다 더 과거인 4500년 전 일을 추정하다보니 어느 정도 오차는 불가피하다고 하겠다.
오성취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실은 오성결집이 실제로 일어났고 옛 기록이 옳다는 것이다. 두 기록 중 ‘아침(旦)’에 일어났고 동지에 더 가까운 BC 2470년 9월 새벽 오성결집에 주목했다. 천문 소프트웨어를 돌려봤더니 BC 2470년 9월 중순 새벽 동쪽 하늘에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수성·토성·금성·목성·화성 순서로 오성이 늘어섰다! 특히 BC 2470년 9월 9일 새벽에는 해와 달 사이에 오성이 ‘주옥처럼’ 늘어섰다.
‘천문류초’ 기록은 비록 3년이나 오차가 있지만 이 오성결집을 기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 오성결집은 처녀자리와 사자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자자리는 28수에 해당되지 않고 처녀자리의 각(角, α별 주위)과 항(亢, κ별 주위) 둘 중 각이 오성결집 중심에 가깝기 때문에 ‘오성취각(五星聚角)’이다. 하지만 다른 문헌에서 또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오성취각으로 정확하게 표기돼 있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조선의 오성취루도 정확하게 표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문 소프트웨어로 확인한 오성취각. BC 2470년 9월 9일 새벽 5시 동쪽 하늘의 모습이다.
오성취각 상상도. 왼쪽부터 수성·토성·금성·목성·화성이다.
‘환단고기’는 삼황오제가 동이족(東夷族), 즉 배달국 사람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삼황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태호 복희씨(太昊 伏羲氏)는 5500년 전에 음양오행 우주론과 태극기를 만든 배달국 5대 태우의(太虞儀) 환웅의 막내아들이다. 전욱은 삼황의 하나인 황제 헌원(皇帝 軒轅)의 손자로서 역시 오제의 하나다.
이번 오성취각의 발견으로 삼황오제 시대는 전설이 아니라 천문대가 있었던 역사라는 사실이 증명됐다. 물론 배달국의 역사 또한 결코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도 저절로 입증된 셈이다! 고조선도 신화라고 하는 마당에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배달국의 오성취각, 고조선의 오성취루(정확히는 오성취성), 고구려의 오성취귀, 이 ‘오성결집 삼총사’는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밝혀줄 영원한 등불이 될 것이다. 고구려의 오성취귀(五星聚鬼)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안내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