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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성서를 썼나(Who Wrote The Bible?) [1/3]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1. 15:29

누가 성서를 썼나(Who Wrote The Bible?) [1/3]

[히스토리채널]

누가 성서를 썼나 [1]

 

인터넷 유투브에 'Who Wrote The Bible'를 검색하면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12개로 나누어 올려놓았네요. 제가 갖고 있는 건 3부작이니 1~4까지의 동영상에 해당할 것입니다)

 

성서는 가장 오래 남았고 가장 힘이 있는 문서이다. 시대를 초월하고 도발적이며 논란도 많고 미스터리에 쌓인 책, 성스러운 말씀의 기원을 탐색하는 기나긴 여정을 떠나보자.

 

성서는 신구약 두 권으로 나누어 66권으로 집대성 되었다. 표준 영어판 성경에는 거의 80만개의 단어가 수록되어 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닌 채 살아남은 이 말들은 인간 사회의 법과 윤리와 도덕의 기초가 됨은 물론 세계인구의 절반에겐 신앙의 원천이 된다.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신명기 61).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다고 일컬어지는 성서는 영감과 장엄한 아름다움과 지혜와 열정의 책이다. 성서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지만, 그 기원은 아직도 장막에 가려져 있다. 이 문서가 어떻게 수집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석되지는 않았을까? 처음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왔을까? 그렇다면 이 영원의 말씀을 글로 맨 처음 쓴 사람은 누구일까?

 

제임스 왕의 흠정역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보는 이도 있지만 그건 아니죠. 성서는 하나의 도서관입니다. 수천 년 동안 쌓여온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죠.”

 

성서는 모든 선남 선녀들, 즉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산물입니다. 서기 1천년 경까지도 초기의 히브리어 성서가 퍼져 나갔는데 그건 대단한 일입니다.”

 

저도 많은 유대교 랍비들의 견해에 동의합니다만, 구약의 본문, 특히 모세의 율법은 영적으로도 매우 완전해서 하나님이 쓰신 모든 내용을 인간은 아무도 이해를 할 수 없을 정도죠.”

 

예수라는 인물에서 시작되는 신약성서 역시 마찬가지로 신비에 쌓여있다.

 

이 복음서들을 언제, 어디서 누가 썼는지는 모릅니다. 우리는 다만 추측만 할 뿐이죠.”

 

이 문서를 어떻게 얻게 됐을까요? 역사적으로 연구를 해 보면, 인생관과 세계관이 다르고 공통점도 없는 여러 집단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이걸 한 곳에 모았을까요?”

 

책중의 책인 성서를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을 알아낼 수 있을까? 이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는 어쩌면 고대의 문서 속에 있을 수 있다.

 

과연 누가 성서를 썼을까?

 

Who Wrote the Bible? part I

 

Act 1. In the Beginning [태초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와 사상, 그리고 전통과 연대기가 1천년이나 넘는 기간 동안 서로 얽히고 짜여져서 융합된 결과물이다. 이러한 성서는 세계 최장기 베스트셀러로 해마다 약 1억권의 사본을 찍어내고 있다.

 

성서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기나긴 여정과 탐구에 대한 논란도 없지 않다. 이 책에 대해서는 우리가 깊고 열정적인 신념을 갖고 있는 데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너무나 성스러운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성서에 포함된 말씀 중에 정말 성스러운 하나님의 신성한 말씀은 얼마나 되고 인간의 작품은 얼마나 될까? 혹시 그 안에는 역사와 전설이 혼동될만큼 뒤섞여 있지는 않을까? 원래 내용이 성서 안에 그대로 담겨 있을까? 아니면 고대 텍스트가 혹시 누락되지는 않았을까? 성서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성서의 본문 자체로 돌아가야 했다. 수세기동안 번역되고 편집되는 과정에서 지금의 성서는 원본과는 많이 멀어졌을 수도 있다. 특히 토라라고도 하고 모세 5경이라고 하는 가장 오래된 성서 맨 앞의 다섯 권이 그렇다.

 

신명기 319절에 보면 모세 자신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에게 주고

 

로렌스 쉬프먼(뉴욕대 피브리 유대 연구)

우린 하나님이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났다고 배웠어요. 이 문제를 이해하려고 애를 써도 이 방대한 토라에 인간의 개입이나 문학적인 작업이 없었다고는 하기 힘듭니다.”

 

데이비드 울프 랍비(유대교 대학 강사)

토라의 본문엔 정확하게 모세가 다 썼다는 말은 없습니다. 모세가 어느 구절을 썼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다 썼다는 말은 없어요. 토라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기원전 2세기 랍비가 나오기 전에 생겨났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나님이 썼다는 것만큼 책의 권위를 확립시켜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서를 누가 썼냐는 질문에 가톨릭이나 유대교에서는 종종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전통적으로 성서의 본문은 성스러운 말씀으로서 신성에 의해 영감을 받아 전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물론 오늘도 성서의 많은 저자들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아론 텔러(유대교 대학 랍비)

우리는 토라가 모세의 손으로 쓰여졌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완전히 신성하게 쓰여졌죠. 마치 비서에게 편지를 쓰라고 불러주는 것처럼요.”

 

제리 폴웰(리버티 대학 총장)

천사들을 통해 말씀하셨거나 직접 문서로 썼을 수도 있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주는 말씀을 인간을 이용해서 썼을 수도 있어요. 모세 5경을 모세가 썼든 안 썼든,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신약을, 또 다른 40권을 누가 썼든, 그 분들은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 말씀을 그대로 받아 적었죠. 하지만 자신의 개성대로 썼을 겁니다.”

 

처음으로 성서가 전해지던 때는 공동체의 모닥불 놀이를 통하여 역사와 가계의 전통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을 시작으로 한다.

 

신구약 성서 66권은 수세기를 거쳐 다양한 공동체를 거쳐 경전으로 인정받아 성서에 포함된 것이다. 외경으로 알려진 책들이 때로는 성서에 부록으로 포함되기도 한다. 원저자를 탐구하는 일은 성서의 전체 구조를 기반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최초의 원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오늘날 학자들의 연구 결과, 성서의 본문은 수도 없이 많은 필체로 구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Act 2. The Legacy [유산]

 

잃어버린 염소를 찾아다니던 아랍 소년 무하마드 아비히드는 1947년 쿰란 부근의 어느 동굴속 항아리에서 먼지묻은 고문서를 만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해문서이다.

 

월터 쟁거(이스라엘 작가)

사해 두루마리라고 불리리는 자료 중, 사해 고문서의 발견은 성서의 본질과 언제, 누가, , 무엇을 썼는가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습니다. 여기에는 에스터서만 제외하고 구약의 모두 들어있었으니까요.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문서였던 히브리 판보다도 더 오래된 1천년 전의 문서였습니다.”

 

사해 문서는 유대교가 풍미하던 시대 3백년에 걸쳐 쓰여졌다. 이 문서는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가 탄생될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예수 자신도 이 문서에 담겨있는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너희가 모르는 자에게서 불을 빼앗지 말라. 너희를 더 궁핍하게 할 뿐이니라. 만약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거라면 궁핍함 속에서 죽어가야 하리라. 그렇게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내 정신을 부패시키지 말찌니” (사해문서 4Q416)

 

1947년과 60년 사이 열한개의 동굴에서 800개의 두루마리가 나왔다. 127개의 문서는 정식 경전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오늘날의 성서에 나오는 내용과 똑같다. 그러나 학자들이 보기에 새롭고 낯선 구절들이 들어 있는 문서도 많았다. 몇 개 문서는 다른 필경자들에 의해 19번이나 달리 쓰여져 있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성서가 다양한 출처에서 수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월터 쟁거(이스라엘 작가)

같은 책이 여러 판으로 유포됐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서는 현재의 것보다 더 좋았죠. 길고 자세했어요. 예레미야서는 짧고 혼란스러웠죠. 현재의 것보다 못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사해문서는 히브리 경전의 정당성을 증명해 주었죠. 하지만 다른 판도 유포됐었다는 사실도 인정하게 해 주었습니다.”

 

사해 문서는 유대교 은둔 종파인 에세네파와 연관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에세네는 아람어에서 나온 말로, ‘경건한또는 치료자라는 뜻이다. 이들은 유대교가 로마와 대결을 벌이기 150년 전에 유대교의 주류에서 떨어져 나왔다. 사막에서 격리된 그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리며 신앙의 양심을 키워갔다. 때는 마침 예수가 역사에 등장하려는 시기였다. 아마도 평화주의자였던 에세네파 신자들이 이 두루마리(사해 문서)를 감췄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로마의 파괴를 예상하고 성스러운 경전을 쿰란으로 가져간 것일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문서를 번역해 보면, 에세네파와 예루살렘 제사장들은 종교적인 쟁점에 관해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드러난다.

 

사해문서와 연관이 있다고 보여지는 에세네파는 사막에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갔다.

 

혼혈을 금지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성스럽고 또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그중 더 성스럽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과 어떤 사람들 중에서는 혼혈을 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이방인과 결혼함으로써 성스러운 피를 더럽힌 것이다.” (사해문서 4Q398)

 

사해 문서 중에서 독특한 것은, 3번 동굴에서 발견된 동판 두루마리다. 이 문서에는 이 지역에 묻힌 64종의 보물 목록이 적혀있었지만 실제로 발견된 것은 없다.

 

마이클 와이즈(시카고대 아람어과)

동판 두루마리 문서는 가죽이나 파피루스가 아닌 동판에 쓰여 있었죠. 그것은 성전에서 나온 보물 명세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전의 공식문서로서 다른 성전과 구별하기 위해 종종 동판에다 새겨 넣었습니다.”

 

로마군이 성전을 파괴했을 당시에 이 문서가 다른 곳에 묻혀있었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 문서를 감춘 사람들이 성전의 보물과 종교적인 공예품까지 감추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가능성이 없다. 에세네파와 예루살렘 제사장 간에는 깊은 골이 파여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학자들이 두루마리 문서의 본문을 깊이 연구했지만 누가 보물을 숨겼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었다.

 

마이클 와이즈(시카고대 아람어과)

아마 다시 돌아올 것으로 생각한 어느 집단이 문서를 숨겼겠죠. 그때가 로마와의 전쟁을 치르던 기원 66~70년 사이였어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죽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지 못한 듯합니다. 이 문서가 발견된 지역에는 수없이 많은 동굴이 있었고 그 중 어느 동굴에 보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열쇠를 가진 사람들은 로마군에게 죽음을 당했겠죠.”

 

예수가 이곳 성지에서 태어나 새로운 세계관을 전파하고 있을 무렵, 로마군이 쳐들어와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을 무렵, 누가 썼는지 모르는 이 두루마리들은 쿰란의 동굴에 보존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문서는 오늘날 성서가 우리가 아는 성서로 집대성되기 이전에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되어 있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다.

 

Act 3. Holy Words [성스런 말씀]

 

거의 1천 년 전 성서의 처음 다섯 권인 모세 5경에서 모순되는 구절이 처음으로 눈에 뜨였다. 대부분이 모세가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모세가 쓰지 않은 것 같은 대목이 있었다. 신명기 345절이 그것이었다. 만약 모세가 모세 5경의 저자였다면, 어떻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기록할 수 있을까?

 

로렌스 쉬프먼(뉴욕대 히브리, 유대 연구)

모세가 토라를 기록해 전달하고 또 자신의 죽음까지도 어떻게 기술했나 하는 점은 이미 문제점으로 제기됐고 이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 가능성으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모세가 죽어가면서 정말 자신의 죽음을 기록했을 가능성, 둘째로는 사망 기록을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했을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이보다 더 혼란스러운 구절이 있고, 그것은 창세기에 나온다. 노아의 홍수에 대한 창세기 619절과 72절이 그렇다. 이렇게 같은 이야기가 두 번씩 서로 달리 등장하는 경우가 성서에는 종종 있다. 학자들은 이 구절을 중복구절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에도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과 족장 아브라함 사이의 계약에도 두 가지가 있다. 심지어 출애굽 당시 네리바에서 물을 얻는 이야기도 두 가지 판이 존재한다.

 

히브리 텍스트에는 신의 이름을 엘로힘(하나님)으로 언급한 경우와 야훼(주님)로 언급한 경우가 있다.

 

리처드 엘리엇 프리드먼(켈리포니아대 히브리 비교문학)

여기서 중요한 증거가 나오는데요 여러 종류의 실마리들을 서로 모아보면 이중으로 중복된 이야기들이 나온다는 것이죠. 그걸로는 아무 것도 증명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중복 구절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보면, 두 그룹은 하나님의 이름을 각각 다르게 부릅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증거죠.”

 

19세기 초반까지 모세 5경은 세 명의 다른 저자가 저술했다고 확신했다. 하나님을 야훼로 부른 저자(J), 엘로힘으로 부른 저자(E), 그리고 JE와는 다른 문체로 글을 쓴 제사장(P).

 

리처드 엘리엇 프리드먼(켈리포니아대 히브리 비교문학)

이 텍스트들은 모두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하지만 시기나 즐겨쓰는 용어에 따라 문체도 달라집니다. 어떤 텍스트에는 하나님이 EJ 대신 P50번이나 나온 것도 있고 각각 개성적인 문체로 되어 있었죠.”

 

최초로 쓰여진 히브리어 원전에서는 그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영어 번역본에서는 그 차이가 사라진다. 차이가 미미할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성서의 텍스트가 여러 가지 출처에서 나온 문서들이 집대성 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1807년 독일의 신학자 빌헬름 드 베테는 성서의 네 번째 저자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신명기서의 문체와 내용을 살펴보면, JE, P와는 다른 저자였음이 밝혀졌다. 학자들은 그 이후 신명기서의 첫 글자를 따서 ‘D’라고 부르게 되었다.

 

D문서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독일의 신학자 드 베테

 

리처드 엘리엇 프리드먼(켈리포니아대 히브리 비교문학)

일단 어떤 텍스트를 보고 저자를 이렇게 확인했죠. ‘이것은 J, 또는 E, 또는 P, D.’ 그런 다음 연대를 파악하기 위해 이미 알고 있는 성서의 텍스트와 비교해서 어떤 발전이 있었는지를 살펴봅니다. 그럼 차이가 드러납니다. 제가 쓰는 영어와 셰익스피어의 영어가 다르듯이 말이죠. 18세기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셰익스피어 시대와 현대 사이의 인물임을 알 수 잇는 것처럼 히브리어의 발전단계를 알게 됩니다.”

 

성서의 저자에 대한 문제와 가설에 대해 초기 교회에서 편협하게 거부 반응을 보인 것에 비해서, 1943년 교황 비오 12세는 새로운 칙령을 발표해 종교지도자들과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학자들에게 누가 성서를 정말로 썼는가에 대해 충분히 조사하도록 독려한다. 교황의 지시는 성서연구에 있어서는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며, 이후 성서의 기원에 대해 전에 없던 진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교황 비오 12세... 성서 연구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Act 4. A Nation Divided [국가의 분단]

 

기원전 1200년 경, 수십 년의 방랑 끝에, 이스라엘 민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기원전 1천년 경,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 수도를 세웠다. 성서의 저자에 관한 문제가 다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왕은 종교적인 것을 관장하는 제사장을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려 진행함으로 종교적인 전통을 깨버렸다.

 

리처드 엘리엇 프리드먼(켈리포니아대 히브리 비교문학)

현재도 수석 랍비가 두 명이니까 제사장이 두 명인 게 이상하진 않죠. 문제는 두 명이면 한 명이 늘 다른 한 명을 제거하려 한다는 거죠.”

 

다윗왕 말기에는 두 아들이 왕위를 놓고 싸우게 된다. 권력투쟁이 일어나고 제사장도 거기에 휘말리게 된다. 다윗왕의 후계자는 솔로몬이 되었고, 솔로몬을 지지하지 않았던 제사장은 추방당하게 된다(열왕기상 226). 이후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솔로몬에게 선택받은 제사장과 그 일행은 중요한 직책을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쫓겨난 제사장 일행에게는 다시금 복귀할 수 있는 희망이 사라졌다.

 

리처드 엘리엇 프리드먼(켈리포니아대 히브리 비교문학)

쫓겨난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선 아무런 자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장은 반란을 일으켜 북쪽에는 이스라엘 왕국이 남쪽에는 유다왕국이 생깁니다. 자기들도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장소를 갖고 싶었던 것이죠.”

 

기원전 912년 북쪽의 10개 부족이 독립을 시도하면서, 나라는 둘로 분열하게 된다. 북쪽에는 이스라엘, 남쪽에는 유다 왕국이 생겨난 것이다.

 

왕국의 분열

 

리처드 엘리엇 프리드먼(켈리포니아대 히브리 비교문학)

두 나라엔 각각의 왕과 전통, 독자적인 예배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라라고 해봤자 미국의 한 카운티만했으니 가까이 살면서 남북에 각각 친척을 둔 사람들도 있었죠. 또 언어와 조상도 같아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이었고 애굽에서 모세와 함께 했고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전통도 똑같았죠. 하지만 종교적인 문서는 따로 만들었을 겁니다. 적어도 각 왕국에서 한 명이 자기 식으로 성서를 제작했겠죠.”

 

그렇다면 따로 따로 만든 성서가 동시에 나오지 않았을까?

 

다니엘 스미스 크리스토퍼(로욜라 마스마운트대 히브리성서학)

“‘J’로 표시된 문서는 처음 솔로몬 왕 시절에 수집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문서에는 솔로몬이 자기 민족의 이야기를 수집해서 이스라엘이 하나 되도록 노력한 과정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서는 국가의 서사시가 됐죠.”

 

솔로몬과 그의 후계자들이 유다 왕국이 역사를 이뤄가고 있는 동안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도 자기들의 역사를 수집하고 있었다.

 

다니엘 스미스 크리스토퍼(로욜라 마스마운트대 히브리성서학)

이들은 그런 자료에다 북쪽의 특성을 덧붙이고 싶었죠. 그래서 다른 자료를 덧붙이게 되는데 그게 바로 ‘E’라고 하는 자료입니다. ‘E’는 당시 하나님을 일컫는 엘로힘의 첫 글자를 말합니다. 아마도 상당히 세련된 신학적인 이야기였겠죠. 하지만 둘째 아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창세기에는 항상 둘째 아들이 더 똑똑한 것으로 나오죠. 이삭이 이스마엘보다, 야곱에 에서보다, 아벨이 카인보다 더 똑똑합니다. 둘째 아들이 중요하고 더 사랑받는다는 뜻이죠. 북쪽의 왕국은 갈라져 나온 뒤에 둘째가 더 낫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겁니다. 자기들이 왕국에서 떨어져 나온 둘째이니 더 사랑받는 것처럼 그리고 싶었겠죠.”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왕국은 이교도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섬겼던 신을 섬기게 된다. 백성들은 19명의 왕들에게서 고통을 받고, 그중 여덟 명의 왕은 난폭하게 죽임을 당한다. 왕들은 도덕적으로 부패했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기원전 721년에 북쪽에서 쳐들어온 앗시리아에게 점령당한다.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의 10부족을 흩어버린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부족들이다(열왕기하 1718).

 

이제 남은 것은 베냐민이라는 작은 지파와 유다 왕국이었다. 그러나 유다 왕국도 영적으로 끊임없이 몰락하게 된다. 통합된 율법과 경전이 없어, 온 나라에 이교도가 가득하게 된다. 그러나 요시야 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달라지게 된다. 요시아는 우상숭배를 금지시킴으로 나라의 분위기를 바꾸고, 시나이산에서 하나님과 맺었던 성스러운 계명으로 돌아가도록 지시했다.

 

다니엘 스미스 크리스토퍼(로욜라 마스마운트대 히브리성서학)

요시아 왕은 젊은 왕이었는데 왕이 되자마자 종교개혁을 해서 백성들이 자국의 신인 야훼에게 가까이 가도록 유도하고 싶어하죠. 그래서 왕은 어떤 운동을 시작합니다. 성전을 청소하고 성전 건축에 백성들을 다시 고용해서 성전을 더 영광스럽고 영적인 장소로 만들죠. 그러다가 한 권의 책을 발견합니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열왕기하 228).

 

리처드 엘리엇 프리드먼(켈리포니아대 히브리 비교문학)

힐기야가 그 날 왕에게 읽어준 문서는 율법서 신명기였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거기엔 하나님을 오로지 한 곳에서만 섬겨야 한다고 되어 있죠. 그래서 요시아 왕은 다른 장소는 모두 파괴합니다. 또 우상을 파괴하고 전국에서 이교도 신앙을 제거합니다. 그는 법전을 그대로 따르는 왕이었죠. 그 법전은 특수한 법으로서 제사를 지내는 의식에서부터 사람이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도덕적인 문제까지 망라하고 있었죠. 올바르게 살고, 과부나 고아를 학대해서는 안 되며 가난한 이들을 돌봐야 한다고 돼있는 특수한 법체계였습니다.”

 

이런 율법은 당시 사람들이 신앙에서 많이 이탈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의 저자는 분명히 그런 관점에서 집필을 했을 것이고, 아마도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몹시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리처드 엘리엇 프리드먼(켈리포니아대 히브리 비교문학)

신명기를 보면 분명하고 눈에 띄는 문체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열왕기하나 예레미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바로 그 저자가 예레미야나 신명기에서부터 열왕기하에 이르기까지 역사서의 저자와 같다고 시사한 적이 있습니다.”

 

성서에는 예레미야서의 대부분을 쓴 사람이 예레미야의 충실한 서기인 바룩이라고 되어 있다(예레미야 3632). 하지만 네리야의 아들 바룩은 단지 서기관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가 신명기까지도 쓰지 않았을까? 그가 예레미야에 썼던 많은 문체들은 신명기의 문체와 놀랄만큼 비슷하다.

 

리처드 엘리엇 프리드먼(켈리포니아대 히브리 비교문학)

최근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은 진흙으로 만든 인장을 발굴했습니다. 7세기 히브리 문서로 확인된 문서에 찍혀 있던 인장이었죠. 문서는 7세기 후반이나 6세기 초의 히브리 문서입니다. 그 인장에 나온 이름은 네리야의 아들인 서기관 바룩이었죠. 만약 바룩이 신명기의 역사가인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보는 이 인장은 곧 성서의 저자 중 한 명의 서명인 셈입니다.”

 

네리야의 아들 바룩의 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