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성서를 썼나(Who Wrote The Bible?) [2/3]
히스토리채널
누가 성서를 썼나 [제2부]
Act 1. The Written Word [글로 쓰여진 말씀]
모세오경을 둘러싸고 풀리지 않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책의 원본을 수집한 사람은 누구였을까?’하는 것이다. 어떤 책이든 쓰는 과정에서는 오랫동안의 편집과 번역의 과정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쩌면 성서를 직접 쓴 사람보다도 그것을 다시 쓴 사람이 누구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일수도 있다.
리처드 프리드먼(캘리포니아대 히브리 비교문학)
“흔히들 성서 작가가 네 명뿐이었던 것처럼 출처가 네 군데였다고 간단하게 말하는데 그건 잘못된 겁니다. 설사 작가가 네 명뿐이었다 해도 이 단계에서 편집자가 존재하죠.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저자만큼이나 편집자가 중요합니다.”
구약에 편집자가 있었다면 누구였을까?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남쪽의 유다왕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유다 왕국의 타락상을 가장 크게 비판한 예언자는 예레미야였다.
너희가 너희 조상들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행하고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예레미야 16장 12~13절]
이 위압적인 예언은 기원전 586년에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 함락시켰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로니아에서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바빌로니아는 더 강력한 제국인 페르시아의 키로스 2세에게 점령당한다. 키로스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신앙을 되찾을 수 있도록 칙령을 반포한다.
키로스 칙령이 새겨진 돌기둥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에스라 1장 1~2절].
황폐한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나름대로 신앙 공동체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느헤미야 8장 2~3절]
아마도 에스라의 지도하에 여러 가지 종교적인 사본들이 제본이 되고 처음으로 함께 읽혀지면서 영구적으로 통합되어 모세오경으로 굳어졌을 것이다.
리처드 프리드먼(캘리포니아대 히브리 비교문학)
“그 율법은 이전에는 한 번도 읽혀진 적이 없었습니다. 신명기의 율법은 최소한 요시아왕 시절부터 공개적으로 읽혀졌지만 우린 지금 모세 5경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가 P나 J, 또는 D로 돼있는 책들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읽는 모세 5경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죠.”
성서의 사본이 포로 귀환 이후,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편집되었다는 사실은 박해를 받고 분쟁을 겪은 오랜 유대인의 역사에서는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모세5경은 비록 인간의 손에 쓰여지긴 했지만 정통성을 지닌 전통적인 경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것은 그 뒤에 나오는 책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나머지 히브리 성서들은 일련의 역사적인 문서로 인식이 되었다. 많은 저자들이 기록한 민족의 연대기라는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 저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랍비 데이비드 울프(유대교 대학 교수)
“예를 들어 우리는 다윗 왕이 많은 시편을 썼고 솔로몬 왕은 잠언과 아가서와 전도서를 썼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랍비들도 솔로몬이 젊었을 때는 아가서를, 중년에 들어선 잠언을, 그리고 노년엔 전도서를 썼다고 생각해요.”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숙련공의 손이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아가서 7장 1~2절].
사무엘 상하도 한때는 열왕기상하권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의 작품이라고 보았다.
랍비 데이비드 울프(유대교 대학 교수)
“누가 썼든 사무엘서의 저자는 역사가였고 또 역대상하권도 다윗 왕가의 궁정사가로 짐작할 뿐 그의 이름은 모릅니다. 대부분의 책들이 저자의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고 저자가 책이름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유대 역사에선 저자가 책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죠. 셰익스피어를 ‘햄릿’이라고 부르는 셈이에요.”
구약의 작가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저명인사였을까? 무명인사였을까? 부자였을까? 가난한 사람이었을까?
아모스는 750년경 북왕국 이스라엘에 사는 비천한 목동에다 나무꾼이었다. 그는 당대 무절제와 방종과 귀족적인 취향을 개탄하는 글을 남겼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아모스 2장 6~7절].
다니엘 스미스 크리스토퍼(로욜라 매리마운트대 히브리 성서 교수)
“하나님이 선지자로 부르기 전까지 아모스는 과수원지기였습니다. 그래서 아모스서는 부자들의 악습을 비판하고 있고 아모스의 말은 보통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죠. 사람들은 아모스를 좋아했어요. 자기들과 같은 부류였으니까요. 그런가 하면 잠언서에는 어떻게하면 돈을 적절히 쓸 것인가 또 권력자와 사귀면서 어떻게 자제할 것인지를 얘기하고 있죠. 그래서 잠언서는 생활수준이 다른 작가가 쓴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쓰여진 시기도 달랐겠죠.”
성서에는 구약에서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책들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서의 원본은 얼마나 되며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Act 2. The Hebrew Bible [히브리 성서]
예수가 탄생하기 300년 전, 성서의 세계는 그리스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가장 초기의 성서를 찾다 보면, 알렉산더 대왕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은 소아시아와 이집트,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휩쓸면서 가는 곳마다 그리스 문화를 퍼뜨렸다. 이후 알렉산더의 이름을 딴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는 한때 유대인 대규모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조셉 블렌킨소프(노트르담대 성서학)
“그때는 모국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를 알아야만 했습니다. 이집트 내의 유대인 공동체 중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유대인들도 히브리어를 잊어버렸죠. 결국 그리스어밖엔 모르니까 유대교회에서도 그리스어로 된 성서를 썼죠.”
이집트의 파라오인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도서관에다 그리스어로 된 성서를 두고 싶어했다. 그래서 72명의 유대 학자들과 이스라엘의 12지파의 후손들로서 학식있는 인사들 여섯 명이 예루살렘에서 알렉산드리아로 호출을 받았다. 각자가 72일 동안의 노고 끝에 통합된 그리스어 번역판을 내놓게 된다. 이것은 후에 70인역 성서로 알려지게 된다.
랍비 데이비드 울프(유대교 대학 교수)
“70인역 성서가 역사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것은 그때 유대인이 처음으로 이렇게 큰소리로 발언했기 때문이죠. ‘히브리어는 이렇게 성스럽지만 원본에 그대로 갇혀있기보다 사람들이 히브리어로 된 성서를 읽게 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문이 열리자 이제는 세계 어디를 가든 미국이나 영국의 호텔방에서도 영어로 된 성서가 있어서 보통사람들이 여행 중에도 읽을 수가 있게 됐습니다. 첫 번역본을 낼 때의 성명서가 바로 이런 말이었으니까요. ‘우리가 어떤 언어를 말하든 성서의 내용을 읽을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 탄생 47년 전, 줄리어스 시이저의 군대가 알렉산드리아를 장악하면서 불을 지르는 바람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보존하고 있던 70인역 성서의 원본은 불타버리고 만다.
다니엘 스미스 크리스토퍼(로욜라 매리마운트대 히브리 성서 교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라는 문제는 어떤 학자라도 안다면 눈물을 흘릴 일이죠. 인간 세계가 얼마나 큰 유산을 상실했는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 상실감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테니까요. 예컨대 페르시아 시대 유대인의 생활상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그때의 선지자는 이름조차 잃어버리고 맙니다.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암시를 하기는 했지만, 그 도서관에 훨씬 더 중요한 정보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70인역에는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쓰던 다른 책들도 포함시켰다. 구약이 경전으로 인정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유대인들은 로마와의 전쟁을 치른 직후인 기원후 1세기 경에 경전 작업을 추진했다.
월터 쟁거(이스라엘 작가)
“그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당국자들은 야브네 시에 모였습니다. 맨 처음 해야 할 일은 성서의 문서를 가려내 집대성하는 일이었죠. 백성들을 타락시키거나 민심을 잃으면 안 됐으니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맺은 계약이자 역사적인 소명이었죠.”
오랜 토론 끝에 합의를 보게 되었고, 이때 결정된 것이 오늘날 구약이 경전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의 탄생과 연관된 사건은 또 다른 성서 집필에 불을 당겼고, 누가 성서를 썼느냐에 대해 완전히 다른 의문을 촉발시키게 된다.
Act 3. GODSPELL [신의 복음]
예수님이 태어났을 당시에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무서운 힘을 지닌 세계 제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릴리 출신의 한 청년이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도미니크 크로산(드폴대 성서학 교수)
“신약성서를 작은 도서관으로 본다면 첫 부분은 네 복음서로 되어 있어요. 그 다음은 예수의 죽음 이후 바울의 로마 도착까지를 쓴 사도행전, 그 다음엔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비롯 다른 사람들이 쓴 서간문이 있죠. 이것은 초대 교회의 다른 사람들이 썼고 마지막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신약성서의 책들은 원래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에서 예수는 종종 좋은 소식,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복음 : 좋은 소식’(Gospel)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받아적었을까?
바트 에르만(노스캐롤라이나대 종교학과)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복음서는 소위 예수의 추종자 중 두 명인 세리 마태와 애제자인 요한, 그리고 열두 제자의 친구들로서 베드로의 제자였던 마가와 사도 바울의 동반자였던 누가가 썼죠. 시기는 1세기 말로 추정됩니다.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구구하지만 대개 마가복음은 AD 65년 그러니까 예수 사후 35년경에,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은 그보다 15~20년 뒤인 AD 80~85년, 요한복음은 가장 나중인 AD 90~95년경에 쓰여졌다고 보고 있죠. 네 복음서 본문에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썼다고는 밝히지 않았어요. 이 복음서의 저자들은 신분을 비밀로 했습니다. 영어 성경의 제목에 나오는 ‘마태 성인의 복음’이란 말은 나중에 필경사들이 붙인 것이죠. 원저자는 신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네 복음서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근세에 이르러 초기 사본의 파편들을 찾아내었다. 많은 문서들이 건조하고 뜨거운 이집트의 열기 속에서 살아남았다. 1920년대 이집트의 사막에서 작은 조각이 발견되어 카이로에 있는 두 명의 고고학자에게 팔렸다. 이 조각은 예수 사후 1세기 경에 쓰여진 요한복음의 사본 조각이라고 판명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가장 오래된 사본으로 알려졌다.
주후 1세기 경 요한복음 사본으로 알려짐.
마가복음의 사본으로 마가의 시대보다 250년 뒤에 쓰여진 파피루스 조각
신약성서의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는 1세기 전에 처음 발견되었다. 이것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상당히 비슷한 구절이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스티븐 패터슨(에덴 신학대 신약학 교수)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비슷한 구절이 많습니다. 학자들은 종종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고 부르는데요, ‘공관복음’이란 세 복음서가 ‘비슷하다’는 뜻이죠. 세 복음서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돼 있어요.”
도미니크 크로산(드폴대 성서학 교수)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을 베꼈음을 학자들이 눈치채기 시작하면서 마태와 누가복음의 본문도 비슷한 내용이 있음을 알게 됐죠. 그건 마가복음에는 없는 내용이어서 다른 출처가 있다고 가정했습니다. 독일 학자들은 이것은 원전이라는 뜻의 독일어 크벨러라고 불렀는데 저는 첫글자만 따서 Q라고 부릅니다.”
신약 복음서의 문서 가설
이 알수 없는 Q문서를 찾는 탐색은 계속되고 있지만 발견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 그것이 존재했다면, 누가 썼을까? 마태와 누가 두 사람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 텍스트의 저자는 누구였을까?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Act 4. A New Testament Emerges [신약성서의 출현]
신약성서의 절반을 쓴 사람은 한 명의 헌신적인 사도였다. 그는 다소의 사울이라는 유대인으로 나중에 사도 바울로 알려지게 된다. 누구보다도 바울은 기독교를 로마제국에 확산시킨 공이 큰 인물이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박해하던 그는 다마스커스로 가던 도중에 예수의 발현을 경험하고 나서, 기독교로 개종한 뒤, 열렬한 선교사로 변모한다.
바트 에르만(노스캐롤라이나대 종교학과)
“바울의 선교는 매우 성공적이었어요. 그는 소아시아 전역과 그리스, 마케도니아, 그리고 고대 아시아 전역에서 교회를 세웁니다. 그의 신도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한두 명인지 수십 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성공을 거둔 건 확실하죠.”
바울의 서간문은 최초로 쓰여진 기독교 문서였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네 복음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의 서간문은 기독교 신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도미니크 크로산(드폴대 성서학 교수)
“바울은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세웁니다. 다른 도시로 갈 때면 전에 세운 교회에 편지를 보내죠. 편지는 어느 면에서 지역사회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편지는 사신이 직접 가져가서 모임에서 읽어주었죠. 그런 다음 그 편지가 복사돼서 그 공동체 안에서 보관됩니다. 그리고 이웃에 있는 다른 공동체에서도 복사를 하죠. 그래서 데살로니카서도 역시 복사돼서 빌립보 교회에 보내졌고, 빌립보에선 바울의 또 다른 편지 사본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죠. 이것이 서서히 모아지기 시작해 바울의 서간문으로 형성됩니다.”
방대한 분량의 서간문을 바울 혼자서 다 썼을까? 학자들은 몇 개의 서간문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진다.
데이비드 바아(라이트스테이트대 종교학과)
“바울의 서간문을 살펴보면 바울은 비서를 둔 게 분명해요. 그때 이미 받아적기가 나와서 키케로의 비서는 속기도 했으니까요. 바울도 그랬던지 몇 개의 서간문엔 추신이 붙어 있어요. ‘크게 써놓은 글자를 주목하라’ 바울은 필체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엔 한 서간문에선 그의 필경사가 열성적이었던지 바울이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말을 보내는데 로마서 16장에 ‘나 더디오는 너희에게 문안을 한다’는 말이 있죠. 그 필경사가 자신의 인사말을 바울의 인사말에다 덧붙인 겁니다.”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로마서 16장 21~22절].
신약성서 중에서 요한계시록은 가장 논란이 많다. 세계 종말과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하는 무서운 비전을 밝히는 이 책의 저자를 밝히는 것은 가장 어려운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그 당시에는 흔한 이름이었던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쓰여진 이 책의 저자는 누구일까? 성서의 맨 마지막에 위치한 이 책은 여전히 위압적인 인류의 멸망과 지상에 신의 왕국을 설립한다는 비전을 제공한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요한계시록 16장 13~14절].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성서는, 성서에 대한 선별과정이 없었다면 전혀 다른 책이 되었을 것이다. 구약의 히브리 성서의 내용은 오랫동안 합의를 거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그러한 합의의 과정이 불분명하다.
바트 에르만
“오늘날 우리가 신약에 대해서 말할 때는 책의 선정 과정에서 실제로 어떤 논쟁이 있었는지 잘 몰라요. 우리는 그저 구약과 신약이 함께 묶여있는 책을 살 뿐이죠. 그래서 기원 후 2~3세기 경에 기독교를 지배하던 교회의 권위가 현재와는 얼마나 달랐는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2세기경엔 네 복음서는 아직 통합된 작품으로 합쳐지지도 않았다. 로마 제국 여러 군데에 뿔뿔이 흩어져서 알려졌다. 로마에 있는 새 교회에 마가의 작품이 있었다. 동쪽(안디옥)에는 마태의 작품이 있었다. 누가는 그리스(아테네)에, 요한은 에베소에서 읽혀지고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책을 하나로 묶기로 한 것이 언제였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존 메이어(카톨릭대 신약학 교수)
“이때 촉매 역할을 한 사람은 2세기 경의 기독교 교사 마시언(마르시온)이었어요. 그는 로마에서 활동하면서 책의 명세를 작성해 보았습니다. 물론 빼야할 책과 넣을 책의 명세를 작성하려는 시도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겠죠. 불행히도 마시언은 대단히 반유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의 믿음에선 빠져나오고 싶어했고 유대인들이 공감하는 것은 무엇이든 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전도서 일부와 누가복음 일부만이 들어가게 됐죠. 그가 보기엔 마태복음도 그렇게 모든 책들이 너무 유대적이어서 성서에다 넣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시언이 보기에 구약의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지 않았다.
바트 에르만
“마시언은 유대성서와 기독교의 성서 두 가지 판을 준 하나님은 서로 다른 두 명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기독교 성서엔 누가복음과 바울의 10개 전도서만 포함됐죠. 마시언은 특히 바울을 좋아했습니다. 바울이 율법과 복음을 차별화시켰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생각을 거부했습니다. 기독교도 유대교에서 나왔고 예수도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죠.”
서서히 모아지는 신약성서의 책들. 그러나 선별과정은 쉽지 않았다. 성서의 초기판에는 현대판에는 없는 사본들이 있었다. 이 책들이 바로 외경(Apocrypha)이다.
래리 쉬프먼(뉴욕대 히브리 유대교학 교수)
“외경은 희랍어판 70인역 성서엔 포함됐던 책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판 히브리 성서에선 제외됐어요. 예를 들면 벤시라서 같은 건데 이것은 ‘집회의 서’로 알려져 있죠. 또 마카베서가 있는데 그리스어로 쓰여졌고 또 너무 늦게 쓰여졌다고 히브리 성서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존 메이어(카톨릭대 신약학 교수)
“유대인들은 결국 알렉산드리아나 다른 곳에서 쓰여진 책들은 성서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비록 어떤 것은 팔레스타인에서 쓰여지기도 했지만요. 히브리어와 아람아로 쓰여진 책에만 집착을 했습니다. 새롭게 출현한 기독교 교회 특히 카톨릭 교회는 팔레스타인과 알렉산드리아에서 쓴 책들도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그 책들은 그리스어로만 보존이 돼 있었죠. ‘솔로몬의 지혜’가 그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카톨릭의 구약성서에는 유대인의 성서보다 책이 더 많죠.”
‘솔로몬의 지혜’에 덧붙여서, 당대에 카톨릭 성서에는 유딧(Judith), 마카베서(Maccabees), 토빗서(Tobit), 벤시라의 지혜(Sirach), 그리고 유대와 신교도에서 나오는 것보다 내용이 긴 에스더와 다니엘이 포함되었다.
로마 제국 전역의 교회 당국자들은 어떤 것은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또 어떤 것은 거부했다. 하지만 기독교 성서를 오늘날과 같은 수준으로 표준화화는 시기가 왔고, 삭제될 책과 포함될 책이 가려지면서 경전인 현재의 성서에 가까워졌다. 이 때에 대해서 명확하지는 않지만,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시점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콘스탄틴 대제는 기원후 325년, 세계 최초의 세계교회주의 운동의 하나인 니케아 공회를 개최했다. 이 공의회를 통해서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의 성격과 기능이 영구히 규정된다.
도미니크 크로산
“어느 한 시기를 꼽으라면 경전이 결정된 건 바로 그때였죠. 콘스탄틴 대제가 50권의 성서 사본을 만들길 원해서 양피지 성서 50권의 제작이 자금을 지원키로 했던 시점입니다. 그 책은 엄청나게 크고 값도 매우 비쌌습니다. 아무도 콘스탄틴 대제에게 이런 말은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을 빼고 무엇을 넣을 것인지 결정 못했습니다’하는 말이요. 황제가 명령을 하고 돈까지 대자 경전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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