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누가 성서를 썼나(Who Wrote The Bible?) [3/3]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1. 15:31

누가 성서를 썼나(Who Wrote The Bible?) [3/3]

[히스토리채널]

누가 성서를 썼나 [3]

 

성서는 인간의 이성과 싸워 이겼고, 역사까지도 바꿔놓은 책이다. 이 말대로 신약성서는 뜨거운 열정과 구원을 담고 있어서 그 저자를 두고 항상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Act 1. Out of the Past [과거로부터의 선물]

 

18세기 후반, 고대 히브리 성서의 파편이 카이로의 옛 거리에 있는 유대교의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기원전 2세기에 예루살렘에 살았던 서기관 시므온 벤 시라가 쓴 원본으로 밝혀졌다. 그 문서는 상당히 긴 작품으로서 벤 시라의 지혜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도덕과 윤리에 관한 몇 차례의 토론과 잠언과 찬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처음엔 그리스판 성서에 함께 실려있었지만, 후에 히브리 정경이 확정되면서 삭제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로마 카톨릭판 성서에서 그것을 접할 수 있다.

 

지혜가 위대한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보다는 더 위대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을 경외함은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며 그것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 무엇에도 비할 바 없느니라”[벤 시라의 지혜 2510]

 

 

벤 시라의 외경을 발견한 것은 성서 연구사에서 큰 사건이었다. 학자들은 이 외경의 본문에 매혹되었다. 그리고 학자들은 중동의 어느 곳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고 숨겨져 있는 경전이 또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고 있다. 사막은 과거의 유물을 간직하고 있는 큰 보물창고이다. 왜냐하면 건조한 열기가 가차 없는 시간의 풍화작용을 막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1945년 겨울, 나그함마디라고 불리는 나일강 강둑의 모래 언덕이 그동안 철통같이 지켜오던 보물 하나를 드러내었다. 현재 이 문서는 카이로의 콥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문서들은 1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노시스파로 알려진 비밀스런 종파의 필경사들이 기록한 것이다.

 

사멸의 때가 오며는 내가 너희를 가르치리라. 어둠의 첫 세력이 너희에게 닥칠 것이니 두려워말고 이렇게 말하라. 보라 때가 왔느니라”[구세주의 대화서 122].

 

그노시스파들은 금욕적이고 규범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는 기독교인이지만 이들의 신앙은 당시의 대중적 기독교 신앙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 정통적인 견해를 따르지 않는 종파는 이단으로 낙인을 찍었다. 그러자 그노시스파의 스파르타식 믿음도 위험하게 되었다. 이들은 아마도 박해를 피해서 피난처와 같은 나그함마디에다 수도원을 세웠을 것이다.

 

스티븐 패터슨(에덴신학대 신약학 조교수)

그노시스파는 억압과 박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실천하는 것도 금지됐죠. 그래서 이들의 경전은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된 것입니다.”

 

 

나그함마디 문서의 글자는 이집트어와 그리스어를 혼합한 콥틱어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성서 관련 문서 중에서 가장 초기의 것이다. 글자를 해독하자 본문에서 비밀이 드러났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복음서가 발견된 것(도마복음서)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외롭지만 선택받은 사람은 복이 있나니 너희가 천국을 발견할 것이니라. 너희가 거기서 왔으니 다시 그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니라”[도마복음 말씀 49].

 

많은 학자들은 이 책이 신약의 4복음서와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용중에 20%가 다른 복음서와 일치하고 있다. 이것은 저자가 예수에 대해 정통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니라. 과거에는 너희가 내게 묻는 것에 대해 내가 말해주지 않았으나 이제는 내가 그것을 기꺼이 말해주리라. 하지만 너희가 그것을 구하지 않는구나”[도마복음 말씀 92].

 

예수께서 무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밝은 빛의 사람 안에 빛이 있으니 그 빛이 온 세상을 밝히느니라”[도마복음 말씀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종종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씀을 너희가 듣고 싶어 하겠지만 아무에게서도 그 말을 듣지 못할 것이니라. 너희가 나를 찾을 날이 오겠지만 너희는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니라”[도마복음 말씀 38].

 

존 도미니크 크로산[드폴대 성서학 교수]

도마복음과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복음서와의 큰 차이점이라면 전혀 조직적이지 않고 한 구절도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이죠. 학자들은 말씀의 수를 114개라고 말하지만 오로지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는 말만 되풀이되고 있고 예수 혼자 앞장서서 말을 합니다. 사건도 기적도 없고 열정이나 탄생의 이야기도 없죠. 부활도 없고, 살아있는 예수가 그저 지혜의 말씀을 할 뿐입니다.”

 

나그함마디 문서는 결국 하나도 신약의 정경에 포함되지 못했다. 학자들은 그 이유를 그노시스파가 정통 기독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아 숨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이 외경의 역사는 아직도 신비에 쌓여 있다.

 

제임스 로빈슨(클레어몬트 대학원 종교학과)

누가 이 책들을 숨겨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책들을 누가 수집했고 또 누가 콥틱어로 썼으며 누가 필경사에게 위임하고 돈을 지불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건 넣고 어떤 건 빼라는 지시를 누가 했는지도 모르죠. 사본 하나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베껴쓰라고 하실지 안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문서를 누가 그리스어에서 콥틱어로 번역했는지도 모릅니다. 쓴 사람이 누군지는 더욱 모르죠.”

 

도마복음처럼 아직도 찾아낼 책이 남아 있을까? 만약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현존하는 성서에 통합될 수 있을까?

 

Act 2. Emergence [성서 사본의 출현]

 

성서의 기원을 탐구하다보면 기원후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당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텍스트를 원본으로 해서, 종교학자인 달마티아 제롬이 성서 전권을 당시 로마 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어로 번역을 한다. 불가타 성서로 알려진 제롬의 성서는 아직 역사가 짧은 기독교의 성장이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역병을 딛고 로마는 회복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조세 제도 아래 경제가 번영하게 되었다. 330년에는 황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기독교는 제국의 동쪽으로 널리 뻗어나가게 되었다.

 

오늘날의 성서처럼 책의 형태로 만들어지기 전에는 양피지나 파피루스 두루마리 문서로 존재할 뿐이었다. 파피루스는 중동지방에서 글로 된 문서나 성서를 만드는 중요한 재료였다. 내용이 길었기 때문에 한 장 한 장 만들어 끝부분을 함께 묶었다(이것이 현대 책의 효시이다).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알레포 사본으로 시리아에 있는 고대 유대교회당 유적지에서 발견된 것이다. 760쪽 분량의 히브리어로 된 문서는 1천 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구약이 전부 담겨져 있다.

 

래리 쉬프먼(뉴욕대 히브리 유대학 교수)

이 특별한 사본에 대해선 중세의 학자 마이모니데스도 가장 권위있는 사본이라고 언급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사라졌다가 어쩌다 시리아에서 발견이 됐죠. 불에 타서 일부가 없어진 뒤에 유태계 시리아인이 갖고 나와서 지금은 이스라엘에 보관돼 있습니다.”

 

알레포 사본보다 더 오래된 것이 시나이산 사본이다. 이 사본은 시나이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동방정교회 캐더린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전통에 따르면 이 수도원은 모세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백성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 파견되기 전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대면했던 그 자리에 세워졌다고 한다. 시나이산 사본으로 알려진 이 문서는 전체가 두터운 양피지에다 한쪽 한쪽 그리스어 대문자로 쓰여졌다. 원래는 신구약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지만 구약의 몇 장은 없어지고 현재는 신약성서만 완벽하게 남아 있다. 현재는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토마스 프래티(대영박물관 고문서 큐레이터)

이것은 4세기 중엽에 쓰여졌기 때문에 각 권을 통합한 것보다도 훨씬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죠. 첫 부분인 구약성서는 1천년 정도 일찍 쓰여졌을 겁니다. 이 문서에는 저자가 누구라고 하는 얘기는 전혀 없습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성서의 생명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고 이것은 성서와 관련된 기나긴 사슬의 한 고리라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성서 사본은 수도원의 필경사에 의해서 하나 하나 수고스럽게 쓰여졌다. 수세기동안 성서는 예배당이나 교회나 수도원의 전유물로 보물처럼 남아 있었다. 15세기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면서 마침내 성서가 보통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하지만 교회의 역사는 종종 격동적이어서 현대판 성서가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단계의 발전을 거치게 된다.

 

인쇄술의 발명 후 얼마 되지 않아 마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난다. 이 개혁운동을 격려하기 위해서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게 된다. 한편 영어판 성경은 600년 전에 처음으로 나타나게 된다. 영국에서 존 위클리프와 그의 조수들이 14세기에 만들었다. 이 책은 제롬의 불가타 성경을 꼼꼼하게 번역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는 라틴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된 성경은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위클리프는 이단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의 성경은 금지가 되었고 그의 시신은 다시 파헤쳐져서 불태워졌다.

 

16세기에 와서 윌리엄 틴들은 그리스어판을 바탕으로 영어판을 번역해 낸다. 하지만 그 역시 이단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서 처형당한다. 영어판 성경의 독자들은 누구보다도 틴들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번역한 구절의 80%가 최종적으로 제임스왕의 흠정역으로 통합이 되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틴들...

 

헨리 8세 치하의 1533, 영국은 로마 카톨릭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영국 성공회를 탄생시킨다. 왕은 공식적인 영역판 성서를 만들도록 지시하였고, 1539년에 Great Bible이 등장하게 되었다. 가로 22cm, 세로 37.5cm의 성서가 대량으로 인쇄되어 영국에 배포된다. 그로부터 20년 뒤,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제네바 바이블이 출판되었다. 이것은 구절에 번호를 붙인 최초의 성서이다. 이것은 또한 세익스피어의 성서이기도 하고 대서양을 건너간 청교도의 성서이기도 했다. 1604년 제임스 1세는 고대 히브리와 그리스어판 성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성서를 제작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것이 제임스 왕의 흠정역 성서이다.

 

Act 3. Mystical Text [신비로운 텍스트]

 

성서의 저자를 찾는 여정에서 아직도 많은 신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성서는 전체가 하나님이 쓰신 것으로 믿는 사람이 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히브리어는 3천 년 전, 고대 가나안어와 페니키아어에서 발전되어 나왔다고 알려진다.

 

데이비드 울프(유대교 대학 교수)

유대교로 돌아가면 히브리어는 성스런 언어라는 믿음이 있죠. 이슬람교와는 달리 기독교에 성스런 언어가 없다면, 기독교인들로서는 이상하다고 여기게 되죠. 회교도들이 코란과 똑같이 코란의 언어를 소중히 여기듯이 유대인도 히브리 성서를 소중하게 여겼으니까요. 그래서 히브리어도 성스런 언어가 됨으로써 궁극적인 의미가 부여되고 한 자 한 자가 많은 뜻을 지니게 된 겁니다.”

 

정통적인 신앙인들은 언어에 신성의 진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오경을 쓸 때 사용된 언어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초자연적으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신성하다는 말이다. 모세오경에는 정확하게 613개의 계율, 혹은 율법이라는 말씀이 있다. 그중 248개는 안식일을 지켜야할 의무와 같은 긍정적인 율법이고, 365개는 부정적인 규례이다. 상징적으로 토라에는 248개의 칼럼이 있고, 1년은 365일이어서 모세오경은 더욱 의미가 풍부해 진다. 새로운 토라를 쓸 때, 이것을 세세하게 지키면서 써야 한다.

 

에릭 레이(히브리 성서 필경사)

모세가 썼던 그대로 써야 합니다. 히브리어로 모세가 썼던 방식대로요. 글자수도 똑같이 맞춰야만 칼럼의 수가 맞게 되고 1365일과 맞아 떨어져서 토라에 나오는 613개의 계명이 모두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248칼럼에 365일이 되고 두가지를 합하면 613이 돼서 토라에 나오는 계명의 숫자와 똑같아집니다.”

 

유대교의 오래된 신비 중에 토라에는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깊은 미스터리가 있다. 텍스트의 구조가 인간 속에 있는 신성을 상징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토라의 248개의 칼럼은 인체의 248개의 뼈의 숫자와 같고, 365개는 인체의 신경과 혈관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울프(유대교 대학 교수)

토라의 전문이 기나긴 하나님의 이름자 하나라는 믿음도 있습니다. 이 믿음은 사해문서와 같은 고대의 토라를 보면 더욱 신통하게 맞아요. 처음에는 문단이나 구절, 심지어는 단어 사이도 떼지 않고 달아 썼죠.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긴 단어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려고 문단과 절로 나눠 띄어 쓴 거죠. 하지만 전문을 붙여놓고 보면 기나긴 하나님의 이름 하나라는 것입니다.”

 

랍비 조나단 오마르만(유대교 지혜 선교센터 소장)

유대 신비주의자가 성서를 볼 땐 같은 이야기라도 평범한 독자들이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봅니다. 작은 기호나 언어사용법과 글자를 쓴 방식도 따져봅니다. 뒤에 숨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죠. 그래서 이상한 구절이나 특이하게 쓰인 글자를 찾아냅니다. 때로는 글자 모양도 어떤 의미를 암시하는 실마리가 되죠. 그렇게 함으로써 놀랍고도 풍부한 의미를 밝혀내게 됩니다.”

 

신비주의자들은 히브리어가 하나님이 손수 만들어내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그 글자를 열심히 연구해서 이해를 한다면 인간의 정신을 드높이는데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필립 베르그(카발라 센터 소장)

글자 하나 하나, 그 모양이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구체적인 에너지 차원과 통하는 하나의 통로입니다. 의식은 하나님의 생명력이죠. 이 히브리어 글자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유익한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계시가 무엇인가를 탐구해보면 혼란과 고통이 없는 미래를 만들어내는 도구를 얻게 되겠죠. 만약 인간이 이 문자 배열과 그 모습을 이해하게 된다면 개개인의 능력에 의해서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도 있을 겁니다.“

 

데이비드 울프(유대교 대학 교수)

성서를 읽다보면 랍비들이 전혀 다른 해석을 한 경우도 있어요. 하나님은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고 상징적으로 말하기 때문이죠. 그 본문 중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글자 한 자 한 자 기호 하나 하나에 수많은 다른 의미가 숨어 있을 겁니다.”

 

히브리어에는 숫자가 없다. 숫자 대신 글자를 사용한다. 그래서 알파벳의 한 자 한 자는 수의 값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

 

 

데이비드 울프(유대교 대학 교수)

첫 글자인 알레프는 1이고 다섯 번째 글자는 5입니다. 100번째 글자 쿠프는 100, 그래서 한 단어를 읽을 때는 숫자까지도 읽게 됩니다. 유대교에 게마트리아라고 하는 학습법이 있는데요, 어떤 단어들의 수를 합해서 다른 단어의 수와 상응하는지를 보는 거죠. 그걸 하다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심오한 의미를 찾게 됩니다.”

 

필립 베르그(카발라 센터 소장)

이 글자들은 결국 숫자들인데요 이것을 합하면 특정한 수가 되죠. 또 다른 이름들을 합하면 다른 이름과 숫자가 됩니다. 이것이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음을 알려주죠.”

 

예를 들어 하나님이라는 낱말과 자연이라는 낱말의 숫자의 값은 똑같다. 이것은 두 단어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다. 사랑이라는 단어와 하나라는 단어의 숫자의 값도 똑같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숫자에다 의미를 부여하는 수비학은 언어의 기원과 고대 언어 사용법을 지나치게 신비화시키는 것이다. 이 수비학은 과학자들을 상당히 매료시켰다. 그들은 컴퓨터를 통해 글자의 형태와 반복을 조사함하였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2차 대전이나 대학살, 그리고 심지어는 현대판 역병인 에이즈의 발생 등을 예언하는 구절을 찾아냈다고 주장한다.

 

성서의 첫 장을 누가 썼는가에 대한 미스터리는 완전히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신비주의 방법과 과학적인 평가방법 두 가지를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울프(유대교 대학 교수)

유대 신비주의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장은 토라가 심리학이라는 것이죠. 비록 하나님의 심리학이란 말은 쓰지 않았지만요. 또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야곱, 레아와 라헬 등 토라에 나오는 인물들의 드라마는 하나님이 작용, 연출하신 것이죠. 그래서 성서를 읽을 때는 세 가지 측면에서 읽게 됩니다. 첫째는 역사로서, 둘째는 인간의 영적인 지침으로서, 셋째는 창조주의 성격에 대한 통찰이라는 깊은 측면에서죠.”

 

래리 쉬프먼(뉴욕대 히브리 유대학 교수)

히브리 성서 내용의 25%는 의미해석에 논란이 있습니다. 성서가 구성되던 전체적인 환경을 모두 아라 수는 없죠. 또 성서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도 없을 겁니다. 성서는 아마도 인류의 영원한 미스터리겠죠. 그렇기 때문에 성서가 그만큼 성공적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알 수 없는 부분 때문에 영원히 연구해야 하니까요. 성서에 대해 알면 알수록 풀어야 할 신비도 더 많다는 걸 알게 됩니다.”

 

성서를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풀 수 없는 의문점들로 가득한 상황이다. 어쩌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은 처음부터 알려지지 않게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Act 4. Living Words [살아있는 말씀]

 

성서의 본문에서 계속 가치있는 교훈을 끌어내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누가 성서를 썼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왜 계속 성서를 읽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데이비드 바아(라이트 스테이트 대학 종교학과)

성서는 지금 있는 그대로 매우 유익한 이야깁니다. 현대 세계에서도 성서는 분명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매우 강력한 책으로 서구인의 상상력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죠. 역사도 성서에 대한 인식을 통해 어떤 지향점을 갖고 나아가며 성서와 함께 발전하고 있다는 이 모든 생각들이 성서적인 전통에서 솟아나는 거죠. 성서에서 솟아나는 서구의 전통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과제겠죠.”

 

데이비드 울프(유대교 대학 교수)

성서를 누가 썼든 그것을 계속 읽는 강력한 이유는 성서의 쟁점은 영원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초기의 성서의 시대와 현대 사이에는 기술공학과 의상과 언어 등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만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죠. 우리는 여전히 다윗왕이 흘리던 똑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고, 요셉이 치렀던 것과 똑같이 형제간에 반목하고 싸웁니다. 여전히 아브라함과 사라가 갔던 미지의 여행길을 떠나고 있죠. 누가 썼든 성서를 읽으면 우리 생활이 풍요로워집니다.”

 

리처드 프리드먼(캘리포니아대 히브리 비교문학)

성서의 저자를 찾고 출처를 JP로 나누면 성서가 해체돼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고들 했었어요. 저는 그 학자들 생각이 잘못 되었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여태껏 읽은 내용은 J, E, P, D로 나눈 것이 아니라 성서 전체였으니까요. 각 부분을 밝혀내면 그 부분들에 대해 잘 알게 되죠. 만약 그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중요한 것을 잃게 됩니다. 결국 그 모두가 통합된 것이고 각 부분이 결합되어서 우리가 소중해 여기는 성서가 됐음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 스미스 크리스토퍼(로욜라 매리마운트대 히브리성서학)

이런 비판적인 학자들의 태도는 성서를 신앙의 지침서로 보는 이들에게는 좋은 선물입니다. 왜 그렇게 해석돼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해주니까요.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죠. 비판적인 연구는 우리를 성서로 돌아가게 해줍니다. 저와 같은 신앙인이 성서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비판적인 성서 연구에서 가장 필수적인 측면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시대를 통틀어 인간을 어떻게 대하며 또 하나님이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이해하고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알게 되는 것이죠.”

 

제리 폴웰(리버티대 총장)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않고도 믿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고 싶은 바램을 성서를 통해 말씀해 주시기 때문이죠. 요즘 세상엔 하나님을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로 보지 않고 베푸는 자로 생각하고 무엇을 구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건 하나님을 종교적인 슬롯머신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주셔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소중하기 때문에 우린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그분이 없으면 우린 불완전하니까요.”

 

데이비드 바아(라이트 스테이트 대학 종교학과)

성서에서 말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알기 위해 저는 성서로 돌아가곤 하는데요, 성서의 독자는 모두 그럴 겁니다. 신자들이 인생을 사는데 영적인 도움을 받을 내용이 많습니다. 성서는 그만큼 풍요로우니까요. 아프리카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요. ‘한 집에 잘난 자식이 있으면 못난 자식도 있다그 말을 바꾸어 말씀드리자면, 위대한 문학작품에도 결함과 장점이 있고 유대인은 이 책을 요긴하게 쓰고 있다는 것이죠.”

 

조셉 블렌킨소프(노트르담대 성서학 교수)

성서에는 한 가지 견해만 있진 않습니다. 서로 다른 견해도 있는데요 의문점을 갖고서 열심히 해답을 구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자신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죠. 또 하나님의 정의나 신정론에 대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식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습니다. 개인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죠. 하지만 절대로 성서를 해답서로 보지 마십시오. 자신의 문제와 고민을 깨끗이 풀수 있는 책으로 봐선 안됩니다. 성서는 단지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실마리를 줍니다. 우리는 진지한 사람들인 만큼 열심히 노력하면서 세상에서 우리를 소중한 존재로 여겨야만 합니다.”

 

데이비드 울프(유대교 대학 교수)

궁극적으로는 누가 성서를 썼느냐 하는 것보다도 성서를 읽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서가 현재 세상에서 생명력이 있느냐의 여부는 쓴 사람이 아니라 읽는 사람이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또한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뭔가를 끌어내기 위해서 성서를 온 마음과 혼을 다해 읽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세월이 변하면서 미래에는 성서도 변하고 모양도 변할 것이다. 새로운 판과 새로운 번역도 분명 나올 것이다. 인류가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는 한 성서는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적절한 표현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서는 그 자체의 힘으로 시대를 뛰어넘는 영원한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복음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