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과학적인韓國史

(4)풍수지리, 어떻게 봐야하나?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2. 11:13
풍수지리, 어떻게 봐야하나?
명당자리 중성토양의 땅과 밀접
새 장묘문화와의 접목 가능할까
풍수지리가 미신이나 잡술의 전형이라 하여 무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견지로 볼 때 이해되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억지라는 뜻이지만 풍수지리의 원래 뜻은 매우 높은 이상을 갖고 있다.

명당으로 알려진 순흥안씨 안향선생 추원각 전경.

우리 역사에서 풍수지리는 도참(圖讖)과 직결된다. 원래 ‘도(圖)’는 예언하는 그림 또는 무늬를 가리킨다. ‘참(讖)’은 예언이란 뜻의 말이다. 전설 시대 중국 황하에서 용마(龍馬)가 나오고 낙수(落水)에서는 신구(神龜)가 나와 앞으로의 새 정권 탄생을 예고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고대 중국의 황토 고원 지대에서 토굴집을 짓고 살던 사람들이 집터를 잡던 방법이 도읍이나 무덤 자리 선정 원리로 확대된 것이 풍수지리의 기원이다. 그러나 풍수지리 사상은 중국과 한국의 지리적 조건이 전혀 다르므로 중국의 풍수지리는 한국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한국의 풍수지리는 우리 땅을 배경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을 해석하려는 우리 민족의 독창적인 유산으로 이를 '자생풍수설'이라고 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풍수지리를 국시(國是)로 삼았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새로운 서울을 한양에 건설할 때 풍수지리에 집착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통치가 궤도에 오르고 점점 안정을 취해가자 국가적인 일에 풍수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개인의 풍수설인 음택풍수로 중심이 옮겨간다. 음택이란 무덤 자리를 가리킨다.
명당도(온양민속박물관 소장)

개인 풍수지리가 특히 조선시대에 성행하게 되는 것은 사회구조에 따른 장례법에도 기인한다. 태조가 이조를 개국하고 유교를 국시의 이념으로 삼으면서 당면 과제 중 하나로 떠오른 것이 고려시대의 불교식 화장법(다비법) 금지였다.
화장은 이미 고려 공양왕 원년(1389)부터 그 금지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 헌사(憲司)는 화장은 오랑캐가 아버지가 없는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하는 것이라며 다비법이 매우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건의는 곧바로 채택되어 다음해에 대부 사 서인의 사당 설치와 제사를 ‘주자가례’에 의해 시행하도록 하는 법령이 제정되고 동 왕 3년에는 대명률에 따른 상복제를 시행하되 3년 상을 상례라고 밝혔다.

조선 초기에는 '전왕조의 폐단', '음란한 제사' 또는 '귀신에 아첨하고 섬기는 것'으로 규정하여 화장을 적극적으로 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백성들이 고려에서 전래된 불교식 화장법을 선호하자 성종 5년(1474)에는 부모의 화장을 엄히 다스리도록 했다. 특히 화장을 몰래 한 위반자를 검거하지 못한 관리는 물론 이웃까지도 논죄하도록 했다.
음택풍수에서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발복이다. 발복(發福)은 명혈에서 주는 운을 말하며, 음복이라고도 하는데 명혈에 조상을 모시면 운이 트여서 음복(陰福)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땅 속에 돌아다니는 생기를 사람이 접함으로써 복을 얻고 화를 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발복의 논리는 사람의 몸에 혈관이 있고 이 길을 따라 영양분과 산소가 운반되는 것처럼 땅에도 생기가 도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땅의 생기 위에서 살아가며 그 기운을 얻지만 죽은 자는 땅 속에서 직접 생기를 받아들인다. 죽은 자가 땅으로부터 얻은 생기가 후손에게 그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 이를 ‘동기감응(同氣感應)’ 또는 ‘친자감응(親子感應)’이라고 한다. 부모와 자식간에 감응이 생겨 생기의 효과가 자손에게 전해진다는 믿음이다.


■ 풍수지리는 위선사(爲先事)
원래의 풍수지리는 아무쪼록 유골만이라도 오랜 동안 남아 있게 만드는 것이 부모의 은혜로움에 보답하는 효도의 일환이라는 위선사(爲先事)이다. 자신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부모, 조부모 등 선조가 있었기 때문인데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물질적이나 정신적으로 효도를 다 할 수 있지만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효도를 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부모의 뼈라도 오래 보존된다면 자신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밀접한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고 믿어 부모의 시신이 오래 보존될 수 있는 곳을 찾았으며 그런 장소를 명당이라고 부른 것이다.

묘를 파보면 매장한 지 몇 년 안 되었는데도 검게 썩어버리거나 부패되지 않은 채 그대로 묘 속에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명혈의 백골은 3백 년에서 천 년이 간다고 한다. 고서에 의하면 명혈 속에서 백골이 융화(融化)되는 가운데 ‘황골로 변하여 싱싱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풍수가들은 뼈의 색깔에 따라 자골, 황골, 흑골(黑骨), 회골(灰骨) 순으로 묘 자리의 좋고 나쁨을 구별한다.
간혹 백골이 황색의 흙 속에 묻혀 있으므로 흙 색깔에 물이 들어서 황색이 되었다는 말도 있으나 풍수가들은 이를 부정한다. 땅에서 정기를 받아야 자골이나 황골로 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집드인들은 '죽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70일간의 정교한 제조법을 이용해 미라를 만든다.

풍수가들이 화장을 반대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화장을 하면 인체 내의 모든 ‘기(氣) 송신 장치’가 다 타버리므로 조상의 음덕이 자손에게 전달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화장을 할 경우 인체의 모든 조직 원소가 타버리기 때문에 조상과 후손 사이에 감응을 일으킬 수 있는 매개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부모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일체의 나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좋거나 나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풍수지리가 갖고 있는 원래의 취지에서 매우 변형된 것이다. 음택을 명당에 모시는 본래의 뜻은 사망한 사람이 후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거나 후손이 사망한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선조를 받들어 모시는 과정에서 좋은 묘자리를 선정하는 것이 도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명당에 시신을 모시면 뼈를 오랜 동안 보존할 수 있다는 우리의 풍수지리는 이집트의 미라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둘 다 죽은 자를 잘 모시고자 한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이집트의 미라는 사자가 영원한 삶을 누린다고 믿어 영혼이 돌아올 수 있도록 시신을 약품으로 처리하여 시신을 오랜 동안 보존될 수 있도록 했다. 반면에 한국은 이집트와 같이 인공적으로 시신을 처리하는 적극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환생의 목적이 아니라 선조와의 정신적인 접촉, 즉 위선사로서 육신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手肢父母)라는 유교 사상에 젖어 있는 조선시대에 시신을 훼손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도 용납될 수 없었으므로 시신이 적어도 5백년에서 1천 년 정도 갈 수 있는 장소를 찾은 것이다.

■ 명당은 중성토양 찾기
풍수가들의 기존 설명을 토대로 보면, 땅 속에 흐르고 있는 땅 기운의 왕성함과 쇠퇴함에 따라 후손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는 것을 풀이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언덕에 서 있을 때 이미 땅의 기운이 다한 곳에 서 있으면 그 화를 당하게 되나 지기가 왕성한 곳에서는 무너지지 않아 화를 입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땅이 무너지는 것은 지기가 아니라 지각이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묘택의 경우도 지각의 변동에 따라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가능한 지각 변동이 없는 묘택을 선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발복이라는 개념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시신이 원래의 위치에서 이동하거나 변한다면 그 묘택이 좋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산소가 변하여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면 어떤 자손이든 마음이 편할 수 없다.
대체로 짐승이 살기 꺼려하는 땅은 인간에게도 좋은 땅은 아니다. 고양이가 살기 싫어하는 집은 특히 좋은 집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고양이는 습기를 싫어하는 짐승이므로 고양이가 도망가는 집의 땅 속에는 지하수의 맥이 흐르고 있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쥐나 개미가 파고 다닌 땅도 좋은 땅이 아니다. 이것도 땅 속에 수맥이 지나가고 있다는 뜻으로 개미나 쥐는 땅 속에 살 때 어느 정도 습기가 있는 곳에 집을 짓기 때문이다. 습기가 많은 땅이 인간이 살기에 여러 가지 면에서 불리하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풍수가들은 명당이란 ‘혈(穴)속에 흐르는 기의 흐름으로 인해 피와 살은 될수록 빨리 썩어 없어지고 뼈는 노르스름한 기운을 띤 채 그대로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지관들은 명당자리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달걀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보통 땅에 달걀을 파뭍으면 곧바로 썩지만 명당자리에서는 몇 달이 지나도 생생하게 보존된다는 것이다.

한 실험에서 명당의 혈처 지점과 보통의 땅에 달걀을 묻어놓고 76일만에 꺼내보니 혈처에 묻은 달걀은 전혀 부패하지 않은 채 처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보통의 땅에 묻은 달걀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당시 두 땅의 흙을 ‘농업과학기술원’에서 분석했는데 두 흙 모두 화강암 잔적층이라는 점은 동일했지만 일반 흙의 PH는 4.88이었고, 명당의 흙은 6.90이었다. 이것은 일반 흙은 산성이고 명당의 흙은 중성의 성질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북한에서 발견된 단군의 뼈가 5천 년이나 지났음에도 온전할 수 있는 이유로 뼈가 부식되지 않고 잘 보존될 수 있는 전형적인 중성 토양이었기 때문이라고 발표된 것과 일맥상통한다. 명당을 찾는다는 것은 중성의 토양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명당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 땅'이라는 개념도 같은 맥락이다. 땅 속에 있는 시신이 온도의 차이에 따라 자주 얼고 해동된다면 곧바로 화학작용을 일으켜 부식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 이를 가능한 피하고자 했던 것이 명당 찾기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요즈음 심각한 묘지난 때문에 화장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이런 화장 풍습은 선조의 시신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모시려는 전통적인 풍수지리 사상과 다소 배리되는 것은 사실이다. 선조의 시신이 없는 풍수지리가 과연 현대의 변화된 사상과 어떻게 접목될지 궁금하다. 2004/1/12 이종호(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