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제일 먼저 온실 개발 | |||||||||||||||||||||||||||||||||||||||||||||
세계최초라는 독일 것보다 170여년 앞서 | |||||||||||||||||||||||||||||||||||||||||||||
15세기 '산가요록'기술....2002년 온실복원 | |||||||||||||||||||||||||||||||||||||||||||||
우리 민족은 쌀 위주의 식생활에 채소를 즐겨 먹었다. 그러나 삼한사온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기후는 계절 변화가 뚜렷하여 겨울에는 채소 생산이 불가능하다. 겨울철에도 채소를 먹기 위해서는 새로운 영농기법이 필요한데 바로 겨울철에도 채소가 자랄 수 있는 온실을 만드는 것이다.
놀랍게도 우리나라는 겨울철에 신선한 야채를 먹을 수 있는 온실 건설에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조선초 세종-세조년간의 의관인 전순의(全循義)가 세종 때인 1450년대에 편찬한 ‘산가요록(山家要錄)’이라는 옛 농서(農書)가 2001년 10월에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8cmx26cm 크기의 한문 묵서로 된 이 책은 앞뒤부분이 심하게 손상돼 있지만 책의 끝부분에 '산가요록 마침'이라는 기록이 있고 전순의찬 최유준초라고 적혀있어 전순의가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전순의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여겨진다. 그는 궁중에서 음식을 담당하는 의사인 식의에서 출발했음에도 세조 정난 때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좌익원종공신으로까지 봉해지는 등 큰 출세를 한다. 그는 의관 노중례와 함께 한의학의 3대 저술 중에 하나인 『의방유취』를 공동 편찬했으며 '식료찬요'의 저자이기도 하다. 당시로선 가장 권위 있는 의사며 식품학자였다. 농업분야의 내용은 고려 공민왕대의 '농상집요'와 상당부분 일치한다. 고려판 '농상집요'는 1273년 중국 원나라의 사농사에서 간행된 것을 그대로 고려에서 찍어낸 것이지만 '산가요록'은 '농상집요' 가운데 중국에만 있는 채소나 과일, 동물 기르는 방법이 삭제돼 있다. 대신 '농상집요'에는 없는 양잠 부분이 포함돼 있어 우리 실정에 맞게 재 편찬한 것이다. 술제조법 63가지등 조리법 200여개 수록 조리 부분에는 200여 가지의 조리법과 27가지 채소 과일 생선 육류의 보관법이 기록돼 있다. 그동안 조리서로는 16세기초 중종대에 간행된 '수운잡방'이나 17세기 중반 장씨부인이 한글로 남긴 '음식지미방'이 전해졌는데 '산가요록'에는 술 제조방법만 63가지에 이르는 등 내용이 풍부하여 15세기에 편찬된 조리서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특히 김치도 배추김치, 금방 먹는 김치, 송이김치, 생강김치, 동아김치, 토란김치, 동침, 나박김치 등 38가지를 기록하여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생선, 양, 돼지껍질, 도라지, 죽순, 꿩, 원미를 재료로 한 식해도 일곱 종류나 나와 있다는 점이 특이한데 한복려는 '동물성 식품을 삭힌 식해법이 이른 시기부터 나왔다'는 증거가 된다고 밝혔다. 오늘날 대통령 주치의에 해당하는 의관이 음식에 해박한 이유로 그가 원래 식의(食醫)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겨울철 채소재배하는 요령 구체적 기록 그러나 ‘산가요록(山家要錄)’의 중요성은 온실을 만들어 겨울철에 신선한 채소를 생산했다는 소위 동절양채(冬節養菜)의 요령이 구체적으로 적혀있다는 점이다. 겨울철에도 채소가 자랄 수 있는 온실을 만드는 것인데 산가요록(山家要錄)』에 적힌 동절양채(冬節養菜)에 대한 원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造家大小任意三面築蔽塗紙油之南面皆作箭 窓塗紙油之造突勿令煙生突上積土一尺半許 春菜皆可載植於夕令溫勿使入風氣天極寒則 厚編飛令掩窓日瑗時則撤去日日酒水如露房 內常令溫和有潤氣勿令土白乾又云作(光)於築 外掛釜於壁內朝夕使釜中水氣薰扁房內 제일 먼저 임의의 크기로 온실을 짓되, 삼면을 막고(蔽) 종이를 발라 기름칠을 한다(塗紙油之). 남쪽면도 살창을 달고 종이를 발라 기름칠을 한다. 구들을 놓되 연기가 나지 않게 잘 처리하고 온돌 위에 한자 반 높이의 흙을 쌓고 봄채소를 심는다. 건조한 저녁에는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하되, 날씨가 아주 추우면 반드시 두꺼운 날개(飛介: 오늘날의 멍석과 같은 농사용 도구)를 덮어 주고 날씨가 풀리면 즉시 철거한다. 날마다 물을 뿌려주어 방안에 항상 이슬이 맺혀 흙이 마르지 않게 한다. 담밖에 솥을 걸고 둥글고 긴 통을 만들어 그 솥과 연결시켜 저녁으로 불을 때서 솥의 수증기로 방을 훈훈하게 해 주어야 한다.'
이 기록을 통해 겨울철에 꽃과 채소를 재배하여 궁중에 진상했다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기록들에 대한 의문점이 모두 해소되었으며 온실의 모형도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왕조실록에도 겨울에 꽃 길러 진상한 기록 특히 ‘산가요록(山家要錄)’에 의해 15세기에 한국에서 건설된 온실의 기록은 이제까지 세계 최초로 알려졌던 1619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극히 초보적인 온실보다 연대순에서 무려 170년이나 앞선다. 훈민정음 금속활자 측우기는 물론 비거(飛車)와 신기전과 같은 로켓 등을 만들어 세계인을 감탄하게 만든 민족의 지혜가 농업분야에도 펼쳐졌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세계최초의 온실을 우리들의 조상이 건설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전문가들은 철저한 고증을 거친 후 정부의 후원 하에 2002년 2월 22일 경기도 남양주시 서울종합촬영소에 세계최초의 과학영농 온실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복원된 온실은 실내 넓이가 약8평이며 정남향의 가장 낮은 쪽이 50센티미터, 정북향의 가장 높은 쪽이 3미터인 경사형 지붕으로 햇볕이 최대한 들어올 수 있다. 지붕은 기름을 칠한 한지를 바른 창호로 덮여 있지만 햇볕 투과율이 45%를 넘으므로 일조량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한지로 만든 신발은 물 속에서도 다닐 만큼 튼튼하므로 창호가 빗물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눈오는 날이나 밤의 보온을 위해 짚으로 만든 차양막이 창호를 보호하도록 설치됐다. 60여 톤의 황토 흙으로 만들어진 온실 벽은 40센티미터 두께이며, 내벽에는 역시 기름을 바른 한지로 도배해 햇볕이 실내에 골고루 반사되게 만들었다. 온실바닥에 온돌깔고 불 때어 보온 또 온실 바닥은 온돌을 먼저 깔고 그 위에 45센티미터 두께의 흙을 쌓았다. 온실 외벽에 설치한 2개의 아궁이로 불을 때어 온돌을 덮이며 아궁이 위에 놓인 솥에 물을 계속 부어 솥과 연결된 둥근 통을 통해 수증기가 안으로 들어가 실내온도가 15도 이상 유지되도록 했다. 복원된 온실의 또 다른 특징은 현재 사용되는 철물을 비롯한 건축자재들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고대에 사용된 건축 방식대로 시공했다는 점이다. .
온실이 완성된 후 2002년 3월, 온실의 온도와 습도를 조사했다. 온실 부위별 온도의 변화를 06시, 13시, 18시, 22시 등 4회에 걸쳐 측정한 결과, 온돌 위 베드의 지중온도는 섭씨 20도 이상이 유지되는 지속적 보온 효과를 보였고 실내 온도도 섭씨 10도 이상으로 유지되었다. 이는 실외의 기온보다 평균 10도 이상 높은 온도이다. 특히 온실 밖의 외기온도와 온실 내 지중온도의 편차가 야간에는 25도 이상이나 되어 온실 효과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밤엔 외기 온도보다 25도나 높아 식물 재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습도의 경우 한낮에 해당하는 13시에는 40퍼센트 정도였지만 나머지 시간대에는 생장온도에 적합한 70퍼센트가 유지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겨울에 잔방을 하면 실내 습도가 30퍼센트 이하까지 내려가므로 실내 습도를 올려 줄 필요가 있다. 상대습도가 낮으면 식물이 손실된 수분을 보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증발시켜 시들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식물 생장은 일반적으로 상대습도 50∼80퍼센트에서 일어난다. 우리 선조들도 이런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온돌을 설치하면 실내공기가 따뜻해지는 효과는 있으나 습도가 너무 낮아지는 결점이 생긴다.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온실 뒤에 가마솥을 걸고 수증기를 공급해 습도를 조절하도록 한 것이다. 기름먹인 창호지를 사용하여 온실의 효과를 실험한 결과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일반적으로 온실의 경우 외기온도와 온실내부 온도 차이 때문에 채광 부분에 결로 현상이 생긴다. 결로 현상은 작물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특히 결로 된 이슬이 식물에 떨어지면 차가운 온도 때문에 상처가 생기므로 병원균이 침투하는 등 식물생장에 악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근래에는 온실에 결로가 생기지 않도록 결로방지 페인트를 칠하기도 한다. 복원된 온실의 경우에는 창호 부분에 결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산가요록’에 기록된 온실이 세계 최초의 과학영농 온실로 부각될 수 있는 이유는 온실이 갖추어야 할 3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한국의 특징적 난방 방법인 온돌을 사용해 겨울철 난방을 도모했고, 둘째는 한지에 기름을 발라 채광을 통해 실내온도를 높이고 습도를 조절을 가능하게 했다. 창호지는 3대 특성인 통기성, 습도조설, 채광성을 갖고 있어 ‘살아있는 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창호지만으로 습도를 조절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가마솥을 걸고 물을 끓여 수증기를 실내로 유입해 온도와 습도를 동시에 올려주는 복합적인 온실이 되도록 한 것이다. 2004/1/6 이종호(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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