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신드롬의 시발점은 바로 광개토왕 | ||||||||||||||||||||||||||||||||||||||||||||||||||||||||||||
큰아버지 소수림왕(재위 371∼384), 아버지 고국양왕(재위 384∼391)의 뒤를 이어 18세에 왕위에 오른 이가 바로 광개토태왕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중국 쪽 기록에는 안(安)으로 전한다. 광개토태왕은 영락(榮樂)이라는 연호를 썼으므로 재위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다. 연호는 국가적 독립관과 민족적 자각을 의미하는 것으로 영락 연호의 사용은 이런 맥락에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은 즉위 초부터 정력적으로 정복사업을 벌였다. 제일 먼저 백제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해 392년에는 4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석현성,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394년에 백제가 빼앗긴 땅을 찾기 위해 공격해왔으나 수곡성에서, 395년에는 패수에서 백제를 격퇴하고 395년에는 한강 너머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을 공파(攻破)했다. 백제의 아신왕에게서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아내었고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을 인질로 잡았다. 그러나 백제가 이에 굴복하지 않고 399년 왜(倭)를 내세워 고구려와 연합하고 있던 신라를 공격하자 대왕은 곧바로 5만 병력을 파견하여 이들을 신라에서 몰아냄은 물론 가야지역까지 추격했고, 대방 고지에 침입한 왜구도 전멸시켰다(광개토태왕비에는 407년의 상황을 전하는 부분이 마멸되어 있어 이를 후연(後燕)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으나 대부분 백제로 추정함). 그러나 대왕이 역점을 두었던 정복사업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점령하는 '북벌'이었다. 먼저 시라무렌 강 방면의 거란족 정벌을 시작으로 숙신을 공략했으며, 요하 건너 멀리 평주(平州)의 중심지인 숙군성을 공격, 후연을 완전히 퇴치시켜 요하 동쪽을 차지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서쪽으로 요하, 남으로는 왜倭) 백제를 정복했고 북으로는 개원, 동으로는 옥저와 예까지 차지하여 고구려 역사상 가장 광대한 국토를 갖게 되었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광개토태왕과 장수왕(413∼491) 시대에 옛날 고조선의 영토를 거의 전부 되찾았다고 추정한다. 광개토태왕에 대한 업적은 아들 장수왕(413∼491)이 414년에 세운 유명한 광개토태왕비라 불리는 사면석비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높이 약 6.39미터, 너비 1.35∼2미터로 당시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 국강상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워졌는데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세 글자를 본떠 일명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그동안 광개토태왕의 능이 어디에 있느냐가 학계의 가장 큰 관심 중에 하나였다. 중국 집안에 있는 두 개의 거대한 무덤 중에서 하나가 광개토태왕릉이 분명하지만 어느 릉이 진짜 광개토태왕릉인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비 서남쪽 1킬로미터 지점(길림성 집안현 통구의 용산)에 장군총(將軍塚)이라는 거대한 무덤이 있다. 일명 우산하 1호분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의 대표적인 기단식 돌무지무덤(基壇式赤石 : 냇돌, 막돌 또는 다듬은 돌을 쌓아 만든 무덤)으로 7층 높이에 피라미드 형태를 갖고 있다.
장군총은 화강암을 장대석(장방형 입방체)으로 잘라 잘 다듬은 후 축조했는데 무덤에 사용한 숫자는 모두 1100개에 달한다. 돌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작아진다. 제1층 평면은 정방형으로 각 변의 길이가 34미터, 높이가 13미터이다. 대략 길이 2미터, 두께 1미터의 돌이 사용되었으며 가장 큰 돌은 길이 5.7미터, 너비 1.12미터, 두께 1.1미터이다. 무덤의 외부 용적은 7600세제곱미터이며 중량은 약 2만 1000톤이나 된다. 무덤 네 변에는 거대한 돌을 3개씩 기대어 세워 놓았는데 북쪽 맨 왼쪽 하나가 깨져 지금은 열한 개만 서있다. 이 돌들은 커다란 능의 밑 기단 돌이 밀려나지 않게 하기 위해 놓은 받침돌(護石)이라는 설과 12지를 나타내는 수호신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장군총이 1500년의 세월을 끄떡없이 버티고 있는데에는 고구려의 특별한 축조기술 때문이다. 우선 튼튼한 기초 공사를 했다. 최근에 발굴한 바에 의하면 장군총 주위의 지면을 깊이 5미터 가량 파고 그 안에 길이 2미터, 너비 1미터 정도의 자연석을 깔고 그 사이를 다시 강돌로 다져 넣어 엄청난 릉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만들었다.
둘째는 고구려의 유명한 그랭이 공법이 사용되었다. 그랭이 공법이란 자연석의 굴곡된 부분을 그대로 살린 채 가공하여 위에 얹는 돌을 자연석의 형태대로 깎아 완벽하게 접합시키는 공법이다. 고구려에서 시작된 이 공법은 불국사의 축대, 각 사찰의 기둥과 주춧돌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일본의 정창원을 비롯하여 수많은 신사 건물에서도 사용한다. 세 번째 역시 유명한 퇴물려쌓기(들여쌓기)와 홈파기이다.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들여쌓고 밑돌은 가장자리가 조금 올라오도록 홈을 파고 그 홈에 맞추어 윗돌을 맞물리게 놓아 상부에서 압력이 가해져도 밀려나지 않도록 했다. 정상부는 석회와 자갈을 섞어서 돔형으로 둥글게 마무리했고 갓돌에는 구멍들이 남아 있어 원래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매장 부분은 제3층 상면을 바닥으로 하여 정방형의 현실과 남쪽으로 길게 통로가 연결된 석실로 되어 있다. 석실의 각 벽은 2개의 장대석을 아래위가 엇갈리게 쌓아 올렸다. 현실 입구는 문짝을 달 수 있도록 돌출시켰고 현재는 개방되어 있지만 본래 제4층의 벽 속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폐쇄되도록 하였다. 장군총에서 특이한 것은 동북쪽에 고인돌과 비슷한 딸린무덤(陪 )이다. 원래 장군총에는 5기의 딸린 무덤이 있었는데 지금은 1기밖에 남지 않았다. 현존하는 1기의 딸린무덤도 도굴당하고 파괴되어 지금은 밑부분 일곱 계단만 남아있다. 밑변 길이 9.2미터, 계단 높이 1.9미터로 딸린무덤의 주인은 왕의 첩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딸린무덤도 장군총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축조방법이 똑같다. 광개토태왕비에서 동북으로 5백 미터 거리에 역시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일명 태왕릉으로 불리는 또 다른 무덤이 있다. 묘 자체는 거의 붕괴되어 기단과 반파된 제2방단(第二方壇)의 일부만 남아 있다. 기단 각 변의 길이는 약 66미터이고 5개의 입석(立石)을 세웠는데 큰 석재 7매를 쌓아 축조했으며 기단 위로 올라가면서 석대의 높이를 줄였다. 방단 내부는 막돌과 강돌로 채웠는데 평면 면적을 감안하면 장군총의 4배에 달한다. 구조는 현실 서벽 중앙에 달린 연도와 평면이 방형에 가까운 현실(동서 2.82미터, 남북 3.16미터)로 이루어졌고 천장 가구는 전벽, 후벽의 위에 3단으로 괴었고 그 위에 뚜껑돌로 동서 지름 4.55미터, 두께 0.8미터나 되는 큰 화강암 판석을 덮었다. 지면에서 현실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16미터이다. 묘의 정상부에서 고구려 기와 파편 전돌, 특히 '원태왕릉안여산고여구(願太王陵安如山固如丘)'라는 명문전(名文塼)이 발견되었고 초석이 있는 건물지가 확인되어 제사를 지내던 작은 사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태왕릉은 광개토태왕릉 장군총은 1905년 일본인 도리이가 처음으로 현지 조사하고 프랑스 학자 샤반 등이 현지 조사했는데 그들은 태왕릉을 광개토태왕릉으로 보았다. 반면 일본인 세키노는 광개토태왕비를 근거로 장군총을 광개토태왕릉으로 추정했고 미카미는 축조기술이 태왕릉보다 발달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장군총을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왕릉으로 추정했다. 또 이케우치는 태왕릉을 광개토태왕릉으로, 장군총을 고구려 10대왕인 산상왕릉으로 추정했다. 태왕릉을 광개토태왕릉으로 추정한 근거는 '원태왕릉안여산고여구(願太王陵安如山固如丘)'라는 명문전(名文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은 일명 '호태왕' 또는 '영락대왕'으로 불렸으며 고구려의 왕들 가운데 '태왕'이라는 명칭이 들어 있는 호를 가진 왕은 고국원왕(16대), 고국양왕(18대), 광개토태왕(19대) 등 세 명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 중 한 명이 주인공일 것으로 추정한다면 광개토태왕이 가장 유력하다는 주장이지만 광개토태왕이 고구려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감안하여 섯불리 광개토태왕릉으로 확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중국이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일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태왕릉과 장군총 부근에서 3곳의 대형 제단터를 발견했는데 태왕릉 동쪽에 있는 제단은 길이 60미터, 폭 4∼5미터의 돌밭으로 큰 돌로 가장자리를 쌓고 굵은 강돌로 안을 채웠다. 제단들은 왕릉 정상부의 사당인 향향(享堂)이 아닌 무덤 동쪽에서 제사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특히 묘실 입구가 있는 서쪽이 정면인 중국의 묘제와는 달리 동쪽을 정면으로 한 고구려 특유의 묘역 구조임을 다시금 확인해 주었다. 학자들은 이들 제단과 청동방울의 발견으로 비로소 태왕릉이 광개토태왕릉이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더구나 방울의 발견은 그 동안 한일 간에 커다란 논쟁이 되었던 광개토태왕비의 ‘신묘년조’ 부분의 해석에서 일본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반박하는 증거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본은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는 ‘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라이위신민(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이란 글을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국내 학계에선 이 문구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파(破)’자까지 문장을 끊어 ‘(고구려)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로 해석했다. 그러나 우석대학교의 조법종 교수는 ‘신묘년’을 기념하는 방울을 부장품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서기 391년에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음을 시사하며, 광개토태왕비의 '신묘년조' 문장의 주어를 고구려라고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 장군총의 주인은 아직도 미정 태왕릉이 광개토태왕릉으로 확정됨에 따라 장군총이 장수왕릉으로 굳어져 그동안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감이 있다. 그런데 근래에 중국학자들 중에서 장군총의 주인은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매우 색다른 가설을 내 놓았다. 장군총이 장수왕에 의해 건설되었기는 하지만 장수왕의 무덤은 아니라는 것이다. 장군총이 태왕릉에 비해 후대에 건설된 것은 사실이지만 장수왕이 427년에 고구려의 수도를 집안의 국내성에서 평양의 평양성으로 천도했기 때문이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한 후 무려 65년(491년 사망)이나 더 살았고 주로 평양에 근거지를 두고 활발한 정복사업을 펼쳤다. 그러므로 장수왕이 사망하자 시신을 옛 수도인 집안으로 옮겨 장례를 지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측 학자들은 두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선 집안에 있는 장군총은 장수왕이 자신의 무덤으로 사용하려고 축조하였는데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했기 때문에 장수왕의 가묘로 남았고 장수왕의 실제 묘는 고구려의 시조묘로 알려 진 '동명성왕릉'이라는 것이다. 평양에 있는 동명성왕릉이 장수왕이라는 가설에 대해 학자들간에 완전한 합의가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우선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릉을 평양으로 천장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을 그 논거로 든다. 아시아 동북지방에서 강성한 위력을 자랑하던 고구려의 지배자가 시조묘를 천장한 내용조차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지만 수도를 옮기기 이전에 이미 국내성에 자신의 무덤을 준비해 놓았기 때문에 관례에 따라 시신을 평양에서 옮겨 집안에 장사지냈다는 설도 있다. 04/1/31 이종호(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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