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해저 메탄하이드레이트가 자원대국 만든다 | |||||||||||||||||||||||||||||||||||||||||||||
독도(천연기념물 제336호)에 관한 우표가 발행된다고 하자 일본외상이 직접 “독도우표건으로 인해 양국간의 우호협력관계가 손상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고이즈미 총리도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공식적으로 발언하는 등 망언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 측에서는 “독도는 역사적ㆍ지리적ㆍ국제법상으로 우리 고유의 영토이며 고유 영토의 자연을 소재로 한 우표발행을 중지해 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독도우표를 발행하자 독도우표는 발매 3시간만인 12시께 매진됐다. 독도는 행정 구역상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42-76번지다. 독도는 동도와 서도를 비롯한 주변 3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전체 면적 181,173제곱미터의 섬으로 경상북도 울진의 도계로부터 해상 123킬로미터 부근에 있는 울릉도에서 동쪽으로 9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울릉도와 달리 나무와 대나무가 드물지만 물개가 난다고 사료에 적혀 있는 무인도였지만 현재 경찰경비대가 24시간 불침번 수비 중이고, 서도에는 1991년 독도로 주소를 옮긴 김성도씨가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독도는 앞으로 한국을 자원대국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독도는 한국 땅 간략하게 독도에 대한 한일간의 논쟁에 대해 집고 넘어간다. 한일간에 독도의 영유권 문제가 처음으로 외교적 분쟁의 대상이 된 것은 1952년 1월 18일 「인접해양(隣接海洋)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 일명 「평화선 라인」이 선포되었을 때부터다. 1970년대에 들어와 해저 자원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독도의 영유권이 다시 외교 문제로 대두되었고, 1990년대에 들어 배타적 경제 수역을 설정할 때 기점 설정을 둘러싸고 한일 양국간에 첨예한 논쟁을 벌인다.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일본의 영토다.” 1996년 2월 9일 일본 외상 이케다 유키히코가 이런 주장을 한다. 일본의 요미우리신문도 2월 21일 ‘독도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일본 영토’라는 사설을 게재했고 일본의 일부 우익 단체는 어민들을 선동하여 소위 ‘독도 반환 운동’을 전개한다. “양국이 한일 기본 조약에서 독도 문제를 공식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으나 한국은 독도의 일본 영유를 묵시적으로 인정했다.”
여기서 양국간에 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는 사료를 살펴보자. 조선시대 태종 16년(1416년), 군역 및 부역을 피하여 울릉도에 들어가 농업이나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모두 데려오게 하고 울릉도에서의 거주를 금지했다. 조선 정부는 아직 왜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건국 초였기 때문에 주민들의 울릉도 거주가 왜구의 침략을 불러들일 위험이 있다고 우려하여 울릉도에 대한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이후 조선이 울릉도에 주민을 옮겨 살게 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으며, 숙종(1693년) 때 울릉도의 영속 문제가 다시 대두될 때까지 공도 정책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이러한 공도 정책은 일본으로 하여금 울릉도와 독도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라는 인식을 갖게 하여 영속 시비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그러나 울릉도에 대한 공도 정책은 영토로서 울릉도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외 정책의 필요에 따라 울릉도를 비롯한 서남해안의 섬들까지도 공도로 관리했던 것이다. 이때 일본에 매우 불리한 사건이 일어난다. 1693년 울릉도 도서에서 조선인의 어업 활동을 불법으로 간주한 일본인들이 한국인 어부들을 인질로 붙잡아 일본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한국인 어부 가운데 안 용복은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알았는데, 그는 호키슈 태수(지금의 돗토리 현)를 통해 울릉도(죽도)가 조선 땅이라고 막부에 항의한다. 호키슈 태수는 사안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일본 막부에 이 사건을 보고하면서 안 용복의 처리에 대해 문의한다. 마침내 1696년 1월 막부가 노중(老中)의 명의로 작성된 봉서를 호키슈와 대마도로 보냄으로써 조일(朝日) 간의 울릉도에 대한 시비는 일단 막을 내린다. 그 봉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죽도(竹島)가 인바슈(因幡州)에 속해 있다고는 하지만, 일본인이 거주한 적은 없다. (중략) 지리상으로 볼 때 인바슈로부터는 160리나 떨어져 있고 조선으로부터는 40리밖에 되지 않으니 조선 땅임에 틀림없다. (중략) 처음부터 그 섬을 조선으로부터 뺏은 적도 없는데, 지금 이를 돌려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일본인이 죽도에 가서 어로하는 것을 영원히 금지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를 조선에 알리도록 하라.” 일본인들이 가장 크게 내세우는 주장은 일본인들이 17세기에 80년 동안 울릉도와 독도로 도해한 사실을 강조하며 일본이 이 섬들을 실효적(實效的)으로 선점하여 경영했다는 것이다. 선점이라는 것은 국제법의 영토 취득론 중 하나로 무주지는 누구나 먼저 가서 선점하면 그 나라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선점은 오늘날 국제법의 영토 취득 권한의 중요한 이론으로 확립되어 있다. 그런데 그 이론은 유럽의 제국주의 세력이 영토 확장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이론이다. 17세기에 80년 동안 일본인들의 울릉도, 독도 도해 사실을 강조하면서 일본이 이 섬들을 실효적(實效的)으로 경영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 당시에도 한국인이 상당수 살고 있었음은 어부 안 용복의 사건을 보더라도 분명하다. 일본이 조선보다 먼저 독도를 조선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증거는 1905년 시마네현의 고시로 독도를 일본 영토로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의 시마네 현 고시보다 5년 앞선 1900년 10월 24일자 관보 41호로 독도를 조선의 영유로 선언한 사실이 있다. <칙령 41호>는 다음과 같다.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함.” 제1조 : 울릉도를 울도라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게 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등(郡等)은 5등으로 한다. 제2조 : 군청 위치는 태하동(台霞洞)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한다. 일본은 1900년의 칙령을 내세우는 것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 측은 석도가 독도라고 주장하지만 석도는 울릉도 근변의 무인도지 독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측이 1881년 고종 18년 승정원일기에서 독도를 석도로 표기하였다는 증거를 제시하자 그 주장도 무시하는 등 억지를 부리지만 일본 측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독도의 중요성을 인지한 한국은 1990년대에 접안 시설과 생활 기반 시설까지 갖춘다. 특히 무인도냐 아니냐를 판명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는 식수를 독도에서 발견하는 개가도 얻었다. 또한 독도가 천연생물상이 양호하게 유지되어 있어 역사ㆍ지리ㆍ문화ㆍ자연환경 등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됐다. ■ 미래의 천연자원 독도에 무진장 매장 일반적으로 일본이 독도에 집착하는 이유는 한국에 독도를 양보할 경우 ‘러시아가 차지한 북방 영토를 영원히 되찾지 못할 전례를 남길지 모른다’로 설명했다. 또한 중국과 분쟁이 있는 센가쿠 제도에 대한 영유권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하여 자기네 땅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들 나름대로의 영토 확장 즉 ‘밑져야 본전’이란 식으로 생떼를 부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속셈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독도에 미래의 에너지원으로 각광받을 메탄하이드레이트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메탄하이드레이트가 주목을 받는 것은 장래의 에너지원으로 개발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류의 주요 에너지 자원은 목재, 석탄, 석유로 변천되었지만 앞으로는 천연가스가 주종을 이룰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일부 사용되고 있는 천연가스는 석유나 석탄에 비하여 탄소를 포함하는 성분 비율이 작아서 연소했을 때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이 적고 유해 물질도 많이 배출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천연가스 역시 매장량에는 한정이 있어 2060년경에는 고갈될 것으로 전문가들을 추측하고 있다. 반면에 전세계에 매장되어 있는 메탄하이드레이트는 천연가스로 환산할 때 1000조에서 5경세제곱미터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에너지의 200∼500년에 해당하는 엄청난 량이다. 메탄하이드레이트가 알려진 것은 1930년대였지만 이 당시에는 원유나 천연가스가 풍부해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는데 요즈음 다시 각광을 받는 이유는 화석연료인 석탄, 원유 등 에너지자원이 고갈되어 가는데다가 연소시 이산화탄소의 발생량이 석탄, 석유에 비해 절반에 불과한 청정에너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메탄하이드레이트는 석유자원이 매장되었는지를 알려주는 표시물이기도 하여 유전개발에 있어 매우 중요시되는 물질이다. 학자들은 시즈오카현 앞바다에서만 6조세제곱미터의 메탄하이드레이트가 발견되었으며(난카이 해구에는 77조세제곱미터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 다른 지역보다 메탄 함유율이 20%나 될 정도로 양질인데다가 이를 추적하면 독도 주변 등 한반도 해역에 엄청난 양이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이 무리한 논리를 내세우면서 독도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종호(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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