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푸는 우리유산] 고조선인은 한국인인가 | |||||||||||||||||||||||||||||||||||||||||||||||||||||||||||||||||||||||||||
만주와 한반도의 청동기 인골, 전형적 한국인 골격 | |||||||||||||||||||||||||||||||||||||||||||||||||||||||||||||||||||||||||||
우리나라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단군조선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2333년이다. 대한민국이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천명하는 근거이다. 그런데 바로 이 2333년이 문제점으로 제기된다. 이 연도는 원래 『삼국유사』의 <고조선>에 ‘고조선 건국 시기는 중국의 요(堯)임금 시기와 같다’는 것을 근거로 요임금 즉위 25년, 즉 무진년으로 보아 기원전 2333년으로 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국이 요임금의 실재조차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사 국가가 존재했더라도 건국 연대를 기원전 16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요의 건국 연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고조선의 건국연대는 기원전 2333년이 아니라 기원전 1600년으로 수정돼야한다. 심지어는 우리의 첫 국가의 건국연대를 고구려가 성립된 시기로 낮춰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는 판이다. 이러한 계산대로라면 단군조선의 연대를 아무리 높이 잡는다 해도 우리나라가 반만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선언은 억지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단군을 부정하는 것은 반만년 역사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므로 단군을 신화로만 인정하자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단군의 즉위연대는 그 절대 연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내세우고자 했던 의식세계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는 『삼국유사』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인정할 경우에 생기는 단군의 건국 연대에 따른 모순을 다소 제거해주지만 기원전 2333년이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느냐는 물음을 잠재우기는 여전히 미흡하다. <청동기라야 국가성립 인정〉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에 국가를 건설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곧바로 단군왕검이 건설한 고조선이 정말로 국가 체제를 가질 수 있었느냐는 문제로 귀착된다. 여기서 기원전 3000년 경은 신석기시대임으로 고대 국가가 설립될 수 없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도 따른다. 학자들은 국가라는 체제가 갖추어지려면 신석기시대가 아니라 청동기 시대로 들어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청동기는 인류가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 수준이 높아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에 등장한 청동제품은 일반인들이 함부로 만들 수 없는 물건이며 또 위정자들만이 이를 소유할 특권을 누렸다. 다른 나라에서도 청동기 시대가 돼야 비로소 국가가 성립될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중국도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는 이리두문화(二理頭文化, 夏)를 국가성립 단계로 보고 있으며 이집트도 이 시기에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이와 같은 학자들의 주장을 고려한다면 청동기가 언제부터 시작했는가가 관건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고대문화는 일반적으로 중국의 황하 유역이나 시베리아로부터 전달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황하 유역에서 청동기 문화가 시작된 것은 대략 기원전 2200년경이고(중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청동기는 주석이 6~10% 포함된 감숙성 마가요문화(馬家窯文化)의 청동 칼로 기원전 1800~1900년에 제작되었음), 고조선 지역과 문화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시베리아의 카라수크 문화는 기원전 1200년경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이들 문화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전적으로 인정한다면 한국의 고대사는 기원전 12세기를 넘어갈 수 없다. 그런데 평안남도 성천군 백원리 9호 고인돌 무덤에서 발굴된 세형 동검과 팽이토기는 이를 측정한 학자들마저 놀라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사람의 뼈를 시료(試料)로 연대 측정한 자료에 의하면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는 3368±522년 전, 열형광법으로는 3324±465년 전, 핵분열흔적법으로는 3402±553년 전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무덤의 축조 연대가 적어도 기원전 14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세형 동검 역시 기원전 14세기에 제작됐음을 뜻한다.
세형 동검이란 동창(銅槍), 동과(銅戈)와 함께 주로 한반도에서 나타났다고 하여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부르는데 비파형 동검을 조상으로 한다. 몸체 길이가 40센티미터 정도이고, 폭은 3~4센티미터 정도로 좁고 날이 잘 서 있다. 칼의 몸체가 날씬하고 우아하며, 그 선이 매우 아름답다. 또한 칼의 몸체 가운데를 관통하는 굵은 척추 뼈와 같은 줄기가 붙어 있는데, 날과 이 줄기 사이에 약간 도려낸 부분이 있다. 칼의 몸체 이외에 칼자루와 칼자루 장식을 별도로 제작하여 조합했으며 비파형 동검보다는 두께가 다소 두껍다. 그런데 세형 동검의 상한선이 기존 학자들이 생각하던 연대보다 10세기나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이 발견되자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세형 동검의 전신인 비파형 단검문화를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경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중국과 다른 청동검〉 비파형 동검은 고인돌과 함께 우리나라 고대사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유물로 거론되는 것 중 하나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비파형 동검이 사용되던 시기에 중국의 황하(黃河) 유역과 그 북부인 오르도스 지역에서는 비파형 동검과는 전혀 다른 동검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황하 유역의 동검문화는 ‘고대의 중국문화’로서 일반적으로 ‘동주식 동검문화(東周式銅劍文化)’라 불린다. 이 문화의 분포 범위는 황화 유역을 중심으로 북쪽은 하북성, 산서성, 협서성 등의 남부까지, 남쪽은 장강 북부 연안에까지 이르렀다. 이곳은 춘추전국시대까지 중국의 영역이었다. 중국의 동주식 동검은 검 몸과 검 자루를 함께 붙여 만들었으며 일반적으로 검 몸이 길고 능형의 검 코가 있다. 자루에는 2~3줄의 돋친 띠가 있는 것이 많고 자루 끝은 모두 작은 원판으로 되어 있다. 이에 비해 비파형 동검은 검 몸의 형태가 비파와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요하를 중심으로 요령지방에 주로 분포돼 있기 때문에 요령식 동검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인 형태는 검몸의 아랫부분이 둥글게 배가 불러 비파 형태를 이루고 검신 중앙부에 돌기부가 있으며 돌기부 양쪽으로 날이 약간씩 휘어 들어갔다. 경부(莖部)는 그대로 이어져 검몸의 중앙부에서 등대〔背〕를 이루며 인부(刃部)의 돌기부와 병행한 등대 부분에는 마디가 있어 약간 도드라져 있다. 이 마디가 비파형 동검을 다른 동검과 구분짓게 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며 중국의 동주식 동검과는 달리 조립식이며 검코가 없다. 동검이 출토된 지역도 다르다. 동검은 대부분 무덤에서 출토되는데 비파형 동검이 대부분 돌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에 비하여 동주식 동검은 나무곽무덤(木槨墳)이나 움무덤(土壙墓)에서 출토된다. 동검과 함께 출토되는 질그릇도 서로 다르며 청동거울도 다르다. 이는 비파형 동검문화가 중국의 고대문화나 오르도스 식 동검의 북방계 문화와 차이가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므로 그 지역의 민족이 중국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파형동검의 연대로 돌아가 보자. 여하튼 세형 동검의 제조 연대가 최소한 기원전 14세기로 올라간다면(북한은 세형 동검이 기원전 2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 비파형 동검이 이보다 훨씬 오래 전에 출현했다는 추론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증거였다. 예기치 못한 문제에 봉착해 있을 때 한반도(평양남도 덕천시 남양 유적 16호 팽이그릇 집 자리)에서 나온 청동기 유적의 측정연대가 무려 기원전 38세기로 거슬러 올라감을 보여주었다. 또 90년대 중반에 발견된 평양시 부근의 상원군 장리 1호 고인돌 무덤에서 청동방울 2개, 청동 2인 교예 장식품 1개, 청동 끌 1개를 비롯한 청동 제품과 활촉 70여개가 나왔고 군사 지휘봉인 별 도끼만 3개가 나왔는데 국왕 급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의 절대 연도는 기원전 3000년 전반에 해당한다.
중요한 것은 비파형 동검이 세형 동검 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는 증거도 발견된 것이다. 평양시 상원군 룡곡리의 4호, 5호 고분에서 비파형 창 끝과 청동 단추가 발견되었는데 그 유물과 함께 발견된 사람의 뼈를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측정한 결과 4539±197년 전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청동 유물의 연대도 기원전 26세기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에서의 비파형 동검문화가 기원전 30세기, 즉 5천 년 이전에 발생하였다고 추정했다. 청동기 시대에 청동 제품 중에서도 청동 단검은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청동 단검은 당시 적과의 육박전에 사용되었던 주된 무기로 통치 권력의 중요한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할 경우 기원전 30세기에 단군을 시조로 하는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성립되었을 개연성을 충분히 갖추었다는 뜻이 된다. 기원전 30세기는 신석기 시대가 아니라 이미 청동기 시대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고인돌 별자리는 세계문명 발상지의 증거〉 고조선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고인돌이 발견되는데 고인돌은 부장품이 나오지 않더라도 청동기 시대에 축조됐다고 인정된다는 것을 「고인돌」(2004. 04. 10)에서 설명했다. 한국의 고인돌은 고조선이 고대 국가 체계를 갖추었다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게 평가된다. 평남 성천군 룡산리에서 발견된 순장무덤은 중심에 큰 무덤 칸이 있고 주위에 작은 무덤 칸이 10개 있는 11칸짜리 고인돌 무덤이다. 무덤의 너비는 동서 4.7미터, 남북 3.6미터이며 무덤 주인이 묻힌 것으로 인정되는 큰 무덤 칸은 길이 2.17미터, 너비 1.04미터, 높이 1.46미터이며 바닥은 다른 무덤 칸보다 한 단 높다. 이 무덤에서는 무려 30여 명의 인골이 나왔는데 중앙 무덤 칸은 다른 칸보다 규모가 큰데도 불구하고 2명분의 사람 뼈만 나왔고 주위 10개의 작은 무덤 칸은 규모는 작지만 보통 3~4명의 인골이 묻혀 있었다. 더구나 무덤이 도굴되어 이를 매장된 사람의 정확한 숫자로 볼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원래 매장된 사람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도굴된 무덤인데도 큰 무덤 칸에서는 부식된 청동조각들이 나왔고 팽이그릇 파편들도 여러 점 나오는 등 순장무덤으로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사람 뼈를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측정한 결과 무덤의 연대는 5069±426년, 핵분열흔적법으로는 5037±852년으로 추정되었다. 단군릉에서 출토된 인골의 출생 연대와 비교할 경우 대략 58년에서 26년가량 앞선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룡산리 순장무덤은 당시 국가 형성의 모든 조건이 성숙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노예제 계급사회=국가’라는 연결고리가 고대사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데 이 순장묘도 그러한 예로 인용되고 있다.
고조선이 국가로서의 완전한 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에 있는 외새산에서 발견된 10호 고인돌 무덤의 별자리로서도 알 수 있다. 이 무덤의 돌은 문자 비슷한 곡선과 점들이 새겨져 있어 글자를 전하는 돌이라는 뜻에서 ‘전자석’이라고 불린다. 고인돌 무덤의 뚜껑돌 겉면에는 80여 개의 구멍이 새겨져 있는데 조사 결과 그 구멍들이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음이 확인됐다. 돌의 중심부에는 북극성이 그려져 있으며 80여 개의 구멍은 11개의 별자리에 있는 80여 개의 별을 의미한다. 별의 밝기를 반영하듯 구멍의 크기도 각각 달랐는데 세차운동(歲差運動)을 감안한 고인돌의 별자리는 기원전 2800±220년의 하늘을 보여주었다. 또 같은 고인돌 무덤에서 발굴된 질그릇 조각의 연대는 4926년(±741년)으로 나타났다. 이는 적어도 기원전 2900~3000년 전인 단군 조선 초기의 선조들이 별을 세밀하게 관측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평양시 상원군 번동 2호 고인돌 무덤도 기원전 30세기 전반기의 무덤으로 뚜껑돌 위에 80여 개의 홈구멍이 새겨져 있다. 크기도 제각각 다르다. 그 중 큰 홈구멍은 6개가 있는데 5개는 북두칠성의 국자와 자루를 연상시킨다. 북두칠성의 놓임 새에 따라 나머지 별들을 관찰하면 큰 별 하나는 5제좌(사자별자리의 β별)에 해당되며 작은 별자리들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자미원(당시 북극)과 테미원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천체 현상은 물리 법칙에 따라 운행됨으로 오늘날에는 특정 시점의 행성들의 위치를 컴퓨터를 이용해 파악할 수 있다. 『단기고사(檀紀古事)』와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무진 50년에 다섯 개의 별이 수성 근처에 모였다’면서 제13대 단군인 흘달단제 50년, 즉 기원전 1733년에 다섯 개의 별이 한 지점에 모였다고 기록돼있다. 박창범 교수는 기록에 나타난 기원전 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50년 동안의 오행성의 결집 현상을 조사한 결과 기록보다 1년 전인 기원전 1734년에 오행성 결집 현상을 발견했다. 이 해 7월 13일 초저녁 다섯 개의 별이 지상에서 볼 때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다. 1년의 오차는 3700년 전과 현재의 시간계산법의 차이로 생기는 오차로 거의 정확한 수치이다. 천문기록은 당시의 국가라는 틀 안에서 측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후대에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했을 경우 정답이 될 확률은 0.007퍼센트로 가필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단기고사(檀紀古事)』와 『檀君世紀』의 신빙성도 함께 증명된 셈이다.
고대 사회에서 천문 기록이 중요하게 평가되는 것은 천문 기록이야말로 당시의 최첨단 과학기술이 모인 자료이기 때문이다. 천문 기록이 있다는 것은 조직적인 체제 하에서 하늘을 비롯한 자연현상을 정기적으로 관찰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세계 고대 천문학계에서는 개, 뱀, 전갈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메소포타미아 유역의 바빌로니아 토지 경계비를 별자리의 원형으로 보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고대 천문학의 발상지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의 토지 경계비는 기원전 1200년경에 만들어진 것이고, 대동강 유역의 고인돌에서 발견된 고인돌 별자리는 그보다 무려 1800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가 다른 지역보다 문명이 앞섰고 4대문명의 발상지라고 내세울 수 있는 커다란 요인 중에 하나는 체계적인 천문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고인돌별자리나 천문기록을 볼 때 고조선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 고도의 문명국가였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벼농사를 지었다는 것도 하나의 증거로 제시돼 있다. 기원전 4000년 후반에 해당하는 남경 유적에서 종자로 보관된 것으로 생각되는 벼, 조, 콩, 수수, 기장 등이 발견되었는데 제일 많은 것이 벼와 조알이었다. 이것은 당시 농경사회가 정착돼 있었으며 국가가 형성될 수 있는 충분한 기반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고조선 강역의 주민들은 한국인인가?〉 고조선의 강역(强域)은 어디까지인가? 일반적으로 고조선의 강역은 서쪽으로 하북성(河北省) 동북부에 있는 지금의 요하로부터 북쪽으로 어르구나하(河), 동북쪽은 흑룡강에 이르렀고 남부는 한반도 남쪽 해안에 이르러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추정한다. 이들 지역 안에서 청동문화가 중국과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발전했고 제작 년도도 훨씬 오래되었으며 단군시대에 국가가 성립될 수 있었다는 개연성을 이미 설명했다. 그러나 고조선이 기원전 3000년부터 국가의 틀을 갖고 중국의 동북방 지역에서 계속 자체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하더라도 고조선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살았던 사람들이 과연 한국인이냐는 의문과 그들이 광대한 영토를 간수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강대했는가에 의문을 갖는 한국인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고대 유적지라 해도 인골을 수습할 수 있는 경우가 흔치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넓은 지역에서 형성된 문화 유형이 인류학적 유형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이동은 반드시 문화의 전파와 보급을 동반하지만 문화의 전파와 보급은 사람의 이동 없이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인의 체질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의 머리뼈가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머리의 길이가 짧고 높이가 매우 높다’는 점이다. 여기서 머리의 길이는 이마에서 뒤통수까지의 거리를 말하며, 높이는 아래턱뼈 윗부분의 ‘으뜸 점’에서 정수리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특히 머리뼈의 높이가 높은 것은 구석기 시대 사람부터 지금의 한국인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중국의 앙소문화(仰韶文化)시대나 현대의 중국인들과도 다르며 또 은(殷)대의 사람들과도 다르다. 한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골격을 보여준다. 웅기 서포항 유적에서 성인남자 3개체분이 발굴되었는데 신장은 보통 크기인 151.3∼163.4센티미터였다. 두개골의 형태는 머리 길이가 상당히 짧은 초단두형이며 높은 머리에 속했다. 함경북도 웅기 송평동 패총(貝塚)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말과 청동기 시대인도 초단두형이었고 함북지방의 나진 초도유적에서 유아뼈 1개체를 포함하여 14개체분이 발견되었는데 골격으로 볼 때 오늘날의 한국인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한반도를 벗어난 고조선 지역에 해당하는 곳에서 발견된 인골자료에 대한 조사 결과도 적지 않다. 중국의 요령성 심양시 우홍구 정가와자 유적은 비파형 동검을 사용한 고조선의 강역으로 그곳에서 M6512호와 M659호에서 두 개의 불완전한 머리뼈와 몇 개의 몸 뼈가 발견되었다.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의 감정결과 이 머리뼈의 형태는 단두형에 속하면서 그 높이가 상당하여 전형적인 한민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중국학자들은 이들을 동호(東胡)족으로 추정). 요서지방의 남산근 유적 주민들도 비파형 동검을 사용했는데 그들의 유골을 분석한 결과 한민족과 유사하므로 한민족의 인종적인 영향 하에 혈연적 특성을 이루었거나 한민족의 분류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래로부터 한민족 집단이 요동지방은 물론 요서지방으로도 적지 않게 진출한 증거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요서지방의 주민을 요하 동쪽에 있던 고대 한민족의 분파인 맥족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길림성 서단산유적에서는 2구의 인골이 보고되었는데 그 형질적인 특징이 몽고인 계의 특징을 보이는 비파형동검문화의 인골과는 달리 퉁구스계에 근접하고 있어 우리 민족과는 비교적 거리가 먼 것으로 추정했다. 북한에서는 서단산의 인골이 한국인과 많이 상이한 것은 사실이나 다른 바이칼호 퉁구스족보다는 우리와 가깝다고 보고 있다. 또 연해주 북쪽 아무르 강 연안에서도 신석기 시대의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역시 인류학적으로 한민족의 특징을 많이 갖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한민족이 이미 신석기 시대에 연해주 일대는 물론 아무르 강 연안까지 진출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지역을 고조선 강역으로 보고 있으며 이 강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중국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조상이라고 믿고 있다. 고조선에 대한 또 하나의 의문은 고조선이 광대한 영토를 차지할 정도로 정말 강대했는가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소 추상적일 수밖에 없지만 언제나 강국이란 선진 무기를 갖고 있는 나라이다. 현재의 세계 판도를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선진 첨단 무기를 갖고 있는 이스라엘은 인구가 몇 100만 명에 불과하지만 수억 인구의 아랍 세계를 상대하면서도 큰소리를 치고 있다. 이 말은 주변의 모든 부족이 석기를 사용하던 시기에 청동 무기를 갖고 있었다면 그 부족은 다른 부족과는 다른 월등한 군사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오늘날로 치면 첨단 선진무기를 갖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당시의 청동 무기는 대단한 위력을 갖고 있었음으로 이를 소유한 부족이나 나라는 주변 지역을 용이하게 정복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파형 동검이나 세형동검으로 무장한 민족이 고조선이라는 거대한 지역에서 강성한 힘을 발휘했다는 것은 무리한 추측이 아니다. 04/5/22 이종호(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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