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 (1)∼(4)」을 기고하자 한 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의견이 들어왔다.
'원균에 대해서도 자세히 써주시면 안될까요? 이순신과 원균에 대해 말은 많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거든요. 원균이 잘못해서 진 게 아니라, 무리한 명령을 이행하려다 그랬다는 것도 잘 몰랐던 사실이네요. 원균도 임진왜란의 일등공신이었다는 건 알았지만, 왜 그랬는지는 잘 몰랐어요. 원균에 대해서도 써주시면 좋겠네요.'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원군장군에 대비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제3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통치 기반 강화를 위한 일환으로 많은 부분을 미화하고 과장시켰다는 것이다. 그 일례로서 임진왜란 중에 있었던 수많은 해전을 이순신 장군 위주로 해석하기 때문에 당시에 이순신 장군과 쌍벽을 이루던 원균 장군 등에 대한 부분을 곡해했다고 지적한다. 원균 장군의 후손들은 이순신 장군을 숭상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원균 장군을 고의적으로 폄훼 하였으므로 역사적인 사실에 의거 정당한 평가를 해달라고 각종 언론 매체와 정부 당국에 탄원을 낸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제3공화국 때 충무공에 대한 평가는 신성시되어 어느 누구도 충무공에 대한 재론이 금지될 정도였다. 이순신 장군은 ‘영웅’이라는 표현으로는 모자라 ‘성웅’으로까지 추앙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순신을 평가하는 기존 정설이다.
첫째, 임진왜란 기간(1592∼1598)에 전쟁의 최고 지휘부인 조선 조정은 철저히 무능했고 당쟁으로 일관했다.
둘째, 충무공은 이 같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직 나라를 구하려고 몸을 바쳤다.
셋째, 충무공은 뛰어난 지략과 거북선 건조 등 빈틈없는 준비로 엄청난 군사적 열세를 뒤집고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전세를 뒤집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넷째, 충무공은 동료 장수인 원균 등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백의종군’한다.
다섯째,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충무공은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패잔병을 수습하여 기적과 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여섯째, 충무공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나라에 대해서 ‘충’으로 일관했으며 가정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등 문과 무를 겸비한 그야말로 성인 중에 성인이다.
이러한 ‘완벽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 신화는 일제 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5 16쿠데타 등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국민들의 가슴에 큰 족적을 남겨 이순신은 국난극복과 민족 중흥의 용기를 북돋우는 데 큰 공헌을 했으나 임진왜란을 이순신 장군의 공적 위주로 설명하다보니 여러 가지 면에서 무리한 수도 두었다는 지적이다.
〈수군 전투의 선봉장 원균〉
원균 장군의 이름은 균이요, 자는 평중이고 본관은 원주이다. 1540년 1월 5일 현재 장군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평택시 도일동에서 출생하였는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보다는 5년 연배이다. 원균은 일찍이 군대에 들어가 경흥군 조산보만호(종4위)였는데 반년만에 특진하여 전라도좌수사(정3위)로 임명되자 사간원에서 그의 근무평가가 나쁜 것을 이유로 임명에 문제가 있다고 반대하여 부임도 못하는 수모까지 당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2개월 전인 1592년 2월에 경상우수사로 임명되어 가배포에서 73척의 군선을 지휘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군은 좌 우로 나뉘어져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그 지휘권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부산진 앞바다에 쳐들어왔을 때 경상좌수사 박홍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리자 경상우수사 원균 혼자 적과 싸웠으나 수영이 함락되었다. 이 당시 원균은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 소수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때 원균으로부터 전라좌수영에 왜란의 급보가 전해진 것은 일본군이 침공한 지 2일 후였지만 이순신 장군이 경상도로 출동한 것은 20일 후인 5월 4일이었다.
어떻든 원균은 영남해역에서 단독으로 일본 수군과 맞서 싸우면서 10여 척을 격파하는 등 전과를 올리면서 전라좌수영에 원군을 계속 요청하였지만 이순신은 계속 출동을 미루었고 이것이 후에 원균과의 불화를 조성하게 된 불씨가 되었다. 사실 이순신 장군은 출동하기 2일 전인 5월 2일만해도 확실한 결심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부하들이 적극적으로 출동할 것을 주장했다. 일부 장수들이 영남구원을 반대하고 나섰을 때 군관 송희립은 그들의 부당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큰 도적이 국경을 치고 들어와 그 행세가 커졌는데 가만히 앉아서 외로운 성만 지킨다고 혼자 보전될 리 없으니 나아가 싸우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래서 다행히 이기면 적의 기운이 꺾일 것이고, 또 불행히 전쟁에서 죽는다 해도 신하된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을 겁니다.”
녹도만호 정운도 이에 가세했다.
“영남도 우리 땅이므로 적을 치는 데 있서서는 전라도, 경상도에 차이가 없습니다. 신하로서 국은을 입고 국록을 먹다가 이런 때에 죽지 않고 어떻게 감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이에 이순신은 출정을 결심하고 주전함인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을 이끌고 한산도에서 원균과 합류한 후 5월 7일 옥포에서 일본선단을 공격하여 26척을 격파하고 이어 합포, 적진포 등에서 다시 16척을 불살라 없애는 등 모두 40척을 대파했다. 이후 이억기의 판옥선 25척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은 전라좌 우도와 경상우도의 수군이 합세하여 이른바 3도 수군의 연합전선이 구축된다.
옥포해전으로부터 부산포해전에 이르기까지 약 5개월 간에 걸친 초기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의 전선만 해도 약 330척을 격파하거나 불태워 없애는 엄청난 전과를 올려 결국 해전에서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전세에서 조선측으로 하여금 종래의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후 명나라의 이여송이 4만 명을 이끌고 참전하여 우여곡절을 겪은 후 평양성을 탈환하고 일본과 명나라가 강화 교섭을 추진하지만 명나라 군이 내부 사정으로 완전히 철군하자 조선은 일본이 재침해 올 것으로 생각하고 군을 정비한다.
〈수군 작전을 모르는 조정 대신〉
이 당시 조선의 조신들은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왜군과 결전하면 언제든지 승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조정은 선조 29년 11월 조선수군이 거제 장문포로 진출하여 이곳을 함대기지로 삼고 부산 앞바다로 나아가 바다를 건너오는 왜군을 해상에서 섬멸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왜수군이 한산에서 참패한 후 해전을 기피하면서 지상군의 엄호를 받을 수 있는 남해연안을 요새화 하여 연안에서만 작전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배후에 두고 부산 앞바다로 나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 후 수군과 육군이 합동으로 공격할 것을 조정에 요구했다.
이때 왜군은 재침의 결정적 장애가 될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역공작의 일환으로 가등청정의 도해 시기를 허위로 알려준다. 이순신은 이 정보를 의심하고 도원수 권율의 명령에 따라 가등청정이 도해한다는 지역으로 함대를 빈빈히 출동시키면서도 결정적인 해상작전만은 유보한다. 군량과 인원 그리고 병선의 부족이라며 적절한 핑계를 대었지만 이순신이 해로 차단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자 선조는 격노하여 원균을 새 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이순신을 하옥시켰다.
이순신의 판단은 현지 상황에 정통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이순신이 왜군을 격파하는데 주저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충청병사로 있던 원균을 경상우수사로 임명한 것이다.
새 통제사가 된 원균도 부임한 이래 조정으로부터 부산 앞바다로 진출할 것을 지시 받았지만 적의 동향을 살펴본 후 왜군이 계략을 써서 아군을 속이고 있다고 판단하고 휘하 함대와 왜군의 해상 결전을 기피하면서 연해안에서 작전을 전개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계속하여 부산 앞바다로 진출하여 일본 해상로를 차단하도록 촉구한다. 그러나 현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원균은 이순신이 건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안골포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육군이 먼저 공격해야한다며 조선수륙군이 연합하는 병진공격작전을 건의한다. 그러나 도원수 권율이 이 작전에 반대하자 원균의 건의는 묵살된다.
일본이 연안에서 활동을 점증시키고 왜군이 곧 재침하리라는 정보가 이어지자 조정은 또 다시 원균에게 조선수군이 선제공격할 것을 촉구한다. 이에 따라 원균은 수군 3만 명과 함선 200척을 한산도에 집결시키고 함대를 두 선단으로 재편하여 교대로 해상에 나가면서 왜수군과 결전에 임했다.
이 때 상상할 수 없는 돌변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 수군과의 전투를 회피한다는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원균이 권율장군으로부터 곤장을 맞는 수모를 당하는 것이다. 이는 요즈음으로 따지면 총사령관이 해군참모총장을 공개적으로 태형에 처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원균은 명령에 의해 수군을 출동시키지만 분명히 일본군의 계략에 빠져 패할 것이라는 비장의 말을 남기며 전선으로 향한다. 상부의 명령에 따라 왜군을 좇아 격파하는 작전에 착수했으나 결국 수륙양면으로 치고 빠지는 작전을 구사하는 1천 척의 왜군에게 대패한다. 원균은 잔군을 수습하여 전력을 정비하려고 춘원포에 상륙했으나 도진의홍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한다. 이 때 유명한 전라좌수사 이억기 등도 모두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배를 이끌고 한산도로 후퇴할 수 있었다. 조선수군이 완전히 와해된 이 해전을 칠천량해전이라고 부른다.
조선수군이 패전하게 된 것은 조정의 무리한 출전 강요가 주요 원인이었으나 원균의 전술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순신은 조선군선을 집중시켜 적선이 분산되었을 대 공격하여 승리했던 것과는 달리 원균은 열세한 군선으로 다수의 적선을 분산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이는 열세한 군사력으로 우세한 적군을 공격하는 모양이 되어 그 결과는 패배로 나타난 것이다(이민웅 교수는 정유재란의 첫 전투라 볼 수 있는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함대 전체를 이끌고 출전했다고 적었다).
〈각색에 따라 달라진 두 장군의 명암〉
한 개인의 역사는 시간이 갈수록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때론 각색되고 때로는 윤색되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사실보다 훨씬 더 부풀려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실보다도 형편없이 축소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원균은 후자에 속한다.
보통 이순신은 ‘천하의 용장’이요 상대역인 원균은 ‘무능한 겁쟁이에다 모함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의 골이 깊게 만든 빌미를 제공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옥포 해전의 장계 때문이다. 이 전투는 이순신과 원균의 수군이 합동으로 참가하여 승리한 것으로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 공을 탐하지 않고 장계를 올릴 때 협의하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이를 어기고 단독으로 장계를 올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을 비롯하여 부하들은 모두 상을 받았지만 원균과 함께 싸운 장병들은 어떠한 포상도 받지 못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순신이 출진한 날이 1492년 5월 4일인데 이순신은 출전하기 직전인 4월 말 원균 측 관할인 남해기지(지금의 남해시)의 관고(官庫)를 불태웠다. 이유는 남해가 무인지경인데다가 전라좌수영 진영과 너무 인접해 있어 왜적의 수중으로 넘어갈 경우 전라좌수영의 방어에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이 행동은 섣부른 오판인데다가 자신의 관할 지역이 아님에도 불과하고 불태운 실수였다는 것이 후대의 판단이다. 충무공이 당시 왜적이 먼거리에 있었는데도 원균에게 상의하지도 않고 남해관고를 불태운 이유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난중일기』에서도 알 수 있듯 이순신과 원균 양측에 두고두고 불신하는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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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친필초본으로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다. 원균 장군과는 달리 이순신 장군의 경우 『난중일기』 등 많은 자료가 남아있어 평가하기가 수월했다고 볼 수 있다(국보 제76호). |
그런 판에 임란이 발발한 다음해 8월(1593년)에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면서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자 정통 무인으로써 자부심을 갖고 있던 원균은 거세게 반발한다. 불같은 성질을 갖고 있는 원균이 계속 불만을 쏟자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함께 근무케 했다가는 전열만 흐트러진다고 생각한 후 충청병사로 전출을 명한다. 사실 충청병사는 관직으로만 따지면 승진한 것이므로 백성들이 원균이 나가는 길에 영전을 축하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명목상 영전이지만 실은 좌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원균은 충청병사로 있으면서도 마음은 수군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수군에 대한 건의를 올리기도 했다.
원균과 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이 원균의 측실소생인 원사옹(元士雄)이 12살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보고한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는 적을 앞둔 마당에 장수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날 위기로 조정에 비쳐져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하니 앞으로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까지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진상을 조사하러간 이덕형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밝혀진다. 원균의 외동아들 원사웅은 측실 소생이 아니라 정실소생으로 당시 18세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쫒아 다니며 적을 여러 명 베기도 하는 등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충무공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원균을 모함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이순신이 하옥될 때 거론되기도 하며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제함( 陷)했다고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원균에 대한 가장 큰 불명예는 이순신의 하옥이 원균의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나 그런 주장은 오히려 원균에 대한 모함으로 볼 수 있다. 기존 정설은 이들 사건에 대해 ‘이순신이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로 잡혀가서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정탁 등의 변호로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백의종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이 하옥된 주요 이유는 4가지인데 이 중에는 오히려 이순신이 원균을 모함한 것과 이순신이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선조의 명을 어긴 죄가 가장 큰 이유였다. 선조의 비망기(備忘記)에는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순신은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수이 여긴 죄를 범했다(欺罔朝廷 無君之罪). 또한 적을 쫓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죄를 범했으며(縱賊不討 負國之罪) 심지어는 남의 공로를 빼앗았고 또 남을 모함했다(奪人之功 陷人於罪 無非縱恣 無忌憚之罪). 뿐만 아니라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까지 있으므로 그를 구할 길이 없다. 이같이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고 용서할 수 없으므로(必誅不赦) 이제 본격적으로 고문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라(今將窮刑得情).”
여기에서 적을 쫓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 일본의 정보전에 조정이 당한 결과이기도 하다. 즉 왜장 가등청정이 간첩 요시라를 이용해 자신이 어느 날 어느 섬에 숙박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유출했다. 그러자 조정은 그러한 정보를 그대로 믿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을 치라고 했지만 이순신은 그것이 계략임을 알고 출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순신은 명령불복으로 하옥된 것이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것이다.
사실상 원균은 이순신과 비교할 때 항상 ‘시기와 모함을 일삼는 무능한 장수’라는 부정적 이미지로만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원균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평자이자 이순신의 친구인 서애 유성룡조차도 선조 앞에서 매우 다른 평가를 했다. 1596년 유성룡은 어전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부터 육장은 수전에 능하지 못하고 수장은 육전에 능하지 못하나, 원균은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용감히 싸우며 그 모두에 능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유성룡이 종전 후 집필한 『징비록』권2 제12장에서는 원균을 원천적으로 비난한다.
“성질이 음험하고 간사하며, 또 중앙과 지방의 많은 인사들과 연결하고 있으면서 순신을 모함하기에 힘을 다했다. 또한 원균은 순신이 당초 전투에 참가하고 싶어 온 것이 아니라 나의 고청에 의해 왔으니 적을 이긴 수공(首功)은 바로 나다.”
원균에 대한 평가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는 뜻이다. 임진왜란의 전투 결과만을 두고 보면 결과적으로 원균은 패전 장수였다. 그러나 그가 모든 싸움에서 겁쟁이처럼 꼬리를 내린 졸장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용맹해서 문제가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원균과 이순신 모두 삼도수군의 수장이 되어 전투에 임했으나 두 사람의 명암은 극에서 극을 달린다. 원균은 조정의 무리한 명령에 따라 부산의 적을 공격하다가 패전하고 전사하는 반면에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승전보를 남기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역사에 충신으로 기리 칭송된다.
〈사망한 세 장군만 일등공신에 책봉〉
난이 끝난 후 3년이란 기간 동안에 심사숙고하여 정한 전공 심사에서 원균은 권율, 이순신과 함께 일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선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1603년 6월에 선무공신의 녹훈(錄勳: 훈공을 정하여 기록함)할 때에 이덕형, 이항복 등이 계(啓)를 올려 말하기를 ‘원균이 처음에는 군사가 없는 장수로 해상전투에 참가하였으나, 그 뒤에 주사(舟師: 수군)를 패망케한 과실이 있으니 이순신, 권율 등과 함께 더불어 같이 할 수 없어 내려서 이등으로 기록하였습니다.’하자 선조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진왜란이 처음 일어났을 적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이순신이 스스로 달려간 것은 아니다. 적을 칠 적에 원균은 죽음을 무릅쓰고 매번 선봉이 되어 앞장서서 용기를 돋구어서 그가 이기고 빼앗은 공은 이순신과 같으며, 그가 잡은 적괴(賊魁)와 누선(樓船)은 오히려 이순신에게 빼앗겼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었을 때 원균은 두 세 번 장계를 올려 힘써 부산 앞 바다에서 왜적 속으로 쳐들어가 싸우지 못할 실정을 알렸다. 그런데 비변사에서는 독촉하고 도원수 권율은 곤장을 때렸다. 이에 원균은 패전할 것을 환히 알면서도 진을 떠나 적을 친 끝에 온 군사가 빠져죽자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이는 원균의 용맹함이 삼군의 으뜸일 뿐만 아니라 지략 또한 출중한 것이다.
옛적에 가서한(哥舒翰)이 가슴을 쓰다듬으며 농궐에 나갔다가 적에게 패한바 있었고, 양무적(楊無敵)은 반미에게 협박을 당하여 눈물을 뿌리고 할 수 없이 싸우다가 드디어 적에게 패하여 죽었으니 어찌 이러한 일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고금의 인물을 성패만으로써 논할 것이 아니라 그의 운과 시기가 어긋나서 공은 무너지고 일은 실패한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아프고 불쌍하게 생각된다. 오늘 공을 논하면서 2등에 기록하려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원균의 눈이 지하에서 감기지 못하리라.”
선조는 이렇게 말하고 권율, 이순신, 원균을 똑같이 1등 공신으로 삼았다. 1604년 4월에 효충장의 적의협력 선무공신(效忠杖儀 迪毅協力 宣撫功臣)의 호를 하사하고 승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능군(崇錄大夫 議政府左讚成 兼 判義禁府事 原陵君)으로 추증하고 이듬해인 1605년 5월 류황을 보내어 가묘(家廟)에서 제사지내게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인조반정 후에 쓰여진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원균을 깎아 내리고 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때 쓴 것이고, 『선조수정실록』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쥔 서인들이 고쳐 쓴 것이다. 이 때 원균은 철저하게 다시 죽임(筆誅)을 당하는데 그것은 당시의 집권측과 원균의 측이 서로 당파를 달리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은 이이의 제자들인 서인들이 주도하고 이황의 제자들인 남인들이 동조해 성공한 쿠데타인데 이순신은 남인의 영수 유성룡의 추천을 받았으므로 남인으로 분류되었다. 반면 왜란 말기 조정에 비호자가 많았던 원균은 북인으로 분류되었으므로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더구나 이 수정실록의 편찬 주관자는 이순신의 후손인 택당 이식(李植)이었다.
여기에다 원균에 대한 기록이 매우 빈약한데다가 상대적으로 이순신은 『난중일기』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원균을 평가절하하기가 쉬웠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원균이 올린 군공장계는 이순신보다 더 많은 6개로 알려지고 있는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렇게 한 쪽은 자료가 철저하게 보관되고 나머지 한 쪽은 철저하게 자료가 없다는 사실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없앴다는 증거라는 학자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조차도 그의 실수나 부정적인 면이 드러날 수 있는 시기의 것들이 전부 전해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조카에게 보낸 짧은 편지까지 쓰는 이순신의 품성으로 볼 때 부끄러운 일이라고 일기를 의도적으로 적지 않았을 리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일기는 남에게 보여 주려고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기가 몇 달씩 전해지지 않는 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의 친필 초고를 찢어냈을지도 모른다는 지적이다.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는 이순신 장군〉
이순신으로서도 억울하게 비난을 받는다고 생각되는 일이 적지 않다. 선조의 말에 의하면 이순신은 원균의 원군 요청을 받았음에도 20여 일이나 질질 끌다가 부하들의 독려에 의해 마지못하여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보면 엄밀하게 살펴보면 그것은 이순신을 탓할 일은 아니다.
당시 전라좌도 수군은 전선이 총 25척 정도였는데 이 중에서 이순신이 관장하고 있던 수군은 작은 포구 4개 뿐이었으며 전선의 수도 겨우 10여 척이었다. 이 당시 경상도의 전선의 수는 좌 우도 합하여 약 150척이었으므로 실제로 이순신이 경상도 수군을 지원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서둘러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순신으로서는 자기가 맡고 있는 포구를 우선적으로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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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을 모함하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반간계 그림. |
더구나 당시 군 편제상 각 도의 관찰사가 병사(兵使)와 수사를 겸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경상도로 지원 나가려면 자신이 관장하는 10여 척의 전선만으로는 어림이 없으므로 적어도 전라좌도 수군을 모두 영솔해 나가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권한 밖이었다.
당시의 작전 구역은 엄격히 자기 도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경상도에 출병할 수 있도록 조정에 허가를 요청하고 있으며 이순신도 경상도에 출병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은 것은 개전 14일 후인 4월 28일경이었다. 그래서 출격 준비를 마치고 허가를 받은 다음날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원균으로부터 경상도의 전선 70여 척의 전선이 격파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데다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몇 일 후에 출격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5일을 더 기다린다. 그러나 이억기가 끝내 오지 않으므로 결국 전라좌도의 전선만으로 출격하여 원균과 합류하는 것이다.
물론 이 당시 이순신이 원균의 구원 요청을 받자마자 출격했더라면 경상도의 수군이 그렇게 처참하게 격파되지 않았을지는 모른다. 선조도 이에 대해 끝까지 불만을 표시했다는 것은 선무공신 책봉 때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작전권을 포함한 군 통제 상황을 엄격히 지키려는 이순신 장군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결론적으로 이순신의 합류로 조선수군은 반전의 기회를 얻게 되었으므로 공과를 따질 수는 더욱 없는 일이다.
사실 전반적으로 군선의 수, 속도, 군수지원체제, 전투원의 정예도 및 전투원의 수 등으로 고려할 때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열세였다. 따라서 함대함 전투를 할 경우 조선 수군에게 절대 불리했다.
그런데도 임란 전 기간을 통하여 수군통제사로 임하였던 이순신의 함대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 요인은 불리한 조선 수군을 이끌고 적을 격파할 수 있는 전략 전술을 적절히 운영했다는 점이다. 조선 해안의 지형 지물에 밝은 연해 주민을 이용하여 주변 환경을 전투에 운용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수전에서 명중률이 다소 낮은 대형화약무기들을 학익진을 형성하여 탄착점을 중앙에 모으게 함으로써 명중률을 높였다.
이와는 반대로 용감성 면에서는 국왕인 선조로부터 신임을 받을 정도로 앞장선 원균은 함대함 전투를 선호하여 적세가 아군보다 강할 때 공격함으로써 적의 협공을 받아 패했다.
사실 임란에서 전국회복을 갖고 오게 한 동력은 조선수군의 승리였다. 그러므로 승전에 대한 공을 이순신 장군의 공으로 돌리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순신의 영웅적인 활동은 조선 군선과 화포 그리고 전술전략의 응용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전투요원들의 책임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이순신 장군 한 사람을 성웅화하고 영웅화시키기 위해 모든 공적을 무리하게 몰아주고 다른 장수들의 업적을 낮추거나 폄하하려는 데서 진실성을 오히려 훼손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04/8/28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지 않았다 |
갑옷 입지않고 진두지휘 '장렬하게 자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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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최후의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갑옷을 입지 않고 진두 지휘하다가 적탄을 맞은 것은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최후를 부끄럼 없이 장식하기 위해 장렬하게 자살한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게 퍼져 있다. 당시의 정치의 역학 관계를 볼 때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로 여겨진다.
이순신 장군은 평소에도 자신의 진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곤 하였다. 후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유형은 이순신 장군이 평소에 갖고 있던 결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순신 장군이 평소에 마음속을 토로하며 말하기를 ‘예로부터 대장이 자기가 세운 전공에 대해 인정을 받으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개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 날에 죽음으로써 유감 되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이 적이 물러나는 마지막 전투에서 ‘반드시’ 죽겠다는 비장한 내용으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결코 통상적인 전사가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1597년 7월 15일 원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왜수군에게 대패했고 이 전투에서 원균도 전사하였다. 이 패전 소식에 놀란 조정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했다. 9월 16일, 명량 해협에서 단 13척으로 적선 133척을 상대로 포위를 당하고도 대승을 거두며 조선수군은 다시 남해의 해상권을 회복하게 된다(「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3)」, 국정브리핑, 2004.08.16 참조).
다음해 7월(1598)에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麟)이 5천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조선 수군과 합동으로 순천에 주둔하고 있는 소서행장의 군을 해상에서 포위, 적의 해상 교통을 봉쇄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전황이 바뀐다. 8월 17일에 8월 1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명에 의하여 왜적은 철수의 길에 오르게 된다. 순천에 있던 소서행장은 이순신 장군이 해상을 봉쇄하고 있기 때문에 용이하게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퇴로를 열어달라고 한다.
진린은 이순신 장군에게 퇴로를 열어주자고 하였으나 이순신 장군은 일거에 거절했다. 이에 왜적들도 일전을 각오하고 소서행장은 곤양과 사천 방면의 적에게 구원을 청하여 구원병들이 노량(鷺梁)으로 모여들었다. 이때 왜군의 배는 500여 척, 조선의 수군과 명군의 배는 300여 척이었다. 이 전투에서 비록 충무공이 전사하였지만 왜선 500여 척 중 450 척이 부셔지고 왜장 도진의홍(島津義弘) 등을 비롯한 일부가 고작 50여 척으로 도망칠 정도로 조선 측의 대승이었다. 그 때가 선조 31년 11월 19일이였다.
〈전사를 선택한 마지막 해전〉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자살이라는데 비교적 많은 공감을 받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때 이충무공이 전사하지 않았다면 어차피 또다시 잡혀가서 억울하고 욕되게 죽음을 당했으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가설이 나오게 되는 당시의 정황을 읽어보자.
여기에는 선조의 성격이 크게 작용한다.
선조는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았는데 왜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더욱 불안해져 의심나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미리 죽였다. 특히 정여립 역옥 사건으로 인하여 1,000여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 죽였는데 그 정도가 얼마니 심하였는지 자살한 정여립에게 다시 형벌이 가해지던 날 어떤 사람이 안질 때문에 눈물을 흘리자 정여립을 추모한 까닭이라고 곤장을 쳐죽이기도 했다. 이순신과 친분이 있었던 조대중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울었다는 죄목으로 고문을 받고 죽었으며 그의 처와 첩, 아들과 딸, 동생과 조카 등이 모두 죽었다.
더구나 왜란 중에 선조를 비롯한 집권자들은 도망치기에 급급했지만 의병장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은 효과적으로 소위 중앙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자치권을 갖고 전투에 임했다. 이 때의 의병장들로는 조헌, 고경명, 곽재우, 김덕령 등으로 이들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감은 컸다.
의병장들이 관의 지휘를 벗어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왜란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조정은 왜란이 끝나면 의병장들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잠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외적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부의 잠재적인 적도 견제해야 했다. 조정은 의병장들에게 촉각을 곤두세우다가 첫 칼을 빼들어 김덕령 장군을 역모 혐의가 있다고 31살 나이에 죽인다.
이에 대한 이민서(李敏敍)의 『김충장공유사』에서 ‘김덕룡 장군이 죽고부터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 스스로 의혹하여 곽재우는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고 숨어서 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바야흐로 전쟁 중에 갑주를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으며 호남과 영동 등지에서는 부자와 형제들이 의병은 되지 말라고 서로 경계했다.’라고 적었다. 조정의 비정한 칼이 영웅호걸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권율은 아침저녁으로 한양에 장계를 띄워 충성을 맹세했고 대장군 이일은 아예 왕실과 조정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다.
사실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체포할 때도 이충무공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있다. 선조는 금부도사에게 선전관의 신표와 밀지를 주어 신분을 위장하고 이순신 장군을 잡아오게 하였다. 금부도사는 먼저 선전관의 자격으로 10여 일을 한산도에 머물면서 이순신 장군의 동태를 엿본 다음 이순신 장군을 잡아오는데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체포하도록 명령한 것은 잘 알려진 다음 4가지 죄목이다.
'이순신은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수이 여긴 죄를 범했다(欺罔朝廷 無君之罪). 또한 적을 쫓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죄를 범했으며(縱賊不討 負國之罪) 심지어는 남의 공로를 빼앗았고 또 남을 모함했다(奪人之功 陷人於罪 無非縱恣 無忌憚之罪). 뿐만 아니라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까지 있으므로 그를 구할 길이 없다. 이같이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고 용서할 수 없으므로(必誅不赦) 이제 본격적으로 고문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라(今將窮刑得情).'
선조가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이순신의 죄목에 대해 자백을 받은 후 사형에 처하라고 지시까지 한 것을 볼 때 이순신을 견제하려던 의도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탁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전투 중에 군사령관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왜병에게만 도움을 줄 뿐이라는 구명 상소문을 올리자 이순신 장군의 목숨만은 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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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을 그린 민족기록화(경남 통영군 한산면 제승당 소장). |
극적으로 생명을 건진 이순신 장군은 1597년 7월 원균의 패전으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 패잔선 12척(총13척)으로 명량 해전에서 또다시 대승을 거둔다.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죽이려 했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순신 장군을 더 미워하게 되었으리라는 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조 실록』 1597년 10월 20일을 보면 선조는 명량해전에 대해 ‘이순신은 사소한 적을 잡은 데 불과하다. 이순신에게는 벼슬을 올려주지 않으면서 포상하는 방법을 연구해보라.’ 고 말하면서 포상도 거부한다. 특히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이후에도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 해전의 승리도 대수롭지 않다고 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을 통해서 자신의 존립이 위태해진 것을 경험하였으므로 전쟁이 끝나자 왕권에 대해 병적인 집착을 갖고 전쟁이 끝난 후의 논공행상에서 선무일등공신으로는 이순신, 권율, 원균 등 사망한 사람에게만 주었다. 곽재우, 이원익 등 살아 있는 사람들은 1등 공신으로 추천되었으나 아무런 상을 받지 못하였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영웅 칭호를 준다면 선조로서 안심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스스로 택한 죽음이라는 견해는 많은 사람들의 동조를 받았다. ‘적의 유탄을 맞았다’는 사실과 ‘스스로 전장에서 영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라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최후의 노량해전〉
자신의 통치에 방해될지도 모를 잠재 세력들을 제거하는데 앞장 선 선조의 행위를 볼 때 이순신 장군에게도 또 다시 칼이 날아 들어올 것이라는 것이 명약관화하게 생각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순신 장군이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동조를 받았다. 특히 왜란을 종식하는 마지막 전투에서 ‘적의 유탄을 맞고 전사했다’라는 것은 무장으로서의 최고의 명예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을 따라다니는 전설 중에는 놀랍게도 충무공이 전사하지 않고 전사한 것처럼 위장하였다는 설도 있다. 사실 이 당시 이순신 장군도 자신에 대한 선조의 마음이 곱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취할 방법은 세 가지 중 하나였다.
첫째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앉아서 맞아 죽는 것보다 스스로 일어나 썩은 정권에 항거하는 것이고 셋째는 외형적으로는 죽기는 죽되 실제로는 살아서 후일에 대비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둘째의 방법 즉 무능한 정권에 항거한 무장봉기 즉 선조가 우려하던 쿠데타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나리오 중 하나라고 적은 네티즌도 있다. 이순신의 근거지는 전란의 참화를 비교적 적게 받은 안전한 거점으로 식량과 농토가 보존되었고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없었다. 또한 백성들은 이순신을 실질적인 주인으로 여겨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이 함대를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한양을 공략했다면 승산도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순신이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데다가 왜군의 침략을 구해준 구세주라는 백성들의 인식은 고려 말 이성계가 중앙정부를 전복할 때와 유사했다. 만약에 이순신이 쿠데타에 대한 이론적 바탕을 보유한 학자들과 결합했다면 중앙정부와 싸울 승산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지만 이순신 장군이 당시의 혁명아로 불리는 허균과 만나 정세를 토론했다면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새 정권에 대한 허균의 설득력이 이순신을 이끌었다면 정도전이 이성계를 이끈 것과 같은 결과를 갖고 올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도 많다. 이순신의 군대는 수군 위주라서 육전에 한계가 있으며 당시 조정이 썩기는 했지만 왜란이 소강상태에 있었으므로 내란을 방어할 만한 힘이 비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두 번째 가설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고 마지막 선택 즉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고 살아서 후일에 대비했다는 설은 예로부터 꾸준히 내려오고 있다. 즉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해전인 노량전투에서 사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순신 장군 자살설’에서 실제로는 죽지 않고 살아서 은둔하였다는 가설을 설명하기 전에 노량해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 노량해전은 워낙 전투 상황이 잘 알려져 있으므로 당시의 정황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순신은 명나라와 조선군 연합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에 출항, 11월 19일 새벽 2시쯤 왜적의 선단이 몰려오는 노량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왜군이 새벽 4시 노량을 거쳐 관음포(觀音浦) 앞 바다에서 이르렀는데 연합함대는 좌우로 편을 갈라 행진했다. 반면에 사천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의 왜적들은 500여 척을 이끌고, 경상도 사천으로부터 남해 노량 사이에 있는 광주양(光州洋)을 지나 곧장 노량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조선 수군들은 대적선의 항로 전방인 죽도와 관음포 사이에 배치되었고, 명나라 수군은 죽도 북쪽에 매복하였다.
왜적선이 노량 수로를 지나 관음포 앞바다로 다가왔을 때, 조선 수군이 좌우에서 일시에 포격을 가하자 당황한 적들은 갈팡질팡하다가 이윽고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우리 수군에게 대항해 왔지만 연합함대의 공격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날이 새기 시작할 무렵 관음포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남해 관음포는 지리적인 지형상 도망치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므로 왜적선들이 다시 돌아서서 결사적으로 대항하면서 이순신의 배를 목표로 겹겹이 에워싸자 자못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 이 때 진린이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이순신을 구해냈고 거꾸로 진린의 배가 적선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을 때 이순신이 진린을 구했다.
연합함대의 맹렬한 공격은 쉬지 않았다. 적들은 패전의 빛이 짙어지자 관음포 앞을 벗어나 남쪽으로 도망치려하였으나 적선 1척도 돌려보내지 않으려는 이순신은 스스로 앞장을 서서 달아나는 적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였다. 적의 탄환이 이순신의 왼쪽 가슴을 관통하여 등으로 빠져나갔다.'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의 생애에서 죽음의 순간처럼 드라마틱한 부분은 없다. 특히 이순신의 전사 장면은 후일 각종 전기에서 약간씩의 포장을 더하면서 그의 죽음을 신화화하는 근거가 되지만 동시에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전 서울대학교의 남천우 박사는 우선 이분(李芬)이 쓴 행장(行狀, 죽은 이의 일생을 기록한 글)중에서 유독 이순신 장군의 전사 현장 기록만은 매우 믿기 어려운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19일 새벽 2시쯤부터 적선을 만나 아침까지 크게 싸웠다. 이순신 장군은 ‘이들을 놓치지 말라. 이 싸움에서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던 왜적을 한 명이라도 살려보내서는 원통하게 죽은 우리 백성들의 영혼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만일 이 원수를 갚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한 후 결전에 나선다. 전투는 치열하였고 적이 차차 무너지기 시작하자 이순신 장군은 더욱 북채를 쥐고 독전하였다. 적은 거의 전멸 상태에 빠지고 최후의 승전고를 울리려 할 때 적이 쏜 탄환 한 발이 이순신 장군의 가슴을 관통하여 등으로 빠져나갔다.
이순신 장군은 맏아들 회와 조카 완(莞)에게 ‘방패로 내 몸을 가려라. 지금 전쟁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物言我死)’라는 유명한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회와 조카 완이 울음을 참고 ‘지금 만일 곡성을 내었다가는 장병들이 놀라고 적들이 기세를 얻을지 모른다.’ 라고 말하며 이순신 장군의 시체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장군이 사망한 것을 아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와 회와 완 세 사람뿐이었고 부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후 진린 도독이 급히 배를 저어와 그의 죽음을 알고는 배 위에서 세 차례 꿇어앉아 큰 소리로 통곡하면서 ‘나 때문에 그대가 돌아가셨구려’하고 가슴을 치며 한참이나 울었다. 그때서야 다른 배의 병사들이 통제사의 죽음을 알고 땅을 치며 목을 놓아 울고 또 울었다.”
이분이 기록한 충무공의 최후 장면이다. 이분(李芬)은 현장에 있었던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완의 친형이다. 그러나 이 글만 보면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지만 이분이 당시 상황을 잘 모르고 쓴 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한 편의 영화장면과 같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설명 때문이다. 우선 이순신 장군이 총에 맞고 나서 처음에는 필요한 말을 제대로 하였으나 곧바로 사망했다는 대목도 이상하지만 전투가 한창일 때 총사령관 근처에 측근 군관들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라우수영의 기록을 보면 사령관 함선에는 항상 90여명의 기라졸(旗羅卒)이 배정되어 있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이 전사할 당시 서 있던 곳은 60여명의 병사들이 항상 있었던 2층 갑판상의 중앙 지점이었다.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이 사망했다면 당연히 차 순위 군관이 함대를 지휘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이 사망하였는데도 그 사실조차 아무도 모르고 있었으며 군인도 아닌 20세 전후의 맏아들과 조카가 해전이 끝날 때까지 깃발을 흔들면서 함대를 지휘하였다. 세계 해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가 마치 어린아이들의 전쟁놀이와 같이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의문점이다.
이것이 이순신 장군의 은둔설이 나오게 되는 당시의 정황이다. 전투상황을 볼 때 사령관 함선에 타고 있던 측근 군관들이 충무공의 유고시 함대를 지휘하였음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사망 조작설로 보면 이들은 장군의 아들, 조카와 마찬가지로 이순신 장군의 은폐 작전에 동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내용을 잘 아는 이분도 공모자인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에게 화가 미치지 않도록 기록을 조작하였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증거도 있다. 야간에 해전을 하면 배의 기동력을 발휘하기 어려우므로 조선군에게 불리하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은 야간에 해전을 한 일이 없다. 그러나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사망한 시각이 새벽 2시인데 이것은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은둔 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어둠을 이용했다는 뜻이다.
더구나 더 큰 의문은 맏아들과 조카가 함께 배를 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순신 장군은 전란 중에 20여 번의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는데 그들이 해전에 참가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이순신 장군이 유탄에 맞은 것을 본 유일한 목격자이며 해전이 끝날 때까지 여러 시간 동안 그의 죽음을 숨겼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들보다 더 이상 좋은 대안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은 『선조실록』(선조31년 11월 27일)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는 지적이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 당시 일본어 역관)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특히 선조 32년 2월 8일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노량(露梁)의 전공은 모두 이순신이 힘써 싸워 이룬 것으로서 불행히 탄환을 맞자 군관 송희립(宋希立) 등 30여 인이 상인(喪人)의 입을 막아 곡성(哭聲)을 내지 않고 재촉하여 생시나 다름없이 영각(令角)을 불어 모든 배가 주장(主將)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승세를 이루었다.’
장학근 해군사관학교 교수는 이분의 행장과 이에 근거한 후세의 기록은 후세인들이 이순신의 애국충정을 강조하기 위한 미화의 흔적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충무공이 살아서 금의환향하며 개선했다면 과연 죽을 때까지 구국의 명장으로 살아 있을지를 의문으로 보는 견해는 선조의 여러 가지 행태로 보아 일리가 있다는 견해이다. 보나마나 이순신 장군의 과거의 죄를 다시 묻는 상소가 빗발쳤을 것이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토끼사냥이 끝나자 사냥개를 잡아먹는 격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이 장렬한 전사를 지론처럼 이야기하자 측근들은 오히려 살아서 은둔하도록 권했다는 것이 은둔설이지만 장 교수는 “사약을 받아도 궁궐 쪽을 향해 배례를 한 후 죽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시대에 후원자인 유성룡의 파면과 고문 받아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며 “순국임에 틀림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위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분의 행장과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분은 이순신 장군의 조카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승선하고 있었던 이완의 친형임을 앞에서 적었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이완과 함께 송희립 등이 직접 목격했다면 이분이 그 당시 정황을 영화장면처럼 적을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은 이분이 당시의 정황을 영화장면처럼 묘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은둔설의 또 다른 배경이다.
공식적으로 충무공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바다에서 사망하였으며 영구는 고금도로 옮겨진다. 그 후 12월 10일 경에 고향인 아산으로 옮겨지며 장례는 다음해 2월 11일에 치러진다. 사망한지 80일 후의 일이다. 그리고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후 16년이 되는 1614년에 묘지를 600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장한다.
여기에서도 의문점이 제기된다. 이순신 장군의 사망은 11월 23일 선조에게 보고되며 12월 4일에 이순신 장군에게 우의정을 증직되고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진다. 그런데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임에도 16년 후에 이장하였다는 것도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것은 그때에 비로소 이순신 장군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장례를 다시 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때 충무공이 사망했다면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물론 이 당시 선조는 사망하고 광해군이 집권하고 있을 때이다.
이순신 장군의 은둔설은 충무공이 전사한 것으로 위장한 후 밤을 틈타 빠져 나왔다는 것을 뜻하는데 현재로 치면 해군참모총장격인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위장하면서까지 탈출을 도모하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설을 제기하는 자체가 적의 퇴로를 차단하며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전의에 불타 있었던 이순신 장군에 대한 모독이라는 견해다.
〈일본의 재침 시 누가 막을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의 은둔설이 나름대로 힘을 받는 것은 일본과의 전쟁 즉 임진왜란(7년전쟁)을 엄밀하게 분석하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명나라를 치러 간다는 명분으로 조선과 동맹을 맺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제의를 받고 소위 정탐꾼(통신사)을 공식적으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침략 야욕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찬반양론을 벌인 후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같은 결론은 전쟁을 대비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따라서 일본이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했을 때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총이라는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유린했고 선조는 허겁지겁 신의주까지 도망갔다. 다행히 명나라 원군이 참전했고 지루한 평화 협상 끝에 일본은 결국 철수한다. 일본군이 철수한 후에도 조정에서는 일본의 재침이라는 돌발 변수에 아무 준비도 하지 않다가 정유재란을 맞는다. 물론 정유재란에서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조선 수군의 활약과 일부 관군, 의병들의 선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적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일본군이 자진하여 완전히 철수하면서 전쟁은 종결된다.
그러나 일본군이 정유재란을 일으켰는데 또 다시 조선을 재공격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당시의 상황을 검토해보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순신 장군이 살아있었다면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또 다시 죽이려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점은 앞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일본이 재침해 온다고 가정한다면 이순신 장군이 사라졌을 때 누가 조선을 지킬 수 있겠는가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유재란 때는 다행하게도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국가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노량 전투에서 전사한다면 다음에 위기가 찾아올 경우 죽은 이순신 장군이 다시 나설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충무공의 부하들이 일본이 또 다시 재침한다면 국난을 지킬 사람은 이순신 장군 뿐이라고 설득하면서 은둔을 요청했을 때 이순신 장군이 섣불리 노량 전투에서 고의적인 자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적어도 이순신 장군과 부하들은 일본이 언제든지 재침해올 수 있었다고 믿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후일 일본이 재침한다고 가정한다면 노량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보다는 살아있으면서 일본이 재침할 때 다시 나서야 한다고 설득하자 노량해전에서 은둔하는 모험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의 은둔설에 대한 결정인 증거는 없다. 정말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것으로 위장하여 살아남기로 작정하였다면 치밀하고도 은밀하게 일을 추진하고 뚜렷한 증거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증거라면 증거이다. 더구나 일본은 우려한 것과는 달리 재침해 오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이 다시 나설 기회가 없이 16년 후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는 설명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언젠가 독자들에게 이런 의문도 속 시원히 밝혀질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순신 장군 동상 이전 백지화〉
서울시는 1968년 광화문에 세운 충무공 동상을 이전하려던 계획을 백지화한다고 발표했다. 조각가 고 김세중씨의 작품으로 제3공화국 시절 서울 한복판에 세워져 군사정권의 잔재라는 비판을 받아 광화문∼세종로 네거리의 광장 조성 계획에 의거 충무공 동상을 광화문 열린마당이나 충무공 탄생지인 필동 부근으로 옮길 것을 검토했다.
조선시대 서울의 중심거리는 광화문∼광교∼남대문 길이었고 지금의 광화문∼세종로∼태평로∼남대문 길은 용산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비상시에 경복궁에 신속히 이동할 수 있도록 새로 만든 것이다. 또한 태평로와 세종로는 서울역이 커지면서 본격적으로 확장됐고, 일제는 일반인들이 경복궁을 볼 수 없게 만들기 위해 도로 가운데 은행나무를 심었다.
충무공 동상을 세종대왕상으로 바꾸자는 의견도 제출되었는데 충무공 동상이 현재의 위치를 지키게 된 연유에는 풍수지리학자들의 의견이 큰 몫을 차지했다. 풍수지리학자들은 ‘세종로와 태평로가 뻥 뚫려 있어 남쪽 일본의 기운이 너무 강하게 들어오므로 이를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충무공 동상이 세워지게 된 이유도 밝혀졌다. 충무공 동상이 세워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조선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복원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거부한 뒤 ‘대신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워라’고 지시해 충무공 동상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번 서울시의 동상 이전 백지화 결정에는 인터넷 여론조사 결과 대다수의 응답자들이 동상 이전을 반대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이 살아있을 때는 물론 죽어서도 계속 한국을 지켜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04/9/18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원균과 정도전이 궁금하다면, 이곳에 와봐야 합니다 [운민의 경기별곡]
운민 입력 2021. 11. 16. 11:33 댓글 0개
[경기 별곡] 평택 2편, 논란의 인물 원균 장군 묘와 조선을 만든 정도전 사당을 가다
[운민 기자]
평택의 북부를 차지하는 송탄은 면적을 따져봐도 넓은 편이 아니지만 우리가 이름은 들어봤을 만한 인물들의 흔적이 심상치 않게 남아있다. 그중 먼저 가볼 곳은 꾸준히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원균 장군의 묘다. 대한민국에서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랑받는 위인이지만 그와 대비되어 칠천량 해전에서 큰 패배를 했던 원균은 한동안 역사의 죄인으로 남아 있었다. 송탄 시내를 벗어나 외곽으로 향하는 길은 도심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너른 들판이 싱그럽게 펼쳐져 있다. 산과 강이 듬성듬성 보이는 김포, 여주, 이천의 평야와 다르게 여유 있고 느긋한 모습이 마치 충청도 내포평야 한복판에 와 있는 것만 같다.
현재 송탄의 동쪽은 브레인시티 개발로 인해 다소 어수선한 모습을 보이는 와중에 그 초입부터 원균 장군의 묘를 알리는 입간판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우리에겐 패장으로 알려진 원균이 이 지역에서는 적어도 동네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자리 잡은 듯했다. 멀리 입구에서부터 저수지와 사당 그리고 위엄을 갖추고 있는 원균의 묘가 보이기 시작한다. 원균을 비롯한 원주 원씨 가문의 선산인 덕암산은 평택 남부에 있던 고을인 영신현의 진산이다. 예로부터 '원씨 천년, 석씨 천년, 소씨 천년'이란 말이 있는 만큼 전통 있는 마을 들과 명문 거족들이 많이 살았다. 원주 원씨가 오랫동안 터를 잡은 도일동 계곡에서 1540년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던 원준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 자체가 잔뼈가 굵은 무인 집안이었으므로 자연스레 원균도 무과에 응시하여 그의 무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원균은 아버지 원준량의 입김 덕분에 무과에서 부정으로 급제했다는 의혹과 여진족 토벌에 활약했다는 설이 있지만 둘 다 확실치 않다. 허나 전공이 아예 없진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승진 속도도 빨랐다.
원균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
원균은 과거에 급제한 지 12년 만에 경상 우수사에 오르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중간에 인사고과점수가 낮아 탄핵하여 파직되었던 수모를 겪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 조선 최대의 수군기지인 경상 우수영을 담당하는 경상 우수 절도사에 임명된다.
원균의 임진왜란 초기 행적은 여러 가지 논란이 많았지만,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이순신, 이억기와 함께 옥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최초 승전이었으며 가장 중요했던 제해권 장악의 시작이었다. 이대로 이순신, 원균이 손을 잡아 함께 힘을 모았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둘 사이의 반목은 점차 심해지게 된다.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이순신이 파직된 후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그는 이순신에 이어 부산포로 출진하려는 조정의 압력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었다. 그는 한산도에서 160척을 끌고 출격했지만 가덕도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병사 400명을 잃었다. 원균은 함대를 철수하여 칠천량(거제도 부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왜군의 수군이 기습하여 조선 수군 대부분을 잃는 큰 패배를 당했고, 그 자신도 목숨을 건사하지 못했다.
한동안 조선 수군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로 이어가게 되면서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며 명량해전을 맞게 된다. 이처럼 그는 큰 전투를 패배하게 만든 패장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임란이 끝난 후 원균은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 1등 공신으로 책록 되고 원릉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현재 원균의 묘 주변으로 생가터, 사당, 묘 등 원균 장군과 관련되어 있는 원균 길이라는 트레킹 코스도 조성되어 있고, 평택시와 원주 원씨 종친회에서 이 일대를 잘 가꾼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저수지 너머 보이는 원균 장군 묘소는 실제 유해가 아니라 장군이 아끼던 애마가 그의 신발과 담뱃대를 물고 온 것을 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묘 아래에 그 애마의 무덤도 조그맣게 조성되어 있다. 원균 장군의 묘에 올라 아래를 바라보니 경치가 정말 훌륭했다. 확실히 원균 장군은 후손들을 잘 두었기에 그의 유품이나마 좋은 터에 묻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덤가를 내려오면 보물로 지정된 원균 장군의 선무공신교서와 임진왜란 당시 쓰였던 무기와 장군의 연보를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원릉군 기념관이 있다. 전시는 비교적 충실했으나 원균 장군에 대한 변명 위주로 내용이 전개되는 듯해 조금 괴리감이 느껴졌다.
조선왕조의 기틀을 닦은 정도전의 사당
그래도 그 시대와 임진왜란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 충분했던 장소다. 다음으로 가 볼 장소는 조선왕조의 기틀을 닦은 삼봉 정도전의 사당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극 소재로 빈번해 쓰이는 소재가 여말선초 시기인데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삼봉 선생은 국가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면서 결국 조선이라는 국가를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조선의 제도는 물론 한양의 도시 설계에도 큰 관여를 했다. 경복궁을 비롯해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은 물론이고 숭례문, 흥인지문 한양의 주요 명칭은 전부 삼봉 선생이 붙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삼봉 정도전은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마자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500년 동안 폄훼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조선말, 고종 2년(1865)에 와서야 그가 세웠던 경복궁을 다시 중건하면서 그의 훈작을 회복시키며 문헌이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모든 오명이 벗겨졌다. 정도전의 사당인 문헌사는 그의 아들 정진의 사당인 희절사와 한 구역에 위치한다. 현재 문은 굳게 잠겨있어서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 옆에 자리한 삼봉 기념관은 그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기념관에는 1791년 삼봉 선생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 정조의 명으로 정도전의 저술을 집약한 삼봉집 목판을 실물로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목판은 총 228판으로 구성되어 있고,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불씨잡변>, <조선경국전>의 내용이 전부 담겨 있다고 하니 그것 하나만으로 이곳에 온 이유가 충분했다. 송탄 지역의 다사다난했던 인물의 흔적을 따라가 보니 앞으로 갈 평택의 이야기가 무척 풍성할 것 같아 기대가 된다. 덧붙이는 글 |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1권 (경기별곡 1편)이 전국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 절찬리 판매 중 입니다. 경기도 각 도시의 여행, 문화, 역사 이야기를 알차게 담았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경기도는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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