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대첩〉
학자들은 최무선이 화약무기가 조선 왕조를 탄생시킨 원동력이라고 믿고 있다. 이성계가 최무선의 함대가 진포에서 대승을 거둔 후 패잔병들을 운봉 황산에서 궤멸시키지 않았다면 고려인들의 신망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족이지만, 최무선이 해전에서 왜구의 선박들을 철저하게 격파하지 않았다면 이성계는 왜구를 격퇴하기는커녕 패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최무선은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울 때도 생존했으나 연로하여 더 이상 군기제조에 종사할 수 없었다. 그래도 태조는 전조(前朝)의 공을 참작하여 검교참찬(檢校參贊)을 제수했다. 최무선이 태조 4년(1395) 4월에 세상을 떠나자 왕은 부의(賻儀)를 후사했으며 태종 원년에 의정부우정승영성부원군(議政府右政丞永城府院君)을 추증했다.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가 가장 우려한 것은 신왕조를 겨냥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각 지방의 호족들이었다. 이들은 각자 사병을 갖고 있었으므로 언제든지 군사를 동원할 수 있으므로 이성계는 이들을 모두 사라지게 하는데 총력을 경주했고 결국 성공한다.(국사교과서에서 이를 ‘왕권강화’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가 초기에 가장 중요시한 것은 국방이었다. 조선은 국가를 세우자마자 육군과 구별된 새로운 병종(兵種)으로 수군 제도를 확립했다. 이것은 고려말 수군이 왜구를 대비하는 유효한 수단으로 인정받으면서 육군과 다른 독립된 편제와 역할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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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 모형. 판옥선은 선체가 크고 단단했으며 갑판에 6문의 포를 설치해 왜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국립진주박물관). |
조선 왕 중에서 가장 국방에 힘을 쓴 사람 중에 한 명이 태종이다. 태종은 즉위 초부터 국방 강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수군 체제도 함께 정비했다. 그의 재위 중에 수군의 군선 보유 척수는 무려 613척이나 되었다. 또한 세종에게 왕위를 이양한 후 상왕이 되자마자 소강 상태였던 왜구들이 다시 준동하자 태종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의 직접 정벌을 단행했다. 유명한 이종무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227척의 군선과 17,285명의 정벌군을 동원)에 의해 대마도에 정박해 있던 전선들이 파괴되자 대마도는 조선으로부터 정식 교역을 허가받고 노략질을 영원히 단념한다.
그럼에도 세종은 차후에 있을지도 모를 왜구의 준동에 대비하여 군선을 800여척으로 증가시켰고 수군을 대폭적으로 늘렸다. 당시 조선군 전체의 병력이 11만 명에 달했는데 수군 병력이 무려 5만여 명으로 당시 단일 병종으로는 수군이 가장 많았다. 더불어 화기의 개발과 성능 개선을 추구했는데 이 부분은 전 회에서 다루었으므로 생략한다.
조선 왕조 초기 왕들은 왕권수호를 위해 국방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수군을 대폭 확대하고 화기의 개발과 발전에 주력했으나 세조대에 들어와서 갑자기 상황이 바뀐다. 세조는 즉위하는 과정에서 단종을 폐하고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등 두 동복형제를 사사하는 등 등극 과정상에서 하자가 있으므로 누군가가 쿠데타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당연히 자신에게 대항할 세력은 군인이라고 판단하고 군사력의 억제를 기본 방향으로 삼았고 세종대에 신설되었던 사포국과 총통위 등을 혁파했다.
물론 세조 당시를 비롯하여 후대의 왕들도 때때로 군사력을 증강하는 조치 등을 취했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할 당시에는 조선군의 전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이 막상 발발했을 때 조선과 왜군과의 전투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선조는 신의주로 도망갔고 조선군은 지리멸렬하여 단숨에 멸망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조선의 저력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명나라로부터의 구원군이 있었지만 많은 학자들은 명나라 군의 조선 원조가 군사적인 면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까지 말한다. 결국 조선은 한국인이 스스로 지켜야 했고 스스로 지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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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과 판옥선의 비교 단면도. 단면도를 비교해보면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임진왜란사에 대해서는 각설하고 김시민의 진주성 전투,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 전투,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해전이 임진왜란 3대 대첩이다.
이 중에서 충무공이 지휘한 수군의 활약은 그야말로 발군으로 학자들은 수군의 활약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의 종결이 어떻게 됐을지 가늠할 수 없다고 단언해서 말한다. 충무공이 활약한 해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기록을 통해 알아보자.
충무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25일 후 1592년 5월 8일에 있었던 옥포해전에서 적 선단을 포착 26척을 격침시켰다. 이떄 판옥선 28척, 협선 17척, 포작선(어선) 46척을 거느리고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포작선과 협선은 전투함으로 볼 수 없으므로 실제 전투시에는 판옥선이 주력이었다. 그런데 적선을 26척이나 격침시켰는데도 아군은 단 한사람의 부상병도 없었고 이후 18척을 추가로 또 격침시킨다.
5월29일 제2차 출동에는 거북선 3척을 포함하여 23척의 전선이 출동하여 사천포에서 판옥선 크기의 왜의 층루선 12척과 성을 쌓고 있던 왜군 400명을 격멸시키고 다시 당포에서 층루선 9척, 중소선 12척을 모두 격침시켰으며 이억기 수사와 합세하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적선 72척을 격침시켰다. 이때 전사자가 12명이었고 부상자가 34명뿐이었다. 3차 견내량(한산도) 해전에서 층루선 35척, 중간배 17척 작은 배 7척 등 총 53척을 격침시켰음에도 조선 측은 사망자 19명, 부상자 118명이었고 침몰한 배는 한 척도 없다. 반면에 일본측의 임진왜란 전사에 의하면 견내량에서 약 1000명, 안골포에서 2500명 정도의 사상자가 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수군의 주력함은 판옥선〉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주력은 잘 알려진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7년 전인 명종 10년(1555)에 만들어진 전투함이다. 조선 초기 조선의 군선은 맹선제였다. 전투인원 80명, 60명, 30명이 승선할 수 있는 대맹선, 중맹선, 소맹선이었는데, 이것은 모두 왜선에 비해 선체가 컸으나 속력이 느린 단점을 갖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연안을 노략질하던 왜구선은 조선의 군선에 비해 선체가 작고 날렵해 우리 군선이 왜구선을 추격할 수 없었다. 조선 수군은 왜구선을 추격하기 위해 소형 경쾌선으로 전환하였지만 전투에 패배했다. 그것은 선체가 작아 적을 제압할 병사와 무기를 적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왜선에 조선 군선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자, 중종 18년 군선 제작회의에서 대형 군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중종 39년에 판중추부사 송흠이 중국선과 왜선을 보면 사면을 모두 판자를 사용해 옥(屋, 집)을 만들어 선원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다며 우리도 옥선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송흠의 제안은 수차에 걸쳐 논의됐으며 그 타당성이 인정돼 명종대에 중국, 일본과는 전혀 색다른 군선이 만들어진 것이 판옥선이다.
판옥선의 가장 큰 특징은 판옥 구조로 갑판 위에 상장갑판(上粧甲板)을 설치하고 그 좌우편에 여장(女牆)을 설치한 것이다. 이 구조는 전선에 승선한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분하여 전투원은 상장갑판 위에, 비전투원은 상하 갑판 사이에 위치하도록 하여 비전투원은 적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판옥선의 상장 위 넓은 갑판은 대포를 설치하기에도 좋아 일시에 6문의 포를 발사할 수도 있으며 사정거리도 늘릴 수 있었다.
반면에 왜수군의 대표적인 군선은 아다케와 세키부네이다.
세키부네는 선체가 홀쪽한 쾌속선으로 임진왜란에 참가한 군선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배의 폭과 높이 면에서 조선 수군의 판옥선보다 모두 작았다. 이 때문에 왜군은 그들의 기본 전법인 등선육박전술을 사용하기 어려웠고 반대로 높은 위치에서 날아오는 판옥선의 화살 공격에도 큰 피해를 입었다.
아다케는 규모에 있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체로 판옥선과 비슷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아다케는 대개 대장선이거나 지휘선이었기 때문에 해전을 할 때에 조선 수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고, 특히 갑판 위의 2 3층 누각은 조선 수군이 갖고 있는 화포의 주된 목표물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화력의 차이였다. 왜군은 조총으로 무장했는데 이민웅 박사는 이 당시 사용한 조총의 성능은 대략 조준해서 살상이 가능한 유효 사거리는 50미터 내외, 살상 가능한 위험 지역은 200미터, 최대 사거리는 500미터라고 설명했다. 이는 50미터까지는 조준해서 맞출 수 있고 200미터 밖이면 맞아도 죽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당시 조선군이 보유한 대형 화포들의 사거리를 감안한다면 판옥선과 왜선과의 전투는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판옥선은 평저선이라 단면이 U자에 가까운 반면 왜선은 V자에 가까운 첨저선이므로 그 너비가 좁았다. 외판도 판옥선은 너비가 좁은 판자를 여러 개 연결해 쓴 데 비해 왜선은 너비가 넓은 판자를 적게 사용했다. 배의 구조나 견고성은 물론 화포의 성능에 있어 조선 수군이 왜선에 비해 압도적인 우세였다는 것이 결국 수전에서의 근원적인 승리의 요건이라고 볼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도 판옥선의 우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군이 수전에 패한 것은 그들이 수전에 능하지 못해서 패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군선이 견고하고 장대해 대포를 안치하고 안전하게 전투에 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옥선은 높은 누각이 있으므로 적선에 가까이 접근하려면 2층의 갑판이 적에게 노출된다는 취약점이 있었다. 이 점을 보완하여 갑판 위에 덮개를 씌워서 보호한 것이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판옥선에 다만 개판 하나를 더 씌웠을 뿐임에도 판옥선으로서는 수행하기 어려운 접근전에 의한 공격과 교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음이 장점이었다.
〈세계를 놀라게 한 명량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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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의 명량대첩기념비. 숙종 14년(1688)에 세워졌으나 일제 강점기시 피해를 입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졌던 것을 1945년 해방 이후 우수영 유지들에 의해 원래 세워졌던 장소로 회수됐다(보물 제 503호). | 1597년 음력 9월 16일, 좁은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13척의 함선은 일본 전함 133척(200여 척이라는 설도 있음)에 포위되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잠시 뒤, 바다 위에는 13척의 조선 전함만이 남았다. 13척으로 133척을 대파한 믿을 수 없는 승리였다. 이 해전이 바로 명량대첩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13척으로 133척의 함대를 어떻게 물리칠 수 있었을까. 대다수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이 있었고 무적함대인 거북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거북선은 명량해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완벽하게 승리한 이유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한 마디로 왜선이 1000척이었다고 해도 조선 해군이 승리했다고 장담하는 것이다. 충무공의 여러 전적 중에서 명량대첩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전라남도 해남의 어란진은 현재 약 200호가 사는 작은 어촌이지만 1597년 9월 7일 133척의 전함과 보습선, 연락선 등 총 500여 척의 일본 함대가 집결했다. 이곳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133척의 일본 대 선단은 9월 16일 이른 아침 어란진을 출발한다. 그들의 목적지는 조선 수군이 진을 치고 있는 우수영으로 지금의 진도대교가 가로놓인 울돌목을 통과하는 것이다.
이 당시 조선 수군의 전력은 모두 13척, 133척의 일본 대함대를 싸우기 위해 역부족으로 보이지만 이순신 장군의 독려로 우수영을 떠나 명량해협으로 진군한다.
이순신 장군은 이 날의 일기인 『난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싸여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군사들이 모두 사색이 되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나머지 배들도 겁을 먹고 진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단 2시간 만에 막을 내린다. 전투의 결과는 그야말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선 수군의 대승이었다. 『난중일기』에 적힌 이날의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이순신 전함의 전사자 2명, 부상자 3명.’
학자들은 이 당시 총 13척을 가진 조선 수군의 총 피해는 전사자 약 30명, 부상자 약 40명으로 모두 70∼100명 미만의 사상자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반면에 일본 수군의 피해는 막대했다. 각종 기록을 종합해 추정해보면 일본이 입은 피해는 다음과 같다.
격침된 배는 31척, 약 90척은 심하게 파손된 채 도주했다. 격침된 배의 전사자는 최소한 3500명, 당시 격침되지 않은 배에 타고 있던 일본 수군을 총 9000명으로 추정하는데 학자들은 이들 중 절반 가량인 4500명이 조선군의 포탄에 맞거나 화살에 맞아서 전사하거나 바다에 빠져 익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명량해전 단 한 전투에서 일본 수군 8천 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조선 수군의 전함은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었다. 13척으로 133척을 물리친 신화적인 전투로 일본은 씻을 수 없는 대참패의 오명을 남겼고 이 전투를 이끈 이순신 장군은 세계 해전사에 유례없는 이름을 올렸다.
〈전선 12척이 남아있다〉
원래 조선 수군도 명량 해전 전에는 상당수의 전투함을 갖고 있었지만 명량해전에 막상 참가한 조선 수군의 배는 고작 13척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은 원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대패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적은 이때의 전과는 다음과 같다.
‘일본 장수 시즈마 160여 척 격파, 도도 60여 척, 야스하루 16척, 목을 벤 자만도 수천 명에 이르며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전멸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중에서 여러 가지 중요성과 의미를 갖고 있는데 우선 일본군이 처음으로 수군과 육군의 양면작전을 펼쳐 조선군을 격파했다는 점이다. 반면에 조선 수군은 지휘관인 원균이 수육양면작전의 필요성을 역설했음에도 이를 묵살 당한데다가 도원수 권율로부터 해군참모총장격인 원균 장군이 곤장을 맞는다. 원균 장군은 육군과 수군이 연합작전을 펼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전황을 잘 모르는 조선 정부의 압력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수군 단독으로 출전했는데 전투 결과는 원균 장군의 예상과 같았다.
거제도 앞바다의 좁은 포구에 정박했던 조선 수군은 왜수군의 기습을 받아 상당한 피해를 입자 육지에 상륙하여 전세를 수습하려 했으나 육지에 미리 매복하고 있던 일본 육군에게 원균 장군, 이억기 장군 등을 비롯한 수군 지휘관들이 거의 전사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피해는 당시 조선 수군의 배가 모두 134척이었는데 도주한 배 12척을 빼고 모두 침몰되었다는 점이다.
수군의 존재가 거의 사라진 것이다. 조선 수군의 참패는 임진왜란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해상권은 조선이 갖고 있었는데 이 전투 후로 해상권마저 일본군이 갖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왜수군이 해상권을 확보했다는 것은 왜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던 후방보급이 보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왜군은 조선 수군 때문에 한반도의 서해 진출이 봉쇄되었지만 칠천량 전투의 승리로 이런 걸림돌이 해소되었다는 것이 왜군으로서는 큰 성과였다.
이 당시 이순신 장군은 권율 장군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고 있었다. 원균의 패배로 허둥대던 조선이 찾은 방책은 이순신 장군을 다시 복권시키는 것이다. 당시 선조가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지난날 그대를 백의종군케 해서 오늘 이런 패전의 욕됨을 입었으니 무슨 할말이 있으리요. (중략) 그대는 부디 충의를 굳건히 하여 다시 나라를 구해주기 바란다.’
선조의 사과문을 담은 이 교서를 받은 이순신은 곧바로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 작업에 착수하지만 이순신 장군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신이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는 세곡(稅穀)을 보관하던 조양창을 찾았지만 창고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군의 기반이라고는 불과 네 마리의 말에 실은 무기와 120명의 군사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추석 저녁 뜻밖의 어명을 받는다. 군사를 모두 합쳐 육전에 참가하라는 것이다.
조정에서는 배도 없고 무기와 군인도 없으므로 권율이 이끄는 육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이었다. 반면에 이순신은 왜적을 바다에서 막아야만 조선군이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은 수군 철폐를 반대하는 장계를 올린다.
“지금 신(臣)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 수군을 폐지하면 이는 적이 바라는 바로, 적은 호남을 거쳐 쉽게 한강까지 진격할 것입니다. 오직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비록 전선이 적으나 신이 아직 살아 있으므로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단 12척의 함선으로 왜수군을 격파하겠다는 이순신의 비장한 장계로 조선 수군의 명맥은 유지된다. 1597년 8월 18일, 이순신은 장흥 화진포에 도착하여 12척의 배와 새로 합류한 배 한 척, 모두 13척으로 조선 수군을 새로 조직하고 최후의 결의를 밝힌다.
“임금의 명을 받았으니 함께 죽는 것이 마땅하다. 나라를 위한 목숨이 무엇이 아까우랴.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율돌목의 지형 지세를 이용한 충무공의 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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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 울돌목. 충무공은 단 13척의 판옥선 이끌고 울돌목에 설치한 수중 철쇄로 왜선들을 봉쇄한 후 화약무기 등을 발사하여 대파했다고 알려졌다(정영옥 사진). |
조선 수군이 갖고 있는 판옥선이 왜수군의 선박보다 앞선다고 해도 13척으로 133척을 상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단 한 척도 손상 없이 일본에 완승을 거둘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울돌목의 엄청난 조류를 조선 수군이 갖고 있던 비장의 무기로 제시한다. 이순신 장군이 울독목의 조류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현재 해남과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 아래가 울돌목이다. 이곳은 암초에 빠른 물살이 부딪혀 소리가 날 정도로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다. 요즘도 웬만한 배가 아니고서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국립해양조사원〉은 울돌목의 유속이 빠른 것은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나가는데 이때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급조류를 만든다고 설명했다.
울돌목 물살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암초가 있다는 것이다. 급조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치는 것이다.
그런데 〈KBS역사스페셜팀〉은 울돌목의 급조류가 왜수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아니라고 분석했다. 왜수군도 울돌목의 강하고 빠른 물살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 시코쿠(四國)의 미야쿠보 지역은 왜수군의 탄생지인데 이곳도 울돌목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조류가 흐르며 물의 속도 또한 울돌목에 못지 않다. 왜군도 시코쿠에서 잔뼈가 굳었기 때문에 물살을 이용해 능숙하게 항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명량해전에 참전한 왜수군에게 울돌목의 빠른 물살은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학자들은 오히려 왜수군이 울돌목으로 과감하게 진입한 것은 급류를 이용하여 조선 수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왜수군은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이 괴멸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전술 중에 하나가 학익진(鶴翼陣)이다. 적진을 향해 진격하다가 갑자기 180도로 회전, 반대방향으로 도망가면서 적선을 유인한다. 전선이 최대 사정거리에 들어오기 직전 다시 180도로 회전해서 따라오던 적선을 에워싸는 것이 바로 학익진법이다.
그러나 울돌목에서는 학인진법도 효과를 발휘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빠른 물살에 잘못하다가는 배가 휩쓸려 떠내려가 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순신 장군의 기상천외한 비술이 태어난다. 가장 폭이 좁은 진도와 해남 우수영에 쇠줄을 연결해서 당기도록 사전에 준비한 것이다.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에 ‘철쇄(鐵鎖) 즉 쇠사슬과 철구(鐵鉤)로 적선을 깨뜨렸다’란 기록이 보인다.
목포 해양방어사령부에는 지금도 수백 척의 배를 끌어당길 때 쓰는 막개가 있는데 학자들은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이런 막개를 이용한 쇠사슬 전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울돌목의 폭은 280∼320미터 안팍이다. 여기에다 배를 끄는 데 필요한 쇠사슬의 길이를 감안하면 450미터 안팎의 쇠사슬이면 충분하다. 쇠사슬의 무게는 배의 무게를 감안하여 4톤 정도로 추정했다.
〈KBS역사스페셜팀〉은 당시의 전투를 다음과 같이 재현했다.
‘수중 철쇄는 지금 진도대교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걸었다. 양쪽에 막개를 박아놓고 쇠줄은 물 속에 잠기게 숨겨놓은 뒤 왜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1597년 9월 16일 오전 11시경, 어란진에서 출발한 133척의 왜수군은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에 들어선다. 그들이 울돌목에 들어서자 수중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쳐 여지없어 부서진다.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춘다. 왜수군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가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의 함선들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처럼 퍼붓는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왜수군 쪽으로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져 불리하게 변하자 조선 수군이 떠내려가는 왜수군을 완전히 섬멸한다.’
철쇄와 울돌목의 물길을 이용한 이 작전으로 왜수군은 손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전멸하고 조선 수군은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이 대승을 거둔다. 한 순간 빼앗겼던 조선의 해상권을 되찾아온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민웅 교수는 2004년 7월, ‘실제 명량해전이 치러진 전장은 진도와 해남 군 사이에 위치한 명량해협(울돌목)이 아니라 해협을 통과한 뒤 해남군을 따라 우측으로 구부러진 지점인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 앞바다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난중일기(亂中日記)』 9월16일자에 나오는 ‘왜함대의 접근보고를 받고 전투준비를 마친 뒤 바다로 나갔는데 곧바로 왜선 133척이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는 기록을 볼 때 명량에선 조류가 멈추는 정조기(停潮期)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이와 같은 장면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 철쇄를 설치해 왜선을 격퇴했다는 앞서의 설명에 대해서도 후대 영웅담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화’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전라좌수영 앞에 방어용 철쇄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명량해전에서 철쇄는 물살이 세서 걸 수가 없었으므로 사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앞으로 관련 전사 전문가들이 보다 정확한 결론을 내릴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더 이상 상술하지 않지만 명량대첩의 해전이 울돌목에서 일어났든 전라좌수영 앞에서 일어났든 133척의 왜선이 이순신 장군의 13척에 의해 여지없이 격파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1905년 러시아 함대를 궤멸시킨 일본의 영웅 도고(東高) 제독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를 영국의 넬슨 제독과 비교할 수는 있지만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는 견줄 수가 없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순신 장군을 따라갈 수는 없다.” 04/8/16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4) |
가장 큰 승전 요인은 파괴력 훨씬 큰 화포 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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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승전 비결〉
조선 수군의 활약을 이해하려면 이순신 장군이 어려운 여건인데도 불구하고 해전마다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을 정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군사평론가들은 이순신 장군의 승전 비결을 다음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충무공이 사용한 거북선의 탁월한 군선으로서의 역할이다. 거북선은 특수한 구조로 제조되어 거북선의 등에 송곳을 꽂아 적이 그 위에 기어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에 거북선내의 장병들은 안전하게 선실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적탄에 의해 살상될 염려가 없었으므로 이것이 조선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거북선은 머리를 비롯하여 10여 문의 대포를 장치하였기 때문에 전후 좌우 사방에서 적선에 접근하여 함선을 파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선으로 뛰어 들어가서 적병을 무찌를 수도 있었다.
둘째는 화포의 활용을 들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사용한 대포는 천자포(天字砲). 지자포(地字砲). 현자포(玄字砲). 황자포(黃字砲)등이고 각종 완구(碗口). 질려포(疾藜砲)외에 승자총통(勝字銃筒)과 신포(信砲)와 대포에서 발사되는 각종 피사물체(被射物體)가 있었다. 대장군전(大將軍箭). 장군전(將軍箭). 차대전(次大箭). 피령전(皮翎箭). 수철연의환(水鐵鉛衣丸). 단석(團石). 철환(鐵丸). 조란탄(鳥卵彈). 화전(火箭). 대발화(大發火)등이 그것이다.
화살 미사일격인 대전은 최고 400미터, 대포알인 철환은 1킬로미터나 날아갔다. 완구는 지름 20센티미터 정도의 돌덩이나 포탄을 장전해 발사했고 신기전은 한번에 100발을 발사하는 로켓으로 신호용으로도 사용했다. 특히 총통류의 사정거리는 세종 이후 중국에서 전래된 기존의 총통을 개량, 격목을 이용해 화약의 폭발력을 극대화시키는 독창적인 방식을 개발해 가까이는 수백 미터 멀리는 4킬로미터 정도까지 날아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 이 방식은 포탄이 떨어지면 돌을 넣어 쏠 수도 있어 무기로서는 매우 효율적이었다.
한편 일본은 사정거리 300미터 정도의 대통이라는 대포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왜적의 장기는 단병접전(短兵接戰)이다. 조총으로 우리 탑승원을 사살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 함선에 기어올라 이른바 돌격전을 감행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의 큰 전함인 대흑주에는 대포가 겨우 3문, 그것도 구경 3센티미터 짜리가 장치된 반면 일본도가 200자루나 되는 점들은 왜군은 접전에 능하므로 단병접전 전술을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수군에게는 이와 같은 그들의 전법이 먹히지를 않았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이 근접전을 벌이는 육전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하였지만 엄청난 살상력과 파쇄력을 가진 대포로 무장한 조선 수군에게 대적할 수는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해전의 전투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 뱃머리를 돌려서 빗발같이 대포를 쏘았다. 이로 인해 세 함선에 타고있는 적의 대부분이 사살되었다. 이어 녹도만호(鹿島萬戶)의 배와 평산포대장(平山浦代將) 정응두의 배가 도착하여 세 척의 배가 포를 집중하였더니 왜선 갑판 위에는 적의 그림자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셋째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당파전술(撞破戰術)을 들 수 있다. 함포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적함을 파쇄하거나 탑승원을 사살하지만 당파전술이란 적선에 접근하여 충격을 가함으로서 완전히 격침시키는 것이다. 당파전술이 가능하였던 것은 조선 수군 전함의 견고성에 기인한다는 것도 앞에서 설명했다.
그러나 세 가지 승전 요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라해도 화포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수군의 화포는 워낙 왜군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있으므로 당초부터 해전에 관한 한 왜군은 조선 수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최무선이 세계 최초로 고안한 함선 내의 화포 사용 전술을 계승한 조선군이 왜군의 대포가 미치지 못하는 거리에서 왜군을 향해 발사하는 것을 왜군이 당해낼 수는 없었다.
임진왜란을 평할 때 많은 학자들이 조선 정부가 당파싸움을 하느라 임진왜란에 적절히 대비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많이 한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비록 조선 정부가 무능했다고는 하지만 화포를 개발하고 화약을 자체로 공급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이 조선에 있었고 또한 화약무기를 해전에서 유효적절히 사용하는 노하우(know-how)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비록 위정자들은 세계 정세를 잘 모르고 당파싸움에 빠져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꿋꿋이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보존하는 최무선과 같은 과학자들의 후예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거북선의 전설〉
우리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던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그동안의 연구에 의해 여러 부분에서 과장되거나 잘못 알려져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3공화국 시절 이순신 장군을 미화시킨 것처럼 거북선에 대한 진실이 감추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거북선에 따라다니는 의문점을 알아본다.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 잠수함이라고 알려진 때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철갑 잠수함인 거북선이 바다 밑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일본 배 밑에서 떠올라 배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쥴 베르느 원작의 『해저 2만리』에 나오는 네모 선장의 노틸러스 호보다 더 오래된 무적의 철갑선을 한국의 이순신 장군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거북선이 철갑 잠수함이라는 이야기는 사라지고 배의 상부가 철갑으로 되었다는 철갑선으로 변한다. 그러더니 이제는 철갑선도 아니라는 설까지 나온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승리하게 되는데는 거북선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부 사료를 보면 매우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다.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국사편찬위원회가 1995년도 말에 편찬한 『한국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종래 해전 승첩의 주된 요인의 하나로 인식되어 온 거북선의 위력이란 것은 사실과 달랐다. 우선 그것은 모두 3척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중에서도 초기 해전에 동원된 것은 2척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장갑선(裝甲船)이란 점에서 사부(射夫)들이 전투하는 데에 불편하였으며 판옥선에 탑승한 군사들에 비하여 사상자들도 많았다. 이순신의 장계 가운데 거북선이 최초로 동원된 2차 출전 때부터 4차 출전 때까지 전라좌수군의 사상자는 모두 165명이었는데 그 중에 두 척의 거북선에 탑승한 사상자가 24명이었다. 이것은 판옥선 23척의 사상자 통계 141명과 비교해 볼 때 거북선에 탑승한 군사들의 피해가 훨씬 컸음을 말해 준다.
만일 거북선의 위력이 대단하였다면 정유재란 이전 휴전기에 단 한 척이라도 더 건조되었어야 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으며, 명량해전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던 사실만으로도 그것의 위력이 지나치게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때 육군 중심의 침략군을 편성하고 수군은 수송의 임무를 주로 하였기 때문에 전쟁 시작부터 끝까지 군선에 대포를 적재하지 않았다. 통신사 황진은 ‘왜인들도 배부림을 일찍이 익혀 왔지만 가볍고 빠른 것만이 좋은 줄 알고, 완전하고 두꺼운 것이 믿음직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대포는 없고 항상 조총을 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조선 측의 주력선은 판옥선인데 판옥선은 군선이라는 측면에서 선체가 커 많은 전투원과 화포 그리고 각종 군수품을 적재할 수 있는 장점과 아울러 선체에 판옥을 설치함으로써 주 갑판에 있는 노 요원과 사수(射手)의 안전을 보장하고 상갑판에서 화포의 구사를 용이하게 하였다.”
상술한 국사편찬위원회의 발표 내용은 기존의 지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러면서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거북선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거북선은 돌격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판옥선의 장점을 유지 발전시키고 판옥선의 단점을 보완한 군선이었다. 판옥선의 장점이란 선체가 높아 적이 기어오르지 못하고 포좌를 상갑판에 설치하여 화력의 효율을 높였다는 점이다. 거북선은 이 장점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주갑판 위에 상갑판을 설치하고 노 요원과 사수를 주갑판에, 포 요원을 상갑판에 위치케 하고, 상갑판 위를 덮개로 씌워 전투 요원까지 안전을 보장하려 하였다. 그리고 판옥선의 단점인 선체가 무겁고 속력이 느린 점을 보완키 위해 선체를 판옥선보다 작게 만들었다. 해전 상황에서 항해 요원과 전투원의 안전을 보장한 군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군선인 거북선이 유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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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350여 년 전 거북선 그림. 3층 짜리 군선의 모습과 배 위에서 회의 중인 장수와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
〈거북선의 구조〉
거북선의 전체 길이는 약 35미터에 이르며 노의 수는 16개 또는 20개로 매우 큰 배임을 알 수 있다. 승무원의 수는 180여 명에 달했는데 이와 같이 많은 승무원이 필요한 이유는 노를 젓는 인원 때문이었다. 각 노에는 5명의 인원이 1조가 되므로 20개의 노에 100명의 인원이 필요했다. 여기에다 20명의 예비병을 따로 두었으므로 노를 젓는 사람만도 총 120명이나 된다.
일본의 『역사기』에 보면 거북선의 독특한 시공 기술이 적혀 있다.
“길이가 3∼4자인 두꺼운 널판자에 구멍을 뚫어 서로 이어 붙이는 수법으로 만들었으며 판자의 접촉 면에는 밀착제를 발랐으므로 마치 도자기의 겉면과 같이 물이 샐 틈이 없었다.”
거북선의 속도는 놀랍게도 시속 20킬로미터가 넘는 대단히 빠른 속도였다. 배의 속도가 빨라지게 되면 수면파(水面波)에 의한 저항이 커지는데 거북선은 길게 뒤로 뻗은 현판으로 수면파에 의한 물의 저항을 크게 감소시켜 속력을 내도록 되어 있다.
거북선에 사용된 노의 특징을 남천우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 서 있는 자세에서 노를 젓게 되므로 앉은 자세로 상체만의 동작으로 노를 젓는 서양식 노보다 큰 힘을 낼 수 있다.
(2) 노를 젓는 동작이 단순하므로 경험이 없는 초보자라도 노를 저을 수 있다.
(3) 노가 측면 쪽으로 뻗어 나와 있지 않고 뒤쪽을 향하면서 물 속에 잠겨 있으므로 근접전을 주특기로 할 수 있다.
(4) 전투용 선박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배의 선회 능력이 극대화되었다.
(5) 바닥이 평저형이며 앞쪽이 30센티미터 정도밖에 물 속에 잠기지 않으므로 해안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마치 현대의 상륙용 주정(舟艇)에서 뛰어내리듯이 어떤 해안이라도 상륙하여 전투 중에 피신하거나 노략질하고 있는 적에 대해서 즉각적인 응징을 가할 수 있다.
(6) 현판 위의 측면이 좌우 수평으로 크게 튀어나와 있으므로 노와 현판을 보호할 수 있음은 물론 적이 배에 기어오를 수가 없었다.
거북선은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하여 모두들 친근한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알려진 거북선의 구조는 정확한 것이 아니다. 정부에서 발표한 공식적인 모형조차도 통제영 귀선과 좌수영 귀선을 적당히 조합하여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거북선의 외형은 정조 때 발간된 『충무공전서』를 대부분 참고하였다. 그러나 『충무공전서』는 충무공에 대한 당시의 자료를 아주 세심하게 모아 발간된 책으로 신뢰성이 높기는 하지만 임진란 당시의 거북선 설계도가 아니라 정조 때의 설계도를 기준했다는 모순점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거북선의 구조에 대한 가설은 매우 많다.
해군사관학교의 장학근 교수는 거북선의 구조가 일반에 알려져 있는 2층 구조가 아니라 침실과 군량 무기고로 사용된 1층 선저가 있었고 2층에는 사부와 격군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3층에 포대를 설치 화포를 발사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노 젓는 층과 포 쏘는 층을 구분해야 돌격선의 본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노와 포가 한 층에 있는 2층 구조였다면 거북선이 순간의 기동력이 승패를 좌우하는 해전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증빙할 수 있는 그림도 공개됐다. 2004년 8월에 공개된 조선시대 거북선을 묘사한 그림에는 비단천에 용의 머리와 거북의 몸체 형태를 지닌 군용선 4척의 모습이 있는데 이곳의 거북선은 3층 구조로, 군단을 이루고 있다. 등이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을 띠고 있으며, 걸어다닐 수 있는 길이 그려져 있다. 조지아대에서 탄소동위원소 방식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300~350년 전 추정되었다. 또한 거북선의 크기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작았다는 설이 많이 있다. 선체의 길이 25미터, 너비 7미터, 높이 5미터 정도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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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조련도, 거북선이 다소 작게 그려져 있다(국립중앙박물관). |
서지학자 이종학도 1998년 12월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길이와 제작연대 등을 기록한 자료가 발견되었는데 거북선의 크기가 매우 적다고 발표하였다. 이들 자료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별도 문서의 낱장 20여 쪽으로 거북선 제작에 관한 보고, 인사 명령, 병사의 명단 및 병력 편제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다. 자료에 의하면 계사년(1593년) 9월에 거북선을 제작했는데 거북선의 몸체는 길이가 약 18미터, 높이가 약 4.8미터로 현재까지 알려진 거북선의 길이인 약 35미터에 비하여 매우 작다. 앞뒤로 돛대를 두개 달았고 병사들이 선박 양쪽에서 각각 8개의 노를 저었다는 기록도 있다. 거북선의 크기가 이와 같이 다른 것은 여러 크기의 거북선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는 거북선에 대한 또 다른 연구과제가 되리라 생각한다.
〈거북선은 충무공이 처음으로 만들었을까?〉
거북선이란 이름의 배는 이순신 장군이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태종실록』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서로 해전 연습을 하는 것을 구경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태종 15년(1451년)에 좌대언 탁신이 ‘거북선의 전법은 많은 적에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승리를 얻어내는 훌륭한 방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북선을 더욱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싸움에 이기는 군선으로 만들어야 합니다’라는 뜻의 상소를 올렸다. 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0년 전의 기록으로 조선 초기에 거북선이라는 배가 엄연히 존재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태종 때의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매우 다르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선체 위 전면에 걸쳐 판옥을 가설하여 갑판을 2중으로 만든 혁신적인 군선인 판옥선을 바탕으로 하여 그 상갑판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둥그런 궁륭용 개판(蓋板)을 덮어씌운 배이다. 그러나 태종 시대의 군선은 모두 상장이 별로 없는 평선(平船)이었다. ‘거북선의 구조를 더욱 튼튼히 하고 교묘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탁신의 주장은 거북선이 평선이었음을 뒷받침한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건조한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난중일기(亂中日記)』,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이분이 쓴 『행록(行錄)』 세 가지이다.
임진왜란이 발발되기 바로 전 해인 선조 24년(1591)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왜구의 내침을 미리 염려하여 본영을 비롯한 수군의 각 진(鎭)에 대한 전쟁 준비를 급속히 강화하는 한편, 특수전투함인 거북선의 건조를 착수하였다.
『난중일기』에는 임진년 2월 8일에 ‘이 날 거북선의 범포(帆布) 29필(匹)을 받아들였다’고 되어있고, 동 3월 27일에는 ‘거북선의 방포(放砲)를 시험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 4월 11일에는 ‘비로소 돛을 만들다’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다 대포를 탑재하여 실전용으로 완성된 것은 왜란 직전인 4월 12일이었다. 그리고 실전에 투입된 것은 5월 29일 사천양 해전이 처음이었다.
충무공이 제2차 출동 후의 임진년 6월 14일에 올린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는 ‘신이 일찍이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따로 거북선을 건조하였습니다.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고 전선 수백 척 속에라도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쏘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 싸움에 돌격장으로 하여금 거북선을 타고 적선 속으로 뚫고 들어가 천, 지, 현, 황 각 종류의 포를 쏘게 했습니다’라고 적혀있다.
또 이순신 장군의 맏형 의신의 아들로 임진왜란에 종군한 이분(李芬)이 쓴 『행록』에는 ‘거북선을 창작하니 크기는 판옥선만한데 위에는 판자를 덮고 판자 위에 십자 모양의 좁은 길을 내었다’라고 적었다. 이상이 거북선 건조에 관한 기록의 전부이다.
내용이 너무나 간략하고 단편적이어서 거북선 건조의 시말을 자세히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거북선은 왜구의 침해가 심했던 고려 말기부터 개발되기 시작하여 조선 초에 만들어져 사용되다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에 의하여 다시 건조된 후 전투에 참전한 것이다. 즉 충무공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었으나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전래된 거북선의 개념을 도입한 새로운 전선을 개발하였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북선의 원형이라 볼 수 있는 고려말의 평선과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은 구조 등이 다르므로 이순신의 거북선이 비록 전래된 아이디어를 채택했지만 독창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거북선은 철갑선이었을까?〉
거북선이 철갑선이냐 아니냐는 여러 학자들간에 이견이 많고 또 우리들에게 관심이 가는 사항이다. 일반적으로 거북선은 철갑선이었다고 주장되고 있으며 해군사관학교에서 제작한 실물 크기의 거북선에도 철갑 개판이 씌워져 있다.
한산도해전에서 패한 왜장의 기록에는 거북선을 철갑선이라 말한 내용이 있다. 『충무공전서』의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에도 6각형으로 된 거북등 모양의 덮개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많은 사료와 전언에도 불구하고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니라 외형만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다.
사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조선공학적인 측면에서 거북선은 판옥선과 거의 동일하며 제작 상에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데 의견을 모은다. 더구나 충무공 해전의 기록을 보더라도 거북선 몇 척의 역할로서 적을 모두 쳐부순 것은 아니며, 거북선과 판옥선은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적을 섬멸하였다. 말하자면 각 해전에서 판옥선 1척이 쳐부순 적선의 수효와 거북선 1척이 쳐부순 적선의 수효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측 기록에도 거북선이 철로 장갑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인갑(鱗甲)’ 또는 ‘구배갑(龜背甲)’ 등의 표현은 있으나 이 단어만으로는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것을 확언할 수는 없다. 더구나 충무공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도 송곳을 꽂았다고는 되어있으나 철로 덮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또 전선을 만들었다. 크기는 판옥선과 같으며 상부는 목판으로 덮었는데, 판상에 십자형 세로(細路)가 있어 사람이 위에서 걸어다닐 수 있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칼과 송곳을 꽂았다”라는 이분의 글은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라는 증거로 제시된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덮개로서는 목판이 더 좋으며 철갑은 불필요하다는 견해이다. 거북선은 돌격선이기 때문에 순발력이 있고 속력이 빨랐는데 철판은 목판에 비해 15배 이상 무거우므로 전투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철판은 빗물과 바닷물에 녹슬기 쉽고 수명이 짧고 쇠송곳을 꽂기에도 오히려 목판이 좋다는 뜻이다.
그러나 적에게 겁을 주기 위하여 거북선을 철선처럼 위장하였을 가능성은 크다. 왜군들이 시꺼먼 거북등 모양의 덮개를 보고서 철갑이라고 오인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결국 군선으로서는 철갑이 불필요하지만 적에 대한 심리적 효과를 감안할 때 철갑으로 위장하였을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요즈음처럼 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목조 전함에 철판을 씌운 정도로 추정하기도 한다.
〈수중에서 거북선이 발견될까?〉
임진왜란 때 사용한 거북선은 3척(전라좌수영에서 건조된 영귀선, 방답진에서 만들어진 방답귀선, 순천부의 순천귀선 등 3척)인데 현재 단 한 척도 남아 있지 않다. 한편 임진왜란이 끝난 후 숙종 때까지 거북선이 5척 있었으나 정조 때에 무려 40여 척으로 늘어났으며 순조 때에는 30척으로 줄어들었다.
여하튼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이 발견되면 좋겠지만 후대의 거북선이라도 바다에서 인양되어 우리들에게 거북선의 신비를 보여주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75년 전라남도 신안군 해저에서 14세기 원대의 무역선이 발견되어 수많은 청자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도 거북선이 발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하여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학자들은 한마디로 결론부터 말하면 바다 밑에 거북선은 없다고 추정한다. 왜냐 하면 목선인 거북선은 물 속에 가라앉지 않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목선의 특수성 때문이다. 커다란 목선이 물에 떠 있을 수 있는 것은 목재의 비중이 물보다도 훨씬 가볍기 때문이다. 송판의 비중은 약 0.5이다. 학자들에 따라 거북선의 배수량을 65톤에서 150톤까지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거북선 선체의 배수량이 65톤이라면 부피는 130입방미터이며 바닷물의 비중이 1.03이므로 적어도 69톤 이상의 추가적 하중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물 속에 가라앉지 않는다. 즉 거북선을 강제로 침몰시키려면, 적어도 80톤 이상의 무게가 필요하다.
사실 거북선은 전선이므로 많은 화포들이 탑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가장 큰 천자총통(天字銃筒)의 무게가 0.4톤이고 지자총통(地字銃筒)이 약 0.3톤이다. 그러므로 화포가 10대 있었다고 가정할 때 화포 전체의 무게가 4톤을 넘지 못한다. 거북선 안에 탑재된 포탄의 무게를 감안하더라도 거북선을 바다 속에 가라앉게 만들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고대의 목선들이 해저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모두 특수한 조건하에서 조난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경우에 목선은 난파되거나 또는 격파되더라도 오늘날의 철선처럼 물 속에 가라앉지 않는다. 신안 해저의 무역선이 바다 속에 가라앉은 것은 수십 톤에 달하는 동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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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선천공충(좌)과 목재에 구멍을 뚫어 놓은 흔적(사진 박상진). |
당시의 전투를 보면 더욱 목선이 침몰하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 형태를 생각해 보면 철선의 경우 격파나 격침은 결국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지만, 목선의 경우 격파는 있지만 격침은 없다. 충무공의 전승보고서마다 ‘대포를 쏘아 맞춰서 철환으로 뚫어 깨트리고 마침내 불태워 없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충무공이 언제나 적의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한 다음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으로 적함을 파괴하여 적함을 무력화한 뒤 불태웠다는 뜻이다.
1597년 7월 16일, 경상남도 고성 땅 추언포에서 왜군에게 패배한 원균 장군도 싸우다가 패한 것이 아니다. 상부의 무리한 명령으로 강행군을 하여 모두들 지쳐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밤중에 기습을 받고 혼란에 빠져 거의 모든 전선을 잃은 것이다. 선전관 김식은 그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추원포 앞바다에서 원균과 함께 육지로 올라왔는데 적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여러 배들이 불타 불길이 하늘을 메웠는데 몇 척의 전선은 다행히도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1992년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 장착됐던 총통이라는 ‘귀함별황자총통’이 발굴되자 거북선도 조만간 발견될 것이라는 희망이 나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군이 추원포 앞바다에서 여러 해 동안 거북선 탐사작업을 벌였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더욱이 곧바로 국보로 지정된 ‘귀함별황자총통’은 시중 골동품상에서 구입한 것으로 판명되어 세인을 놀라게 했다. 한편 박상진 교수는 거북선이 침몰하지 않았다는 주장 자체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했다. 목재조직학이 전공인 박 교수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목선이 가라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무의 횡단면을 잘라보면 마치 벌집을 연상시킨다. 육각형 모양이 진짜 나무 부분(세포벽)이고 나머지는 빈 공간이다. 나무가 물속에 들어가면 우선 세포벽이 물로 포화되고 이어서 빈 공간 속으로 물이 스며든다. 그런데 나무 세포벽 자체의 비중이 1.5나 되므로 물로 완전히 포화되었다면 전체적으로 바닷물의 비중(1.03)을 넘어서게 되어 가라앉는다. 실제로는 완전 포화되기 훨씬 전에 가라앉는다. 비중이란 무게를 부피로 나눈 값인데, 나무가 물을 빨아들임에 따라 무게와 부피는 모두 증가하지만 부피는 거의 증가하지 않는다. 즉 무게 증가만 계속되므로 비중 역시 계속 증가한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 이르면 바닷물의 비중을 넘어서게 되어 나무도 가라앉는 것이다. 또한 전투 중에 배에 구멍이 났거나 반쯤 파괴되는 경우, 선박에 실려있는 무기와 병사들의 생활용품 때문에 추가 하중이 발생하므로 더 빨리 가라앉는다.’
그러나 박 교수는 설사 목선이 가라앉았더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목선을 찾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바다 속에 살고 있는 바다벌레들 때문이다. 목선이 침몰하면 제일 먼저 목선천공충(shipworm)과 바다나무좀(limnoria)이라는 바다벌레들이 덤벼든다. 목선천공충은 머리에 작은 조개껍질을 뒤집어쓰고 표면 여기저기에 구멍을 뚫어 집을 만드는데 이때 바다나무좀이 달려들어 나무질 자체를 양분으로 먹어버린다.
그러므로 침몰한 목선이 바닷속에서 오랫동안 보관되기 위해서는 이들의 침입을 막아줄 개흙(뻘)이나 모래가 빨리 덮어줘야 한다. 바다벌레는 두꺼운 뻘이나 모래를 뚫고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점은 있다. 이번에는 나무의 뼈대가 되는 셀룰로오스 성분만 분해시키는 연부후균(soft rot)가 기다렸다는 듯이 덤비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해 속도가 느린 탓에 두꺼운 나무를 먹어치우는 데는 수백 년이 걸리므로 임진왜란 때 침몰한 배라면 뻘이나 모래 속에 남아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이 박 교수의 설명이다.
여하튼 거북선의 인양 작업에 참여하였던 한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에 거북선이 바다 밑에 있다면 판옥선과 왜선들이 제일 먼저 발견되어야 한다. 왜란 때에 격파된 거북선은 단 3척에 불과하지만 판옥선과 왜선은 그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거북선이 발견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많은 판옥선이나 왜선이 먼저 발견되는 것이 정상이라는 뜻이다. 아직도 판옥선이나 왜선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거북선 자체의 인양 가능성이 불가능함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 개인적으로는 거북선이 어떤 이유로든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만이 거북선에 대한 수많은 논쟁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북선의 실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04/8/21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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